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박물관(숭실대- 한국 초기 개신교 역사 자료)

2011. 3. 10. 00:27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의사 존 헤론 선교사에게 고종이 내린 교지

 

헤론 선교사의 묘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있으며 최초의 매장 선교사이다.

 

 

존 헤론(John W. Heron, 惠論, 1857 ~ 1890)은 조선 선교를 자원한 최초의 미국인으로, 국립병원(광혜원) 원장을 지내는 등 의료 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헤론은 1883년 테네시 종합대학의 의과대학을 개교 이래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의 안정된 의사 생활 보다는 그의 절실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땅끝'으로 가기를 원했고, 동양의 여러 나라중 '코리아'를 찾아내었다. 장로교 선교 본부를 찾아갔으나, 선교 본부에서는 조선 선교는 아직 이르다는 의견과, 지금이 바로 선교해야할 때라는 의견이 맞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내부적으로는 개화파와 척사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1866년에는 9명의 프랑스 신부를 포함한 8천여명의 천주교 신자가 학살당했고,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등 서양의 여러나라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조선에는 정식 개신교 선교사는 없었지만, 외국에 있는 조선인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다. 1876년 이후, 조선 최최의 개신교인으로 기록된 이응찬이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고,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은 미국에서 사절로 있는 동안 복음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이미 조선어로 번역된 마가복음이 발간되어 있었다. 선교본부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 일본 등지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부터 조선 선교가 시급하다는 보고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저 교사와 의사로서 선교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전략까지도 제시되고 있었다. 조선에 가장 먼저 들어가고자 했던 헤론의 열망과는 달리 1884년 알렌, 아펜젤러 등이 먼저 조선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닥터 헤론은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어를 익히고 1885년 6월 21일 한성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5년동안 조선인들에게 의술을 베풀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1890년 7월 26일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당시 전염병이 돌아 다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에서 운둔하며 쉬고 있었지만 헤론은 매일 사대문까지 들어와 병든 자를 치료하다가 본인이 전염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의 장례 문제로 한성은 발칵 뒤집히게 되었다. 사대문 안에 낯선 서양인의 시신을 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환자들이 그의 손에 의해 치료를 받았고, 은밀한 중에 전도가 되어 예수를 믿은 이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의 집 뒤뜰에 가매장을 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한성 근교의 양화진이 선정되어 헤론은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남겨둔 채 낯선 땅에서 주의 군사로서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최초로 들어가서 선교하고 싶었던 조선에서 한강변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무덤에 최초로 묻히게 된 것이다.그는 조선 땅에서 젊은 나이로 죽었지만 밀알이 되어 제2이 제3의 헤론들이 태어나 복음의 빛을 빛을 갚고 있는 것이다. 이 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이들은 양화진에 뼈를 묻었고, 한국 기독교의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것이 양화진의 시작이다.

 

 

헤론 선교사 양화진 묘지 

            

떨잠(족두리), 19세기 초 명성황후가 제중원 의사인 헤론 선교사의 부인에게 하사한 족두리 장식 

      

떨잠, 옆 모양

 

헤론 선교사가 고종으로 부터 하사받은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찬미가, 1897년 존스(G.H.Jones) 외 공역, 미 감리교회 최초의 찬송가

 

그리스도 신문, 1897년 4.1- 1897년 12.23

 

선교사 언더우드가 1897년 창간한 순 한글판 기독교 주간신문

             

찬송가, 1908년 언더우드 편역, 감리교, 장로교회 연합 찬송가

 

신학세계, 1918년 7월, 1919년 1월, 협성신학교, 현 감신대 교수회에서 발행한 신학지

             

성경잡지, 1918년 2월, 1919년 3월, 조선예수교서회 간

 

중국의 "성경잡지"를 한글로 번역한 월간잡지로 성경강해나 교리해설 수록 

 

명심도, 1918년 성서를 동물 그림에 비유하여 설명한 전도문서

십계요해, 1918년 한국인의 입장에서 십계명을 한글로 풀이한 해설서 

 

만국주일공과

 

미 감리회 강령과 규칙, 케이블, 최명화 공역, 1910,

 

사과지남, 게일, 한글문법교습서, 1894, 외국인을 위한 최초의 교습서

 

성교촬리, 존 저, 언더우드 역, 1890, 기독교 교리를 간략히 설명한 전도문서

 

약한의긔록한글복음, 요한복음 한글판, 펜윅, 1893, 캐나다 그리스도교회 독립 선교사 펜윅이

번역한 요한복음 한글판

 

주일학교공과, 유경상, 1921,

 

진리편독삼자경, 야소교서국, 1895, 기독교교리를 한자 3음절로 말을 짓고 한글로 해석을 붙인

교리해설서 

 

활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1928, 1922년부터 성결교회에서 간행한 신학잡지

 

장로회 신학교 졸업증서, 1907.6

 

감리교회 조례, 1908년 윌리암즈, 안창호 공역

 

목사직첩, 1911년 감리교회, 감리교회에서 김정길에게 목사직을 허가하는 확인증명서

 

집사증장, 1918년 감리교회,  미국감리교회 조례에 의해 이강우를 집사로 임명하는 증명서


 

한국 역사, 1880년 로스(J.Ross) 저

로스 선교사의 한국 역사 서적으로 3-6세기 한국 역사 지도를 싣고 있다.

 

로스 목사

 

 

1872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J. Ross)가 만주 관문인 영구(영구)에 도착해서 만주 선교를 시작하였고 1년 후에는 매제가 되는 매킨타이어(J. McIntyre) 선교사가 합류했다. 로스 목사는 1874년, 1876년 두 차례 봉황성 아래 고려문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그곳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만나는 의주 출신 상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는 한 편, 이응찬을 비롯하여 최성균 · 김진기 · 이성하 등을 영구로 불러 들여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한문 성경이 국내에 전파되었다. 의주에 살던 백홍준이 성경을 읽고 3년 동안 탐구한 후 개종을 결심하고 1879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영구로 갔다.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한 로스 대신 그를 맞은) 매킨타이어 목사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자 "함께 지내보고 진짜 교인이면 주겠다." 하였다. 백홍준은 3개월 동안 영구에 머물면서 의주 출신 성경 번역자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였고 마침내 그 해 6월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3년 동안 성경을 번역하던 이응찬도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한국인 최초 개신교 세례이다.  1881년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로스 목사는 봉천(지금 심양)으로 옮겨 동관교회를 설립하는 한 편, 교회 구내에 성경 번역소 및 인쇄소를 차리고 한글로 된 문서를 찍어냈다. 즉 1881년 세례 문답과 전도용 문서인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인쇄하였고 이듬해엔 최초 한글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서>와 <예수성교 요한복음>을 인쇄하였다. 그 후 계속 쪽복음을 인쇄하였고 1887년 이르러 신약 전체를 번역하여 <예수성교전서>란 이름으로 출판했다. 이렇게 인쇄된 한글 성경은 백홍준 · 서상륜 등 매서인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전달되었고, 거기서 남쪽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처럼 한글 성경이 인쇄되어 나오자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인 개종자들이 사방에서 나와 이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국내에서는 의주에 교회가 처음 설립되었고, 거기서 구성을 거쳐 선천, 평양으로 복음이 퍼져 나갔으며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를 통해 황해도 소래(松川)와 서울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만주 땅에 압록강을 따라 형성되었던 한인촌에서도 그런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그 중에도 로스 목사를 도와 성경 교정과 인쇄 일을 맡아 보았던 김청송의 전도로 1898년 설립된 집안현 이양자(裡楊子)교회가 유명하였다. 임오군란(1882년) 때 피난 온 한국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이양자 산골짜기에 교회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압록강 연변 20여 개 한인촌 마을마다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생겨났고, 말로 번역된 성경을 읽은 개종자들이 생겨나 선교사들이 들어와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를 두고 언더우드는 "우리는 씨를 뿌리러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결실을 얻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전파한 결과 '성경 중심적' 교회의 역사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전도여행기, 1834년 귀츨라프 저

 

1832년 선교차 내한하여 성경을 전해주었던 네델란드 선교사 귀츨라프의 전도 여행기

 

귀츨라프 선교사

 

귀츨라프 선교사

 

고대도 앞 바다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와 고대도(古代島)

 

귀츨라프는 1832년 한국에 최초로 온 개신교 선교사로 보령군 소재 고대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며 복음을 전한 독일 출신 루터교 목사이다.  현재 보령군 통계에 따르면 고대도는 1백여 가구, 주민 4백여명. 면적 26만평. 가구당 월평균소득 3백여만원으로 봄에는 새우잡이, 가을에는 멸치잡이 등이 주업이다. 국민학교 보건지소 각 1곳, 10년전 낙도선교회의 주선으로 곽길보 목사가 개척한 고대도교회(지금은 이인환목사 시무)가 있다.

1832년7월23일, 이 섬 앞바다에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천t급 군함 로드 암허스트호가 나 타났다. 영국과의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고 그 지방 관민(官民)의 통상에 관한 관심을 살필 목적으로 중국 연안을 거처 한국까지 온 이 배에는 독일 출신의 영국선교사 귀츨라프가 통역 겸 선의(船醫)로 동승하고 있었다. 숭실대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그가 남긴 암허스트호 항해기(영문)가 있다. 조선 서해안 기사는 극히 적은 부분이지만 그의 조선에 대한 유별난 관심을 엿볼수 있다. 여기서 그는 조선의 첫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나라의 토지는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지만 주민은 얼마없고 개발도 안되었다…그만큼 밉살스런 쇄국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는데…"당시 조선은 순조(純祖·재위 800~34) 통치 말년으로 가톨릭 교도들이 수십년간 엄청난 박해를 받고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세도를 부릴 때였다. 정치는 문란해지고 민생 이 도탄에 빠져 각종 참설(讖說)이 유행하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항해기에도 "이 왕국은 자체적으로 독립하여 통치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나 조공을 바치며 중국에 복종하여 왔다. 중국은 이 나라의 여러 파벌싸움을 조장하였고 이로써 이 왕국은 미개 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고대도에 정박한 귀츨라프 일행은 홍주목의 관리인듯한 지방관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하여 국왕에게 통상소원 서한과 유리그릇 옥양모 모직물 등 선물을 보냈다. 이 선물 중엔 성서 한질과 전도문서 등도 들어 있었다.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 사람들과 접촉했다. 배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전도문서를 나누어주기도 했고 지방관리들의 식사초대를 받기도 했다. 감자심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주민들은 국법에 어긋난다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피부과 안과 전문의사였던 귀출라프는 주민들에게 약도 나누어주고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전도문서를 곁들여 복음서를 주었는데 관리들은 이를 금지시켰다. 이를 두고 귀츨라프는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 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리라' 적고 있 다. 또 그는 주민들에 대해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이를 좋아한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걸 질투하리만치 편협하지는 않은 것 같다'며 '겉으로 보기에는 냉담한 것 같으나 이는 정부의 강요 때문이며 일대일로 대할 땐 누구나 인정스럽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츨라프 일행이 천주교 신자로 추정되는 '양이'라는 사람과 만난 일화가 당시 상황을 단 적으로 보여준다. 양이는 그들에게 한글 자모를 써주었고 귀츨라프는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어 그것을 한글로 베끼게 했는데 양이가 베끼면서 자꾸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한 것으로 보아 관헌에게 발각되면 목이 달아난다는 암시인 듯 했다. 이 때 천주교 신자들은 귀츨라프 일행에게 어느 나라에서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여러번 물었다. 천주교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충청도 해안에 개신교 선교사가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빛을 갈망했던 우리 선조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엿보인다. 8월초 한양에서 회신이 올 때가 임박하자 귀츨라프 일행에 대한 관리들의 태도는 점차 굳어져 갔다. 8월9일 , 한양에서 내려온 특사는 서한과 선물을 도로 돌려주며 중국 황제의 허락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귀츨라프 등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관리들로 부터 약속받은 식량 등을 공급받은 후 결국 이 미지의 나라 조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한달 남짓한 귀츨라프의 복음사역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귀츨라프의 한국사역은 가시적 성과는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한 땅에 복음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는 그의 믿음은 오늘날 바로 1천만 한국 기독교인의 믿음의 뿌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암허스트호의 조선방문 목적에서 볼 때 한 개인으로서의 귀츨라프는 본의 아니게 서구의 동양침략 전위 역할을 일부 감당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 귀츨라프가 아닌 복음사역자로서의 귀츨라프의 염원은 오늘날 여전히 귀 기울여 볼만하다.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 야 말 것이다. …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초의 내한 개신교 선교사인 귀츨라프 목사가 방한한 지 150년이 되는 1982년 7월 17일 이를 기념하여, 고대도(古代島)가 아닌 바로 건너편에 있는 원산도(元山島) 남쪽 해수욕장 동편 언덕에 역사적인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분명한 고증이 안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귀츨라프의 고대도 선교와 원산도 기념비의 비판적 고증 을 참조 바랍니다.

 

한국서해안항해기, 바실 홀, 1818,  최초로 한국에 성경을 전해준 영국 리라호 함장 바실 홀의 한국 서해안 항해기

 

장원량우상론, 밀른 저, 마펫 역,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두 친구(장씨, 원씨)의 신앙문답 형식으로

해설한 전도서

 

 

하멜 표류기, 1718년 하멜 저, 숭실대 박물관

 

하멜 육필 보고서, 제주 하멜기념관

 

 

 

하멜표류기는 네덜란드인 H.하멜이 썼다.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라고도 한다. 한국의 사정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1668년에 네델란드어 ·영역본(英譯本) ·불역본(佛譯本) ·독역본(獨譯本)이 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1971년 영국왕립협회 한국지부에서 G.레드야드의 영역본을 발간한 바 있으며, “진단학보” 1∼3권에 이병도(李丙燾)가 영 ·불역본에서 번역 ·전재하였다.  이 하멜표류기 육필 원고는 1920년 네덜란드 학자 회딩크에 의해 발견됐으며 그때까지 출간된 많은 하멜표류기의 오류를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내용을 약설하면, 하멜이 탄 네델란드 스페르웨르호(號)가 1653년(효종 4) 1월에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같은 해 6월 바타비아(Batavia), 7월 타이완[臺灣]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항해하던 중 폭풍우에 밀려 8월 중순 제주도 부근에서 파선을 당하였다. 선원 64명 중 28명은 익사하고, 하멜 이하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하여 관원에게 체포된 경위와 1653년~1666년(현종 7)의 14년간을 여기저기 끌려다닌 생활, 즉 군역(軍役) ·감금 ·태형(笞刑) ·유형 ·구걸의 풍상을 겪으며 모든 사람과 접촉하고 남북 여러 곳의 풍속과 사정을 견문한 결과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특히 부록인 《조선국기(朝鮮國記)》에는 한국의 지리 ·풍토 ·산물 ·경치 ·군사 ·법속(法俗) ·교육 ·무역 등에 대하여 실제로 저자의 보고 들은 바가 기록되어 있다. 하멜과 그 일행은 제주도에 표착한 다음 해인 1654년 5월에 서울로 호송되었다가 2년 후에는 전라도 지방으로 분산 이송되었다. 1666년 9월 하멜 이하 8명은 야음을 타서 읍성(邑城)을 탈출, 해변에 있는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1668년 7월에 귀국하였다. 이 책은 한국의 존재를 유럽인에게 뚜렷하게 알렸을 뿐 아니라, 당시 한국의 사회실정 ·풍속 ·생활 등을 아는 데에도 귀중한 사료가 된다. 내용 중 한국을 소개한 부분을 보면  “ 이 나라를 저희들은 코레, 그들은 조선이라 부르며 북위 34도 반에서 44도 사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북의 길이는 대강 140~150 마일, 동서의 폭은 약 70~75 마일이며 그들은 나뭇잎 모양으로 자기들 국토를 그립니다. 그 나라 해안은 들쭉날쭉 돌출부가 많습니다. 국토는 여덞 개도( 道 )와 360개 도읍으로 나눠지고 그 밖에 산에는 성채, 해안에는 진( 鎭 )이 있습니다. 또 이 나라 바다는 암초와 얕은 곳이 많아 지리를 모르는 사람이 항해하기는 매우 위험합니다. 이 나라에는 인구가 많고 풍년일 때는 자급자족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쌀과 곡식 그리고 목화가 많이 재배되는바 특히 남부가 그렇습니다. 이 나라의 동남쪽에는 일본이 있는데, 제일 가까운 곳, 즉 부산에서 대판( 大阪, 현 오사카 )까지는 약 25~26 마일이고 그 중간에 쓰시마 즉 그들이 대마도( 對馬島 )라 부르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처음에 조선에 속해 있었으나 그 옛날의 전쟁시 조약으로 일본땅이 되고 조선은 그 대신 제주도를 얻었다 합니다. 서쪽으로는 중국, 죽 남경만( 南京灣 )이 있고 북으로는 아주 높은 산으로 하여 중국의 제일 북쪽의 주( 州, 만주 )와 련결돼 있습니다. 북쪽만 제외하면 이 나라는 섬이라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이 나라 동북쪽도 �은 바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바다에서는 매년 화란( 네덜란드 ) 인이나 그 밖의 구라파( 유럽 ) 인들의 작살에 찔린 고래가 몇 마리씩 발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