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순교기념비

2011. 3. 10. 01:53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순교자 강은영 목사  (감리교)

 

강은영 목사(1905-1950)


강은영은 1905년 음력으로 2월 30일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읍 구사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다가 전주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 성서학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 2학년 때 부터 원효로에 교회를 개척 성공적인 목회에 돌입했다. 그의 힘있는 설교는 성령의 은혜가 넘치고 이웃교회에서 부흥회 인도를 부탁할 정도로 학생부흥사이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개척한 교회를 후배목사에게 일임하고 해주로 내려가 해주제일교회 조사로 시무하다가 1941년 평양신학교에 편입했으나 김인준교장 등 교수 전원이 신사참배 거부로 페교조치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는 해주제일교회를 떠나 평안남도 강서로 내려가 대안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장로교가 아닌 감리교 서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신암리교회, 신덕교회, 온정리교회, 삼화읍교회를 전전하며 목회를 했다. 그가 여러교회를 전전한 이유는 신사참배강요에 있었다. 신사참배에 타협처인 감리교회의 태도와는 달리 강은영목사는 교단의 허락한 문제였지만 십계명에서 지시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강은영목사는 일제하에서 경찰서 유치장을 여러차례 들락거리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기독교도연맹의 음모로 공산당 내무서원에 의해 철저하게 협박당했다."동무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까불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갈지 한번 생각해 보았소?" "어느 귀신은 어느 귀신이겠소 예수귀신이겠지 오히려 나는 그 귀신에 사로잡히기를 바라는 바요." 그가 신암리교회 목회할 때 장터에가서 사과상자를 연단으로 하고 복음을 증거했다. 그는 앉으면 기도 서면 전도한다는 목표가 생활화 되었다. 새벽기도는 3시부터 교회 강단에 나가 먼동이 트는 7시까지 되어서야 일어났고 평일 낮에는 산기도에 올라가 깊은 기도에 잠기기도 했다. 강목사는 해방 후 전국을 돌아치며 부흥회를 인도했고 부흥회에는 젊은 청년들이 많이 몰려와 회심하는 특징을 나타냈다. 해박한 한문지식과 위트와 유모어가 넘치는 달변때문에 많은 젊은 청년들이 몰려와 회심을 하는 것이었다. 글씨도 미문이어서 부흥회하는 교회에 족자를 남기기도 했고 교회 간판이 시원치 않으면 송판을 구해다가 친히 써서 달아주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인간미를 보여주었다. 그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삼화읍교회에 시무시에 1949년 새벽송 도는 청년들을 안면방해로 구금시켰을 때에 내무서장을 찾아가서 내무서장을 쏘아보며 비수같은 항의를 쏟아놓았다. "진리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을 잡아 가둔다면 이 땅 위에는 비진리의 어둠의 세력만 판치라는 소립니까? 하나님의 무서운 징치가 있을 것이라" 항의했다. 강목사의 눈에서는 불이 펄펄 일고 있었고 그의 항의가 주효했던지 모두 풀려나와 크리스마스 예배를 은혜롭게 보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강목사에 대한 감시는 이때부터 본격화 되어 내무서원이 주택에 상주했다. 성도들 집에 피해 있으라는 교인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일이나 수요일이면 교회에 나타나 예배를 인도했다. 1950년 6월 24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나오는 강목사를 두사람의 내무서원이 팔을 끼어 끌려가 용문동 굴속에 몰아넣고 강제 노역에 처했다. 4개월간 소식 한자 없던 강목사가 8월 14일에 정치보위부 한교선과 사택에 나타나 "여보 때가 되었오 겨울 내복을 주시요" 하고 부억에 따라 들어가 배가 고프다고 하며 사모에게 밥한 그릇을 차려먹고 "여보 갱도안은 너무 추우니 오바를 주시오"하고 겨울 오바를 꺼내다 주는 아내를 애잔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한교선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의 북진이 계속되고 사화읍이 국군통치하에 들었을때 한교선이 잡혔다. 그는 피모르 장거리 숲속에 죽여 매장한 것을 실토했다. 당시 강은영 목사를 위시하여 장로교목사 등 탄부감리교회 남전도사 등 14명이 순교했다. 교회는 이들을 모두 교회 과수원에 가매장을 했다. 후예로는 사모 윤성란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강신일목사와 강신평목사가 그들이다. (이하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강종근 목사 (감리교)

 

강종근 목사 (1904.9.26-1942.6.3)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부모의 신앙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1925년 배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윤희성과 결혼하였다. 1933년 4월 중부연회에 허입한 후 첫 목회지로 경성지방의 창동교회에 파송 받아 목회하였고, 1935년에 창동교회가 동부연회로 편입됨에 따라 그의 소속도 동부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19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교회를 이듬해인 1938년에는 창도교회를 그리고 1939년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한 그는 열심히 봉직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매 교인은 물론 일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 경찰은 교회 행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방해하며 강종근 목사를 호출하여 방해하곤 하였다. 1940년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문으로 신병이 약해지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아내 윤희성 사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 이었다.  윤희성 여사는 아현동에 신성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장로로서 충성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이 없었던 고 강 목사는 지난 8년간 강 목사의 제자이자 장남 서웅 씨의 친구인 이창건 박사의 노력 끝에 2003년 8월 15일 뒤늦게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리고 2006.11. 국립대전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하는 예식이 거행됐다. 예식을 치룬 뒤 이 박사는 “오늘 뜻 깊은 자리까지 오게 돼 감격스럽다”며 “고 강종근 목사를 위해 감리교회 모두가 기도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순교자 강준의 목사 (장로교)

 

순교자 강준의 목사(1893- 1950)


강준의목사(백낙준박사와 동창)는 1893년 6월 26일 평북 선천에서 9남매중 4남으로 태어났다. 신성중학교 보성전문을 졸업한 후 평양신학교 1924년 제17회로 졸업하고 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지적하고 시정해야 마음이 풀리는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부드럽고 인자한 그의 모습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마련이었다. 그분의 불같고 뜨거운 정렬은 일제당시 독립운동과 관련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서게 했으며 이것 때문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26년 문맹퇴치 운동을 통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영명학원(보통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15년간 봉사하였고 기독교 실업인들의 많은 후원을 받으며 교육에 힘썼다. 수업에 앞서 모든 학생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 의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수난을 겪어야 했고 1939년 강목사가 출타한 틈을 타서 일경의 사주를 받은 비류들에 의해 영명학원은 불타버렸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에 지하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1940년에 노량진 흑석동에 조선기독교장로교회를 개척하고 1944년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를 사임하고 강원도 영월 마차리 탄광촌 골짜기로 가서 노동자로 들어가 같이 일하며 복음을 전하고 마차리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로 복귀하여 3백만 부흥운동에 손양원목사와도 손을 잡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말씀대로 자신의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아내도 자녀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복음을 위하여 배설물처럼 여겼다. 6.25동란중에도 쉬지않고 복음사역에 앞장서 활약하던 중 공산당에게 수난을 받게 되었으며 6.25사변 당시 신임하던 장로의 아들이 자신의 부친과 강목사를 밀고하여 강경으로 체포 부여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몸이 결박된채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1950년 9월 20일 장남 강태문(하바드 신학대학 졸업반)에 의하여 시신이 모시밭에서 발견되었을때에 손과 발목이 잘려 있었다. 충남 논산군 광석면 서울에서 1시간 가량 가면 이사리 신촌동 비석도 없이 풀만 무성한 묘지를 만나게 된다. 살아생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토레이 박사의 "완전한 사람" 이란 말이 생각난다. 우리 하나님은 피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순교한 순교자들의 피가 오늘날 발전된 한국교회의 터전의 역할을 하였 음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한다.

 

순교자 기주복 목사 (장로교)

 

기주복 목사(1897-1950)


“김구와 이승만의 卒徒(졸도) 기주복을 타도하자” 시뻘건 글씨로 플랭카드를 만들어 든 젊은 공산당원들이 곡산읍교회 사택 앞으로 몰려와 소리를 질렀다. 1946년 11월 8일 새벽 2시 온 식구들은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몰려 잠이 깨었다. 그때 젊은 공산당들은 손에 망치와 삽 괭이를 들고 있었다. 얼마만큼 구호를 외치다 이제는 대문이며 방문을 짓부수고 광기어린 몸짓으로 집안을 부수고 수라장으로 만든 후 기주복목사를 잡아갔다. 기목사는 “11월 3일 선거 안한 것은 주일이기 때문이요 보시오 이게 민족해방을 외치는 붉은 당원들의 모습이란 말이요 ----” 기목사는 1897년 10월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대정리 두대동 뒤주터에서 기형달 영수와  정영애 여사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일날 낳기 때문에 주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졸업반 때인 1919년 2월 서울에서 올라온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만세운동을 부르기 위해 태극기제작 독립선언서 복사등 준비를 시켰다. 기주복은 황해도 수안의 만세운동을 책임지고 고향으로 파견되어 구두 밑창에 독립선언서를 깔고 다시 못질을 해서 신었다. 고향에 와 아버지 기영수와  교회대표들과 상의하고 동리의 뜻을 같이할 동지들과 협의했다. 그들의 결의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첩보 제공자에 의해서 주동자인 기영수의 집은 경찰에 포위되고 기주복은 그 어머니가 쌀독밑에 넣고 쌀로 덮어놓아 발각되지 않았고 기주복 부친 기영수는  잡혀가고 기주복은 동생과 함께 간도로 갔다. 이듬해 동생이 돌림병으로 죽자 어머니의 간청으로 귀국해서 숭실중학교 선생으로 일했다. 교육위원회에 자격상신을 했고 저녁에 집에와서 식사를 할 때 일경이 들어닥쳐 그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죄목은 수안면 3.1운동 주모자 평양감옥에서 2년형기를 치루었다. 형기를 마친 후 곡산학원 교사로 봉직했다가 부름을 받아 평신에 입학했고 1932년 제27회 절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천곡대정리 교회를 시무하다가 봉산군 사인면 계동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계동교회 기목사 주관으로 강병석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5개교회가 야유회로 정방산 대성사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대성사 안에 일본 천황의 영정을 보고도 고개한번 끄떠김 없이 지나친 강병석 목사의 일로 주지승과 다투다가 기목사가 책임지기로 했는데 몇일 후 황주경찰서에서 기목사를 연행해 천황불경죄로 해주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해방후 목회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46년 11월 3일 주일 선거를 안했다는 이유로 반동분자가 되었고 감시대상이 되었다. 타도 주기복을 외친 것도 이같은 연유였다. 처남이 남한으로 피난가자고 했지만 교인이 다 간 후에 가겠다고 했는데 1950년 6월 24일 평양에서 전보가 왔다. “위독속래 평양 아들”평양에는 기목사의 장남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서 보낸 공산당들의 술책의 전보였다.그날 새벽 기목사가 조반을 먹고 있었는데 평양에서 사모님께 전화가 와서 받으라고 해서 사모님이 나갔다 돌아오니 기목사는 공산당에게 끌려가고 보이지 않았다. 공산당들은 요시찰 인물들을 미리 잡아 감금함으로 후환을 없애려 한 것이고 그후 기목사는 소식이 없다 그를 잡아 평양으로 압송했던 이인형은 남한에서 붙잡혀서 죄값을 치루었다. 기주복목사의 뒤를 이어 아들 기현두목사는 2008년 현재 새온교회 담임목사로 충성하고 있다.

 

순교자 김개수 장로 (기장)

 

김개수 장로(1900-1950)


1900년 4월 6일에 전남 장흥에서 김문오의 외아들로 출생 1927년 5월 20일 안장례씨와 결혼하고 같은 날부터 목포 양동교회 출석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 교회 민족주의자 박연세목사 밑에서 신앙행활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일본사람들을 상대로 어묵을 만들어 사업에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교회를 봉사하든 중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하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아 순교하기 까지 유년주일학교 교장으로 섬겼다. 조실부모하고 외로움을 경험한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교회학교 교사로 또는 밤 늦게 박연세 목사의 뜻을 받들어 부녀자들과 청년을 위한 야학당을 개설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29년 박연세목사의 목회 지침에 의해서 목포 동쪽 연동교회를 기도처로하여 출석하여 봉사하고 1934년 초대 교역자 문명록 전도사부임 초대목사 이남규목사가 부임 교회가 부흥하고 김개수는 여러 집사들 틈에 끼어 스데반 처럼 살겟다고 다짐한 일등 집사였다. 1946년 6월 장로임직 이남규목사의 영향을 받아 애국적인 신앙인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자리잡았다. 신사 참배에 항거하다가 박연세 목사, 김창옥 장로, 이남규 목사 등 20여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순교 등 고문을 당했고 김개수장로는 조선교 조선교단으로 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한 이남규목사를 모시고 30리 밖에 시골인 무안군 일로면 상리교회로 출석하면서 신사참배 없는 예배를 드렸다. 해방 후 정부수립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해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국방장관 표창을 받았고 해방 후 첫번선거를 공정하게 치른 공로로 국회의장의 공로표창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무법천지에 동네 파출소를 손수 지어 6명의 순경을 두어 악습에 빠진 청년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 당시 연동교회를 시무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옷도 벗어주는 자애롭고 경건한 최명길 목사를 존경했고 최목사는 김장로를 든든한 동역자로 여겼다. 그는 행동하는 애국자이면서 신앙인이었다. 그의 강연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유모어와 탁월한 설득력이 있어 청중을 사로잡아 이끄는 거인이었다. 그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식구까지 불러모아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에도 모범이 되고 자녀들을 철저한 신앙의 사람으로 양육하며 아브라함이나 고넬료를 흠모하였다. 6.25전란으로 애국청년단체의 단장으로 숙청대상 1호였다. 제주도는 이미 빨지산에 수중에 들어가고 목포도 시간문제였다. 연동교회 당회가 모여서 교인들을 어디로 피난을 시켜 보호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특별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회의를 마치고 문밖에서 김개수 장로가 최명길 목사에게 "그러면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최명길 목사도 김개수 장로를 붙들고 "그래요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인사를 하면서 헤어졌다. 김개수장로는 최목사와 약속한대로 총칼로 무장한 공산당들에 의해 연행되었으나 그의 신앙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담대하게 예수를 전하고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애국청년단의 일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변호하고 1950년 음력8월 16일 밤중에 대박산으로 끌려가 기도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집단 처형 당해 순교했다. 장남 김옥남 목사. 차남 김승남 목사. 장녀 김옥금권사. 차녀 김순자 김갑배목사부인.(장남 김종현목사 차남 김종철목사) 삼녀 이순이 권사. 사녀 김순옥 권사 국제어린이 재활원 원장.  

 

순교자 김규흥 장로 (감리교) 

 

김규흥 장로(1894-1950)


김규흥장로는 1894년 5월 6일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죽률리에서 김경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믿음의 동기는 부친이 병환중 먼저 믿고 교회 어른들이 자주 와서 기도해 주시는 동안에 아버지를 위한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에 감화되고 전하는 설교말씀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독실한 신앙을 간직하게 되었다.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상청 설치문제로 문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버티어 신앙으로 이겼다. 그 후 뜻한바 있어 서울협성신학교에 입학 2년 수료하고 고향에 돌아와 청년 전도사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군자 거무게교회를 세워 목회하니 교회는 부흥되고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 원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한편 피 압박 민족의 쓰라린 비운을 누구보다 더 가슴 아프게 느낀 김장로는 민족이 살길로 삼대목표를 세웠다. 1. 하나님께 대한 믿음. 2. 신학문교육. 3. 농촌 자립경제, 그는 신학문과 특별히 여성교육을 강조하고 동네 문맹 부인들을 모아 손수 가르쳤고 농촌경제를 위해서 농업협동조합을 조직하여 생필품을 싸게 구매하고 농사개량과 축산장려 신생활 운동에 앞장 서는 등 강습회를 통해 계몽하는 한편 각종 도서를 구입하여 청소년 교양 및 후진 양성에 힘썼다. 신앙생활과 논촌계몽운동으로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그는 요시찰 인물로 주목받아 어려움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1945년 해방 후 논현동에 교회를 개척하고 전임목사를 모시는 등 동민의 복음화와 복지사회를 위하여 전력하게 되었다. 1950년 8월 19일 안선재 권사와 함께 내무서원에게 끌려가던 중 수수밭에 이르렀을 때 안선재권사를 피신하게 하고 김장로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저들의 손에 끌려 영원히 사는 길로 갔다. 유자녀로는 김태선장로로 대원건설 대표이사이고 김연화권사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다. 큰 딸 김갑순은 송재수목사의 부인이 되어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고 둘째딸 김신덕권사는 진남덕 집사의 부인이고, 세째딸 김과숙권사는 한강교회 정운상 목사의 사모로 교회봉사를 하고 있다.

 

순교자 김길수 목사(1905-1949) 장로교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거치며 한국교회는 숱한 순교자를 배출했다.교회의 탄압을 온몸으로 막아낸 ‘믿음의 투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외의 절대신이 있을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성수주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이 가운데 해방후 행방불명돼 순교한 김길수목사(金吉洙·1905∼1949)는 복음전파 뿐 아니라 민족운동과 청년운동, 교육사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고 또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적인 삶을 살다간 목회자였다. 김목사의 신앙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었고 주일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 공산정권과 맞선 것이 결국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평남 용강군 양곡면 남동리. 유복한 유교가정에서 출생한 김길수는 소학교를 마친뒤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학 중학부를 마쳤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 부친의 별세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랫만에 본 조국의 모습은 일본과 비교해 너무 피폐했다. “지금 우리 민족에 필요한 것은 민족정신이며 청년들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설 수 있다.공부보다 민족·청년운동이 더 절실하다” 20대 초반의 청년 김길수는 고향에서 남동(南桐)학교를 개교해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과 바른 사고를 깨치는 일에 주력했다.이 과정에서 조만식선생과 이상재선생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들의 사고(思考)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뒤 스스로 기독교인이 될 것을 다짐한다. 김길수의 개종은 집안에 큰 파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오히려 평양고등성경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함으로 기독교에 더 몰입한다. 진남포 비석리교회, 평양 남문밖교회 등의 전도사를 거쳐 42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부임한 곳이 평양 신암교회였다. 당시 일제는 41년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모두 강제출국시킨 뒤 조선기독교 통리직을 만들었다. 교단적 특징을 없애고 하나의 교회로 만들어 마음대로 통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강사였던 선교사들이 떠난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열심히 목회하던 김목사는 항상 청년들에게 소망과 비전을 주는 메시지를 전했다.45년 8월15일.식민지 아래에 있던 민족의 해방은 지하에 숨어 은밀히 신앙생활을 하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잃었던 교단을 재건하고 복음전도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3·8선 이북을 맡은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교회탄압을 시작했다. 당시 목사와 성도들은 세가지 부류로 나뉜다. 처음은 무조건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에 대해 항거하고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자는 파와 공산당과는 대화가 되지 않으니 무조건 피해 남한으로 내려가자는 파, 셋째는 강단을 지키며 현실을 인정하고 신앙을 유지해 나가자는 파 등이었다. 김길수목사는 첫번째 파에 속했다. 김목사는 45년 12월,장로교 이북5도연합노회를 발기하는데 앞장섬으로 처음 공산정권의 눈총을 받았다. 또 46년 3월1일은 해방후 처음맞는 기념일이어서 강양욱이 주도하는 기독교연맹은 평양역전에서 기념예배를 갖기로 했다. 그런데 김목사는 바로 이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3·1절기념예배를 갖는다고 공포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장대현교회 예배를 중지시키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허사가 되었다. 5천여명이 성도가 모인 이날 행사로 인해 김목사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며 정치보위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47년에 김목사는 더 큰 일을 냈다. 11월3일로 확정된 인민위원회 총선거를 주일성수를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담판을 짓기 위해 김일성까지 만났던 김목사는 결국 선거가 예정대로 주일에 치러지자 성도들을 토요일 오후 모두 교회로 불러 모은 뒤 철야예배를 드리게 하고 다음 주일날 저녁 예배후까지 데리고 있다 귀가시켰다. 당시 결의문을 쓴 김목사는 “신자의 주일성수는 생명이며 정치와 종교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고 어디에서든 집회와 신앙의 자유가 확보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치보위부는 김목사에 대해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았다. 48년도에 체포돼 1년간 심한 옥살이를 하다 49년 3월에 잠시 석방 되었고 곧바로 다시 연행돼 행방불명이 되고 밀았다. 당시 신암교회 당회원들이 대동강에 배를 준비하고 남하할 것을 권유했으나 “양을 놓아두고 목자가 어떻게 도피하느냐.한사람이 있어도 교회를 지키겠다”고 말한 일화가 유언처럼 남아 있다. 공산당에 의한 납치로 아무로 모르게 죽임을 당한 김길수목사.복음전파와 후진양성으로 일관된 그의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며 신앙의 귀감이 되고 있다. 김길수목사는 부인 김화연권사(85년 소천)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장남 김만용목사(76·평양신학원학장)와 차남 김완용집사(73·영락교회)는 모친과 남하해 순교자 유족으로서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고 있다. 특히 김만용목사는 부친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일본중앙대학에서 수학,평양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김만용목사는 남하해 1951년부터 학교법인 숭의학원 설립의 산파역을 맡아 교육일선에 일생을 헌신해 왔다. 53년에 교회장로가 된 그는 지난 92년 부친의 유업을 잇기 위해 숭의학원장직을 떠나 뒤늦게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부친이 제자를 가르치던 신학교육의 맥을 이어 현재 서울 홍익동에 있는 평양신학원 학장을 맡고 있다. “목회자 가정은 누구나 들여다 보기에 유리와 같은 것이라며 항상 언행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시던 부친의 모습이 생생합니다.어려울 때마다 아버님의 말씀이 삶의 큰 지침이 되었습니다.부친은강양욱과 절친한 사이였으나 정권과 타협치 않으셨고 이윤영목사님이 월남할 때 동행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것도 거절하셨습니다” 김만용목사가 부친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49년,26세 교사시절이었다. “지방의 연합집회인도를 위해 집을 나선 뒤 이후의 소식을 아는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교회의 진리를 사수하신 부친의 신앙을 유산처럼 생각하며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 김목사는 교육자로 이제 목회자로 무탈한 삶을 살았고 1남4녀의 모든 자녀들이 신앙안에서 훌륭하게 성장해 제몫을 다해주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며 남을 후진양성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글 출처- http://www.ihappy99.com)

 

순교자 김동철 목사 (감리교)

 

김동철 목사(1899-1950)


1945년 만주에서 서울로 귀국한 김동철은 오갈데 없는 많은 귀국동포들을 불쌍히 여겨 세운 교회가 서소문 교회이다. 1899년 출생하면서 부터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땅에서 애국지사들의 학교인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영안학교 교사를 하든 중 소명을 받았다. 서울에 돌아와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만주땅 용정으로 돌아가 용정교회 부담임으로 일하면서 용정교회 소년학관의 사감을 보았다. 용정교회에서 수련과정을 거친후 신경시로 옮겨 신경입선정교회를 개척하고 목단강 가에서 국적없는 한국이들이 걸인처럼 부랑하는 이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서울에 돌아와 만주 용정, 신경, 하얼빈에서 귀국한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돌보는 일을 시작한 것이 서소문교회가 되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식구들만 피난시키고 교회에 남아 갈곳 없는 교인들과 함께 숙식을 하다가 인민의 적으로 몰아 인민군에게 8월 23일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무소에 끌려가던 새벽에 그는 설교에서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남다른 생의 경험을 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갖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일본 헌병들에게 착취당했고 공산 비적들에게 물건을 빼았겨 가면서 살았고 중국 본토인들에게도 갖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공산당은 서울을 점령하고 민족해방군임을 선전합니다. 6.25전 미군은 자기들이 세계의 경찰이 되겠다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이들을 믿는 이가 없습니다. ----- 고통과 역경에서, 수난과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신 이는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공산당도 신뢰하지 맙시다. 미군이라고 천사라고하지 맙시다. 주님만 의지하고 삽시다" 외세나 환경에 전혀 동요할줄 몰랐던 김목사는 오직 주님의 옷자락만을 붙잡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의 벗이 되기를 기도하다가 공산당의 채찍에 쓰러져 하나님 나라로 이적해 갔습니다. 김동철목사의 유족으로는 부인 안마리아 권사, 장남 김창국목사가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교하리에 교하교회(기장)를 개척했고, 차남 김창렬은 YMCA총무를 역임했고 사남 김창덕은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집사로, 김창길은 미국 뉴저지 한인 장로교회 목사로, 육남 김창림은 내과 의사며 미국인교회 집사로 순교자 선친의 순교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김두병 장로 (기장)

 

김두병 장로(1906-1950)


1906년 3월 25일 전북 남원군 대강면 풍산리에서 김창원의 3남 1녀중 장남으로 출생.예수를 믿기 전 무속에 빠져 교회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그가 첫 아이를 잃고 아내를 동부교회에 나가라고 하여 아내가 교회에가서 목사님의 기도중 마귀 잡귀를 일체 틈타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면서 나도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하고 그 다음주부터 동부교회에 출석하다가 친구들의 권유로 전주 중앙교회로 옮겨 극진히 봉사하였다. 1943년 일제 말기에 징용병으로 일본 북해도 북단 아오모리 광산지구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오던 중 부산 앞바다에서 어뢰에 난파되어 기름 바다를 헤치며 가까스로 생환했다. 1949년 6월에 전주 중앙교회에서 제 6대 장로로 임직하며 기쁨에 넘쳐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할것을 결의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로 교회시설에 '중앙교회'라고 페인트로 표시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를 사랑하며 목회자를 섬기고 자신의 직임에 충성을 다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다가 교회의일이 마음 놓이질 않아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전주로 돌아와 지하실에서 살다가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끌려가 민주인사들과 줄줄이 묶여 개처럼 끌려다니며 가두시위를 했다. 전북 토목관구사무소에서 인민재판을 했는데 학살에 가담한 자들은 술을 마셔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쳐죽이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공산주의자들은 김장로에게 "너는 믿는 사람이니 어디 죽여도 사나보자"고 조롱하면서 마지막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할 때 김장로는 "죽으면 천국에 갈터이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만 다만 아쉬운 것은 나는 일흔이 넘으신 어머님이 계신데 내가 먼저 죽는것이요. 또 하나는 마지막 죽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 고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곡괭이와 삽에 찍혀 순교했다. 그는 평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완전히 변화된 생을 살다가 간 사람으로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으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몸으로 살아 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유언과 몸소 그런 삶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기도중에 1950년 9월 28일에 순교하였는데 전주시 효자공원묘지에 모셨다. 유족으로는 아내 김복순 권사는 81세를 일기로 1994년에 소천했고 장남 용신은 집사로 차남 용희, 삼남 용문, 사남 용운은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고 있다. 손자중 장손자 손녀 정곤 승곤 형균 옥현 중 김정곤씨는 현재 '군산한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중이다.

 

순교자 김성기 집사 (장로교)

 

김성기 집사(1914-1950)


1914년 11월 5일 전북 전주시 겨원동에서 김만성의 3남으로 출생했다. 전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과 상업을 하였고 영상교회(전남산교회) 교사 성가대 안수집사로 봉사하였음. 청년시절에 입교하여 전도에 불타 많은 결실을 맺었고 친구 박복수집사와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를 섬기며 안수집사로 섬겼다. 당시 친일파 세력들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애국청년들은 거의 애국심이 불타는 신자들이었음. 송지동교회에서 안수집사로 봉사하던 중 잡혀 황산지서에서 수많은 고문을 당하고 영상교회로 넘겨져 10명이 사형당하기전 하늘가는 밝은 길을 찬송부르고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인사한 후 1950년 8월 10일 스데반처럼 순교하였음

유족으로는 아내 김길례 권사. 자 금은식 목사. 자부 성경례 사모. 손자 김성국 김성진 김성일 이 순교신앙을 지키고 있음.

 

순교자 김영윤 목사 (장로교)

 

김영윤 목사(1902-1950)


1919년 3.1운동시 3월8일 대구 장날을 기해 계성학교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평양신학교 재학중 신사참배 강요에 정면 대치한 것이 일경의 노여움을 사 투옥당했다가 1935년에 출옥하여 안악읍교회 조사로 봉사하다가 193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안수받고 안악읍교회 담임으로 부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몇번의 옥고를 치루었지만 교회는 그때마다 다른 목사를 두지 않고 기다렸다가 김목사를 다시 당회장으로 환영하기를 몇차례 목회경력이 16년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 후 황해노회 노회장으로 노회를 재건 교회확장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안악읍교회는 대지가 1200평 본당규모 160평 화강암 석재건물로 장년만도 500-600명이었다. 성전아래층을 교육관으로 하여 완벽한 여성훈련의 도장으로 만들었고 당시로선 생각지도 못한 선견자적 목회자였다. 교회운동장에는 정구 코트와 운동시설을 갖추어 놓고 앞서가는 모범교회상을 심었다. 청년회로 하여금 밴드부를 조직케하여 월 1회 정기연주회 겸 노방전도를 벌려 시민들의 눈을 교회로 돌리게 했다. 교회학교내에 고등성경학교를 개설해 스스로 교장이 되어 농어촌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 1946년 조직된 기독교도연맹 가입에 거절하자 시시콜콜 박해를 받았으나 이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선한목사는 양들을 버릴 수가 없다'는 이유로 월남하지 않고 탄압을 견디었다. 1950년 6.25동난 하루전 공사군에 체포당해 해주형무소에 감금당했다. 전쟁이 길어지고 유엔군이 북진이 이루어지게 되자 공산당은 감옥에 반체제 목사들을 위시해서 반공인사 반동지식인들을 반공호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터뜨려 죽이거나 우물에 넣어 생매장을 하고 손도끼로 찍어 죽이기도 했고 해주형무소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나오면 해주 앞바다 용당포에 던져넣어 수장을 시켰다. 김영윤목사는 고문에 온 몸이 상하고 찢어졌는데도 원래 건강하다보니 끝까지 견디었지만 용당포에 던져 넣을 때 던지워 한많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나라로 옮겨갔으니 49세였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신덕권사. 장남 김정식장로는 뉴져지주 의사. 차남 김정환장로는 해성여상 교감을역임. 현재 평양신학 신학연구원 교학처장. 삼남 김정권 장로는 와싱톤 거주 기독교사상 편집국장 역임. 장녀 기정순권사는 계성고교 교목실장 이삼열목사의 사모. 차녀 기정심권사. 삼녀 김정실집사 등 선친의 순교신앙을 전승하며 각 분야에서 선한열매를 맺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순교자 김이준 목사(감리교)

 

김이준 목사(1912-1945)


김이준은 1912년 8월 1일 충청남도 금산에서 출생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굶기를 밥먹듯했다. 가난한 그의 부친은 남보다 높은 향학열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 이준을 그곳 소학교에 보내서 공부를 시켰다. 남아이며 최소한도 자기 이름자는 쓸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겨우 소학교를 졸업할 때 죽어도 땅을 파다 죽을 각오를 하고 부친을 따라 남만주지방으로 이민을 갔다. 임자 없는 땅을 부지런히 파혜쳐 생활이 낳아지자 부친은 아들 김이준을 용정에 독립투사들이 설립한 중등학교에 보냈다. 고향에서부터 예수를 믿은 그의 가족은 만주에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 하게 되었다. 일제 탄압에 못 견디고 외국까지 밀려 고생하는 동포들을 볼때 가슴이 쑤시는 아픔을 느낀 김이준은 중등교육을 마치는 대로 "내 동포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가 되리라 ." 결심하고 만주신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에 제 1회로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된 김이준은 재만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 자체를 항일 독립군으로 보는 일제의 시각은 애국운동을 하기 위하여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집결지 용정에 기독교를 그들이 세운 괴뢰정권을 통해 교회를 탄압하였다. 김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한 1941년은 장. 감. 성 교파의 독자성이 무너지고 만주조선기독교도연맹에 통페합되어 있었음으로 교회의 독자적인 신앙행위도 인정을 하려하지 않고 중앙에서 명령하는 처지였다. 감리교는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국가의 의례로 받아들였지만 김이준 목사는 달랐다. 신사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완강히 거절하고 교회에서도 신사참배를 죄라고 가르쳤다. 일경은 김이준 목사를 국헌위반자로 체포하여 죽음보다 못한 옥살이를 시켰고 고문과 영양실조 정신적인 압박속에 건강하던 김목사도 견디어내지를 못하고 끝내 쓸어졌다 1945년 8월 1일이었으니 그의 나이 33세였다.  

 

순교자 김철훈 목사 (장로교)

 

 

김철훈 목사(1904- 1948) 


김철훈은 1904년 10월 7일 경기도 양평에서 독립유공자 김경덕 목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헌병에 검속되어 4년의 옥고를 치렀다. 부친의 옥살이로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김철훈은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 마저 자유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민족지도자가 되기위해서는 배워야했기에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4년의 옥고를 치룬 부친을 지켜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김철훈은 한으로 얼룩진 민족애를 배웠다. 그리고 고학을 결심하고 평양을 택했는데 이는 부친 김경덕 목사의 친구인 선교사 곽안련 목사의 도움이 있었기 가능했었다. 숭실전문학교 시절인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의거사건이 발생하여 서울을 거처 동년 12월 14일 숭실전문학교로 번저 평양시에 독립운동의 격문이 붙기 시작하여 진행되었다. 겨울 방학 시 잠시 주춤하다가 1930년 1월 21일과 22일 양일 숭실전문학교 종교부장이던 김철훈 학생과 그의 친구 강태민 학생이 주동이 되여 숭실전문학교 전교생과 평양시 12개교 학생이 참가하는 대규모 학생 만세 사건을 일으켜 140여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김철훈은 최초의 1개월의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뼈가 꺾이고 갈비뼈가 우골 드는 고문 속에서 그는 이를 다물고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예수를 만나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후 평양신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1936년 3월 목사안수 후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채용되었으나 학생시절 평양 학생만세사건으로 옥살이 하던 자에게 학생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수업 중 일본 경찰에 끌려가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부임 후 3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1936년 8월에 용강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년여 기간이 지났을 때 당국에서 교회 뜰에 일장기를 계양하고 예배 전에 일본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낭독하도록 강요한 것을 김철훈 목사의 강직한 성격은 즉각 거절하고 그 교회를 사임하였다. 1938년 2월에 송산리교회 목사로 부임하여서 당시 일본 식민정책으로 조선인의 목을 조이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가혹한 옥고를 치루고 9개월 만에 출옥했다. 동년 11월 의성교회 시무했던 유재기 목사가 평양신학교 학생시절 배민수, 박학전, 송영길, 김철훈 등 10여명을 상대로 농우회(農友會)를 조직하고 졸업 후에도 이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위장 단체라 하여 일경이 평소 감시하던 김철훈 목사를 농우회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국내 사정이 악화되어 만주로 가려고 시무하던 송산리교회 까지 사임했다. 1939년 3월 삼성리교회 장로들의 간청에 이끌리어 삼성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지나던 중 1942년 3월에 성서조선 잡지 158호의 수필부분에 “조와”를 문제 삼아 폐간시킬 의도로 독자인 김철훈 목사를 그 잡지의 필화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하여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고대하던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되자 1945년 9월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인 고당 조만식 옛 스승을 보필하게 되여 고당은 김철훈 목사를 밀사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공문을 휴대 월남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 선생을 만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1945년 10월에 800여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동평양교회에 부임하였고 총회를 잠정 대행(통일될 때까지)하는 이북5도(16개 노회) 교회연합회 서기를 맡아 연합 사업을 했으나 공산당의 교회탄압은 날로 가중되고 있었다. 1947년 강양욱은 기독교연맹을 조직 가입을 권고했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동년 11월 3일 주일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기독교인을 앞장세우려 했으나 이북5도 회장 김진수 목사와 김화식, 김길수, 김철훈 목사 등이 반대하자 교회탄압에 광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배출한 산정현교회는 해방 후 온건파와 강경파로 내분되어 1947년도에는 7개월 동안 강단에 공백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유계준 장로를 중심으로 산정현교회를 평양노회에 복귀시켰다. 일본의 탄압과 교회분쟁으로 인해 교인은 1000명에서 200여명으로 줄고 교회사정은 몹시 어려웠다. 이때 유계준 장로는 김철훈 목사를 방문 간청함으로 편안한 동평양교회를 뒤로하고 어려운 산정현교회를 택하고 김철훈 목사는 산정현교회를 위해 죽으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메시지로 알고 1948년 2월에 부임해 오직 교회의 부흥과 선교에만 매진하다가 그해 6월 25일 서평양역 근처에서 공산당에 체포당하여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유족으로는 연금봉 사모가 2009년 현재 101세로 건강하며 아들 김기영 목사와 딸 김명희 권사(사위 이금세 장로) 김성희 장로(산정현교회, 유치원장)가 그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김화식 목사 (장로교)

 

 

김화식 목사(1894- 1947 연행)    


김화식은 평양의 숙천에서 김찬성 목사의 두 아들중 맞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찬성목사는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으로 슬하에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다. 첫째 아들이 김화식이요 둘째 아들이 김성여 목사였다. 1919년 김화식의 나이25세가 되던 해 아버지 김찬성목사는 평안북도 안주군 안주읍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때 3.1운동을 맞아 부자는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시위를 벌리다 아버지 김찬성목사와 함께 부자가 일경에 체포당해 주동자로 2년 6개월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했다. 김화식은 감옥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옥중에도 전도해 목사가 되게 한 이만 8명이 되었고 그중에 33회 총회장을 지닌 이원영목사가 그 중 한사람이다. 김화식목사의 목회는 경건주의 일변도로 수면하는 만큼 독경을 해야한다고 강조했고 성경연구에도 조예가 깊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빌립보서 강해와 두권의 강도집을 갖기도 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총회적으로 결의할 때 주기철 이유택 등과 함께 묘향산에가서 기도하고 힘을 합해 저지하려고 했지만 감옥에 끌려갔다. 일제하에 감옥을 안방 드나들듯 하며 고통의 세월속에 해방과 함께 장대현교회로 강단을 옮겼다. 이북교회의 중심인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며 기독교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무실론 이데오로기인 공산당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평양의 염혈 목사들과 기독청년들을 규합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김화식목사가 결성한 기독교자유당은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남북통일 문제가 협의되고 난 후 국제 사회에 본격적으로 여론화시켜야 한다는 급박한 사정 때문에 고한규장로를 당수로 추대하여 1947년 11월 19일 결당 날짜를 정했는데 하루 전 11월 18일 내부고발로 창당도 못하고 40여명 전원이 연행되어 중형선고를 받았고 김목사도 13년 형을 선고받고 이들은 시베리아 아오지 탄광에 강제노동에 처해지고 김목사를 위시한 몇 목사들은 총살형에 처해져 기독교의 인맥을 끊으려 했다.

 

순교자 김희서 교사 (침례교)

 

 

김희서 교사(1878-1918)


김희서는 1873년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원당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여에서 양반, 뼈대있는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한학을 읽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그가 어릴 때 돌아가시고 형님의 집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의 안에 내재한 문학성이 발휘된 것은 너무도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던 그가 예수를 만난 것은 1895년이었다. 그는 서당 시절에 두보의 시를 좋아했다. 1895 당시 익산 난포에 내려가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든 중 서양여자 두사람이 서당에 찾아와 전해준 한문성경을 등잔불 밑에서 펼쳐 읽고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스며옴을 느껴 그는 밤을 밝혀 창세기를 다 읽었다.여자선교사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전할 때는 "무부무군의 사교를 믿으라고 하느냐"고 얼굴엔 노여움이 서리었던 그가 밤새 성경을 읽고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당신이 내게 오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노여움을 사고 창세기를 다 읽은 후 "희서야 너는 내것이니라. 교회로 가서 가르침을 받으라"는 음성을 듣고 무작정 걸어서 난곡침례교회 앞에 갔고 불이 밝혀져 있는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 갓을 쓴 외국인이 나와 정중히 맞았고 전날 낮에 서당을 찾았던 여가가 있었고 그들은 희서를 보며 부르던 찬송을 계속했다.그가 신앙을 고백한 것은 1895년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1908년 그는 부여 칠산교회에 부임해 교역자생활을 시작했으며 1915년 목사 후보인 교사 직분을 받고 함경북도, 간도를 중심하여 만주일대르 선교지로 삼아 순회전도를 했다. 1918년 원산대회에서 시베리아 선교를 명받았는데 조장은 박노기 목사 부조장은 김희서 교사였다. 김교사는 시베리아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면 목사로서 안수받기로되어 있었다. 조장과 부조장 전영태 총찰과 최응선 감로 넷이서 함께 러시아 선교를 위해 수청 연추지방을 향하여 항해하게 되었다. 1918년 10월 20일 그들이 탄 선박이 노영 보시엘해 모커우 지점에 이르렀을 때 돌풍을 만나 끝내 파선하므로 네 사람도 파선하는 배와 함께 풍랑에 휩쓸려 순교했다. 김희서의 45세되는 생일날이었다.  

 

순교자 노형래 집사 (성결교)

 

 

노형래 집사(1923-1950)


노형래는 1923년 7월 27일 충남 서천군 마서면 한성리에서 한성교회 장로 노승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기독교신앙으로 자랐기 때문에 부여를 거쳐 예산군 고덕면으로 이사해 삽교 보통학교를 재학할 때는 신사에 절하지 않아 호되게 야단을 맞고도 반성하지 않는다하여 급기야는 퇴학처분을 받았다. “잘했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신앙에의 길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란다” 아버지 노승우 장로는 오히려 아들 형래를 칭찬했다. 그 길로 노장로는 아들을 기독교 계통인 사립예수교 배양학교에 편입학시켰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형래는 배양학교에서 특출나게 공부를 잘했고 졸업 후에는 서울로 상경하여 학업을 계속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17세에 결혼을 했으며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할 일을 찾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 사립학교인 배양학교를 졸업하였다. 1948년 노승우 장로 부자는 사랑방을 털어 한성성결교회로 간판을 걸었고 노형래 집사는 자전거로 4 개 교회 예배처를 돌며 예배를 집전했다. 2차대전으로 젊은 이들을 전선으로 내몰자 부친의 권유에 따라 노형래는 만주로 피신했다가 귀국해 1945년 해방이 되자 . 해방된 조국은 노형래같은 인텔리 청년을 농사만 짓도록 가만 두지않았다. 당시 도마다 건국 준비위원들이 선발되어 있었고 청년단 운동이 군 단위까지 파급되어 조국건설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민족청년단에 가입했고, 서천군 당 위원장이 되어 활동을 했다. 그는 그러한 분주한 중에서도 성수주일은 물론 교역자없는 4개의 교회를 돌며 예배를 집례했다. 이런 분주한 세월속에 노형래는 6.25를 맞았다. 공산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점령했고 1주일이 가기 전 대전까지 점령했다. 서천도 이내 공산화되고 말았다. 부친 노장로는 결사적으로 아들을 피난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망설였다. 민족청년단은 뒤로 미룰 수 있었지만 교회만은 떠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아떻게 교회를 버리고 도망하겠습니까” 노형래는 많은 고민을 했다. 피난해서 생명을 구할 것인가 주의 강단을 지키다가 순교할 것인가? 친우 최동규전도사를 만난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노형래는 끝내 죽는 길을 택했다. 육신은 죽으나 영원히 사는 길,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결국 노형래 부친장로와 또 동생 등 3부자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내무서에 갇히게 되었다. 1950년 6.25로 서천도 공산화되고 노형래 집사는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에게 체포되었다. 노형래 집사는 교회지도자로 활동하지 말 것과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오히려 그를 심문하는 내무서원에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며 전도했다.결국 회유가 불가능하자, 대전 형무소로 이감된 후 처형되었다. 1951년 8월 3일 서천군청에서는 유족들과 그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위령제를 드리고 장례식을 거행했다. 순교자 노형래의 시신은 불타고 없어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식기를 관에 넣어 교회 앞산 가족묘지에 묻었다.(장례예배에서 황봉의 장로가 낭독한 고인의 약사는 순교신서 4권 163-65쪽에 있음) 유족으로는 장남 노태철 목사(제일교회 당회장), 차남 노희석목사(명일교회 당회장) 딸 노평란(허성활 목사 사모), 손자로는 노윤식 목사(미국 에즈베리 신학대학원 졸, 성결대학교 선교학 교수), 노윤숙(유경렬 목사 사모), 노윤성 안수집사(미국 NYU 졸업, CJ 부장), 노윤철 집사(미국 하바드 졸, 치과의사), 노유림(디자이너), 허상범 목사(미국 바이올라 대학 선교학박사과정), 허종범 집사(컴퓨터 전공박사), 허대범(회사원) 이 있다.

 

순교자 도복일 목사 (감리교)

 

도복일 목사(1914-1950)


도복일은 1914년 경북 경산에서 도봉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직이 영남지방에서 선교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전도를 받아들여 예수를 믿었던 초기 신자였다. 도복일은 모태신앙으로 민족주의자 아버지 도봉희가 3.1운동 참여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도복일은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땅 용정으로 이주함으로 용정학교와 서전의숙을 나왔고 1935년 해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감리교 만주연회가 경영하는 만주신학원을 졸업하고 만주 조선기독교연맹 만주교구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고 만주영안교회 부임한후 1개월만에 해방이 되어 1년간 공산치하에서 목회하다가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1946년 8월 총리원으로부터 당진교회 파송되어 1949년까지 3년동안 당진교회를 비롯 지역 여러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1950년 삽교로 옮기고 몇달이 못되어 6.25사변이 터지는 비운을 겪게 되어 부여지역으로 피난했다가 9월 초 "여보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장중에 달렸으니 비겁하게 살지말고 차라리 의롭게 죽읍시다"라는 도복일 목사의 간곡한 말에 사모도 눈시울이 굵어졌고 "당신의 뜻이 정 그렇다면 좋을대로 하시지요 저는 당신이 하자시는대로 하겟습니다." 교인들의 권고로 부여로 피란갔던 도복일 목사는 조바심이 나서 죽음을 불사하는 결단을 하고 가족을 이끌고 목회지 삽교교회로 다시 돌아와 교회를 돌보며 남은 교인들을 살피며 위로했다. 1950년 9월 21일 유엔군의 활약으로 후퇴하는 공산군은 남쪽 지도자들을 나포해 가면서 도목사도 체포해 삽교천 뚝방으로 끌고가 총살한 것이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리춘석 집사

 

 

리춘석 집사(1919-1950)


이춘석 집사는 1919년 8월 15일 서천군 서천면 두왕리에서 진사인 이중현씨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3살 때 마을 훈장이었던 엄친께서 영서하시고 편모슬하에 장성하였다. 서천군 거산면 완걸리 야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역경과 비운속에서 장성하였다. 1933년 어느 봄날 부위렴 선교사가 파송한 전도대가 완길리에 들어왔을 때 그 전도대에 의해 12살된 이춘석은 어머니와 함께 입신 종주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18세에 부위렴 목사에게 세례받고 교회를 열심히 봉사했다.18세에 화신교회 성극태씨 장녀 성경용씨와 결혼하였다. 19세에 집사임명을 받고 신전교회에 열심히 봉사하였다. 22세에 장남 요한을 낳았고 선춘교회에 이주하여 전북노회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석촌교회를 인도하며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2차대전 발발하게 되매 야학당에서 젊은이들에게 나라사랑의 길을 깨우치고 애국적인 노래들을 가르쳐 왜경들의 감시를 받던중 신사참배거부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는등 신앙의 절개를 지키던 26세의 그를 왜경이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일본에서 강제노역 중에 2년동안 강제노역에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전도에 열심인 이집사는 총감독 마쓰다의 호의로 식량관리자로 있으면서 징용자들의 예배를 인도했고 징용으로 번돈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해방 후 귀국하여 남은 돈을 이집사가 출석하는 석촌교회에 헌금하였다. 귀국 후 석천군청에 취직되어 근무하면서 신천, 남전, 옥산교회를 개척하고 순회예배 인도와 신송기도실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두신 뜻이 있음을 기도로 찾으며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6.25가 터졌다. 그무렵 서천읍교회 강단을 맡고 있는 그를 미워하고 있던 공산당은 인천 상륙작전 소식을 듣고 후퇴하기 전에 그를 체포하어 서천등기소에 감금했다가 1950년 8월 16일 감금된채 쏘아죽인후 방화해 버렸으니 그는 동족의 죄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면서 아쉬움 없는 32세의 젊음을 불태워 하나님께 드렸고 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장남 이요한 목사는 부친의 뒤를 이었다.

 

순교자 박만익 장로 (장로교)

 

 

박만익 장로(1906-1949)


1906년 8월 7일 경북 영덕군 삼사동에서 박해문장로의 장남으로 출생했으며 3대에 걸쳐 믿는 가정에서 부친의 엄격한 청교도 신앙을 본받아 어릴 때부너 신앙심이 돈독하였다.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전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후배양성을 위해 동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면서 삽시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였다. 최연매 권사와 결혼하여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였고 지역사회와 교회를 위하여 충성 봉사하시든 중 1942년 장로가 되었으며 항상 스데반과 같이 순교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영덕 경찰서에 투옥 중 1945년 8월 15일 석방되어 여전히 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해방 후 좌우익의 혼란기에 국민회의 회장으로 공산주의자들의 표적이 되든중 6.25가 발발되자 공비들의 피습을 받아 우익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신문보도에 친지들과 목회자들까지 피난을 가라고 권고하였으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버리고 도망가겠느냐"면서 스스로 순교자의 각오를 하고. 당시 교회가 열악하여 목회자를 모시지 못하는 때라 고 박만익 장로가 설교도 하시면서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9년 2월 18일 집에서 공비의 기습을 받아 창과 칼에 찔려 당시 중학생으로 주일학교 반주도 하든 아들 재은과 함께 무침히 살해되어 순교하여 하늘나라로 가셨다. 장남을 살려두면 후에 원수를 갚는다고 하여 어린 학생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현재 두 분은 독립운동과 순교의 공을 인정받아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직계 자손들은 현재 44명이며 고 박만익장로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장로 박재화, 안수집사 박성화, 권사 박선호, 집사 이필우 등 각 소속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자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의사가 4명 대학교수 2명 강사, 교사, 공무원, 장교, 회사원으로 각각 자기 맡은 자리에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순교자 박연서 목사 (감리교)

 

 

박연서 목사(1893-1950)


박연서목사는 1893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청담이란 곳에서 박성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고향마을 청담을 사랑해 일생을 청담이란 아호를 사용했다. 어려서는 8년동안 한문을 읽었고 1908년 그의 나이 16세가 되던 해에 보성초등학교를 졸업했다.1910년 3월 개성보창학교를 거쳐 1917년 6월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백모에게 기름을 받았던 그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예수까지 믿게되자 폭넓은 아량을 가진 젊은이로 성장했다. 피어선 성경학교에 재학시절부터 서석, 철원, 화천, 연천 등지에서 목회했던 그는 1919년에 일어났던 ‘철원애국단’연락 책임자로 연루되어 원산 형무소와 서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뤘다. 그의 인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최석주의 "내가 본 인생백경 박연서"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루고 나온 박연서는 연천읍교회에 시무하다가 1923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바로 이듬해 장감연합공의회 소속 선교사가 되어 일본 관서지방 거주한 교포들의 신앙문제와 권익문제를 위해 파송되었다. 관서지방 선교사로 4년 활동하다가 귀국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화천, 연천, 서석, 포천 등지에서 교역을 했다. 기독신보가 계획대로 일간지로 돌아설 수 없자 박목사는 손을 떼고 목회일선으로 복귀해 선교교회, 원산상중앙교회, 서울 남산교회 등지에서 1948년까지 목회에 정진하면서 감리사 혹은 교구장 등을 역임하면서 감리교 법을 일괄 손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50년 몸이 쇠약하여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6.25사변이 터져 그해 8월 23일 내무서원들에게 끌려가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어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수감 20여일만인 1950년 9월 20일 58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63년 3.1절 국가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유가족으로는 부인 차사라 여사와의 사이에 2남 4녀가 있다. 아들 박은표장로는 경신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퇴임했다. 박연서 목사의 사위 도건일 목사는 현재 서울 창전동 서강 감리교회에서 32년째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 도건일 목사의 부인 박영조 사모는 박연서 목사의 4녀이다. 이와 같이 순교자 박연서 목사의 자녀손들은 선친의 순교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박헌근 장로 (순복음)

 

 

박헌근 장로(1914-1950)


순교자 박헌근 장로는 1914년 9월 3일에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봉산리 567번지에서 부친 밀양 박씨 민상(敏相)님과 모친 이영풍(李永豊)님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어렵게 살다가 10세에 부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까시에 거주하면서 도교시(東城區) 나마노마찌(生野町)에 있는 일본고등학교를 다니던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인쇄회사에서 일하다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이꼬마(生駒) 신학교에서 4년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 후 최예님씨와 결혼하였고 1942년도에는 귀국하여 대전 중동 제일장로교회의 창립과 동시에 집사로 임명받아 면류 청년회장과 주일학교 교사로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48년 11월에는 순천경찰서 남쪽 남내동에 세워진 순천 오순절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가 담임한 후 순천교회는 300명이 모이는 큰 교회가 되었다. 1950년 4월 9일에는 그 곳에서 박 장로가 주축이 되어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가 열렸고 박 성산, 윤 성덕, 허 홍, 김 성환 목사 등과 박 귀임 전도사를 비롯하여 약 200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이 대회에서 박 성산 목사는 사회를 맡았고, 박 장로는 성회를 인도하였다. 기도와 성경 읽기에 열중하였던 그가 순천교회에 부임해 온지 2년 뒤 여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피난하지 않고 교우가정 심방과 주일예배에 열성을 다하던 그는 공산군이 순천시를 점령하고 가진 행패를 다하기 시작하자 더욱 더 열심과 용기를 다하여 양들을 지키기에 심혈을 쏟고 있었다. 방언, 신유 등 오순절적 역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교우가정을 비밀리 심방하고 다니던 그는 공산군 치안 대원에게 검거되어 순천경찰서에 감금당하였다. 신앙을 버리면 살려준다고 회유하는 공산군에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며 전도하였다. 순천 오순절교회가 순천경찰서 인근에 있어서 그가 고문당하며 부르짖는 비명과 신음소리가 교우들에게까지 들렸다고 한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들의 행패는 더욱 심하여져서 박 장로에게 가하는 고문은 더욱 혹독해졌다. 그러던 중 유엔군의 인천 상륙과 서울 탈환으로 공산군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퇴각하던 공산군은 감금된 양민들을 대부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 박 헌근 장로도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당시 같이 감금되었던 순천중앙병원 원장(최氏)에 따르면, 그는 가족들과 교우들이 보내준 김밥과 옷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피난 중에 잠시 그를 만났던 어느 교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신은 노모의 피난 권유를 뿌리치면서도 교인들에게는 얼마 안 남았으니 계속 잘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양들을 지키다가 노모와 처, 어린 자녀들을 두고 순교한 그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삶을 그대로 실천했던 숭고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남은 유족으로 두 딸이 있는데 차녀 박청자 권사는 광주 서현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4녀 박성실은 군산시 서수면 화등리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성교회의 정진일 담임목사의 사모로서 교회를 섬기며 박헌근 장로님의 순교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첫째 사위는 전남 강진읍 기독교 장로교회 장로로 있으며 제이차 사위는 전남 광주기술공업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은퇴하시고 사위는 전북방면과 서현장로교회 목사님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소천한 3녀 박성제는 충북 청천 순복음교회에 전도사 직분을 다하다가 40전에 소천한 딸도 있습니다. 순교하신 박헌근 후예들 첫딸 삼남매, 둘째딸 자녀 사남매, 막내딸 가족 4남매가 잘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을 이룩한 외손자 외손녀도 있습니다.

 

순교자 백봉렵 전도사 (장로교)

 

백봉렵 전도사(1906-1948)


백봉엽은 1906년 8월 12일 평북 의주군 피연면 태마동에서 초대교회 성도 백낙승 장로와 김락도 권사의 일곱남매 중 들째아들로 태어났다. 백봉엽 전도사는 1948년 1월 눈쌓인 중국 길림성 회덕현 남가자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팔로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중국교회도 북한 교회와 마찬가지로 장개석 군대와 모택동 군대가 맞붙어 대륙을 말발급아래 밟히게 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모택동은 중원땅에서 종교를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백봉엽전도사가 섬기는 남가자교회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예배중지를 명령받았지만 일제 치하에서 목숨걸고 선교하던 백봉엽은 중국당국의 요청으로 예배를 중단할 수 는 없었다. 백전도사는 죽음의 순간을 알았을까? 죽기 한달전부터 죽음의 준비를 하듯 기도에 전념했다. 1948년 1월 어느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오다 교회를 찾아온 팔로군을 만났다. 예배행위를 중지해 달라고 요구하러 온 사람들은 아니고 총을 메고 쩔뜩이는 병사들은 백목사가 성경찬송을 끼고 가는 교인들에게 일일히 인사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총을 들고 백전도사에게 몇방 쏘아댔다." 아버지는 백봉엽이 보통학교를 나올 때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믿음좋은 어머니 밑에서 신의주 고보를 다니며 주일학교 교사에서부터 청년회 일까지 도맡아서 일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법을 배웠다. 형은 왠일인지 돈에 초월한 사람이라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관심이 없었고 백봉엽은 유기그릇 장사를 시작 도자기도 구워서 중국으로도 수출을했다. 청년 그 무렵 청년 백봉엽은 마침 미국유학을 마치고 신의주 제2교회로 부임해 일대 도약의 기회를 맞은 교회 한경직목의 지도를 받으며 소명감을 가지게 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930년 후반기로 오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경직 목사 이하 13명의 신의주 제2교회 교인을 감옥에 같히게 했으니 백봉엽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악랄한 고문으로 가뜩이나 폐결핵을 앓고 있던 한경직목사는 옥중에서 병을 얻었고 고문에 못이겨 천황의 신사에 절했다고 고백하며 노안을 적신 것이 바로 이때였다. 김인범 장로가 보증을 서서 출옥을 했지만 13명의 용사들은 찢어진 마음에서 피를 흘리며 울며 뿔뿔이 흩어졌다. 한목사는 교회를 떠나 양로원 원장이 되었고 백봉엽전도사는 중국땅 북경에 망명하여 하북성 석가장에서 석가장교회를 개척설립했으니 1938년 장로교 제27회 총회가 열리던 해였다. 석가장교회 교세가 확장되어 자립할 형편이 되자 길림성 회덕현으로 옮겨 남가자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남가자교회가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때 1945년 8.15해방이 되었다. 중국 교포들중에 아주 부자이거나 아주 가난한자 외에는 속속 귀국길에 올랐다. 백전도사는 형제들과 아들들은 서둘러 귀국을 시키고 아내 염영선 집사와 모친 김락도 권사만은 함께 남았다. 목자 없는 어린 양들을 두고 자신들만 귀국하는 몰염치를 저지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8년 1월, 중국의 전세는 혼미했고 그런 혼미속에 목회하던 백전도사는 팔로군의 총에 맞아 교회당 뜰에서 순교했다. 총에 맞아 피를 쏟으면서 아내에게 "모친과 함께 고국으로 가시오" "나는 고요히 하늘나라로 먼저 갑니다" 이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으니 이 때 나이 43세였다. 백전도사의 유족으로 여동생 백은엽 권사가 유일하게 살아 매제 박순복 장로와 함께 영락교회를 섬기고 있다.

 

순교자 서기훈 목사 (감리교)

 

서기훈 목사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요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

 한 줌 흙을 퍼 옮겨놓으면 아마 그런 모습일 것이다. 철원평야 한가운데서 長防山은 화선지에 찍힌 획 하나처럼 작고 보잘 것 없었다. 온통 낙엽송 밭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그늘 속에 마을이 소복히 앉아있었다. 마을의 돌담들은 나이가 든듯했다. 한탄강이나 대교천 강돌들일텐데 덕지덕지 세월의 때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장흥교회도 돌집이었다.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곰보둘들이었다. 철원 제일교회의 무너진 벽채와 돌계단에서 보았던 바로 그 현무암들이었다. 넌즈시 한 시대를 공유했던 두 교회의 아픔을 암시하고 있었다. 17평 벽돌집을 이어붙였지만 뒷채 곰보돌 벽엔 여전히 잔인한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독교 감리교단의 첫 반공 희생 사건이자 장흥교회가 연루된 첫 순교 사건은 48년 8월에 일어났다. 이시영 부통령은 멀지않아 38선이 헐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극비리에 ‘38선이북관리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통령은 김윤옥목사(당시 34세)를 불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상임이사를 지낸 김병조 목사(1876∼1947)의 아들. 김목사는 38선 이북 강원도 반공책임자가 되어 38선을 넘어 철원 제일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젊은 부목사는 장흥교회를 주목했다. 이 교회는 1920년 장방산마을 고봉기씨집에서 창립한 철원교회의 자교회.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이었던 신석구 목사를 비롯해 명관조 박경룡 목사등이 담임하면서 민족교육이 단단히 착근한 교회였다. 이 교회 청년 30명을 모아 ‘신한애국청년회’를 결성했다. 46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그해 8월 일망타진됐다. 장흥교회 청년들은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갔다. 그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박성배장로는 8년, 박정배(당시 36세)는 5년, 김정필(당시 37세) 정창화(당시 35세)는 각각 15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모두 옥사했다. 몇사람이 옥고를 치르고 돌아왔으나 이내 그들은 다시 함경고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장흥리 사람들은 시퍼런 한을 장방산에 묻었다. 장방산은 한많은 산이었다. 50년 10월 10일 육군 백골부대가 철원읍에 진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1백5가구중 30가구가 공산당원이었던 장흥리에는 아직도 서슬이 퍼런 그들의 시선이 마을을 감시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장방산에 ‘터졌다 38선. 만나보자 부모형제’란 삐라가 뿌려졌다. 마을 봉기의 예고탄이었다. 마을 청년들은 어느새 토마토 빨갱이 30명을 공회당에 감금해 놓았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저지를 죄과를 벗어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출타중이던 徐琦勳목사(1882∼1951)는 이 소식을 마을 밖에서 들었다. 그는 허겁지겁 마을로 달려왔다. 이미 두 사람이 처형된 뒤였다. “내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徐목사는 준엄하게 청년들을 꾸짖었다. 徐목사는 徐榮九논산군수의 장남이다.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이미 고저 구역장, 철원지방 감리사, 원산 구세병원 원목, 원산 신고산교회 담임 등을 지낸 원로목사. 47년 5월 신한애국청년회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장흥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파송된 그의 권위는 대단했다. “내말을 듣지않으면 내가 마을을 떠나겠다”는 호령에 청년들은 ‘원수’를 풀어줬다. 그러나 徐목사는 바로 그 원수들의 손에 순교했다. 전세가 역전돼 마을은 다시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徐목사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냉정리에서 첫 밤을 보내던 徐목사는 열 집이 마을을 떠나지 못한 사실을 알았다. 그날밤 노목사는 가족을 이끌고 장방산으로 돌아왔다. 열 집의 마을 주민들은 내무서원의 눈길을 피해 아궁이나 돌각더미속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목사가 울리는 새벽종소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밤중 돌담장모퉁이에서 “오늘은 약력으로 섣달 스무사흘,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하루, 30분만 있으면 자정”이라고 날자와 시간을 알려주는 노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있었다. 51년 새해 첫날, 실성한 사람처럼 어두운 마을을 순회하던 노목사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장흥교회는 종이 울리지 않았다. 다시 장방산으로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노목사는 교회에 없었다. 내무서원들은 노목사에게 처음 외아들 기택씨(현 인천 영화학교 교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요리의 빈창고로 끌려갔다. 그들은 창고에 훤히 불을 밝혀 놓았다. 등화관제를 하지 않은 건물은 B-29의 좋은 표적이었다. 그들은 목사의 아들을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포탄이 떨어지는 틈을 타 철원을 탈출했다. 그해 12월 13일 몰래 교회를 찾아온 권오창 장로에게 徐목사는‘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오,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라)란묘한 글귀 하나를 적어줬다. 철원평야는 큰 눈으로 새해를 맞았다. 작은벌 끝 대교천변의 韓집사집에 기거하던 徐목사에게 새해 손님이 찾아왔다. 잘 아는 내무서원이었다. “갑시다.”들판을 가로 질러간 발자국은 세 개였다. 하나는 내무서원의 것이고 하나는 徐모사의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노목사의 길을 마지막까지 동행하던 그의 지팡이 자국이었다. 발자국은 들판을 지나 장방산으로 올랐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발자국은 오래도록 멈춰 서 있었던 것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은 동송 사문안골로 이어졌다. 거긴 지금도 철원사람들이 그곳으로 끌려간 사람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해 ‘死不還’골로 고쳐 부르는 곳이다. 15년 뒤인 67년 마을 사람들은 장흥교회 뜨락에 오석으로 된 비 하나를 세웠다. 작은 비신이었지만 이수와 비좌를 갖춘 정성을 들인 비였다. ‘故 서기훈 목사 순교 기념비’에는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이란 그의 시구가 적혀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요(요:25∼26)’란 성경구절은 마을 사람들이 노목사의 음성인양 가슴에 묻고 싶은 바램같은 것일 것이다. 작은 동산 장방산은 동으로 자릿벌, 서로 달챙이들, 남으로 메닷다니들, 북으로 작은벌 등 온통 철원평야를 거느리며 한탄강과 대교천을 굽어보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둔덕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장방산이라고 멧산자 하나를 더붙인 것은 아마 그 산이 작지만 큰 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처: http://www.dmzline.com) 

 

순교자 서두성 목사 (성결교)

 

 

서두성 목사(1920-1950?)


서두성 목사는 1920년 2월 11일(음)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에서 부친 서정원씨와 모친 최옥진여사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한편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이수 후 향학열에 불타는 소년으로 마을 어른들께 칭찬받는 모범학생으로 손년기를 보냈다. 예수믿는 노인 여집사의 인도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노인집사의 외손녀와 백년가약을 맺었고 부인 이기남 권사는 독립문성결교회 권사였다. 신혼의 보금자리에서 멀지 않은 단양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낮에는 농군 밤에는 야학선생님 마을 무료봉사 이발사 주일에는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중추적인 역활을 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서울신학교에 입학였으며 신학생 시절에 마포구 신수동의 신수동성결교회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48년 11월 첫 부임지이자 마지막 사역지이기도 한 경기도 용인군 백암리 소재 백암 성결교회에 부임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한 해로 사상적 경제적 혼란한 어려운 시국에 지방관서의 협조를 얻어 시국강연회를 얼어 공순주의의 이중성에 현혹되지 않게 노력을 했다. 서목사는 거리가 멀거나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할 수 없는 청소년들을 보고 교회사택을 수리하여 교실을 만들고 서울에서 선생님을 초청하여 수업을 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백암중학교의 모체이다. 청년들의 의식개혁을 위하여 청년단을 조직하여 사경회 시국강연회등을 열어 신앙을 바탕으로 한 확고부동한 국가관을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6.25 전쟁으로 모두 피난을 떠날 때에도 서목사는 교인과 인민군 점령하에 숨죽이며 교회에 모여 기도하며 교회를 지키다 공산군에 체포되어 다른 교인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감금되었다가 1주일 후 석방되어 사택에 머물다가 내무서로 연행되어 북송되던 중 수원의 어느 야산에서 살해되었다. 후배로 목사님을 따르던 권유석(현 부산 소재 동광성결교회 담임)목사도 서목사의 목회활동과 그의 사랑실천과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청년운동 어린이 정서교육을 힘쓰고있다. 또한 특히 굶주린 사람을 만나면 당신이 잡수시던 것 까지도 내어주었으며 유치장에서도 당신 몫으로 나온 밥을 먼저 체포당해 오랜 옥고로 몸이 쇠약해진 사람에게 먹여주었고 평상시 추위에 떠는 이웃에겐 입었던 옷까지 벗어 주므로서 목사는 변변한 외출복도 없었다고 한다. 유족들은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아 그분께서 못다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도리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순교자 석박남 전도사 (장로교)

 

 

석박남 전도사(1903-1950?)


석박남은 1903년 5월 9일 함흥시 풍량리 석승필 옹의 차녀로 태어났다.석승필은 당시 선교차 함흥에 온 카나다 선교사들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교육열이 남달라 아들은 물론 딸들까지 8남매를 모두 신학문을 공부시켰다. 별난사람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딸들까지 공부를 시켰다. 석박남과 그 언니는 영생여학교 초대 졸업생이 되어 둘다 선생이 되어 민족교육에 이바지 하였다. 석박남은 주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야간에는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학원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전도자 까지 검했다. 동정녀로 살기로 결심하고 복음전도에 열심을 내다가 서울에 와서 정신학교를 마치고 요꼬하마 공립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뛰어난 손재주로 수예품을 만들어 학비를 조달하다보니 춘하추동 한벌의 의복, 운동화 한켤레, 1일 1식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그를 친언니 처럼 따랐던 윤보선 대통령부인 공덕귀여사는 그를 가르켜 "석전도사는 성녀였다"고 증언 한다. 일본 고배중앙신학교 출신 가가와 선생의 영향을 받아 빈민선교를 통해 생활속에서 그리스도를 심어야 한다는 철학을 실천하였다. 1934년 카나다 선교부의 선교프로젝트로 사할린 등 로서아지방 노무자들을 위한 선교프로젝트에 10년간 참여했다. 그의 선교사업의 특징은 생활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할린 선교사로 7년을 마치고 해방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와 큰교회의 청빙을 물리치고 미자립교회인 서상리교회를 담임했다. 해방 후 1947년 동생들은 모두 월남하여 소식이 끊겼고 2년 후 6.25발발 후 그는 공산치하에서 박해에도 불구하고 월남을 거부하고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1978년 경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여사가 순교소식을 동생 석영근 집사에게 알려주었다. 석영근 집사는 "제 누님은 하나님이 이 시대에 보내신 성녀였습니다. 그의 소유라고는 성경 찬송 몇벌과 그가 배우던 종교서적이 전재산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사랑을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 대 사회적인 기독교의 모습이 어떠해야 되는 가를 보여준 분입니다"라고 증언했다. 동정녀로 주님위해 살다가 순교한 석전도사의 동기는 석박순권사, 석영근집사, 석정복권사, 석춘복권사, 석춘근집사, 부산인제대학교수 석동수박사 등이다. 

 

순교자 석옥린 목사 (장로교)

 

 

석옥린 목사(1900-1950)


일신의숙 이사장으로 민족교육을 시도하였다. 부백리교회에는 인근 동리에서 몰려온 청소년들로 가득찼다. 그들앞에 나선 석옥린목사는 청중을 휘둘러 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는 것이 힘입니다. 배워야 삽니다. 우리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 고생을 하는 것도 공부하지 못한 대중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 따라서 하세요.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배워야 산다” 청소년들은 목에 힘을 주고 교회가 떠나가라 외쳤다. 일신학원은 석옥린목사에 의해 세워진 민족학교였다. 석옥린은 1900년 2월 28일 평안남도 평원군 동암면 부백리에서 석은찬 영수의 3남으로 출생했다. 부친 석영수는 부백리교회를 개척 설립한 인물로서 비교적 개화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석옥린은 한문만 읽은게 아니라 보통학교도 다닐 수가 있었다. 그가 20살 되던 해에 3.1만세운동이 터졌다. 석옥린은 청년들을 이끌고 부백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일경은 눈이 시뻘개서 석옥린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1년을 숨어 살았다. 그러다가 시국이 좀 잠잠해지자 나와서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아무래도 민족을 이끌려면 배워야 하겠다고 생가해서 21살이란 나이에 중등교육기관에 뛰어든 것이다. 5년의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 그는 숭실전문대학으로 가지 않고 평양신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전도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신학생이란 개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다녔는데 한학기 공부하고 1-2년 쉬고 또 등록해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석옥린도 그런 교육과정을 밟았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를 9년만에 졸업했다. 1941년 36회로 졸업을 한 것이다. 석옥린은 목사가 되어 아버지가 세운 부백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평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민족교육에 대한 계획을 실천해 나갔다. 一信學院을 창교한 것이다. 평원군은 내륙고원에 위치한 산골이어서 가난이 깊었다. 주민들은 공부하기 보다 먹고 살기에 바빠 흙 두더지처럼 땅만 파고 살았다. 석목사가 일신의숙을 사작한다고 간판을 내 걸었을 때에 구름떼처럼 모여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 전체를 발로 뛰며 지역민들을 설득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제 이름자나 쓸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면사무소에서 공문이 날아들면 무슨 공문인가 읽을 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보내십시요. 무료로 가르쳐 주겠습니다.” 무료라고 해도 무지한 주민들은 선뜻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 어린아이의 일손도 귀해 당장 급한 농사를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석목사는 일신의숙을 낮에만 가르치는 주간학교를 운영하지 않고 야간학교까지 운영했다. 그들이 바로 이 나라의 부흥을 책임진 동양의 재목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교육하며 민족의식과 함께 신앙을 아울러 주지시켰다. 민족의식 교육은 이 나라에 태어난 것에 대한 자각의식이고 신앙교육이란 하나님의 뜻때로 살아갈 의로운 백성을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석옥린은 목사가 되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뛰었다. 일제하에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를 복창하며 일신학원 창교하여 8.15해방까지 민족의식과 함께 신앙심을 아울러 주입시키고 실천했다. 해방직 후 동암국민학교 명예교장으로 교회를 시무하면서도 학교를 재건축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해방 후 기독교도연맹 결성하고 가입을 강요하는 강양욱의 요구를 거부하고 김화식목사를 중심으로 의식있는 목사들이 기독교자유당을 창당하여 남북이 통일될때 기독교정신을 구현할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창당준비를 할때 석옥린목사도 중심멤버가 되었으나 내부고발로 창당도 못하고 체포당해 함흥 본궁교화소(형무소)에 수감되어 강제도동에 시달리든중 6.25가 터졌고 1950년 12월 북진하는 UN군들의 의해 함흥과 흥남이 접수되자 퇴각하는 공산당들은 10월 15일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석옥린목사등 애국지사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장남 석윤경목사 차남 석윤식목사 삼남 석윤초장로 장녀 석윤란집사. 손자 석남식목사. 증손 석승권(장신대)으로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안길선 목사 (장로교)

 

 

안길선 목사(1891-1950)


해방 이후로 지금까지 성동구에 자리한 한국교회의 지표로서 그 자리를 지켜온 신당중앙교회. 그 숨쉬는 역사를 힘있는 맥박으로 이어지게 한 심장부가 있다면 바로 교회 마당에 자리한 '안길선목사 순교기념비'의 신앙적 유산일 것이다. 그는 1891년 12월 8일 함북 성진에서 출생하셨다. 신사참배반대로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경성신학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음. 만주 각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집회를 기획해 나갔다. 신사참배 거부로 중국에 망명 연변 용정에서 동산교회를 시무하시다가 1945년 해방과 함께 청진에 남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이승만의 앞잡이로 오인받기도 했다. 1948년 2월 월남하여 바로 신당중앙교회 시무하였다. 그는 자주적인 민족목회를 주장했고 신학교시절부터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로는 송창근 목사(조선신학 학장)와 박형용목사(고려신학 학장) 인권운동가로 유명한 김재준목사 등이 있고 송창근 목사는 안목사와 함께 북으로 납치되었다. 1950년 6월 27일 신당동을 지나가는 피난민을 보며 가족들은 안목사를 설득했지만 "만주서도 양떼들을 버리고 나왔는데 어떻게 나만 살자고 또 여기를 떠나겠느냐, 아직 피난가지 못한 교인들도 있는데 난 교회를 지킬테니 어머니를 모시고 너희들만 떠나거라" 고 하고 1950년 8월 23일 오전 10시 교회에서 기도하시다가 납북되어 순교하셨다. 아들 안철호 장로는 누이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에 피난갔다가 9.28수복으로 서울에 올라온 가족들은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고 당혹감과 슬픔 속에 빠졌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아오지의 한'은 남궁혁 박상건 송창근 등 60명의 저명 종교계 납치 인사들은 50년 12월 10일쯤 압폭강 연안의 만포 부근까지 당도하여 헐어빠진 농가에 수용시키고 기독교도연맹에 협조할 것을 설득하다가 실패하자 식사도 제대로 안주고 불도 때 주지 않아 종교인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새우잠을 자야했고 발진티푸스에 걸리고 사경을 헤메는 등 결국 납치 당했던 인사들은 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하늘나라에 안식했다. 안길선목사는 김광훈목사, 한만영, 최원일, 정원석 목사 등 한국 교계의 귀한 종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많은 목회자와 일꾼들을 배출해냈다. 안길선 목사의 외아들인 안철호장로는 서울대에서 40년 교수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토목학계의 거목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안철호는 (주)범아 엔지니어링 회장으로 항공축량사업계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교육은 물론 회사에 신우회를 창립해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며 직원들의 영성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고 순결하게 살다가신 아버지 안길선 목사의 뜻을 기리며 안철호 장로는 이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과 주께서 흠향하실 향기로운 찬양의 메아리를 위해 헨드벨 콰이어 사역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하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안덕윤 목사 (장로교)

 

안덕윤 목사(1897-1950)


안덕윤은 1897년 11월 22일 전남 광양군 진상면 원당리에서 태어났다. 성경학교 신학교 시절에 광양의 농촌교회, 평양의 여러교회 전도사로 시무 1939년 평양신학교를 34회로 졸업하고 1940년에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광양중앙교회 담임으로 시무하였다. 말씀의 능력과 신유의 은사가 있어 부흥사협회에 가입하고 부흥사로 파송받았다. 1943년 목포지방에서 부흥회 하던중 "천황은 신이 아니다, 2-3년내에 일본이 망하고 조선도 해방을 맞는다"고 한 설교가 일경의 귀에 들어가 2년 6개월 옥살이 하던중 해방을 맞았다. 안목사의 예견은 정확했던 것이다. 출옥한 안목사는 고성읍교회 죽산교회를 거쳐 6.25 한해 전에 대창교회로 옮겨 시무하다가 6.25를 맞은 것이다. 아내가 피하기를 권했지만 "살면 충성이요 죽으면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는 것인데 무엇을 염려합니까."? 하며 담대하게 교회를 지켰다. 물밀듯이 밀어닦친 공산군은 대창교회를 접수해 인민군 임시본부로 사용했고 교회 사택도 쓸만한 물건은 모조리 가지고 갔다. 1950년 9.28 수복으로 서울을 탈환하는 등 전세가 180도 바뀌었는데도 김제는 여전히 인민군이 동리를 장악하고 철통같은 수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남포에서는 동리 청년들이 성급하게도 라디오 방송을 듣고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며 농악대를 앞세우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가 졸지에 40여명의 청년들이 인민군에 의해 체포당해 교회당에 감금되었다. 이때 안목사도 배후조정 가능자라고 하여 함께 연행돼 함께 교회 당에 감금되었다가 40명 청년들과 함께 총살당하고 인민군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1950년 9.28수복시에 농악대를 앞세우고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는 청년들의 배후조정 가능자라고 하여 함께 연행하여 교회당에 감금당했다가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40여명의 청년들과 함께 안목사를 끌고 가다가 총살하였다.

 

순교자 안봉진 목사 (장로교)

 

 

안봉진 목사(1895-1949)


안봉진은 1895년 8월 10일(음)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장호리 116 번지에서 안기환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오성학교시절 입신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의술까지 시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에 서울에가서 서울의전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재정보증인이 없어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안봉진은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신흥우 박사의 스칼라쉽을 얻어 미국유학길에 고향에 들렸다. 조모의 반대로 미국유학 기회를 놓치고 장로교에서 안수받고 순회목사가 되어 경기도 양주 강원도 협곡 호양 고저교회를 돌보든 중 1948년 함경도 원산 신창 속후 등 여러교회를 전전하다가 북청교회에 안착하였다. 일제하에 그의 목회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북청교회 당회장으로 있으면서 함남노회장을 역임 교회재건에 동분서주 했다. 번듯한 민족교회를 역설한 그는 붉은 국가 건설을 위해 협력할 것을 강요하는 공산당의 요청을 반대하고 오히려 공산당이 싫어하는 조선 민주당 북청군당 위원장으로 활동을 하며 신앙의 절개를 다짐했다. 자연 공산당의 눈밖에 날 것은 당연했다. 공산당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편을 만들려고 8.15,3.1절같은 국경일에 원고를 미리 써주고 연사로 협력할 것을 강요하고 기독교도연맹에 군당위원장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 반동으로 몰아 가택수색을 하는등 공산당의 사찰정치에 시달렸으나 월남하지 않고 교회를 지켰다. 공산당의 사찰정치에 견디지 못한 교역자들이 하나둘 월남하자 1947년 북청성동초등학교 교사였던 외동 딸이 "그러지말고 아버지 남한에가서 살자고 "애원했지만 "목자가 양떼를 두고 어찌 도망치듯 피난할 수 있느냐? 이 아비를 삯군목자로 만들지 말거라" 그리고는 1948년 중앙교회를 거쳐 고향인 신창교회로 임지를 옮겼다. 안목사가 고향교회로 부임하자 기독교도연맹은 그를 군당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꼭두각시 노릇을 시키려고 했지만 안목사는 죽기를 각오한 듯 강경하게 거절했다. 1949년 크리스마스 때 내무서에서는 의도적으로 집회허가를 내주지 않고 크리스마스 전야에 집회승인 문제로 잠간 왔다가라는 연락을 받고 출두했으나 밤 10시에 서시베리아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이 돌아오나 해서 끝내 월남하지 않고 공사당의 학정에 몸서리치다가 정신분열증세를 보인 2남과 함께 북에 남았다. 세째 아들 순천만을 월남시켜 딸 준삼씨와 함게 교회 집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순천씨의 가족으로 자부 김월순 집사 사이에 손자 용검이와 손녀 미영이가 있고 딸 준삼씨도 3남 1녀를 슬하에 두었다. 한평용목사는 순교자라는 시를 써서 시베리아로 유배간 순교자들을 신학세계에 헌시해 위로 했다. 바람찬 시베리아 감옥 안에서 스라린 온갖 고생 다 당하다가 정 깊은 고국 하늘 바라보면서 불쌍타 남 모르게 세상 떠났네.

 

순교자 원성덕 목사 (장로교)

 

 

원성덕 목사(1889-1951?)

 

1889년 10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서 태어나 민족의 요람 선천 신성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구성면 면서기가 되어 근무했다. 면서기로 근무하든 중 3.1만세 사건이 전국을 강타하게 되었을 때 독립선언문을 구해서 친히 손으로 써서 등사를 하여 구성군의 유지와 청년들에게 배포했고 원성덕의 애국적 행위에 감동받은 군민들은 4월 첫 구성장날을 택해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폈다. 필적수사를 통해 원성덕의 필적임을 알게된 일경은 그를 수배했고 원성덕은 윤하영과 함께 최창학의 폐광굴로 숨어들어 부인이 두레박으로 내려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피신하다가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계획으로 윤하영과 약속하고 헤어진 후 부인과 작별을 하고 산자락을 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선천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미 잡혀온 윤하영과 함께 일경에게 고문당해 몇번이고 까무라쳤다. 마침 선천경찰서장이 원성덕의 먼 친척으로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어 2년 형을 받고 출소했으나 그와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6명의 동지들이 하나같이 고문으로 옥사한 사실을 알고는 세상의 허망함을 느끼던 나머지 하나님의 사자가 된다는 소명감을 가지고 평신에 입학 1926년 19회로 졸업한후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남시교회에 부임했다.남시교회를 시발로 천산의 영동교회 원세평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 1945년 8월 14일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애국가를 가르침으로 반일감정을 고취했다고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이튿날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 공산군은 원목사에게 애국자라는 표창을 주며 회유했으나 거부하자 요시찰인물로 일거수 일투족 감시대상이 되었다. 공산화된 북한에서 신시교회, 영산교회를 를 섬기든중 6.25사변을 맞고 가족들의 월남권유를 "양떼를 버리고 목자가 어디를 가겠느냐?"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교회를 사수하다가 UN군 북진할 때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 산에서 대검에 무참히 찔려 죽임을 당했다. 살아있는 원목사를 대검으로 찔러죽인후 머리, 팔, 다리 등을 각을 떠서 주검의 시체는 가마니에 넣고가버렸다. 잡혀가는 원목사를 뒤따르던 교인들과 부인과 자손들이 원목사의 주검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원목사의 후손으로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다문리에 사는 딸 원옥경씨가 있다.

 

순교자 유계준 장로 (장로교)

 

 

유계준 장로(1879-1950)


유계준은 1879년 4월 3일 평안남도 안주군 청산면 오리에서 유석덕씨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영변에서 알아주는 거부였으나 몰락하고 세상을 떠나자 13세에 아버지를 잃은 유계준은 평양으로 나와 어떤 상점의 점원이 되어 3년간 일하다가 1895년 청일전쟁으로 상점이 대성구지라는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그의 재치 있는 솜씨가 주인의 마음에 들어 상점주인의 사위가 되어 단독으로 장사를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평양에 이주 장인이 마련해준 미림리 장터에 한 가옥에서 단독으로 장사를 하게 되었다. 성실했으나 술만 먹으면 부인을 때리고 술주정을 하고 싸움만하면 치료비를 도맡아 물어주던 그가 평양서문통을 지나가다가 깡패 이기풍이 던진 돌에 맞아 터진 이마를 손으로 누루며 시종 웃는 얼굴로 "형님 예수믿고 구원 얻으세요" 하는 선교사 마포삼열의 행동에 아상한 감동을 받고 가까이 지내는 한석진을 찾아가 그 선교사는 미국에서 박사까지 한 석학인데 조선에까지 와서 선교하는 훌륭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중에 전도를 받아 감동되어 중생되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유계준의 부인은 남편에 대해 회고하기를 "중생이란 뜻이 무엇인지를 남편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예수 믿기 전에는 맹수 같았는데 복음이 들어가자 사람이 변해도 어찌 그렇게 변할 수가 있어요?" 천부적으로 효자였던 그는 예수를 믿자 홀어머니와 동생 계삼이를 평양으로 불러 한집에 살면서 동생을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숭덕학교 교사로 일하게 만들었다. 결혼 6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자 부인은 새벽마다 산정현교회에 가서 기도하여 6년만에 장자 기원을 얻어 기뻤으나 아들이 예능방면에 관심을 갖는 아들의 캠퍼스를 찢고 목사가 되라고 했으나 목사는 못하고 의학을 해서 인술을 베픈다고 하여 그것까지 막을 수 없었다. 자기의 기업을 사기업으로 키우지 않고 민족기업으로 키운 청지기 사상이 뚜렸한 기업으로 평을 받았다. 교육사업에 눈을 돌리고 숭덕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이사장이 되었다. 교육사업은 항상 미쪘고 모자라는 월급은 기업에서 충당했고 그러면서 그는 일찍이 양로원 사업을 시작했다. 극심한 기근과 일제의 수탈로 젊은이는 이민가고 노인만 고향에서 고생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며 굶어죽는 수가 적지 않아 기도하는 중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 땅에서도 알아주는 소금장사로 수출하는 소금속에 독립신문을 감추어 배포하였고 산정현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은 그는 독립자금모금 등 독립운동에 힘썼고 창씨개명 반대 학도병제도 반대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민족적 거목이었다. 교회헌납을 강요하는 공산정권에 반대하여 교회 정문에 두러누워 버티다가 1백명의 무장 군인에 의해 교회를 징발당하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사가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6.25가 발발하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28 북진하는 국군의 공세에 몰려 퇴패하든 공산군에 의하여72세에 총살당해 주님의 품에 안겼다.

 

순교자 유세근 목사 (성결교)

 

兪世根(유세근·1909-1950) 


대한성결교회 서울시 독립문교회 목사이다. 8월23일 오후 4시경 서울 독립문 성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당을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되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경성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유세근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납북된 인물들로, 2000년 들어서 본 교단에서 순교자로 추서되었다. 한편 용인한국교회순교자기념관은 한국교회 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으며 장로교와 감리교, 본 교단 등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기간 중 순교한 한국교회 순교자들과 그들의 헌신적인 신앙의 기록이 사진과 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순교자 유영복 정교 (구세군)

 

 

유영복 정교(1914-1950)


유영복은 1914년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사업을 하던 유춘실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중학교때 부친이 부도가 나 빚독촉에 못이겨 금화로 이사가는 바람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부친을 따라가 토건업을 하면서 토관제조업에 착수 1년만에 약관 20에 큰 토관제조회사로 발돋움했다. 그대 유영복에게 새로운 전기가 될 기회가 왔다. 김화시장에 군복을 입은 이들이 북을 치며 강연하는 것을 듣는 인파에 들어갔다가 예수를 믿으면 죽지 않는 다는 강연을 듣고 죽어도 다시 사는 비밀을 알아보기 위해 영문에 출석하기 시작 하게 되어 병사가 된 것이다. 유영복은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금주 금연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김화영문에 출입하기 시작한 그는 성령세려를 받아 열심있는 병사가 되었다. 바쁜 일중에도 전도대원들과 함께 매주일과 수요일 오후에는 북을 치며 찬송을 부르며 전도를 하며 큰 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그의 열심으로 아내는 물론 부모까지도 교인이 되었고 유씨 집안은 이제 착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유영복은 25세에 부교가 되었고 그의 열심은 4년후 30이 되기전 정교가 되었다. 그가 정교가 된 후에는 김화영문의 살림을 도맡아 했다. 김화영문에서는 강습소를 운영했는데 구세강습소는 학교를 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과정에서 중등학교 과정까지 있었다. 대입검정도 지도했는데 김화에서는 구세강습회가 명문고로 통하고 있었다. 학생도 물론이고 교사강사료도 무료였고 영문이 담당했는데 그것은 바로 유영복정교의 몫이었다. 금화영문의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구세강습소를 무료로 운영하며 담임사관을 불편없이 보필함으로 교세가 불어났다. 그의 사업은 이상하리만치 번창했고 구세강습회는 많은 학생들을 수용했다. 유영복정교는 구세군 영문중에서도 사관님을 따뜻하게 모시는 정교로 소문날 정도였다. 담임사관이 오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쌀도 팔아다 독에 채워 드리고 도서비다 심방비다 예비비다 해서 목회에 지장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일제의 교회 탄압으로 교세가 위축될때에도 김화영문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고 교육에도 힘을 기울여 교세가 부쩍부쩍 늘어났다. 그가 남다른 열정으로 김화지역 선교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일제하에서도 그의 열정은 그의 사업도 잘되고 교세도 불어난 것이다. 1945년 해방후 영문안 프락치들은 담임사관의 설교를 메모해 보고하고 기독교도연맹에 가입압력에 못이겨 영문사관이 서울로 가버리고 유영복정교가 책임을 지게 되었다. 유영복은 담임사관 파견을 요청했지만 공산당이 교회를 없애려고 탄압을 느추지 않고 박해중이라 오는이가 없어 유영복이 영문을 책임지고 이끌어갔다. 1950년 6.25가 터지자 남한으로 피난가자는 권유도 물리치고 교회를 지키다가 1950년 10월 28일 UN군에 패퇴하던 인민군에게 끌려가며 배교를 요구받았으나 거부하자 배우개고개에서 따발총으로 사살했다.

 

순교자 유정철 목사 (기장)

 

柳禎喆(유정철, 1904-1950) 


기독교 장로회 신남포교회(장로교) 목사이다. 8월21일 오후 10시경 중구 장충동 2가 162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되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시무 중이던 신남포교회에서 6월23일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에 피살되었다.

 

순교자 이  건 목사 (성결교)

 

 

이  건 목사(1896- 1951) 


이 건은 1896년 10월 20일 함경남도 북청(北淸)에서 엄격한 유교 가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머리가 명석한 그는 학업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 20살 때에는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이 건은 유교의 전통에 젖어든 부모의 슬하에 자라면서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가 17,8세가 될 때에 기독교를 접하자마자 곧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대쪽같이 곧고 바른 그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는 열심히 경건한 신앙행활과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이씨 조선이 한말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어이없이 무너져내리자, 이 건은 기독교를 통한 민족의 구원을 내다보게 되었다. 유교의 인습에 강하게 젖은 그의 부친은 제사 문제 등의 이유로 그의 교회출석을 몹시 반대하였으나, 갖은 핍박 속에서도 이 건은 신앙생활에 더 열심을 내었다. 그는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였고, 기도에도 열심이었으며, 주일학생을 가르치고, 교회봉사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럴수록 가정의 핍박이 더 심해져서 그가 아끼던 종교서적들을 불태우곤 하였다. 1920년에 이 건은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 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신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 보조를 받을 수 없었던 그는 피눈물나게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추운 방에서 굶주린 배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2년 동안 공부를 계속하였지만 그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져갔다. 결국 그는 고향친구요 믿음의 동지인 이원균의 권면을 받아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한 후에 그는 나라를 빼앗긴 조국을 위해 일하고자 하였으나 그럴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겨레를 구원하는 것이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보다 더 급한 임무임을 깨달은 그는 1922년 경성성서학원(京城聖書學院: 현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이 건은 천성이 경건하고 인물이 준수하며 신학문과 구학문을 겸비한 수재였으며, 신학생 시절부터 뛰어난 독서열과 학구열을 보였다. 1925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성서학원을 졸업한 그는 그해 6월에 평양으로 파송을 받아, 부교역자 김제근(金濟根)과 함께 평양교회(일명 상수리 교회)를 개척하였다. 유학시절의 가난 때문에 병약하였고 뼈가 앙상하였던 그의 사역을 가족은 극구 반대하였으나, 그는 부인과 자녀들을 이끌고 상수리 교회에 부임하여 3년간 목회에 전념하였다. 평양교회의 신자가 100여명으로 늘어나 교회의 공간이 협소해지자, 이 건은 1928년에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같은 해에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평안남도 지방 감리목사 대리로서 산하 교회의 감독과 치리(治理) 등에도 힘썼다.  육신의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1931년에 이 건은 경성성서학원의 교수로 초빙을 받아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그는 교무과장 혹은 학생과장의 직책을 맡았으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의 거부로 1934년에 교단이 해산되고 경성성서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썼다. 천성이 강직한 이 건은 신사참배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교 중에도 천황숭배가 우상숭배의 죄임을 강조하였다. "활천"에 기고한 그의 글 '기독교 재림문제'가 곧 이를 잘 보여준다. 밤이 캄캄할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것같이 時代가 暗黑에 빠져들어갈수록 하나님의 擇하신 子女의 빛은 더욱 드러난다.  우리가 初夜에 天空을 쳐다보면 별들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깊어오면 天空이 캄캄하여진다. 이때에 별들은 그 값없는 빛을 明朗하게 드러내인다. 今日 우리의 處地도 그러하다. 참빛의 아들된 信者나 敎役者이면 至今이 곧 빛을 드러낼 때이다. ... 末世敎會에도 一邊 主의 在臨을 悲望하며 順福音을 傳하고 있는 者가 많은 것이다. '사데에 오히려 몇 명이 있어 흰옷을 더럽히지 아니한지라, 저들이 合當한 자니 白衣를 입고 나와 함께 행하리라'(묵 3:4) 한 말씀과 같이 우리들은 遺殘者의 班列에서 主를 證據하며 살 것이다. 不義한 자 그대로 不義하고 깨끗하지 못한 자 그대로 깨끗지 못하되 오직 우리들은 信仰貞燥를 굳게 지켜 나갈 것이다." 8,15 광복 후에 이 건은 새로 개교한 경성신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혼란기의 교단 목회자의 양성에 노력하는 한편, 교단 기관지 "활천"의 주필도 겸직하여 교단 목사들의 자질 향상, 영적 지도에 힘을 쏟았다. 1950년 6,25전쟁 때에 그는 박현명, 김유연 목사 등과 함께 피난을 가지 않고 신학교를 지키겠다고 남아 있다가, 같은 해 8월 23일 아침에 북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붙들려 납북되었다. 납북된 이후의 그에 대한 소식은 알 수 없다. 1962년에 내외문제연구소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던 글 "죽음의 세월"에 의하면, 이 건은 발진푸스에 시달리며 평양까지 끌려가, 북한에서 지하 신앙운동을 일으키던 김인준(金仁俊), 박상철(朴相澈) 목사와 연락하며 수용소 안에서 신앙운동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끝내는 1951년 말엽에 김유연 목사와 함께 순교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성서영해전집(聖書靈解全集), 성서인물강화(聖書人物講話) 및 설교집 "진리의 강단" 등이 있다.

(글 출처- http://blog.naver.com/bianco100/10010428579)

 

순교자 이병휘 장로

 

순교자 이성태 집사 (장로교)

 

 

이상태 집사(1915-1943)


순교자 이상태 집사는 1915년 4월 3일 경북 금천군 구소요면 도암동 198에서 이동하의 4남으로 출생 익산으로 이거함.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심하고 기독교 탄압이 고도에 달한 시절을 사셨고 창씨개명과 신사침배가 극심했던 일제 강점 중 하반기에도 신앙을 지켰으며 초등학교에도 친구들이 증언하는대로 신앙이 좋았고 영명미션스쿨 재학시 민족 독립운동에 심취하셨고 유학적 가정교육과 함께 기독교교육을 받으심. 초등학교시절 주일학교 학생으로 부모님과 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셨고 영명학교시절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셨고 주일학교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주일예배인도자로 안수집사로 설교자로 열심히 봉사하셨고 철야기도와 수시 교회기도와 밤 산기도에 열심히셨음. 1920년부터 1943년 순교하기까지 익산고현교회에서 안수집사로 교회 각분야에서 교사 찬양대 구역인도자 설교자로 신사참배반대를 강력히 주장하셨고 병자방문 심방기도 간호에도 열심히셨음. 강단에서 설교시 신사찹배는 우상이라고 강조하고 군산노회석상에서 신사참배 가결은 불법이요 우상숭배라고 외친 사실로 경찰에 수배되어 서울로 피신하였으나 민족해방운동과 노방전도중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과 옥고를 치루고 깊은 병에 신경으로 가석방되었으나 병석에서 순교하심. 아들 이성수 장로 군산 주암교회 시무 전북장로회 회장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총회재정부장 순교자기념사업부 면려부 부 총무로 학생지도부 회계. 순교자기념사업부 서기로 봉사하고 있음.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시요!라고 부인에게 유언.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요 우상숭배하는 나라와 민족은 망합니다“라고 외침. 유품으로는 거의 소실되었으나 사용하시던 성경 교인들 초상화 스켓취북 사진등이 있다.

 

순교자 이우석 목사 (장로교)

 

이우석 목사(?- 1942)


이우석은 을미사변을 비롯한 구한말의 어수선한 소용돌이와 함께 복음의 씨앗이 싹터오르는 시절 전북 전주 화원정에서 봉산이씨 이선명씨와 전주 최씨 선자씨의 2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미국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13세에 예수를 영접하였다. 복음성가단을 만들어 이들이 가는 곳 마다 간증과 연주로 청중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그 복음성가단원중 이석우는 목사가 되었고 현재명같은 훌륭한 음악가가 배출되었다. 예수냐 조상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아버지의 명령에 거역하게 된것은 부위렴 선교사를 통하여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942년 봄 세례를 받고 부위렴 선교사의 눈에 들어 평양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버지로부터 외면을 당한채 집을 나온 이우석은 학교구내 이발사가 되어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트럼팻연주를 익히며 새로운 양식을 익히니 이 모두 은혜로운 연단이었고 부위렴 목사의 배려였다. 1938년 신사참배결의, 1941년 하와이 기습한 전쟁과 함께 선교사 추방 당하여 부위렴선교사와 이우석목사가 헤어진다. "일본은 이 전쟁에 이기지 못하고 망합니다" 마지막까지 승리하십시오"하며 헤어지는 부위량 선교사의 말에 기대와 꿈이 되었고 민족을 일깨우는 메시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1942년 신사참배 애국헌납기 등 강압적인 요구로 교회의 숨통이 터지자 이우석목사는 부위렴 선교사가 마지막 남기고 간 "일본은 망한다"고 한 말을 주일 설교때마다 반복하니 일본은 이우석목사를 민족주의자로 지목하고 괴롭히다가 검속하게 된다. 일경의 유혹에 답하지 않기 위해서 이우석은 혀를 깨물어 취조가 불가능해지자 석방한다. 석방 후 보성읍교호로 임지를 옮기게 된다. 설교에 불온사상이 내포되었다고 연행하는 일은 예사일이 되었다. 목회 심방 경찰서 연행 부흥사경회 --- 모두 마지막기회로 알고 나팔수의 연주는 복음전파도 되었지만 피로함과 무리는 경찰서 연행과 함께 발병된 임파선 염으로 인하여 진안읍교회에 부임을 앞두고 1942년 11월 6일 오후 16시 230장을 가족들 앞에 브르며 가족들에게 "도를 굳게 지켜라, 오직 믿음으로 성취하라"는 말을 남기도 주님의 품에 안겼다. 미망인 취금례. 장남 봉일장로 둘째 용일 장로 셋째 영일 새샘교회 담임 넷째 호일은 문화교회 시무중 장녀 영자 권사 차녀 광자 명성교회 충성 (유복녀) 이봉일장로는 순교자유족회 임원이다.

 

순교자 이유택 목사 (장로교)

 

이유택 목사(1905-1949)


이유택은 1905년 1월 9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운곡동에서 이퇴계 선생의 후예로 태어났다. 4대독자 유복자로 태어나 한문을 읽다가 14살에 조혼하여 15살에 첫 딸을 낳았다. 그는 예안보통학교에 다니든 중 평양에서 온 김선생이란 분을 알게 되어 예수를믿게 되어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집안 어른들의 "그래 네가 그토록 야소를 믿으려면 할 수 없다. 너는 이 문중에서 나가야 하느니라"는 호통에도 이유택은 부동자세로 엎드려 입을 열줄 몰랐다. 4대독자이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식은 그대로 살려둘 필요가 없다하여 가문회의에서는 처형하기로 결정하여 멍석말이를 하고 발로 밟아 처형하는 한창 도중에 문중의 어른들이 곰곰히 생각하고 "그런대로 쓸모있는 놈을 그대로 죽이기는 애석하다"하여 중단했다. 멍석말이에 풀려난 그를 보고 있던 문중 어른 중 외삼촌이 신주단지를모두 끄집어 내어 냇가에 내동댕이 치고 신주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니 이런 놈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낫을 던져 찍었지만 다행히도 빗나가 목숨을 구했다. 어린 중학생의 몸으로 슬하에 딸 셋이 있었고 문중에 축출을 당해 가족을 먹여 살리랴 학비를 벌랴 갖은 고생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머리가 비상하여 시간에 쫏기면서도 항상수석을 차지하여 매퀸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매퀸은 이유택을 전문학교를 거쳐 미국유학을 시킬 계획이었지만 김인서 장로가 매퀸에게 길선주목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훌륭한 젊은 전도사를 찾는다고 하니까 이유택을 소개했다. 이유택은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7년 32회로 졸업한 후 평양노회에서 1937년 목사안수받고 신현교회 담임으로 부임. 1938년 9월 10일 제 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가결시킬 때 이미 금강산 수양관에서 10일동안 주기철, 김화식목사와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던 이유택목사는 땅을 치고 울었다. 1938년 농후회사건에 연루되어 주기철목사와 함께 주동자로 몰려 경북 의성 경찰서로 잡혀가 7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았다. 출옥 후 1941년 신현교회는 폐쇄 당하고 남신의주 교회에 부임 해방을 맞았다. 일제에 의하여 신앙의 용장이 된 이유택목사는 해방 후 신현교회를 재건함과 동시에 이북 5도 연합노회를 결성하는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재건된 신학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을 권유받았지만 500명의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어 교회를 사수하다가 1949년 12월 28일 공산당에의해 문제의 교역자로 검거가 되었으니 이듬해 일으킬 6.25의 전초전이었다. 수요일 찬양예배를 마치고 사택으로 가든중 어둠속에서 나타난 내무서원이 그의 팔장을 끼고 "갑시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 이목사는 가족이나 교인들에게 작별인사 한마디 못하고 영원히 오지못할 곳으로 가고 이삼열목사가 부친의 뒤를 이었다. 이삼열목사는 대구 계성고등학교 은퇴 교목이다.

 

순교자 이정흡 목사 (장로교)

 

이정흡 목사(1910-1950)


이정흡은 1910년 2월 10일 평남 박천에서 장로 이용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숭실학교와 평양 의과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어 도회리교회와 용전교회 조사로 시무하여 의료 봉사활동을 펴고 있었다. 부친 이용훈장로는 민족애가 뜨거운 사람으로 도화면 무릉리로 이주해 왔을때 질곡교회 기주복목사가 시무하는 질곡교회 장로로 시무하다가 1945년 해방 후 고당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민주당 곡산군당 위원장직을 맡아 구국운동에 혼신을 경주하게 되었다. 이정흡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기주복목사가 목회하던 안주노회 소속 도회리교회를 담임한 이정흡목사는 부친 이장로가 월남할 때도 목양지를 지키겠다며 월남을 거부했다. 그의 목회는 남다른데가 있었다. 목사이면서 의사로서 가난한 지방민들에게 의료사업을 베풀어 신, 불신간에 지역사회에 존경받는 목사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그의 교회는 항상 소독내로 찌들어 있었다. 6.25발발하자 인민병원에 근무하라는 공산당의 명령에 대해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원목으로 근무할 것을 요구했으나 "의사가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려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 의사입니다. 나를 인민병원에 근무시키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는 목사로서 근무하게 해 주십시요 그러면 제 의술을 죽어가는 생명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이목사의 제안은 종교를 아편으로 보는 공산주의 자들에게는 천부당 만부당 한 일로 말씀전하는 원목제도를 허락할 이가 없었다. 이목사의 제안을 거절한 그들은 "악질반동 이정흡이는 공산주의의 기본정신을 뿌리채 흔들려는 인민의 적이다."라고 하며 반동으로 몰려 6.25가 터지고 이내 도회리 국민학교로 끌려가 트럭에 태워져 교인들과 함께 어느 외진 들판에서 장렬히 순교한 것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순교지 이창실 목사 (장로교)

 

이창실 목사(1890-1949)


이창실은 상해 무관학교 제 2회 졸업식에 졸업생 대표로 선서를 낭독하였다. 주님 사랑이 곧 겨레사랑이고 겨레사랑이 곧 주님 사랑임을 실천할 무대에서 다시태어나는 이창실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번뜩였다. 이창실은 1890년(경인) 4월 21일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송학리에서 이영기씨의 5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년시 한문서당에서 수학. 정신이 총명하여 천재란 별명을 들었고 송천교회 설립한 해서제일학교에 입학 수업하였고 학예회를 개최하고 토론회 연설회를 하면 매번 일등연사로 칭찬이 자자하며 부친이 그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고 귀가하여 형제분이 교회를 열심히 봉사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어 소래에 있는 금세학교를 졸업한 후 풍천양재학교 교사로 4년 광선학교에서 5년을 근무하였고 1917년부터 전도사에 임명되어 송학교회, 금곡, 진목 3교회를 시무하다가 1918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신학교 2학년때 3.1운동에 참가한후 고향 은율로 돌아와 3.1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장연경찰서에 체포 구금당했다 온갖 고역을 치룬 후 출옥했지만 1920년 .구월산대-독립혁명군 사건에 연루되어 밀정에 의해 대장등 7명이 전사당하고 교회지도자 24명이 고발당하여 쑥대밭이 되는 위급한 상황에서 쫏기는 몸이 되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군관학교에 입학 제2회로 졸업한 것이다. 1921년 8월 32세의 나이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3월 16일 풍천장날 시장중앙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선두시위하며 독립만세로 천지를 진동시켰다. 항일투사들과 구월산 구엽사 지하실을 열락본부로 정하고 상해 임정과 연락인으로 군자금을 모집케하고 상해 임정에 들어가 광복군에 입대 훈련받고 무력항쟁에 밀명을 받고 은률로 잠입해 시민들 앞에 동립선언서를 낭독해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송화 지구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군과 교전끝에 체포당해 7년형을 받고 해주, 평양, 서울, 마포 등지 형무소에 수형생활을 하다가 1925년 9월 대정가에 경사로 특사 운운하며 석방하였으니 5년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출옥했다. 1927년 해창교회 전도사4년 1930년 재영읍교회 4년간 전도사 1934년 재령군 북율면 거실포 교회 시무중 신학교에 입학 1935년 3월 평신을 28회로 졸업하고 동 4월에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2월에 거실포 교회에 위임목사로 취임하니 46세로 18년 만에 졸업을 한 것이다.1940년에 남천읍에 장로교회를 세우고 목회하였으나 독립군이라는 전직이 따라붙어 항상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다. 한때 군민들의 원에 의하여 평산군수로 지낸바 있으며 해방을 맞아 사리원 남부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을 거부하고 월남하지 않고 끝까지 강단을 지키다가 1949년 4월 부활절예배를 마치고 공산당 내무서의 문제 교역자 검거령에 연행돼 영영 불귀의 몸이 되었다. 공산군은 독립운동가라면 대접을 해 주어야 할 이창실목사를 오히려 항일투쟁 경력 때문에 이목사를 살려둘 수 없다하여 체포되는 즉시 총살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창실목사의 재판시에 남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송화읍 일심재판시에 판사가 7년형을 언도하고 피고로서 할말이 있으면 하라하자 이목사는 나는 무엇으로든지 여기 김남섭보다 우수하다. 지성으로던지 인격으로던지 독립운동 한것으로든지 무엇으로든지 그보다 우수하다 나는 김난서보다 10배 일을 더한 나인데 왜 나는 7년 김남섭은 12년으로 판정하니 아무래도 이 재판은 오판이니 내게 형을 더 달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방청석은 박수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진실여사. 아들 성진은 의사로 활약했는데 1947년 3월 공산군에 납치당한 후 소식이 없다. 자부와 두딸은 월남하여 여전도사로 성업의 대를 이었고 그 손자는 이응삼목사로 영락교회 부목사로 14년간 목회 하다가 1996년부터 현재 순교자기념선교회 총무로 수고하고 있다.

  

순교자 이창현 영수

 

이창현 영수(1898-1950)


이창현은 1889년 8월 15일 황해도 청곡면 평천리에서 이성지씨의 3남 3녀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창현은 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났지만 고집도 남다른 편이었다. 한번 옳다고 여기는 것은 숱한 매를 맞으면서도 아니라고 번복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취학전에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었다. 이창현은 나이가 들어 신학문의 전당인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었다. 북한쪽 주민들은 북장로교의 극성스러운 선교사들의 전도로 일찍부터 예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목회자가 되어 신유의 은총을 나타내는 부흥사가 되고 싶었고 애기전도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1919년 30세가 되던 해에 3.1운동이 일어나 교역자들이 숫하게 끌려가 매를 맞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3.1운동의 전후를 통하여 감동만 받은 것이 아니라 변절자들의 슬픈 모습도 목도했다. 평원교회 영수가 되어 죽을때까지 영수로 봉사했다. 일제하에 신사참배의 올무가 싫어서 시골교회에 몸담고 살았고 해방 후에 주일선거 반대, 기독교도연맹가입 압력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순수한 믿음을 지키려 노력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나서 공산당의 탄압은 더 무서웠고 공산당과 타협을 거부하고 순수하게 믿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는 진리를 사수해 교회 뒷산으로 끌려가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총성과 함께 구덩이에 쓸어넣었다. 1950년 11월 18일 62세 환갑이 지난지 3개월째 되던 해에 순교를 했다. 함께 총살당할 때 귀바퀴만 뚫고 지나가 붕대를 감고 살아 한달만에 돌아온 유정엽선생이 나타나 순교현장에 대해 그때의 상황을 증언 해 주었다. 후손들은 월남하여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선교사로 순교자의 신앙유업을 계승해가고 있다. 이선각집사. 이선장 장로. 이복단권사(성지기도원 원장) 이복녀권사. 이승조목사(육군군종감 역임 현재 문성교회 담임) 이승신목사(러시아 선교사). 이순혜전도사(성지기도원 부원장). 양영근목사(러시아 선교사)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1:34)

 

순교자 이태석 목사 (장로교)

 

이태석 목사(1901-1950)


1919년 경신중학교 1년시에 3.1운동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감시를 피해 고향에 돌아가 태탄사립학교에서 훈도를 하는 등 숭실중학교 편입하여 수학하던 중 학생의열단을 조직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국내에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일본에가서 고학하면서 오사카 명교중학교을 졸업 도쿄중앙대학예과를 거쳐 상과를 졸업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귀국시켜 경성성서학원(현서울신학대학)에서 32세로 졸업한 후 첫 목회지로 충남 금산읍 금산성결교회 초대교역자로 파송 3년간 시무하게 하신 후 평양시내 상수리교회, 신암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목회하시다. 1945년 해방 후 평양 신임리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 교회를 폐쇄하는데 항의하였다. 해방 후 조국해방과 1950년 6.25동란 등 수많은 혼란과 위협의 와중에서도 강단수호와 교인들의 양육을 위하여 불철주야 애쓰다가 1950년 6.25가 터지고 국군과 공산군이 교대로 남과 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바람에 교회지도자 목사님들과 성도들 그리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희생당할 때 이태석 목사의 순교도 이런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 9.28 수복 국군북진 평양폭격 공산군의 눈을 피해 살던 이목사의 세 아들과 많은 신앙인들은 숨어있다가 비행기만 나타나면 자유와 평화로 마음이 가득찼다. 이목사와 사모와 네 딸과 손자들이 평남 강서로 피난을 갔고 20세 안팎의 승욱, 승만, 승규 삼형제만은 평양에 숨어 살도록 잔유했다. 사랑하는 세 아들이 평양에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시골서 평양에 와 보곤 하던 이목사는 10월 11일 평양에 왔다가 후퇴중인 공산당에게 끌려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질과 구두발로 말로 다 못할 곤욕을 치루며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1950년 10월 20일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 이목사의 아들 삼형제와 온 평양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을 했지만 체포된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이태석 목사는 이 기쁜 평양탈환의 자리에 엇었다. 이목사의 행방을 찾던 가족들은 안타깝게도 이목사의 싸늘한 시체를 만날 수 밖에 없었다. 후퇴하던 공산군들에 의해 동평양 철도역 근처 평천리 야구장 한모퉁이 반공호속에서 40여명의 납치인사들과 함께 총살되었다.항상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온갖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며 평소에 찬송가 226장을 부르던 이목사는 50세의 나이로 험란했던 한 생애를 마감하고 하나님 나라로 영접받아 옮긴 것이다. 학구와 독립운동 그리고 목회자의 길을 향하여 뜻을 세워 달려오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의 꽃을 피운 것은 단순한 인간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섬리에 의한 복음사역의 한 과정임을 입증해 준다.평양서문밖교회 교우들과 친척들의 애도와 찬송중에 장례예배를 마치고 평양근처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예로 두 아들은 1950년 12월 월남, 차남 이승만 목사는 미국NCC회장으로 있으면서 극동지역선교책임을 맡으면서 이미 80년초부터 북남을 오고가며 소식을 전하였고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PC USA총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유니온신학교 교수로 수고하는 등 그의 리더쉽을 전 세계에 떨쳤다. 3남 이승규장로는 순교자의 신앙적 유산을 따라 교회에 충성할 뿐 아니라 삼성, 효성, 롯데그룹등에서 기업경영을 했고 은퇴 후 사회복지사업분야에서 장애인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이태석 목사와 사별했던 사모와 네 딸 등 유가족들은 북한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고 딸중에 한분은 의사로, 또 한분은 철도청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부인 김송희사모는 1970년 12월 6일 월남한 두 아들 이름을 부르다가 함흥에서 별세했다.

 

순교자 임성근 장로

 

임성근 장로(1886-1950)


임성근목사는 1886년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동창리에서 조그만 과수원을 경영하는 임창화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읽고 그의 나이 19세에는 그보다 나은 학자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한학에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이같이 한학에 깊이를 더하던 무렵 마포삼열 선교사를 만남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이유로 부모에게 숱한 매를 맞아가면서 부모를 설득해 예수를 믿게 했고 29세에 동창교회 초대장로로 세움받았다. 1919년 33세에 동창 장날을 기해 안악 학생들과 연대해 3.1우동을 주도했다. 임장로의 기지로 동창 장날 조기를 받는 김장독에 태극기를 감추어 장터에 내 놓았다가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우어주고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동창 장날이 되면 상인들이 조기를 받기 위해 종종 김장독을 동원하기 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3.1만세 시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1년만에 황태자 탄생으로 특사되었다. 출옥 후 그는 동창교회 조사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일제는 예배시간이면 두명의 정복 경찰관으로 칼을 차고 참석해서 신사참배를 하나 안하나를 감시하였다. 처음에는 교인들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지만 악랄한 일경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색출해 배급을 중지해 버리고 말았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교인들이 하나 둘 고집을 꺾자 괴로워하던 임성근 전도사는 신사참배 강요에 못이겨 가족을 이끌고 1943년 만주로 건너가 장사를 해서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1945년 그렇게 그리던 해방은 되었으나 해방 후 장개석 군대가 패배하고 팔로군이 만주땅을 점령하게 되자 임성근 전도사는 재산을 몰수 당하고 인민재판에 회부 당했다. 그러나 그 혼란스런 인민재판중에도 어떤 변호인의 정직한 변호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감사하며 1948년 가족을 이끌고 빈손으로 귀국했다. 김익두목사가 시무하는 서부교회에 전도사로 이명을 받아 사명을 다해 전도사일에 열중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김익두목사를 모시고 교회를 사수하는 중 1950년 10월 13일 공산치하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반공의거가 안악에서 일어나 북진하는 UN군을 환영하고 공산군은 물러가라고 외치게 되자 북으로 후퇴하던 공산군은 반공의거의 보루로 지목되는 신천 서부교회로 몰려가 새벽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을 무차별 사격했다. 김익두목사와 임성근 전도사 이천실집사 등 다수와 인근교회 청년3명도 그자리에서 총살되고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순교자 임수열 전도사 (성결교)

 

임수열 전도사


한국교회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순교자 추모예배가 지난 11월 6일 경기도 용인의 한국교회순교자기념관에서 진행됐다. 특히 이번 추모예배에서는 성결교단 순교자로 추서된 최석모, 이건, 유세근 목사와 임수열 전도사의 존영을 게시하고 추모비 제막식을 함께 진행해 그 의미를 더했다. 임수열 전도사 또한 한국전쟁 당시 교회를 위해 헌신하다 순교해 순교자로 추서됐다. 한편 용인한국교회순교자기념관은 한국교회 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으며 장로교와 감리교, 본 교단 등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기간 중 순교한 한국교회 순교자들과 그들의 헌신적인 신앙의 기록이 사진과 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순교자 임인재 자로 (장로교)

 

 

임인재 장로(1900-1955)


임인재는 1900년 3월 2일 황해도 화우군 삼전면 철도리 941번지에서 태어났다 . 그는 아버지와 함께 그의 집 사랑방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어릴때부터 충성스럽게 교회봉사에 임했다. 그의 사랑방교회를 찾아오던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션스쿨 영흥중학교를 졸업한뒤 상경하여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해재면 신정리 무의촌에 들어가 해동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개업을 했다. 그가 무의촌을 택한 것은 기독교신앙에 연유된 것이고 목포 양동교회 이남규목사의 권면을 받았던 것이고 그의 아내 정득씨의 조언도 큰 힘이 되었다. 주일이면 교역자 없는 양매교회 나가 교역자 역할도 했고 1942년 10월 5일 무안교회는 그를 장로로 안수해 개교회 교역자로 세운 것이다.그는 의사요 교역자요 면에 유지로 행정 자문까지 맡게 되었다. 2차대전에 전쟁물자 공출로 경찰들이 교회의 종을 떼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집의 성물을 감히 경찰이 압수해 갈 수 있다니"하면서 소리치자 공무방해죄로 연행해 무수히 구타하며 시시콜콜 감시하며 괴롭혔다. 1945년 해방되자 면지도자로 대한독립촉성회 및 국민회장직을 받았다. 공산주의가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활동하면서 임장로는 타도대상이 되었다. 임장로를 괴롭히기 위해 그들은 임장로가 사랑하는 교회에 불을 질렀다.임장로는 한걸음에 뛰어가 종을 처서 화재사실을 알려 진화했다. 30분 이상 불이 탔는데 지붕만 탔고 기둥과 석가래는 말짱했다. 임장로는 땅에 무릎을 꿇고 감사하며 몸바쳐 축성하기로 기도를 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공산주의 자들은 지도 세력을 무차별 감금하기 시작했다. 교인들의 피난 권고에도 임장로는 머리를 저으며 " 양들을 버리고 장로가 저만 살겠다고 도망을 치라고요? 저는 못합니다 아니 합니다"하고 거절했다. 결국 임장로는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당하여 모진 매질을 당하던 중 부상병들이 몰려오자 공산군은 그에게 치료를 부탁했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에게 의술을 페풀수 없다고 하여 거부하자 국민학교 교사인 그의 맏아들 정순씨를 아버지 앞에서 고문하여 후유증으로 6개월만에 죽게 했다. 1950년 8월 8일 해제국민학교 교정에서 임장로를 비롯한 양매교회 전도사 집사 등 네사람을 인민재판으로 총살했다. 임장로는 세번의 총을 맞고 총살을 당하면서도 입에서 성경말씀이 쏟아져 나왔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한12:25) 어디서 '흑흑'우는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면민들은 소리내어 울지는 못하지만 얼굴위로 흘러 내리는 눈물을 지우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의사로 사랑으로 상처를 싸매주던 임장로에 대한 위로의 조문이었다.

 


 

순교자 장규명 목사 (장로교)

 

장규명 목사(1891-1950)


장규명 목사는 1891년 5월 11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농사꾼의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규명은 15세가 되기 전 사서감경을 줄줄 읽을 정도였고 미문이어서 후에 총회장이 되어서도 총회내에서 알아주는 문필가였다는 것이 보필하던 목사들의 변이다. 농사꾼인 그의 부친은 " 대의명분에 사는 아들이 되라는" 지조높은 뜻을 그의 인생의 등뼈로 삼았다. 한문공부를 끝낸 그는 양시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신학문과 함께 기독교에 귀의했다. 국가 잃은 시름에 암울한 시대를 당시 인테리 젊은 층 중에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삶의 피안을 삼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미국인 목사가 부흥회를 승동교회에서 개최했을 땐 빈자리가 없었고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열창할 때에는 얼마나 뛰면서 발을 굴렀던지 마룻장이 내려 앉을 정도였다. 예수쟁이가 되 그는 26세에 결혼을 하고 1924년 33세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17회) 1924년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받고 선천중앙교회에 부임 기나긴 목회의 외길로 줄다름첬다. 평소 키가 크고 멋쟁이 기질을 타고 났던 장목사는 이내 교인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1930년대 들어서고 부터는 신사참배문제에 봉착해 본격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1931년 제20회총회장에 당선된 그는 총회를 위해 큰 일을 했으나 1938년 제 27회 총회시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로 결정되자 그는 소리처 "아니오"를 연발해 주기철 김석창 장규명 최봉석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는 등 6회나 옥고를 치루었다.매일 장목사 사택에 일경을 상주시키고 감시감독하는 등 1945년 8월 18일을 기해 기독교지도자들을 사형에 처하려 각본을 짯지만 3일전인 1945년 8.15일 해방됨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시 선천중앙교회로 돌아가 목회에 임해 마음놓고 목회할 줄 알고 마음도 부풀었으나 해방 후 기독교도연맹가입거부, 1947년 11월 3일 주일선거 협조하지 않는다 하여 이북5도 연합회 임원들이 모두 체포되던날 함께 보성학교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3개월만에 풀려났다. 당시 그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살고 싶은가? 죽고싶지 않으면 당정에 협조하라"고 회유할 때 가슴을 드리대며 쏘아보라고 함으로 인민군은 섬짓해하며 총을 꽂았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3개월만에 풀려났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월남하기 위해 기차를 타다가 발을 헛딛어 발가락 3개를 짤려 하나님이 북녁땅에 머물러 성전을 지키게 하시는 체험을 했다. 1948년 10월 정치보위부는 간첩혐의로 날조하여 그는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반동 종교인과 지식인을 숙청할 때 수감중인 장목사도 순교의 면류관을 썼으니 그의 나이 60세였다. (이하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장수은 전도사 (장로교)

 

장수은 전도사(1911-1950)


1911년 황해도 서흥읍에서 출생하여 재령 명신고녀를 9회로 졸업하고 1931년 평양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1934년 동교를 졸업했다. 황해도 재령. 시흥등에서 유치원 일도 한 그는 모교인 평양여자신학교 사감으로 4년간 시무했다. 그 후 1942년 평양 신양리 신암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직하다가 1950년 6.25사변 전날 백인숙전도사와 함께 공산당에 의해 구속되어 깊은 구덩이에 쓸어넣는 생매장순교를 당하였다. 신암교회 김길수 목사의 순교 후 담임목사 없는 교회를 혼자 목회하며 교인을 성전에 모아 철야기도를 그치지 않았으며 새벽기도회 때이면 정보부원이 언제나 지키고 있었다. 6.25직전에 교회가 문을 닫게 되자 교인 집집마다 심방함으로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사수 순결한 신앙을 널리 전하다 공산당에 의해 구속되어 깊은 구덩이에 쓸어넣는 생매장 순교를 하였다.

 

순교자 전진규 목사 (감리교)

 

전진규 목사(1895-1950)


1895년 6월 25일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읍내리에서 전사명 전도사의 장남으로 출생 개성의 한영서원과 송도고보를 졸업 일본 관서학원신학부와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강원도 이천읍교회를 시작으로 개성 동문안 중앙 철원읍교회 철원지방 감리사 원산중앙교회 뤼하교 구세병원 이사장을 역임 서울 성동교회(현 보문교회)목회 중 1950년 8월 공산당에게 납치 순교했다.

1909년 8월 15일 세례받음(당시15세)

1919년 10월 1일 전도시작

1919년 10월 - 1920년 8월 강원도 이천읍교회 전도인

1920년 3월 27일 전도사 직첩받음

1921년 9월 -1922년 8월 남산교회(개성)전도사

1924년 9월 연회학습

1925년 9월 6일 집사 안수받음

1925년 4월 - 1926년 9월 강원도 이천읍교회 목사

1926년 9월 년회완속

1926년 9월 - 1927년 8월 개성 동문안(東門內)교회목사

1927년 9월 - 1930년 8월 개성중앙교회 목사

1930년 9월 - 1934년 8월 강원도 철원읍교회 목사

1934년 - 1935년 철원지방 감리사

1935년 - 1943년 원산 중앙교회 담임

1941년 강원 동지방 감리사

1935년 - 1943년 원산 루시 고등여학교 이사장

원산 구세병원 이사장

원산 광명학교 이사

원산 교회연합회 외장

감리교 신학교 이사

총리원 이사

주일학교 전국 연합회 회장

원산 보혜여자성경학원 이사 등 역임

1943년 8월 기독교조선감리교회 감독(당시 통리)역임

1943년 진남포 신흥리교회 담임

강서지방 감리사

1944년 해주 남본동교회 담임

1946년 월남하였음

1946년 개성중앙교회 담임

1947년 의정부교회 담임

1948년 - 1950년 8월 서울성동교회(현보문교회)담임

경동지방 감리사

총리원 전도국 위원회 위원장

재건파 복흥파 합동 추진위원회 위원장

총리원 이사

연희대학교 재단 이사회 이사

1950년 8월 성동교회에서 공산군에 남피 순교하시다

1980년 4월 10일 사모 이수산 권사 소천

1993년 10월 24일 보문교회에 전진규목사 순교비 제막

 

순교자 전치규 목사 (침례교)

 

전치규 목사(1878-1944)


전치규는 1878년 1월 5일 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농부 전달용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문서당에서 오랫동안 한문을 읽고 조금 자라서는 훈장이 되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23세에 예수를 믿고 펜윅 선교사밑에서 6년 성경공부하고 1916년 38세에 목사가 되고 8년후 1924년에 동아기독교회 3대감독이 되어 10년동안에 124명의 전도인을 시베리아 만주 일대에 파송하는 전도의 개가를 불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교단 5역 김영관 백남조 이종덕 전치규 노재천을 수감해 3개월 옥고를 치루게 했다. 1942년 6월 복음찬미가에 수록된 찬미가의 내용(대황님 예수씨 보혈)을 꼬투리 잡아 5대감목을 가두고 이듬해 9월 11일에는 전체 동아기독교회 임원32명을 검거해 수감하고 천년왕국 신앙과 만왕의 왕 예수신앙이 천황체제에 위배 된다며 예수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석방될 수 없음을 분명히했다. 일경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복음찬미 7장에 기록된 "대왕님 예수씨 보혈"이란글을 가지고 꼬투리 삼아 "예수가 대왕이면 천황은 대왕위인가?"고 묻는 일경에게 전치규목사는 "우리 주 예수는 천지를 창조하신 구세주이시다. 그 위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있을 뿐이다. 천황이 예수 위냐고 묻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언행이다"라고 그를 취조하는 고등검찰을 호되게 책망을 했다. 전치규는 전기의자에 앉아 전기고문등 매일 심한 고문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 옥고를 치르며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1944년 2월 14일 그날도 한 차례의 심한 고문을 받고 자리에 누워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땅에 있는 동안 아버지 영광에 살게 하시더니 이제 부르시옵니까?" 남겨진교단과 육신적 식구들을 부탁드리니 보살펴 주옵서서"하고 기도하는 중 숨졌으니 그의 나이 66세였다.

 

순교자 정치호 목사 (장로교)

 

정치호 목사(1917-1950)


정치호는 1917년 6월 30일 평안북도 철사군 여한면 서봉동에서 정대흥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이 일직 타계하고 부친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보천성 청원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부친이 깨인분이라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민족학교에입학해 예수를 알게 되었고 신학문에 눈뜨게 되었다. 험난한 생활전선에서도 그들 형제는 신앙만은 철저하여 그의 나이 19세에 무순교회 집사가 될 정도로 열심히 교회봉사를 했다. 봉천천 성경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땅끝 선교에 대한 사명감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성경학교 졸업반 때 22세에 본계호교회에서 목회하든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내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십계명에서 금한 우상숭배는 못한다"라고 거부함으로 '부정선인'으로 본계호교회 목양실에서 체포되어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어 9개월간 모진 옥고를 치루고 출옥했으나 일경의 압제로 강단에 못서게 하여 만주로 돌아갔다. 일경은 교역자를 교회에서 쫓아내기 위하여 1. 장로를 회유해서 교역자를 강단에 못 서도록하고 2. 장로가 거절하면 장로의 사업체나 사상을 꼬투리 잡아 탄압 3. 주먹잡이들을 투입시켜 교인이 되게 한후 린치를 가해 스스로 도망가게 했다. 정전도사는 일경의 악랄한 제재 수단에 밀려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문순의 부친에게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이름없는 성도로 교회를 섬겼다. 교역자가 총회참석으로 자리를 비울때 강단을 지켜달라고 부탁해서 주일 설교를 했는데 그것도 못하게 일경이 와서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당신은 대 일본 제국의 중죄인이야.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하며 방해를 했다. 4년의 생활은 그에게 생지옥같은 생활이었다. 1945년 해방 후 그곳 탑련교회의 부름으로 고국에 귀국하지도 못하고 무순 탑련교회 전도사로 부임 섬기면서 1947년까지 봉천신학교 4학기를 마치고 1948년 2월에 서울로 돌아와 이태원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총회신학교에 편입해서 2회로 졸업했다. 이태원교회를 시무하던 정전도사는 1948년 12월 통일을 염원으로 남북교회(현 미암교회)를 개척하고 1950년 3월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봄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고 3개월 후 6.25동란이 일어나 나이많은 교우들과 교회를 사수하던 그는 기독교도연맹 가입거부로 내무서원들에 의해 연행되 북으로 끌려가고 돌아오지 못했다. 정목사의 유족으로는 아들 정준철과 사모 승병도 권사가 서울 은평구 증산동 166-20에 살며 서영교회를 출석한다. 장녀 정숙희 집사는 평강교회를 차녀 정숙명 집사는 대전에서 살며 대전성서침례교회에 출석하면서 경건한 신앙인들로 주어진 일터에서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순교자 조상학 목사 (장로교)

 

조상학(趙尙學) 목사 (1877-1950)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출생으로 일제에 투옥되고 공산당에 순교당한 장로교 목사이다. 조상학목사는 1877년에 전남 승주군 송광면에서 양반집 조형섭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생활정도도 풍요롭고 행세하는 양반의 가문에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별 어려움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한문을 수학하면서 유교적 인생수업을 훈육받아 아직 젊기는 했지만 당시로 보아서 또 그렇게 어리지만도 않은 나이였다. 또 타고난 세도집 가문에서 고고ㅓ학게 전통적 선비로서 다른 학문이나 사상에 젖어들거나 수용할 만한 데라고 바늘끝 꽂을 만큼도 없는 인품에 꼿꼿한 이 젊은이에게 당시 감히 누가 "예수"소리를 할 수 없었고 또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따로 있지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믿음의 저력과 끈질진 한 사람, 붙잡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전도인이요 조사였던 지원근이 있었다. 이지 조사와 함께 물러설 줄 모르는 한 사람 서양인 선교사로 오웬(Owen,Clement Carrington)이 있었다. 오웬은 물론 하나님의 뜻하신 바이나 개인적으로 말하면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도에 관록이 있었다. 벨 선교사와 함께 개척한 교회를 보면, 목포의 양동교회를 비롯, 송정리교회,해남군 선두리교회, 보성군 신천리교회,육곡교회,양동교회,운림리교회,양주 양림교회,완도군 관산리교회, 나주군 내산교회,방산리교회,장흥군 진목리교회,고흥군 옥하리교회,화순군 화순읍교회, 광양군 광양읍교회 그 밖에도 15개처 교회를 세운바 있는 이런 사람이다. 조상학이 아무리 고집센 젊은 선비라고도 해도 오웬이나 지원근 같은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또한 오웬은 1898년 11월에 한국선교사로 내한한 이래 벨9Eugene,Bell:배우지)선교사와 함께 목포 선교를 시작하는 한편 목포진료소를 개설했고 의사이기도 한 그는 광주선교부를 시작하여 순천,광주,목포 등지를 순회하며, 의료 및 복음선교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으로 그 때만 해도 그 신기하기만 한 그 서양 의학의 기술이었다. 이런 헤택을 주는 이 선교사가 비록 이국적인 외인이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유식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조상학은 그래도, 이쯤은 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양반 유학도의 입장에서 예수를 받아들일 만한 취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학력과 인격에 끈질긴 전도에 드디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광주에서 학습을 받고 2년 후엔 1909년 벨(Bell Eugen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완전히 거듭난 사람으로 이제는 성령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깊이 있는 성경을 배우면서 연구하는 중에 그토록 힘들여 복음을 받아들인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도 전도인이 되어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때 이천만 동포를 다 전도할 만한 부푼 마음과 성령의 인도로 뜨거워진 마음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자기가 그렇게 어렵게 받아들였던 것은 두분의 전도자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끝낸 인내와 성실로 그 전도를 자신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그는 개인적으로 전도에 열심을 다했다. 이같은 결과가 열매를 맺어 여천군 율촌면 장천리의 조의한이 예수를 믿던 날로부터 또 그런 열성이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동네에다가 장천리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또 다시 조의환과 함께 또 힘을 합해 한태원에 전도하자 그도 예수를 받아들여 광양군 신황리에 신황교회를 세웠다. 조상학의 전도열심은 더욱 그 열기를 더해 이번에는 보성지방의 최초의 교회인 무만동교회도 정태인과 김일현 그에게 전도받아 세운 교회였다. 이 중에 정태인은 목사가 되어 순천 삼미교회를 설립하고 1917년 평양장로교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아 보성군 벌교지방 목사로 무만교회를 비롯 낙안 평촌교회, 고흥읍교회 등을 순회 인도하다가 순천읍교회, 무만교회를 두루 시무하면서 제주노회로 옮겨 모슬포교회,삼양교회,월막교회, 고산교회를 시무하면서 목회에 큰 공을 세운바 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순천읍교회도 조의환과 함께 전도하여 최집사님과 최정의가 믿고 세운 교회로서 이와 같이 조상학은 전도받은 자가 일대에 머문 자가 하나도 없이 전도받아 믿으면 더 많은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되곤 하였다. 이 와 같은 업적은 그로 하여금 1911년에는 광주의 숭일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학원전도를 쉬지 않았다. 1916년에 순회전도사로 부름을 받아 각 지방을 순회전도하는 중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입학하여 1923년에 제16회로 졸업을 하고 바로 그 해 순천노회가 전남노회로부터 분립하면서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아 광양읍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또 순천노회의 최초의 총대가 되어 제12회 총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율촌교회,1940년에는 경남하동읍교회, 1946년에는 여천 덕양교회에 시무하였다. 조목사는 1940년 순천노회 청년 조직 단체인 원탁회 사건으로 여러 목사 장로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는 순천중앙교회에서 청년들이 신사참배에 불참하고 항거할 것을 뜻하고 애국적 신앙사수의 목적으로 힘으로 모아 조직적으로 반대할 것을 결의한 조직체였는데, 황두연 장로를 비롯하여 목사로는 조상학, 양용근,김정복, 김상두,오석주,김형제,나덕환, 선재련,김순배,김형모등과 장로로는 박창귀,선춘근,김원식 장로등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때에는 조 목사는 청력이 약해 취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자 그대로 석방시킨 일도 있었다. 그때 벌써 연세가 70고개에 달한 노구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나날을 보내던 중에 이 민족에게도 일제의 패망으로 그 굴욕적이고도 치욕스러운 결박에서 해방이 되는 날은 왔다. 그러나 북한 땅은 공산정권으로 인하여 수난을 겪었지만 이제 우리 세상인가 하는 날들은 꿈결같이 사라지고 민족적 사상이 좌우로 갈려 편할 날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에 6.25가 터졌다. 남단 이곳에도 공산침략의 태풍이 거세게 소용돌이 쳤다. 제직들의 강한 권유로 피신을 종용했으나 강권을 뿌리친 채 막무가내로 교회를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대신 희생할 테니 나의 시체는 저 산에다가 묻어주시오" 굳은 결의로 주의 피에 참례하는 성찬을 베풀고 난 그후 얼마 안되어 여수 내무서에서 보낸 3명의 서원에게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 전하는 일을 인지 않았다. 70일을 감방생활을 하고 그 해 9월 28일 10리 밖에 이는 미평공동묘지로 끌려갔다. 이 날 함께 동역하던 손양원 목사의 뒤를 따라 그 날 같은 곳에서 손 목사의 순교를 보면서 그 뒤를 따라 살해되니 73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썼다. (출처: http://kcm.co.kr/person/person_k013.htm)

 

순교자 주삼식 전도사 (장로교)

 

 

주삼식 전도사(1908-1950)


1908년 10월 24일 전남 목포시 옥암동에서 아버지 주경환의 3남 1녀중 3남으로 출생했다. 목포고등성경학교를 입학과 동시 무안 임성교회(현 목포시 옥임교회)를 개척하며 목회중에 1950년 3월 장로회신학교(서울남산소재)를 입학하여 재학중 6.25사변으로 1950년 8월 4일 옥암동 섬너리에서 예수선생이라는 죄명으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인민재판을 받은 후 총살형으로 순교했다.

 

순교자 주채원 목사 (장로교)

 

주채원 목사(1904-1950)


주채원은 1904년 9월 2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추면 서호리에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주영섭의 2남으로 태어났다.태어나자 얼마 안되어 비밀리에 만주를 비밀리에 오가며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부친은 친일파의 밀고로 헌병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끝에 세상을 떳다. 부인도 남편의 죽음소식을 듣고 시름시름 앓다가 남편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주채원은 형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5세에 그의 동리에 온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어야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라는 말에 주채원은 정신없이 예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주씨가 예수를 믿으면 주씨를 버려야 한다. 양반 주씨가 상놈 주씨로 전락하려느냐? 고래로 야소는 무부무군의 사도로서 한번 빠지면 부모조차 몰라보게 된다더라 하면서 핍박하는 어른들의 꾸중을 들으며 당시 사회주의 이념에 물든 집안이 양반같지가 않아 벌떼같이 일어나 구박을 하는데도 오로지 새벽제단에 나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이사야43:1-3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위로에 용기를 얻어 더 열심히 예수를 믿고 캐나다 선교부에서 세운 함흥의 영생학교를 다니면서 지도자 자질향상에 노력했다. 1926년 22세 되던해 교회주선으로 결혼을 하고 평양에 가서 노동을 하며 11년만에 1937년 32회로 졸업을 하고 함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함흥중앙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1938년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결의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명령을 더 귀하게 여기고 거부하다가 옥에 갇히고 수난당하고 순교당하는 손양원 박경구 주기철 박관준 이영한 등 수 많은 교회지도자들을 보고 또한 창씨 개명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주목사는 차리리 옥에 갇히는 편을 택하겠다고 반발을 했다. 1940년 우리교회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창씨 개명을 권고하는 담임목사에게 "살기 위해 신앙을 버리고 살기위해 부모도 버린다면 그건 죽은 목숨아닙니까. 차라리 저는 옥에 갇히는 편을 택하겠습니다"하며 거부했다. 주채원 목사는 내선일체를 반대하는 비국민이라는 죄목으로 일경에 체포당하고 목사이기 때문에 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하여 함흥중앙교회로 돌아가 섬길 때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주씨문중과 공산당의 회유를 거절하고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월남해서 행화정교회를 부흥시키며 새로 교회를 신축했다. 월남하여 공산당 치하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6.25동란을 겪어야 했다. 피난을 권유하는 마포구 국회의원 기사돈 장로에게 "목사가 양떼를 두고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포탄이 퍼붓듯 할때도 행화정 교회를 지키며 매주 주일 예배를 드리던 중 8월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칠때 정치보위부에서 나온이가 "갑시다 조사할 게 있습니다"하고 손에 수갑을 채워 체포해 끌고 간 후로 소식이 끊겼다. 그의 후예로는 LA에서 사역하는 주요한 목사와 신광교회에서 충성하는 주요셉장로 뎀바에 거주하며 교회봉사하는 셋째아들을 비롯해 딸은 권사, 사위는 장로 3남 3녀 모두가 그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진학철 목사 (장로교)

 

진학철 목사(1895-1950)


진학철은 1895년 2월 26일 서울에서 출생했다.진학철은 부친이 알렌의 제중원 의사이며 양부모가 초기 기독교 신자라서 장로교 초대선교사 원두우 선교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유복한 가정으로 서울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창궐하는 천연두 퇴치를 위해 황해도로 파견되는 부친을 따라 황해도에 이주해 재령성경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전도사로 파견되어야 하는데 그는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바라보며 구국일념에 불타 교육입국의 기치를 든 것이다. 따라서 전도보다 교육입국의 기치를 들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1919년 3.1만세운동에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학숙의 동료교사 이기풍과 그가 출석하던 교회의 박기영조사와 손을 잡고 밤새워 태극기를 그려 사리원 장날인 3월 11일 만세운동을 봉기시켰다. 민중들은 요원의 불길 처럼 일어났고 헌병대와 주재소가 불타는 사태로 발전하자 그는 잡혀가 뼈를 분지르고 주리를트는 갖은 고문을 매일같이 당하다가 1년 6월의 징역언도를 받았다. 그는 옥살이를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평양신학교를 입학한지 10년만에 1932년에 신학교를 마쳤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6개교회를 돌아보면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우선되어야 하다"고 하면서 목회를 하다보니 먹을것 입을 것 쓸것이 제대로 남아날리 없었다. 그는 복학해 공부하는 시간보다 휴학해 현장 전도를 더 많이 하는 가운데 10년만에 마쳤다. 1932년 안수를 받은 후 평촌교회로 부임했으나 교인들을 괴롭히는 일제의 탄압으로 쫓겨 다니며 목회생활을 하는 중 목사안수 후 13년만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주일선거반대, 기독교도연맹가입 거부 등으로 체포되어 곤욕을 치룬일도 많았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만식 장로등 뜻있는 이들과 빈번하게 만남으로 공산당의 눈의 가시가 되었다. 6.25가 터지자 파괴된 도로보수 공사장으로 강제로 투입되어 공사하든 중 B29가 폭탄을 투하할 때를 기회로 도주해 반공호로 들어갔다가 UN군의 진격으로 공산당들의 집이 불타는 새벽미명 집으로 돌아와 가족의 안부를 묻고 닭 울기 전 기도처인 이장로의 사과밭에 방공호에 갔다가 동산당원들의 집이 불타는 것으로 보고 새벽에 집안의안부가 걱정되어 안부를 묻고 기도처로 가려고 돌아서는 찰라 마을 반장의 고발로 공산당과 청년 몇명에게 목덜미를 검어쥐고 밖으로 끌고 나가 아내의 비명소리와 아이들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끌려갔다. 공산당 패주병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예수믿어야 낙원에 간다"고 전도하는 그를 향해 " 좋은 나라에 너나 먼저 가라"총성이 요란하게 울리고 진목사는 정신없이 쓰러졌다. 진목사의 신음소리를 듣고 뛰어간 가족들이 총쏜 사람의 얼굴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진목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그들도 우리 이웃이니 그들을위해 기도하시오 이웃사랑이 큰 계명인거요."하고 "주님 제가 본 주님을 저들도 보게 하소서" 기도하고 "순천(수철)아 네가 내 뒤를 이어 목사가 되 주어라" 하는 마지막 최후의 기도와 부탁을 했다. 이렇게 1950년 10월 14일 새벽 진목사는 주님 나라로 떠났다. 후예중 맏딸은 자운철목사의 사모, 큰아들 수철목사는 한국기독교순교자유족회 회장 둘째아들 영천은 장로로 막내딸 순신은 노원철 목사의 사모로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최상은 목사 (장로교)

 

 

최상은 목사(1904-1950)


최상은은 1904년 11월 21일 황해도 평산에서 최일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네살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자랐으며 어려서는 한문과 붓글씨에 명필이였다. 1918년 미션스쿨인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 3.1만세 대열에 가담하였고 졸업 후 그는 일본인 경영 방직회사에 취직하여 사회 곳곳의 각종 일에 부딪치면서 일제의 수탈과 극심한 차별대우를 뼈저리게 경험하는 등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에 피가 꺼꾸로 솟구쳐 올랐고 일제에 대한 인상은 곱지 않았다. 그가 노동쟁의에 가담하게 된 것은 1924년 봄이었고 시위내지 파업건수가 전국적으로 45건에 이르렀다. 일경은 그를 반역행위로 규정하고 구속하여 심한 고문을 했고 재판결과 4년의 중형이 내려졌다.기도로 옥고를 극복한 후 그는 문평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마르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전현숙과 결혼하고 교사로 있으면서 영흥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평양신학교에 재학시 신사참배 반대설교가 적힌 노트의 학생들을 모두 잡아갔다. 1938년 8월 21일 신사참배불참이유로 학교를 자진 폐쇠하고 재학생들에게 무기휴학 통지를 발송했고 27회 총회가 9월 10일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다. 1939년 평신을 졸업한 그는 함해노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은 후 혼자서 50여 교회를 순회하며 돌봤다. 패전이 가까울 무렵에는 더욱 교회를 탄압하여 문을 닫는 교회가 많았다. 8.15해방과 더불어 새아침이 밝았으나 1946년 11월 3일 주일선거 강요상황에서 1947년 5월초 아내와 식솔들을 월남시키고 수일 후 결국 자신도 38선을 넘었다. 1947년 응암교회 제 3대 담임으로 부임 교회가 부흥하여 건축이 과제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비들이 예배를 방해하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공비의 표적이 된 그는 1950년 6월 18일 당회 앞에 사표를 내고 원남동 처가에 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 6.25동란이 터지고 설상가상 아들의 늑막염으로 장례를 치루는 등 슬픔에 잠겨 통곡의 기도를 하는 중 세사람의 내무서원에게 영행되어 소식이 끊겼으니 그의 나이 47세였고 사모와 8남매를 남겨둔채 아무 말없이 갔다. 전현숙 사모는 모진 고통과 가난의 굴례를 뚫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며 사모는 삼양제일교회 전도사로 귀감이 되었고, 자부 한병옥 전도사는 순교자 유족회 총무로 봉사하고 있다.

 

순교자 최석모 목사 (성결교)

 

최석모 목사는 아현성결교회에서 23년간 목회하다가 한국 전쟁 당시 도주하는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되었다.

 

순교자 최인규 권사 (감리교)

 

최인규 권사 (1891-1942)  

 

1881년 11월 15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1921년 북평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속장, 유사, 권사로서 주일학교 교장으로도 봉사하였고 1932년 천곡교회를 권화선 속장과 함께 개척하여 열심히 전도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장로가 없는 교회에 장로 역활까지 했다. 또 자기의 전재산인 밭 539평과 논 1369평을 천곡교회 대지로 헌납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재목을 운반하는 등 초가 8칸의 예배당 건축에 헌시하여 1933년 봉헌식을 가질수 있었다. 강대상 3개도 만들어 옥계, 천곡, 북평교회에 기증하였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신앙생활로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에서 선정한 모범신자에 선정되어 1938년 10월 포창을 받았다. 최인규는 창씨개명과 일어사용, 황국식민서사를 거부하는 민족주의자였고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로 일제의 억압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40년 5월 일경에 체포되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이라고 기뻐하였다. 함흥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재판관 앞에서도 담대히 신앙을 증거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일본 천황도 하나님이 내신 사람으로 지인에 불과하다고 담대히 말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징역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감옥에서도 늘 기쁘게 찬송부르며 전도하다가 1941년 10월 주로 항일투사, 사상법들이 수용되어 있던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병을 얻어 갇힌지 3년이 되던 1942년 12월 16일 대전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형제 여러분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주의 일 하시오. 나중 천국에서 우리 만납시다" 그가 남긴 유언이었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해방 후 1946년 3월 유골을 천곡교회로 옮겼고 12월 16일에는 수교 44주기를 맞아 기독교대한감리회 동해지방에서 정성을 모아 순교비를 건립했다. 순교한지 40년이 되던 1982년 8월 최인규 권사가 섬기던 천곡교회 마당에 선교탑이 세워졌다.   (글 출처- http://kcmma.org)

 

순교자 한경희 목사 (장로교)

 

한경희 목사(1881-1935?)


한경희는 1881년 평북 의주에서 부호로 권세를 부리던 한승주의 3남으로 태어났다. 7세시에 부친사망 후 가세가 기울어지자 형제들이 사업에 어느정도 성공 기반을 잡는 듯 하더니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모조리 잃어버리고 퇴락을 했다. 갑자기 평민으로 전락되자 형제들은 유명한 싸움꾼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서양전도인만 보면 행패를 부리고 싶어 안달이났던 그는 23세때 예수믿는 친구가 하루밤 함께 자다가 두고간 구세론이란 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형제들의 반대와 구타에도 불구하고 믿은지 3년만에 세례를 받았고 3개의 교회를 개척한 열성파였지만 교역자로 부족함을 느끼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7회로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노회 파송을 받아 외지 선교사가 되어 길림성으로 간 것이다. 길림교회에 정착해서 선교와 동시에 조선족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특히 조선인의 생활 지위문제에 착안하여 잘사는 것이 힘이라고 믿고 농무 상무 조합을 만들어 저축생활을 권장했고 중국관헌들과 교섭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농지 마련 등 실생활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교육을 통한 그의 민족의식고취는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구세주의 목소리로 들렸으나 일인 통치자들에겐 반골 독립투사로 비쳐졌다. 남만노회장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을때 몇차레의 마적의 습격을 받고 살림을 탈취당했고 5회나 일경의 심사를 받아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 3년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형무소에서 출소해 1935년 정월 초하루를 맞아 가정예배 겸 송별 예배를 인도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오소리강에 이르렀을 때 공산 비적 50여명이 나타났다. 마침 한목사를 마중하러 김창근영수가 합휴해 있었다. 그들의 행랑을 뒤졌으나 미싯가루 두봉지와 신의주 교회에서 여비를 준 돈 몇푼이 전부였다. "왜 이렇게 선교사로 간다는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거요."하면서 그 둘을 실신하도록 때리고 오소리강 얼음 구멍 속에 밀어넣고 공산 비적들은 왔던 길을 말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으니 한경희 나이 55세였다.

 

순교자 허  은 목사 (장로교)

 

허  은 목사(1913-1950)


허은은 1913년 2월 28일 평북 철산군 여한면 연수동 316번지에서 애국지사였으며 교회건축을 위해 사제를 털어 예배당터와 목재를 들여 건축하였던 열정적인 신앙인 허셕현 장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후 선천성경학교를 졸업 이어 서울로 상경하여 피어선신학원에 재적하면서 양반교회로 소문난 안동교회 조사로서 활동했다. 똑똑하고 총명하며 애국애족혼에 뜨거웠던 허은은 안동교회 윤보선 대통령의 후원으로 일본닛본대학 종교학과를 1942년에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청빙받았으나 사양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 1944년에 졸업했다. 평신재학중에는 철산교회 조사가 되어 겸손하게 섬겼고 졸업 후엔 평북 철산군 백량면 풍천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46년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6년 기독교도연맹가입거부, 11월 3일 주일선거 거부등으로 시련을 당하다가 1948년 5월에2남 3녀중 딸 하나만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가족은 9월에 월남하여 서울에서 만나 전북노회 산하 고창읍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영락교회 한경직목사의 요청으로 영락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은혜를 받아 해방교회 교우들이 허은목사를 당회장으로 초청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107평 2층 석조 교회당을 짓기 위하여 부흥회 인도로 받은 사례비를 봉투도 뜻지 않고 일꾼들 품삯으로 내 놓았고 친지들의 도움을 구하느라 하루도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1949년 해방교회를 신축하고 헌당예배는 1950년 3월 중순에 드렸다. 헌당 후 6.25가 터졌으나 교인들만 피난 시키고 두번 양떼를 버릴 수없다는 이유로 자신은 신축된 해방제단에 엎드려 낮밤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다가 1950년 7월 25일 정치보위부원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 가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을 향하여 "예수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겨주고 9월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교회에 불을 질러 허 은목사와 함께 한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허 은목사의 유족으로는 전옥자 사모가(82세) 있으며 맏딸 허오복 권사와 아들 허 전 장로(보성여고교장 은퇴)가 있으며 딸 허팔복 권사와 허희복 권사가 신앙의 유산을 성실히 이어가고 있다.

 

순교자 홍석황 장로 (장로교)

 

홍석황 장로(1901-1945)


1945년 11월 19일 소련군이 진주하고 북한 주민들은 소련군을 환영하기 위하여 용암포 국민학교에 모여 모두가 인공기로 무장한채 독립투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교회신도들의 얼굴이 비치지 않자 환영회가 끝날 무렵 공산당 정치부의 사주를 받은 누군가의 입에서 "민족과 공산주의를 배반하는 교회를 타파하자." 청년들이 우 합동으로 구호를 연창했다. 용암포제일교회로 몰려간 그들은 이기혁목사가 노회차 평양에가고 없자 가지고 간 곡괭이 삽 쇠스랑 등으로 강대상 파아노 의자들을 파괴했다. 그들이 무차별 성구를 부수고 있을때 소식을 들은 홍석황장로는 교회로 뛰어들어갔으나 살기가 번뜩이는 성난 무리들을 말릴 염도 나지 않아 교회당 한 구석에 선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주여! 이 살상과 증오로 가득찬 무리들 속에서도 당신은 계시는줄 압니다. 당신이 진정시켜 주옵소서" 이때였다."목사가 없으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다"하며 성난 군중들은 홍장로 주변으로 모여들어 쇠스랑으로 무자비하게 홍장로의 등어리를 찍어 내렸다. "윽" 홍장로는 숨이 막혀 간헐적으로 단말마의 비명을 쏟아 놓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등 가죽에서 핏줄기가 물총처럼 솟구쳐 올랐다. 피.붉은 피가 예배당 마루바닥에 어지럽게 번져 나가자 무리들은 누가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홍장로의 쓰러진 몸을 짓 이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홍석황은 1901년 평북 용천군 용암포에서 용암포 제일교회 장로 홍승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3.1 운동 때 교회에서 경영하는 구세학교를 졸업한 후 신성학중학교를 졸업한 홍석황은 목공소를 경영하는 아버지와 함께 태극기를 목판에 새겨 복사해서 나누어주기도 했다. 1931년 홍석황은 30세에 용암포 제일교회에서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장로가 됨으로 3대장로의 가업을 이루게 되었다. 용암포는 비교적 조용한 동리였다. 온 마을의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살았기 때문에 굶주리는 이들이 없었다. 조선의 천국이 바로 용암포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공산당이 강점하고 정권을 수립하면서 용암포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땅 한평 갖지 못한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공산주의에 부화뇌동하여 용암포에 찬바람이 불기시작했다. 1945년 11월 19일 소련군 환영대회에 교우들이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여공산당 푸락지들은 난동을 부리면서 학교를 때려부수고 끝내는 교회까지 침범해 파괴를 해댔다.

 

순교자 홍순용 집사 

 

홍순용 집사(1909-1950)


홍순용은 1909년 9월 28일(음)전남 무언군 해제면 신정리405번지에서 홍성춘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었고 글씨가 얼마나 미문(美文)이었던지 동리에선 명필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견선여불급(見善如不及)하고 견불선여탐탕(見不善如探湯) 하라. 착한일을 보거든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 악한 일을 보거든 뜨거운 물을 더듬는 것처럼 하라” 순용의 머리는 총명했으나 가정이 부유한 편이 아니어서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각처에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사업을 구상하기도 하고 시도해 보기도  하면서 심지어는 일본을 왕래하며 사업을 개척해 보려는 꿈을 가지고 노력도 해 보았으나 당시 태평양전쟁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결국 혼순용은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장사를 하였다. 그의 나이 36세가 되었을 때 해제교회에 출석하는 천기조장로가 홍순용에게 다가왔다. “홍선생 예수 믿으시오. 믿어야 삽니다.” “아니 그럼 내가 죽었단 말이요?” “예수 믿지 안고는 살았어도 죽은거지요. 암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지요.”  처음엔 천 장로의 전도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으나 천 장로는 집요하게 전도했다.  그런데 천장로가 자꾸 찾아올수록 이상하게 가슴을 압박했다. 악몽까지 꾸게 되었다.  게다가 그때 전도사까지 합세했다. .“홍 선생 위해 기도해 주러 왔지! 엊저녁 꿈에 홍선생이 괴로워하는 꿈을 꾸고 보니 찾아보고 싶어서 왔어!” 김전도사는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는데 홍순용의 방으로 성큼 성큼 들어왔다. 김전도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답답하던 체증이 확 뚫리는 것 같으면서 찌프둥하던 머리가 상쾌해왔다. 홍순용의 입신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의 입신으로 그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장자가 그것도 조상 봉제사할 사람이 사교인 야소교에 몰입돼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버지 홍성춘은 펄펄 뛰며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지만 “아버지, 제가 예수 믿는 것은 집안 잘되자고 믿는 것인데 왜 쑥대밭을 만듭니까.” 또 지병 속병인 체증도 하루 아침에 고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의사라고 해도 못고치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의 부친은 농사를 지으면서 한의술을 습득해 농촌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고마운 분이었다. 더욱이 그는 피부병에 좋다는 고약을 개발해 치료해 주기도 해 환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질 않았다. 한약재도 집안에 가득 가득 쌓여 한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홍성춘씨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집안에서 떠나 주기를 요구했다. “이놈, 더 이상 너를 보기 싫으니 우리 집에서 나가거라.” 홍순용은 더 이상 아버지를 모실 수 없을 정도로 신앙문제로 인하여 분가 하기에 이르렀고 가솔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야 했으며 예수 믿기가 어렵다는 것을 그는 절감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자는 얻으리라.(마태10:34-39). 그는 지역사회 유지로 알려저 동리 이장 일을 보면서도 북과 장고를 치며 전도하여 해제면의 많은 인재를 교회로 인도했다. 홍집사는 성령을 받아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해 지역사회에 많은 감화를 끼치는 복음의 증인이였다고 지역 사회에 알려지고 있다. 해방 이후  조국수호를 위해 좌익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자 집에는 빨간 페인트칠을 해서 구분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6.25가 터지고 지방 빨갱이들은 죽창을 들고 교회 책임자들에게 찾아와 생명을 위협했다. 결국 그는 총을 소지한 채 공산군에 체포당했다. 그가 잡히기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그는 총을 지녔기에 죽창을 든 공산군들을 죽일 수도 있었으련만 그는 죽이기를 포기하고 죽는 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에게 체포되어 해제면 내무서로 끌려갔다. 악랄한 공산당은 출가한 큰 딸 홍정임마저 끌어내어 몽둥이로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몸을 던졌다. 그런 공산당이니 홍집사는 얼마나 두들겨 팼겠는가? 홍정애와 관표가 면회를 가자 그는 자녀들에게 등물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님을 뵙더라도 깨끗한 몸으로 뵈어야 할 것이니 너희들의 손으로 친히 몸을 깨끗이 씻어 주기 바란다.“ 저녀들은 울면서 등을 밀어주었다. 피멍이 들어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홍 집사는 등물을 마친 후 자식들을 그 앞에 앉히고는 기도한 후 부탁했다. ”예수 잘 믿어야 한다“ 그 이튿날 새벽4시 5인의 지사들이 해제초등학교 교정으로 끌려나갔다. 임인재 장로, 김판업집사, 황인경집사, 홍순용십사, 경찰관 김지선 경위였다. 다섯 사람은 인민재판을 받고 총살형을 받았다. 그런데 인민군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총살당해 순교한 홍순용 집사의 시신만은 칼로 자상하여 확인사살을 한 것이다. 다섯 사람이 순교할 당시 바다 가운데 우뚝 선 마실산에선 다섯 개의 불덩이가 치솟아 올라 사형집행자들이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다고 목격자의 말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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