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지에서의 칼빈과 개혁신학의 위치

2010. 4. 21. 14:18운영자자료/종교개혁지 순례

유럽 종교개혁지에서의 칼빈과 개혁신학의 위치

 

 

박종원

 

 

오늘날 한국에서의 장로교와 개혁신학의 위치는 결코 작지 않다. 장로교가 여러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장로교는 교파는 여전히 개신교 가운데 가장 큰 교세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칼빈의 발자취를 따르는 금번 종교개혁지 탐방을 통해서 바라본 유럽에서의 칼빈과 개혁신학의 위치는 생각보다 영향력 있지 않을뿐더러 나아가 좋지 못한 평가가 대다수였다.

칼빈의 고국인 프랑스는 이미 가톨릭이 국가의 90%를 점유하고 있을뿐더러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위그노의 후손들을 향한 국가의 시선이 곱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칼빈 종교개혁의 본고장이었던 스위스 역시 대다수의 연방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있음은 유럽에서 칼빈과 개혁신학의 현 위치를 잘 방증해 주고 있다.

탐방 도중 만나게 되었던 스위스 취리히 한인 감리교회인 사랑의 교회 목사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목사님께서는 유럽 현지에서 칼빈과 개혁신학이 끼치는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을뿐더러 본인을 비롯한 현지 여러 목사님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개혁신학이 참되고 바른 신학이 아닌 단순히 과거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나간 신학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나아가 오늘날 개혁파와 알미니안과 웨슬리안을 놓고 논쟁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보고 있었으며, 개혁신학자 속에 칼 바르트를 포함시켜, 개혁신학과 신정통주의가 아닌 정통주의로 묶어서 보는 것이 오늘날 유럽의 일반적인 시각이라고 했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어거스틴, 칼빈으로 이어지는 개혁신학을 현대에 맞게 더욱 발전시킨 학자가 칼 바르트라는 것이었다. 칼 바르트가 바라보는 성경관과 역사관, 기독론 등 그의 신학이 개혁신학과는 엄밀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르트의 신학을 좀 더 깊이 있게 알지 못했던 우리들은 좀 더 논증적으로 이를 반박할 수 없었음에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물론 타교단의 목사님이셨기에 어느 정도 편향된 주장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편으로는 개혁신학을 바라보는 더욱 객관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 역시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계승하여, 성경을 통해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함을 외치는 개혁신학이 바른 신학이며, 성경을 바라보는 정확한 안경이 되는 것임은 틀림이 없지만, 이러한 개혁신학이 우리 안에만 머무른다면 그 찬란한 빛이 조금은 빛을 바래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을 배워감에 있어 바른 신학을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것은 가장 기본적일 것일 뿐, 더 나아가 성경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들을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하며 알아가야 하는 것 역시 너무나도 중요한 것임을 깊이 생각해 본다.

여행 도중에는 이러한 주장들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탐방 첫째 날 우리는 칼빈의 생가를 방문하기 위해 파리에서 북쪽으로 120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노용(Noyon)이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 잔뜩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칼빈의 생가는 생각보다 허술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건물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도 더욱 세심하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유럽 곳곳에 있는 종교개혁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는 종교개혁지를 진심을 다해 기념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타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7일간 물심양면으로 우리의 탐방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본교 선배 목사님이신 박용관 목사님께서는 유럽, 특별히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는 장로교가 단순히 교세가 약한 것을 떠나 이단적인 취급을 받고 있다고까지 말씀하셨는데, 이는 칼빈이 3년간 사역했던 스트라스부르크의 “성 니콜라스 교회”를 방문했을 때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성 니콜라스교회를 찾아가는 길은 굉장히 어려웠다. 유럽 전 지역에 성 니콜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는 무수했지만,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이 사역한 교회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서의 준비기간 동안에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현지인들조차 칼빈이 사역한 교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교회를 찾아낸 우리들은 교회 내부로 향했다. 교회 내부의 벽면은 성화를 지운 거친 흔적이 역력했고, 말씀의 권위를 상징하는 높은 설교대가 있어 칼빈이 사역했던 흔적과 종교개혁의 작은 노력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지만 높은 설교대가 한쪽 구석으로 아무렇게나 치워진 채 예배가 드려지는 현실은 박용관 목사님의 말씀을 증명해 주기에 충분했다. 잠시 후 현재 성 니콜라스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연로한 목사님을 만나 뵈었지만, 목사님은 본 교회가 칼빈이 사역한 교회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더욱이 칼빈이 누구인지 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짙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여행의 막바지에 방문했던 스위스 제네바에서도 역시 칼빈의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현지 목사님께서는 16세기 칼빈의 성시화로 인해 억압받던 시민들이 개혁의 시기가 지나면서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스위스의 타 도시보다도 더욱 향락적이고, 세속적인 도시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러한 주장이 객관적인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칼빈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이처럼 유럽의 개신교는 오늘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한 채 급속도로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그와 같은 절차를 밝아가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언약을 믿는 개혁신학이 무너짐에 나타나는 현상이리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유럽 교회의 역사적인 행보를 교훈 삼아 개혁신학이 우리의 머리와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죽은 신학이 아니라 실천하는 바른 신학이 되어 이를 통해 한국의 교회가 개혁되고 회복되며 나아가 다시금 세계의 공교회를 개혁하는 역동적이고 생동적인 살아있는 신학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 개혁신학을 더욱 확고히 정립하되, 그것에서 안주하지 않고, 이를 통해 건전한 교회의 부흥이 있기를 기도하며, 현시대의 요구와 사회적인 문제에도 귀 기울여 바른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신학적 오류들과 이단들로부터 진리를 방어하기 위한 반동으로 이루어진 정통이 정통이 되지 못하고 무너졌을 때, 교회가 무너졌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교회 역시, 이름만 바꾼 채, 다시금 교활하게 교회를 공격하고 있는 역사적 이단들로부터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개혁신학이 더욱 확고히 서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개혁신학을 공부하는 우리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사명감의 무게를 감사함으로 지고, B.B. 워필드가 말했듯이 성경을 그야말로 하나님 말씀으로 바라보는 개혁신학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임을 전파하기에 열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번 종교개혁지 탐방을 통해 종교개혁자들의 숨결을 체험하고, 현장을 마음에 담아 좀 더 입체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지만, 언어적인 문제로 좀 더 풍부한 정보와 지식을 담아올 수 없었던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렵게 주어진 기회이니 만큼 많은 것들을 원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 가득했으나 부족함이 가득 남은 탐방이 된 점 너무나도 죄송스럽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칼빈과 개혁신학의 위치를 통해 개혁신학이 무너져 감에 따라 다가올 앞으로의 한국교회의 위기의식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음에 위안을 삼으며,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을 통해 귀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열정 전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