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2011. 3. 10. 01:58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광주 호남신학대학교 구내 언덕에 위치한 외국인 선교사 묘지는 1895년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나주, 목포, 광주에 선교부를 세우고 30년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살다가 주님의 품에 안긴 오웬 선교사, 유진 벨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와 그들의 부인과 자녀 그리고 친척 등 22명의 미국인이 묻혀있다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오웬 선교사 (1867- 1909)

 

유진벨 선교사 (1868- 1925)

 

오웬 선교사(앞), 유진벨 선교사(뒤) 

 

오웬과 유진벨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광주 지역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광주 최초의 교회인 현 광주제일교회의 연혁에 보면 1904년 12월 25일 광주 양림동 벨 선교사 주택에서 오웬 선교사 가족과 한국인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광주선교부와 광주교회(현 광주제일교회)가 설립됐다. 전남 내륙지방 선교의 거점이었던 이 교회는 그 후 교인이 증가하자 북문안으로 이동하여 예배를 드렸다. 1909년 4월 오웬선교사는 장흥의 한 시골에서 선교활동 중 갑자기 고혈로 쓰러져 급거 광주에 도착하였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또한 벨 선교사 부인 마가렛트 선교사가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병점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양림동산에 안장했으며, 벨 선교사도 노환으로 1925년 9월 삶을 마감하고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양림동산에는 22명의 선교사들이 영면하고 있다.

 

오웬 선교사(앞), 유진벨 선교사(뒤)

 

광주 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오웬 선교사


광주 외국인선교사 묘지는 남구 양림동 108번지 호남신학대학 교내 언덕에 위치하여 있다. 여기에는 1909년 광주에서 최초로 순직한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모두 26기의 외국인 선교사 또는 그 가족들의 묘가 있다. 미국 남장로회 동료 선교사 니스벳(Nisbet, Anabel M.)은 오웬 선교사의 역동적인 선교 활동의 시작에 대하여 “그의 목포선교는 오웬이 미국 북장로희 의료선교사로 제일 경험이 많고 유능한 화이팅과 1900년 결혼함으로 인하여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의사이면서 목사로 지칠 줄 모르는 순회설교자였다. 그는 삶의 마지막 해에도 13개 군의 선교지역을 담당하여 순회 전도하면서 한 달 이상을 집을 떠나 전도여행을 계속했다.”라고 하였다. 그는 20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고, 430명의 학습교인을 세웠다. 그가 별세하기 몇 일전 그의 어린 딸은 아빠는 왜? 우리 집에 계시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라고 하였다. 오웬은 1909년 3월 22일 광주를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흥에 도착했다. 그러나 주일날 아침부터 뜻하지 않게 격렬한 오한으로 떨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장흥의 교우들은 가마를 준비하여 급히 광주로 향했다. 오한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는 신음했다. 가마꾼들은 빠른 걸음을 재촉하였으나 광주까지 이송하는 기간이 3일이나 걸려 수요일 새벽 2시에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윌슨(Wilson, R. M., 禹越淳) 의사의 치료와, 목포 포사이드(Forsythe, W. H., 保衛廉) 의사에게 전보(電報)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그가 도착하기 전 4월 3일 밤 10시 45분 급성 폐렴으로 별세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장례예배는 1909년 4월 6일 광주선교부 묘지에서 프레스톤(Preston, 邊約翰)목사 집례로 거행되었으며 광주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부인(Georgiana W.)은 네 딸을 데리고 귀국하였으며 1952년 1월 24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Denver)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하였다. 양림동 67-1번지에는 현재 광주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어있는 오웬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그 가족과 친지들이 낸 성금으로 예배당 및 집회실 형태로 1914년 지은 건물이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2층 건물로 당시에는 광주 숭일학교 예배당 겸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기독간호대학 강당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yanghwajin.co.kr,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  

 

목포에 전라남도 최초의 진료소를 개설한 C. C. 오웬


C. C.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한국명: 吳基元)은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 블랙 월넛트(Black Walnut)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햄덴시드니(Hampden Sydney)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스코틀랜드(Edinburgh)에 유학하였다. 해외 선교지에서 의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97년 5월 버지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898년 11월 6일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목포선교부에 부임하였다. 1899년 목포진료소를 개설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했다. 1900년 12월 12일 미국 북장로회 화이팅(Georgiana Whitting) 의료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하고 목포에 합류하여 호남지역 선교사업에 힘썼다. 목포선교부는 당초(1896) 선교사 연례회에서 전라남도의 선교 거점으로 나주에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나주는 육로가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 영산강 하구에 연하여 수운(水運)을 통한 각종 산물의 집하장으로 서남 해안 교통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나주는 풍요로운 농촌으로 인근에 영산창(榮山倉)이 있어 이곳에서 세곡을 서울까지 운송하였다. 그러나 1897년 10월 1일 목포항(港)이 개설되면서 나주의 교통 입지가 달라졌다.  목포는 해상과 육지를 연결하는 중요 관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부의 중심 위치를 목포로 변경하여 부지를 매입하고 1898년 가을, 벨(Bell, Eugene, 裵裕祉) 선교사가 서울에서 목포로 이주하고 뒤이어 오웬 선교사가 부임하므로 목포선교부가 조직되었다. 오웬은 선교 초기 의사와 목사로서 의료사업과 전도 사업을 병행하였다.  그 후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의료 활동을 중단하고 전도 사업에 치중하였다. 그는  복음전도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였다. 그의 한국 선교 업적은 의사로서 보다는 목사로서 더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두움을 밝혀야 한다.”는 그의 열망을 표현한 1899년 가을에 쓴 편지 하나가 있다. 이 무렵 호남지방에는 미국산 석유가 처음으로 보급되어 “등불‘을 키게 되었는데 오웬은 이 등불과 비유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 빛의 나라(미국)가 이 어둠의 나라(한국)를 비추고 있다. 밤이 밀려 들 때 밤 그림자를 통해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면 불빛들이 별들처럼 어둠을 비추고 있다. 이 불빛의 출처는 우리의 모국이다. 왜냐하면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은 미국산 석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한국의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둠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1904년 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열린 연례회의는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오웬 선교사는 벨 선교사와 함께 1904년 12월 19일 광주로 이사하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양림동 언덕에 선교 기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호남지방 전도 사업에 헌신하면서 190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9회 선교사공의회 회장으로 선임(언더우드 후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합동공의회시대(1901~1906)에는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예를 들면 1901년 광주 송정리(松汀里)교회를 벨과 협력하여 설립하고, 1902년 해남 선두(先頭)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년 12월 19일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였으며 12월 25일 광주 양림(楊林)교회 설립에 벨과 협력하였다. 그리고 완도 관산(冠山)교회도 설립했다. 1905년 나주 방산(芳山)교회, 보성 무만(武萬), 신천(新泉)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06년 고흥 옥하(玉下)교회를 설립했다. 이밖에 전남 각 지역을 순회하며 프레스톤(Preston, J. F., 邊約翰), 맥컬리(McCallie, H. D., 孟顯理), 코잇(Coit, R. T., 高羅福) 등과 나주 광암(廣岩), 장흥 진목(眞木), 순천 평촌(平村)교회에서 상계(相繼)하여 시무하였다. 독노회(獨老會) 기간에 해당하는 1907년부터 그가 순직한 1909년까지에는 화순, 보성, 광양, 나주 지방 등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 화순읍(和順邑)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보성 운림(雲林)교회도 설립하였다. 1908년 광양읍(光陽邑)교회, 보성 양동(陽洞)교회와, 나주 내산(內山)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전남지역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광주 중흥(中興)교회에서 벨 선교사와, 장흥 삭금(朔金)교회에서 니스벳(Nisbet, 柳西伯)과, 나주 서문(西門)교회에서 탈마지(Talmage, J. V., 打馬子)와, 나주 상재(上材)교회에서 뉴랜드(Newland, L. T., 南大理)선교사 등과 각각 상계하여 시무한바 있다.  

(자료출처- http://www.yanghwajin.co.kr,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 

  

오웬 선교사  

 

유진벨 선교사 (1868- 1925)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선교사는 남장로교회의 제2진 선교사로 오웬(A. D. Owen)선교사와 함께 1895년 4월 9일 내한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배유지였다. 전라남도지역에서 개척하도록 위임받은 그는 어학선생 변창연과 함께 나주로 가서 일하기로 하고 1896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나주지역을 답사하기도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거주지도 얻지 못하고 나주지부 설치에 실패하게 된다. 그는 목포로 옮겨가 목포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개척과 교육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의 노력으로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선교활동 속에서 서울에서 자동차를 몰고 광주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한국에서 당하는 첫 시련이었다. 목포지부를 개척한 그는 1904년 광주로 옮겨오게 된다. 먼저 김윤수 집사를 보내 광주에 거처를 확보하게 하고 주택이 거의 완성되자 1904년 12월 19일 유진 벨은 오웬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였다.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에는 유진 벨과 오웬가족,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들이 주민을 초청하여 40여명이 함께 예배드렸는데, 이것이 광주지방 최초의 교회인 현 광주제일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유진 벨은 이곳 광주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의료활동, 그리고 교회개척에 힘썼다. 그는 한국에서 30년간 일하고 1925년 9월 2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양림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유진벨 선교사 (1868- 1925)

 

유진벨 선교사 부인 마가렛트 벨 (1873-1919) 

 

부란도 선교사

 

로스 선교사

 

  

 

 

 

 

 

기타 선교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