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성결교회

2011. 3. 10. 02:02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강경성결교회 


강경성결교회는 한국교회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진원지이다. 1924년 10월에 일어난 이 신사참배거부 사건은 일제 총독부가 1925년 조선신궁을 완공한 후 신사참배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던 정책을 10여년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은 1919년 3월에 일어난 일제 경찰에 의한 존 토마스 감독 구타 사건과도 연계되어 있다. 이 구타 사건은 영. 일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고 결국 토마스 감독은 보상금을 받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강경성결교회 최초의 예배당 (현 강경북옥감리교회- 아래 사진 참조)은 바로 이 보상금의 일부로 지어진것이다. 강경성결교회는 민족애와 항일의식에서 남다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강경 교회 내부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제막식  2006.9.20)


"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 는 1924년 10월 강경공립보통학교에서 일어난 한국내 첫 신사참배 거부를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신사참배는 당시 강경성결교회 성도였던 김복희 교사와 학생 57명이 집단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1925년 조선신궁 건립 등 신사참배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던 일본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10여년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옆면엔 기념비 건립경과보고, 뒷면엔 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1924년 12월 기독교잡지인 ‘활천’의 내용이 새겨졌다.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조형물은 5m 높이로 사용된 화강암은 강경 산 황등석이고 힌색 바탕은 순결, 믿음, 평화, 승리를 상징한다. 위에서 본 모양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물고기 모양이고 아래의 물은 생명수되시는 예수님을 뜻한다. 크기가 다른 두개의 돌은 두루마리 성경을 의미하며 오른쪽 조각은 강경교회 전도사였던 백신영 전도사와 여 교사 김복희, 그리고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강경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왼쪽 조각은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 줄지어 있는 사람들과 일본제국주의를 그렸다. 십자가는 고난을 따르는 신앙을 천사는 미가엘 천사로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한다.  아래에 있는 64개의 돌기둥 중 큰 기둥 두개는 백신영 전도사와 김복희 교사이고 나머지 62개의 돌기둥은 학생들을 상징하는데 이 중 57개는 강경성결교회 주일학생들이고 나머지 5개는 일반 학생이다. 후면 상단부는 성결교회의 상징인 "가시밭의 백합화 "를 형상화 하였다.  

 

강경성결교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강연- 이만열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장소- 강경성결교회, 일시- 2006.9.20.

강연제목-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대응”


1925년 강경공립보통학교 사건에 대해 언급하겠다. 활천 언급에 따르면 교회신자인 강경공립보통학교 여훈도 김복희 양과 그 교회 주일학교 학생 57인이 1924년 10월 11일 강경신사제일을 당하여 일반교사와 학생들은 다 경배를 하되 이들은 절하지 아니하고 학교에서는 절하지 않은 교사와 학생을 취조하여 교사를 면직하고 학생을 출학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여선생인 김복희 양은 면직되고 학생 7명은 퇴학 당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이것은 일제가 1912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하여 1925년 10월 15일에 거행할 서울 조선신궁 진좌제를 앞두고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조상숭배, 애국심고양을 위한 의식이라고 선전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 때 많은 기독교계 학교가 신사참배에 불참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강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강경교회에 출석하고 있었고 그 교회에 백신영 전도사가 지도하고 있었다. 백 전도사는 1919년 9월 김마리아가 다시 조직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결사대장으로 참여하여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1920년 강경교회에 부임하여 1927년까지 전도사로 시무하였다고 한다. 강경보통학교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배후에는 백신영 전도사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경교회 김복희 집사와 주일학교 학생 57명이 참여하여 일으킨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최초라는 의미의 해석이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이 사건은 미션계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일으킨 최초의 신사참배 반대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교사가 한 분 있기는 하지만 어린이들이 일으킨 최초의, 아마도 유일한 신사참배 거부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 교회에서 훈련받은 교사와 학생이 대거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나선 사례로서는 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애국활동을 했던 백신영 전도사의 지도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 비추어 이번 신사참배 반대투쟁은 단순히 우상숭배를 말라는 1,2 계명에 순종하기 위한 신앙적인 행동일 뿐만 아니라 그 뒤에는 애국적인 동기도 같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된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사학계에서는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투쟁으로만 해석해 왔지만 강경보통학교와 다른 옥중성도들의 반대투쟁에서도 애국적인 동기를 무시할 수 없는 점들이 보인다. 오늘 ‘최초 신사참배 거부 기념선도비’ 제막식을 맞아 그 비문에 이런 의미가 투영되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이런 사실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교육장으로서의 활용도 폭넓게 생각해 보기를 기원한다.   출처:한국성결신문    (출처- http://blog.daum.net/lee_ys)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건립소사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건립소사


"1924년 10월 11일에 강경보통학교에서 일어난 신사참배거부운동은 강경성결교회 김복희 집사 외 57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이 주역이었으며 그밖의 일부 학생들이 참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것은 담임목사였던 신영준씨였다. 2005년 11월 11일자 성결신문에 '신사참배거부 선도지에 기념비를 세우자'라는 글을 실어 공론화한 것이다. 이후 이광복 화백의 도안과 감독으로 기념물을 완성했다. 

 

기념비 후면

 

신사에 불배하고 면직을 당해 

 

작품해설

 

작품해설

 

사용된 화강암은 강경 산 황등석이고 힌색 바탕은 순결, 믿음, 평화, 승리를 상징한다. 위에서 본 모양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물고기 모양이고 아래의 물은 생명수되시는 예수님을 뜻한다. 크기가 다른 두개의 돌은 두루마리 성경을 의미하며 오른쪽 조각은 강경교회 전도사였던 백신영 전도사와 여 교사 김복희, 그리고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강경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왼쪽 조각은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 줄지어 있는 사람들과 일본제국주의를 그렸다. 십자가는 고난을 따르는 신앙을 천사는 미가엘 천사로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한다.  아래에 있는 64개의 돌기둥 중 큰 기둥 두개는 백신영 전도사와 김복희 교사이고 나머지 62개의 돌기둥은 학생들을 상징하는데 이 중 57개는 강경성결교회 주일학생들이고 나머지 5개는 일반 학생이다. 후면 상단부는 성결교회의 상징인 "가시밭의 백합화 "를 형상화 하였다. 

 

기념비 뒤 푸른초장 교회 식당 건물 

 

최초로 신사참배거부 운동이 일어났던 강경초등학교 당시 건물 모습

 

등록문화재 60호로 지정된 강경초등학교 강당(1937년 건립)

 

최초 거부 기사를 기사화 한 활천 1924년 12월호 복사판 

  

교회 2층 전시물

 

토마스 감독의 보상금 일부로 지은 강경성결교회 최초의 교회 (현 강경북옥감리교회) 에서의 교인 모습  

 

신사참배 거부를 주도한 백신영 전도사

 

1925년 3월 18일, 19일자 동아일보 사설 

 

교회 홍보물

 

교회 홍보물

 

교회 홍보물

 

교회 홍보물

 

교회 홍보물

 

교단 출판물

 

교단 홍보 책자에 기술 된 강경교회

  

 

<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제막 강연요약 >


강연- 이만열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장소- 강경성결교회, 일시- 2006.9.20.

강연제목-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대응”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대응


일제는 식민통치 초기부터 우리 민족의 특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제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의 제창과 창씨개명, 조선어 조선문자 조선역사의 폐지와 일본어 사용 등을 강요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


그중에서 가장 고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종교문제였다. 당시 한국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있어 일제가 장악은 물론 파악조차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 자칫 종교를 무단으로 억압할 경우 외교문제로 비화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구 선교사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을 그들의 정책에 동조하도록 회유하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내세워 종교인들이 민족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헌병경찰들을 동원하여 종교계에 대한 감시와 억압을 자행하였다. 한일합방 후 그들은 통제가 가능했던 불교와 유교부터 사찰령과 경학원 규칙을 제정하여 총독부가 직접 통제장악을 꾀하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이목이 있었기에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함으로써 그 활동을 위축시켰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1915년 3월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였다. 이 규칙은 1911년 10월에 제정한 것을 개악한 것으로 개정 목적은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경과목을 가르치거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교수용어도 일본어로 하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을 교사직에서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에 일반 종교계에 대해서는 억압통제 정책을 실시한 반면에 신사신도에 대해서는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법령정비를 통하여 관공립적 성격을 부여하고 천황제 이데올로기 주입과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지원, 장려하려는 정책을 취했다.


신사참배 강요


조선총독부는 1925년 조선신궁의 준공을 앞두고 신사참배와 신사신앙의 확산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정책은 어느 정도 언론의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기독교계 학교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1924년 5월 겸이포신사 낙성식에 일반인들로부터 봉축비 명목으로 기부금을 거두고 그 지역 학생들을 참배시킨 것에 대해 동아일보가 ‘맘에 없는 기부, 뜻에 없는 참배’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 총독부 학무국장이 각 도지사에게 ‘신궁대마 및 역 반포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보내 이의 보급을 장려한 것이라든지 같은 시기에 발생한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에 대한 학무국장의 통첩에도 신사신도를 초종교적 위치에 두고 이에 대한 숭경과 참배를 장려했다. 신사참배문제가 절정에 이르렀던 1938년 2월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마련하여 그들의 시책에 순응하게 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른바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를 만들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고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이용코자 하였다.


신사참배 거부운동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거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의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하는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이여 둘째는 일제의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다.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000여명에 달하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하였다고 한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였다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아니라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민족 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미 또한 클 것이다.


강경성결교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1925년 강경공립보통학교 사건에 대해 언급하겠다. 활천 언급에 따르면 교회신자인 강경공립보통학교 여훈도 김복희 양과 그 교회 주일학교 학생 57인이 1924년 10월 11일 강경신사제일을 당하여 일반교사와 학생들은 다 경배를 하되 이들은 절하지 아니하고 학교에서는 절하지 않은 교사와 학생을 취조하여 교사를 면직하고 학생을 출학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여선생인 김복희 양은 면직되고 학생 7명은 퇴학 당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이것은 일제가 1912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하여 1925년 10월 15일에 거행할 서울 조선신궁 진좌제를 앞두고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조상숭배, 애국심고양을 위한 의식이라고 선전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 때 많은 기독교계 학교가 신사참배에 불참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강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강경교회에 출석하고 있었고 그 교회에 백신영 전도사가 지도하고 있었다. 백 전도사는 1919년 9월 김마리아가 다시 조직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결사대장으로 참여하여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1920년 강경교회에 부임하여 1927년까지 전도사로 시무하였다고 한다. 강경보통학교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배후에는 백신영 전도사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경교회 김복희 집사와 주일학교 학생 57명이 참여하여 일으킨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최초라는 의미의 해석이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이 사건은 미션계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일으킨 최초의 신사참배 반대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교사가 한 분 있기는 하지만 어린이들이 일으킨 최초의, 아마도 유일한 신사참배 거부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 교회에서 훈련받은 교사와 학생이 대거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나선 사례로서는 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애국활동을 했던 백신영 전도사의 지도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 비추어 이번 신사참배 반대투쟁은 단순히 우상숭배를 말라는 1,2 계명에 순종하기 위한 신앙적인 행동일 뿐만 아니라 그 뒤에는 애국적인 동기도 같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된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사학계에서는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투쟁으로만 해석해 왔지만 강경보통학교와 다른 옥중성도들의 반대투쟁에서도 애국적인 동기를 무시할 수 없는 점들이 보인다. 오늘 ‘최초 신사참배 거부 기념선도비’ 제막식을 맞아 그 비문에 이런 의미가 투영되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이런 사실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교육장으로서의 활용도 폭넓게 생각해 보기를 기원한다.   출처:한국성결신문    (출처- http://blog.daum.net/lee_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