사순절 설교 모음

2011. 3. 14. 00:03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줄기에서 나온 싹 나사렛 예수

2008-06-19 14:28:52 read : 26

 

 

본문: 이사야 11:1-5

인용: 요한복음 1:45-51

 

 

오늘 사순절 시리즈로 네 번째가 되고 오늘 부활주일 메시지로서「줄기에서 나온 싹 나사렛 예수」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인용된 성경은 요한복음1장 45절로 51절에 있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이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하고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이에 빌립의 말을 들었던 나다나엘은 46절에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사렛은 거룩한 예루살렘도 아니요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탄생하기로 예언되어 있었던 베들레헴도 아닌, 그야말로 상업의 도시요 환락의 도시요 죄가 많고 허물 많기로 유명해서 종교적으로 특히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나타낼 만한 자랑할 만한 도시가 아니고 오히려 부끄러운 그런 저질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대답이 나사렛같은 곳에서는 의로운 자가 나실 수가 없다 라는 뜻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 선지자의 글을 빌립도 나다나엘도 읽기는 많이 읽었던 모양이지만, 오늘 본문으로 채택된 이사야서 11장 1절 이하에 있는 글에 대하여서는 읽기는 읽었어도 참뜻은 아마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할 자라 라고 1절에 설명하고 있고, 그 2절부터는 그러한 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설명했는데 그러한 자는 곧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바쁘게 그저 읽어가시면 무심코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마는 글은 글대로 읽을 수 있으나 이 글은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나무에 맞지 않다 그것입니다. 싹이 씨앗이나 뿌리에서 나와야지 줄기에서 싹 나오는 것 봤습니까? 그런 꽃나무도 없고 그런 어떤 과일 나무도 없습니다. 싹은 그 씨앗이나 혹은 뿌리에서 처음 싹이 나오는 것이지 다 자란 나무, 줄기에서 싹이 바로 나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또 가지라면 줄기에서 나무 둥치에서 가지가 나와야지 어찌 뿌리에서 가지가 바로 나오는 그런 나무가 있습니까? 뿌리에서 땅을 뚫고 나오는 것을 혹은 새싹, 혹은 새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가지가 바로 나올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세상의 창조된 여러 수목 가운데서 이런 일은 결코 없는데 그러나 선지자들의 글로 이러한 자가 탄생할 것이니 그는 곧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글을 그냥 읽으면서 대강 넘어가 버렸으면 모를 것이로되 이 상식적이지 아니한, 다시 말씀드려서 줄기에서 싹이 나며 그리고 뿌리에서 바로 가지가 나버릴 사람, 그와 같이 나타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 예언을 따지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혹은 깨닫지 못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지금 나사렛에 오셔서 소개되는 이 분은 이미 나이 삼십이 되셔서 나타났습니다. 이 때에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싹으로 난 것도 아니고 가지로 바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이 상식적이지 않는 이 특별난 사람은 오늘 본문의 이사야서 11장 2절로 5절 사이에 살펴보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총명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고 공의로 판단하시는 그야말로 우리의 주님인 것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 선지자들이 말한 사람이지요.

나다나엘이 이 이사야의 글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나이 삼십 되어 불쑥 나타난 이 사람이 바로 그이인 줄 알았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로서 나타나지 아니하고 출생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삼십 되어 나타난 이 사람이 바로 그인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줄기에서 날 수 있다 라고 하는 싹, 줄기에서 싹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줄기에서 혹은 순은 나올 수 있겠습니다마는 줄기에서 싹 나려고 한다면 그 줄기는 어떤 상태여야 합니까? 깨끗한 줄기는 싹을 낼 수가 없습니다. 상처가 나고 그리고 썩어야지만 씨가 발아하게 되고 그리고 싹이 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줄기라고 하는 바로 그 대상은 즉 이 새싹을 발아시킬 수 있는 이 줄기라고 하는 이것은, 비록 산 나무에 붙어있는 한 부분이기는 하더라도 싹을 낼 수 있는 줄기였다면 썩고 그리고 상처 나고 이러한 상태가 아니면 가능치 않았으므로,

이 빌립이나 나다나엘이 이 이사야의 글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오히려 나사렛같은 데서 싹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야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바로 알았을 것이고 "그렇도다. 이곳이 나사렛이기 때문에 허물 많고 죄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바로 이런 곳에 주 예수의 싹이 움틀 수가 있었다." 이렇게 했어야 되는 것이지요.

 

참고적으로 신학적인 내용 하나 말씀을 드리면 신약시대 제자들이나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구약을 많이 인용을 했습니다. 그 때 구약이 창세기 출애굽기 혹은 몇 장 몇 절이 표시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말씀하시기를 "시편에" 또 "선지자의 글에" 이런 식으로 하시면서 그 신약에서 구약 때의 글을 많이 인용한 것이 있습니다.

그 인용된 것은 우리 신약을 읽어가다 보면 난을 한 단 내려 가지고 쓴 것은 다 구약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는 선지자의 글을 사용했다 라는 뜻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사용된 제자들이 인용을 했거나 예수님께서 시편에 혹은 선지자의 글에 라고 하면서 구약에 있었던 그 글 내용을 인용한 경우는 반드시 다 있습니다. 구약에 없는 게 없습니다. 반드시 있어야지만 신구약이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예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억되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 나사렛 동네에 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이미 구약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라고 했는데 구약 전체를 찾아보아도 이 글만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글만은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모든 신약에 인용된 것을 다 찾아서 구약에 찾았지만 이것이 나오지 않아서 제가 글을 잘못 읽거나 정독을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해서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여러 신학생들에게 숙제를 주었습니다. 이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이 말씀을 구약에서 찾아내면 몇 장 몇 절이라는 것만 찾아내면 그냥 무조건 이 학기는 패스시켜준다 해서 아마 여러분 중에서도 그런 숙제를 받아 보신 분이 계실텐데 아무도 이 말만은 찾아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참 선지자들이 분명히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라고 했는데 왜 없을까 고민 고민하던 중에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적에 참 힘들게 갔지만 그 동네에 가서 나사렛 동네를 방문하면서 이것이 구약 어디에 있다 라는 것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냥 경비도 들고 고생도 스러웠지만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나사렛이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이냐 하면 "줄기에서 난 싹"이 나사렛이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나사렛 동네는 이사야 11장 1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이름이 동네 이름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도 좀 뜻으로 이름을 짓습니다마는 저쪽 지방으로 가면 이런 이름이 있지요. 영화 제목으로도 기억하실겁니다마는 "늑대와 춤을", 저는 늑대와 춤을 해서 늑대와 춤을 추는 것인 줄 알았더니 사람 이름이 "늑대와 춤을" 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사람 이름이 늑대와 춤을 인가 했더니, 늑대와 춤을 잠시 춘 그런 사람이라서 그것을 쳐다보았기 때문에 늑대와 춤 춘 사람이라고 해서 이름을 그냥 "늑대와 춤을" 이렇게 지은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나사렛이란 이 단어는 어떤 뜻을 가졌느냐? 줄기에서 나온 싹,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줄기에서 나온 싹, 뿌리에서 나온 가지, 바로 이 뜻으로 나사렛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라고 본다면 신약에서 사용한 모든 말씀들이 구약에 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저는 그때 참 만족스러웠던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동행했던 분도 있습니다마는 그때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릅니다.

 

이 나사렛 사람 예수는 그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부활의 새 싹이 되셨으며,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줄기에서 나오셨다는 겁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딴 데서 출생해서 어른이 다 되어 바로 능력이 나타날 때 능력의 꽃으로 그냥 나타났다 그겁니다. 그러면 능력의 꽃으로 나타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나타나야 할 곳이 썩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나타나야 하셨던 곳은 능력이 필요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나사렛이란 동네는 의로운 자가 태어나거나 의로운 자가 여기에 거할 수 없는 곳이라고 자기는 생각했지만, 성경은 미리 말하기를 의로운 자는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의롭지 못한 곳에 싹으로 나타나서 의롭지 못한 곳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구원을 위하여 나타나신다고 예언되어 있었다 그것입니다. 이 나다나엘은 그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야말로 나이 한 살로 무균상태인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오신 게 아닙니다. 어머니 태에서부터 출생한 것은 저 베들레헴이었고 지금 나사렛은 삼십이 되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줄기에서 싹이 나오는 것처럼 나와 버렸고 뿌리에서 순이 아니라 바로 가지가 나오듯 예수님이 이 나사렛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고 부활의 싹이 되어 나타나신 그 현장은 어떠했느냐? 무균질의 어머니의 태와 같지도 아니했고 한 살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부활하셨느냐? 썩어 냄새나는 무덤에서 부활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의 죄악이 극에 도달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마저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이런 굉장한 어둡고 두렵고 슬프고 정말 외롭고 그리고 절망이 가득찬 그러한 곳, 어떠한 곳이냐? 바로 냄새나는 나다나엘이 생각하는 것처럼 더러운 곳 허물 많은 곳 그래서 이러한 곳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수가 없다 라고 했지만 성경은 미리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곳이기에 찾아가서 싹으로 나타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난 것입니다. 아니 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나사렛이었기 때문에 의로우신 이가 그곳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썩은 곳에 새싹으로 나셨던 것입니다. 그 썩은 곳이 새싹을 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에 이민을 간 어느 목사님 가정의 얘긴데 오늘 칼럼 난에도 실었습니다마는 이사를 가 보니까 뒤뜰 한 쪽에는 라일락꽃이 피어있고 아마 지금쯤 되는 모양입니다. 라일락꽃이 피어 있는데 그 반대켠에는 무엇을 하던 다음에 그렇게 버려두었는지는 모르지만 땅이 거무스레하고 오물 모아두었던 곳처럼 생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사를 대략 마치고서 그 거무스레한 그곳에다가 부서진 의자같은 것을 오히려 갖다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피곤한 사람들이 새 이삿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 뒤뜰 라일락 향기가 집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 뒤뜰로 나가보았더니, 라일락은 참 좋은데 거무스레한 곳에다가 부셔진 의자 조각도 몇 개 던져 놓았더니 이웃에 사는 사람이 새벽 일찍부터 자기 집에 있는 쓰레기를 잔뜩 갖다가 그 거무스레한 뒤뜰에다 쌓아두었습니다.

아주 기분이 좀 나빴습니다. 그래서 "이것 참 왜 이런가" 했더니 그 뒷날에도 또한 쓰레기를 거기다 갖다놓습니다. 자기집 쓰레기도 아닌데 이웃 사람들이 이사온 자기집 뒤뜰에다 갖다버리니 "이것 정말 내가 소수 민족으로서 이사를 왔기 때문에 이 백인들이 나를 무시하는가"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 목사님의 아들이 그 아들은 영어도 잘하고 그랬던 모양인데 "내가 좀 따져야 되겠다. 미국에서는 이럴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그 옆집으로 가서 막 따지려고 성을 내어 가지고 이제 뛰쳐나가려고 하는데 그 사모님이 지혜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아들아, 오늘 당장 가서 따지지 말고 내일 아침에는 이렇게 해 보렴. 뒤뜰에 일찍 나가서 옆집 사람이 쓰레기를 가져오기 전에 옆에 있는 라일락을 꺾어다가 그 쓰레기 위에다가, 그 사람이 갖다 놓은 쓰레기 위에다가 갖다 놓아보렴."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의 말씀이 뜻이 있다 싶어서 이 깨끗한 라일락을 갖다 놓지 하고서 꺾어 가지고 이제 그 쓰레기 무더기 위에다가 갖다 놓았습니다. 다음날 나가보았더니 옆집에서 라일락이고 뭐고 그 위에 상관없이 또 오물을 갖다 쌓아 두었습니다. 그래서 또 따지려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하는 말이,

 

"라일락의 향기가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구나. 오늘은 또 더 싱싱한 라일락 향이 발하는 라일락을 갖다가 놓아두어 보렴." 해서 이틀 삼일 계속해서 라일락을 갖다 놓았더니, 그 옆집에서 쓰레기를 갖고 오던 사람이 자기도 그저 미안했던지 꽃 위에 쓰레기를 자꾸 덮을 수가 없고 또 갖다 덮으면 또 그 위에 꽃이 있고 꽃이 있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그 깨끗한 꽃을 더 이상 덮을 수가 없어서 그저 그 뒤부터는 갖고 오지 않았다 라는 이런 얘기를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어쩌면 참 가슴 뭉클하게 하는 그런 말씀인데, 우리는 그동안 사순절 메시지를 통해서 연한 순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이사온 이민 목사의 옆집 아주머니처럼 피해를 주어도 연한 순이신 주님께서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거리에 들리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어야 되는데 꺾지 않으시려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리고 새 등을 준비해야 되는데 그 불을 끄지 않으시려고, 참으로 우범지역에 가 있는 딸을 찾아내기 위해서 딸 대신 자기의 사진을 곳곳에 갖다 걸어서 모든 창피를 딸 대신 자기가 감당했던 이 브라질의 한 여인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의로운 성스러운 도시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런 분은 이런 곳에 오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나사렛같은 동네에 나타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머니의 태에서 바로 부활해 나오신 것도 아니고 깨끗한 어떤 병원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무덤과 절망과 죄악이 활개를 치는 그런 곳에서 부활해 나와 주셨습니다. 어리게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줄기에서 싹이 나왔습니다. 어떤 줄기에서 나왔느냐? 가장 험하고 허물 많고 죄스러운 그런 줄기였기 때문에 싹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나사렛을 보고 이런 내 동네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고 나다나엘같은 생각을 하십니까? 이제 생각을 바꾸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보니 나사렛 같습니까? 여러분의 경제적 구조를 보니 나사렛 같습니까? 여러분 주위의 모든 환경을 보니 나사렛 같습니까?

자녀가 나사렛 같습니까? 남편이 나사렛 같습니까? 아내가 나사렛 같습니까? 썩어가고 있습니까? 무너져가고 있습니까? 거룩하다 일컬어지는 예루살렘이기는커녕 미리부터 예언되었던 베들레헴이기는커녕 나다나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렇게 추한 곳에 의로운 이가 난다니 그 말이 되느냐 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현장이 나사렛 같습니까?

 

전에는 믿음이 좋았으나 지금 여러분의 줄기 가운데 토막은 오히려 시험에 들고 있습니까 유혹을 받아 있습니까? 전에는 충성하였으나 지금은 충성하지 못하고 전에는 겸손하였으나 지금은 교만하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금 그 마디가 여러분의 그 줄기가 처음에는 좋았으나 지금은 바로 나사렛처럼 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나사렛처럼 되어 있는 그 동네를 여러분이 발견하면서 "무슨 선한 것이 이 내 동네에 나겠느냐?" 그리하지 마시옵소서. 오히려 여러분의 현장이 나사렛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현장에 나사렛이 있다면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나사렛이라는 현장이었기에 생명으로 싹이 되어 여러분의 그 현장에 발을 붙이고 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나다나엘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줄기에서 싹이 나며 뿌리에서 바로 가지가 난다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 칭할 것이라는 그대로 나사렛이란 험하고 영적으로 희망없는 도시에서 나타나 주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나사렛같은 이 현장에 부활의 주님께서 갑자기 가지가 되어 나타나고 썩어 있는 우리의 현장에 갑자기 한 싹이 되어 나타나 우리들의 위에 한 송이 백합화처럼,

그래서 오늘 저는 이 라일락을 바쳤는데 저 뒤에서 보니까 라일락만 있는 것 같아서 "이 라일락 중에서 백합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제가 얘기하면서 제 사무실에 백합화가 있기에 "이것 좀 강대상에 놓아두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더니 와서 가까이 보니까 이 라일락 사이에 백합이 다 피어 있습니다. 여러 꽃들 가운데 여러 백합이 피어있는데 저와 여러분 수많은 성도님들의 현장에 나사렛같은 형편이 있다면 오늘 이 이천년 부활의 생명의 새싹이 여러분의 나사렛에 피어나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썩은 줄기에 싹이 나면 싹이 얼마 있다가 줄기가 썩었으니 그만 되겠지 여러분 생각하지만, 여러분 오물 위에다가 꽃을 갖다 두면 그리고 그 꽃이 계속 피게 된다면 어떻게 되느냐? 오물은 더이상 오물이 아닙니다. 꽃이 없으면 오물이지만 꽃을 피우는 오물은 오물이 아니라 거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꽃을 위하여 꼭 필요한 거름이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줄기에서 난 싹, 줄기가 썩었으니 싹이 났다 하더라도 잠깐 났다가 쓰러지지 않겠는가 여러분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이사야서 11장 뒤에 10절에 가서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그랬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1절에는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왔는데 줄기에서 싹이 나왔지만 그저 없어질 날아가버릴 그런 줄기에서 나온 싹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싹이 줄기에서 나서 피는 동안에 바로 그 날에 그 싹이 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새 싹이 되어 나사렛같은 여러분의 현장에 오늘 나타나셨다면 영접하고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후로는 썩어있는 여러분의 줄기가 아니라 그 예수의 새 싹의 새 뿌리가 뿌리를 여러분에게 내리게 된다면, 여러분의 나사렛 현장은 이제는 나사렛이 아니라 거룩한 예루살렘성과 같이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이천 이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을 축복하고자 합니다. 백성들로부터 죄인이라 취급받아서 백성 앞에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던 세리장 삭개오, 그는 물질은 많이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대상에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싹 되신 주께서 "삭개오야 뽕나무에서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서 유하여야 하겠다." 하며 주님이 그 욕먹고 있는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한 송이 백합처럼 꽃으로 심기어지니 그 집이 얼마나 기쁨이 넘쳤던지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오히려 그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은 여기 있도다." 말씀했으니,

 

여러분에게 물질이 혹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취급받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그런 분들이 계셨다면 이 이천년에 나타난 백합처럼 피어나신 주님의 이 새 싹을 여러분의 그 정말 험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그 줄기에 심어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된 순간에 어제의 삭개오가 아니라 오늘의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영광스러운 삭개오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 오늘 부활의 새싹 되어 여러분의 그 현장에 있어서, 삭개오의 집처럼 삭개오의 즐거움처럼 그리고 삭개오의 그 권위가 위상이 높아졌던 것처럼 오늘 이후 주 예수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밤새워 그물을 던졌으나 잡은 것이 없는 제자, 그래서 빈 그물만을 씻고 있었는데 주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며 그들 앞에서 지시하시니 나가서 다시 그물을 던지매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들었으나 찢어지지 아니하고 옆에 있는 동무의 배까지 불러서 그 고기를 담을 정도가 되었다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낮이고 밤이고 남편뿐만 아니라 부인까지도 열심히 나가서 일을 하고 사업하고 또 여러 가지 이 재산을 키워보겠다고 하다가 큰 실패를 하고 제자처럼 빈 그물만 털고 씻고 있는 여러분의 형편이 되어 있습니까? 경제가 그렇게 어려움에 빠져있는 여러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그런 경제상황은 예루살렘도 아니요 베들레헴도 아니요 나사렛입니다. 썩어갑니다. 죽어갑니다. 내어놓을 수 없이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그런 현장에 싹으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그런 썩어가는 줄기에 싹으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의 그런 썩어가는 그런 망해가는 현장에 한 송이 꽃이 되어 피도록 하시고 아멘으로 받아드려 붙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현장은 더이상 망해가는 현장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놀라운 복이 이 이천 부활절에 여러분의 생업의 현장에 부요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병들어 죽고 나흘이나 지나서 썩어 냄새나던 나사로 그 누이들이 실망하고 웁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가서 냄새를 밖으로 풍겨냈습니다. 그 돌의 문을 열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마는 갑자기 나타나신 주님, 뿌리에 가지처럼 나타나신 주님, 능력 있는 자가 되어 바로 나타나신 주님, 그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시니 나사로는 순종하여 걸어나옵니다. 수족을 쌌던 것을 풀어 걸어다니게 하라 하여 그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 걷습니다. 그 누이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육신이 병들고 쓰러져가고 있습니까? 전에는 팔팔하게 힘을 썼으나 힘을 쓰지 못하는 지체를 가졌습니까? 아니 피가 통하지 않아서 손발이 저리고 그리고 어쩌면 곪아들어가고 썩어들어가고 눈만 감으면 바로 냄새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입장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아니 계시겠지요. 계시기에 오늘 부활의 주님이 오늘 싹으로 소개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다나엘과 빌립은 이러한 곳에는 거룩하신 분이 안 오신다고 했지만 성경은 이미 말하기를 그러한 곳이기에 싹이 피어날 수 있다 라고 했으니, 병들어 죽고 나흘 지나 썩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의 집에 주님이 그 무덤 앞에 서시니 큰 기쁨이 그 집에 가득찼던 것처럼 여러분을 위하여 축복합니다.

오늘 부활하신 싹이 되신 주님의 그 부활의 생명

 

으로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그 나사렛같은 현장에 오늘 주님이 서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주님이 서신 것처럼 여러분의 그 썩어져가는 여러 환경 앞에 오늘 주님이 말씀과 함께 소개되어 섰습니다. 서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주님이 섰다면 이제는 그 주님이 싹으로 나시더니 바로 11장 10절에 나타난 대로 그 날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그분이 떠나가지 아니하고 여러분이 붙들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의 땅은 오물이 아니라 쓰레기가 아니라 거무스레하던 여러분의 그 땅은 그를 꽃피우면 그를 피워낼 수 있는 거름밭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슬픈 자가 아니요 부활의 생명의 그 기쁨과 함께 그 기쁨이 오늘 우리 가운데 주의 말씀과 함께 소개되었으니 여러분의 나사렛 현장에 모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산업과 또 여러분의 앞날에 그리고 영원한 날에 있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51 장 찬송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의 새 싹이 여러분의 나사렛 현장 잘 나가다가 중간에 썩어져버리는 어쩌면 꺾여버릴 장래가 없어져버릴 그런 썩은 줄기에 새 싹이 났는데 그 싹을 찬양하며 거룩한 순서들로 믿음을 가지고 붙드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환영을 받으며 여러분에게 거하시게 되는 주님께서 그 날에 그의 뿌리를 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의 뿌리가 내려지면 우리는 그의 나무에 속한 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부활 축하를 위하여 헌금한 예물을 주께 봉헌하고 축복하는 순서를 갖겠습니다. 기도합시다.

 

기도

 

"이천년 어김없이 부활의 싹 된 소식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의 종을 통하여 성경에 많은 사건들과 말씀들을 통한 주님의 여러 모습 가운데, 오늘 썩어서야 만이 나올 수 있는 갑자기 줄기에서 나온 싹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에게 성령으로 소개케 해 주셨으니 그 주님이 우리의 현장에 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현장은 그야말로 나다나엘의 표현처럼 나사렛입니다. 장래의 소망도 끊어져 절망하고 육신의 건강도 쇠하여져가고 믿음도 약하여가고 충성도 덜하여져가고 경제적인 좋은 환경들이 옆에는 있는 것 같은데 우리의 것은 아닌 경우도 많아서 어쩌면 보기는 좋은 나무 같으나 썩어져가는 줄기의 마디가 아니었는지, 이런 중에 부활의 싹으로 나사렛 예수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으니 오늘 저희의 드리는 축하 예배의 순서들을 받으시옵소서.

 

드린 이 예물을 받으시옵소서. 예배 전에는 주의 전 안이 컴컴하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언제 종소리가 날까 뭔가 답답하고 시간이 지루한 것 같고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오늘 첫 우리 귀에 들려온 우리 성전 안에서의 소리는 주 부활하셨네 라고 하는 찬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 천사의 음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주님의 그 무덤에서 나오셨고 천사들이 밝은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해 주었던 것처럼 저희 눈에 비춰진 또한 첫 순서는 천사들의 복장을 한 우리 여성들의 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순서 이처럼한 주님 앞에 예물을 갖고 왔더니 주께서 오늘 썩어져가는 나사렛같은 우리의 현장에 그러기에 내가 너희의 거기에 싹이 되어 지금 피었노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이어 여러 찬양으로 이렇게 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이 모든 순서들을 이 예물과 함께 주께서 받아 열납하시옵시고 정말 우리가 주께 드려 이 예물이 열납되기 원하오니 주여 받아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항상 피어나 주시옵소서. 더이상 나사렛이 아니라 주님의 꽃동산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부요의 동산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헌하옵고 축복하옵고 축복하여서 기도올렸사옵나이다."

 

축도

 

"이제는 부활의 산 소망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감동 충만하심이, 이천년 부활절을 맞이하는 산해원교회와 성도들의 가정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무궁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

 

 

 

 

성찬을 받은 후 찬미한 제자를 보며

2008-06-19 14:27:25 read : 17

 

 

본문: 요한복음 6:48-58

인용: 마태복음 26:26-30

 

사순절 시리즈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로서 성찬식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겠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우리와 똑같은 성찬을 받고도 어쩌면 우리보다 더 해야 될텐데도 숙연해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성찬에 참여하는 분위기와 성경 속에 나타난 제자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하는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0절에 소개된 바를 살펴보면 이들은 성찬에 참여하고 끝이 나자마자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올라갔었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 그들의 성찬에 대한 이해가 오늘 우리들의 성찬에 대한 견해와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주께서 베푸시는 이 성찬을 수찬하기에 앞서서 이 떡과 이 잔에 담겨진 주님의 말씀을 살펴가면서 과연 그때 제자들이 성찬 후에 취했던 태도를 우리가 취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그때 제자들이 우리같지 못했던 것이 사뭇 아쉬웠던 일인가 이것을 한 번 살펴보는 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경은 또한 고린도전서 11장 27절 이하에 보면 "이 잔을 먹고 마시기 전에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분별하고서 받을지니,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신다면 그것이 오히려 죄가 되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많고 약한 자가 많고 쓰러지는 자가 많은 것이 이 성찬을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고 참여했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오늘 우리들의 성찬에 대한 분위기와 제자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일에 대해서 주께서 베푸신 성찬의 참 의미를 찾아가 보는 이런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6장 48절로 50절에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곧 나 너희에게 주는 이 생명의 떡은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읽으면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마는 잘 살펴서 읽어본다면 간단치가 않습니다. 의문을 가질만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이 오늘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처럼 죽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만나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언제까지 살았습니까? 근 40년 동안을 이 만나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들의 수한이 다하여 죽었을 뿐이지 만나가 저들에게 효험이 없어서 또 영양이 없어서 죽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어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러면 주께서 주시는 성찬을 먹은 사람은 죽지 아니했습니까? 당시 제자들도 성찬에 참여했지만 죽었고, 우리들의 믿음의 선조들도 다 성찬에 참여했으나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조금 전에 소개드렸던 "너희 조상들은 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살 곧 이 생명의 양식의 떡은 사람이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라는 이 말씀을 쉽게 그저 읽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잘 살펴서 헤아려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 떡에 대하여 이 잔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시다가 이 말씀 끝에 쯤 가서 6장 63절에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장으로 볼 것 같으면 이 문장은 완전한 문장이 아니고 앞에 주어가 생략된 그런 문장이 되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이 성찬에 관한 여러 말씀을 하시던 끝에 결론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생략된 주어를 찾아본다면 계속 말씀하시던 주님께서는 "이 떡은, 이 떡은" 하며 떡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되살려서 함께 말씀을 드려본다면 "이 떡이 살리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이 떡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이 떡으로서 육에는 유익함이 없느니라"

다시 말씀드려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었던 그 만나는 영혼에게는 유익이 없었으나 육에게 유익을 주었고, 지금 내가 너희에게 주고자 하는 이 떡은 육에는 무익하나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이 만나는 사십년 동안 자기의 수한이 찰 때까지 육신을 살리는 데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시는 그때의 그 성찬이나 오늘 우리가 받게될 이 성찬의 떡은 무엇을 살리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만나는 육에 유익하여 육을 사는 날 동안 살렸으나 영은 무익하여 영이 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몸인 이 떡은 육에는 그다지 유익하지 않으나 영에는 유익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갖게 되고 그리고 그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이르시되 본문 6장 53절로 55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이런 말씀으로 계속하여 이 성찬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만나가 육신에 유익해서 사는 날 동안에 양식이 되었다면, 주께서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이 떡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그의 생명을 넣어 두었다가 우리 육신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게 되는 생명의 능력이 오늘 저희에게 베푸신 이 떡에 담겨있음을 헤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이 떡에 대하여 이 잔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열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비중을 더 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떡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는 강한 인상을 받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하시는 말씀들 가운데서 우리와는 달리 생명에 관하여 큰 인상을 받았었더라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육신이 끝나는 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 주심에 따라서 우리가 이대로 나이 들어 혹은 병들어 사고로 죽을 것 같으나 죽는 것으로서 끝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의 시작은 바로 그때부터로구나 하신 이 주님의 말씀에 더 관심을 두었더라 그것입니다.

 

이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죽음에 관하여 강한 집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이 성찬이 끝난 다음 숙연해 있지 아니하고 슬퍼하고만 있지 아니하고 엄숙해지기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의 말씀과 함께 성찬에 참여한 다음에는 흔쾌하여 산으로 오르면서 그것도 어느 산이냐? 승천하실 주님의 감람산으로 오르면서 찬미를 하면서 갔다 라고 소개되어 있는 것을 저희가 보면서,

 

참으로 우리는 성찬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강했다면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찬에 담겨있는 죽음의 의미보다는 삶에 더 강하지 않았는가? 생명과 영생에 더 강하지 않았는가? 이 두 가지 부분이 다 의미가 있습니다마는 제자들은 찬미했고 우리는 숙연해진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강했고 우리 죄사함 받는 일에 강했고 이 제자들은 생명에 강했기에 찬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결론을 충분히 얻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이 받으실 이 떡과 잔, 성경에 소개된 바 제자들이 받았던 그 떡과 잔이 과연 그리스도 예수의 몸일 수가 있는가? 피 일수가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분명히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시라 그리하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시라 했는데 과연 주께서 그 살을 주실 수 있었으며 그 피를 주실 수 있었겠느냐 그것입니다.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또한 먹을 수가 있었겠느냐 그겁니다.

아주 의문스러운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당시에 유대인들도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상당히 논란이 많았음을 오늘 본문 6장 5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였고 또한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아니한, 그래도 주님을 따른다 라고 하는 제자의 무리에 속했던 사람들도 60절에 보니 제자 중 여러 사람도 거의 대부분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하면서 주님의 곁을 떠나고 말았던 사실을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바 있는 성찬 후 저들은 주께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았기에 또 그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줄로 알았기에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올라갔던가? 그때 감람산으로 올라가며 찬미했다 라고 하는데 그 현장의 그 모습을 더 생생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 마태복음 26장으로 한번 찾아가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 이하를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 이하 30절까지 봉독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찬미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직전까지의 성만찬의 분위기는 어떠했느냐? 주께서 물론 유월절 절기에 준비된 많은 음식들이 놓여있는 상에 둘러앉았습니다. 제자들도 같이 둘러앉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 상 위에 놓여진 모든 떡에 축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잔에 대하여 축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떡이 주님의 살이 될 수 있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잔이 주님의 피가 될 수 있다 라고 하지 아니하셨다 그것입니다.

26절에 나타난 대로 "저희가 먹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먹으려고 하던 때도 아니고, 그리고 먹기 전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라고 했으니 이것은 다른 말로 풀이해서 말씀드린다면 "식사 도중에"라는 뜻입니다. 보통 식사 기도를 할 때에는 먹으려고 할 때에 라고 하겠지요. 또 먹기 전에 기도했다 라고 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즉 식사 중에 떡을 하나 가지셨습니다. 떡을 가지고 그 떡에 대하여 축사하십니다. 많은 떡들 가운데 떡 하나를 주님께서 취하시더니 그 떡에 대하여 축사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 또 잔 하나를 취하시더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새 언약의 내 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신 다음 "이것을 먹으라"라고 하면서 그 축사된 떡을 떼어준 것이지 축사되지 아니한 아무 것이나 오늘 저녁 음식은 다 내 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먹으라" 이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축사된 이것을 먹으라, 축사된 이 잔을 마시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모여서 음식을 먹을 때에, 즉 식사하는 도중에 주님께서 "잠깐, 잠깐" 하시더니 떡을 하나 가지사 "이 떡은" "이 떡들은"이 아닙니다. 이 상 위에 있는 모든 음식 그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가지시고 "이 떡은(분명히 지적했습니다) 너희를 위하는 내 몸,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내 피"라고 말씀하시더니, 그 다음에 "드시오 드시오, 먹으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떡을 떼어준 것입니다. "이 떡을 너희 안에 들게 하라. 이 잔을 마셔서 너희 안에 이 잔이 들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께서 많은 떡 중에 떡을 하나 가지사 축사하시고 이 떡을 굳이 먹으라고 하면서 그 떡을 떼어서 나누어준 것이지 아무 떡이나 같이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닐진데, 과연 주께서 축사하신 바 그 축사된 떡은 어떤 효력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안에 생명이 있으려면, 그 누구의 생명입니까? 예수 당신의 생명입니다. 너희 안에 내 생명이 있으려면 내 살을 먹으라 라고 했습니다. 내 피를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줄 수 있으며, 주신들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겠느냐?" 이런 의문이 그때도 있었고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주께서 이 일에 대하여 한 떡을 가지사 축사할 때에 "이 떡은 내 몸, 이 잔은 내 피"라고 말씀을 그 떡과 잔에다가 부여하시고 그리고서 이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을 먹으라" 다른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말고 "이것을 먹으라. 이것은 내 생명이니라"라고 말씀하셨으나 과연 축사하게 되면 떡이 다음 순간 어떻게 변하는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고린도전서 10장으로 가셔서 참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 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혹 여러분께서 성경을 읽으시다가, 이 본문같은 본문을 읽으시다가 이쯤 읽었는데 전화가 따르릉 온다든지 아니면 또 대문에서 벨이 울린다든지 아니면 갑자기 아이가 무엇을 깨뜨리는 소리가 난다든지 해 가지고 여기까지만 읽다가 그쳐버리면 무슨 뜻이냐?

다시 읽어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이 잔은" 지금 우리가 축사하고 축복하여 여러분에게 드릴텐데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라고 했으니 아닌 줄로 알기 쉽습니다마는 이 문장은 끝까지 읽어야 됩니다. 아니며 또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문장의 배열상 부정을 부정하면 무엇이 되지요? 긍정이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축복하여 축사받아 먹는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그 축사된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했으니 축사된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뜻이지요. 이해가 되시면 아멘 합시다.

또 축사된 잔은 그리스도의 피라는 뜻이지요. 아닌 것이 아니라 기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쉽게 생각하기를 편하게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아 그러면 긍정의 긍정은 부정이겠네요" 이렇게 합니다. 긍정의 긍정은 강한 긍정입니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은 긍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축사하고 축복된 그 떡은 먹게 되면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되는 것이요 또 축사하여 축복한 그 잔을 마시게 되면 우리의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고 무엇이뇨. 누가 가르친 것입니까? 사도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주께 받은 성찬은 이런 것이니" 하고 가르쳐주신 그 내용 중에 들어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어떤 물질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그 부여된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그 본래의 물질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실 적에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예. 마른 막대기 하나밖에 없나이다" "그러냐. 그러면 내가 지금부터 내가 지금부터 네 그 막대기에 내가 함께 있어서 나의 행할 바 모든 능력을 그 막대기로서 나타나게 하겠느니, 그 지팡이는 네가 지금 이전까지 들고 다니던 그런 막대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는바 지팡이가 될 것이니 그 지팡이를 들고 홍해에서 치켜들면 홍해가 갈라질 것이요 반석을 치면 거기에서 물이 나게 될 것이다." 하시더니 그야말로 그 지팡이는 보통 지팡이가 아니라 홍해를 갈랐으니 전에 모세가 가졌던 그 나무 막대기가 가른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지팡이에 부여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했던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했던 것이지요.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제는 그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라고 하는 그 말씀이 부여됨으로 말미암아 보통 지팡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그 지팡이에 있었으니 중요한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저 마라라고 하는 쓴 물의 샘을 이스라엘이 만났을 적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모세를 통하여 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그 쓴 샘에다가 던져 넣으라 라고 해서 던져 넣었더니 모든 쓴 기운이 없어지고 나무가 감당하고 단물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마셨던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 모세가 꺾어 넣었던 나무 종류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신풍나무 입니까? 아카시아나무 입니까? 소나무 입니까? 어떤 나무겠습니까?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종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그 나무를 찾아 가지고 지금도 찾아서 무슨 소독하는데 사용하면 참 좋겠지요.

그러나 그때 주님께서 꺾으라고 해서 꺾은 그 나뭇가지 그 나뭇가지가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했던 그의 그 부여된 말씀이 그 나무 그 일 할 때까지만 역사 했던 것이지 그것이 끝난 후에도 그 나뭇가지 꺾어다가 아무 데나 사용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무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뭇가지에 부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으로서 역사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서, 주께서 한 떡을 취하사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떼어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했으면 이제는 떡이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효력이 그 말씀과 함께 얹혀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잔을 드시고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내 피니라"고 했으면 그 잔에 맹물이 들면 어떻습니까? 포도주가 들면 어떻습니까? 아니면 다른 또 술이 들었으면 어떻습니까? 술의 종류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포도주 몇도짜리냐, 포도즙이냐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다 중요한 줄 알고 포도즙을 먹어야 된다고 하는데 성경에는 포도주라고 썼는데 또 어떤 분들은 사람이 술을 먹어서 되느냐?

 

그래서 포도즙이라고 일부러 글자까지 바꾸어가면서 읽으면서 '즙'이 중요하냐 '주'가 중요하냐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 위에 얹혀진 주의 말씀에 생명이 있는 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 그 안에 있는 뜻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지, 눈으로 보여지는 것 입으로 씹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바로 그것이지요.

 

따라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한 번 따라합시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성찬을 베푸시면서 하신 말씀, 그리고 그 성찬의 의미와 큰 목적은 어디 있었느냐?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은 압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부터 죽음의 길을 따라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죽고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가지 마소서 죽지 마소서 그리 마소서 막 매달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자는 작정된 대로 간다 라고 하면서 주님은 가시는 길로 갔습니다.

 

이 성만찬을 베푸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야말로 만찬이로다. 오늘밤 이 만찬이 끝나면 다시금 나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실 수 없을 것이니라. 이 세상 땅에서 나온 곡식으로서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고 너희는 살 것이로되"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성찬을 베푸셨으니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제자들은 주께서 이 식사 같이 하고 나면 죽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살 방법이 달리 없다는 것을 이제 다 알았습니다. 분위기가 그쯤 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이 떡은 내 몸이니 네가 네 속에 먹어 있게 하라. 이 떡에 내 생명이 있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떡에 부여되었다면 떡이 가 있는 곳에 주님의 생명이 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참 뜻은 무엇이냐? 당신의 몸을, 당신의 몸을 이 떡에 부여해서 축사하신 후에 이 떡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의 몸 속에 넣어두기를 원했다 그것입니다.

 

"너희가 먹게되면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되느니라.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 있게 되면 너희는 결국 또 내 안에 있게 되는 이런 관계가 되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아주 심각합니다. 왜 심각합니까? "나는 조금 있으면 죽게 돼. 내가 죽게 되더라도 내 육신이 죽을 뿐 내 생명은 죽을 수가 없으니 나를 따르는 진리 아는 너희들, 나를 믿는 너희 속에 내 생명을 저축해 놓고 싶구나. 보관시켜두고 싶구나. 너희가 받겠느냐?"

 

그러시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또한 요한복음 3장 14절에 말씀하셨던 그대로 "내가 십자가에 들리는 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것같이 내가 들리는 것이지 다른 강도들이 죽는 것과 같지 않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뱀은 무엇입니까? 불뱀입니다. 굉장히 능력 있는 불뱀입니다. 사람들을 불고 쏘면 당장 죽게되는 그런 불뱀입니다. 이런 불뱀을 잡아다가 장대 끝에 올렸는데 모세가 올릴 때에 불뱀을 올렸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의 보기에는 불뱀입니다. 그러나 불뱀이 아니라 놋으로 만든 놋뱀 불뱀이었던 것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놋뱀을 올렸으니 놋뱀 속에 불뱀의 생명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생명은 불뱀 안에 있습니다. 모세가 장대 끝에 매달았던 그 바로 불뱀은 생명을 가진 뱀이 아니라 놋으로 만든 껍데기요 육체적인 모양만 있었지 생명은 거기 있지 않았다 그것입니다. 생명은 십자가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던 것이지 그의 생명은 죽은 적이 없었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생명이 어디에 들어가 있었느냐? 몸이 죽기 전에 "이것은 내 살이라. 내 생명이 너희 안에 있도다" 이렇게 된 것은 어떤 관계가 되느냐?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되었느니라"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떡과 포도주가 들어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축사된 주의 말씀 속에 있는 주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또한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지만 그러나 죽지 아니하고 산 것은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 위에 올라갔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하나님이 쥐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한은 그 몸이 죽었어도 하나님이 살리고자 하는 날에 다시 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어서 내가 죽었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인것처럼,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게 되면 너희는 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요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 내일 모래면 너희 눈앞에 나의 죽는 모습이 십자가에 달릴 것이나, 생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죽게 되는 것이니라.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불뱀처럼 매달았던 것처럼, 생명 없는 놋만 매달았던 것처럼 내 몸은 너희를 위하여 죽게 되나 생명은 믿음을 가진 너희 안에서 살겠느니라. 내 생명을 너희가 갖고 있어서 너희가 전도하게 되면 너희의 전도를 받는 사람이 너희의 생명을 받아서 전도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는 내 생명이 그에게 옮겨져가서 거듭나게 되는 것을 믿을지니라 이것이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요한복음 6장 56절로 57절 말씀하시더니 또 이어서 58절에는 "이 축사된 떡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이 축사된 떡은 하늘로서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 그런 떡이니 먹고도 죽은 만나와 같지 아니하여 너희는 마지막 날에 영원히 살리라. 이에 제자들은" 그랬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찬미하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감람산으로 찬미하면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찬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만찬이 끝나면 주님께서 죽으시는데 주님께서 어쩔 수 없어 죽이는 자들에 의해서 죽을지라도 광야에 불뱀이 아닌 놋뱀같이 죽게될 것이며 주님의 생명은 그의 피와 함께 그의 몸과 함께 주님 죽기 전에 내 몸에 들게 해 주셨으니 내 안에 보호하겠노라. 내가 믿음으로 내 안에 보호한 주의 생명이 주님이 필요한 때에 다시 부활하실 수 있도록 주의 생명이 내 안에 드시겠다 하시니 주여 오시옵소서."

 

받은 후에는 "주여 염려 마시옵소서 죽으실 지라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 안에 있나이다.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있나이다. 난 분명히 먹었고 내가 영접하였나이다. 그리고 이 생명 이 피를 놓치지 않겠사오니 주여 염려 마시옵소서. 살아계신 주여 죽으시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사셨나이다. 그리고 영원히 사실 것이니이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올라갔다 하였으니, 그들의 그 태도가 수찬자로서의 잘못된 태도냐? 아니요. 그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죽음에 비중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삶에 비중을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그 일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생명 있을 적에 들어와서 그 생명으로 계시며 내가 예수를 모셨으므로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살 것이며 그리고 예수를 모시면 우리의 마지막 날에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같이 살리실 것이라는 여기에 더 비중을 두었었던 것이니,

그리스도의 성찬을 맞을 때마다 숙연해지고 엄숙해지고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그런 일도 그 성찬에 의미가 있으니 옳은 일이라고도 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제자들이 성찬 후에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주여, 내일 이후 죽으시지만 주님은 진정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셔서 들어와 계시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가 없습니다 주여" 하고서 감람산으로 갔던 것처럼 제자들은 생명에 관심을 더 두었고 영생에 관심을 더 두었을 그 차이었던 것을 인정하시고, 오늘 성찬은 제자들과 같은 감격을 하면서 받아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이후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는 "너희가 이 떡을 먹고 마시는 일을 내가 다시 오는 날까지 할 것인데 너희가 이 떡을 먹고 마실 때에 주의 죽으심을 주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라고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르쳐주니까 이 구절만 받고서 "아하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는 좀 심각해야 되고 그날은 밝은 옷도 입어서는 안 되고 그리고 아주 엄숙해야 되지 내가 엄숙한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면 "아이고 남이 보면 어떻게 할까?" 이렇게 신경을 쓸 만큼 된 것 같은데 여러분, 바울이 이 말한 참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라 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만큼 그 죽은 것을 기억하기 힘든 경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라는 것을 특별히 날 만들어서 특별한 행위를 하면서 일부러 기억을 시키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입니까? 다른 이는 한 번 죽으면 다시 안 돌아오기 때문에 다시 안 나타나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셔서 옛날 그때처럼 죽은 자를 살리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성령 안에서 살아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경험했으면 아멘 합시다.

그러기에 살아있는 분을 보고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다른 이는 죽었다면 흔적을 남깁니다. 유골이라고 남지요. 예수님은 유골은커녕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때 당시에 있었던 사람들은 죽었었노라 라고는 하겠지만 10년 20년 지난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을 인정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죽으심은 아무도 믿기가 곤란할 정도로 흔적도 없었으니 그러나 너희를 위하여 죽었던 것은 사실이니 이 사실을 기념하라 했습니다. 기념은 어떤 경우에 하는 겁니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서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사모하라, 추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잊어버릴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기념을 하라는 겁니다. 성찬할 때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일부러 기념하지 않고서는 잊어버릴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었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잠시 후에 여러분께서는 그때 당시에 주께서 축사하신 축사를 이 떡이 받게 되고 이 잔이 받게 되면, 그 축사하고 축복된 떡과 잔을 여러분이 받게 될 것인데 떡도 중요하고 포도주도 중요합니다마는 더 중요한 것은 축사된 주의 말씀 안에 있는 그의 생명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좌정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들어오고 예수의 생명이 들어왔더니 내가 죽는 날 다시 살게될 것이고 예수님은 죽으나 사나 내 안에서 지금도 살아 계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게 되는 이 놀라운 일을 오늘 우리가 하게 되며, 전에 죽으셨던 것을 우리는 오히려 전파하면서 그러나 지금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수찬에 이 성찬에 참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을 부르시겠습니다. 468장 찬송 1절, 2절 부르시는 동안에 분병 분잔 위원들은 위치에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임하여 교통하시며 역사 하심이, 주의 성찬을 받으며 그때 그 제자들처럼 주의 말씀 깨닫고 그 제자같은 심정으로 이 성찬에 참여한 모든 성도께 이제로부터 주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육신이 다하고 다시 살리심을 입은 그 순간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돌리며

2008-06-19 14:25:56 read : 22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돌리며

본문: 이사야 50:4-7

 

 

성경은 오늘 상식으로는 가히 이해할 수 없는 한 아들과 그의 아버지를 우리로 하여금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그 아들이란 사람은 가히 자신에게 죄도 없으면서 6절에 나타난 대로 소개해 드린다면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자기의 등을 돌리기는커녕 되레 실컷 때리라고 맡기며, 자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저항을 하기는커녕 마음대로 하라고 자기 뺨을 통채로 갖다 맡기는가 하면, 수욕과 침 뱉음을 당할 때에 피하려고 자기 얼굴을 가리우는 것이 상식이고 또 얼굴에 침을 뱉으면 본능적으로 눈이 감기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여기에 소개된 한 아들은 남이 침을 뱉어도 그리고 모욕을 그 얼굴에 퍼붓고 있어도 얼굴을 돌리거나 눈이 감기어지지 않는 그런 아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 멀쩡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된 데는 그의 아버지가 세뇌를 시켰기 때문임을 성경은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세뇌를 시켰던지 7절에 보면, 아들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같게 했으므로 수치를 당하여도 그 수치를 수치인 줄을 알지 아니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철판 두껍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철판과 철판을 이렇게 충돌시켜 가지고서는 불이 잘 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부싯돌은 서로 충돌시키면 불꽃이 튀어서 불쏘시개로 삼기도 합니다. 아들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로 만드신 이가 바로 그의 아버지셨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가 어떠한 방법으로 이 아들을 이토록 만들 수 있었는가? 그의 세뇌시킨 방법이 과연 무엇인가? 4절부터 5절 사이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비는 아들에게 학자의 혀를 주어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것을 깨우쳐주었고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사 보기 전에 세상의 지식과 접하기 전에 세상의 어떤 즐거움들을 만나기 전에 매일 아침 눈만 뜨면 그에게 말을 해 주었는데, 그 귀에다가 대고 진리의 말씀을 얼마나 계속적으로 말씀했던지 결국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귀에다 대고 세상 물정도 알기도 전에 그냥 퍼붓듯 계속해서 말씀해주시는 그 말씀으로 귀가 열려버렸는데 아들의 귀가 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여호와께서 아들의 귀를 열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영어를 하려고 하면 영어를 우선 많이 들어야 합니다. 또 한국말을 하는 우리 아이들이 일단은 많이 듣습니다. 듣다가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혀가 돌아가고 입이 터집니다. 그래서 영어를 하게 됩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들음으로써 자꾸 들음으로써 결국 그 혀는 들은 대로를 그대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나타난 아들은 그 아버지가 세상도 보기 전에 아침마다 그 귀에다 대고 그 아버지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지만 말씀을 계속 해 주었는데 그 내용은,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것을 늘 가르쳤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들의 귀가 어느 날 갑자기 열리기 시작했는데 누구로 말미암아 열려졌느냐?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5절에 그랬지요?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그에 의하여 내 귀가 열렸더니 그가 말하는 대로 기계처럼 로봇처럼 그저 명령을 따를 뿐 거역할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이런 내가 되어 버렸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이 희한한 아버지가 4절에도 5절에도 '여호와'라고 그 성호가 소개되었으니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세상 물정 알기 전에, 세상에 그 무엇을 접하기 전에 계속해서 그 귀에다가 진리의 말씀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냐? 죄인된 사람 죽어가는 사람 곤핍한 자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말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그 다음에 그들을 위하여 네가 어떻게 어떻게 하는 것이 네게 생명이 되는 것이다 라고 계속적으로 주입을 시키고, 그 외에 다른 말은 한 마디 들을 수 없었으므로 그 아들이 성장하여 막상 말을 하게 될 때에는 그 말이 아버지의 말이었고 그의 행동은 아버지의 뜻대로 기계처럼 움직인 것이니 내가 거역하거나 뒤로 돌아서거나 할 수 없는 이런 이상한 청년이 되고 말았다 라고 고백한 고백을 요한복음 12장 50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찾아보실까요. 요한복음 12장 50절에 보면 이제 그 아들이그 아버지로부터 세뇌를 받아 가지고 자기의 행할 수 있었던, 다 성장한 후에 자기 행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50절 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아버지의 명령입니다)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이 삼십이 넘으시고 이제 그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하시면서 그가 하시는 모든 행동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하여 그는 해명을 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이 말은 원래부터 내가 생각하여 내가 하는 말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 귀에다가 담아주었고 계속해서 담겼던 내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했을 뿐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이것은 내 아버지의 명령이니 내가 죽든지 살든지 나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따라가는 것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 외에는 내가 아는 것이 없도다."라고 주께서 고백하신 이 고백을 보아서도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이처럼 철저하게 세뇌시켜서 우리에게 내어보내셨던 것을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리하셨으며, 왜 그 아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그 모양으로 만드셨는가? 오늘 본문 있는 조금 앞에 이사야서 50장 1절로 3절이 설명을 잘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 사람이 본다면 어쩌면 비정상적인 그런 아들로 세뇌를 시켜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50장 1절로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어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이 말씀은 어떠한 말씀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그 모양대로 지은 자기 백성을 좋은 세상에 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자기 백성에게 다 맡겨 주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잠시 다른 곳에 가셨다가 찾아오셨습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을 찾듯이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찾아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언제 너희 어미에게 이혼증서를 주어서 나를 떠나서 너는 자유 하라고 했느냐? 보기 싫으니 함께 살기 싫다고 했느냐? 나는 네 어미에게 이혼증서를 써준 적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를 어느 채주에게 팔았더란 말이냐? 너희를 팔고서 내가 받은 돈이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지은 죄로 너희는 주인을 바꾸어 버렸도다. 너희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죄값을 받으려고 하는 마귀에게 너희는 종이 되고 말았도다.

너희 어미는 어떤 형편이냐? 내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나가라고 한 적이 없느니라. 내가 싫어서 쫓아낸 적이 없느니라. 너희 어미는 왜 나를 떠났느냐? 왜 내가 만날 수 없게 되었느냐? 너희의 허물을 인함이니 어미된 자로서 너희가 죄를 지어 다른 채주에게 종이 되어 그 마귀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어미는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느니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아담이 어쩔 수 없이 에덴을 두고 떠나감같이 너희 어미는 내가 쫓아내어서 이혼증서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 현장을 떠나서 너희와 함께 그곳에 내어 보냄을 입히게 되었느니라. 그런데 내가 너희를 당장 데리고 오려면 손이 짧으냐? 능력이 없느냐? 내가 바다를 꾸짖은즉 바다가 말라버리고, 강을 명한즉 강물이 말라서 그곳에 있던 어족이 다 죽어 악취가 온 세상에 가득하지 않았더냐? 내가 능력이 없어서 다른 채주에게 가 있는 너희를 내가 당장 찾아오지 못하겠느냐?

 

나는 흑암으로 하늘을 두른 자니라. 베로서 이 땅을 감쌀 수 있는 하나님이니라. 내게 능력이 없겠느냐? 너희를 찾을 힘이 없겠느냐마는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여 너희를 당장 찾아온다고 하면 너희가 지은 너희의 죄값은 언제 물겠느냐? 죄인으로서 내 나라에 온다면 너희가 편하겠느냐?

 

죄지은 사람은 또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차라리 죄악 세상에 사는 것이 편하지, 죄지은 사람이 그 죄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그것은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죄인으로서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빛의 나라에서는 어두움을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그 맡겨준 세상 땅에 찾아오셨더니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찾아도 없습니다. 그 어미마저 없어졌습니다. 어미는 죄지을 사람이 아닌데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자식들이 죄를 지어 다른 채주의 종이 되었고, 그 어미는 자식들을 인하여 아담이 하와 때문에 에덴 동산을 버리고 함께 쫓겨난 것처럼 내어보냄을 입혀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니 당장 그 채주로부터, 그 마귀로부터 자기 백성과 그 어미를 불러 나왔으면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나온 내 백성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내 나라에 오면 더 불행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아들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가 죽어 그 영혼을 죄인들 대신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 씨를 되찾아, 죄인의 씨앗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의 씨앗을 되찾아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아 죽게 하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어느 카펫 깔아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남의 집에 가서 일을 맡았습니다. 카펫을 깔고 있었는데 한참 깔다가 힘도 들고 해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어서 밑 포켓에 넣어 두었던 담배를 꺼내려고 찾아보니 담배가 없었습니다.

 

"담배를 내가 어디 두었지? 일하다가 어디 빠뜨렸나?" 하고서 두리번두리번 하다보니 카펫트 저 한 쪽 편이 불룩했습니다. "아이구머니나. 담배가 어떻게 저기 들어갔지?" 그래서 가서 담배이리라 생각하고 발로 자근자근 밟아보니까 역시 말랑말랑했습니다. 담배였습니다.

카펫을 뜯어가지고 담배를 꺼내 한 대 피우고 싶지만 강력 접착제로 다 붙여 놓았고 그리고 전부 무늬를 맞추어 놓았는데 이것을 다시 뜯어낸다면 아주 복잡하게 생겼습니다. 차라리 내가 담배를 피우지 말고 말지 하고서 이렇게 막 밟아도 불룩하고 좀 뜹니다. "이것 안되겠네."해 가지고서 몽둥이를 하나 갖고 와서 얼마나 거기를 두들겨 팼던지 납작하게 두들겨 팼습니다.

일을 끝내고 그 주인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끝났습니다. 이제 저 돌아갑니다." 하고서 장비를 다 챙겨 가지고서 자기 차에 갖다 실었습니다. 차에 실으려고 짐을 싣는데 자기가 앉았던 운전석에 보니까 담배갑이 거기 있다 그겁니다. "아이구머니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까 나는 카펫 밑에 있는 것이 담배갑인줄 알고 자근자근 밟다가 그것도 안 되어 가지고서 몽둥이로서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는데 이것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뭐던가?"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여주인이 "아저씨!" "왜요?" "혹 일하다가 우리 앵무새 못봤어요?" 몽둥이로 한없이 두들겨 팬 그것이 담배갑이 아니라 앵무새였습니다. 그래서 납작하게 이제 본 살처럼 되고 말았는데, 아저씨는 망설였습니다. 자기가 두들겨 패서 납작하게 만들었던 그것이 앵무새였구나 하고 이실직고 하려고 하다가 멈칫 하다가 모른척했습니다.

 

집주인은 그저 앵무새가 바깥으로 날아갔거니 생각하고 이제 일한 노임도 주고 그리고 "아저씨 오늘밤에 오세요. 우리가 집수리를 깨끗이 했으므로 동네 지인들을 불러서 우리 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오십시오." 해서 그날 저녁에 파티에 참석했더니, 그저 수고했다가 카펫트 잘 깔아주셨다고 술도 한 잔 주고 마시고 전부 춤을 추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카펫을 잘 깔았다라고만 알고 편편한 카펫 위에 춤을 추고 자기는 그 현장을 지나갈 때마다 발을 조금 조금 이렇게 건너뜁니다. 자기는 알고서도 춤을 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카펫 작업을 하는 이 아저씨는 처음에는 이 불룩했던 것이 자기의 담배갑인줄 알았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나타난 대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받는 것은 그의 죄 때문에 그가 당연히 받을 벌을 받는 줄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카펫 깔은 사람은 나중에는 그 죽은 것이 자기의 담배갑이 아니라 앵무새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제 우리는 마음 아파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죽였도다."라고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마는 어쩔 수 없어 살아갑니다. 돈을 받아야 가족이 살겠고 그리고 그 파티에 춤을 추어야만 하겠기에 그가 죽은 사실을, 그 새를 자기가 두들겨 패서 죽였다는 사실을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마음속으로는 항상 이것이 걸렸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다른 새면 모르겠거니와 말한다고 해서 앵무새인데 그냥 내가 두들겨 팰 때 "앵무, 앵무" 하지 왜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죽는단 말인가? 저는 앵무새는 원래 "앵무, 앵무" 하는 줄 알았더니 "앵무, 앵무"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면 "아프다." 하고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말하는 앵무새인데 이 앵무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자기는 편리하게 일을 다 마쳐버렸고 그 위에 춤을 추고 그 일 했다고 돈을 받아서 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습니까? 이 카펫 작업을 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뭐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 와서 즐거워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교회라는 반석 위에서 춤을 춥니다. 우리는 우리를 가리켜 우리의 옆 사람을 가리켜 죄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이미 의롭게 된 사람들,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죄인이며 결국은 주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지옥으로 갈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구별하고 있습니다. 바깥 사람들은 죄인이요 사망의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나, 우리는 죄인이 아니요 그래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이 바닥이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깨어진,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어 세우신 이 바닥인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 밑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밑에서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뽑아버린다면 저 바깥 사람이나 믿는다고 하는 우리나 무엇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죄인 아닌 것처럼 되고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채주가 다른, 그래서 마귀가 채주가 되어 있는 그 현장으로 끝내 갈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면서 우리는 언제 그런 신분을 가졌던가 하는 생각을 벌써 갖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앵무새가 깔려 죽은 그 카펫 평평한 그 바닥 위에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이 바로 그런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입이 있었으나 말없이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수염을 잡아 뽑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찐한 모욕을 주는 겁니다. 차라리 재판정에서 몇 년 징역을 받고 있지 수염을 뽑힌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수염을 뽑으면서 얼굴에다가 침을 뱉으면서 온갖 모욕을 퍼붓는데도 그 얼굴 하나 변하지 아니하고, 침을 뱉어도 본능적으로 눈이 감길 것인데 눈도 감지 아니하고 자기의 수염을 뽑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노다지 갖다 맡기며 "마음대로 뽑아라. 더 뽑아라. 다 뽑아라." 그렇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에게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가 등을 맞고 있었으며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수염이 뽑히고 있었던 것을 카펫 공사한 사람처럼 우리는 압니다.

남의 죄를 지고도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지 못합니다. 수치를 수치로 알지 못합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을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 아버지는 우리를 찾아왔으되 찾지 못하고 우리의 이름을 불렀으되 대답하는 자가 없어 살펴보았더니 모두들 자기 죄로 말미암아 채주를 바꾸어 버렸더라 그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어야 될 사람들이 마귀를 주인으로 삼고 마귀는 자기의 백성이 되었다고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더라 그것입니다.

 

어미를 내어보내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타난 어미는 누굽니까? 그는 죄를 짓지 아니했어도 죄짓고 떠나간 백성을 위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고 말했으니,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었어도 내어보냄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어보낼 때에 내어보내기 전에 오랜 세월동안 귀에다 대고 진리만을 말해 주었습니다. 아침 눈을 뜨면 해질 때까지 진리만을 그 속에 넣어주었습니다.

 

사람은 들은 대로 합니다. 본 대로 합니다. 가끔 공부를 잘해서 점수가 좋고 퀴즈대회 같은 데서 아주 높은 점수를 따는 학생들을 보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같이 선생님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역시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하고(옛날에 다 공부 잘하면 선생님 했으니까요) 공부를 잘하니까 공부 잘하는 부모 밑에서 난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는가 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분이 아주 그럴듯한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연구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자식이 꼭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머니가 아이를 배고서도 어쩔 수 없이 매일 교단에 나가서 가르치기 때문에 배속에 있는 아이가 가르치는 어머니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가르치는 얘기를 훨씬 많이 듣기 때문입니다. 태교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일 적부터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그때부터도 그 어머니가 마음먹은 대로 말하는 대로 그 집안의 분위기대로 그 아이가 나서 그대로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에게 진리 외에는 들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보이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사 자기 뺨을 때리는 자에게 뺨을 돌리지 아니하며,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 뺨을 오히려 갖다 들이대며. 그리고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다 맡겨 버리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누가 이처럼 하도록 만들어 주었는가? 그 아버지께서 그토록 하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맞아야 한다. 맞아야 한다. 맞는 것이 사는 것이다. 수욕을 당하는 것이 내 백성이 수욕을 당하지 않고 죄짐을 벗고 빠져 나오는 길이야. 다른 사람이 할 사람이 없어. 네가 해야돼. 네가 해야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렇게 만들어 우리 가운데 보내셨으니, 그가 끌려갈 때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앉은 양처럼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가서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으면 맞는 대로 죽이면 죽이는 대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화도 내자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한 흔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 라고 했습니까?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세뇌하여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수치와 곤욕을 당하여도 그를 수치로 알지 못하였노라고 주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산군의 부왕되는 성종은 여러 여자들을 후궁으로 삼았고 많은 자식을 낳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 엄 귀인과 정 귀인이 역사에 잘 나타나 있지요. 이들은 연산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연산군 자기 생모를 어렵게 했다 라고 해서 죽입니다. 이 두 여인에게 자루를 뒤집어 씌워버립니다.

 

자루를 뒤집어 씌운 후에 이 여인들의 아들들을 불러와 가지고서 다 왕자들인데 이 왕자들을 그 자루 뒤집어쓴 어머니 옆에다 세우고서 "이 속에 있는 이 사람들은 대역죄인이니라." 너희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연산군이 말하기를 "대역죄인이니라. 이 대역죄인을 나는 나의 동기가 되고 형제가 되는 너희들의 손으로 때려죽이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만약에 이 대역죄인을 몽둥이로 때려죽이지 못하면 단칼에 너희를 베겠노라." 이렇게 했습니다.

 

자루 하나 뒤집어썼으니 귀가 막힌 것도 아니고 이 여인들은 자루 속에서 다 들었습니다. 끌려온 자식들이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연산군이 미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지금 이 아들들이 자기를 두들겨 패서 죽이지 아니하면 칼을 뽑아서 그 아들들을 죽임으로써 다른 왕자를 없애서 자기의 왕위를 보존하려는 아마 그런 뜻이 있는 것으로 여인들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겠지요.

연산군이 너무나 무섭게 채근하니 몽둥이를 들고서 그 여인들을 두들겨 팹니다. 두들겨 맞는 여자들이 누굽니까? 자기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맞아 다 죽어가는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이 두 여인은 "이놈아 네가 왜 나를 때리느냐. 나는 네 어미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아들들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 살려고 연산군에게까지 대어들면서 또 인수대비에게 그렇게 생명을 부탁하고 하던 이 여인들인데 막상 자기 아들들이 자기를 두들겨 팰 때에는 어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들을 살리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 내가 이 속에서 "이놈아, 나는 네 어미다."라고 말하면 저 아들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아들이 끝내 나를 죽이지 못하면 저 연산군이 당장 내 아들들을 칼로 벨 것이다.

 

그래서 여인들은 죽고 아들은 겨우 살아남았던 사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라보는데, 앵무새 주인은 모르기라도 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종의 후궁들처럼 알고도 오히려 그 아들을 죽이는 자들을 살리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알고도 능력이 있으면서 조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건져낼 수 있는데 그 아들을 건져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아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하고 있습니다. 끌려갑니다. 쓰러지고 또 쓰러집니다. 침 뱉음을 받습니다. 뻘건 베옷을 감고서는 침을 뱉고 그 병정들이 뺨을 때립니다. 수염을 뽑습니다. 모욕을 가합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부끄러움도 타지 아니하고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돌려대며, 자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침을 뱉으며 뺨을 치는 자들에게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저리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하는데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세상에 사람 치고 상식적인 사람 치고, 자기의 죄도 아니고 남의 죄를 위하여 죽어주면서 이렇게 진실할 수가 있더란 말인가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난 사람 치고 그렇게 된 사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누구의 실력이 그를 그토록 되게 했습니까?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실력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교육을 시켜서 때리는 자에게 자기 등을 돌려대게 하였고 자기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 뺨을 맡기는 것을 하나님이 친히 직접 봅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올라가서 막 모욕하고 목마르다 라고 하는데 그저 쓸개탄 포도주를 자기 입에다 문지르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저리하오니 저들에게 감정을 갖지 마시옵소서.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아들의 부르짖음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체면상 하는 말이 이었습니다. 진심었습니다. 진심할 수 없는 자리에서 진심을 내어놓는 그 아들을 보는 아버지, 그 아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은 아들 탓이 아니라 아비 탓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아들이 자기의 시킨 대로 기계처럼 끌려가서 그렇게 죽는 것을 바라다보면서 진심까지 다 드러내었는데 "나 죽이는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하면서 그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되도록 가르쳤던 하나님께서 얼마나 하늘에서 몸서리를 쳤던지 예수 운명하는 순간에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리고 태양이 빛을 잃고, 얼마나 흔들어대었던지 주님이 운명하는 순간에 많은 무덤들의 돌문이 다 굴러 떨어져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인 지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누구의 육체가 갈라진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육체가 갈라졌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쪼개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하셨지만, 그처럼 당신의 가슴이 찢기어졌어도 하나님은 그 아들 죽인 자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을 그처럼 모욕하고 그토록 험하게 죽였던 사람들을 그 천사들로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단 한사람도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 아들을 그렇게 희생시키므로써 수많은 잃었던 우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어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될 줄 몰라서 그렇게 내어놓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불러도 대답이 없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도다. 너희가 갑자기 어디에 갔느냐? 너희 위에 있는 그 주인은 누구냐? 너희의 채주가 마귀로구나. 언제 그렇게 되었는가. 너희가 죄를 지었구나. 너희가 죄를 지었구나.

 

죄지은 너희를 내가 어떻게 찾아내랴? 내가 힘이 있어서 손을 쓰면 바로 데리고 오겠지만, 죄를 갚지 아니하고 그대로 데리고 온다면 너희는 지옥에서 사는 것보다 천국에서는 더 힘들 것이야. 방법이 따로 없으니 내 아들을 너희 대신 너희 당할 수치를 당하게 하고 너희 뽑힐 수염을 뽑히게 하고 너희 맞을 등을 맞게 하고 너희 죽을 죽음을 죽게 하여 내 아들을 희생시키고 너희를 찾겠노라.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하나님께서는 죽는 아들만을 쳐다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되찾을 수 있는 우리을 찾으셨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는 것을 보고 그는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손해보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 하나를 희생시켰고, 충분하게 내 백성을 찾아내었으니 그가 속건 제물로 그 영혼을 드리기에 이르면 나의 많은 씨를 되찾게 될 것이라 하시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찾게 되었으니 그가 억울해 한다면 우리를 찾을 기쁨이 없었겠지요. 우리를 찾은 기쁨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내 아들 하나를 죽이고 모든 내 백성을 찾았도다 하고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닮았던 그 아들께서도 죽기 전에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하고 그리고 자기의 뺨을 치는 자에게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의 뺨을 맡기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겨서 두들겨 패는 자에게 자기의 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등을 내어 맡기던 그 분이 부활하신 후에 어찌하였습니까?

 

저는 부활하자마자 주님이 빌라도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헤롯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놓게 만들었던 대제사장들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사십일 동안 여러 곳에 다니셨지만, 제자들과 함께는 저 호숫가에도 가고 저 산에도 가고 또 방에도 가서 여러 차례 만나주시고 식사도 같이 했지만 자기를 죽인 사람들에게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올라갈 날이 가까운데도 단 한 번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죽였지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이렇게 살았도다. 이놈들아!" 하고 찾아갈 만한데 전혀 가지 않았습니다. 왜 안 가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만족이었습니까? 죽인 자들에게 가서 "나의 죽음의 값을 내어놓아라. 나의 죽음을 보상하라." 한다면 주께서 보상을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그로 말미암아 삶을 입은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주께서 자기를 죽인 자들에게 찾아가서 보복하지 아니한 것은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하지 아니한 것은 그 보상으로 저와 여러분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했기 때문에 오히려 찾아가서 말하다가 "나 당신의 생명을 보상해주겠소. 그러나 당신의 백성은 도로 찾아오겠소." 할까바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은 것으로 만족하시고 하늘로 오르셨던 것으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신 하나님, 이처럼 하신 예수님, 이 하나님과 그 아들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벌써 의인되어, 죄인이었던 시절마저 잊어버리고 천국 시민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 춤을 추며 사는 저희가 된 줄로 믿습니다.

참으로 이 사순절을 기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앵무새의 여주인처럼 모르고 그 아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알고서 보고서 그리하였고, 그 아들이 그처럼 희생되도록 미리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만들어주셨으니 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우리에게 만나게 해 주신 이 아버지와 이 아들을 한 번 더 만나보십시다.

 

이사야서 50장 1절 이하를 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어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이것은 이제 아들의 입장에서 쓰는 말입니다)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길을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학자처럼 말씀하시고 학자같은 귀를 주시고 학자같은 혀를 만들어 버렸으니, 들은즉 말하게 되니 아들의 입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말 외에는 더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자기가 자기의 귀를 열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라났기 때문에 열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수치를 당치 아니한다 라고 하니까 수치 당할 일이 없었다는 겁니까? 온갖 수치에도 수치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는 것입니다. 누가 그리하였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그리 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아들을 하나밖에 없는데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의 아들이 죽었어도 죽인 자를 보복하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도 자기 죽인 자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억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입니까?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만족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으로 만족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416장 찬송합시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감화하시고 감동하시고 인도하심이, 진실로 이 사순절을 기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그 크신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를 구원하신, 그래서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갖다 맡기며 죄도 없으면서도 자기를 죄인처럼 두들겨 패는 자들에게 자기의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맡겨 버렸던 주님을 생각하는, 그래서 감사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께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

 

 

 

 

사순절 설교(1)/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2008-06-19 14:23:19 read : 58

 

제목: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본문: 이사야 42:1-4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별스럽게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사람이기에 특별나서 이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갈대를 가지고 지붕을 이거나 혹은 엮어서 울타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한 갈대를 꺾어버리지 아니하고 지붕에 사용하는 사람 없고 또 꺾어버리지 아니하고 울타리로 썼다면 그 상한 것이 계속 상하면서 비도 세게 하고 그리고 또 꽁꽁 묶어서 울타리를 만들었을 적에 상한 갈대 하나 있으면 비 맞으면 곧 썩어서 그 묶음이 풀어지고 헐거워져서 울타리가 무너지는데, 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사람이 오늘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 그것을 가지고 먼 길 가겠다고 밤길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름이 다 되어 불이 꺼져가면 그 등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꺼져가는 등불 가지고 어두운 밤길 몇 리나 더 가겠습니까? 끄고 새 불 바꾸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 상식인데 오늘 성경에 소개되는 분은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이런 특별난 분이 누구시겠는가? 성경에 이런 일을 행하신 그의 일을 소개한 바가 있는데, 마태복음 25장 1절로 13절 사이에 그가 신랑으로 오면서 예상 외로 기름이 넉넉한 다섯 처녀를 데리고 잔치집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기름이 넉넉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데리고 들어갔고 잠시 후 기름을 가득 채워 가지고 온 다섯 처녀는 밖에 두고서 잔치집 안으로 들이지 아니했던 그 신랑이 오늘 바로 이 이사야서에 소개되고 있는 신랑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들어간 다섯 처녀는 기름을 충분하게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들 합니다. 못 들어간 다섯 처녀는 미련하여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름이 없어서 못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로 그렇게 알도록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따져서 읽어보면 들어갔던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한 다섯 처녀의 기름 도움 요청을 받았을 때에 우리의 남은 이 적은 기름을 너희에게 나누어 주면 너희가 우리의 쓰기에 다 부족할 것 같으니, 신랑 올 때에 정작 너희 등불도 우리 등불도 꺼질 것 같으니 줄 수 없노라 라고 했습니다.

신랑과 함께 잔치집에 들어갔던 이 다섯 처녀는 기름이 그야말로 신랑이 올 때에는 매우 부족했지만 그 신랑은 부족한 다섯 처녀를, 꺼져가는 등불을 가진 다섯 처녀를 아무 말 없이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못 들어간 다섯 처녀는 오히려 장사하는 사람에게 가서 기름을 가득 채워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문은 닫혔지만 신랑이 멀리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가득 기름을 채워가지고 불을 밝히고 와서 신랑이여 우리가 불 밝히어 왔으니 우리를 입장시켜 주소서 주소서 했지만 기름을 가득 채워 왔던 이 다섯 처녀는 주님에게 그다지 반가웠던 사람들이 아닌지, 그 사람들은 밖에 두어도 밝은 등불과 함께 살 수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별난 사람을 소개하기 위하여 제가 읽고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사례 하나를 예로 말씀드려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이 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브라질에 한 시골 마을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딸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들어서 그나마 있는 재산 다 허비하고 아내와 딸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이 어릴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또 그 가정은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딸 때문에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딸은 자라는 동안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었고 또 어머니는 그를 사랑하며 교육을 잘 시켜서 아주 행복스러워 보이던 그런 가정이었는데, 그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이고 그 딸의 이름은 '크리스티나'라고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십대가 되면서 학교 가서 친구들을 만납니다. 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가끔 주말이 되면 이제 큰 도시에로 한 번 가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나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또 자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던 어머니 마리아가 이 크리스티나에게 말하기를 "조심해야 한다. 도시에 가면 도둑놈도 많고 험한 사람 많으니 집에 있어야 한다. 나쁜 친구 사귀지 말아야 한다."라고 당부를 했지만 그 어머니가 일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왔더니 딸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출해 버렸습니다. 그 못된 십대 친구들과 함께 이제 향락스러워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큰 도외지로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딸이 갔을 것이라고 예상한 리오데자네이로, 세계 유흥도시 향락도시 리오데자네이로로 갔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가서 있을 곳이 뻔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호텔, 나이트 클럽, 또 술집, 도박장 이런 곳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찾아 나서기에 앞서서 자기 사진을 사진관에 가서 여러 장 복사를 했습니다. 좀 확대해서 복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서 자기 딸이 갔을 만한 그 나쁜 지역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그 사진을 이제 부착했습니다. 화장실에도 붙이고 또 전화박스에도 붙이고 그리고 현상금 붙은 죄인 수배하는 그런 사진 옆에도 갖다 붙이고 온갖 나쁘게 된 사람들이 갈 만한 곳에다가 자기 사진을 많이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뒤에는, 앞에도 쓰지 않고 그 뒤에다가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네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 하고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서 그 어머니는 지치고 돈도 떨어지고 해서 다시 시골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몇 주 후 그의 딸 크리스티나가 나이트 클럽에서 밤새도록 나쁜 사람들과 춤추고 그리고 호텔을 전전하면서 몸을 다 망친 후에 피곤하여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건물 층계를 한층 한층 내려오고 있었는데, 지친 자기의 눈에 약간 취한 자기의 눈에 언뜻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가까이 가 보았더니 자기 어머니의 사진이었습니다. 얼른 그 사진을 떼였습니다. 그 동네에 사진이 붙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얼굴이 팔리기 때문에 사진을 뜯었습니다. 뜯고서 앞면 뒷면을 살펴보았더니 메모가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이라고 써 두었습니다.

 

부끄러워서 옆에 누가 있나 없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끄러워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어머니 얼굴만 팔린 것이지 자기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름도 자기 얼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 되었던 자기 딸을 남들이 알까바 외쳐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찾는 소리가 거리에 들릴까바, 자기 딸의 허물이 거리에 들릴까바 서서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조용하게 자기 얼굴만을 사방에다 갖다 붙였던 것입니다.

범죄하고 떠나간 딸의 사진을 붙여야 할 것인데 어머니 자신의 사진을 붙여놓고 그리고 메모를 남겼지만, 혹 누가 그 메모를 보고 자기 딸이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그런 딸인 것으로 생각할까바, 들킬까바 자기 딸 죄인인 것이 남에게 들킬까바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던 이 어머니, 그는 딸을 대신해서 죄지어 만신창이가 된 그 딸의 얼굴을 씻기 위해서 그 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평생을 선량하게 살아온 이 어머니가 온갖 우범지역에 자기 얼굴을 내어다 팔았던 것입니다.

 

자기 얼굴이 붙었던 그 지역의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 지역에 얼굴이 붙으면 어디 학교에 동상을 보는 것 같이 여기지 않습니다. 큰 기념관 앞에 있는 자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침을 뱉으며 "저 다 늙은 여자도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얼굴이 저기 붙었지? 현상금 얼마짜리인가?" 이렇게 하면서 모두들 지나가는 그 현장에 자기를 있는 대로 복사해서 갖다 붙이고 딸을 찾았지만 그 동네에 이름이 들켜질까바 그 딸의 체면을 위하여 딸의 이름을 쓰지도 않고 그냥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서는 집 나간 아이를 찾는다고 막 사진을 수만장 복사해 갖고 뿌립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진을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짓 한 아이의 사진을 뿌립니다. 그리고 어떻게 어떻게 생겼다고 몽타쥬를 만들고 특색까지 씁니다. 턱이 나오고 눈이 크고 작고 자세히 알아볼 수 있도록 다 기록합니다. 더 많이 붙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게다가 "아무 아무개야 돌아오라.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 그렇게 합니다.

 

어찌 보면 참 훌륭한 아버지이고 훌륭한 어머니인 것 같습니다. 많은 큰 죄를 짓고 나갔지만 다 용서하겠다고 아무 아무개야 돌아 오라 했지만, 이 브라질 여인 마리아는 딸의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용서해주겠다는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곧 누구를 허물되게 하느냐? 허물된 자기 딸을 더욱 허물되게 소문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한 이년 전인가 기억됩니다마는 월남 엄마들이 한국 군인 아저씨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이끌고 한국에 와서 TV에 부끄러운 자기 얼굴을 비취고 태어난 아이 얼굴을 비취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우리 한국 군인 아저씨들이 전쟁터에 파병되면서 총알만 뿌리고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씨앗까지 뿌리고들 와 가지고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겁니다.

 

여인이 나타나서 이렇게들 했지요. "나는 어느 지역 몇 번지에 이층집에 있었습니다. 나와 동침한 남편 되는 사람이 거기 지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그 아이입니다." 하고서 신문에다가 어머니도 내고 아이의 얼굴도 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월남 갔던 씨뿌린 아저씨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타나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두고서 비판한 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되었던 이 브라질의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는 딸의 수치 위에다가 자기의 얼굴로서 덮어버렸던 것입니다. 딸의 이름 위에다가 자기 이름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딸의 이름이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닙니다. 딸의 얼굴이 자랑스러운 얼굴이 아닙니다. 그런 그의 얼굴 위에 어머니의 얼굴로서 덮었고, 그런 딸의 이름 위에 자기의 이름으로 그 딸의 부끄러움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구원하되 그 구원받는 자의 체면을 위해서 외치지 아니하며 거리에 들리게도 아니하면서 자신을 사방에 십자가 위에 걸어 세우고 우리를 소리없이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주인공은 상한 갈대면 꺾어버리면 그가 가진 갈대 단은 훌륭한 단인데 꺼져가는 등불 꺼뜨려버리고 새로 기름부은 새 등불을 들고 나가면 얼마든지 밤길을 갈 터인데, 그는 상한 갈대라 하여 꺾을 용기가 없고 용기가 없다기보다 진실한 사랑 때문에 꺾지를 못하고 꺼져가는 등불로써 자기가 헤매면 헤맬지라도 이 등불마저 아직도 명이 붙어있는데 꺼버려서야 되겠는가. 버려서야 되겠는가. 차라리 내가 다시 불을 지펴보리라 생각하면서 꺼져가는 등불의 사람을 찾을 적에 상한 갈대를 찾을 적에 소리내어 동네방네 다니면서 외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상한 갈대 아무개야 나오라. 꺼져가는 등불 아무개야 나타나라. 내가 여기 있다. 너를 구원하려 왔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그런 말씀을 거리에 다니면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외치지도 아니하고 거리에 혹 죄인의 이름이 들릴까바 외치지도 아니했다는 그분이 바로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는 분인데,

 

그렇게 하자니 죄인이 가 있는 우범지역 스스로 찾아다니시면서 죄인 찾는 게시판에다가 누구의 얼굴과 누구의 이름을 오히려 내어야 그 죄인이 욕되지 않게 허물스럽지 않게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마치 크리스티나를 부끄럽게 아니하려고 대신 어머니가 부끄러움을 당했듯이 죄로 말미암아 이 딸 크리스티나처럼 되었던 우리들,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여기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참으로 부끄럽게 된 우리를 꺼져가던 우리 등불 그리고 반드시 꺾어버리고 추려내어야만 될 상한 갈대였던 우리를 위해 구원을 하시되 우리의 이름이 팔릴까바 우리의 잘못된 그 얼굴이 사람들에게 알려질까바 곳곳에 우리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를 사방에 걸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하면,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까, 죄없는 주께서 달려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가 달려야 함에도 십자가 하면 우리도 그렇게 말하고 세상 사람도 말하기를 십자가에 하나님 아들 예수가 달렸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세워지면 세워질수록 걸리면 걸릴수록 예수님의 체면이 참 추하게 됩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큰 죄를 가졌어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곳이 없고 그 십자가 위에 주인공은 예수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덮어져 버린 겁니다. 그러한 주님에게 우리는 조용히 찾아가면 되었습니다.

 

처음 신랑을 맞으려 나가는 열 처녀는 신랑이 더디 온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오게 되어 있는 날 온다는 그 시간에 등불을 밝히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어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 등불에 가득 채우고도 또 다른 병에 기름을 더 준비해 갔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랑이 금방 올 터인데 등불에 기름이 가득 찼으면 그만이지 또 다른 병에 기름을 더 담아갈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작 기름이 소비되는 곳은 신랑을 기다리는 길목이 아니라, 신랑이 입장한 후에 날이 샐 때까지 그 잔치의 집을 밝혀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등불에 기름을 가득 채우는 이유도 그리고 슬기로워서 다른 기름병에 기름을 더 준비한 이 처녀들도 기다리기 위해서 더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 당연히 신랑과 함께 들어가서 밤새도록 등불을 밝혀주어야 하는 일을 이 처녀들이 해야 되었기 때문에 등불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기름을 따로 또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신랑이 더디 오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등불에 담았던 기름이 다 소비되고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들이 따로 준비했던 기름마저도 다시 부었는데 거의 다 소비될 쯤에 신랑이 그때서야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다 떨어졌고 슬기롭다고 해서 기름을 더 가져갔던 그 처녀들도 이제는 마저 부었지만 신랑이 올 때까지도 버틸 만큼 기름이 안 될 만큼 나누어 쓸 수 없을 만큼 꺼져가는 등불을 가졌던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인공이 되었던 이 신랑은 기름이 모자라는 그 처녀들을 안으로 들어가자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십 분 후에도 한 시간 후에도 다섯 시간 후에도 기름이 떨어진 이유로 해서 처녀들이 쫓겨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비유를 보면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 신랑 예수님과 함께 입장했던 처녀들은 기름을 많이 가졌던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들어가지 못했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 것쯤으로 우리는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오해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왜입니까? 기름이 다 떨어져가는 처녀들이 들어갔지만 쫓겨나오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불을 켜준 것으로 되어버렸습니다. 그 처녀들에게 기름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꺼져가는 등불의 주인공에게 그의 기름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을 가진 처녀라고 알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 신랑의 사랑이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기름 얼마 없는 처녀들을 불러들이어서 밤새도록 다음 해가 밝을 때까지 기름이 없었던 여자로 나타나지 않게끔 커버를 해 주신 신랑, 그가 참으로 우리의 구주십니다. 완벽하게 우리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정작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바 된 자가 누굽니까? 간고를 겪어야 할 자가 누굽니까? 죄로 말미암아 상한 갈대된 우리요, 꺼져가는 등불이었던 우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고난받게 했습니까? 허물스러운 상한 갈대로 만들었습니까? 꺼져가는 등불처럼 만들어 결국은 등불이 꺼지도록 만들었습니까? 왜 그가 그같은 간고를 겪었으며 그같은 질고를 당했어야만 했습니까?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 무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그의 죄가 있어서 징벌을 받아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이사야 53장 3절에 당시에나 지금에나 마찬가지로 생각들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마치 범죄한 딸 크리스티나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 허물없는 그 어머니가 자기 얼굴을 확대하고 복사를 해서 온갖 우범지역에 붙였습니다. 딸이 당할 모든 죄인 취급을 그 어머니가 죄인 취급받도록 자기 자신이 죄인 취급받으므로써 죄인 된 자기 딸을 덮어버렸던 그 허물을 면케 해 주었던 마리아처럼, 우리들이 죄짓는 현장마다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십자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골목 가든지 교회 종탑으로만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방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가 말하여 십자가 볼 수 있는 사람을 죄인이라 하겠습니까? 누가 말하여 십자가에 달린 자를 죄 없다 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를 주로 보는 입장에 계십니까, 아니면 달려서 십자가를 볼 수 없는 입장에 계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위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부탁할 뿐, 십자가가 과연 이렇게 저렇게 생겼구나 오히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에 모든 방백들과 모든 관원들은 십자가에 달린 저 사람은 죄인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죄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사방에서 봅니다. 사기꾼 되어 사기꾼과 함께 사기를 치고 있어도 며칠 안에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현상금 붙은 그래서 수배하는 강도의 옆에도 십자가는 있습니다. 심지어 술집에도 정상 영업시간을 어기고 불법으로 영업하는 심야에 영업하는 술집 계단 지하로 내려가서 문을 다 걸어 잠그고 그리고 은밀하게 술을 마십니다.

 

그곳에서 술 마시다가 나온 사람이 이런 말을 합디다. 사방 사방 돌아다녀도 그 계단 밑으로 내려가서 지하에서 앞 뒤문 다 걸어 잠그고 술집 술방에서 술 마실 때에는 십자가 안 뵐 줄 알았는데 거기도 십자가가 있더라는 겁니다."에이 어느 술집 주인이 술집에다 십자가를 걸어놓았겠어요?" "아이고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벽에 걸어둔 것이 아니라 술 따라주는 여자 목에 걸려 있습디다." 그럽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하면 예수님 생각합니다. 십자가 하면 십자가 져야할 죄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우리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오히려 우리의 위치에서 구경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정작 십자가에 달렸어야 할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칼을 찬 병정도 재판관도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죄인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죄가 있건 없건 십자가에 달려있는 사람을 죄인이라 여깁니다. 이 세상 마귀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을 죄인이라 여겨 공격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마땅히 죄로 말미암아 징벌을 받는구나 하고 외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까?

 

이처럼 우리의 죄를 미리 덮어주신 예수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온갖 우범지역에 자기 얼굴을 십자가에 달린 채로 나타내 보이시는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그런 당신의 아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나니 그는 나의 붙드는 종이요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라. 내가 그에게 나의 신을 주었더니 그는 이방에게 나아가서 죄지은 자기 백성을 찾되 그 이름이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하며 외치지 아니하며 꺾여야 될 상한 갈대를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자신이 꺾여버리고 자신이 꺼지면서 정작 죽어야 될 자기 백성들을 죄 없었던 것처럼, 죄 없는 것처럼, 앞으로도 그리 할 것처럼 드러내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라." 그러한 분이 오늘 성경 속에 소개되었습니다.

 

한 때 저에게 몇 분들이 말씀하기를 "세례식을 하고서 세례받는 사람들과 목사님이 같이 촬영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습니다." 하고 저도 촬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저는 함께 촬영하지 않겠다 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례를 받았다는 것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세례받기 이전에는 마귀의 자식이요 사망의 자식이요 이제 세례받은 것은 비로소 거듭난 자라는 것을 증거하여 세례주는 것이니, 아무 날 아무 시에 세례받은 기념사진이라 하여 사진을 찍고 나면 세례 준 사람은 거룩해 보이지만 거기에 얼굴 같이 내밀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날짜 이전에는 마귀의 자식들처럼 소문이 나지 않겠습니까?

 

큰 질병 중에 큰 슬픔 가운데 있다가 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역사로 나음을 입었거나 문제 해결을 받았던 사람 간증시키는 일을 저는 조심스럽게 하려고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 큰 죄 중에 있는 사람을 만 사람 앞에 불러내어 가지고서 귀신을 쫓으니 귀신이 소리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떠나갑니다. 나둥그러집니다.

 

능력이 있으니 그렇게도 할 수 있어서 저도 한 때 그렇게도 해 보았지만, 미친듯이 거품을 흘리고 쓰러지고 온갖 희한한 소리를 하면서 그 사람 속에 들었던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보곤 할 때 떠나간 그 이후에 낫게된 것도 좋지만 그 이전에 그런 귀신과 함께 살았던 것을 드러내어버리는 효과도 동시에 있었던 것을 봅니다. 이것은 좋은 효과가 아니라 역효과였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병을 낫게 해 주시고 죽을 자를 살려주시되 그가 꺼져가는 등불이었다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하여 거리에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신 주님. 상한 갈대였던 것을 고쳐주어 버리고 전에 상한 갈대였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상한 갈대되어 그 허물 많은 사람 위에 덮어버리고 죽어 가는 사람 위에 덮여져서 욕을 보지 않아야 될 사람이 사방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죄의 현장에 와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성령으로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달리신 주님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조용히 빠져 딸 크리스티나가 그 어머니 마리아의 시골집으로 갔던 것처럼 아무 소리 소문 내지 아니하고 주께로 찾아와 조용하게 회개합니다.

 

우리 대신 온갖 창피를 당하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허물스러운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겠지요. 우리 얼굴을 펴라고 하겠지요. "내가 네 허물을 덮었는데, 내가 네 얼굴을 가리웠는데 왜 어깨가 처져 있는가? 왜 죄지은 사람 인상을 하고 있는가? 너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당당하고 담대하라. 큰 소리 쳐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떨지 말고 담대함으로 나아오라."

주께서는 그리 말씀하십니다마는 그래서 우리 그렇게 살아오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우리의 당당한 어깨와 담대함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신하여 주신 오늘의 주인공 주 예수로 말미암아 된 것쯤은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일만달란트 탕감의 은혜를 베푸신 임금이 탕감받은 자에게 원하여 "다만 나아가서 네 이웃의 짐을 덜어주기를 원하노라. 내가 네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였거늘 너는 나가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이웃이 또한 힘들지 않도록 짐을 덜어주어라."라는 부탁을 다만 하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 졌고 그리고 교회를 세웠나니 너희는 이제 죄인이 아니로다. 그러나 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남은 고난을 너희에게 잠깐 맡겨두었으니 내 십자가를 지고 오히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날 따라오지 않겠느냐." 주님 말씀하셨건만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이웃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집안에 걸어두고도 집안에서 자랑합니다. 십자가가 걸려있는 성전 안에서도 남보다 나타나기를 좋아합니다. 남보다 자랑스러워지기를 좋아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 "그래 너는 자랑스러워 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해. 똑똑해. 남보다 훌륭해. 그래 너 잘났어."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그리 하도록 허락하시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제 신앙의 아이가 아니라 좀 자랐으니 우리가 자랑하며 교만할 수 있는 것도 주님 때문에 되었던 것이니 이 사순절 기간 중에라도 그리 하신 주님, 온갖 우범지역에 얼굴을 팔아버리고 그 이름을 파신 주님을 생각하여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어보시기 바랍니다. 교만을 버려보시기 바랍니다. 자랑을 뒤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이 시간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주여,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하셨고 외치지 아니하신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나 이렇게 되기 이전에 십자가에 달릴 죄인이었던 것을 내 이웃도 모릅니다. 세상 관원도 모릅니다. 우리 이웃 구역원들도 모릅니다.

어떻게 이렇게 모르고 우리가 구원의 현장에 와 있겠나이까? 주여, 오늘 저 브라질의 한 여인의 딸을 위하여 했던 것처럼 아니, 주님이 그 여인을 닮았겠나이까? 그 여인이 주님을 닮았던 것이지요. 주여, 주께서 그리하셨기에 우리의 죄인이었던 것이 소문나지 않아 아무도 우리가 죄인이었던 것을 모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큰 은혜를 받았으니 이웃을 사랑해 보렵니다. 이웃에게 자랑을 이제 그만 하렵니다. 교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의 이 심정을 받으시옵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통성으로 잠시 함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그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독생자로서 죄인 된 우리 현장에 보내사 우리가 달렸어야 할 그 십자가에 우리보다 먼저 우리 집행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아들을 매달리우시고 우리로 그 십자가를 오히려 바라보는 위치에 있게 하신 그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지금도 여전하게 주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신 그 십자가의 능력과 효력이 우리 앞에서 여전하게 하게 하사 우리로 죄없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로서 칭함 받아 마귀로부터도 공격받지 않게 하고 천국길 가게 하시는 그 역사 하심이, 사순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여 감격하고 감동하는 모든 무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

 

 

 

 

사순절/ 아슬아슬한 구원/눅23:39-43

2008-05-27 15:18:52 read : 38

 

우리는 지금 교회 절기 상 사순절(四旬節, Lent)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주일 제외)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기도와 성경읽기, 절제와 성결, 구제와 섬김 등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절기입니다.

 

매년 사순절 날짜가 달라지는데, 금년에는 아주 빠릅니다. 사순절 기간이 왜 매년 달라질까 아마 궁금하실 겁니다. 그것은 부활절(復活節, Easter) 날짜가 매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날짜는 이렇게 정합니다. 부활절은 춘분을 기준으로 계산합니다. 춘분(3월 20일 혹은 21일)이 지나고, 보름달이 뜬 후 첫 번째 주일로 정합니다. 음력으로 환산하다 보니까 매년 달라지는 겁니다. 대개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금년은 3월 23일입니다.

 

이제 부활절 전까지 3주 남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연관된 말씀들을 전해 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순서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 ‘가상 칠언’(架上七言) 중에서 말씀드립니다. 본문은 그 중의 두번째 말씀으로 한 강도와 최후의 대화를 나누신 내용입니다. 모쪼록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피차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아슬아슬한 구원 : 강도가 얻은 구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좌우에 강도 두 사람이 함께 못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죽기 직전 구원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아슬아슬한 구원’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본문을 통해 살펴봅니다.

 

① 한 강도의 구원 :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습니다. 본문에는 한 강도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다른 복음서(마태, 마가)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틀린 게 아니라, 이렇게 된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싫어해서 빌라도 총독에게 거짓 고소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무지한 백성들도 예수님을 오해해서 욕을 하기 시작합니다. 거짓말쟁이라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메시아 그리스도냐? 네가 구세주라고? 그러면 십자가에 당장 내려와 봐! 우리도 좀 구원해 보시지! ... ” 별의 별 말을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강도들도 한데 어울려 욕을 합니다. 마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막15:32 “ ...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요? 39절~40절을 보십시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지금 이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욕을 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욕을 하는 다른 강도를 책망합니다. “이 사람아! 너나 나나 죄를 지어서 사형을 당하게 된 주제에 무슨 소리야? 하나님이 무섭지도 않아?”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 영 딴판입니다.

 

여러분, 이런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복음서를 읽을 때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기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문 여러 개 보는 것과 같다 ... 동일한 사건이라도 신문마다 강조점이나 시각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전체를 종합해서 보면 올바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같이 예수님을 욕했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쪽의 강도의 심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아주 가까이서 예수님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겁니다. 무리들이 욕하고 소리를 쳐도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더욱이 첫 번째 말씀(눅23:34)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잘 몰라서 그럽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 예수는 누구란 말인가? 분명히 저 예수는 보통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리들이 조롱하는 저 소리가 실제로 맞는 소리 아닌가? 그래 맞다. 저 분은 분명 메시아 그리스도야, 구세주란 말이야!” 이런 생각이 들자 불현듯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 나 같은 놈은 정말 십자가에 달려 죽어 마땅한 죄인이야.”

 

여러분,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입니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릅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마치 겨울에 선 사람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을 훤히 보게 됩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아는 죄인이다.”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죄인은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반면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막2:17 “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병자와 의사의 관계에 빗대서 설명하십니다. 아무리 명의라고 해도 병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쓸데없습니다. 원래 건강해서 그렇다면 다행이죠. 그런데 병자이면서 자기 병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실제로 그런 예를 종종 봅니다.

 

병이 전혀 없는 줄 알고 지내다 갑자기 악화되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구세주로 오셨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지만,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강도는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다른 한사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를 보십시오! 뭐라고 고백합니까?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사람은 자기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는 분임을 발견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왜 ... 흉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단 말인가? 그는 고민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약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53:12 “ ...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 ” 무슨 말인가요? 죄인이 아닌 예수님이 죄인들 틈에서 죄인 취급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두 강도 사이에 끼어서 처형당하심으로 이 예언이 절묘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심으로 죄를 대신 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던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죄 석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어코 제거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충동질해서 데모를 일으킵니다. 예수를 살려두면 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며 빌라도를 협박합니다. 권력이 흔들릴까봐 겁이 난 빌라도는 결국 타협해 버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합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은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대야에 물을 떠오게 해서 손을 씻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그리고 꼼수를 부립니다. 누가 봐도 사형감인 강도 두 사람을 급히 처형하면서 예수님을 그 사이에 끼워 넣은 겁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처형하는 불법을 은폐하기 위한 일종의 ‘물타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은 고후5:21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들을 의인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인간에게는 의인이 되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어렴풋이 대속의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본문 42절입니다. “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말은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런 겁니다. “예수님! 나는 흉악한 죄인입니다. 언감생심 나 같은 죄인이 어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감히 구하오니 당신이 천국에 들어갈 때 저도 따라 들어갈 수 없을까요? 제발 도와주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오직 예수만 믿으면 의인이 되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0:10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이런 사실을 직접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은 이 약속대로 그 강도의 믿음을 보시고, 43절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서 ‘낙원’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강도는 예수님을 통해 직접 예수님의 육성으로 구원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그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정말 아찔한 순간입니다. 만일 이 때 우물우물하다가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기회를 놓쳤더라면 그는 지옥으로 떨어져 영영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중에 이 사람처럼 아슬아슬한 구원을 받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심방을 갑니다. 그런데 평생 예수님을 부인하던 분입니다. 얼마나 다급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완고하던 분이 십자가 복음을 제시하면 마음이 녹아져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얼마 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감사하면서도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만일 그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더라면 어찌할 뻔 했나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어르신께 미리 복음을 전해 놓고 목사가 오면 세례를 주실 거라고 미리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한 대로 교역자와 교인들이 갔습니다. 가족들도 많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이 시간을 맞추셨는지 주무시는 겁니다. 얼마나 난처한지! 기껏 갔는데 허탕치고 그냥 돌아올 수도 없고,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고 ...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곤히 주무시던 분이 스르르 깨어나시더니 복음을 다 받아들입니다. 병상 세례를 받고 몹시 기뻐하십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영혼을 반드시 구원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② 구원의 십자가 :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는 비참하게 처형되는 십자가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십자가는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18 이렇게 선포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므로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받고 영생의 복을 누리시고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분명한 구원의 십자가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고집을 부리며 부인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였고,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의 「팡세」를 보면 ‘내기 이론’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의 기쁨으로 가슴벅차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집을 부립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수학자답게 확률적으로 한번 따져보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은 물론 천국을 확신하지만, 가정해서 천국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는 게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 믿지 않으면 큰 손해가 난다는 겁니다.

 

사실 인생은 넓은 의미로 보면 ‘내기’ 하는 겁니다. 순간순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궁리하다 결정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안전하고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많은 복을 받게 됩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옛날 광고 카피처럼 가전제품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지만, 예수 믿고 안 믿고는 영원을 좌우합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결정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미국의 한 마을에 불량한 청년 둘이 있었습니다. 주일 저녁인데 도박장으로 갑니다. 그런데 교회 옆을 지나가다 게시판에 있는 포스터를 보게 됩니다. 서교 제목이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한 청년은 도박장에 가지 말고 한번 들어가서 설교를 들어보자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청년은 미쳤냐고 빈정거립니다. 둘이 다투다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한 청년은 그 날 설교를 듣고 예수 믿고 독실한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대통령 취임식이 성대히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감옥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한 죄수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30년 전 헤어진 친구가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이 바로 미국 제22대, 24대 대통령 클리블랜드(Stephen G. Cleveland 1837~1908)입니다.

 

이렇게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합니다. 심지어 영원을 좌우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도 “나중에 믿지 뭐. 그 강도처럼 죽기 전에만 믿으면 되는 거 아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위험한 생각입니다. 인생이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나요? 미안한 말이지만, 자기가 언제 어디에서 죽을지 압니까? 그러므로 구원의 기회는 항상 지금 당장입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칩니다! 고후6:2 “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잠언 27장 1절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여러분 가운데 혹시 아직도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속에 믿지 못하는 단 한분이라도 계십니까? 이 시간 믿음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중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받고 영생과 천국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아쉬운 구원 : 강도가 놓친 축복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구원받은 강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정말 행운아입니다. 그런데 너무 아슬아슬하죠. 남의 일이니까 드라마틱하고 흥미롭게 보이지만, 나 자신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입니까? 정말 아찔한 일이죠. 더더욱 이 사람은 일찍이 예수를 믿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너무 아쉬운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 사람을 보고 그래요. 아주 경제적으로 예수를 믿었다고, 믿자마자 천국 갔으니 얼마나 효과적이냐고 ... 남은 수십 년 예수 믿고 천국 가는데 ... 그러나 그 사람은 효과적으로 경제적으로 예수 믿은 게 아닙니다. 사실은 손해 본 게 너무 많습니다. 그가 구원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많은 축복을 놓친 ‘아쉬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크게 두 가지 축복을 놓쳤습니다. 첫째는, 이 땅의 축복을 놓쳤습니다.

 

① 이 땅의 축복 :

 

여러분, 이 땅에 사는 동안 인생이 얼마나 고달픕니까? 그리고 죄 많은 세상입니까? 아마 이 사람도 처음부터 흉악한 범죄자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살다보니까 험한 세상에서 힘겹게 살면서 한번 두 번 범죄하면서 큰 범죄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만일 그가 진작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험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맛보며 승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평생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셔서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도와주셨을 겁니다. 마치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시23:1~4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② 하늘의 상급 :

 

그뿐이 아니죠. 이 세상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으니까 세상에 연연하지만, 사실은 영원한 내세가 더 중요합니다. 영생을 얻어야 하고, 더 나아가 천국의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가지만,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하늘의 상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인내하며 기뻐하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늘의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딤후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초대교회에 이런 순교사화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귀양가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밧모섬 아시죠. 그곳에 가면 ‘聖 요한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것에 가면 벽화가 여러 개 있는데, 그 중에 40인 순교자」란 벽화가 있습니다. 그 벽화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우상 신전 제사를 거부한 크리스천 군인들 40명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발가벗겨져서 얼어붙은 호수에 세워져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곧 얼어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만일 당장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따뜻한 목욕을 시켜 주겠다며 옆에 목욕탕을 준비해 둡니다. 보초가 모닥불 피워놓고 목욕탕 옆에서 지키는데, 40명이 찬송을 부릅니다. 그때 40명의 천사가 40개의 면류관을 들고 내려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천사가 슬픈 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군인이 울상을 하고 목욕통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보초가 소리칩니다. “여기 내 옷을 입으시오. 내가 당신 대신 서 있겠소!” 그래서 그 초병도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여러분, 면류관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우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 가운데 아슬아슬하게 구원 받은 강도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한번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기왕 예수 믿는 것 경 구원만 받고 턱걸이 하는 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많은 축복 받으시고, 저 천국에 들어갈 때 하늘의 큰 상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순절/ 이 사람을 보라!/요19:23-30

2008-05-27 12:49:54 read : 44

 

 

지금은 교회 절기 상 사순절(四旬節)입니다. 사순절이란 열흘 순(旬) 자를 써서 부활절 직전 40일을 기념하는 절기를 의미합니다. 주일을 제외하고 계산해서 40일이므로 주일을 포함하면 47일에 걸쳐진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날을 가리켜 ‘재의 수요일’라고 부릅니다. (금년의 경우 2월 6일이고, 부활절은 3월 23일임.) ‘재’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상징적 제스처로 재를 뒤집어쓰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기간입니다. 혹시 우리 신앙이 나태해졌던 회개하고 다시 회복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 한 단계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성경을 보면 40일은 경건한 삶과 관련된 상징적인 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모세도 40일간 시내산에서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을 저 광야에서 훈련받았습니다. 이렇게 40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건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한 해에 한 번은 40일 동안 절제하며 경건을 힘써 연습하자는 뜻에서 사순절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하는 성경 가운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흔히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대기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주의해서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체 분량의 1/3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 주간, 십자가, 죽음 등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제자가 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의 고난을 중심에 두고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비하면 사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 승천과 같은 기사는 이상하리만큼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가 버립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복음서란 무엇인가? 복음서란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모든 사건과 말씀을 기록한 연대기요, 그 나머지 모든 부분은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중심에 있습니다. 복음의 중심이요, 은혜의 근원이요, 샘이 됩니다. 바울도 그가 복음을 이야기할 때에 '십자가의 도'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그는 소리쳤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자기 자신을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부활을 등한히 했다거나 예수님의 승천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는 부활은,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 역설을 우리 마음에 흡족하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의 고통과 침 뱉음의 모욕을 당하시면서 그 길을 걸으시고 결국은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을 이사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십자가의 잔인함은 멀쩡한 사람을 십자가 틀에다 눕혀놓고 손발에 철 못을 박는 것만큼 잔인 할 수 있겠습니까? 톱으로 켜임을 당해 죽는 것은 5분이나 10분 정도 고통을 당하다 보면 까무러쳐서 그대로 죽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느낄 기력이 남아 있는 한, 모든 고통을 다 받게 하는 사형제도라 하는데 이 십자가 형벌의 잔인함이 있습니다.

 

못 박힌 손과 발에서 서서히 피가 빠져나가고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땡볕 아래서 고열과 함께 땀을 흘릴 때, 온 몸에서는 피와 수분이 같이 빠져나갑니다. 온 몸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손과 발에 못 박힌 상처의 고통도 극심하지만, 출혈로 인한 체내의 통증은 가히 살인적인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죄수들은 십자가에서 혼절하다가 깨어나고 깨어났다가는 혼절하곤 하면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날 밤부터 온갖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였습니다. 체포되신 후에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불법 재판을 받으며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주먹질 당하고, 욕설을 듣고, ... 당시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기다란 가죽 끝에 쇠붙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치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쇠붙이가 살에 박히며 살점을 뜯어내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됩니다.

 

가시면류관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가시로 왕관처럼 만들어 씌운 겁니다. 그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찔러 피범벅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후에는 자신이 매달릴 60kg가 다 되는 십자가를 몸소 메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형극의 길을 의미하는 비아 돌로로사는 로마총독 빌라도의 집무실에서 십자가의 골고다 언덕까지 1.5㎞의 길입니다. 맨몸으로 가도 숨이 가쁜 언덕길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가셨음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첫째는 우리 대신 치르신 고통의 대가지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간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22:14절에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죄 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실 훗날을 내다보면서 이사야서 53장 5절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에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그 순간을 마음에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십자가는 우리의 수치를 담당한 대가 지불입니다. 23절에 계속해서 중요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시편 22:6절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왜 이렇게 말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죄는 수치를 수반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금방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뭇잎을 얽어 가지고 부끄러운 하체를 가리고도 너무나 부끄러워 나중에는 숨어 버렸습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아무리 오라고 초청하셔도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끌어다가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사흘 안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 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가 가져다 준 수치를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다시 세워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현장입니다.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원히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하시고'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구약에 예언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명분을 다 완전하고 충분하게 주님이 갖추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완전하고 충분한 구원의 길을 우리 주님이 닦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이루어 주신 현장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 십자가 가까이 가서 조금이라도 함께 있어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신앙 선배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십자가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사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세요. 본문을 보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현장에서 바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 요한, 이렇게 다섯 명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은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시면서 서서히 죽어 가시는 예수님 바로 곁에, 작은 목소리로도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거리에 있었던 사람은 이 다섯 사람뿐이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지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릅니다. 죽어 가는 예수님 앞에서 군병들은 서로 제비를 뽑아가며 예수님의 유류품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순간입니다. 그 비극적인 현장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다른 세 여인과 함께 서 있습니다. 그리고 밝히는지는 않지만, 요한이 있습니다. 여기 모친 마리아는 자신의 태에 10달 동안 품고 있었고,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고, 자신의 품속에서 말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작했고, 자신이 지어주는 밥을 먹고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30년 동안이나 한 집에서 모자지간으로 살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자식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갑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옷은 자기 자식의 옷입니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직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뒤로 넘어져 실신하지도 않았습니다. 불한당 같은 로마군병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홀로 슬픔을 삼키면서 아들의 죽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마리아의 행동이야말로 예수님이 자신의 친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의 아들로, 자신의 소유로 키워오지 않았음의 증거였습니다.

 

또 요한을 보세요.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미가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은밀히 부당한 청탁을 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던 인간이었습니다. 요한이 주님을 모셨을 때 단지 마리아만 섬겼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자신이 모신 주님으로부터 늘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신 그의 심중에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마리아 봉양이 끝났을 때에, 노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요한1서, 2서, 3서를,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모시고 살지 않았더라면 결코 가능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한평생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아니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날마다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1 4:7-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리고 십자가 가까이 그 곁을 떠나지 않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눅8:2).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쓸모 없는 한심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좇기를 중단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줄 안 이상, 주님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놀란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갈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더불어 끝까지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주님과 3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제자들을 제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첫 번째 증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계속 살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창녀로 비참하게 썩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여인이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온전히 바쳤을 때 인류 최초로 부활을 증언하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부활의 증인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주님의 도구로 바칠 때 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증명해 준 위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막달라 마리아란 더 이상 비천한 창녀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녀야말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영원한 표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해짐으로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흡수 해 버린 신비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한번 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텅텅 비었던 가슴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차 오르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담대함을 갖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불만족에 휩쓸렸던 사람들이 날마다 용서하며 찬송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부여잡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떠납니다. 후회하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고난이 오고 아픔이 올찌라도, 담대하게 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꼭 사로 잡혀 살게 만듭니다.

 

이제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머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아직도 죄가운데 있다면 그 십자가에 보혈에 자신을 담그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우리 교회는 고난 주간 기간 동안 "이 사람을 보라!!" 는 주제로 모든 구원받은 성도가 십자가 앞에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십시다. 아-멘.

 

 

 

 

사순절/ 예수님을 닮으라/롬8:26-30

2008-05-27 12:47:37 read : 55

 

요즘 목적이 이끄는 40일에 동참하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감동스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택시를 운전하는 어떤 권사님은 평소에 새벽기도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답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손님들이 별로 없고, 밤늦게야 있는데

밤2시쯤 끝나고 돌아오면 새벽기도회에 나오기가 어렵죠.

그런데 해보니까 되더라고 합니다. “어떻게 되느냐?”고 하니까

특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일찍 들어온답니다.

그래서 수입은 반으로 줄어들었는데 그래도 좋답니다.

새벽기도회를 해서 수입이 늘어나야 좋은 것인데, 반이나 줄었다고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특별새벽기도회에 나오는 분들이 모두

형편 좋은 분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직장에서 돈 많이 벌고, 퇴근시간도 일찍 보장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 내막을 잘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말 무리하지만 인생의 목적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루에 2시간을 자고 왔다는 분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사고날까봐 걱정이 됩니다.

 

어떤 집사님은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정말 쉬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이 거룩한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그냥 매일 새벽에 나오라고 한다면

그 일을 하기가 쉽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면서 새벽을 깨우는 이유는 거기에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찾으려고 합니다.

 

첫 번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특히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인생의 목적을 살피고자 합니다.

 

본문 로마서8:29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즉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에베소서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구원은 일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순간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서 우리가 이루어가야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훈련”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볼 때, 좋은 일만 아니라, 나쁘게 보이는 일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실패나 가난, 고통, 질병과 같은 것들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선하게 사용하셔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는 과정에는 3가지 도구가 사용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당하신 것들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시험이라는 것입니다.(Test)

 

이것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더 강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신뢰하게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특히 우리의 성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상황이 편하고 좋은 상황에서는, 더 강해지거나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킬 목적으로 어떤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목적은 우리를 넘어지거나 고통 가운데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훈련시켜 더 자라게 하고 예수님을 더 닮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5:3-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사느냐 보다는 성품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천국에 갈 때 이 땅에서 하던 어떤 직업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성품을 가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성품입니다.

진짜 편안함을 누리는 곳은 천국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에서 살 사람의 성품을 개발하는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는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결국 우리는 소망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고난, 시험, 질병 앞에서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만 그런 고난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른 고난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시험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가장 씨름하셨던 부분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이 고통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정말 하나님은 나를 최선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

 

이 고통의 순간에 주님은 함께 그 고통 가운데 있어줄 친구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3제자에게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막14:32)

이것이 바로 소그룹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교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십자가를 피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함께 있어 달라고 했습니다.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고통을 혼자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4)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계획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결국 현재의 고난은 지나가는 것이고

나중에는 크고 영원한 영광과 상급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2. 사탄에 의해서 고안된 유혹입니다.(Temptation)

 

이것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상하게 하려는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사탄의 시험까지도

우리 인생에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이 아닌 하나님 쪽을 선택하면

사탄의 계획은 실패하고 우리는 인생에서 더욱 자라나게 됩니다.

이 선택들은 우리 인생에서 성품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를 범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으시고 40일간 금식하셨습니다.

금식이 끝난 후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마귀의 유혹 자체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마저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나만 시험을 당한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나만 재수가 없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이 말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이것은 나이도 상관없고, 영적으로 아주 거룩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시험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아닌지에 테스트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우리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쪽을 선택하면 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유혹에 집중하지 말고 좋은 생각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항상 우리가 그 시험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시험에 집중하면 시험은 우리를 이리 저리 흔듭니다.

 

빌4:8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시험을 받을 때 저항하지 마십시오. 저항하면 단지 시험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험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십시오. 선하고, 옳고, 참된 것만을 생각하십시오.

 

 

두 번째 해결책은 좋은 영적인 파트너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빛 가운데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공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영적인 파트너입니다.

 

전4:9-10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여러분의 인생을 삼킬 것 같은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함께 나눌 사람을 찾으세요.

그 사람은 바로 여러분의 옆에 있는 바로 그 소그룹의 일원들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많은 영적 파트너들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디모데, 디도, 그리고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믿음의 업적을 남겼던 것은 바로 이런 영적인 파트너들 때문입니다.

 

 

3.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모욕과 상처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치기 위해서 죄, 모욕당함을 사용하십니다.

시험은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도록 하기 위한 상황이라면,

유혹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사탄이 만든 상황입니다.

그러면 모욕은 우리를 상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상황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는 여러분을 의도적으로 상처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상처들을 참아내고 더 적극적으로는 그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이 단계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중에 가장 어려운 단계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억울하게 오해를 받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고, 학대를 당합니다.

분명 이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이 부분에서 그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오해를 받고, 상처를 받고, 학대를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벧전2:23)

 

“아버지,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

그분은 참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닮고 싶다면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습니다. 이곳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여러분 역시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에게 상처를 줍니다.

우리는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처를 서로 주고받습니다.

이 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다면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고는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상처를 받았을 때,

상처 준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여러분이 용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용서는 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선택인 것입니다.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용서하기 바랍니다.

에베소서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그것은 물론 나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여러분 삶에서 선하게 쓰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고백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려가서 온갖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형들을 만났을 때 뭐라고 말합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여러분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통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 때가 바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입니다.

 

 

 

 

나를 기념하라 /눅22:19-20

2008-01-31 07:55:25 read : 111

 

 

 

이제 사순절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한번 뜻을 모아 맞이하시길 부탁드립니다. 한번 소중하게 뜻을 모아 신앙성숙, 하나님과 깊은 대화, 기도응답, 예수님의 고난 음미, 신앙인으로서 깊은 영적 체험을 한번 이루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생에서 가장 기억될만한 기도회가 될 수 있도록 시도해 보십시오. 오늘 주일부터 부활주일 전까지 사순절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은 성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직접 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 내 몸이라 받아먹으라, 이것은 ... 내 피니라 받아 마시라.. 그리고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성찬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찬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고 제자들에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이 성찬의 의미와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나를 기념하라”

 

성경을 보면 주님은 이 성찬식을 행함으로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은 나를 기억하고 또 나를 기념하여 장차 내가 없어도 이것을 행함으로 예수님의 전체적인 고난의 삶과 중보의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예수님을 기억하는 예식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성찬식”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을 나눕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을 나누면서 주님을 생각하고 은혜를 되새기고 고난을 생각하고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찬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라는 말이 아니고 빵과 포도주를 받음으로 예수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성찬식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찬식의 목적은 “예수님을 기억”하는데 있습니다. 또 주님을 기억을 되살려 예수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삶을 기억하고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그 성찬식에 임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되는 은혜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을 기념하고 그 은혜를 새로 느끼기 위해서 성찬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성찬식에는 그런 깊은 영적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억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이 성찬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사후 제자들은 모여서 성찬을 나누었고 또 음식을 나눔으로 주님을 기념하고 친교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성찬이 오늘까지 교회들이 행하면서 주님을 기념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찬을 받을 때마다 여러분이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떡과 포도주의 내용이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떡도 작고 포도주의 양도 너무 작습니다. 포도주 잔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만큼 아주 작은 잔입니다. 마시면 한입에 차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 중에서도 큰 것을 고르느라고 두리번거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찬은 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성찬은 양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배가 고프면 집에 가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성찬은 양이 아니고 그 의미를 중요시 합니다. 성찬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주님이 지금 현재 여기에 임재하심을 믿고 체험하고 경험하는 음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찬은 단순히 떡과 포도주가 아니고 그 매개를 통해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영적인 예식입니다. 성찬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은 주님을 기념하고 성령이 여기에 임재하심을 믿고 행하는 예식입니다.

 

성찬을 받을 때에는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받자마자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손에 들고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성찬을 통해서 임하실 주님의 영에 감동받는 마음으로 먹고 마셔야 합니다. 또 떡은 입에 넣으면 자연스럽게 녹아버리게 되어있습니다. 음식 먹듯 사납게 씹는 일이 없어도 됩니다. 그리고 포도주는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기도한 후 두 손으로 받들어 마시는 것이 성찬을 받는 예의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꼭 소주 마시듯이 한손으로 홀짝 입에 털어 넣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앞에서 보면 그 모습으로 전에 술 마시던 분들의 전력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에서는 매달 성찬을 나누기 때문에 시작과 끝의 순서가 생략된 채 직접 분병과 분 잔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매달 마지 막 주일에는 오기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성찬을 받을 준비를 하고 오셔야 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이곳에 임하시는 상징의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성찬은 예의바르게, 정신을 포함해서, 정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2. 사순절의 의미

 

성찬식과 더불어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이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어 삶과 고난을 음미하면서 보내는 기도의 기간을 말합니다. 기독교에는 여러 절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절기들을 교회력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교회력의 초점은 예수님의 생애에 두고 만들어졌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력 가운데 가장 먼저 오는 절기는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는 대강절이라고 하는 대림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예수님이 인간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시는 성탄절이 있습니다. 또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어 복음전파를 기다리는 주현절, 십자가의 수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사순절,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와 희망을 안겨준 부활절, 교회를 만드시고 이끌어주시는 성령강림절 등이 있습니다. 이 절기는 세계 교회가 공통으로 지키는 교회의 절기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사순절은 모든 절기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절기에 속합니다.

 

올해 사순절은 참회의 수요일(Ash Wednesday)인 2월 21일부터 4월 6일 성금요일까지 계속됩니다. 사순절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가장 소중한 절기의 시작이며 계속해서 고난주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으로 이어지는 이를테면 예수의 계절에 속하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40일간의 절기를 말하는데 부활절 전 주일을 뺀 40일간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받으시는 고난과 수난 그리고 죽음을 음미하면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정숙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신앙의 계절을 말합니다.

 

처음 사순절이 시작된 것은 3세기 초부터였다고 전해집니다. 처음에는 40일간이 아니고 2-3일간씩 지켜오던 것이 기원 325년 당시 비드니아의 수도 니캐야에서 동서교회가 연합으로 한자리에 모여 40일간으로 정식 채택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 교회가 40일간을 사순절 기간으로 보내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이 처음 시작되는 날은 수요일인데 그 날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불태운 재를 가지고 이마에 십자가를 긋고 회개의 기도를 했다 해서 그 날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불렀고 “성회수요일”(聖灰水曜日)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의식은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회개와 슬픔의 표시로 재를 바른 것에서 기인합니다.

 

성경에 보면 40일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인과 싸워 이긴 후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나아가 고난의 날을 보냈던 날들이 모두 40일이었습니다(왕상 19:8).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돌비를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갈 생활의 강령을 받기 위해서 두 차례 시내 산에 올라가 금식한 날들이 모두 40일씩이었습니다(출 4:18, 신9:9).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 나가서 금식하신 날들이 모두 40일간의 기간이었고 또 노아의 홍수 때 이 땅에 전무후무한 비가 내렸는데 비가 내린 기간이 모두 40일간이었습니다(창 7:17). 성경에 나오는 이런 40일간의 전례들이 사순절의 기간을 40일간으로 정하게 된 근거가 되었다고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순전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의 고난 받음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보내어지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창조주가 이 땅에 와서 피조물들로 부터 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시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묻히게 되는 그 수모스러움을 묵상하면서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기간은 모두 옷깃을 여미고 우리의 삶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고 축제와 오락과 환락을 피하고 기도와 참회와 절제와 경건으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회상하면서 보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이 사순절 절기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고 예수의 고난을 음미해가며 보내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물고기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도 일절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8세기 이후에 규정이 많이 완화되었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금식기도 대신 절식을 허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순절은 나를 위한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위한 나의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 채무자에게 보채듯 보채는 기간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빚 진자인가를 생각하며 빚 갚는 자 심정으로 보내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멸시받고 고난당하신 예수를 마음 깊이 묵상하며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이 사순절이 해마다 주어진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현대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생활이 번잡하고 세속화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한발 더 깊이 세속으로 성큼 빠져 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모두 영성이 메말라진 채로 살아가기 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두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말라버린 모습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사순절의 기간을 통해서 우리들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또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며 십자가를 깊이 음미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현대인을 향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사순절을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음미하는 것으로 그 뜻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삶에 어떤 형태로든지 구체적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참여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내가 금식함으로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헌혈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또 나름대로 생각해 오던 고난 받는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또 기간 동안 일절 검소한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삶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도 주님의 고난에 뜻있게 동참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사순절이지만 금년의 사순절은 신앙성장의 기간으로 그리고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아 순례자의 심정으로 이 기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3. 2007년의 특별한 사순절

 

금년 사순절은 이번 주 수요일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금년으로 제 16회째 사순절 기도회를 가지게 됩니다. 사순절은 어느 해나 다 뜻이 있게 보내야 하지만 특별히 금년 사순절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절기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2007년은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대부흥운동 100주년의 해”

 

2007년은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부흥 백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00년 전 그러니까 1907년에 평양에서 일대 영적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었습니다. 그 일로 어둑했던 우리 민족이 크게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삭막했던 이 땅에 기독교의 불길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때 영적 대 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회개운동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영적 운동은 마침내 도덕운동으로 번졌습니다. 그래서 술 안 마시기 운동, 도박 안 하기 운동, 축첩 안 하기 운동, 담배 안 피우기 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모이는 곳마다 사경회를 열었고 소명에 불타는 성직 지원들이 모여들면서 성경읽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평양에 일대 영적부흥 그리고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역사가 금년으로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금년은 다시 이 땅 이 민족에게 성령의 부흥이 일어나야 하는 해입니다. 이 성령의 부흥이 성령 100주년을 맞이하는 2007년 사순절의 기도회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간구합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성령부흥이 오늘에 다시 일어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2007년은 성결교회의 창립 100주년의 해”

 

모든 교단들이 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성결교회는 이 땅의 두 젊은이들이 이 시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이 나라를 복음화 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뜻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성서학원에 들어가 신학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젊은이는 마침내 공부를 마치고 성령의 강권에 힘입어 이 땅으로 돌아와 신앙운동을 일으켜 세운 교단이 성결교단입니다. 그래서 성결교단은 이 땅에서 시작된 자생적 성격을 가진 최초의 교단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이면 우리나라 형편은 참으로 어둑했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이 세계가 오늘 같은 발전상을 가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100년 전 일본도 그렇게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100여년 어간에 이 세계가 급성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역시 그 기간에 가장 극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오늘같이 발전상을 보인 것은 불과 4,50년 전부터 입니다. 그 전에 우리나라가 얼마나 어둑했습니까. 지금 동남아 여러 나라를 가보면 우리의 60년대 그 모습 그대로 입니다.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우리나라 형편이 그랬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 성결교회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평양에서는 영적 대부흥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금년 2007년이 특별난 해가 아닙니까.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금년 사순절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이 성결운동과 영적부흥운동이 이 땅에서 일어났으면 하고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화가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일어나기를 모두 기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 성결교회의 초기의 모습을 재연하여 전도를 통한 새 역사가 일어나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순절 기도회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고난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사모하고 기념하고 그의 삶과 고난을 되새기며 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100년 전 평양에 임하셨던 성령의 대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다시 재현되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성결교회의 시작을 기념하면서 그때 충천했던 성결교회의 전도의 열기가 다시 불타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 사순절은 전국의 성결교회가 똑같은 교재를 가지고 똑같은 주제를 놓고 기도하고 묵상하게 됩니다. 이번 사순절 기도회에 모두 참여하여 성령의 새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광야의 시험/눅4:1-13

2008-01-29 14:48:00 read : 63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굳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메시야 신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장엄한 광경에 펼쳐졌습니다. 한 마디로 요단강 세례는 ‘메시야 대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 앞에 전개되는 공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요, 그 마지막은 십자가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그 가운데 첫 번째 사건으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입니다. 여기서 시험은 ‘유혹’을 의미하는데, 마귀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유혹한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이유 : 메시야 자격 입증, 승리의 길 제시

 

본문 1절~2절(상)을 보면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 ”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순순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① 메시야 자격 입증 :

예수님의 메시야 신분은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메시야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인간이고, 무죄한 의인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어야 하고, 대속하기 위해서는 무죄한 의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기만 하면 십자가를 질 수 없고, 또 죄인이면 남의 죄를 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광야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이 두 가지를 갖추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② 승리의 길 제시 :

인간의 불행은 죄로부터 기인합니다. 마귀는 죄를 빌미로 인간을 공격하고 멸망시킵니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죄와 마귀와의 싸움, 즉 영적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소유를 갖고 출세함으로 화려한 모습을 갖춘다 할지라도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인간의 대표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승리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승리함으로 우리 성도들도 승리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창세기 3장 보면 인류의 시조 아담의 실패 사건이 나옵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합니다. 선악과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언약관계의 ‘고리’이므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범죄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 마귀(Satan)가 개입합니다. 마귀는 본래 천사장(루시퍼)이었는데 하나님께 반역하고 지상으로 쫓겨났습니다.(이사야 14장 참조) 그가 타락할 때 그 수하에 있는 천사들도 함께 타락했는데, 그게 바로 귀신 혹은 악령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간을 멸망시키는 데 열중합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뱀을 가장해서 여자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시험합니다. 결국 아담과 여자는 실패하고 범죄합니다. 그 후 모든 인간이 아담처럼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고 그로 인해 불행해집니다. 마지막에는 영원한 사망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비참한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마귀의 시험에서 완전 승리합니다. 종국에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셨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속에 순간순간 닥쳐오는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줍니다. 고전15:22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뒤를 따라가면 얼마든지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곧 영생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믿고 이 길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는 길 : 승리자 예수님의 모델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처럼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 전쟁에 관한 내용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白戰不殆 - 상대를 알고 자기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음)입니다.

 

① 시험하는 자 : 마귀(Satan)

본문에서 시험하는 자는 마귀입니다. 잠시 참고로 성경에 나오는 시험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시험인데, 창22:1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물로 바치라고 시험하십니다.

이런 시험은 신앙을 테스트(Test)하고 연단(Trial)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긍정적인 시험입니다. 또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것 같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이것은 유혹(Temptation)으로, 인간의 욕망과 죄를 자극하여 실패하게 만들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궤계입니다.

 

② 시험의 대상 : 누구나

시험의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가 자칫 시험은 죄인이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미숙한 그리스도인이나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오해입니다. 시험은 누구나 당하는 겁니다. 마귀는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시험할 정도니까 말입니다. 마치 파리와 같습니다. 여러분, 파리가 임금님 수라상이라고 덤벼들지 않나요? 막 달려듭니다. 체면도 없고, 막무가내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이 마귀의 시험 대상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③ 시험의 시기 : 언제든지

시험의 시기는 언제인가? ‘언제든지’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을 하고 패배한 후 물러가고 끝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시험을 했습니다. 십자가 지실 때까지 그랬습니다.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 NIV)” 여기서 ‘얼마동안’이란 좋은 기회가 생길 때가지만 떠났다는 겁니다. 다시 기회를 엿보고 시험한다는 겁니다.

 

④ 시험의 내용 : 3대 시험(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그러면 시험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마귀는 영물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약점을 기가 막히게 잘 압니다. 격투기에서 공격할 때 상대방의 가장 약한 급소를 가격하는 것처럼 마귀도 우리의 급소를 찌릅니다. 급소가 어딥입니까? 창3:6에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것을 잘 요약해 주는 구절이 요일2:15~16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독사 중에 ‘링카루스’라는 코브라의 한 종류가 있습니다. 이 코브라는 침을 뱉는 것처럼 상대방의 눈을 정확히 겨냥해서 독을 분사합니다. 그러면 짐승이든 무엇이든 눈이 멀어 꼼짝 못하고 결국 잡아먹히고 맙니다. 마귀도 마찬가지 우리 인간의 급소를 공격함으로 영적인 눈을 멀게 해놓고 멸망시킵니다.

 

마귀는 어림없는 짓이었지만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제 딴에는 약점을 노렸습니다. 40일간 금식한 예수님은 주리셨는데, 바로 그때 시험을 한 겁니다. 본문을 보면 세 가지 시험을 합니다. 이것은 마귀에 아담과 하와에게 시험했던 것과 같은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약한 부분입니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i) 육신의 정욕(육욕) - 맨 먼저 마귀는 예수님의 육신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그도 인간으로 오셨기에 식욕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을 겨냥한 겁니다. 2절(하)~3절. “ ...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돌을 갖고 얼마든지 떡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말을 듣고 할 수 없죠. 더구나 금식 기도 중인데 말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훼방 놓으려고 이런 시험을 한 겁니다. 만일 예수님이 육욕을 따른다면 어떻게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육욕만 따르면 좋을 것 같지만 나중에는 그 욕망에 사로잡혀 망하게 됩니다. 육신의 쾌락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순간은 즐거운 것 같지만 차츰 무감각해져서 더 큰 자극을 원하고, 나중에는 중독 증세까지 보이고 결국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런 육욕의 시험을 단호히 거부하고 승리하셨습니다.

 

ii) 안목의 정욕(소유욕) - 마귀는 두번째로 다른 시험을 합니다. 이것은 아마 환상 중에 일어난 일 같습니다. 5절~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는 높은 데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의 화려한 것들을 보여줍니다. 절하면 다 준다고 시험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시험입니다. 마귀의 말은 거짓말이죠.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마귀에게 절한다도 얻는 게 아니고, 마귀에게 속아서 종노릇 하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욕심을 내고 소유하려고 합니다. 소유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줄 압니다. 그러나 착각이죠. 소유 자체가 진정한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족할 때 진정한 만족이 있는 겁니다.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죄를 짓고 부정한 짓을 하면 오히려 마귀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로 인한 만족보다 갈등과 고통이 더 큽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이면 무엇이든 하지만 그 돈 때문에 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iii) 이생의 자랑(명예욕) - 세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 9절~11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웁니다.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받아줄 것이고, 백성들이 환호하게 될 거라고 시험합니다. 명예욕을 자극한 겁니다. 사실 메시야니까 빨리 대중들 앞에 유명해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유명해지려는 게 아니라 십자가 지러 오신 겁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인간을 구원하는 게 중요합니다. 인기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육신의 일만 해 주면 됩니다. 결국 이 시험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⑤ 시험을 이기는 법 : 성령충만

예수님은 이런 시험을 어떻게 이기고 승리하셨습니까? 시험은 누구나 다 받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사람이 있고,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이깁니까? 예수님의 모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절(상).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시험을 이깁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다스림, 지배를 받는 상태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하면 번번이 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욕망으로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구체적으로 성령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i) 승리의 확신 -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다스림 속에서 승리를 확신하게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해야 됩니다. 요일3:8 “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승리했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시험은 뻔합니다. 승리자 예수님만 의지하면 충분히 이깁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맞서 대적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부디 이런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ii) 영적 경계태세 - 마귀는 언제 어디서 시험할지 모릅니다. 방학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항상 경계 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혹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도 영적으로 경계를 풀면 곤란합니다. 군대에서도 휴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군 휴양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보초가 있습니다. 경계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시 휴식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영적으로는 결코 해이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합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깨어 있습니까?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우리 영혼은 기도로 깨어 있는 겁니다.

다윗이 신앙의 거장인데 왜 실패했습니까? 왕이 된 후 방심해서 그랬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귀가 시험했고 여지없이 무너진 겁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인 사건이 그래서 벌어진 겁니다.

 

iii) 영적 무장 - 전쟁을 치르기 위해 무장하는 것처럼 우리도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 영적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엡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군인이 완전무장을 하듯 영적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 수비를 위한 것들이고, 오직 한 가지만 공격용 무기인데 바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도 마귀의 시험이 있을 때 예수님이 무엇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승리합니까?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 ”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 ”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 ” 번번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승리하십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말씀을 묵상하고 담아두면 마귀의 시험을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iv) 결단(타협 거절) - 마귀에게 패배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조금만 틈을 줘도 비집고 들어와서 시험합니다. 엡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 NIV) 마귀가 시험하도록 발판을 만들어 주면 안 됩니다. 작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넘어가면 그게 점점 자라서 나중에는 죄를 짓고 멸망하게 됩니다. 이번에 딱 한번만 ... 이게 문제입니다. 한번이 두 번, 두 번이 세 번, ...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망하게 됩니다. 약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타협하고 핑계 대는 것을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면 저절로 발사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성이 있고 연약하지만 마귀가 시험한다고 무조건 넘어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기 응해야 넘어지는 겁니다. 마귀가 아무리 시험해도 내가 응하지 않으면 절대 죄를 짓지 않고 실패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단해야 합니다. 단호하고 신속하게! 첫 판에 결단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 가장 쉽습니다. 한두 번 시험에 들고 범죄한 후에 나중에 만회하고 승리하려면 몇 배 더 어렵습니다. 성경 인물 중 두 사람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셉과 삼손의경우입니다.

 

요셉이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할 때의 일입니다. 착실해서 인정받아 가정 총무가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계속 유혹합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혈기왕성한 청년입니다. 잘만 하면 그 여자를 통해 큰 이득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도 인간인데 어떻게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결단합니다. 창39:9,10,12 “ ...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요셉은 결단함으로 영적으로 승리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고난을 당합니다.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넘치도록 보상해 주십니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겁니다. 그가 첫판에 결단함으로 비교적 쉽게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삼손은 어떻습니까? 그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용사입니다. 그런데 기생 들릴라에게 유혹을 받아 넘어집니다.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있다가 머리 깎이고 눈 뽑히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끌려가 광대처럼 놀림감이 됩니다. 그제야 회개한 삼손이 마지막 기도를 합니다. 삿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 ” 다행이죠.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승리했으니까. 하지만 아쉬움도 많습니다. 첫판에 시험을 이겼었더라면 그런 큰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심으로 우리를 대속하는 십자가를 질 수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호시탐탐 엿보고 시험하는 마귀를 대적함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부디 이런 확신을 갖고 우리 대장 예수님과 함께 승리의 기쁨과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어린양의 피/출12:1-13

2008-01-28 13:58:25 read : 109

 

 

 

제 2차 대전 막바지에 있었던 일입니다. 일단의 독일군들이 한 조그마한 마을을 급습하게 되었습니다. 집집을 돌면서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체포하고, 학살을 하곤 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유태인 가정이 그 마을 구석진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처 피할 틈이 없어서 구석방에 들어가서 떨고 있었습니다.

 

떨고 있는 아이들을 측은히 바라보던 아버지가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얘들아! 걱정하지 마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짐승중에 한 마리를 잡아서 그 피를 집 대문 앞과 마당에 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라.” 라고 했습니다. 독일군들이 마침 그 집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면서 “아니 피좀봐! 우리 동료들이 앞서서 이집을 수색하고 지나 갔나봐!” 그들은 그 피를 보고 그냥 그 집을 지나쳤다고 합니다. 유태인 가정은 그 위기 속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민족을 구원한 위대한 피의 능력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노역이 과중해지고 혹독한 시련을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그들이 부르짖고 신음할 때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하십니다. 모세가 가서 애굽의 왕인 바로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내어달라고 부탁할 때에 바로는 순순히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열 가지의 재앙을 내리게 하십니다. 나일강이 핏물로 변했습니다. 우박이 온 애굽 진영에 내려서 모든 농작물이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메뚜기 때가 급습을 합니다. 그리고 광명이 빛일 잃고 흑암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재앙이 계속되면서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장자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장자를 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수컷 어린양을 잡아서 그 어린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라.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너희 집은 피해갈 것이다.” 뛰어 넘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뛰어 넘다.’는 'Passover' 즉,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규례입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고 1년 된 수컷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유대인들의 가정은 그 장자가 보호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은 이 땅에 장차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피흘림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뿌림으로 그들은 이제 바로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고 자유한 백성으로서 광야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해방의 날이요 구속의 날입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유월절 규례를 생각해 보면서, 이 땅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깊은 비밀을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달력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절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여러분 왜 달력을 바꾸라고 했을까요? 그들이 유월절 규례를 지킴으로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한 그 달을 정월 1월로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기존에 쓰고 있는 환산법을 버리고 새로운 월력을 쓰라는 재정해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첫 달을 아빕월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포로 후에는 닛산월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절기를 오늘날 태양력으로 환산을 하면 3월이나 4월이 됩니다. 여러분 3,4월은 만물이 소생하고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바로 이 계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고통당하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월절을 통해서 그들에게 참 자유와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옴으로 우리가 바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전서 5장 10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흘려지는 그 순간, 아니 흘려지는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안에서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주간 제가 중국에 가서 조선족 처소교회의 지도자들과 중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훌륭한 분이 한분 있었습니다. 박용국 집사님이라는 분인데, 조선족 처소교회 지도자입니다. 중국은 목사님이 아주 귀합니다. 몇 천명이 모이는 교회도 목사가 한명밖에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골교회를 방문했더니 예배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어떤 할머니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생긴 이후로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한적은 처음입니다.” 대게 집사님들이 교회를 돌보고 설교를 하고 새벽기도를 인도합니다. 이 박 집사님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다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사가 되고 처소교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대해서 사정을 들어보니 그저 70,80 대 되는 노인들 한 20명 정도가 나오는 교회입니다. 재정도 없을뿐더러 처소교회 지도자들은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분은 김치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김치를 만들어서 조그만 시장에 나가서 그것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김치를 잘 사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겨우 조금씩 수입을 얻어서 생활을 합니다. 가끔 공안이 오면 벌금을 물기도 하고 쫓겨 다니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데 둘 다 대학생입니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도와주어서 근근이 생활을 합니다.

주위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아니 젊은 사람이 여기서 생활을 합니까? 한국에 가면 일 년에 몇 백만 원씩, 천만 원씩 벌어서 생활을 하면 되는데?” 그분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중국에도 젊은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도시로 가거나 한국으로 오거나 합니다. 그러나 이분은 하나님이 새운교회의 지도자로 변함없이 교회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을 볼 때 원래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의 보혈이 그의 마음속에 뿌려지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예수님의 보혈이 뿌려 질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 번째 유월절 규례는 흠 없는 수양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5절 까지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러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각 가족을 위해서 어린양을 준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양 한 마리에 열 명을 계산합니다. 우리 식구가 적으면 이웃집까지 계산해서 한 마리의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뿌립니다. 여기에 어린양은 흠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 흠 없는 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시고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바로 유월절의 어린양은 장차 이 땅에 우리를 구속할 어린양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 여러분과 저의 죄가 씻음 받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인은 죄인을 위해서 피를 흘릴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무죄하셔야 합니다.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오늘 유월절 규례는 흠 없는 어린양이 피흘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이 보호받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보호받고 구원받을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유월절 규례는 유월절 어린양은 나흘 동안 준비되도록 했습니다.

 

오늘 12장 6절에 보면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라고 했습니다. 나흘 동안 아빕월 10일부터 14일까지 기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14일 되는 날에 양을 잡아서 유월절 규례를 지키게 했습니다. 왜 나흘이라는 기간을 두었을까요? 주석가마다 의미가 다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가 나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이 준비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주석가는 이런 해석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양이 왜 죽어야 하는지 되새기고 묵상하는데 나흘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집에 기르는 양중에 흠없는 1년된 수컷 한 마리를 마당에 나흘 동안 묶어 두었을 것입니다. 이 양을 보고 그 집 장자 되는 소년이 물었을 것입니다. “아빠 왜 이 양을 여기에 묶어 두었지요?” “얘야! 이제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시는데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거야! 물설주가 뭔지 알지? 대문이 있으면 그 대문을 받치는 기둥 있지 그 기둥에 이 피를 발라야 된다. 그래야 우리 가족이 보호를 받고 네가 생명을 보호 받을 수 있단다.” 아마 어린 소년은 그 설명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양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착한 양아! 너는 우리집에서 제일 잘생긴 양이고 흠도 하나도 없지! 너는 나 때문에 죽어야 하는 구나!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네가 대신 죽겠구나!” 이 아이는 양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죽어야 할 애굽의 장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우리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으면서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에게 사망을 주었습니다. 인간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합니다. 바로 어린양 예수께서 유월절의 희생이 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순절에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대신 달리고 우리가 치러야 할 십자가를 대신 치르신 예수님을 봐라 보는 계절이 사순절입니다.

 

네 번째로 이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한번 읽겠습니다.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여러분 대문을 달수 있는 두 개의 기둥이 좌우 설주입니다. 그리고 기둥을 지탱하는 대들보가 인방입니다. 양을 잡아서 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다 발랐습니다. 이것은 인류를 죄와 사망가운데서 구속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 2절에 보면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이 좌우 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를 때 애굽인들은 그들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상한 행들을 하고 미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복음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이천년 전에 죽은 예수의 피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내가 예수가 죽은 것을 봤나? 나는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라고 그렇게 비웃을 것입니다. 당시 애굽인들도 그렇게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밤에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을 때 유대인들의 장자들만이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능력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의 보혈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죄를 그 분이 십자가에서 대신 해결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피가 내 죄를 씻어냈습니다. 그분의 피가 내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분의 피가 나를 보든 환란에서 건져낸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 어떤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이제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데 아이가 어립니다. 가끔 신문에 보면 온 가족이 다 차를 타고 가다가 아이만 살고 부모가 다 죽어서 이 아이가 고아원에 갈 신세가 되었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신혼부부는 생각했습니다. “여보 우리가 내일 일은 모르잖아! 우리 이 아이를 위해서 보험을 들어두자!” 이 부부가 한 5억짜리 보험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불행하게도 이 부부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아이는 다행히 살고 부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아마 보험회사에서 그 아이를 양육할 양육자를 선정해서 그 사람에게 양육비를 대신 지급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학교 가는 비용, 등록금, 모든 생활비를 다 대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성인이 되면 남은 자금 한 3억정도 되는 돈을 넘겨줄 것입니다. 이 아이는 너무 어린 나이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변호사로부터 설명을 다 들은 후에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부모님이 나의 미래를 생각해서 보험을 들으셨군요!” 그리고 서명을 하고 3억을 타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젊은이가 “나는 그것을 보지도 못했고 믿지 못한다.”고 말을 한다면 그는 그 3억을 수령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이천년 전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시고 피흘리신 사실을 믿으실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의 백성됨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많은 공로를 쌓고, 업적을 쌓고, 구제를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들이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오늘 우리 성경 13절 말씀을 다시한번 읽습니다. “내가 애굽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주님은 무엇을 보실까요?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얼마나 훌륭하게 살았는지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 너희의 심령속에 어린양 예수의 피가 뿌려져있는가를 보실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던 그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배우든 배우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인생가운데 예수의 보혈이 뿌려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예수님의 보혈이 뿌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예수님의 피를 발랐던 것처럼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예수님의 피를 바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는 능력입니다. 피는 보호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를 바른 유대인의 가정마다 장자들이 보호함 받았듯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는 여러분의 모든 환란과 재난에서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는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피는 사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죄를 씻어 내는 능력이 이 보혈에 있습니다. 요한1서 1장 9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함이라.”고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습니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이 씻어 냅니다.

 

어떤 사병이 전쟁에 나갔다가 아주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이제 곧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긴 군목이 그를 찾아가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군목은 사정을 해서 그 사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내는 왜 나를 만나기를 거부하는가? 나는 자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고 싶은데” 사병은 말합니다. “군목님! 저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를 기록한다면 여기 흰 벽에 기록한다고 해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때 군복이 말합니다. “여보게 자내의 죄를 여기에 다 기록해보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네.” 그는 그 젊은이에게 이 보혈의 능력을 설명했고 그가 복음을 영접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임종을 맞이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종 목욕탕에 가면 문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용 그림, 뱀 그림, 호랑이 그림 이런 것을 등에다가 그립니다. 보기가 흉합니다. 그런 것을 하신 분들을 보면 조폭 세계에서 오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도시에서는 그런분들을 목욕탕에 출입을 못하게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바늘로 찍어서 그곳에 색깔 있는 것을 넣어서 그렇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우는 것은 더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 문신은 내가 보기 싫다고 해서 아무리 이태리타월로 밀어도,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죄의 흔적들은 우리에게 늘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죄는 아무리 씻어도 씻을 수가 없습니다.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만이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8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은 없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구속은 한번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속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12절에 보니까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만이 아니라 미래에 지은 죄까지도 다 용서하신 은혜를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농담도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그냥 너희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면 되는데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통 받게 하셨을까? 왜 그르셨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죄가 그만큼 중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의 보혈은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우리 육신의 질병까지도 치료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질병을 치료할 때 예수님의 보혈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사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과 우리 예수님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잡을 때는 뼈를 꺾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때 뼈를 꺾기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십자가에 죄인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반듯이 뼈를 꺾는데 예수님은 뼈를 꺾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가족, 장자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유월절에 어린양과 어린양이신 예수님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은 희생물을 드린 가족의 숫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유월절 어린양은 유월절 절기가 되면 그 가족을 위해서 양을 잡아서 피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주님이 흘리신 그 보혈의 비밀을 깊이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혈의 능력아래 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등산가가 알프스 등산을 그렇게 소망했다고 합니다. 그는 번번이 실패를 했습니다. 한번은 이태리에서 온 등반가들의 안내를 받아서 자기가 원하는 알프스 산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려오는 하산길입니다. 등산은 일반적으로 올라 갈 때보다 내려올 때에 더 많이 사고가 난다고 합니다. 내려오는 상황중에 한 등반대원이 발을 잘못 디뎌서 줄을 놓치게 됩니다. 그가 아래에 있는 사람 등에 떨어지고, 그것을 보고 놀라서 두 사람이 서로 겹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네 사람이 대롱대롱 로프 하나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구조해 줄 테니 조심히 기다리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들이 잡았던 로프가 힘없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천피트의 계곡 밑으로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이 등반가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줄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줄에는 대용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잡은 로프가 왜 끊어졌는지 상황을 조사해 보니 알프스 산에서 사용하는 붉은 색의 규격 줄을 사용해야 하는데 규격 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붉은 보혈의 줄을 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승들이 여리고를 점령할 때 가나안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의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내립니다. 그 줄을 내린 집은 보호를 받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많은 줄이 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붉은 줄을 잡는 사람이 보호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그 보혈의 줄을 잡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도의 줄을 잡아야 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새벽기도에 기도의 줄을 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보혈에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보혈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강같이 흐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과 영광 /마17:1-8

2008-01-27 18:41:07 read : 103

 

 

예수님은 요단강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 메시야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주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목격하자 사람들은 기다리고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제국의 압제로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정말 꿈같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약 유명인사가 됩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환호를 합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은 덩달아 신바람이 났을 겁니다. 마치 벼슬이라도 한 것은 기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공생애가 2년쯤 경과한 때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 산은 아마 헤르몬 산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신기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가리켜 흔히 ‘변화산 사건’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우선 그 배경이 중요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냐 하는 겁니다. 1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여기서 ‘엿새 후’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언제부터 엿새인가? 따져봐야 합니다. 앞에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죠? 예수님께서 처음 십자가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까지는 여러 말씀을 하시면서도 유독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는 함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십자가 이야기를 꺼내신 겁니다. 제자들로서는 마치 찬 물을 끼얹은 것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시쳇말로 하면 김이 팍 샜습니다.

 

제자들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항의하는 장면이 마16:21이하에 나옵니다. 마16:21~2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 여기서 ‘간한다’는 말은 ‘책망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의하다 못해 책망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라도 되실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러면 자기들도 한 자리씩 할 것이고 ... 이런 저런 꿈에 부풀어 있는데 엉뚱하게 수치스러운 십자가 사형 틀에 못 박혀 죽는다니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인류를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영적 메시야로 오신 겁니다. 예수님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말은 ‘방해거리’라는 뜻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본문의 사건이 있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전혀 딴 생각을 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지 설명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변화 산의 예수님은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바로 그게 십자가를 지는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게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그냥 영광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과함으로 얻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영광 없는 고난’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헛고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 없는 영광’을 원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한심한 망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헛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신앙의 진수를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변화산 정상 : 하나님 나라의 영광

 

본문의 변화산 사건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천국 영광의 예고편’입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이미 천국에 관한 말씀을 들었지만 막연해 했습니다. 관심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세상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변화 산 사건을 통해 “우리가 장차 누릴 천국의 영광이 이런 것이다!” 이렇게 보여주십니다.

 

① 예수님의 영광 - 메시아의 영광

 

먼저 천국의 중심인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2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화되는데, 너무 신기합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납니다.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막9:3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빨래를 잘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정도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속으로부터 발산되어 옷까지 변화된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대표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갑자기 구름이 몰려옵니다. 5절.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현상인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것은 마치 요단강 세례 시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던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신 후 아마 제자들은 헷갈리기 시작했을 겁니다. “메시야라면 화려하고 멋있는 왕이 되어야 하는데, 십자가에 죽다니 ... 말이 안돼! 이건 뭔가 이상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당신이 분명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확증시켜 주셨고, 동시에 십자가 고난이 하나님의 뜻임을 주지시킨 겁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6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 앞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눈을 들어보니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8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 하더라” 예수님과 대화하던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져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만 남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세나 일리야가 대단한 인물들이지만 예수님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그 진리를 각인시켜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비록 십자가 못 박혀 죽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영광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부활입니다. 승천입니다. 천국의 영광입니다. 그런 파노라마가 준비되어 있기에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실패가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요 영광입니다.

 

② 성도의 영광 - 영생복락과 부활의 영광

 

예수님이 변화되시는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는데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들의 구약 대표 인물로 성도들을 대표하는 겁니다. 3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그러면 그들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샘플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셨을 겁니다.

“내가 왜 십자가를 지는 줄 아느냐? 천국에는 죄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야. 그래서 너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 흘려 죽는 거야! 너희들이 십자가를 믿으면 이런 영광을 누린단 말이다.”

 

i) 영생복락(永生福樂)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그들이 결코 죽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린다는 겁니다. 성도들도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 아무리 좋은 데가 많고 좋은 것이 많다고 하지만 천국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는 변화산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밧모섬에서 천국 영광을 계시로 보았습니다. 그 광경은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별 수 없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여러분! 천국은 아무리 상상해도 그 이상입니다. 어떤 말로 표현해도 그 이상입니다. 그저 성경 말씀을 읽고 그 정도로 상상할 뿐입니다. 그곳이 바로 성도들의 본향입니다.

 

ii) 부활의 영광

더 나아가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은 그런 사실에 대한 실증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부활에 관해 여러 가지로 말씀합니다. 빌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고전15:42~45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의 몸은 이렇게 영광스런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의 모습을 보고 어땠을까요? 한 마디로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4절.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여러분, 얼마나 좋았으면 베드로가 이랬을까요? 아무 생각이 없고, 그저 그 영광스런 가운데 오래 오래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영광을 본 사람은 이렇게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가 289장의 작사자 가브리엘의 노래입니다.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 아무쪼록 이 찬송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변화산 아래 : 영광을 위한 고난

 

① 예수님의 십자가 - 대속의 죽음

 

예수님은 이런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그래서 십자가를 지셔야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병행 구절인 눅9:31 보면 ... 눅9:31 “ ...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별세하실 것은 곧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그렇게 추앙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예수님과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려준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 수치의 십자가지만 달게 지시는 겁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로 값없이 구원 받았다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은 값이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값비싼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대가입니다. 베드로처럼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을 오해하는 게 아니라 그 은혜에 감격 감사해야 합니다.

 

② 성도의 십자가 - 자기 십자가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면 그분의 뒤를 좇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천국의 영광을 본 자들은 그것을 사모하기에 어떻게 살아야 마땅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모두 이기적이고 육신적입니다. 그 생각을 포기하고 버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말합니까? 당시 십자가 사형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 지셨으니 이제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의(義)를 위한 고난’을 자원하라는 겁니다.

오늘날 시대가 안일을 추구 하다 보니까 우리 성도들도 세류에 휩쓸려 신앙생활을 대충 편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의 안일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겁니다.

 

옛날 우리나라가 못 살 때 설탕이 부족해서 사카린을 먹었습니다. 사카린은 인공감미료인데, 발암물질이 함유되어 있어서 세계보건기구에서 사용 제한을 권고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는 그 사실도 몰랐고, 없어서 못 먹던 시대라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설탕도 먹어보고 자연산 고급 꿀을 먹어보니까 더 이상 사카린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계속해서 사카린을 먹으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겁니까? 그런데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해서인지 여전히 세상의 헛된 것들을 보고 입맛을 다십니다. 육신에 속한 ‘사카린 신앙’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영광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영광을 본 사람으로서 세상의 하찮은 것들에 빠지면 곤란합니다. 세상에 살되 천국의 영광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의 십자가를 달게 지는 겁니다.

 

i)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고난 - 이 믿음은 우리를 천국으로 안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도 조롱도 감수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혹시 신앙 때문에 손해 볼 일이 있다면 기꺼이 보라는 겁니다. 세상 눈치 보느라 십자가 신앙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우상에 고개 숙이면 안 됩니다. 세상의 죄악과 타협하면 안 됩니다.

 

ii) 계명을 지키기 위한 고난 - 우리는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그 말씀 계명을 지키느라 손해 볼 것 같습니까? 손해 보라는 겁니다. 남들이 다 해도 주님이 원치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은 안 해도 주님이 원하면 해야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주일을 지키고, 깨끗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 죄악 세상에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만 그래도 지켜야 됩니다. 그게 자기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iii) 사명을 지키기 위한 고난 - 가장 고상한 것은 사명을 위한 고난을 자청하는 겁니다. 복음을 증거하느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느라 수고해야 합니다. 헌신해야 됩니다.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 축복만 구하는 신앙은 사절입니다. 영광만 구하는 신앙은 사절입니다. 십자가 믿는 신앙이 중요하지만, 십자가 지는 신앙은 그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③ 영광을 위한 고난 - 크고 영원한 영광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신앙은 왜 아름답고 귀합니까? 그 고난은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영광이 따라옵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헬라어로 λογιξομαι(로기조마이)이고, 영어성경에는 consider (NIV)로 번역되어 있는데 ‘계산하다’ ‘목록을 작성하다’ 등의 뜻입니다. 한 마디로 수지타산이 맞는다는 말입니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가장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또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육신의 축복을 많이 받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에 자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고귀한 인생이 됩니다. 미래의 더 큰 영광이 있습니다.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卿(Sir Edmund Hillary, 1919 ~ )의 이야기를 잠시 나눕니다. 그는 산악인이요 탐험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1953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했습니다. 현재 88세지만 두어 달 전 신문을 보니까 남극을 탐험할 정도로 노익장을 자랑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외적인 성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다른 겁니다. 그는 네팔의 세르파들과 그 자녀들을 위해 사랑의 헌신을 하는 분입니다. 복지재단을 만들어 학교, 병원을 지어주고 ... 그의 인생의 정상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바로 이겁니다. 사랑으로 헌신하는 삶 그것이 인생의 정상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인생의 정상에 올라가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죄 가운데 살고,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 가운데 사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 몫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스펄전 목사의 말을 마음속에 새겨 봅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구원도 영생도 부활도 없고, 천국의 영광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요1:29-30

2008-01-27 18:40:14 read : 91

 

 

유대 광야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그가 먹는 것은 메뚜기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외쳤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면서 그는, 요단강에서, 그에게 나온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부근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요한’인데, 그 앞에 ‘세례자’라는 호칭이 붙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요? 엘리야요?” “아니요.” “당신은 예언자요?” “아니요.”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합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언제가 주님께서 오시는데, 그 오시는 주님 앞서서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라고 스스로를 밝힙니다. 마치, 옛날 임금들이 행차하면, 그 앞에 서서 “쉬잇! 물럿거라! 상감마마 행차이시다!” 하고 소리치는 사람의 바로 그 소리 같은 이가 자신이라는 겁니다.

 

세례자 요한.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부터 활동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이미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쩌면 자기 나름대로 세력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 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소”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 대해 기분 나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요단 강 건너편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데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제자들이 와서 이야기 할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요 11: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 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 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요11:9-10)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말라기 3:1의 말씀을 인용하신 겁니다.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인데,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 11:14)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어서 나선 특이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 가운데 이 땅에 보내신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미리 알려서 사람들을 준비하려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보다 앞서서 이 땅에 와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일꾼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그는 그리스도보다 먼저 와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였습니다.

 

그 세례자 요한이 어느 날, 자기에게 오는 예수님을 보고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입니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요 1:29-31)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또 말합니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 하였습니다.”(요 1:32-34)

세례자 요한,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예수, 그분이 곧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 하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구원자 이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이 말들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이 어디 어울리기나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된다는 겁니까?

 

출애굽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에 들어가 내 백성을 인도하여 내라”고 하셨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앞에 선 모세는 아홉 가지의 재앙을 바로 앞에서 나타내었지만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내기를 거절합니다. 끝내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시기로 하십니다. 임금 자리에 앉아 있는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맷돌질 하는 몸종의 맏아들과 모든 짐승의 맏배가 다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달 열흘날 각 가문에 어린양 한 마리씩 곧 한 가족에 한 마리씩 어린양을 마련하도록 하여라.”(출 12;3) “너희가 마련할 짐승은 흠이 없는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골라라.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 나흗날까지 두었다가, 해 질 무렵에 모든 이스라엘 회중에 모여서 잡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 피는 받아다가, 잡은 양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야 한다.”(출 12:5-7) “그날 밤에 내가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은 모두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신을 벌하겠다. 나는 주다. 문틀에 피를 발랐으면, 그것은 너희가 살고 있는 집의 표적이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피를 보고 내가 너희를 치지 않고 넘어갈 터이니, 너희는 재앙을 피하여 살아남을 것이다.”(출 12:12-13)

 

“한 밤중에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치셨다. 임금 자리에 앉은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감옥에 있는 표로의 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치시니, 바로와 그의 신하와 백성이 그날 한 밤중에 모두 깨어났다. 이집트에 큰 통곡소리가 났는데 초상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한 집도 없었다.”(출 12:29-30)

 

그러나 어린양이나 염소를 준비하여 그 피를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집은 주님께서 그냥 지나가셨습니다. 그 집안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다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린양이나 염소의 죽음이 그 집안의 사람들을 살린 겁니다. 어린양이나 염소의 피가 그 집안의 사람들을 살린 겁니다. 어린양은 피 흘림이 곧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겁니다.

 

레위기 16장. 유대 달력으로 7월 10일 있는 대 속 죄일.

아론의 두 아들이 다른 불을 가지고 분향하다가 죽는 일이 있는 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속죄소 앞에는 아무 때나 출입할 수 없는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만 출입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때는 대제사장이 속 죄 제사를 드려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고, 정해진 규례와 규정된 예복을 입고서만 지성소에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자신과 자신의 자손을 위해 수송아지 속죄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 제물로 준비 합니다. 그리고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죄를 고백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물인 염소를 위해 번제단 북편에서 제비를 뽑습니다. 그 중에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그리고 또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는 제비에 뽑혔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드려진 염소는 붉은 줄로 그 목에 매서 표시했는데 이 염소는 백성들이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재물이었습니다. “아사셀을 위하여” 드려진 염소는 붉은 줄을 그 염소의 두 뿔에 매어서 표시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론은 백성이 속죄 제물로 바친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수소의 피를 뿌릴 때와 마찬가지로, 덮개 너머와 덮개 앞에 뿌려야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성소를 성결하게 하여야 한다.”(레위기 16:15-16)

 

“이렇게 하여 아론은 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성결하게 하는 예식을 마치게 된다. 다음에 아론은 살려 둔 숫염소를 끌고 와서, 살아있는 그 숫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를 온갖 악행과 온갖 반역 행위와 온갖 죄를 다 자백 하고 나서, 그 모든 죄를 그 숫염소의 머리에 씌운다. 그런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그 숫염소를 빈들로 내보내야 한다. 그 숫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갖 죄를 짊어지고 황무지로 나간다. 이렇게 아론은 그 숫염소를 빈들로 내보낸다.”(레위기 16:20-22)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죽은 숫염소.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빈들로 나가 결국 죽고 마는 숫염소. 이 두 마리의 염소들은 이스라엘이 1년간 지은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이 두 염소는 인류의 죄를 지고 성문 밖으로 나가 나무 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던 겁니다.

 

레위기에는 번제, 화목 제사, 속죄제 등 제사를 이야기합니다. 곡식제물을 드릴 때도 있지만 거의 짐승을 제물로 드립니다. 이때 짐승은 제물로 잡습니다. 그 살과 내장은 제사 방법 곧 무슨 제사냐에 따라 달리 처리 합니다. 그러나 그 피는 반드시 제단 둘레에 뿌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레위기 17:11, “생물의 생명이 바로 그 피 속에 있기 때문이다. 피는 너희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물로 삼아 제단에 바치라고 너희에게 준 것이다. 피가 바로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를 속하는 것이다.” 레위기 17:14, “피는 곧 모든 생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피는 곧 생명을 의미 합니다. 그렇기에 피를 제단 뿔에 바르거나, 번제단 밑바닥에 쏟는 것은 곧 생명 드림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짐승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그 짐승을 드리는 이가 죄에 대해서 용서 곧 죽을 생명이 살아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린양의 의미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으로 그 피 흘림으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으로 그 피 흘림으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11-1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일어난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과하여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해져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거든,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10:19-22,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생명드림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속량의 제물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희생의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그 몸을 찢으시고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청산하시고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에베소서 1:7, “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요한계시록 1:5b-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셨습니다.

 

더욱이 구약의 짐승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은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닌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세상 죄를 대신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 그래서 온 인류에서 구원을 주신 예수. 바로 여러분과 저의 죄를 용서 받도록 하기 위해 그분은 피 흘리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고, 끝내 그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해서 여러분과 저는 죄 용서함 받고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 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한 번에 끝났다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9:25-26,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분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여러분 바치셔야 하셨다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아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하여 시대의 종말에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께서 또 대신 담당하여 피 흘려주시겠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에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 하시려고 피 흘리셨음을 믿는 겁니다. 예수께서 나를 구원 하시려고 생명 내어 주셨음을 믿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겁니다.

 

히브리서 10: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 하셨습니다.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이젠 더 이상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 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만 죄를 없애 주고 영원한 생명주십니다. 그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 10:10)

 

이제 우리는 거룩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 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 10:21-25)

 

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피를 흘리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죄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 받은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고백 하는 그 소망 곧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해야 하고 또한 그렇게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이제는 더욱 모이는 일에 힘 써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뒤에도 짐짓 죄를 짓고 있으면, 속죄의 제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다고 예상 할 수 있는 것은 무서운 심판과 반역자들을 삼킬 맹렬한 불 뿐입니다.”(히 10:26-27)

“그러므로 여러분의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 확신에는 큰 상이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히 10:35-3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믿음 안에 사십시오.

이제는 말씀대로 사십시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한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히 10:39)

 

 

 

 

 

수가성의 변화의 역사 /요4:5-30

2008-01-27 18:29:58 read : 65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이 시간에도 말씀을 통하여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어느새 3월이 되었습니다. 내일 모래가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입니다. 금년 봄은 유난히 빨리 왔습니다. 기상대의 발표에 의하면 예년에 비해 25일이나 빨리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 기온이 3월 하순경이나 4월 초의 기온을 기록함으로 100년 만에 찾아오는 이상기온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엘니뇨현상 때문이라고 합니다. 엘니뇨현상이란 태평양의 수온이 상승하는 현상인데 이로 인하여 지구촌 곳곳에서는 기상이변들이 일어나서 각종 천재지변들이 끝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철이 되었습니다. 벌서 고추 묘들을 키우느라고 밤잠을 설쳤다는 성도도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주일입니다. 사순절이란 지난 주일에 자세하게 말씀을 그려서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 40일간을 사순절이라고 하는데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인 지난 2월 21일부터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됐습니다.

 

사순절은 종려주일(4월1일), 고난주간을 거쳐 부활절(4월8일)로 이어집니다.

사순절은 대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겪은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한 절기로서 주일을 제외한 부활절 전 40일을 이릅니다. 사순절은 AD 325년 제정된 니케아교회법에서 결정됐습니다. 3세기 때까지는 부활절을 앞두고 보통 2,3일 금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때를 계기로 바뀌었습니다.

 

40이란 수는 예수님의 40일 광야기도, 모세의 시내산 40일 금식기도,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 예수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올해는 평양부흥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로써 회개와 각성을 통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고 목회자들은 말합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는’(마11:21) 심정으로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사순절 기간에 특별 새벽기도회나 금식기도회를 진행해 왔습니다. 신약성경을 일독하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그밖에 복지시설 방문이나 음악회 등 의미 있는 시간도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른바 ‘문화 금식’을 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익숙한 것을 끊고, 고난에 참여하고 있으며, TV 시청하지 않기, 장기기증, 나눔 실천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해외 교회들도 사순절 기간에 다양한 행사를 갖습니다.

 

영국은 특별 기도회, 금식, 성경공부 등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실제로 체험합니다. 교회학교 학생들은 일정기간 좋아하는 초콜릿을 먹지 않거나, TV를 시청하지 않습니다.

독일은 교회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요한의 수난곡’ 등 칸타타가 공연됩니다.

한국 교회는 사순절을 맞아 교단별 묵상집을 펴내 성도들이 말씀 속에서 사순절을 보내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역사 가운데 나타난 사순절을 지키는 방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먼발치에서 구경꾼의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가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께서 당하신 고난의 길에 함께 동참한다는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 가셔서 하신 일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수가성의 변화의 역사」오늘 설교제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셔서 수가라고 하는 한 마을을 구원하신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을 사마리아 수가 마을의 어구에 있는 한 우물가로 인도하겠습니다.

 

사마리아라고 하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슬픈 역사와 사연을 간직한 곳입니다. 때는 기원전 721년 앗수르 나라가 북 왕국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단일민족인 이스라엘을 혼혈 민족을 만들기 위하여 27,290명을 강제로 앗수르 나라로 끌어갔고 또 앗수르 나라에서 약3만 명의 앗수르 사람을 이스라엘 나라 사마리아에 이주시켜서 혼혈 민족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마리아는 그 후 남북한이 통일이 되었어도 동족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버림받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보면 외면을 하고 이스라엘의 남부 예루살렘 지역에서 북부 갈릴리 지역으로 갈려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 보기 싫어서 동쪽으로 돌아서 요단강을 건너 북으로 올라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 갈릴리로 갔습니다. 3,4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10여일 씩 걸려서 갔습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상종하지 않고 자신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자구책을 강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사마리아 지역을 찾아가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고 버림받은 사마리아를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잘 나타내 주고 있고 주님은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만남은 사마리아 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고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갔던 살몬과 그므엘은 라합이라는 여인을 만나서 여리고성 함락을 성공할 수가 있었던 것처럼 수가 마을뿐만이 아니라 전 사마리아가 이 여인 때문에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버림받고 소외당한 곳의 한 여인이 주님을 만남으로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 소망이 생겼고 멸망 가운데서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마리아 수가성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도 역사를 변화시키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에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누가 이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러분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러면 수가 마을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수가성 앞 우물가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은 누구입니까?

 

(1) 이 연인은 부도덕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는 여자가 아니고 남의 남편과 사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남의 눈을 의식해서 남들이 물 긷는 저녁 서늘한 때가 아닌 한낮에 물을 긷게 되었습니다.

다 같이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102)

1.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자는

정오의 타는볕 마시며

목마름에 우는 빈물동이 이고

끝없는 미로를 갔오

채워도 족함이 없고 욕망의 그늘진 삶에

영혼을 스쳐갔던 다섯남편과

또 하나의 남편도 사랑은 아니었소

마셔도 갈한 목마름에 무너졌던 삶

우물가로 찾아오신 나사렛 예수를 만난후

이제는 방황을 마치고 영원의 길을 갑니다.

 

 

(2)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와 무시를 당하면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왜 같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서 남에게 무시와 멸시를 당해야 합니까? 이유는 그만큼 그의 생활과 행동이 남에게 무시 받을만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지난주일 우리 성도들은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로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밖에 버리어 밟힐 뿐이라는 말씀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불신자들에게 밟힙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에게 멸시나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3)이 여인은 향락 주의자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남의 가정을 파괴시키는 여자입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인데 이 여인이 바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사회악이요 기생충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산헤드린의 공회원이나 로마의 관료가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고,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 여인이 예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기다렸습니다. 마치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와 같이 예수님은 이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사마리아로 오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요구한 것은 다만 갈증을 면하기 위해서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생수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 여인은 물 한 그릇 대접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샘물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 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요구 사항은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더 풍성한 것, 더 훌륭한 것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에 사는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시고 또 떡을 좀 달라고 한 것은 앞으로 닥칠 3년 반 동안의 기근을 면케 해 주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 은둔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시켜 떡과 물을 날라다 먹이시던 하나님이 왜 갑자가 두로 지방으로 가라고 하셨겠습니까? 바로 사르밧에 살고 있는 한 가난한 과부를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일성수를 요구하시는 것도 더 큰 축복과 더 큰 풍성함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신 것도 “그리하면 황충을 금하며, 밭의 소산물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부어 주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술과, 재능과, 지혜와, 지식까지도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여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예> 베다니 마을의 한 사람은 나귀 한 마리를 정성껏 길렀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주님의 제자들이 와서 달라고 하니 기꺼이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데 무엇인들 드리지 못하겠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도 하나님이 ‘바쳐라’ 고 하시니 지체 없이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은 자손의 번성케 하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1) 그런데 수가성의 이 여인은 주님이 물을 달라고 할 때 물은 드리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9절 말씀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 여인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도 안 하드니 이제는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뒤틀린 이상 성격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나의 생각, 나의 신앙이 뒤틀리면 안 됩니다. 바른 생각, 바른 믿음, 바른 사상, 바른 선입관을 갖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축복을 내려주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러니까 이번에는 대답하기를 “이 물은 깊고 당신은 물 긷는 도구도 없는데 무슨 수로 이 물을 긷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떠먹지 왜 나에게 달라고 하십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파서 우리들이 지금까지 먹고살았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합니까? 얼마나 주님을 무시한 말입니까? 주님을 야곱과 비교를 하였습니다. 물길을 그릇도 없이 물을 긷느냐고 무시하였습니다.

 

(3) 세 번째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니까 이 여인은 다시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그 물을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 물 길러 여기 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 얼마나 이기주의요 자기중심적입니까? 우리 성도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다면 체면도, 염치도, 신앙도 다 버리고 욕심만 부리는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3. 주님은 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변명하기를 남편이 없다고 이제는 거짓말까지 합니다. 주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 오라” 고 하신 말씀은 그 여인의 가장 잘못된 부분,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이 있어서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먹고 숲속에 숨은 것과 같습니다. 이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지만 주님은 “네가 그렇게 말한 것이 옳다 다섯 명의 남자를 거쳐서 지금의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고 하는 네 말이 옳다” 고 하시니 그제서야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시군요” 하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합니다. 이 여인은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이와 같은 방탕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돈 많은 김 서방과도 살아보았고,

권력만 있으면 안 될 일이 없을 줄 알고 권력 있는 권 서방과도 살아 보았습니다.

지식이 있는 남자와 같이 살면 행복할 줄 알고 지식이 많은 지 서방과도 살아보았습니다.

명예만 있으면 될 줄 알고 명예가 높은 명 서방과도 살아보았습니다.

힘세고 체격 좋은 사람을 골라 강 서방과도 살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귀와 장수와 지혜를 얻어서 세상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모든 복을 누렸습니다. 거기다가 외국에서 가장 예쁜 여자들만 수입을 해 다가 일 천 비빈 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행복의 조건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1:2-3 말씀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6명 아니 10명을 갈아도 그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병이 났을 때에는 근본적인 치유를 해야 하듯이 이 여인도 근본적인 심령의 치료가 있어야 합니다. 심령이 변화되고, 생각이 변화되고, 생활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 무더운 여름날 덥다고, 갈증이 난다고 해서 아이스크림이나 빙과류를 먹으면 입에서는 달콤하고 시원한 것 같으나 갈증은 더 나는 법입니다.

어린아이가 공원에 엄마와 같이 놀러 왔다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그만 미아가 되었습니다. 미아보호소로 온 이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계속 울기만 합니다. 보호소 직원들이 사탕을 사다 주고 장난감을 주고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어도 이 아이는 계속 울기만 합니다. 우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빨리 엄마를 찾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 오라 고 하신 것도 이 여인의 부도덕한 생활을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기 위한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잘못된 생활을 고쳐주고 바로 잡아주고 치료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것을 치료받으려면 주님 앞에 내 놓아야 합니다. 병든 곳을 치료받으려면 환부를 의사 앞에 내 보여야 하듯이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죄악에 물든 우리의 심령을 주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고쳐 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이 여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눈이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을 야곱과 비교 하드니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메시야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우물가의 여인처럼(53)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4. 주님을 만난 이 여인은 마침내 변화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선지자시군요”

(요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요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 말씀 한 마디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로 달려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때는 한낮의 시간이라 모두가 뜨거운 햇빛을 피하여 오수(午睡)를 즐기는 시간이라서 동리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나와서 보십시오 나의 행한 모든 것을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사실상 자기의 지금까지 행한 일은 자랑스러운 일이 하나도 못됩니다. 부끄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낮잠을 자고 있던 동리 사람들이 나와서 ‘저 여자가 미쳤다’ 고 합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외칩니다.

39절 말씀에 보니까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버려진 땅, 외면당하고, 멸시 당한 사마리아의 가장 비천한 한 여인이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나니까 복음의 불이 당겨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이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생의 샘물을 소유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 수가성의 여인처럼 생수를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강물 같은 평화와 기쁨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다 같이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102)

2.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자는

인생의 무거운 짐지고

목마름에 지쳐 헤매이던 그때에

영원한 안식 찾았소

죄의짐 무거워지고 소망이 사라져갈 때

기쁨을 알게하신 영생의주님

그분만이 나의 참사랑이 되었다오

내영혼 속에 생명의강 넘쳐 흐르네

우물가로 찾아오신 나사렛 예수를 만난후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생명 바치오리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쓰레기장에서 장미꽃이 피고, 시궁창에서 연꽃이 피고, 가시덤불에서 백합화가 피어나듯이, 버려진 땅, 그리고 외면당하고, 멸시와 천대받는 곳, 사마리아!!

그곳에서도 또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사는 한 여인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만남의 역사는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만남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장 천대받고 멸시 당하는 여인일지라도 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그 개인이 구원받고 사마리아 온 성에 구원의 물결이 파도쳤습니다. 은혜의 물결이 충만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21:3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 시간에 예수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의 손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이루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지금도 예수님은 저 사마리아 수가성 마을 어귀의 우물가에서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내게 물을 좀 달라” 고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쓰신다면, 주님의 요구라면, 나의 재주, 나의 시간, 나의 지혜, 나의 물질, 나의 생명까지도 드리겠나이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아 멘>

GS 주여! 나의 정성 나의 생명(83)

주~여 나의 정성 나의 생명 드립니다.

이작은 나의 생명 나의정성 다해

주님만을 위하여서 살기원하오니

주여 잡아주소서 나를 잡으소서

주님만을 위하여 살게하소서

아 - 불같은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환난이와도 핍박이 와도

내 주만 위해 내가 살리라

주님께서 나의 가장 부끄러운 죄악을 내어놓으라고 하실 때에 죄를 고백하고, 사유함 받고, 기쁨과 은혜의 충만함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이와 같이 여러분 하나하나가 변화될 때 “내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메시아를 만났습니다”라고 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물결, 변화의 역사는 마치 수가성과 같이 우리 지역사회에도 강하게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이제는 여러분 하나하나가 ‘문제는 내게 있다’ 고 생각하고 수가성의 여인처럼 자신이 은혜 받고 변화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나 하나가 회개하지 않고 변화 받지 못할 때에 구원의 역사는 중단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변화되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요한 웨슬레와 같이,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나가서는 이 나라 이 민족을 변화시키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거기 너 있었는가/마27:27-44

2008-01-27 18:18:09 read : 82

 

8살 난 어린이를 유괴 살해한 파렴치범을 보며 지금 온 국민이 분노에 떨고 있습니다. 유괴살인 자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지만 아이를 유괴하자마자 산 채로 물에 던져 죽게 하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목소리를 이용해 마치 아이가 살아있는 듯 부모를 계속 협박한 것을 보면 정말 인면수심, 사람의 탈을 쓴 짐승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이 유괴범이 한 살 난 아이까지 가진 가장이며 돈도 잘 벌면서 유흥비로 탕진한 돈을 갚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모두는 도대체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영화제작소라는 단체에서 이런 설문조사를 했답니다. “관객이 선정한 영화사상 최고의 악당은 누구인가?“ 영화에서 악당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B급 영화는 주인공만 잘 생기고 멋지게 활약하면 되지만 완성도 높은 A급 영화를 만들려면 조연배우뿐 아니라 악역을 맡은 사람까지 연기가 빛나야 합니다. 악역이 정말 '저런 나쁜 놈' 소리 나올 정도로 연기를 해야 영화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화사상 가장 끔찍한 악역으로 인기 아닌 인기를 누린 악당은 누구일까 조사한 것인데 그 결과 쟁쟁한 악역들을 다 물리치고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온 한니발 렉터 박사가 1등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안소니 홉킨스라는 배우의 악역 연기가 정말 빛났지요. 2위는 영화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 3위는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악역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성경에서 최고의 악역은 누구인가?“ 묻는다면 1, 2, 3등은 누가 할 것 같습니까? 저는 1등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 2등은 히브리인들을 핍박한 애굽의 바로 임금, 3등은 여성 중에는 유일하게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차지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순위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이 고백되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1500년 이상 세계 수십억의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이 구절을 외웁니다. 그러니 빌라도가 지옥에 가면 만날 1순위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디 빌라도뿐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에 보면 참 여러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주도하거나 돕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죄인들이요 기독교 사상 최고의 악역을 감당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빌라도 총독과,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들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십자가 주변에 서서 주님을 조롱한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사주하고 사실상 이 일을 주도한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사형을 적극 지원한 헤롯 임금도 빠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악역을 담당하게 된 바라바(예수님 대신 풀려난 죄인이지요)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도 있습니다. 설교 첫머리에 악역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악역이 나쁜 역할 제대로 못 해주면 영화도 제대로 완성되지 못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여러 명의 악역을 쓰고 계십니다. 물론 가룟 유다가 악역 중에 주연 역할을 맡았습니다. 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도 조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세 주에 걸쳐 가룟 유다와 제자들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악역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라도, 로마 군병, 유대인,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 헤롯, 바라바, 두 강도들입니다. 사순절 기간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특별히 이 악역들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하는데 왜 하필 십자가 주변의 악역들이냐? 좋은 사람들도 많은데... 여러분, 이 악역들이 결코 잘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정말 나쁜 인간들'이구나 하고 분노하며 치를 떨라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회개에 대한 시리즈를 계속 설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 선 주역들을 살펴보면서 남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죄인 아닌가? 나는 오늘 또 다시 예수님을 못 박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바로 그 십자가 현장에 서서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조롱한 죄인 아닌가?“를 돌아보려는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 오늘은 십자가 주변의 악역 중 두 사람만 다루지요. 제일 먼저 살펴볼 악역이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때론 빌라도가 참 억울하겠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아니, 아마 제일 억울해 할 사람은 빌라도 자신일 것입니다. 아마 빌라도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준다면 이런 항변을 할 지 모릅니다. “아니, 한 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라는 말이야. 당신이 그 때 유대 총독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냐고? 물론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은 다 아는 일이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상황인데 어떻게 바라바 대신 예수를 풀어줄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억울하다고 말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빌라도의 이런 항변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 준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대중의 요구와 위협 앞에서 얼마든지 꺾을 수 있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언제든지 악이나 죄와도 타협할 사람입니다. 본문 19절에 빌라도의 아내가 자기 꿈에 대해 전하면서 죄 없는 예수님을 그냥 두라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 빌라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경고하셨음에도 그는 악과 타협하고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빌라도는 본디 로마의 상류계급출신이 아니라 중류계급 출신 군인인데 부인 잘 만나서(빌라도의 부인은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의 세 번째 아내인 클라우디아의 사생아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라고 합니다) 귀족이 되고 유대의 총독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성공과 이익에 민감한 법입니다. 늘 성공과 출세를 따라 살았겠지요.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손해 볼 짓을 하지 않았겠지요. 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익숙했겠지요. 아마 이런 습성 때문에 오늘도 군중들을 만족시키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도 이 빌라도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무슨 똑똑한 사람인 양 생각합니다. 유연성 있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치켜세웁니다. 괜한 고집 부리다가 손해 보지 말고 세상의 흐름을 잘 따라가고 사람들의 요구에 적당하게 자신을 변신시키면서 살라고 말합니다.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들려준 하여가(何如歌)에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라고 말했듯이 그렇게 얽혀서 한 번 잘 살아보자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경고하셔도 무시하고 그 길로 갑니다. 오직 자기 성공과 이익을 위해 눈치를 보며 시류를 따르다가 그만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우리가 이 빌라도나 빌라도 같은 현실주의자, 타협주의자들을 보고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혹시 신앙적인 신념보다 현실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손해 안 보려면 얼마든지 불의한 현실과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적인 세계보다 육적인 이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 모습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빌라도 비난할 자격 없습니다. 나도 만수산 드렁칡처럼 세상과 벗 삼아 이리저리 얽혀 살면서 어떻게 빌라도를 비판합니까? 나도 대중의 비난과 따돌림이 무섭고, 그들의 요구가 부담스럽고, 그래서 손해 볼까 무서워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간다면 빌라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막 15:15에서는 분명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의 죄는 무리에게,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아닌,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나님을 희생시킨다면, 또한 나 자신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주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빌라도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정몽주처럼 오늘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신앙의 단심가(丹心歌)를 부를 줄 알아야 빌라도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 두 번째 십자가 주변의 악역은 바로 로마 군병들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군병들도 빌라도 이상으로 억울할지 모릅니다. 군병들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총독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요?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물론 예수님이 죄 없는 것 다 압니다. 하지만 위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제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저야말로 정말 억울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판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이 군병들 말이 맞습니다. 빌라도 총독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잔인하게 굴었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누가 잔인하게 하라고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몹시 잔인하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못 박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27절부터 보십시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부터 희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 그 앞에서 무릎 꿇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더니 다시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툭툭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요한복음) 모욕한 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끌고 갑니다. 또 35절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한 줌이라도 자기들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지는 모습입니다. 어떤 영화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망치로 못을 내려치는 이 군병들이 잔인하게 웃으면서 망치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장면이 안 나왔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을 조롱하며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이렇게 로마 군병들은 나쁜 놈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또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로마 군병보다 나은 사람이냐?“ 오늘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불의를 저지르지는 않습니까? 윗사람 명령이라 어쩔 수 없고, 부모님이 원하시니 어쩔 수 없고,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고, 세상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어서 한다고요? 변명이 안 됩니다. 군병들도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시키지도 않은 조롱을 하며 자기를 만족시키고, 어쩔 수 없이 사형시킨다면서 옷 한 벌이라도 얻으려고 제비를 뽑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실은 내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 위해 얼마든지 손해도 감수하겠다고 결심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 이익 포기하고, 꼭 하고 싶은 일이라도 주님 위해 안 하겠다고만 결심하면 가능합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오늘 나는 누구의 군병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세상 사람들입니까? 빌라도나 로마 같은 세상의 권력입니까? 아니면 마귀사탄의 군병 노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딤후 2:3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싫으면, 예수님의 군사 되기 싫고 고난도 받기 싫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세상의 종노릇 하던지, 세상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지, 마귀의 군사 노릇을 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군병입니까? 거기 너 있었는가? 제가 좋아하는 렘브란트(Rembrandt)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는데 그는 돈독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어서 성경에 나오는 장면을 많이 그렸고 그 중에도 십자가에 관한 작품을 참 많이 남겼습니다. 이 가운데 <십자가를 세우다>라는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십자가를 세우는 로마 병정들 사이에 이상하게도 베레모를 쓴 남자가 함께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를 세우고 있습니다. 참 안 어울리는 복장입니다만 이 사람은 바로 베레모를 쓴 화가,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바로 그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니, 그 현장에 서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이 로마병정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화가 자신의 어떤 설명도 붙어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병정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그림을 보는데 성지순례 갔을 때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본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이즈미르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서머나입니다. 이 서머나에는 순교자인 폴리캅 감독을 기념하여 세운 폴리캅 기념교회가 있고 그 안에 각종 벽화와 장식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유난히 페레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에 제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바로 폴리캅 감독의 화형장면을 그린 그림인데 칼을 들고 폴리캅을 화형 시키는 무리들 뒤에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서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손이 밧줄로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그림을 그린 페레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순간 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페레 역시 순교자 폴리캅을 생각하며 내가 그 화형 장소에 서 있었다고 자기 그림을 통해 고백한 것입니다. 아니, 페레는 한 술 더 떠서 아예 내가 그 순교자 폴리캅과 함께 화형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으로 묘사하고, 페레는 자신을 순교자와 함께 화형 당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내 자신도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들 중에 나도 들어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조롱하던 사람이 바로 나며,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병정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 136장 가사처럼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하고 물을 때 “네, 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병정으로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저도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하고 인정할 때 진정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기쁨과 축복/벧전4:12

2008-01-27 18:14:07 read : 128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 중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 기간 중 네 번째 주일을 맞으면서 고난과 관련된 말씀을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중심은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도 싫어하고 죽음도 싫어합니다. 특히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현세주의에 빠진 오늘 우리의 세대는 고난도 불편도 수고도 희생도 모두 싫어합니다. 사실 은혜 받기 전에는 수제자 베드로도 고난과 죽음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16장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말씀했을 때 베드로는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가 마땅히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할 것을 강조해서 말씀했고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와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1-24).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17:22,23). 그러면 이제부터 고난과 관련된 말씀을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고난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첫째, 성경은 고난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은 고난과 죽음을 싫어하던 베드로 자신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은혜 받은 다음에는 시험과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사도 바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Even in tribulations we rejoice. 저는 1988년 4월 극심한 가뭄으로 모두가 죽어가는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를 방문하고 도움과 격려의 손길을 폈는데 그때 도움의 손길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우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현지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롬5:3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이후부터 롬5:3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Even in tribulations we rejoice.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사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기뻐하라는 말씀을 제일 먼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그것이 복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핍박을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고난을 싫어하며 십자가를 등지고 도망갔었지만 나중에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과 능욕을 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사도 바울은 나중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능욕을 기뻐한다고 고백하면서 고난을 예찬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고후12:1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제가 가장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님도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 고난을 귀중히 여기면서 고난을 예찬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1986년 4월 22일 합동신학교 학생들에게 고난의 귀중성과 필수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사람과 기도의 사람과 고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생을 죽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은 저주다 고생은 싫다 고생은 꿈에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과 고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고생을 가지고 개조되고 새로워지고 눈의 밝음을 얻으며 귀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고난관은 세상 사람의 고난관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거리가 멀고 다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사실 평생토록 고생과 수고로 일관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은 환경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지만 박 목사님 스스로 고생과 고난과 수고의 길을 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편하게 삽시다"를 교회의 표어로 삼으신 이동휘 목사님도 그 길을 걸으셨고 "별세"의 삶을 주창하셨던 이중표 목사님도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거의 모두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면서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을 고난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성경은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참예하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소유하는데 있지 않고 참예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소유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소유에 관심이 많지만 이타적인 사람은 관계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에 참예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평안과 기쁨과 치유에 참예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입니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면서 고통을 당할 때 자식의 아픔과 고통에 참예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지성이 아빠는 지성이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지성이에게 주는 아픔과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죄 값으로 당해야만 하는 지옥의 고통과 저주를 면해주시기 위해서 우리들이 당하여야 할 지옥의 고통과 저주에 참예하셨고 지옥의 고통과 저주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지니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은 우리가, 주님께서 아직도 당하셔야만 하는 고통에 조금이라도 참예할 수가 있다면, 그래서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이요 영광이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고난의 신비를 바라보면서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고난에 참예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기쁨이고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기쁨이고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기쁨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주님을 위해서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천국에서 받을 상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경은 고난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고 그리고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고난이 우리 자신을 시련하기 위해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순수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5:3,4).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 고난은 우리를 시련하고 우리를 단련하고 우리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에게 고난과 환난이 필요했다면 우리들에게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필요합니다. 고난은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소망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입니다. 저의 아들 철원이는 극심한 고통과 아픔을 당하므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순수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예수님과 천국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바라보면서 주님과 천국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우리교회 초기의 조축국씨는 그가 당한 척추암의 고난과 고통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죄사함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전도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찬송을 부르며 담임 목사의 기도를 받은 후 고요히 천국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사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 중 고난과 고통 없이 예수님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고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둥병 중풍병 소경 등의 고난을 통해서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죄인들로 하여금 두 손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또한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고 겸손하고 성숙하게 만듭니다. 안흥규 장로님이 몸에 고난과 고통을 지니므로 인격이 성숙하게 되었고 주님과 교회를 겸손하고 충성스럽게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몸을 찌르는 육체의 가시를 몸에 가지므로 더욱 더 겸손하게 되었고 더욱 더 충성스럽게 되었고 더욱 더 주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아직도 너무 뻣뻣한 사람은 고난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둘째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고 믿음에 굳게 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골1:24).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고후1:6).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황인범 군이 캄보디아에서 고난과 수고를 당하는 것은 캄보디아에서 사는 수많은 어린이들의 믿음의 성장과 사랑의 성장과 소망의 성장을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구원과 복음화를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유익을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통 사고로 죽음의 위험도 당합니다. 그런데 황인범 군은 자기가 그곳에서 고난과 환난을 당하다가 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설교도 아닙니다. 수고와 고난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여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방식은 설교나 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고난과 수고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 아펜셀라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 언더우드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조선의 구원과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 다음 셋째로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 아시아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후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5-7).

 

예수님은 주님 자신 때문에 받는 고난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고 천국에서 받을 상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5,26). 고난이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면 고난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준비하게 만듭니다. 안일과 평안은 지옥을 준비하게 하고 고난과 수고는 천국을 준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인 설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국이나 북한이나 모슬렘 지역에서 사는 지하 교회 성도들에게도 보다 진하게 다가가는 설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극도로 이기적이고 극도로 세속화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설교입니다. 성경 말씀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은 천지가 변해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귀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피하는 대신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방편으로 천국을 준비하는 방편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신비를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귀중성과 필요성을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세대가 무질서하고 방종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모두가 의인이 되어서 분노의 소리를 지르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고난을 모르는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불편과 수고를 싫어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고난의 귀중성과 필요성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처럼 욕을 먹고 매를 맞는 것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군대에 가서도 분을 참지 못하고 남을 죽이고 자기를 죽이는 불행한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고난의 귀중성과 필요성을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기쁨과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요8:25-29

2008-01-27 04:14:56 read : 102

 

세상 죄를 지고 오시는 어린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이분의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데 우리가 한번쯤 물어봐야 될 것 아닙니까? 당신 누구십니까? 자주 만나는 사람도 신분에 의심이 가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늘 예수께서 수난을 받으시러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신 중에 유대사람이 예수를 보고 묻습니다.

 

기적도 행하시고 좋은 말씀도 전해주시고 하늘의 권능으로 하늘나라 복음도 선포하셨는데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선포 하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릴 때에야 비로소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한다. 예수님에게 당신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는 나다. 이 말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원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다. 이렇게 말하신 분이 오늘 저를 보내시고 그분이 나한테 부탁한 말을 제가 전하고 그분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해서 승천할 때까지 나와 함께하시고 나는 그분의 명령에만 따라서 말을 전할뿐입니다. 말을 반복하면 나보고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나다’ 하신 분한테 물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직답을 피하시구 하나님한테 답을 미루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실 때 모세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홍해를 건너는 일까지 다 마치고 십계명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고 가나안까지는 못 들어갔지만 자기 후예인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입성까지 시킨 출애굽사건의 주인공이 모세입니다. 이쯤 되면 모세는 위대한 선지자 하나님의 사자인 것이 분명한데 모세한테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도 건너라 하는데 하나님이 기적은 보여주셨는데 저는 당신 얼굴도 본적이 없고 당신의 말씀만 들었고 당신의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당신 누구십니까? 이렇게 질문하기 미안해서, 내가 백성들보고 당신은 누구라고 전할까요? 이렇게 질문을 모세가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이렇게 전해라. 내가 누구냐 하면 ‘나는 나다’ 이 말만 전해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나다. 모세가 질문을 던졌을 당시에 이집트의 사회나 종교계, 사상계, 신앙계 다 합쳐서 이집트에는 신들의 수가 참 많았습니다. 신마다 다 이름이 있었습니다. 태양 신, 달 신, 무슨 신 해가지고 신의 이름이 참 많았습니다.

 

이름이 없는 신은 일단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단 이름이 부여되면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이 있고 이름 값 만큼이나 기적을 행해야 됐고 그래서 어떤 신이 제일 좋으냐? 기적을 많이 행하는 신이 믿을 만한 신이었습니다. 모세가 보기에 하나님은 이집트에 있던 모든 신들보다 훨씬 위대하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많은 백성을 홍해를 건너서 광야까지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다시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는 편하게 하나님 믿고 예수 믿습니다. 성경 말씀도 있지요 과거 역사도 있지요 모든 기록도 있지요 모세 당시는 기록도 없지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사건은 벌어졌는데 도대체 그분을 뭐라고 기록 할 수도 없고 설명 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 모세 심정은 답답했을 겁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이 누구시라고 제가 백성들한테 말할까요? 하나님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나는 나다. 이 말의 뜻은 모든 신들의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건물을 세우면 이름을 붙입니다. 사람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이름은 우리 인간들이 편리하다고 생각을 했든 존경하기 때문이든 우리가 붙이는 이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은 우리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모든 신들은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신들에 관한 개념이나 신들의 이야기, 신들이 갖고 있는 사상의 폭과 깊이와 넓이 모든 게 사실은 다 우리 인간이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사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오늘 여호와 하나님은 나는 나다. 나를 인간의 언어로 규정하지 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창조하기도하고 부수기도 하고 그런 신을 만들지 말라. 그래서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나다. 나는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나는 나다. 신은 신이다. 규정하지 말라. 믿기만 해라. 나하고 인간 사이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 나를 규정하지 마라. 아마 모세가 이 답변을 듣고 굉장히 당황했을 겁니다.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나는 나라는 말이. 그러면 당신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냥 개명 천지에 당신은 갑자기 우뢰를 내려서 기적이나 행하고 날보고 기적을 전하는 사신이나 되라는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중요한 선언을 하나 하십니다. 나는 나이므로 규정하지 말라. 그 말은 인간이 인간이면 됐지 왜 자꾸 신의 이름을 그대들의 필요에 따라서 규정하느냐. 진실로 그대들은 인간이기를 원한다. 나는 신으로 남기를 원한다. 그 대신에 신과 인간과 신과 세계의 관련을 내가 선포하마. 이름은 얘기하지 않은 채 백성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그대들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대들의 첫 조상이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조상. 그 다음에 조상 이름이 이삭입니다. 마지막 조상 이름이 야곱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 셋을 대면 이스라엘의 백성 이스라엘의 사고방식, 이스라엘의 이념, 이스라엘의 모든 체제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조상의 이름 속에 응축하여 표현을 합니다. 가서 이렇게 말해라. 나는 나다. 단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일러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어라.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선포하여라. 하나님은 규정 할 수 없지만 인간이 맘대로 조정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그대들이 만든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알려주어라. 이름을 묻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뭔가 하고 깨닫게 하여라. 이것이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 들으면서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구약성경에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신격화된 조상들의 하나님이신 분의 이름을 차마 부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호와 하나님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보기엔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느냐. 나는 나다. 한 말이 여호수와. 여호와 나는 나다. 이 뜻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이 아무 뜻이 없는 게 아니고 나는 나다. 그 뜻입니다. 이름을 부를 수가 없어서 히브리말로 그냥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다 이끄시고 섭리를 만드시는 주인이라는 뜻으로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주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 주님이라는 말이 아도나이 그렇습니다. 주님이란 말은 아도나이고 우리 조상들의 하늘이십니다. 이게 신약시대에 오면 아도나이 라는 주님이란 말을 뭐로 번역할까 하다가 희랍 말 중에 아도나이와 똑같은 말 중에 절대자이신 주님 우리 조상의 신이신 주님이 말을 키리어스란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희랍 말에 키리어스란 말이 주님 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키리에엘송 하고 자꾸 노래를 하는데요. 키리에라는 말은 주님이시여 하는 호격입니다. 키리어스란 말로 번역이 됐는데.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름을 물었지만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실존과 역사적 개입과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믿고 의지하고 우리는 그분을 그냥 주님 그러십시오.

 

우리 주가 되신 분. 그래서 우리가 지금 주님 하는 말과 하나님이라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럴 때는 우리의 주님. 이렇게 여러분 고백하시면 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조상이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아니 저 자신의 하나님 우리 가정의 하나님. 우리 모두의 하나님.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 주님이 오늘 우리한테 오셔서 하나님 복음을 전했더니 유대사람이 또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모세 때 한 얘기 못 들었느냐? 나는 나다. 그러나 그대들의 역사와 세상과 삶과 함께 한 그분이 나를 보내서 오늘 왔노라.

 

오늘 저희는 수난주일 중간에 서있습니다. 누가 수난을 받았냐하면 우리가 끌어내서 우리와 같이 수난 받기를 원하는 그분이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해도 관여 할 수 없는 그분. 나는 나라고 자기 존재를 과시하신 그분이 오늘 직접 아들을 통해서 수난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이 수난을 받으신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나는 나다. 너희는 너희고 나는 나다.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했으니 그대들의 죄 때문에 대신 지시기로 했으니 이 수난은 저의 수난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난은 하나님 자신의 수난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나는 상관이 없다면 그분은 나에게 주님이 아닙니다. 그냥 여호와라고 부르시던지 하나님이라고 부르시던지 신이라고 부르시던지 객관화해서 마음대로 부르십시오. 오늘부터 수난절에 동참하는 우리 심정 속에 당신이 제 인생의 목표요 당신이 제 인생의 처음이요 제 인생의 완전한 완성입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살겠습니다. 결단하면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외 기도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십시오. 그냥 그대라고 하십시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예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우시지요. 환란을 맛보시지요.

 

하나님이 우리 대신 당한 환란 속에 동참하면 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를 주십니다. 인내를 하나님과 함께 이겨내면 우리는 단련이 됩니다. 왜 그렇게 주시냐하면 그 분은 희망이라 이른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저희에게 환란도 인내력도 단련된 인격도 주십니다. 수난의 목적은 고난이 아닙니다. 수난은 부활의 열매를 잉태하기 위한 삶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우리에게 떠맡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감당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뭐해야 됩니까? 제가 책을 읽다가 고백록 같은 이야기 하나 전해드립니다. 소경이 돼서 고생하는 어린 소녀가 있었는데 누구도 눈먼 것 때문에 옆에 있어주지 못합니다. 자기 옆에 항상 있어주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이 여자가 사람들 앞에 고백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한테 눈을 주신다고 하면 눈뜨자마자 나와 항상 함께 있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세상이 좋아가지고 각막 기증을 받아서 눈을 뜨고 결혼할 남성을 봤습니다. 남성이 하는 얘기입니다. 네 약속대로 나와 함께 있어 주겠냐? 여성이 눈떠서 봤더니 자기와 항상 함께 있던 남자 친구가 역시 소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맘이 바뀌어서 결혼을 못해주겠다 그랬더니 소경된 남자가 울며 떠납니다. 내가 눈멀 때 그대를 돌봐 주었듯이 눈뜬 그대가 내 눈을 좀 돌봐 줄 수 있습니까? 하고 눈물 흘리며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우화 같기도 하고 있을 수 있는 얘기 같습니다.

 

우리가 눈멀 때 눈뜬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게 아니라 눈먼 우리를 눈먼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래야 동료가 되니까요. 그래서 우리 눈을 뜨게 했더니 우리가 눈을 본래 떴으나 우리 때문에 눈멀고 같이 동행해 준 하나님을 보고 당신은 싫다. 그런 배신의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롯 유다 역사는 이런 역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눈이 먼 게 아니라 눈먼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서 스스로 눈도 멀고 죄가 없으시지만 죄 된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서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시고 우리가 아플 때는 함께 아프시고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인데 우리가 먼저 낫고 보니 우리와 동행하는 하나님이 싫었습니다. 그런 역사 많이 있지 않습니까? 아주 작은 일상생활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맛있게 음식 드시지요. 음식점에 갔는데 음식이 맛없다고 불평할 때가 저도 있습니다. 불평하십니까? 그럴 때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입에 풀칠할 것도 없어서 매일 같이 굶어 죽는 사람이 이 땅에 수십억 인구가 됩니다. 맘대로 불평해보시지요. 아내와 남편이 사시면서 불평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부부싸움도 많이 하시지요.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배필이 없어서 누구라도 좋으니 배필 달라고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지요. 살기 지쳐서 자살도 합니다만 이렇게 살아도 힘들고 저렇게 살아도 힘들고 살기가 너무 지치다고 불평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너무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를 기르시면서 혹시 분노하십니까?

 

저도 많이 분노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임 때문에 자녀 하나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노력하는 그분들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집안에 들어가서 더럽다고 청소가 잘 안됐다고 신경질 부리시는 분계십니까? 그런 분계시면 길거리에서 집은 고사하고 집이 없어서 초막집에서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homeless 분들이 수없이 많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자동차를 몰고 예배도 오시고 회의도 가십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막히면 얼마나 불평이 많고 가슴이 뛰는지 불평을 많이 합니다. 제가 지금 마사이 신발을 신고 있는데요. 그럴 때 생각을 해보시지요. 차는 고사하고 수십 리, 수백 리 길을 걸어서만 가야하는 사람이 이 땅에 수십억이 됩니다. 직장 일 때문에 불편하십니까?

 

임금 때문에 불편하십니까? 이 땅에 실직자가, 장애 때문에 일자리를 못 얻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요. 오늘 우리한테 있는 모든 상황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파서 고생하는 수난에도 내가 동참할거고 그러나 동시에 아파서 약도 못 먹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고난에도 난 동참을 해야 되고 하나님의 고난의 동참은 좋은 대로 나쁜 대로 쉬운 대로 힘든 대로 하나님은 우주적 역사로 함께 동참을 하십니다. 우리의 질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주지 못합니까? 하는 질문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저한테 먹을 거 하나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그림 그리시는 분이 많이 있으실 텐데요 제가 어느 책을 읽어봤더니 그림 그리시는 분은 날씨가 좀 궂으면 그림 그리기 좋다고 합니다. 맞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밝으면 대상물들이 너무 많아서 중점적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날씨가 궂으면 그림 그리고 싶은 것들만 딱 보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다. 사진 찍으시는 분들은 날씨가 밝아야 됩니다. 어느 날이 좋은날입니까? 혹시 사진 찍으시는 분은 궂은날이 되면 그날은 안식하고 생각해보라고 그림을 그리시는 분은 맑은 날이 되거든 그림그리지 말고 안식하며 구상하며 명상하시라고. 우리에게 준 모든 아픔의 운명, 불편의 운명을 운명으로만 보지 마시고 그때는 우리가 연단하고 인내하며 새로운 희망을 창출하기 위해서 한번 마음과 뜻을 모아보는 날이다.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께서 ‘나는 나다’라는 말을 통해서 주시는 것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난당할 때 성경말씀은 이렇게 써있습니다. 천군만마를 동원하여, 번개화살을 동원하여 이집트를 다 물리치고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적인 과정을 생각하시고 모세라는 사람을 내세워서 광야에 어두운 생활도 지내게 하시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으로 이끄셨지만 모든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하나님은 우리 못된 인간의 죄를 깔끔히 기적적으로 없앨 수 있지만 예수님을 보내셔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수난 당하시면서 용서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희망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저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늘에서 기적같이 떨어졌으면 저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그때 그 하나님은 나는 나다 할 수는 있지만 나는 야곱의 하나님은 아니다. 저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저의 역사 속에 아름다움 속에 희망과 좌절 속에 오셔서 나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나님 저는 그 하나님이 참 좋습니다. 같이 울어주시는 하나님이 참 좋습니다. 저 불평도 함께 들어주시는 분이 참 좋습니다. 이 땅의 역사 속에 오셔서 함께 고난 받는 하나님도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마지막에 포도밭 얘기처럼 결국에는 알알이 맺는 포도송이를 맺게 하려고 부활의 영광을 주시려고 나는 오늘 그대들의 서글픈 역사와 힘든 역사 속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 주님이 오늘 우리의 수난을 함께하시고 동시에 자기 수난에 우리의 동참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높은데 계시는 하나님 그러나 저 안에 계시는 하나님. 고마우신 하나님. 이분의 수난이 우리의 수난이 되고 우리의 수난은 이 분이 짊어지시고 그래서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다. 내 속에 그대들의 수난과 구원을 함께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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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정남목사|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