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창립/ 은혜가 충만한 교회/행11:19-26

2011. 3. 14. 00:05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교회창립/ 은혜가 충만한 교회/행11:19-26
2008-03-08 12:43:34   read : 207



오늘은 우리 교회의 창립53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지금도 좋은 교회이지만, 앞으로 10년 후에, 20년 후, 50년 후에도 참으로 좋은 교회, 자랑스러운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마지막 시대에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본래적인 목적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하며, 어려운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창립기념일이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자축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목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회에 있어서 초대교회는 본래적인 교회요, 기본에 충실한 교회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언제나 모든 교회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중에서도 가장 칭찬 듣는 교회로, 가장 자랑스러운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안디옥교회라고 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 선교의 중심적인 교회라고 하면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중심이 된 교회였습니다. 세계정신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에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세계 여러 나라로 피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환난이 있은 후에 흩어진 성도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가서 우선 유대인에게 전도하였지만,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인들은 안디옥에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전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였습니다. 베니게란 곳은 페니키아를 말하는데, 현재의 레바논을 말합니다. 두로와 시돈이란 항구도시들이 있는 지역입니다. 구브로란 곳은 지중해 안의 아주 큰 섬나라인 키프로스를 말합니다. 유명한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시리아의 안디옥을 말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안디옥이란 이름의 도시들이 있었는데, 성경에는 시리아의 안디옥과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다한 교회입니다. 성도들은 어떻게 하든지 복음 전파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교회는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았고, 이방인들의 접근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해외선교의 열매요, 해외선교의 신기원을 이루었지만 누가, 어떤 사람이 그 일을 시작하였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왔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그들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남의 눈에 알려지기를 바라거나, 감사와 칭찬받으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이름이 역사책에 기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안디옥이란 도시는 시리아의 고도였습니다. 이 도시는 “동방의 여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에 인구 50만 명이 사는 세계적인 도시였습니다.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는 로마였고, 두 번째로 큰 도시는 북아프리카의 알랙산드리아였으며, 세 번째로 큰 도시는 시리아의 안디옥이었습니다. 시리아의 안디옥은 지중해에서 24km 떨어진 곳으로 아름다운 국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우상숭배가 넘쳐나고 있었고, 사치하였고, 환락의 도시였으며, 스포츠와 도박이 성행하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계 도시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이 도시 안디옥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세계정신이 부족하여 해외 선교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안디옥교회로 하여금 해외선교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고, 헌신하는 교회를 들어 선교의 중심지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의 중심지가 되어야겠습니다.

21절 말씀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주의 능력 있는 손이 복음 전도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교회가 설립되는 곳마다 주님의 손이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가는 나라마다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이제 막 복음이 들어가고 선포되는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교회요, 거룩한 교회요 우주적인 교회여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하나이어야 합니다. 유대의 예루살렘 교회가 특별하거나 안디옥의 교회가 이질적이어서 예루살렘 교회와 신앙과 직제와 예전이나 교리적으로 하나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도 아니요, 하나님의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를 파송하여 안디옥교회를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신중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복음에 비전을 가진 사람, 복음 전파에 열정을 가진 사람, 한 사람의 지도자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 사회를 이해하고, 언어 소통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른 신앙을 정립한 사람으로, 교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지도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에 바나바는 아주 적합한 일꾼이었습니다.

사실 안디옥교회에 대한 소식은 소문으로만 아는 정도였습니다. 정식으로 어떤 절차에 의하여 보고된 것이 아니라, 들리는 소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라는 지도자를 파송하여 안디옥교회를 지도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요, 교회와 복음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4절에서 바나바의 인격과 신앙에 대하여 그를 인정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24절에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했습니다. 구브로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으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위로와 권면을 잘하여 “위로의 아들, 예언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근본적으로 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착하지 못하고 악하거나 불성실하면 명예나 이윤을 추구하려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좋지 않은 마음, 일그러진 마음이라고 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맙니다. 우리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성령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령이나 믿음은 찾아볼 수 없고, 지식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요, 경험으로만 하겠다고 하면 사람의 소리만 나고, 하나님의 영광이나 능력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속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어야 진정 교회를 위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바나바가 멀리 안디옥에 왔습니다. 소문대로 교회는 자생적으로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 중심으로 교회가 아니라, 헬라인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 위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제 갓 믿는 성도들에게 외쳤습니다.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예수님을 모신 사람으로 철저한 신앙을 요구하였습니다. 굳은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흔들리지 않는 마음, 식어지지 않는 열정, 단단한 결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안 됩니다. 주께 붙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란 생명의 관계입니다. 생명이란 떨어지면 죽고, 하나로 연결되어야 하고, 예수님 안에 연합되고, 일치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전은 그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나바는 길리기아주의 수도인 다소에 사는 바울이란 청년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 회심하고는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였지만, 반기는 사람이 없어 고향 다소로 내려가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참으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란 사람은 지성과 열정을 겸비하였고, 믿음의 확실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세계선교를 위해서라면 바울을 세워주어야 하고 그를 붙잡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산다는 것만 알고 어느 동리에 사는 것을 모르고 찾아가서 마침내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와서 두 사람의 지도자가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으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안디옥교회를 통하여 교회란 모름지기 이러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아 소멸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어나는데, 아예 초기에 쓰러뜨리면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박해는 멀리 시리아의 수도였던 다메섹까지 미쳤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였고, 배교를 강요하였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제 몇 명만 잡아들이고 죽이면 나사렛 이단, 기독교회는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부활하신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입니다. 세상 나라는 무너지고 소멸된다고 하여도 우리 주님의 몸인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요,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므로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직도 복음화 되지 않았지만, 복음은 결코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이제는 땅 끝까지 복음은 선포되었고, 교회는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도 우리 자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어는 한 순간도 멈출 수 없고, 중단할 수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전도할 때에 교회입니다.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남은 과제는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저는 선지자 예례미야를 통하여 참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예례미야의 열정, 사도바울의 열정을 본받으려고 합니다. 저는 예례미야의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소명의식을 느꼈습니다. 렘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여호와를 선포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미칠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며 구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의사로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전도하는 원종수권사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비비안이라는 암 환자가 수술을 받으려 왔으나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서 수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예수님의 피만이 당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할 수 있다.”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그분이 간증하기를 “제가 암에 걸리게 된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만약 제가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저는 원종수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평생 예수님을 모른 채, 그렇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구원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그 교회에는 2000명 정도의 교인이 모였는데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가족 7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환자 한 사람을 전도함으로 그의 영혼이 구원받고, 그의 온 가족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주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육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육하는 사명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힘쓴 부분이 있다면 일꾼을 양성하는 일, 사람을 세우는 일에 힘썼습니다. 이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이 일 년 간 함께 있어 큰 무리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교회는 좋은 사역자들, 지도자들을 있었습니다.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라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5명의 참으로 좋은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성령이 충만하였고, 성령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부름 받은 지도자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합심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힘이 나고 좋은지 모릅니다.

교회란 교육적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사람을 양성하고, 사람을 세우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만 지도자요, 내 시대의 지도자는 오직 나 한 사람으로 족하다는 편협하고 마귀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시무장로를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안수집사를 세우고, 권사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경공부, 제자훈련, 사역자반 인도자반을 운영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일꾼이 곧 교회요, 곧 선교요, 곧 봉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육전도사를 모시는 일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각 부서를 나누고 연령에 맞게 교육하고 일꾼을 활용하였습니다. 유치부를 유아부와 유치부로 나누었습니다. 어린이 교회학교를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로 나누고 있는데, 사실 교육관만 확보된다고 하면 학년별로 나눌 수 있으면 좋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공간이 확보된다면 대학부, 청년부, 젊은 부부반으로 나눌 수 있으면 좋습니다. 교회는 교육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배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연령과 취미와 신앙정도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소그룹과 공부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육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운명이 달린 문제요, 한 교회의 미래가 걸린 문제입니다. 교육이란 우리 사회가 누려온 지식과 쌓아온 경험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은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일에 열심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도 부지런히 가르치고, 우리도 배우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참된 가치관을 심어주는 교육은 우리 교회만이 심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진정한 인간교육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시키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 때에 나를 알고, 이웃을 알게 됩니다. 교육이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고, 양성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칭찬받는 교회로 도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로부터 지탄받지 않고, 인정받는 교회여야 합니다. 이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별명으로부터 시작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합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익살맞은 별명을 잘 붙이는 재능이 있다고 합니다. 후에 로마의 율리안 황제가 안디옥을 방문하였는데, 그가 수염을 기른 것을 보고는 황제라고 하지 않고 염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접미사 “니아노스”라는 말은 어느 당에 속하여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었습니다. “헤로디아노스”라고 하면 헤롯당원이란 말입니다.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은 크리스토스 당에 속한 자,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멸시하고 조소하는 요소가 배어 있으면서도 철저한 정신과 생활을 지적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이 말은 절반은 욕이요, 절반은 익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경멸하는 말이지만, 참으로 자랑스러운 별명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잘 할 때도 있지만, 형편없을 때도 있습니다. 잘 믿으려고 힘쓰고 있는데, 수준이 보잘것없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장로님들은 장로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되고서,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목사의 자격이 있어 목사가 된 것이 아니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목사가 되어가야 합니다. 장로님들을 들어 말씀드리면, 장로의 자격이 있어 장로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장로가 되었습니다.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격에만 머물지 말고, 장로다운 장로님들이 되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여러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있지만, 이번에 청년 단기 선교에 가서 보고는 우리 교회의 장로님과 권사님들은 정말 귀하신 분들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한 분 장로님과 한 분 권사님이 참여하셨는데, 우리 청년들에게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청년들과 함께 행동하시면서 땀 흘려 봉사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금년에 청년들을 보면서 우리 교회는 소망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청년들이 섬지방으로 단기 선교 가면서 우리 청년들이 흘린 땀을 모두 모으면 우리 모두를 다 적시고도 남을 것이라고 봅니다. 완도와 소안도, 횡간도의 여러 어려운 성도들과 목사님 사택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도배하고 페인트를 칠해주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집이 아니라, 20여 집을 감당하는데, 그들이 흘린 땀은 참으로 소중하게 열매를 맺고, 하나님 앞에 기억될 것입니다. 섬 내의 9개 교회가 모여 여름 성경학교를 개최하였는데, 우리 교회의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운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먼저 구원받은 사람으로 성도다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수준을 보시고, 하늘나라에 데려가는 것입니까? 여러분, 신앙이란 소속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였다가 이제는 우리 주님에게 속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티아노스입니다. 그리스도당원입니다.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교가 이뤄지는 교회, 교육적인 사명을 다하는 교회, 칭찬받는 도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와 같은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교회(교회창립 기념 주일 설교/행11:19-30
2008-07-03 10:28:05   read : 181

지난 주일 예배 후에 어떤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모세 오경에 여호수아가 들어 갑니까?” 제가 대뜸 그랬습니다. “안 들어 갑니다. 여호수아가 왜 들어갑니까?” 그렇게 말해 놓고 뭔가 찜찜해서 설교 원고를 보았더니,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모세가 썼다고 믿는 모세 오경 밖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이 다섯 권 속에 있는 것만 믿었습니다.” 분명히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에 신약성서 신학을 가르치던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 하다가 마침 그 때는 크리스마스 때여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선물을 가져 왔다는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동방 박사들이 유향과 몰약과.......” 하다가 이 분이 꽉 막히셨답니다. 분명히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게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더 시도를 했답니다. “동방 박사들이 유향과 몰약과........” 그래도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이 교수님이 엉겁결에 “유향과 몰약과 기타 그 외의 것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랬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지난 주에 있었던 저의 실수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해야 다섯 권이 되는데, 중간에서 레위기를 뺏더니 여호수아까지 내려갔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그런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 동방 박사의 선물을 말할 때도 황금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래야 세가지 선물이 다 나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 말할 때도 중간에 빠진 것이 없게 하십시오. 그래야 신명기에서 안전하게 끝이 납니다.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28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28주년이면 결코 짧지 않은 역사입니다. 사람에 비교한다면 청년의 나이입니다. 자신의 진로와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교회의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 머리 속에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를 아십니까? 그는 구원의 열정으로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이 남아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땅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50년 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를10바퀴 도는 거리를 돌아 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는 틈틈이 2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냈습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60년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는 영적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1791년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그가 조직한 감리교회의 미래(未來)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감리교회가 이 땅에서 없어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염려하는 것은 100년, 200년이 지난 후 감리교회가 사랑과 열정을 잃어 버린 싸늘한 조직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생각나는 것은 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경고한 신학자들의 말입니다. 에버리 덜레스(Avery Dulles)라는 신학자는 그의 책「교회의 모델(Models of the Church)」에서 “종으로서의 교회(The Servant Church)” 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을 위한 섬김의 삶을 사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마땅히 섬김의 공동체여야 한다.” 그리고 한스 큉(Hans K?ng)이라는 신학자는 「교회(The Church)」라는 책에서 교회를 이해하는 기존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도화된 교회는 “하나님-교회-세상”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하나님이 교회를 먼저 선택하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으로 교회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본질은 “하나님-세상-교회”라는 구조 속에서만 이해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에 있지 교회에 있지 않다고 과격하게 말했습니다. 또 선교 신학자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 같은 사람은 아예 책 제목을 「흩어지는 교회(The Church Inside Out)」라고 했습니다. 제왕처럼 세상에 군림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으로 들어가서 겸손하게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신학자들은 모두 제도화 되어가는 교회로부터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점점 사랑과 열정을 잃어가는 교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s)」을 펴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예언자적인 안목(眼目)에 감탄하면서 그 책에 열광했습니다. 확실히 그에게는 미래를 내다 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에버리 덜레스나 한스 큉이나 호켄다이크 같은 사람들의 예언자적인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 생각나는 것은 리전트(Regent) 신학교에서 영성(靈性) 신학을 가르치는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 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The Unnecessary Pastor)」라는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목회자가 필요 없는 3가지 영역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목회자를 사회적인 안정의 바탕을 제공하는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때때로 목회자들 자신이 자신을 상당히 중요한 존재로 여기고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목회자를 교인들의 요구를 충족 시켜 주는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향에 편승(便乘)하는 목회자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무익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때서야 비로소 정말 필요한 일을 자유롭게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목적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피터슨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한 목사(necessary pastor)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세가지 서약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서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겠는가? 둘째로,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겠는가? 셋째로,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서 세상의 화목을 위해 헌신하겠는가?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것은, 릭 워렌(Rick Warren)이라는 목사가 쓴 「The Purpose Driven Church(목적이 이끄는 교회, 1995)」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된 「목적이 이끄는 삶」 보다 7년 전에 나온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교회의 목적 다섯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예배(worship)라는 교회의 목적을 찾았습니다.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사역(使役, ministry)이라는 교회의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셋째는,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 속에서 전도(傳道, evangelism)라는 교회의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넷째는, 세례를 주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교회의 목적은 교제(交際, fellowship)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말씀에서 제자 훈련(discipleship)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전통에 매인 교회가 되지 말고, 인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되지 말고, 재정(財政)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가 되지 말고,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되지 말고, 건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되지 말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되지 말고,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가 되라!” 성경에서 발견한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가 올바른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 28주년을 맞이 하면서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런 생각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넘치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존재하니까 존재하는 교회, 세월이 가니까 역사가 10년도 되고, 20년도 되고, 30년도 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정말 이 땅에 필요한 교회, 비전과 사명과 소명감으로 충만한 교회,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熱情)을 품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를 보면서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교회에 대한 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첫째로, 저는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열린 교회에 대한 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디아스포라(Diaspora) 교회였습니다. 박해와 핍박을 피해서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세운 교회였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스데반의 순교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환난으로 인해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베니게(Phoenicia)와 구브로(Cyprus)와 구레네(Cyrene)와 안디옥(Antioch)까지 흩어졌습니다. 베니게는 지금의 레바논(Lebanon) 지역이고, 구브로는 지금의 터어키(Turkey) 남쪽의 지중해에 있는 섬입니다. 그리고 구레네는 아프리카 대륙의 리비아(Libya)에 있고, 안디옥은 이스라엘 북쪽 시리아(Syria) 영토에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이 지역들로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자기 동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그만 사건 하나가 터집니다. 사도행전은 이 사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사도행전 11:20-21).”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브로와 구레네에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지역을 벗어나서 지중해를 건너 멀리 시리아 영토까지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입니다. 최초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엄청난 의미(意味)를 갖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여러분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조국을 떠나 미국 땅에 와서 이민자(移民者)로 살고, 유학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조국을 떠나 타 문화권에 들어와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입니다. 디아스포라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개방성(開放性, openness)입니다. 이것은 한 지역에 정착(定着)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미국에서 한 5년, 10년 살다가 한국에 방문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구동성으로 “한국 생활은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미국 생활을 하면서 그의 삶이 개방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디아스포라들의 개방성을 이용하셔서 헬라인들에 대한 선교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개방성은 단순히 사람에게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타 문화와 전통, 관습 등 모든 문제에 관계된 것입니다. 개방성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개방성이 있었기에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연 것입니다. 그 결과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사도행전 11:21).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게도 개방성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축복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둘째로, 저는 안디옥 교회에서 동역(同役)하는 교회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많은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니게르라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같은 사람들이 그 교회에서 동역했습니다. 이들의 출신 성분은 다양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흑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루기오는 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롯왕과 함께 젖을 먹고 자란 마나엔 같은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서 동역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일년 동안 한 교회에서 일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恩賜, gifts)대로 일했습니다(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일꾼으로 세워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진다”는 말을 “The man of God is equipped(디모데후서 3:17)”라고 합니다. “equippe”라는 말이 명사형으로 씌어지면 “도구(equipment)”가 되지 않습니까?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도구가 되는 교회였습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국가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의 취임식을 지켜 보는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미국이 당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우리 모두 함께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얻을 것이 없으면 쉽게 교회를 옮깁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이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셋째로, 저는 섬기는 교회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흉년이 들어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보냈습니다. 그 때는 천하에 흉년이 들었다고 했으니까 안디옥 교회 교인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 모(母) 교회에 헌금을 모아 보냈습니다. 헌금뿐만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람도 키워서 하나님의 일에 내 놓는 교회였습니다.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너희 교회에 계속 데리고 있지 말라. 내가 두 사람에게 다른 일을 시키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좋은 인재를 소유한 교회가 아니라 좋은 인재를 배출(輩出)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람을 키워서 세상으로 내 보내는 교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을 추구하는 교회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교회 안에 기도와 금식(禁食)이 있는 교회, 영성이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께서 그 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While they were worshiping the Lord and fasting, the Holy Spirit said, 사도행전 13:2).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달리는 금식이 아니라,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와 금식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분별하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을 하는 교회,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을 하는 교회, 주님과 더 깊은 교제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을 하는 영성이 깊은 교회가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교회 창립 28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모두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 우리 교회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우리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인지, 어떻게 그 비전을 이루어 나갈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목사인 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저의 비전은 여러분의 비전이 되어야 하고, 이 교회의 비전이 되어야 하고, 우리 모두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이 비전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좋은 교회는 그렇게 해서 세워집니다.





교회창립/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교회 /행2:43-47
2009-05-06 18:28:51   read : 98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3~47)

부모들의 한결같은 기대는 자녀들이 예쁘고 공부 잘하고 말도 잘 듣고 밖에서 칭찬받고 커서 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이고 기대입니다. 이것은 사람만이 아니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는 금년으로 54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교회는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발전도 성장도 역할도 했습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더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도 더 많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세상을 향한 역할을 다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 큰 바람이 하나 더 있다면 우리교회가 아주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하나님께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뜻이자 하나님의 뜻이고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 사후 직후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사후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제자들 모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성령에 충만함을 입고 모두가 영적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현상이 교회의 건강한 모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가장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할 만큼 모델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날마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당시 매일같이 모일 동기가 분명히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여서 떡을 떼며 찬미를 했습니다. 그 말은 그 때는 영적인 열기가 충만했다는 말이고 그 마음으로 서로 나누며 영적으로 형제애를 두텁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교회가 공감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교회들이 날마다 성장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건강한 교회의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 장

생명체는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성장해야 합니다. 수적 성장과 영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장하고 성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날마다 성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변화하고 퍼져나가 수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성장한 이유가 몇 가지입니다.

하나는 “뜨거운 찬양”입니다. 당시 교회는 날마다 모여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신앙고백은 기도로도, 간증으로도, 찬양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찬양은 힘차고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퇴보하는 교회나 퇴보하는 신자들이 모인 곳에서 부르는 찬양은 느리고 맥이 없는 찬송일 것입니다. 찬양에는 힘이 있고 활력이 있고 확실한 신앙고백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그렇게 매일 모여 찬미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3천 명씩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매일 모여 성만찬을 떼고 나눔과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눈물과 고백과 사모함과 인내함이 있었고 형제애가 두터워졌을 것입니다.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은혜가 넘치며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배는 너무 기계적입니다. 한 시간 안에 끝나면 곧 바로 돌아가 버립니다. 한 시간 안에 드려지는 예배에 훈련이 되어 10분만 길어지면 모두 조바심을 합니다. 그러니 그 예배에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교회는 날마다 모이고 성만찬을 나누고 함께 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시대 말고도 3,40년 전만해도 예배에 뜨거운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때 부흥회는 월요일 밤에서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했습니다. 설교도 두세 시간씩 했습니다. 그래도 그 설교에 은혜가 있었습니다. 모두 달게 받았고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는 모두들 그렇게 은혜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에는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 영적 부흥이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발적 선교”입니다. 사도행전교회 중에서 가장 앞서간 교회는 안디옥교회였습니다. 그 시대에 이미 안디옥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것도 선교사를 이방사회에 파송하였습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고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그것은 당시 안디옥교회에 지도자들이 상당히 열린 신앙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 군을 이루는 분들의 정신이 참 중요합니다.

그 당시에 이방선교를 착안하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일입니다. 당시 최초의 교회요 모든 교회의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그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심지어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집을 방문하여 세례 주었다 해서 소환해서 문책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고 성령의 계시가 있어 갔는데 그곳에도 성령이 강림하셔서 세례를 주었다고 말함으로 겨우 이해되어 불문에 부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모교회이면서도 개척교회 격인 안디옥 교회에게 세계선교에서 밀린 것입니다. 정신도 밀리고 사고도 밀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도 밀렸습니다. 당시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아쉬운 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누구보다 열심도 있었고 구원의 역사도 있었고 회심의 역사도 있었지만 이방선교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하였을 정도로 아주 구태의연했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구태의연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교회만 주장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나눌 줄을 모르고 선교에 개념도 없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퇴보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할 일 중에 첫 번째 사역입니다. 선교가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와 체험의 역사와 회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선교에 열중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또 “모두 참여”입니다. 본문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모두 “한마음으로 한 몸으로 함께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본문을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44)”,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46)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행전의 교회들이 지극히 능동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생명력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인은 움직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누워있거나 앉아있습니다. 생명력이 고갈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모두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목표가 이것입니다. 다 같이 모이고 다 같이 행동하고 다 함께 봉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모두가 움직이며 봉사하는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항상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다움 유지

사도행전의 교회는 지극히 교회다운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몇 가지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는 “거룩함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순전한 마음으로 모이고 찬미하고 음식을 나누었다(46)”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43)”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거룩함과 성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이 성결과 거룩히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은 성결함과 거룩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이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거룩함을 입고 배우고 익히고 체험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구원받은 거룩한 무리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성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중세시대에는 너무 거룩과 성결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경건생활에 주력했습니다. 그렇게 너무 거룩과 성결을 강조하다 보니까 신앙이 행동을 멈추고 정적인 신앙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도를 닦고 명상하고 앉아있는 거룩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세속과 등지고 산속에서 혼자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거룩과 성결은 내가 주님의 영을 받고 말씀을 받아 내가 주안에서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주어진 힘과 능력과 거룩한 자본으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이 거룩한 삶이고 경건한 삶이고 성결한 삶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고 성결한 줄 압니다. 그렇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니까 욕하고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느 여인이 차를 난폭하게 운전했습니다. 앞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추자 이 여인은 앞차 운전자에게 빨리 지나갔으면 나도 지나갔을 것인데 멈추어 섰다고 고함을 지르고 욕하고 흥분을 했습니다. 그 곁을 지나가던 교통경찰이 그 여인에게 다가가 나와 같이 경찰서로 가자하고 그 여인을 잡아 유치장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경찰이 오더니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다, 나는 당신 차가 도난차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당신 차 뒤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스티커를 붙인 것을 보고 당연히 당신 차가 도난차인 줄 알았다“ 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해야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거룩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아니니까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 책망은 하늘로부터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양심으로부터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웃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심지어는 사탄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반드시 “거룩과 성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그 거룩과 성결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영성을 잃어서 세속화되고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또 하나는 “신앙정체성의 분명함”입니다. “정체성”이라는 말은 고유한 정신과 뜻과 가치관을 말합니다. 오늘은 이 정체성이 자꾸만 흐려지고 혼동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정체성 상실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정체성이 상실되면 삶에 대 혼란이 오고 목적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가게의 모든 물건에는 정가가 붙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정체성입니다.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고 나는 이 씨이고 너는 김 씨다” 그것이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김 씨가 됩니다. 그러면 정체성에 혼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게의 값싼 물건에다 비싼 값을, 비싼 물건에다 싼 값을 붙여 놓으면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일대 혼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말합니다.

덴마크 의 철학자 킬케골이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의 고향 덴마크에 있는 어느 큰 상점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 도둑은 물건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물건은 그대로 있는데 다만 가격표만 조작해 놓았습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2달러를 붙이고 가죽으로 만든 고급 구두에 50센트를 붙이고 연필 하나에 100불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도둑은 물건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둑은 정말 중요한 것을 가져갔습니다. 그것은 상품의 본질을 가져간 것입니다. 즉 상품의 정체성을 훔쳐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게 안에 일대 혼란을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신앙인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이십니까. 그 대답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질문이고 대답입니다. 빌 하이벨 목사가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가” 라고 묻고 “왜 그런가, 그것은 삶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없기에 자신 있게 대답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라고 고백한 뒤에는 “책임 있는 삶”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신앙인이 소신도 확신도 빛도 이렇게 바래는 것은 이 정체성을 상실해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고백이 확고해야 정체성이 분명해진은 것입니다. 거기서 분명한 신앙고백이 나오고 삶의 신조가 나오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찾을 것은 또 과감히 찾게 되는 용기가 나옵니다. 그것이 없으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게 됩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고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길은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세 번째는 “분명한 교회론”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교회론이 분명했습니다. 모두 주님을 중심해서 건강한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사도행전 교회의 특징은 예수를 중심으로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생활에서 모든 것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가지는 가지역할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 가지가 중심역할을 할 때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갈등하고 편이 갈라지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하면 교회론이 세워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초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의 교포교회가 분란이 많은 이유가 이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머리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니까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자들이 초점되시는 예수를 떠나 가지들을 초점인줄 알고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갈등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싸우는 곳에 가 보십시오. 그곳에는 예수는 없어지고 인간들만 있습니다. 그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내 의견. 내 생각, 내 판단이 예수에게로 모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금년 1월로 54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교회는 지난날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건강한 교회로 나아갈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우리 모든 성도들은 중심되시고 주인 되시는 주님을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내 의연, 내 은사, 내 재능, 내 뜻이 모두 주님의 뜻으로 모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사도행전의 교회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날마다 모여 성만찬을 떼고 한 마음으로 찬미하며 구제하고 전도하며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뜻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십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인 곳에 역사하십니다. 준비된 곳에 기적을 보내주십니다.

세상으로부터 칭찬받고 칭송받는 곳에 하나님의 의도 함께 하시고 섭리도 나타며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 일을 우리교회가 해 내야 합니다. 그때 우리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할 일을 다 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창립/ 반석 위에 내 교회 /출33:21-23, 마16:18-20
2008-11-17 11:46:03   read : 87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11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창립을 축하하는 특별한 행사는 없지만 우리 교회를 주시고 오랜 역사 속에서 친히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돌리는 귀한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114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여러 가지 많은 의미가 있지만 114라고 할 때 가장 익숙한 것은 전화번호 안내 번호입니다. 114에 전화하면 거의 모든 전화번호를 다 알 수 있습니다. 114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안내하는 교회, 길잡이가 되는 교회, 해결사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교회가 많습니다. 무슨 ‘제일교회’라고 하지만 제일이 아닌 교회도 많습니다. ‘중앙교회’라고 하지만 저기 변두리에 있는 교회도 많습니다. ‘한마음교회’라고 하지만 두 마음, 세 마음인 교회도 있습니다. ‘반석교회’라 부르지만 반석은커녕 흔들바위 같은 교회도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주님이 아닌 사람의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는 그 이름에 어울려야 하고, 모든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어야 하고, 모든 교회가 반석교회이어야 하고, 모든 교회가 한마음교회여야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을 만난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확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8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다음에 예수님께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위의 교회를 친히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반석은 베드로입니까? 물론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베드로도 인간이었습니다. 실수도 많이 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인격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가 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제1대 교황이라고 합니다. 현재 베네딕토 16세는 265대 교황입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도 교회의 기초일 수는 없습니다.

반석은 하나님의 별칭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성경에는 반석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 “오직 저만 나의 반석”, “우리 구원의 반석” 등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지칭하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견고하시며, 변치 않으시며, 든든한 기초가 되십니다. 반석은 하나님의 별칭인데 하나님의 별칭을 베드로의 이름으로 붙여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영광이며 명예로운 일입니다.

반석이란 말은 구약에서는 ‘수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안전과 방어, 침입할 수 없는 요새를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페트로스’로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든든한 바위이시며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0:4에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반석 위의 교회는 하나님이 지키시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릿돌인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반석 위에 세운 든든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는 반석 위에 있는 것처럼 견고해야 합니다.

18절에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음부의 권세는 지옥권세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호시탐탐 교회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로 하여금 마귀의 세력이 이기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마귀의 권세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가장 탐내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세상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세상은 이미 자기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연동교회가 내 교회입니까? 모든 교회가 그러하듯이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의 권세가 이겨야합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이 지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교회에 음부의 권세가 어떻게 지배할 수 있습니까? 음부의 권세는 음부를 지배합니다.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내 권세”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내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교회의 권세가 돼야 합니다.

사탄을 보세요. 사탄은 끊임없이 세상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까지도 시험합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천하만국 보이며 “내게 절하면” 세상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까지 지배하려고 합니다. 사탄은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를 자기 권세로 지배하려고 합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에 내가 정말 추구해야 할 인간적 자아와 싸우는 두 가지 적이 있다. 하나는 동물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악마적 자아이다. 이 둘 중에 더 나쁜 것은 악마적 자아이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냉정하고 독선적인 도덕가가 거리의 매춘부보다 훨씬 더 지옥에 가까울 수 있다.” 이런 악마적 위선, 악마적 자아가 교회 안에 존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속에 있는 악마적 요소들 때문입니다. 악마적 자아가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란 공히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이중성입니다.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세속적입니다.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거룩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천사표이면서도 간혹은 악마표를 달고 다닙니다. 사탄의 권세가 지배하지는 못하지만 사탄은 하지도 못할 일을 끊임없이 조장하여 교회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 13퍼센트가 심판과 지옥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절반이 넘는 부분이 죄인들의 영원한 심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옥을 가리키는 가장 강력한 단어인 ‘게헨나’는 성경에 열두 번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열한 번 이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보다 지옥에 대해 더 많이 말한 이는 없습니다. 지옥은 예수님과는 등진 세계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대하여는 언제나 원수입니다.

시편 40:2에는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끌어올리시고, 반석 위에 두셔서 견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교회를 그렇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음부의 권세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옥에서 세 명의 성직자가 만났습니다. 가톨릭 사제와, 유대교 랍비와, 뉴에이지 목사였습니다. 이 세 사람이 왜 지옥에 오게 되었을까요? 가톨릭 사제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는 술독에 빠져서 너무 술을 좋아해서 지옥에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랍비가 입을 열었습니다. “햄 샌드위치 같은 음식을 먹었어요. 전 그런 음식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뉴 에이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여기에 오셨지요?” “여긴 지옥입니다. 전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요”. 지옥이 불편하지 않으면 곤란하지요? 음부의 권세가 편하면 음부의 편이지요? 음부의 권세가 지배하면 더 이상 교회는 아닙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는 비결을 아십니까? 예수님이 반석이시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이면 가능합니다. 이런 견고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는 땅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19절에는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합니다. 교회는 사회의 해결사, 열쇠, 희망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은 해결사이셨습니다.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함께 혼인잔치에 참석하셨다가 포도주를 해결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게 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의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 주라”고 하셨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람과 풍랑 때문에 배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바람을 향해 “고요하라”, 풍랑을 향해 “잔잔하라”고 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형제의 재산문제까지 해결해 달라고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너희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교회도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무슨 문제든지 교회를 통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세상을 향해 인식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통(通)입니다. 모든 일이 교회를 통하여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성전에서는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은 문제해결의 기본핵심입니다.

지금도 교회가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교회는 무슨 문제든지 해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경제의 문제, 아이들 학업의 문제, 취업과 전업의 문제, 달러 환율까지, 수출문제까지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가 교회에 있습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을 아시지요?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물쇠와 열쇠는 항상 같이 있습니다. 자물쇠만 팔고 열쇠는 안파는 것을 봤습니까? 열쇠는 파는데 자물쇠를 팔지 않는 것을 봤습니까? “문제해결의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풀 수 있고, 교회가 풀어야 합니다.

교회는 양의 문처럼 들어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습니다. 피곤한 자는 능력을 주십니다. 무능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십니다. 교회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어야 합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외교, 안보, 모든 인생의 문제에 교회는 해결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해결합니까? 성경을 보세요. 성경대로 사세요. 여기에 열쇠가 있습니다.

호텔에는 마스터키가 있습니다. 마스터키는 모든 방을 다 열 수 있습니다. 마스터키 하나만 있으면 모든 방을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입니다. 아마 제가 연동교회에 부임해서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 것 같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갔는데 두 아이가 다 잠이 들었습니다. 하필 그 날은 열쇠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밖에서 문을 두드려도 안 되고, 집 전화로 벨을 울려도 안 되고, 도무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경비실에 연락해서 좋은 수가 없는가 물었습니다. 우리 연락을 받고 경비원 아저씨들이 왔습니다. 이곳저곳 한참을 밖에서 살펴보더니 한 경비원 아저씨가 아파트 밖에 있는 가스 파이프를 타고 집 안에 들어가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경비원 아저씨가 혹시나 다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릅니다. 열쇠는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의 가치는 엄청납니다. 그 것 하나만 있으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문제 해결사 노릇을 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모세는 백성들의 재판 문제로 사람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그의 장인 이드로는 ‘선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데 사람과의 관계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문제를 푸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문제를 풀어야 세상과 풀립니다.

하나님과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세상과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땅에서만 매면 필요가 없습니다. 땅에서만 풀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매이기도 하고 풀리기도 한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며 세상을 닫는 빗장입니다. 열쇠는 열기만 합니까? 닫기도 합니다.

하비 콕스는 세 가지 유형의 교회를 말했습니다. 자유와 정의를 향한 출애굽기의 교회, 감사와 축제가 있는 시편의 교회,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계시록의 교회가 세 가지 유형입니다. 세상과 하늘나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가 되어야 진정한 교회입니다.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온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이 세 가지 기능을 동시에 해결하는 열쇠가 교회입니다.

프랭클린은 “쓰고 있는 열쇠는 항상 빛난다”고 하였습니다. 늘 쓰는 열쇠는 언제나 손에 닳아 빛이 납니다. 자주 쓰지 않는 열쇠는 녹이 슬거나 색깔이 변해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가 늘 살아있어야 녹슬지 않는 열쇠처럼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맥가이버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인입니다. 비록 영화이지만 그의 손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닫혀도 열고 갇혀도 빠져나옵니다. 그의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하듯이 교회는 세상을 향한 만능의 마이더스 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손을 대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손이 닿으면 병이 나았습니다. 바울의 앞치마만 닿아도, 그림자만 닿아도 병이 나았습니다. 바울의 손이 닿으면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났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만능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맥가이버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 생동하는 교회,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 가슴이 뜨거운 교회, 손발이 부지런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은 가톨릭교회, 성공회, 개신교가 함께 하는 신앙 고백서입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신경은 12사도의 전승에 따라 작성한 것입니다. 초기에는 세례예비자의 문답례로 사용하던 것인데 최종 형식은 6세기말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2세기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공식적인 신앙진술로 인정하였습니다. 사도신경의 한 마디 한 자가 중요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든든한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이 교회의 일꾼입니다.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불확실한 신앙고백은 교회를 뿌리 채 흔들고 맙니다. 지금도 신앙고백은 교회의 기초입니다. 이 든든한 신앙고백이 하늘을 여는 열쇠입니다. 세상을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우리교회가 신앙고백 위에 견고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하늘을 열고 세상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120년, 130년, 주님 오실 때까지 든든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하늘을 여는 열쇠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든든히 서가는 교회/행9:31 교회창립기념주일
2009-05-02 10:55:34   read : 74

어떤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교회는 유람선인가? 구원선인가?” 그러면서 교회를 정의하기를 지상의 교회는 영혼구원의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영혼구원의 목적을 이루며 존재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영혼구원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고 들먹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영혼구원 즉 불신자를 건지는 일에 전념하는 교회가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방주라고 비유하면서 영혼구원에 전념해야 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타깝게 방주는 방주인데, 구원선이 아니라 유람선 같은 교회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 유람선 같은 교회라고 칭했는가? 유람선 같은 교회는 교인끼리 친목을 도모하여 놀기를 좋아하고 은혜를 체험하며 편하고 쉽게 교회생활을 하며, 적당히 봉사와 헌금을 하는 교인에 의해 유지되는 교회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교회 밖의 불신세상 바다에 낚시를 던져 불신고기를 가끔 심심풀이로 잡아 올리는 교회가 유람선의 교회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영혼구원 때문에 바쁘고 고단한 것이 아니라 놀러 다니는 야유회, 친목회, 낚시, 등산, 단풍놀이, 체육대회 등등의 일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교회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람선 같은 교회는 잠깐 사는 동안 재미있고 편하고 좋은 것 같지만 마지막에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깥세상의 바다에 엄청나게 많은 불신자들이 빠져 허덕이고 있는데 관광을 하는 유람선 같이 방관하고 있으니 얼마나 악하고 큰 죄가 되는냐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도 우리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교회는 유람선 교회인가? 구원선 교회인가?

그러면 구원선 같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구원선 같은 교회는 영혼구원 즉 불신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그 일을 위해 전념하는 교회인 것을 말합니다. 불신 영혼을 건지는 일 때문에 온 교회가 바쁘고 고단한 것이요, 선장대역인 목회자, 항해사, 기관장, 갑판장 같은 장로, 권사등의 중진들이 영혼구원에 바쁜 교회를 말합니다. 모든 행사, 계획이 불신영혼 구원에 맞추어져 그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가 구원선이 아니겠는가? 해마다 수백 수천수만의 불신 고기를 잡아 올리고 그들을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구원선의 교회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얼마나 불신영혼들을 건져 많이 살려내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선 같은 교회도 친목과, 놀이모임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놀긴 놀되, 불신고기를 많이 잡은 후에 잠깐 휴식을 취하고 정비를 하고 그물을 깁느라고 놀고 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선의 교인들은 고단하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원선의 교인들은 반드시 마지막에 큰 영광과 상이 기다리고 있기에 참 성도는 구원선의 교인이 되려고 힘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생명을 살리는 희열은 의사가 병자를 살리는 것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것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유람선인가? 구원선인가?

분명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구원선의 교회로 바꾸기만 하면 교회는 반드시 부흥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모든 교회가 구원선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표어를 영혼구원에 맞추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교회의 표어는 어떻습니까? “성령의 능력받아 생명살리는 교회” 구원선으로서의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목표설정도 영혼구원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교회의 최고 큰 목표는 영혼을 많이 건지는 것으로서, 영혼구원의 목표, 전도목표를 가장 비중 있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산 목표나 출석목표를 세우지 말고, 무엇보다도 크고 중요한 목표는 세례를 몇 명이나 줄 것인가, 얼마나 양육을 시킬 것인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지난해에 입교와 세례를 100명 이상으로 잡았습니다. 금년에도 100명이 넘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조직 구성이나 모든 설교도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추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 한 분 한 분이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전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을 쉬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전도하기를 쉬는 것은 더욱 큰 죄가 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원이 없어서 전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는 어자원이 고갈되어간다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의 소득이 점점 줄어들고 어촌인구도 급속도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자원이 없고 소득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어떻습니까? 전도자원, 선교자원은 많습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가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인구에 80%가 됩니다. 대구에는 90%가 됩니다. 자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원은 더 많습니다. 지금도 하루에 22만 명 이상이 죽고 있습니다. 그 중에 90%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지옥 불에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불이 나거나 홍수가 나서 사람이 위험을 당하고 있을 때 뭐라고 합니까?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라는 말을 합니다. 성도들은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구원부터 시키고 보자’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옥으로 가는 생명도 우리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지 못하고 지옥으로 보낸다면 우리의 책임 크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부흥 안되는 것은 기적입니다. 왜냐구요, 부흥성장의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한국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도 부흥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우선은 불신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즉 어장의 고기가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고기가 풍부한데 고기를 많지 잡지 못하는 것은 어부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게으르든지 그물이나 낚시가 잘못되었든지 미끼가 좋지 않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장에는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계 최고의 기도 열기 속에 부흥이 멈춘 것은 한국 교회의 기적입니다. 교회 부흥에 있어 기도만큼 중요한 게 없을 것이요, 기도야말로 교회 부흥 최고의 조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한국 교회는 세계적인 기도의 열기가 있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를 교회마다 매일 혹은 때를 따라 특별기도를 하는 나라는 한국 교회뿐일 것입니다.

기도원도 다른 나라에 없는 시설이요, 기도원이라는 말조차도 우리나라뿐인 것입니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어느 나라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긴 시간과 뜨거운 열정의 기도를 하는 곳도 한국 교회인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부흥 성장의 필요충분조건인 기도가 세계 최고인데 왜 부흥 성장이 멈춘 것인가? 이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는 기도의 근본이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고인 성경 공부, 제자훈련 열기 속에 부흥이 멈춘 것은 한국 교회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부흥에 있어서 말씀의 비중만큼 큰 것이 없기에 한국 교회는 성경 공부와 제자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세계 최고의 열기인 것입니다. 벧엘, 크로스웨이, 트리니티, 제자훈련, 주제별, 권별 성경 공부 등등 교회마다 대부분 큰 비중을 갖고 시행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교회의 부흥 성장이 멈추었으니 얼마나 잘못된 기적인가?

세계 유래 없는 부흥회 개최 열기 속에 부흥성장이 멈춘 것은 한국 교회의 기적입니다.
부흥회란 부흥을 위한 집회라는 뜻으로 부흥회를 하면 교회가 부흥 성장을 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흥회를 연례행사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부흥성장이 멈추었으니 얼마나 잘못된 기적인가?

세계 최고의 교회가 많다고 자랑하고 신학교가 많고 목회자 지원자가 많고 목회자 실력이 높다고 자랑하는 가운데 부흥성장이 멈춘 것은 한국교회의 기적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건지는 기관이요, 목회자는 영혼을 건지는 전문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교회설립들과 목회자 양산율이 최고임에도 한국 교회가 부흥 성장이 멈추었으니 얼마나 잘못된 기적인가? 이는 신학교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에 영혼 사랑으로 불신자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건지는 전문가를 양산하지 않고 머릿속에 신학 지식만 저장하여 내보내기 때문이요, 그와 함께 오늘날의 대부분 교회가 불신 영혼을 건지는데 최고의 목표를 두지 않고 교회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남의 교인을 모아 커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 때문인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양산하지 못하고 머리 좋은 사람을 뽑아 문장실력을 높여 말잘하는 사람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들도 그런 목회자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 부목사들도 박사과정을 해야 한다고 다 하고 있습니다. 이력서를 내면 박사학위가 없으면 이력서 심사에서부터 제외된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실 속에서 오늘은 우리교회가 창립된 지 103주년이 되는 창립기념주일을 맞았습니다. 화려한 생일잔치도 생각해 보았지만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축하금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돌잔치에 갈 때도 빈손으로 가지 않고 회갑이나 칠순잔치에 초청을 받아갈 때도 그냥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구원받았고 이 교회를 통하여 영적인 능력을 받아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이 교회를 통하여 삶의 기쁨과 능력을 얻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질문, 유람선 교회인가? 구원선 교회인가? 를 생각하면서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통하여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배경은 이렇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고 곧바로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는 본래 예수님이 생전에 불러 세워놓았던 열두 사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스스로 사도라고 할 때 누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과 사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이란 청년의 소문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는 다 붙잡아 옥에 가두거나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보자마자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도가 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저라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불과 얼마되지 않았는데 자기가 사도라도 지칭하면서 사귀고자 할 때 또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예의주시할 것입니다.

이때 사울을 잘 아는 바나바가 중재역할을 합니다. 바나바는 역시 인격이 고매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보다는 그래도 사도들에게는 인정을 더 받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을 찾아가서 사울이 다마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난 사건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지 사흘 후에 곧바로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지도 일러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제자들이 사울을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는 헬라어를 하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실력으로는 사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이길 수 없으니까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때 믿음의 형제들이 사울이 위험한 지경에 놓인 것을 알고는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다시 다소라는 곳으로 보내었습니다. 이때에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더라도 우선 교회가 함께 동반성장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요소가 몇 가지 본문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평안해야 합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교회가 다툼만 없으면 성정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역사를 가졌더라도 교회가 분쟁과 다툼이 있으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합니다. 자기 교회만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도 나쁜영향을 줍니다. 목회자를 자주 교체되는 교회, 교인들의 이동이 심한 교회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교회의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 100년사 자료에 보면 교역자 이동이 잦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만화 목사님 부임전까지는 담임목사 시무기간이 평균 3년 반입니다. 이만화목사님과 김영환 목사님이 10년이었고 제가 지금 10년째입니다. 물론 환경의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통계자료가 나온 것으로 주일 낮예배 출석수를 보면 1965년 150명인데 이만화목사님이 부임한 1976년 200명입니다. 12년 동안 50명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이만화 목사님이 부임한 후 사임할 때까지는 약 두배가 증가한 400명이 되고, 김영환 목사님이 부임한 후 사임하기까지 배는 안되지만 260여명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부임한 후 9년이 되었습니다만 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이 물론 있지만 외부적 환경이 성장할 조건을 갖추었을 때 담임교역자가 안정적으로 목회하는 교회는 성장하고 그렇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즉 교회가 평안해야 합니다. 평안은 살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 곧 평안입니다. 대구칠곡교회는 항상 평안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10장 36절에 보면 복음을 가리켜 “화평의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79절에 보면 예수님은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10장5절에 보면 예수님이 사도들을 둘씩 짝을 지워 파송하면서 남의 집에 들어갔을 때 먼저 평안을 빌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는 “평화를 심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교회는 평화로운 교회여야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싸움꾼으로 소문난 성도라도 우리교회에 오시면 평화를 심는자로 변화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명성교회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가 대형화되면 별의 별 성도가 다 모여듭니다. 여기 저기 문제를 일으켰던 성도들도 많이 등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교회만 들어가면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하게 되고 불평하는 성도가 감사의 성도가 되며, 봉사하지 않고 헌신 하지 않은 성도가 헌신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 교회는 오직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채워진 교회여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며 살피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께 하듯 하는 삶을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에베소서 6장5-7절 말씀을 보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3장22-23절 말씀에도 보면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런 마음을 이웃을 돌보고, 이런 마음으로 회사에서 근무하고, 이런 마음으로 학교에서 학업을 하며,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우리를 향하여 ‘천사 같다’ ‘예수님 같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되고 그들은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 성도들은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감동을 주는 삶을 삽시다.

세 번째,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우리와 격려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성령은 보혜사 성령입니다. 성령은 위로의 영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교회가 성령의 위로가 있음으로 인해 핍박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돕는자로서 변호자로서 성도들이 세상을 능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내주하시며 위로하시고 권면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성령이 충만한 교회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성령의 도움과 인동하심과 격려하심과 위로하심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면 이런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도 현제보다도 더욱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도 여러분 한분 한분이 성령이 충만하며 우리교회 전체가 성령충만한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성도는 상처받고 찢긴 심령을 위로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위로가 필요한 사람, 즉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우선은 우리 모두가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상처받고 찢기고 눌림받고 억울함을 당한 심령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좌절과 낙망에 빠진 영혼들을 격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평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며 성령충만으로 위로와 격려를 하며 살아가는 성도들로 채워진 교회는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됩니다. 든든히 서간다고 할 때 ‘서간다’는 단어가 현제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따라서 한번 선 채로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든든히 서가는 교회는 날로 부흥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을 싫어하는 목사,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만 구원시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기까지만 기다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에스겔33장11절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잘못된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까? 이상한 기적을 갖고 있는 교회들 가운데 또 다른 기적, 즉 모두가 성장하지 않고 부흥하지 않는 교회 가운데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선택은 여러분이 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든든히 서가는 교회 날마다 믿는 수가 더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든든히 서가고 날마다 수가 더하는 부흥하는 교회를 위하여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교회창립/ 새 교회를 향한 감사와 소망 /시48:1-14
2008-11-15 08:13:25   read : 73

오늘 우리 교회 창립60주년 생일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위해 수고하시고 기도하시며 충성하신 모든 성도님들께도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더 크신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시48편의 말씀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우리 교회를 생각하며 감사와 소망의 말씀을 드리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시48편은 고라 자손들이 시온산을 향해 부르는 감사의 고백과 소망을 담은 시요 찬양입니다.
이 시48편은 왕하19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다 물리치고 대 승리를 거둔 후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시를 읽으면서 이 새 언덕, 즉 우리 교회에 지난 60년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고,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고 영원한 미래를 향한 새로운 소망과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새언덕의 역사와 의미를 바로 깨달읍시다.(1-8절)

본문 시48:1-8절에서 고라 자손들은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시온성에 대한 의미와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하면 정말 위대하십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와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셔서 적들을 다 물리치시되 완전히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이요 거룩한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 예루살렘도 처음에는 허허벌판이고 보잘 것없는 산 언덕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하나님의 성이요 거룩한 평화의 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라고 했는데 '시온'은 '요새'라는 의미로서 예루살렘 성은 영적인 요새요
우리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터가 높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여기서 높다는 것은 높은 산에 세워진 것도 있지만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처소이기에 높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것도 성을 화려하게 잘 지은 것이기도 하지만 영광스런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아름답고도 영광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이 교회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을 바르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새언덕이라는 의미인데 참으로 이름만 들어도 좋고 참된 소망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터가 높고 아름답습니다.
이대와 연대 등 신촌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저 이대 운동장에 가서 한번 교회를 올려다보시면 얼마나 웅장하고 멋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은 저녁에 이 교회 마당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면 십자가의 네온과 APM 건물과 어우러지고 하늘의 별과 어우러져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무엇보다 우리는 어떤 세상적인 시각으로만 이 교회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 교회는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세운 교회인 즐 믿습니다.

지난날 일제 식민지에서 나라를 되찾고 북쪽에 들어온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남하한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개척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올라온 성도들이 함께 어우러져 믿음과 사랑과 충성으로 한 마음이 되어 여기까지 달려온 교회입니다.
비록 두 번의 분열이 있었지만 그 속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우리는 항상 그 너머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더 크고 깊은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에 참된 교회의 영광된 모습이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깊숙이 베여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 교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영적인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로서 우리의 영적인 요새요 피난처요 은혜와 소망이 넘치는 믿음의 새언덕인 줄 믿습니다.


2. 새 언덕을 향한 감사와 사랑의 고백을 하십시다.

9-11절에서 고라 자손들은 이 시온성을 바라보며 감사와 사랑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지금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치시고 보호해 주심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좋은 예루살렘 성전도 점령당하기도 하고 파괴를 당하기도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도 서로 다툼도 있고 실수도 있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 성도들도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고라 자손들과 같이 하나님께 감사와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고 성도들 간에도 불편한 일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큰 은혜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있을 때 우리들도 고라 자손들과 같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교회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단순한 세상적인 안목이나 인간적인 욕심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할 일은 이처럼 교회를 통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이 우리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이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하나님 은혜 안에서 모과 마음 물질을 바쳐 충성하고 헌신한 성도님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영적인 눈을 열어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우리 모든 성도들도 서로 사랑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새 언덕을 향한 소망과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십시다.

이제 12-14에서 고라 자손들은 시온을 향한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고 하나님께 소망과 간구를 아뢰고 있습니다.

먼저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온성의 상태가 어떤지를 자세히 살피라는 것입니다.

지난날 비록 앗수르 나라의 적들이 쳐들어 와서 큰 전쟁을 치루기도 했었지만 이 시온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조금도 손상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지금 우리 교회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의 시설들이 어떤지 성도들의 믿음은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한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고 했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잘 해야 하지만 후대에도 잘 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역사를 잘 전수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교회의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좋은 믿음의 유산을 물려줘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앞에서 이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 하셨던 분들이 물려준 믿음의 유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우리 교회를 거쳐간 많은 분들이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많은 일들을 이루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들도 많은 믿음의 유산을 잘 물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지금의 모습 중에서 좋은 것은 더 좋게 만들고 잘못된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하나하나 채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교회가 더 부흥되고 발전하며 하나님이 주신 시대적인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또 그렇게 해 주시길 소망하며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영원히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능력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죽을 날이 있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일을 했고 또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길어 봐야 겨우 몇 십 년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교회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영원한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해 주시고 영광된 그리스도의 신부로 맞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때까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교회를 잘 섬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고 물질을 생명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친히 인도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최대의 소망이요 간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언덕에 교회를 세워주시고 60주년이 되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다시한번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립시다.
그리고 시온 산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한 고라 자손같이 우리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하십시다.
나아가 이 교회를 통한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주님오실 때까지 잘 섬기고 충성 봉사하여 이 세상과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광스러운 새 언덕으로 물려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다같이 이렇게 한번 고백하십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인도해 주세요." 할렐루야! 아멘!




교회의 사명/계3:7-13(교회창립주일)
2009-05-02 11:03:54   read : 68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된지 45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김관호 목사님이 쓰신 「홍익교회 초기애환사」에 보면 1960년 12월 11일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세칭 N.A.E. 파동으로 교회가 나누는 중에 합동측이었던 성석교회 직원 일부가 따로 났다.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뜻을 같이 하는 이들, 즉 이종정, 심재원, 박문실, 주종신, 전복안 제씨와 그의 가족들이 따로 모여 예배드리기로 한 것이 본교회의 시작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45년 전 바로 오늘입니다. 그리고 12월 15일, 이종정 장로님 댁에서 14분이 첫 예배를 드리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위치를 잘 모르는 분들을 만나면 “홍익교회가 홍익대학교 부근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홍익교회란 이름이 왜 명명되었는지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설립될 당시에 과거 경찰병원이 있었던 홍익동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홍익동에서 한창 많이 모였을 때는 학생들 포함하여 200명가량 모이는 교회였으나 1967년 10월경 이 언덕에 대지를 사서 30여 평의 교회당을 짓고 이사 오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분들도 적지 않아서 많은 분들이 떠나가고 함께 이사 온 분들은 약 30-40명에 불과하여서 그 때가 제 2의 창립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덕으로 이사 온 때가 38년 전이어서 주보 첫머리에 제 38권이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45세가 된 홍익교회는 본격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장년의 나이가 된 것입니다. 교회 중에는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책망하시는 교회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다섯 교회는 칭찬 받는 면도 있었으나 책망을 받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와 빌라렐피아 교회는 칭찬만 들었지,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오늘은 빌라델피아 교회가 칭찬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를 배움으로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해야 칭찬받는 교회가 될 것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빌라델피아 교회가 칭찬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빌라델피아라는 도시는 사데에서 동남쪽으로 약 40 킬로 지점에 위치한 소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지리적 요충지였습니다. 서머나와 서북 아시아, 브루기아를 잇는 도로를 끼고 있기 때문에 동과 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매우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직물, 피혁 공업의 발달과 양질의 포도주를 생산하는 아주 부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거대한 포도원 지대의 중심에 있어서 주조업이 번성함으로 술의 신(神)인 ‘디오니소스’를 주신(主神)으로 모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애주가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그에 따라 음란이 가득한 방탕의 도시였습니다. 그렇게 부요한 도시에서도 빌라델피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 가난한 교회라고 불러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향락이 만연하고 도덕이 타락한 분위기에서 돈을 벌려고 하면 세상 사람과 같이 술과 음란에 끼어들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회가 부패할수록 정직하게 돈을 번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과 거래를 하려면 같이 요정에 가서 술을 먹고 음란을 함께 해야 잘 이루어집니다. 전혀 안될 일도 술집이나 고급 요정에 가서 함께 어울리면 가능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빌라델피아 교회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교회가 된 이유가 세상과 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교인들은 비록 빈한했으나 결코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말씀대로 믿고 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써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요, 그런 사람에게 결국 주어지는 것은 책망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 진리와 생명이 되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기독교인은 힘써 지켜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가 칭찬을 들은 것은 비록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혹은 명예를 다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신앙고백과 같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귀한 처녀가 돈이 많고 유복한 집안으로 시집갈 수 있음에도 가난한 청년에게 시집을 왔다면 “나는 세상 그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백 마디의 말보다 그런 결단이 더 귀한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말의 고백보다 행동의 고백을 보시고 칭찬과 책망의 가늠 하시는 것입니다. 1925년경, 소련에서는 전 국가적으로 기독교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자행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를 박해하던 기관의 책임을 맡았던 부르실바라는 사령관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며느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체포되게 되었습니다. 그 부하들은 상관의 며느리를 어떻게 하든지 살려 보려고 달랩니다.

“부인, 딱 한번만 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당신을 내 보내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완강하게 부인하기를 “나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셨는데 내가 어찌 죽음이 두려워 그 분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브르실바 사령관은 마지막으로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이제라도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끝까지 거절하고 오히려 기쁨과 찬송을 부르며 얼굴에는 평화의 빛까지 가득 넘쳤습니다. 사령관은 화가 나서 “네 얼굴에 웃음을 멈춰라.”고 호통을 쳤지만 며느리는 조용한 소리로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내 육신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마음에 솟아나는 이 끝없는 기쁨과 감사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 교회와 교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겠노라.”는 단호한 자세를 가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빌라델피아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빌라델피아 교회가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그 도시는 우상 숭배가 매우 심하여 신앙 생활하는 데 많은 고난이 따랐습니다. 9절 말씀에 보면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고 했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왜 유대인을 사단의 회라고 했습니까?

유대인은 혈통 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면서 실상은 사단의 종노릇을 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그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도 안팎으로 핍박과 환난을 당했는데, 안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가하는 핍박이요, 밖으로는 우상 숭배자들이 가하는 핍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고 끝까지 안내하면서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900년대에 모든 국가들과 도시들이 터키가 몰고 온 회교의 세력에 의해서 굴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델피아라는 도시는 1932년까지 기독교 도시로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성지순례하면서 그 교회 터에 가보면 빌라델피아 교회는 굉장히 큰 교회였던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칭찬하는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교회요, 어떠한 고난이나 핍박이 오더라도 십자가 지고 인내하면서 주님을 따라 가는 교회입니다. 영락교회가 초창기에는 크게 두 쪽으로 갈라질 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의주 제 2교회를 시무 하시던 한경직 목사님이 공산당을 피해서 월남한 후에 영락교회 전신인 베다니 교회를 세우자, 신의주와 평북 중심의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과거 신의주 제 2교회 신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판을 치게 되자, 신의주 제 1교회 출신들이 은근히 비위가 상해서 자기들도 따로 교회를 만들고 신의주 제1교회 목사님이셨던, 당시 충북 도지사로 있던 윤화영 목사님을 모셔 오자하고 청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윤화영 목사님이 서울로 와서 자기를 모시려는 교인들 대표를 만나서 야단을 쳤습니다.

“이북에서 쫓겨 왔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아직도 네 교회, 내 교회가 무엇이냐? 한 목사님을 잘 모시고 영락 교회를 잘 섬기라”고 권면함으로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주님의 이름만 높이는 자세입니다. 어느 목회자 중심으로 뭉치거나 어느 지방 사람들 중심으로 뭉치어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우상을 세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 홍익교회는 주님 오실 때가지 결코 사람을 중심한 교회가 아닐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는 교회가 됨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빌라델피아 교회는 열린 문을 통해서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다시 한번 8절을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교회는 하나님이 일할 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문을 열어 주실 때 그 문을 통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일할 문, 일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주춤거리거나 순종하지 못하면 주님이 문을 닫으시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주님이 문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주님이 문을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전도의 문, 선교의 문도 하나님이 열어 주실 때 순종으로 나가서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점점 더 크게 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하나님이 선교의 문을 주실 때에 열심히 복음을 전하므로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되었으나 교회가 점점 부유함으로 비대해지고 권력자들과 가까워지자 교회의 순수성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 복음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으나 선교의 열심을 나타내지 않자, 교회는 점점 침체해지고 마침내 고트족으로 보내어 로마교회를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야만족인 고트족이 복음을 받아들여 북유럽의 선교의 문을 열게 했습니다.

독일교회도 문이 열렸을 때 열심히 선교했으나 후에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생명력을 잃음으로 선교의 열심이 식어질 때 수천 명이 모이던 교회가 오늘은 몇 십 명도 모이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학자 김의환 교수는 말하기를 “유럽에서는 교인들이 2,000명 이상씩 등록 되어 있으나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수는 고작 60여명이요, 그것도 거의 노인뿐이라.”고 했습니다.

미국 교회에게 선교의 문이 열렸을 때 최고로 많이 보낼 때는 59개국의 파송된 선교사가 4,500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 75%가 미국인 선교사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선교하는 교회를 축복하셔서 세계 최강의 교회요, 최강의 나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무기산업에 열을 올리고 미국교회가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선교사의 수를 점점 줄이기 시작할 때에 교인 수가 날로 감소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한국교회에게 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열심히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힘쓰고 있어서 어느 때는 과열할 정도이고 무질서하게 느껴질 때도 있으나 이러한 열심이 결코 식어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 선교가 시급한 것은 마지막 때의 끝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콜린 데일 박사가 쓴 저서인 「주님 재림의 날과 시간」이라는 책에서 그는 대단히 심각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말세의 시기를 가장 정확히 알려면 성경의 중심 민족인 이스라엘인들을 주목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가 범죄할 때에 모세를 통해서 예언 하시기를 레26:18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네 차례나 이방인들, 즉 바벨론, 메대 파사, 헬라, 로마에 의해서 징계하셨는데 만일 그들이 그 징계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를 범하면 열국 중에 흩으시리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1년을 360일로 치는데 여기에 칠 배라 하면 360×7=2520일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이방인, 즉 바벨론의 속국이 되던 해가 주전 640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산해서 2520년을 계산해 보면 놀랍게도 서기 1917년이 됩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유대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세계에서 추방당하여 살다가 1917 년 발포어 선언을 하고 처음으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25,000명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거의 2,000년 동안 빼앗겼던 땅에 돌아온다는 것은 그것은 역사적으로 기적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민족이 거의 1,300년 전에 잃었던 고구려 땅인 만주를 다시 찾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또한 콜린 데이 박사는 다니엘에 예언된 말씀을 풀이합니다. 단8:13-14 “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 준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힘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한 죄로 이방인들에게 밟히게 되고 성전이 짓밟히게 되는데 언제까지 밟힙니까?’라는 질문인데 그 대답은 2,300 주야, 즉 2,300 년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주전 333년에 성전을 짓밟고 점령했는데 그 때로부터 2,300년을 계산해 보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을 다 시 탈환한 때인 1967년이 된다는 계산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성경은 이렇게 정확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사건들을 해석하려면 이스라엘이라는 잣대를 통해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2005년 지금 이스라엘에 대한 성경적 예언은 무엇입니까? 구약에 또 하나의 예언서인 겔38:8에 보면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폐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여러 나라에서 모여 들어오며 이방에서 나와 다 평안히 거주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 때문에 서기 70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동안 세계 모든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너무나 비참하게 박해를 받다가 하나님이 칼을 풀어주시니 그 때부터 세계 모든 나라에 로부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기 시작함으로 마침내 1948년 5월 14일에 극적으로 독립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거의 57년 동안 주변 아랍나라들 때문에 갖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위협하던 나라가 이라크로, 훗세인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겠다고 큰 소리 치면서 침략을 준비했으나 결국 미국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 것도 우연히 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에스겔의 예언대로 지금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나라가 되어 평안히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이처럼 평안한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전에 소개했던 겔38:8 이후에는 무시무시한 사건들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다만 폭풍 전야의 고요일 뿐입니다. 언제 어떠한 세계적인 사건들이 터질지 모르는 속에 우리는 숨 가쁘게 살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한 증거로 보면 주님의 재림이 대단히 임박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에게 선교의 사명, 선교의 촛대를 옮겨 오셨다는 것은 대단히 보람된 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 열려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선교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45년 동안 이렇게 축복하여 주셔서 장년 재적수 1,349명, 교회학교 재적수 452명 등, 약 1,800명의 식구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또한 재정도 홍익선교회를 포함한다면 10억을 넘게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전력을 다해 선교 하는 일에 진력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동안 우리 교회는 나름대로 교회 밖을 위해서 큰일들을 행해왔습니다. 창립35주년 기념으로 고양홍익교회를, 창립40주년 기념으로 복된홍익교회를, 창립45주년 기념으로 아세아홍익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그 동안 몇 나라를 부분적으로 협동 선교하던 것에서 2004년부터 두 가정을 파송하여 전담선교하기 시작하고 지금 훈련 중에 있고 외국인근로자 선교, 선교인재 양성 등 국내 선교와 해외 선교에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대부분의 교우들이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금년은 얼마나 어려우신지 그렇게 열심히들 헌금하셨지만, 예산보다 1억이 미달될 형편입니다. 그런 어려운 가운데도 열심히 일반 헌금과 선교를 해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 자체도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국내, 국외 선교와 이웃봉사를 위해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열심을 다해주시는 당회와 제직회, 모든 교우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하나님도 참으로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우리 교인들을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는 영적긴장을 늦추지 마시고 더욱더 많은 국내선교와 해외선교를 위해 열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 끝인지라, 앞으로 어떠한 무시무시한 자연의 이변이나 세계적인 사건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열심히 선교에 힘쓰는 가정, 열심히 선교에 힘쓰는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 끝 날까지 눈동자같이 친히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랑하시는 홍익의 성도 여러분이여, 이제 우리 교회가 45주년 동안 하나님이 열어 주신 문을 통해서 열심을 다한 것처럼 앞으로도 더욱 선교와 봉사에 힘씀으로 하나님이 칭찬 하시는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창립// 행복을 주는 교회 /눅13:18-19
2009-05-02 10:51:46   read : 64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된 지 36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72년 6월25일 작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하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는 호남제일의 교회를 꿈꾸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면서 오늘날 꿈꾸었던 호남제일의 교회를 이룩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하심입니다. 또한 먼저 믿은 선배들의 기도와 헌신과 충성의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목사나 장로나 그 누구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게 세워졌고 부흥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땀과 눈물과 헌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호남제일의 교회를 꿈꾸었던 것은 결코 우리의 자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선교를 위해서 가졌던 꿈이요 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호남제일의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의 크기나 성도의 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가에 있으며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서 우리는 호남 제일의 교회를 꿈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외적 성장만을 자랑하지 말고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로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늘 교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좋은 소문을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 사회에 선한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물론입니다. 진정 우리 교회가 불신자들에게도 인정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참 좋은 교회야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지역 어르신 초청경로잔치가 있었습니다. 약 500명 조금 못되는 어르신들이 오셔서 성황리에 잔치를 했습니다. 10시30분부터인데 일찍 오셔서 기다리시는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꿈꾸는 뜰 공연장에 가득 메운 어르신들은 공연을 보시며 즐거워하시고 여선교회 회원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잡수시면서 즐거워하셨습니다.

여선교회는 물론 남선교회, 청장년회, 또한 장로님들 모두 함께 그분들을 섬기며 봉사하는 일에 함께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인사 말씀 중에 내년에는 1000명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잔치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실 지금부터 걱정이 됩니다. 그분들이 모두 식사를 하시려면 공간이 많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식당을 빨리 개선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특히 쉽게 들어오실 수 있도록 입구를 잘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식당 뒷문으로 있는 계단의 경사가 너무 급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어르신들을 부축해드리고 손잡아 드리면서 도와드려야만 했습니다. 저도 계단 도우미 역할을 했습니다.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그래도 어르신들은 제 손을 잡으면서 목사님이 손수 손잡아 주시고 부축해주시니 좋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무 고맙다고 참 좋은 교회라고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소문을 내고 있습니다. 가보고 싶은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 교회로 나오시겠다는 분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목사님들 사이에서도 방문하고 싶은 교회, 가서 설교하고 싶은 교회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자랑거리가 참 많습니다. 제가 무엇보다 자랑하는 것은 성도님들입니다. 저는 동료목회자들에게 교회 부흥의 비결은 성도님들의 열정과 헌신에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성도님들이 얼마나 은혜가 많은지... 상냥하고 친절한지...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말씀을 잘 경청하는지.. 찬양이 있는 교회, 말씀에 사모함이 있는 교회,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자랑합니다.

또한 저는 장로님들을 자랑합니다. 열정과 헌신이 남다르며 기도하시는 장로님들을 자랑합니다. 무엇보다 비전을 함께하는 열려진 마음과 자세를 가진 장로님들을 자랑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가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으로 이전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같은 큰 부흥이 과연 가능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10여년 전에 교회를 이전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꿈과 비전을 가지고 결단함으로 목사님을 도와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에 교회를 건축한 것입니다. 장로님들의 결단이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들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합니다. 백발의 머리 앞에 머리를 숙이라고 했는데 그분들 앞에 정말 머리가 숙여집니다. 권사님들의 눈물의 기도가 우리 교회의 부흥의 힘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순종 잘하고 무엇이든지 맡기면 책임 있게 그 일들을 잘 감당하시는 집사님들을 자랑합니다. 다른 교회가 부러워하는 것이 우리 교회는 무엇이든지 맡겨지면 잘된다는 것입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헌신하는 집사님들은 우리 교회의 큰 자랑거리입니다.

제가 또 자랑하는 것이 찬양대와 교회학교입니다. 찬양대는 모든 예배 때마다 예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어린이 찬양단에서 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찬양단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모두 수준급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좋습니다.

교회학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국에서 부흥하는 20대 교회학교에 우리 교회 교회학교가 들어갑니다. 1000여명의 교회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을 키워가고 있는 교회학교입니다.
교회학교 부흥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사들의 헌신과 충성입니다. 사실 교회학교 부흥의 핵심은 교사들에게 있습니다. 교사들의 헌신과 열정만큼 교회학교가 세워지는 것을 봅니다.

특히 자랑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2년 전에 개관한 꿈꾸는 뜰 교육문화센터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꿈 뜰이 그렇게 널리 사용되는 건물이 될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역사회를 섬기려는 꿈을 가지고 시작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찾아오는 분들이 깜짝 놀라는 것은 이 모든 운영을 교회가 헌신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도님들의 땀과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꿈 뜰을 이용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공연장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교육이 실시되고 많은 단체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양하게 진행되는 문화 강좌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정보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어린이 도서관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와서 독서를 하고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지역에 어린이 집에서 견학을 오는 필수 장소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의자도 어린이 도서관의 자랑거리이기도 합니다.

꿈꾸는 뜰 문화센터는 토요일과 주일에는 교회학교에서 사용하고 평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사용하는 늘 열려진 건물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설립한 교육관을 보면 주일에만 사용되어지고 주중에는 건물이 텅 비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의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이 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꿈꾸는 뜰은 그렇게 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꿈꾸는 뜰은 복음전파를 위해서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로 들어오기가 힘든 불신자들이 쉽게 교회로 들어 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간접 선교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너무 많은데 너무 자랑하다보면 혹 교만하게 비춰질까봐 그만해야겠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자랑거리보다 더 중요한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자랑입니다.

지난주일 오후 예배시간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자랑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는데 그 교회의 자랑은 한결같은 믿음, 성장하여 진보하는 믿음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성도의 교제 속에 넘치는 사랑의 풍성함을 자랑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는 믿음의 인내를 자랑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자랑거리가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에 화려한 것을 자랑하는 것보다 더욱 성도들의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자랑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사람을 세우는 교회,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를 자랑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 아주 작은 씨입니다. 마치 채송아 씨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씨가 심겨졌습니다. 그리고 싹이 나서 자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큰 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가지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틀고 쉬어 갈 만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교회에 대하여 적용하는 말씀으로 이해해 보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심으시는 씨앗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자라야 합니다. 큰 나무로 자라야 합니다. 새들도 둥지를 틀고 지나가는 나그네도 쉬어갈 만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쉼을 제공하고 안식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목적이 교회를 위해서 일까요? 세상을 위해서일까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을 위해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은 오히려 교회를 손가락질 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교회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선한 영향력을 이 땅에 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목적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제까지 교회의 목적을 위해서 교회를 세웠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교회를 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이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는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세워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세워지는 교회는 세상에 행복을 주는 교회입니다.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 교회는 본문의 말씀처럼 겨자씨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첫째, 생명 있는 씨앗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생명 있는 씨앗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교회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겨자씨가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 씨앗 속에 있는 생명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예수 생명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늘 중심에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겨자씨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죽었다는 표현 보다는 희생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 것입니다.
희생하려는 사람이 없이 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오늘의 부흥도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님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헌신 곧 희생입니다. 시간의 헌신, 물질의 헌신, 마음과 정성을 다한 헌신이 희생의 씨앗이 되어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셋째, 건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병든 교회가 되어서는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은 건강하면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교회는 자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은 육신적인 건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건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세워지고 쓰임 받는 진정한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 교회는 2008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라는 표어를 세웠습니다. 행복을 주는 교회, 정말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교회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다시 교회를 진단해 봐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는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중심하는 교회인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나의 헌신과 희생이 교회 속에 담겨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헌신하고 희생하고 있는지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교회는 이 땅을 위해서 희생하는 교회가 되어질 때 진정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건강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건강은 물론이지만 영적으로 건강한 성도들이 되어야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교회가 건강해지면 가정이 건강해지고 이 사회가 건강해지게 될 것입니다.

제가 늘 꿈꾸는 교회의 모습은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같은 교회입니다.
영혼을 사랑하여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절망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교회입니다. 믿음의 복된 가문을 세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리며 베푸는 교회입니다. 세상에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정말 우리가 해야 할 것 그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젠돌프는 말했습니다.
“더 만족스럽고 오래 가는 것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관계적 앎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도 관계적 앎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머리로 알 때에 타인을 저주했습니다. 사나워져 있었습니다. 가슴으로 알고, 관계로 알 때에 자기를 저주했습니다. 겸손해져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머리로 하나님을 알 때에는 죽이고, 잡아가고, 저주하고, 사나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알 때에 살리고, 용서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겸손 같지만 사실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바울도 우리보다 잘난 것이 없는 범인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전서 11:1에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푸아티에의 힐러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시도하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오르며,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예수님, 감히 갈 수 없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방하면 닮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 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소위 짱이 되기 위해서는 모창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을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은 자신을 잃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배우 설경구라는 사람을 아시지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배우는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모습에 만족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랑스러운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당신을 보니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닮은 성도들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옆사람에게 “당신을 보니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창립// 행복을 주는 교회 /눅13:18-19
2009-05-02 10:51:46   read : 66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된 지 36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72년 6월25일 작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하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는 호남제일의 교회를 꿈꾸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면서 오늘날 꿈꾸었던 호남제일의 교회를 이룩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하심입니다. 또한 먼저 믿은 선배들의 기도와 헌신과 충성의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목사나 장로나 그 누구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게 세워졌고 부흥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땀과 눈물과 헌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호남제일의 교회를 꿈꾸었던 것은 결코 우리의 자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선교를 위해서 가졌던 꿈이요 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호남제일의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의 크기나 성도의 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가에 있으며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서 우리는 호남 제일의 교회를 꿈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외적 성장만을 자랑하지 말고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로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늘 교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좋은 소문을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 사회에 선한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물론입니다. 진정 우리 교회가 불신자들에게도 인정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참 좋은 교회야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지역 어르신 초청경로잔치가 있었습니다. 약 500명 조금 못되는 어르신들이 오셔서 성황리에 잔치를 했습니다. 10시30분부터인데 일찍 오셔서 기다리시는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꿈꾸는 뜰 공연장에 가득 메운 어르신들은 공연을 보시며 즐거워하시고 여선교회 회원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잡수시면서 즐거워하셨습니다.

여선교회는 물론 남선교회, 청장년회, 또한 장로님들 모두 함께 그분들을 섬기며 봉사하는 일에 함께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인사 말씀 중에 내년에는 1000명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잔치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실 지금부터 걱정이 됩니다. 그분들이 모두 식사를 하시려면 공간이 많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식당을 빨리 개선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특히 쉽게 들어오실 수 있도록 입구를 잘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식당 뒷문으로 있는 계단의 경사가 너무 급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어르신들을 부축해드리고 손잡아 드리면서 도와드려야만 했습니다. 저도 계단 도우미 역할을 했습니다.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그래도 어르신들은 제 손을 잡으면서 목사님이 손수 손잡아 주시고 부축해주시니 좋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무 고맙다고 참 좋은 교회라고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소문을 내고 있습니다. 가보고 싶은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 교회로 나오시겠다는 분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목사님들 사이에서도 방문하고 싶은 교회, 가서 설교하고 싶은 교회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자랑거리가 참 많습니다. 제가 무엇보다 자랑하는 것은 성도님들입니다. 저는 동료목회자들에게 교회 부흥의 비결은 성도님들의 열정과 헌신에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성도님들이 얼마나 은혜가 많은지... 상냥하고 친절한지...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말씀을 잘 경청하는지.. 찬양이 있는 교회, 말씀에 사모함이 있는 교회,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자랑합니다.

또한 저는 장로님들을 자랑합니다. 열정과 헌신이 남다르며 기도하시는 장로님들을 자랑합니다. 무엇보다 비전을 함께하는 열려진 마음과 자세를 가진 장로님들을 자랑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가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으로 이전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같은 큰 부흥이 과연 가능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10여년 전에 교회를 이전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꿈과 비전을 가지고 결단함으로 목사님을 도와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에 교회를 건축한 것입니다. 장로님들의 결단이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들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합니다. 백발의 머리 앞에 머리를 숙이라고 했는데 그분들 앞에 정말 머리가 숙여집니다. 권사님들의 눈물의 기도가 우리 교회의 부흥의 힘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순종 잘하고 무엇이든지 맡기면 책임 있게 그 일들을 잘 감당하시는 집사님들을 자랑합니다. 다른 교회가 부러워하는 것이 우리 교회는 무엇이든지 맡겨지면 잘된다는 것입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헌신하는 집사님들은 우리 교회의 큰 자랑거리입니다.

제가 또 자랑하는 것이 찬양대와 교회학교입니다. 찬양대는 모든 예배 때마다 예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어린이 찬양단에서 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찬양단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모두 수준급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좋습니다.

교회학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국에서 부흥하는 20대 교회학교에 우리 교회 교회학교가 들어갑니다. 1000여명의 교회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을 키워가고 있는 교회학교입니다.
교회학교 부흥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사들의 헌신과 충성입니다. 사실 교회학교 부흥의 핵심은 교사들에게 있습니다. 교사들의 헌신과 열정만큼 교회학교가 세워지는 것을 봅니다.

특히 자랑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2년 전에 개관한 꿈꾸는 뜰 교육문화센터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꿈 뜰이 그렇게 널리 사용되는 건물이 될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역사회를 섬기려는 꿈을 가지고 시작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찾아오는 분들이 깜짝 놀라는 것은 이 모든 운영을 교회가 헌신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도님들의 땀과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꿈 뜰을 이용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공연장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교육이 실시되고 많은 단체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양하게 진행되는 문화 강좌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정보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어린이 도서관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와서 독서를 하고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지역에 어린이 집에서 견학을 오는 필수 장소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의자도 어린이 도서관의 자랑거리이기도 합니다.

꿈꾸는 뜰 문화센터는 토요일과 주일에는 교회학교에서 사용하고 평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사용하는 늘 열려진 건물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설립한 교육관을 보면 주일에만 사용되어지고 주중에는 건물이 텅 비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의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이 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꿈꾸는 뜰은 그렇게 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꿈꾸는 뜰은 복음전파를 위해서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로 들어오기가 힘든 불신자들이 쉽게 교회로 들어 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간접 선교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너무 많은데 너무 자랑하다보면 혹 교만하게 비춰질까봐 그만해야겠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자랑거리보다 더 중요한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자랑입니다.

지난주일 오후 예배시간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자랑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는데 그 교회의 자랑은 한결같은 믿음, 성장하여 진보하는 믿음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성도의 교제 속에 넘치는 사랑의 풍성함을 자랑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는 믿음의 인내를 자랑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자랑거리가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에 화려한 것을 자랑하는 것보다 더욱 성도들의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자랑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사람을 세우는 교회,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를 자랑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 아주 작은 씨입니다. 마치 채송아 씨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씨가 심겨졌습니다. 그리고 싹이 나서 자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큰 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가지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틀고 쉬어 갈 만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교회에 대하여 적용하는 말씀으로 이해해 보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심으시는 씨앗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자라야 합니다. 큰 나무로 자라야 합니다. 새들도 둥지를 틀고 지나가는 나그네도 쉬어갈 만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쉼을 제공하고 안식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목적이 교회를 위해서 일까요? 세상을 위해서일까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을 위해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은 오히려 교회를 손가락질 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교회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선한 영향력을 이 땅에 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목적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제까지 교회의 목적을 위해서 교회를 세웠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교회를 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이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는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세워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세워지는 교회는 세상에 행복을 주는 교회입니다.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 교회는 본문의 말씀처럼 겨자씨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첫째, 생명 있는 씨앗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생명 있는 씨앗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교회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겨자씨가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 씨앗 속에 있는 생명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예수 생명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늘 중심에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겨자씨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죽었다는 표현 보다는 희생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 것입니다.
희생하려는 사람이 없이 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오늘의 부흥도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님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헌신 곧 희생입니다. 시간의 헌신, 물질의 헌신, 마음과 정성을 다한 헌신이 희생의 씨앗이 되어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셋째, 건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병든 교회가 되어서는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은 건강하면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교회는 자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은 육신적인 건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건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세워지고 쓰임 받는 진정한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 교회는 2008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라는 표어를 세웠습니다. 행복을 주는 교회, 정말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교회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다시 교회를 진단해 봐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는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중심하는 교회인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나의 헌신과 희생이 교회 속에 담겨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헌신하고 희생하고 있는지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교회는 이 땅을 위해서 희생하는 교회가 되어질 때 진정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건강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건강은 물론이지만 영적으로 건강한 성도들이 되어야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교회가 건강해지면 가정이 건강해지고 이 사회가 건강해지게 될 것입니다.

제가 늘 꿈꾸는 교회의 모습은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같은 교회입니다.
영혼을 사랑하여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절망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교회입니다. 믿음의 복된 가문을 세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리며 베푸는 교회입니다. 세상에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정말 우리가 해야 할 것 그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젠돌프는 말했습니다.
“더 만족스럽고 오래 가는 것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관계적 앎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도 관계적 앎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머리로 알 때에 타인을 저주했습니다. 사나워져 있었습니다. 가슴으로 알고, 관계로 알 때에 자기를 저주했습니다. 겸손해져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머리로 하나님을 알 때에는 죽이고, 잡아가고, 저주하고, 사나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알 때에 살리고, 용서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겸손 같지만 사실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바울도 우리보다 잘난 것이 없는 범인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전서 11:1에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푸아티에의 힐러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시도하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오르며,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예수님, 감히 갈 수 없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방하면 닮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 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소위 짱이 되기 위해서는 모창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을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은 자신을 잃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배우 설경구라는 사람을 아시지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배우는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모습에 만족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랑스러운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당신을 보니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닮은 성도들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옆사람에게 “당신을 보니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창립/ 신령한 교회로 만듭시다/벧전2:1-6
2009-05-02 11:01:48   read : 4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택하여 부르셨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3년 동안 같이 훈련하시며 계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셨고,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 되심과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려 주셨고, 택한 제자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계속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어보시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신앙고백 할 때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는 자에게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구원의 축복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처음 만났을 때 사용했던 이름 대신에 신앙고백한 후에는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고(요1:42), 3년이 되던 해에 베드로의 '이름 위에(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을 하는 신자들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난 뒤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애 되심을 담대히 증거하며, 전도 사역을 잘 감당하여 마침내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인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존재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기준하여 마치 사업을 경영하는 것처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즉, 육적인 기준을 가지고 교회의 성공여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크게 올려 교회당을 세웠다고 해서 훌륭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봉사하고 구제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일한다고 해서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시적인 어떤 외형적인 보이는 결과만으로 교회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자선 사업가는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셨으나 그렇다고 의사는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으나 교육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밀 부르너'는 [교회의 오해]라는 책에서 교회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룹별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배웁니다. 그러나 교회는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 진리를 배운다고 해서 학교와 같은 곳이 아닙니다. 교회가 구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본다고 해서 자선 단체로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교회를 비판합니다. 교회를 사업 단체로 오해하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구제를 많이 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사회의 불의에 대하여 저항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본질은 신령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다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맛 볼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하여 신비한 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요, 이 귀한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 모임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보십시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함께 떡을 떼며 교제했습니다.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습니다. 이 대 믿는 자들에게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으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자신의 것을 서로 나누며 살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모인 모든 무리들은 주님의 명령인 행 1 : 4절을 따라열심으로 기도하면서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하며, 날마다 전도하였고, 배운 말씀을 실천하며 구제하였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나라 확장과 예수그리스도게서 메시야 되심을 믿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도들의 모임을 신령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미스바교회가 이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르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 신령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만 교회 존재의 가치가 있는 줄 믿습니다.

초대교회는 건물보다 성도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의 몸이요. 지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핍박과 환란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고, 자신들도 부활한다는 분명한 믿음이 굳건했고, 동시에 재림 신앙에 근거한 '종말론적인 믿음의 공동체'였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그 날을 사모하며, 받든바 은혜를 가지고, 서로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미스바교회도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명을 감당하여야 신령한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1. 신령한 젖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갓난 아들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에서 '갓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겐네타'(* ) 는 '아르티'(* , '방금')와 '겐나오'(* , '되다', '나다')의 합성어로 방금 태어난 상태를 묘사해 줍니다(Lenski, Robertson).

이 '갓난아이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자에 대한 비유로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간절히 찾듯이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마 18:3; 막 10:14,15).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생명력이 있고, 살아 움직이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하며, 영적인 양식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젖과 같고, 순수한 젖과 같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1) 혹자는 '말씀의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AV, Calvin, Bigg, Caffin, Bengel, Keil, Lenski).

2) 또 다른 해석은 '사리에 맞는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RSV, Vincent, Hort). 그러나 두 가지 해석 중 '말씀의 젖'이 타당하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장에서도 '말씀'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1:23-35) 본 절 후반부에서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수하고 신령한 젖'은 가감이 없는 순수 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말씀의 젖으로 성도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말씀의 젓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냅니다.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성장하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성장하고 성숙해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가능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히 5:11-14).

'온전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으로 진리를 성령의 역사로 깨닫고, 회개하여 메시야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영적'으로는 죽은 영혼이 거듭나며, '법적'으로 죄의 용서를 받는 '칭의'와 '가족적'으로는 하나의 자녀가 되며, '소속적'으로는 천국시민이 되어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며, 영화롭게 하시는 영생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방금 태어난 어린이가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 하며, 더운 여름철에 시원한 냇가나 그늘이나 바람을 찾아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떠나는 것처럼 우리들은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젖은 태어난 어린 아이가 먹는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젖을 먹으므로 무럭무럭 자라나게 합니다. 저항력이 우유를 먹은 아이들 보다 모유를 먹으면 더 강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들도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신령한 젖을 먹고, 영혼이 건강하고 신령한 모습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미국 감리교 '알렌'목사는 자기 교인을 대상으로 조사했답니다. "교인 중 등록은 했지만 20%는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며, 25%는 기도하지 않으며, 35%는 성경을 읽지도 않으며, 40%는 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있고, 75%는 봉사를 하지 않고 있으며, 85%는 한 사람도 전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통계를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들 100%가 모두가 천당을 가는 것은 희망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신령한 것입니까? 세속적인 것입니까? 세속적인 것과 신령한 것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살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어느 것을 더욱 더 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라나기를 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위치가, 경제적으로 사업이 자라나고, 재산도 불어나기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신령한 것도 자라나기를 갈망합니까?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받은 자가 맛보는 은혜의 단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십자가의 용서를 맛보아야 합니다. 죄의 용서를 맛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신령한 젖을 처음으로 맛보는 것입니다.
2) 하늘의 은사를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주는 신령한 은사를 맛본 사람은 이 세상 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3) 성령의 능력을 맛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권세가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4) 내세의 능력을 맛보아야 합니다. 나사로는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부자의 밥상'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로는 세상에서 천국을 소유하고 살았습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는 현재 천국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단계로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암 부스'는 앞으로 다가 올 교회의 위험은 성령이 없는 교회,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이 없는 천국을 선포하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더욱이 본문에서 '구원'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화의 완성(完成)을 시사를 한 것입니다. 이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계속적인 성장으로 나타내 보여야 할 미래의 목표이기도 합니다(1:5,9; 고전 3:1-4, Stibbs, Caffin).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어 성령의 능력, 내세의 능력을 체험하며, 참된 소망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반드시 구원을 받되, 충성된 헌신 자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교회가 '신령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4-5절을 봅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라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집'은 저자가 본 절에서 그리스도인을 '제사 직'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아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시 69:9;사 56:7; 막 11:17, Blum).

한편 '세워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스데'(* )는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나아올 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돌'이 되며, 거듭난 자들과의 연합을 통해 교회를 이루게 됨을 강조합니다(롬 12:1; 15:16; 고전 3:16: 엡 2:21-22; 3:6, Alford, Vincent, Stibbs, Leighton, Selwyn,Mi- chaels).

여기의 집은 건물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를 의미 합니다. 구약의 신령한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앞 절에서 그리스도를 산돌에 비유하였으나 본 절에서는 '산돌'을 '그리스도인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산 돌'에 해당하는 헬라어 '리도이 존테스'(* )는 복수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산돌이 되며, 생명의 근원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가되어야 할 존재임을 시사합니다(Lenski, Leighton, Robertson).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살아있는 성전으로 오셨고 이제는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신령한 젖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신령한 집은 그리스도의 성숙된 인격을 나타내는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은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시몬은 아담의 후손인 흙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반석이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인간은 그 때부터 흙으로 없어질 존재가 아니라 비바람이 불고 죽음의 홍수가 넘쳐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위에 세워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얼마나 큰 집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산돌 같은 신자가 몇이나 되느냐가 문제입니다.(말없이 충성하는 교인)?그러므로 이 귀한 반석과 같은 신앙으로 우리 미스바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거하시는 신령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5절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신령한 산돌이 되는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산에 있는 반석으로는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반석에서 깨어져 나와야 집을 지을 수 있게 됩니다. 땅에 붙은 반석은 집 지을 수 있는 반석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름의 뜻이 반석이었으나 땅과 같이 함께 있는 반석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 다녔으나 땅의 속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였습니다. (마16:23)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로 육의 사람이 깨어지면서 신령한 신앙의 집을 세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신령한 돌이 된 성도들의 심령 속에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심령에 자신이 거하실 신령한 집을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선한 도구가 되어 신령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데 헌신 자가 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3. 신령한 예배(제사)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5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헬라어 '히에라튜마'(* )는 '제사장의 직분'이나 '제사장의 단체'를 의미합니다(눅 1:8, Hort, Meyer).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가진 '산돌'이라는 사실에서 진일보하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사 직을 수행하는 제사장이 되었음(만인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제사장적 역할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시사를 합니다(Blum, caffin, Alford, Selwyn, Reicke).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고 제물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제물을 가지고 선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그 피로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친히 피 흘리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 자신이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산제사 , 즉 신령한 제사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구약에서는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몸으로 구약의 제사 신약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거기에는 입술로 드리는 찬양의 제사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드리는 눈물의 제사가 있어야 합니다. 나의 것을 하나님의 사업에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헌신과 선행과 나누어 줌으로 드리는 '행위의 제사'가 있어야 합니다.

미스바교회에는 많은 분들이 신령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충성했기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기도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기 위해 교회와 사명을 떠나지 않고 충성해 온 장로님들 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지금도 열심히 하난을 섬기고, 미스바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알고 헌신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귀한 상급을 받으시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제사장은 구약시대 당시에 하나님의 성전(성소, 법막, 회막, 증거막)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제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제물은 미스바교회 성도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저와 함께 하나님게 드려질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양들의 털을 깍고, 젖을 짜는 목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양들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거룩한 제사장 이셨듯이 우리는 그 뒤를 따라 우리의 몸을 신령한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구약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요, 짐승을 잡는 칼잡이요, 다른 말로 하면 칼 들고 짐승 잡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의 사명은 말씀의 칼을 들고 교인들에게 내재해 있는 짐승의 근성을 잘라내어야 합니다. 칼로 육적인 것을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 구약의 제사장이요, 신약의 목사요.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믿음의 선지자가 모두 제사장들인데 아벨,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양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그는 양을 치고 그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길러서 털을 깍거나 젖을 짜지 않았습니다. 제물이 되도록 길렀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날마다 불로 태워 제사를 드리는 일(번제)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신령한 제사장이셨습니다. 자신의 피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 제물이 되어??거룩하신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의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당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아내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보면서 커다란 고민을 같고 있습니다. '양들을 살찌우고 젖 짜고 털을 잘라서 목장을 번영케 하는 사업가 목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제물이 될 양들을 기르는 신령한 제사장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어떤 마음 같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예수님처럼 참된 목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미스바교회가 부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분이라도 하나님께 헌신하는 제물이 될 사람이 없으면 그 목장은 하나님 앞에 설 때 교회의 존재목적,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한 실패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털을 자르고, 젖을 짜고 새끼 낳고 그래서 번창하기 위한 목장이 아니라 제물 삼을 양을 기르기 위하여 우리는 제사장적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한 최후 목적은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교회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들에게 신령한 젖을 먹여 자라게 해서 신령한 집이 되게 하고 결국 신령한 제물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성도들이 신령해 지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신령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으로 주님을 따르고자 합니까?

지난 금요일 구약의 언약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배웠습니까? 우리가 선택함을 받았으면 의무와 본분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해 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성도와 교회는 모이기를 힘쓸 때 가능해 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성경말씀을 배우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입술의 제사인 찬송하는 성도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이다. 천국 백성을 만드는 전도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하기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죽이고, 지금까지 충성한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제물이 되는 성도가 되어 신령한 교회와 신자가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