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역사박물관

2011. 3. 10. 01:56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배재학당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1858- 1902) 목사가 설립한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이다.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고종황제가 배재학당 설립을 재가하고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배재학당이란 학교명을 하사하였다.  

 

공사중인 배재학당    (출처-  http://blog.naver.com/hyotao)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효시이기도 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선교사로 이땅에 온 아펜젤러 목사와 스크랜톤 대부인이 선교의 일환으로 교육활동을 먼저 하게된 것으로 정동제일교회와는 한울타리(우리)에 있는, 말 그대로 "우리"이며 선교공동체 이다. 아펜젤러 목사가 배재학당을 세운것은 이 학교를 한국 복음화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또한 배재하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었고 그가 목표한 유능한 인재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이었다.

 

옛 배재학당

 

배재학당 자리

 

1889년 배재학당 학생들 (출처- 종교교회사) 

 

배재학당

 

독립신문사 터  

 

배재학당 동관

 

한국 근대교육이 시작된 곳으로 옛 배재학당의 동관이다. 1886년에 세워진 다른 옛 건물들은 모두 헐리고 이제는 1916년에 세워진 이 건물만 하나 남았다. 건물은 당시 유행했던 르네상스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서울기념물 제16호로 H.G.아펜젤러가 세운 국내 최초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다. 1910년대 한국 근대 건축 중요 지표이다. 아펜젤러 홀이라 불린 동관은 2008년에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장하였다.

 

배재학당 동관

 

배재학당 동관  

 

배재학당 동관 , 1916년 건축  

 

배재학당 동관 

 

배재학당 동관 

 

배재학당 동관 측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 동관이 역사박물관으로 변모되어 귀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출처- http://blog.naver.com/j4274247/10048339621)

 

2001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옛 배재학당의 교실로 사용된 건물로 한국 근대 교육적 의미가 크며 한국 근대 건축으로서 그 형식이 우수하다. 건물의 구조와 창문, 외장 및 벽돌 구조가 뛰어나며 정면의 현관(玄關)과 양쪽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1916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原形)이 대체로 남아 있고 건물의 형태가 우수하여 1910년대 한국 근대 건축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 된다.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교실로 사용되었으며 배재고등학교 동관으로 불렸다. 2008년 7월 24일 동관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장하였다.  박물관에는 상설전시관(1층), 기획전시관(2층), 체험교실(1층), 세마나 실(3층)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 상설전시관에는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 모습을 재현한 체험관이 있고, 전시관에는 이 학교 졸업생인 유길준의 친필 서명이 있는 서유견문록, 1885년 최초에 사용된 벽돌, 고종이 하사한 현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배재를 빛낸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등 유물들이 있다. 2층 전시관에는 아펜젤러가(家)의 귀중한 유물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입구

 

현판

 

안내포스터

 

박물관 봉헌기념문

 

박물관 소개서

 

박물관 소개서

 

1층 입구 (좌측)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 선교사의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교육 이념이 쓰여있다.

 

1층 입구(우측)

 

1930년대 배재학당 교실 체험실     (출처-http://alleyway.kr/140067225466)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을 재현한 공간이다. 당시 사용했던 석칠판과 책걸상 등을 근대 교실 분위기를 체험하게 된다. 영상물을 통해

120년 전 아펜젤러의 전인 교육과 배재학당의 교육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1층 상설전시관>

 

1층 전시관 입구 년표

 

1885년 배재학당 설립

 

배재학당 동관, 학당가 

 

 

1층 전시관, 19세기 말 조산의 선교사들

 

1층 전시관, 19세기 말 조산의 선교사들

 

코리안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1892년 1월에 선교사 F.올링거(F. Ohlinger) 부부가 창간하였다. 1년 동안 발행하다 휴간되었다가 2년 뒤인 1895년 1월에 H.G.아펜젤러, G.H.존스, H.B.헐버트 등에 의해 속간되어 1899년 4월 통권 59호로 폐간되었다. 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해 발행한 것으로, 거기에 실린 정치·경제·문화·풍속 등 한국에 관한 글은 한국의 근대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한국에 서구의 문화를 소개하고 인식시키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마태복음, 1892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 매킨타이어 공역


1892년 예수성교본 발행의 마지막 단편이며, 이후 선교사들의 성서위원회에서 성경번역이 본격화되었다. 순한글본으로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으며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고, 각 절 표시가 되어있다.

 

유길준의 친필 서명이 담긴 "서유견문"


우리 나라 초유의 서양 견문록으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나라 밖 사정에 어두웠던 백성들에게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제도, 문화와 삶에 대해 쓰고있다. 이 책은 20편으로 구성돼 있다. 제1편부터 18편까지는 세계 지리와 서양문물의 소개로 일관돼 있다. 제1편과 2편은 세계의 산, 바다, 강, 호수, 인종, 물산 등 인문 지리적인 개론이고, 제3편과 4편은 `나라의 권리’ `국민의 교육’ `국민의 권리’ 등 개화파로서의 의견을 밝힌 계도적인 글들로 구성돼 있다. 서양의 문물, 제도, 교육, 정치 형태, 정부의 직분, 세금, 군대, 화폐, 법률, 경찰 제도, 건강법, 서양 학문, 종교, 관혼상제, 놀이, 시설, 문명기기 등이 망라돼 있다. 제19편과 20편은 미국과 유럽 대도시의 소개다. 유길준은 1880년대에 한국인으로서 서양 여러 나라 대도시들을 여행한 유일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가벼운 여행기가 아닌 서양의 문화와 제도를 우리 나라에 소개함으로써 `개화’를 앞당기자는 시대적인 사명감을 갖고 쓴 책이었다.  유길준의 글은 완성되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연금 상태에서 풀리지 않아 출판할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1894년 갑오경장기간 중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출판사인 ‘교순사’에서 1895.4.25.책으로 발간하였다. 서유견문은 1,000부를 찍어 판매하지 않고 조정의 고관과 유력인사들에게 기증하였다.

 

<배재학당의 태동과 배재의 정신>

 

배재학당 모형도

 

배재학당에 사용했던 벽돌

 

배재학덩은 아펜젤러가 감독하고 한국인 심의석이 한국 최초로 벽돌로 지었다. 

 

신교육의 태동 배재학당

 

고종황제가 하사한 배재학당 현판  

 

초창기 교과서

 

초창기 교과서

 

초창기 교과서

 

초창기 교과서

 

초창기 교과서

 

천로역정 목판과 영인본  

 

<아펜젤러의 의로운 순교>

 

아펜젤러의 의로운 순교

 

아펜젤러의 의로운 순교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1858-1902)

 

 

 

아펜젤러 문화훈장증, 훈장(국민장)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추서하였다. 

 

문화훈장 

 

아펜젤러의 성경책(1897년)

 

아펜젤러가 생전에 쓰던 성경으로 그의 자손이(리차드 다지 아펜젤러) 배재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기증하였다. 

 

<배재학당 명예의 전당>

 

이승만, 주시경, 나도향, 김소월 등 우리 근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배재인들을 소개하였다. 또한 축구, 야구, 럭비, 수영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체육의 초석을 놓은 배재 체육의 진면목도 확인하고있다. 김소월의 시집인 "진달래꽃" 초판본과 함께 교지 "배재" 2호에 게재한 "접동" 등 작품들도 공개하고있다.

 

1층 전시관

 

이승만과 주시경

 

주시경 선생 (1876-1914), 독립신문 창간

 

주시경 (周時經, 1876.12.22-1914.7.27)


황해도 봉산 출생으로 아버지는 주면석(周冕錫)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본관은 상주이다. 둘째 아들로 태어나 둘째 작은아버지 주면진(周冕鎭) 앞으로 양자(養子) 입양되었다. 어려서 처음에는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양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1887. 6) 후에도 한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서울에서 신학문에 흥미를 느끼고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1894. 9). 도중에 인천의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에 들어가 속성과를 졸업하였으나 정치적 혼란으로 해운계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들어갔다(1896. 4). 때마침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있던 터에, 독립신문사 회계사 겸 교보원(校補員 교정보는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순한글 신문을 제작하여야 했기 때문에 한글의 이론과 표기법 통일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동료 직원들과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한글 표기법 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일과 연구를 병행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가 서재필이 추방당하자 독립신문사를 나오게 되었다. 대신 과거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제국신문》 기재(記載, 일종의 기자)를 하게 되었고, 동시에 선교사인 스크랜턴(W. B. Scranton)의 한국어 교사를 병행하였다. 한편으로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서 강사로 일하였다. 일을 하면서 공부도 계속 병행하여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1900. 6).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에서 흥화학교(興化學校) 양지과(量地科)를 야간반으로 졸업하였고, 정리사(精理舍)에서는 수물학(數物學)을 3년간 공부하였다. 그 때 나이 34세였다(1910). 학업을 마치고 그는 당시로서는 근대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서 후진 양성을 위해 교사로서 바쁘게 생활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침략을 당한 처지에서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계몽운동, 국어운동, 국어연구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애국계몽운동으로는 배재학당협성회 전적과(典籍課) 찬술원(纂述員), 독립협회 위원, 가정잡지 교보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친목회 제술원(製述員) 등의 활동이었다. 국어운동으로는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그리고 동교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 국어교육과 국어 발전에 앞장섰다. 교사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교사로 재직했던 학교는 간호원양성학교·공옥(攻玉)학교·명신(明信)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서우(西友)학교이다. 그 밖에 협성(協成))학교·오성학교·이화학당·흥화학교·기호(畿湖)학교·융희(隆熙)학교·중앙학교·휘문의숙(徽文義塾)·보성학교·사범강습소·배재학당 등에서 강사로 활약하였다. 그는 주로 조선어·주산·지리 등을 가르쳤다. 동시에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국어연구운동으로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하여 학교내의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 국문연구회 운영,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하였다. 그의 저술인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말》(1908?), 《국문연구》(1909),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은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고, 국어에서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다. 국어의 체계화, 표의주의 철자법,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혁신적 주장을 한 국어학의 선봉자였다. 그는 학교 및 강습소에서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특히 한글학의 후진으로 최현배(崔鉉培), 김두봉(金枓奉), 장지영(張志暎) 등 수많은 학자가 있다. 그의 개척자적 노력으로 오늘날의 국어학이 넓게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주시경 친필이력서 (1897년)  

 

이승만 박사 (1875-1965)

 

이승만 (李承晩, 1875.3.26~1965.7.19)


본관 전주(全州). 호 우남(雩南). 초명 승룡(承龍).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선비의 외아들로 태어나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한 복수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귀국,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지만,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네이버 백과사전) 

 

이승만 배재학당 졸업장 (1912년)

 

김진호, 이승만

김진호 (金鎭浩, 1891. 9. 25-1945. 7. 24)


전라북도 정읍(井邑)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6일 태인(泰仁)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에 참배하려고 상경하여 그곳에서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등을 만나 서울에서 있었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상황을 전하여 듣고 귀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김현곤(金玹坤)·송수련(宋洙連)·박지선(朴址宣)·송한용(宋漢鏞)·송진상(宋鎭相) 등과 독립만세시위 계획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거사날을 결정한 후, 당시 면서기였던 김현곤이 면사무소에서 등사기를 빼내어 송한용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3월 16일 정오, 수많은 시위군중이 장터에 모이자 이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이때 상인들도 상점을 모두 철시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출동한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같은해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보안법위반혐의로 태형을 받았으며, 출옥한 후에도 김현곤·박지선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견원들과 연락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는 등 구국활동을 계속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이 치러졌다. (네이버 백과사전)

 

서재필, 윤치호

서재필 (徐載弼, 1864.1.7~1951.1.5)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제이슨(Philip.Jaisohn)이다. 전라남도 보성(寶城)에서 출생했다.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79년(고종 16) 전강(殿講)에 장원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 1883년 일본의 도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뒤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操鍊局)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洪英植)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명성왕후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윤치호 (尹致昊, 1865~1945)


본관 해평(海平). 호 좌옹(佐翁). 충남 아산(牙山) 출생.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비준 때 초대 주한(駐韓) 미국공사 L.H.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개화인사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게 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선교사 A.J.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서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영어·신학·인문사회과학 등을 공부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 함경도 덕원부윤(德源府尹), 천안군수 등을 지냈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 있다가 11년 105인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한때 변절,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저서에 《우스운 소리》, 《영어문법첩경(捷徑)》 등이 있다

 

주시경, 오궁선(세브란스 의대 설립자)

 

김소월, 나도향

 

배재학보 2호에 실린 김소월의  "접동", 1923년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1925년, 매문사,초판본)", 23세 때 간행한 첫 시집

 

<배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배재의 모습

 

전시물

 

전시물

 

졸업증서

 

성적표

 

월간 배재 창간호 

 

찬송가 집 등

 

배재 학교배지와 교복단추

 

 

 

타임머신 함

 

<2층 기획전시관, 아펜젤러/ 노블 기념홀>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던 사진 자료와 아펜젤러/ 노블 가족이 지니고 있던 한국 관련 유물들을 통해 한국 근대화에 미친 선교사들의 영향과 그들의 삶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자연 풍경과 가옥들, 한국인들의 일상이나 한국 여인들에 대한 단상, 한국어 발전에 대한 강한 집념, 배재학당 우물에 얽힌 이야기, 감옥에 수감중이던 이승만이 보내온 편지 등 다양한 사연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아펜젤러/노블 기념 홀

 

1885.4.5 부활주일에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제물포에 도착하다.(김학수 화백 그림, 1980) 

 

아펜젤러 가족(위)/노블 가족(아래)

 

아펜젤러/노블 가계도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와 엘라 다지 아펜젤러(1884년)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한국명:亞扁薛羅)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회 최초의 선교사이며,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추모비는 배재동창회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로부터 출생하여, 미국에 있는 플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1878)했다. 두루 신학교에 진학(1882)하였으며, 1884년 12월 엘라 닫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그는 1884년 미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해외선교부(총무)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85년 2월 27일 아라빅호 배편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잠깐 머물다가 1885년 4월 5일 미츠비시 배편으로 부산을 경유 인천에 그의 부인과 함께 도착했다. 이 때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는 첫 기도를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등 우리 나라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미국 공사(G. C. Foulk)의 권유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H. G. 아펜젤러 선교사의 주요 활동과 업적을 요약하면, 첫째, 배재학당의 창설(1886. 6. 8)을 예시할 수 있다. 배재(培材)학교는 고종 임금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둘째, 한국감리회 최초의 정동제일교회의 설립(1887.10.9)이다. 셋째, 한국의 문화 연구와 독립운동의 적극 지원이다. 그는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서구식 의회법을 제일 먼저 시행하였다. 그리고 벙커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넷째, 성서 번역사업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여 당시 한문(漢文)위주의 사회에서 한글을 장려하고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 계몽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밖에도 마가 복음서를 번역하고, 언더우드, 혜론, 스크랜톤 등과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1890)하여 성서 번역에 공헌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 중 1902년 6월 첫 주일, '레이놀즈' 미 남장로회 선교사 주재 구역의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할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어감독 등과 '무지내교회' 방문(1902. 6. 1)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시흥)을 통과하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마구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재판의 증언 때문에 목포 출발이 지연되어 다른 선교사보다 늦게 구마가와마루(熊川丸)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 정면 충돌, 침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순직하였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보올비(J. F. Bowlby : 미국 인디애나로 돌아가던 운산광산 근로자)였고 아펜젤러 선교사 외에 한국인 14명, 일본인 4명, 선원 4명도 실종(사망)했다. 성서 번역에 공적이 큰 J. S. 게일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순직에 대하여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서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윌리암 아서 노블과 매티 윌칵스(1892년)

윌리암 아서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 9. 13-1945. 1. 6)


미감리회 선교사로 한국명 노보을(魯普乙)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스프링데일에서 출생한 그는 1889년 와이오밍신학교(Wyoming College), 1892년 드루신학교(Drew Univ.)를 졸업한 후 1892년 와이오밍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홀(W.J. Hall) 선교사의 권유로 그 해 10월 15일 미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 교사로 3년간 재직했으며 홀 선교사 별세 후인 1895년 평양으로 파송되어 15년 동안 평양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다. 1896. 3 미감리회 신학당 시작될 때 조직신학과 설교학 강의, 1906 철학박사 학위 수여, 1908~11 평양 및 서울지방 감리사로 한국 감리교 70% 관할, 1910. 가을 남경 금릉대학에서 해리스 감독의 친일행위 공박, 평양에 주재하면서 한국북지방 감리사로 시무하였으며 1917~1922, 1928, 1932~1934년에 수원지방 감리사로 시무하였다. 1930년 남.북감리교회 합동 시 미감리회 전권위원으로 활약했다. 1933년 2월 11일 한국 선교 40주년 기념식을 원주읍교회에서 가졌으며 1933년 5월 은퇴하였다. 관리자로 2년, 지방 감리사로 40년을 활동한 그는 이듬해 11월 14일 경성지방 교역자회가 마련한 송별 만찬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송별예배에 참석한 후 귀국하였다.  정동교회에도 깊이 관여한 노블 목사 부부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1934년이고 1945년 1월 6일 사망했다.1945년 1월 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스톡튼에서 별세했다.

-논문:"젼도사업 론리", 〈신학월보〉, 1901. 4(제1권 5호);"령혼론", 〈신학월보〉, 1902. 8(제2권 8호), 1903. 3(제3권 3호), 1903. 5(제3권 5호), 1908(제6권 1~5"6호);"미이미 감리 계삭회 규측", 〈신학월보〉, 1908(제6권 2호);"그리스도론", 〈신학월보〉, 1909(제7권 4"5호);"In Memory of Dr. William James Hall", The Korea Mission Field, 1931. 1;"복음전도법의 일고찰", 〈기독신보〉, 1931. 1. 1~1. 21;"Training Laymen through Classes", The Korea Mission Field, 1933. 10;"Pioneers of Korea", C.A. Sauer ed., Within The Gate, 1934. -저서:Ewa, A Tale of Korea.

지금은 남편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거주하는 그의 손녀 엘렌 맥카스클(67) 씨는 아버지 서재에서 액자에 꽂힌 태극기를 항상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맥카스클 씨에 의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국에서 모은 유품은 현재는 그 후손 집안에 분산, 상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노블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가져간 태극기 2점은 그의 수중에 있다. 이 태극기 2점을 들고 맥카스클 씨가 조부모에게는 실상 제2의 조국과도 같은 한국을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건국 6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마련한 '대한의 상징, 태극기'에 흔쾌히 이들 태극기를 내놓았다.

 

그의 부인(Mattie Wilcox Noble, 1872~1956)

 

1892년 노블 선교사와 함께 내한하여 1896년부터 평양시내 여자아이들만을 모아 교육시켰으며 1900년 평양 남산현교회에 사범반을 설치하여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였다. 1903년 유년주일학교를 처음으로 시작했으며, 1905년 선교공의회에 주일학교위원회 위원으로 주일학교운동을 발전시켜 나갔다. 《어머니에 대한 강도》(예수교서회, 1916), 《자모권면》(예수교서회, 1921), 《승리의 생활》(예수교서회, 1927;Victorious Lives of Early Christians in Korea, 東京:敎文館, 1934) 등의 저서와 The Journals of Mattie Wilcox Noble 1892~1934란 일기를 남겼다. 딸 둘과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큰 딸(Ruth Noble Appenzeller)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남과 결혼하였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와 루스 에밀리 노블 (1918)

 

헨리 다지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 선교사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亞扁薛羅2世, 1889~1953)는 1889년 11월 6일 서울 서대문구 정동 2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프랭클린-마샬(Franklin and Marshal)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11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1915년 드루(Drew)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7년 뉴욕대학에서 M. A. 학위를 받았다. 1917년 9월 4일 선친의 뜻을 계승하여 감리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인천지방에서 3년간 활동하였다. 1920년 배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20년간 봉직하였다. 그는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끊임없이 교육시켰다. 1919년 11월 6일 ‘미국감리회한국연회’ 서기로 피선되어 1924년 9월 17일까지 다섯 차례나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찬송가 개정작업에 동참하여 <신정 찬송가》를 1931년 발행하는데 공헌하였다. 1952년 11월 배재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중 백혈구 부족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미국 뉴욕감리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53년 12월 1일 64세로 별세하였다.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1954년 10월 18일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되었다. 이화·배재 연합성가대의 주악과 찬송(570장)과 신흥우 박사의 조사 등으로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가 진행되었으며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H. D.아펜젤러 부인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선교사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는 1892년 10월 1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과 평양지방 감리사로 1934년까지 봉직한 노블(Noble, William Arthur. 魯普乙, 1866-1945)선교사의 딸로 1894년 6월 14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중학교와 교육대학을 졸업하였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亞扁薛羅)의 아들 H. D. 아펜젤러와 미국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1917년 9월 4일 남편과 함께 내한하였다.(자료 : 윤춘병,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처음에는 인천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남편을 내조하며 감리교 선교사로 봉직했다. 1941년 강제 출국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0년 세계봉사회 한국지부 대표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다시 내한하여 1952년 남편의 병 치료차 귀국하였다. H. D. 아펜젤러와의 사이에 3남매(Appenzeller, Alice R., Mary E.)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 사후에 다시 내한하여 1962년까지 정동에 있는 감리교선교사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 책임자(Hostess)로 봉직하였다. 정년 후에는 나이트(Cecil Knight)와 재혼하여 미국 그렌다르(Glendale)에서 살다가 1986년 11월 25일 별세하였다.(자료 : Donald N. Clark)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87년 1월 19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헨리 다지 아펜젤러

 

루스 에밀리 노블

 

히브리어 성경책

 

성경책

 

양피 성경

 

양피 성경

 

노블 선교사와 초기 선교사

 

한국의 역사, 1905년

 

조선 남감리교회 30주년 기념보

 

저서

 

각 종 유물

 

자개 함

 

반짇고리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가죽 가방

 

헨리 다지 아펜젤러 홀

 

노블 선교사 가족 사진

 

노블 선교사 가족 사진

 

노블 선교사 가족

 

노블 선교사 가족사진

 

유물, 놋으로 만든 접시, 잔, 화병

 

남자아이 실크모자

 

여자신발

 

소설 이화

 

노블 가족 사진첩

 

루스 에밀리 노블의 공책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 친필 일기(1896-1900)

 

이승만과 주고받은 서신, 배재 학당 우물사용과 관련하여 고종황제에게 올린 진정서 등 1890년대 정동 중심의 한국 근대기의 모습을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 친필 일기(1896-1900)

 

올갠

 

올갠

 

전시물

 

전시물

 

한국 근대의 선구자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 저)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자필일기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자필일기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자필일기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자필일기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사진첩(1885-1900), 1985년 자손이 기증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사진첩(1885-1900) 

 

 

한국 선교기 (저자미상)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 부부

 

아펜젤러와 초기 학당 직원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책상

 

전시실

 

가르치는 헨리 다지 아펜젤러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신학박사학위기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일기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작은 공책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면허증 등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여권 등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생애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부인 루스 에밀리 노블의 생애

 

루스 에밀리 노블의 여권, 거주허가증, 운전면허 등

 

사진첩

 

루스 노블 아펜젤러가 즐겨 입던 검정색 실크 드레스(1935년)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교장실에서 쓰던 책상

 

헨리 다지 아펜젤러

 

헨리 다지 아펜젤러가 사용하던 타자기(1920년대)

 

아펜젤러 노블 가족

 

전시실

 

색동저고리 등 유물

 

노블 선교사 선교 40주년 기념식

 

노블 선교사 선교 40주년 기념식(1932년) 

 

전시물

 

전시실

 

아펜젤러가 사랑한 한글과 그의 제자

 

아펜젤러와 제자들

 

아펜젤러 가족

 

노블과 윌칵스 가계도

 

유물 옷

 

아펜젤러 초기 사택

 

아펜젤러 초기 사택

 

아펜젤러 사택 보수공사

 

가족 사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 부부

 

노블 선교사 가족

 

할렐루야 자수(1912년)

 

할렐루야 자수(1912년)

 

루스 노블 아펜젤러와 1927년의 배재학교

 

배재를 빛낸 인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