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10. 00:32ㆍ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천주실의, 1595년, 복사본
중국 명나라 때 예수회 소속 이탈리아 신부인 마태오 리치(Matteo Ricci:利瑪竇)가 1593- 96년에 편찬한 한문으로 된 천주교 교리서이다. 천주실의의 내용은 선조 때 문인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1614)"에 소개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하느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며, 8편 17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말(明末) 청초(淸初)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총 500여 종에 이르는 서양 학술서적을 다투어 한문으로 번역 출판하는 분위기 속에서 1593~96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며, 1603년에 중국 북경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거듭 출판되었다. 가톨릭 철학과 스콜라 사상의 입장에 선 서사(西士)와, 전통 유학과 불교·도교의 사상을 갖춘 중사(中士)가 토론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동양사회에 대한 천주교 전파가 목적이었으므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필요한 경우 불교와 도교 이념도 동원하였으며 중국의 고사(古事)와 성어(成語)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1편은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2편은 불교·도교에 대한 논박과 상제(上帝) 개념 등 천주교 수용의 기반이 되는 유교의 성격에 대한 설명을, 3편은 천국(天國)의 필요성과 식물·동물·인간의 특성을, 4편은 인간 영혼의 신령함과 범신론적 일신론(汎神論的一神論)에 대한 비판을, 5편은 윤회설 등 불교에 대한 비판과 그리스도교의 재계(齋戒)의 성격을, 6편은 죽은 후의 상벌(賞罰)과 지옥·천국·연옥에 대한 설명을, 7편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본성을, 8편은 천주교 신앙생활과 상통하는 중국 고대의 생활과 천주교에 귀의하여야 할 당위성을 논하였다. 이 책의 일차적인 특징은 불교와 도교는 배척했지만 유교는 태극설(太極說)을 제외하고는 그 의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천주교 전파의 바탕으로 삼으려 했던 점에 있다. 18세기 중엽 이후 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 등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반대중을 위한 번역본도 많이 필사되었다.
천주실의 한글 번역본, 절두산 박물관
천주실의, 절두산
천주실의, 1868 중간, 카톨릭대박물관
마태오 리치, 천주실의 저자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교황령 도시 마체라타에서 13남매의 장남으로 출생. Matteo는 세례명이다. 부친인 요한 리치는 마체라타의 시장을 지냈으며, 후에 주지사의 지위에까지 이른 인물이다. 마테오 리치는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로부터 배웠으며, 가정교사인 니콜로 벤치베니는 후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리치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1571년 (19세) 예수회에 입회하여 로마의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가다. 1582년 (30세) 중국의 마카오에 도착하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의 사제 계급인 승려로 어필하기 위해 머리를 삭발하고 회색 승복을 착용하고 전도생활을 시작하였다. 1603년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인쇄함. 1610년 5월 초 병상에 눕다. 5월 8, 9일 고해성사를 하다. 5월 10일 종부성사를 받았다. ⑶ 1610년 5월 11일 저녁 7시에 만 57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⑷ 1611년 황제로부터 산랸의 묘지를 하사받았다.
지봉유설(Treatises on Practical Topics), 1614년 이수광 저
이수광의 호는 지봉(芝峰)으로 병조판서를 지냈던 전주 이씨의 희검(希儉)의 외아들이었다. 선조 18년(1585)에 관직에 올라 광해군 때에 물러났으며 사행을 세 차례 했다.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1613년(광해 5년)에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도승지와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다 1628년(인조 6년)에 별세했다. 그의 책 『芝峰類設』(지봉유설)은 1614년에 집필되었으며 그 책의 박물적(博物的) 성격은 그의 활동과 학업의 소산이라 하겠다. 그는 조선에 서양에 대하여 처음 문헌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선조 36년, 그가 북경에 갔을 때에 이광정이 가지고 귀국하려던 '구라파국여지도'(歐羅巴國與地圖)를 보았다고 하면서 프랑스(佛良機國)의 무기를 불랑기(佛浪機)라 한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영국(永기利國)에 대하여 기상과 생활, 그리고 군함에 대하여 언급한다. 또한 이어서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리치가 쓴 『天主實義』(천주실의)를 소개하여 천주교의 교리와 교황에 대하여 언급했다. "歐羅巴國亦名大西國有利瑪竇者...天主實義二卷首論天主始制天地主宰安養之道次論人魂不滅大異禽獸次辨輪廻六道之...天堂地獄善惡之報末論人性本善而故秦天主之歲...敎化皇不婚 ..重友論...."(구라파국역명대서국유리마두자...천주실의이권수론천주시제천지주재안양지도차론인혼불멸대이금수차변윤회육도지...천당지옥선악지보말론인성본선이고진천주지세...교화황불혼추..중우론) (유럽국 또는 대서국의 마테오리치라 하는 이는... 천주실의 이권 신론에서 천주는 천지를 만들 때 계셨고 주관하시며 평안을 준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교리를 논하자면 인간의 혼은 불멸하기에 금수와는 판이하게 다르며 윤회의 육도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천당과 지옥은 선과 악을 말세에 보응하며 인간의 성품이 본래 선한 것은 크신 천주의 뜻이라...교황이라 하는 자는 여인을 취하여 결혼하지 않으며...형제를 중히 여기고...) 비록 상세한 언급은 아닐지라도 그의 관점에서 읽은 서학의 내용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믿는 자끼리는 형제라 여기고, 교황은 독신이며, 천주의 창조설과 주재하심, 인간의 영혼설과 당옥설(堂獄設)을 말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天主實義』(천주실의)의 내용을 몇 가지만 간추려 소개했다. 즉 이는 그의 관심이 천주교가 아닌 서양의 문물에 있으며 서학의 일부분으로서만 천주교에 대하여 소개한 것이지 자신의 해석이나 견해를 피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글은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경원시하였던 박학(博學)의 방법으로 성리학적 경학관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아야 한다. 당시의 학문과 문물에 대한 박학적 소개는 현실성과 실천성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실학적 태도의 발효였고 서학과 관련된 실학의 효시라 평가할 수 있다.
교요서론, 1670년 베르비스트(verbiest) 저
천주의 존재, 영혼불멸, 천지창조 등 12개의 기본적인 천주교 교리를 해설한 교리서이다
이벽의 몽회록, 1777년 정약종 저
정약종이 지은 '이벽선생 몽회록'은 고전소설로 그 내용은 이벽과 정학술과의 대화체로 되어 있다. 천지가 혼미해진 가운데 서기가 비치더니 홀연히 옥안선풍의 선비인 이벽이 나타나 정학술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벽은 천상선인(天上仙人)으로 이 세상에 내려와 학술에게 △우주창조의 원리 △낙원추방과 예수의 구원 △유불도의 허망함 △조상제사와 우상숭배 △신유옥사와 진리의 승리 △하느님의 최후심판 등을 이야기해주고 천주밀험기(天主密驗記)를 전하고는 다시 승천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벽이 죽은 뒤 60년만에 다시 현세에 재현한다는 내용으로 이벽의 공덕과 그의 죽음이 작자에 의해 신성화되어 박해를 통한 신앙의 강화를 당부하는 주인공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이 소설은 초기 서학의 대표적 인물로 이벽이 중시되었음을 드러내는 중대한 실례이다
이벽 성교요지
이벽, 성교요지
성교요지
한국 천주교 창설에 공이 많았던 이벽(李檗)이 서구 천주교 교리를 한국적인 정서에 맞춰 읊은 장대한 사시(史詩)이다. 신약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죄와 구원의 의미, 복을 누리기 위한 신앙인의 자세, 믿음의 생활화 등 천주교의 참된 진리에 관한 내용으로 이뤄졌다. 이 서적은 《주교요지》와 더불어 한국 천주교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이며, 당시 우리 나라의 자발적인 천주교 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주교요지(Substance of Catholicism), 1797년 정약종 저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 편
1. 인심이 스스로 천주님 계신 줄을 아느니라.
2. 만물이 스스로 나지 못하느니라.
3. 만물이 저절로 되지 못하느니라.
4. 하늘이 움직여 돌아감을 보고 천주가 계신 줄을 알지니라.
5. 사람은 반드시 천주로 말미암아 생겼느니라.
6. 천주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7. 천주는 본디부터 계시고, 스스로 계시니라.
8. 천주는 시작이 없으시고, 마침이 없으시니라
9. 천주는 지극히 신령하시어, 그 형상이 없으시니라.
10. 천주께서는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니라.
11. 천주는 무궁히 능하시니라.
12. 천주는 온전히 아시느니라.
13. 천주는 무궁히 아름다우시고, 좋으시니라.
14. 천주는 세 위(位)이시고 한 체(體)이시니라.
15. 푸른 하늘이 천주가 아니니라.
16. 천지가 스스로 만물을 능히 내지 못하느니라.
17-27
28. 천주는 반드시 착한 이를 상주시고 악한 이를 벌주시니라.
29. 사람은 죽은 뒤에 영혼이 있어 상과 벌을 받느니라.
30. 영혼은 반드시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느니라.
31. 천주께서 천당과 지옥을 두사, 세상 사람의 선악을 시험하여 갚으시느니라.
32. 지옥은 천당과 맞은 짝이 되느니라.
33. 천주께서 엿새만에 천지 만물을 내시니라.
34. 세상이 본디 좋더니 사람의 처음 조상이 천주께 죄를 지으매, 좋던 세상이 괴로워지고, 착한 사람이 다 그릇되었느니라
(35-38)
39. 세상이 끝날 때에 천주 예수께서 다시 내려오시어 천하고금 사람들을 다 심판하시느니라.
40. 천주께서 강생하신 의심을 밝힘이라
41-42
43. 사람이 천주교를 들으면, 즉시 믿어 받들어 행할지니라.
주교요지, 카톨릭대박물관
주교요지 필사본, 절두산
주교요지 판목, 절두산
정약종초상화, 숭실대
정약종(1760- 1801)
정약종은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학자로, 한글 교리서(敎理書)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해 조선 초기 교회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이다. 정약종은 조선 후기 조정의 천주교 금교령(禁敎令)을 어겨 숭고한 죽음을 맞은 순교자이다. 정약종은 경기도 양근(현재의 양평군)에서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정약전은 훗날 '자산어보'를 지었고, 그의 아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지은 실학자(實學者)로 유명하다.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뒤늦게 천주교에 입교했다. 성격이 곧고 탐구욕이 강한 정약종은 입교 후 여러 해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한문 서학서와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교리 연구에 몰두했다. 철저한 교리 연구가 있었기에 그는 부친이나 주위 사람들, 그리고 조정의 배교(背敎)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1791년 집안이 천주교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자, 그는 가족을 이끌고 강 건너 마을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집안의 박해로 인한 이주였지만, 오히려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교우들을 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로 날이 새는 줄 몰랐다. 천주교에 대한 그의 박식함은 점점 신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약종은 1795년 한양에 온 청나라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직접 배운 후, 그 내용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자주 토론을 펼쳤다. 이 무렵 주문모 신부는, 교리에 밝고 신자들의 존경을 받던 정약종을 전교 활동 조직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으로 선임했다. 정약종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주문모 신부 입국 당시 4000여 명이었던 교우가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1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 하층민 출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알기 쉬운 교리서의 필요성을 느낀 정약종은 명도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주교요지'를 저술했다. 두 권으로 된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는 한문의 혜택을 받지 못한 신자들에게 널리 읽혀졌으며, 초기 조선 교회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던 1801년 유생들의 천주교 배척 상소가 빗발치자, 결국 조정에서는 천주교 금교령을 내리고 신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정약종은 박해가 시작되자 하인을 시켜 집 안에 있던 천주교 서적과 일기 및 주문모 신부의 서한 등을 농짝에 넣고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운반 도중 포졸에게 발각돼 물품을 압수당하고 정약종도 그 해 2월 11일 체포되었다. 이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그는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특히 책롱 속에서 발견된 그의 일기 가운데 "나라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군주(君主)이며.."라는 글귀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심문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정약종은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밝혔다. 결국 정약종은 국가가 금하는 사교를 믿은 죄, 국왕에 대한 불경과 국가에 대한 모반죄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민중에게 천주교의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정약종의 당시 나이는 42 세였다.
정약종의 영세증서, 1790년 6월
류선님 영세증서
천주 성교 공과 일권 (필사본), 1864년, 앵베르(L.M.J.Imbert) 역
1862년 목판으로 인쇄되어 1869년 가톨릭 기도서가 나오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기도서로서 사용되던 책. 일반적으로 성교공과, 또는 공과로 불렸는데 공과란 광의로운 매일의 기도를 의미하고 협의로는 주일과 축일 및 기타의 기도문을 수록한 기도서를 의미한다. 천주성교공과의 간행은 1862년이지만 번역은 조선교구 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로부터 시작된다. 그뒤 천주성교공과는 1963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과로 1969년 새로운 기도서인 '가톨릭 기도서'가 나올 때까지 수없이 재판되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으나 근본적으로는 큰 변화없이 100여 년 이상을 한국교회의 공식 기도로 사용되었다.
천주성교공과 필사본, 언양 신앙유물전시관
권철신 서찰, 1773, 조선후기 순교자
기해일기, 현석문, 1905, 1839년 기해박해시 순교한 천주교인에 대한 기록
벽이연원록, 이익일가, 18-19세기, 천주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내용을 서술
사학징의, 미상, 1801, 신유박해시 천주교인들의 진술 및 판결문을 수록한 박해문서
사후묵상, 미상, 1864, 천주교회의 사후세계에 관한 묵상서
성찰기략, 다블뤼 저, 1864, 천주교인들의 성찰하는 길을 쉽게 설명한 교리서
신명초행, 다블뤼, 1899, 천주교 초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묵상서
척사문, 한익철, 1866, 천주교를 배척하는 6가지 이유를 서술한 천주교 비판서
척사설, 황필수, 19세기, 천주학을 금수와 같은 오랑케 학문이라고 배척하는 글
척사윤음, 1839, 기해박해시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박해의 정당성을 선전하기위해 반포한 윤음
천신회과, 천주교회, 1861, 천주교회의 여러가지 행동강령과 경문 수록
천당직로, 미상, 1864, 천주 교리서의 하나로 대표적인 심신서
천주성교예규, 다블뤼, 19세기 중반, 예식서이자 생활규범을 담은 교리서
치명일기, 뮈텔, 1895,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순교한 877명 의 순교자 기록
칠극, 판토자, 1798, 죄악의 근거가 되는 7가지 뿌리와 이를 다스리는 7가지 덕행을 기록한 교리서
교황즉위기념메달, 순교자기념메달, 1847-1925
교황즉위기념메달(좌), 한국에 온 최초의 신부 모방, 앵베르, 샤스땅의 순교기념메달(우)
유한당 언행실록, 유한당권, 1795, 천주교 신앙에 입각한 여성교훈서
진도자증, 사바낙, 1866, 천주교 교리와 정당성을 변증한 교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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