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마틴루터 종교개혁지 순례에 다녀와서

2010. 4. 21. 13:48운영자자료/종교개혁지 순례

마틴루터 종교개혁지 순례에 다녀와서

“하나님, 여기 내가 섰습니다.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es, Gott helfe mir, Amen.").
이 말은 신성 로마 제국재판(Reichtag zu Worms)에서 칼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의 부르짖음이다.

뒤셀도르프한인교회 교우 36명은 성인교육부(부장:박(Sohr)춘실,이(Pawlak)강림 권사)주관으로 작년에 이어 구동독지역의 여러 루터의 도시(Lutherstaedten)를 돌아보는 3일 간의 순례일정을 가졌다.
부족한 경험이나마 정리하여 소개한다.

순례단 일행은 첫날 새벽 버스를 이용, 아이스레벤으로 이동하면서 루터의 처음과 마지막 사용했던 침대와 그의 동상을 보면서 본격적인 루터에 관한 탐방일정에 들어갔다.
루터는 1484년 11월 10일 인구 4천에 달하는 평범한 농촌도시인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더(Hans Luder)는 원래 농부였으나 세상에서 행운을 잡기 위해 의지적으로 광부가 되었다. 광부생활 7년 만에 만스펠트(Mansfeld)의 번성하는 구리 광산의 소유주가 되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 이어서 그곳의 시의원이 되는 명예를 누리게도 되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아들 또한 자신처럼 출세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결심을 하면서
루터를 만스펠트의 라틴어 학교에 보내 문법과 논리학 그리고 수사학의 기초를 교육받게 한다.
루터는 그 당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라틴어 문법을 암기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루터의 집' 교실의 모습에서 넘어져 있는 이름표가 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비텐베르그(Wittenberg)로 옮겨 종교개혁의 불을 당긴 슐로쓰성당(Schlosskirche)을 찾았다.
95개조 반박문이 동판으로 부착된 모습이 그 당시의 치열했던 모습들을 짐작하게 했다.
1505년 여름 만스펠트에 있던 부모 집을 방문하고 에어푸르트(Erfurt)로 다시 되돌아가던 중,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 현재 에어푸르트시 외곽)마을 부근에서 무섭게 몰아닥친 천둥소리에 놀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루터는 성모마리아를 찾으며, "도와주소서, 성 안나여! 살려주신다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Heilige Anna, hilf !, Laesst Du mich leben,so will ich ein Moench werden.")

라고 서원한다. 그는 왜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수도사가 되겠다는 비장한 서원을 했을까?

루터는 구원에 대한 불확실하고 불안한 심정을 이렇게 표출한 것일까? 그런 궁금증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체 남아 있다.


장차 법관이 되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이 맹세를 이행하기 위해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그가 22살 되던 해인 1505년 7윌 17일 성경연구와 고행주의로 이름난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회’에 들어간다. 이 수도원은 일명 “검은 수도원”이라고도 부르는데 검정 옷을 입은 수도사들이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간 지 2년도 채 못 되어 사제 안수를 받고 첫 번째 미사를 집례하기에 이른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박사가 된 루터는 스승이며 어거스틴회 수도원장이자, 비텐베르크 주교인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신학 교수직을 이어받는다.

그는 그곳에서 시편강의(1513-15), 로마서 강의(1515-16), 갈라디아서 강의(1516-17), 히브리서 강의(1517-18), 그리고 다시 시편 강의(1518-21)를 하였다. 강의를 하는 동안 루터에게는 새 빛이 비추어졌다. 그 새 빛은 루터가 그렇게도 고민하던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발견케 했으며 개혁의 당위성을 키워나가게 했다.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대사(大赦,소위 면죄부)였다. 1513년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100년 이상을 끌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비 마련을 위해 대사(大赦)를 반포하고, 대사부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대사 설교를 실시하였는데,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를 면죄부로 착각하여 남용하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이 문제에 비판적인 자신의 견해를 95개조로 낱낱이 써서 발표하였고,

로마 교황이 파견한 특사 요한 에크(Johann Maier von Eck)와 논쟁한다.

루터는 에크와의 논쟁에서 ‘교황권과 공의회가 한점 오류도 없다’는 "교황무류성"을 거부한다.


루터는 하나님의 구원은 성례전이나 순례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면죄부를 통해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구원을 주는 새 빛은 다름 아닌 "오직 신앙만으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으로"를 주장하면서 구원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번 종교 개혁지 순례를 통해서 우리 교우들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외형적인 화려함과 당시 신앙의 여러 형태와 모습들을 목격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모든 지위와 명예, 목숨까지도 내어 놓고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마틴 루터. 그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역사의 현장들을 탐방하면서 필자는 깊이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날마다 개혁되어져야만 바람직한 교인의 또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나 자신을 개혁하면서부터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의 모습으로 갱신되어 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참가자들은 김재완 담임목사가 준비한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이라는 자료를 숙독하고 순례에 참여함으로서 더 큰 감동과 은혜와 체험이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글:나복찬

 

---------------------------아래는 김목사의 자료 ----------------

독일라인란드지방 뒤셀도르프한인교회                                              2009년 4월 23-25일 종교개혁유적지순례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

 

= 출생과 성장기 그리고 학업 =

1483년 11월 10일 Eisleben의 광부집안에서 출생. (부: Hans Luder, 모: Margarethe)

1484년                      Mansfeld로 이사하면서, 아버지 집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짐. 부친은 아들을 장차 법관으로 키우고자 Mansfeld, Magdeburg, Eisenach에서 공부시킴.

1501년                      Erfurt 대학 입학

1505년                       문학석사 (Magister Artium)로 졸업

 

= 사제의 삶 =

1505년 07월 02일   Mansfeld의 부모집을 방문하고 Erfurt로 돌아오는 길에, Stotternheim (현재 Erfurt 시에 속한 Stadtteil)에서 강력한 벼락을 동반한 폭우를 만나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성모 마리아를 찾으며 이렇게 기도함: "Heilige Anna, hilf! Lässt Du mich leben, so will ich ein Mönch werden."

1505년 07월 17일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Erfurt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회에 수도사로 입문함. 그곳에서 스승 Johann von Staupitz를 만남.

1507년 02월 17일       사제로 안수 받음.

1508년                           스승의 추천과 권유로 Wittenberg 대학에서 신학 전공.

1509년                           신학과정을 마치고, Erfurt로 돌아옴.

1510년 11월 – 1511년 4월                 수도회 일로 로마 방문.

1512년              Johann von Staupitz 후임으로 Wittenberg 대학 신학부 교수가 됨.

1513년-1515년              시편 강의

1516년 말까지 로마서 강의. 그 다음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디도서를 강의함.

 

= 종교개혁을 향한 걸음 =

1517년 10월 31일      95개 신학테제를 Wittenberg의 Schlosskirche 정문에 붙임.

·         배경: 100년 이상 진행하였으나, 아직도 완공하지 못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무리할 수 있는 공사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교황 Leo X.가 1506년부터 면죄부(Ablassbriefe)를 판매하기 시작함.

·         독일에서 Mainz의 대주교 Albrecht가 면죄부 판매하는 설교가를 파견하면서, 각 교구에서 그들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교서를 보냄.

·         Albrecht 대주교가 Sachsen지방에 면죄부를 판매하는 설교자로 Johann Tetzel이라는 사제를 파송함.

·         Tetzel 일행이 Wittenberg를 향해 오고 있을 때, 루터는 마침 병중에 있는 목사를 대신해서 Wittenberg 교회 설교와 목회를 맡고 있었음. 루터는 면죄부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며, Tetzel 일행이 성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설교함.

·         복음의 본질에 역행하고, 돈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터무니 없는 거짓말로 선량하고 무지한 민중들의 재산을 뺏아가려는 Tetzel 일행을 겨냥하여 95개조의 신학테제를 교회 문에 걸게 된 것임.

·         선제후 Friedrich III.가 루터를 지지하였음.

 

=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재판 (der römische Prozess)

1518년 초                  Mainz의 대주교 Albrecht와 도미니칸수도회가 루터를 로마에 고발함.

1518년 04월             교황은 이 일을 수도회 내부의 일로 간주하고, 4월 Heidelberg에서 열리는 수도사 회의로 루터를 호출함.

1518년 06월            교황 Leo X.는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는 소환장을 발부함과 동시에, 도미니칸 수도회를 통해, 루터가 쓴 책들을 검열하여 그의 입장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요청함. 하지만 선제후 Friedrich III.가 나서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정치력을 동원하여, 루터를 소환할 장소를 로마에서 Augsburg로 수정하게 함.

1518년 10월 20일   Augsburg로 소환된 루터가 그의 심문관으로 지명된 추기경 Thomas Vio에게 조사받음. – Vio 추기경은 루터에게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비판한 것을 모두 철회하라고 강요함. 루터는 교회의 권위는 인정하지만, 면죄부에 대한 입장은 양보할 수 없으며, 그 회의를 무효로 선언한 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야반도주함.

·         그 이후에 황제  Maximilian (1519년 1월에 서거)의 최후가 가까워 오자, 온 유럽이 후임 황제 선출에 관심을 집중. 교황은 자신의 입장에서 Friedrich가 황제로 선출되기를 원함. 그래서 그에게 호의를 표하기 위해서 루터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함. 

·         그로 인해 루터는 시간을 벌게 됨.

1518년                  이 무렵 Philip Melanchton (1497-1560) Wittenberg 대학 그리스어 교수로 취임함. 그는 당대 가장 유명한 인문학자  Johann Reuchlin의 증손자로, 앞으로 루터에게 매우 중요한 조력자가 된다.

1519년 06-07월        Leipzig에서 루터 문제를 두고 공개적인 신학 논쟁이 벌어짐

·         발단: 처음에는 Johann Maier von Eck라는 사람이 루터의 옹호자였던 Andreas von Karlstadt와 논쟁을 벌이면서 촉발. Eck가 Karlstadt에게 공개적인 변론을 제안하게 된 것임.

·         처음에는 Karlstadt와 Eck의 논쟁이었지만, K.는 변론가가 아니라 그리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루터가 나서서 Eck와 직접 논쟁을 벌이면서, 격렬해지게 되었다.

·         Eck는 루터를 유도하여, 100년 전에 공의회(Konzil)를 통해 John Huss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화형시킨 일(1414년)을 오류라고 공언하게 함. Eck는 공의회의 무오류를 부정하는 자는 모두 이단이며, 죄인이라고 선언하며, 자신이 루터에 대해 법적인 승리를 얻었다고 여김.

·         이것은 루터에게 치명적인 사건. 즉 그는 공개적으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였고, 종교회의의 무오류를 거부한 것이기에. 루터는 내면적으로 중세기의 모든 권위 구조를 버리고, 오직 성서의 권위만 인정하려 하였음.

·         결국 Eck는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 내용을 로마에 보고함.

1520년 06월 15일   로마 교황이 루터에게 파면장을 내림.

·         그런데 이 파문장이 12월에야 Wittenberg에 도착함. Wittenberg에서는 그 파문장의 공포를 거부함.

1520년 12월 10일   루터가 학생들과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의 파문장을 불태움. 정부는 지켜보기만 함.

·         네델란드 출신의 교황사절이었던 Girolamo Aleandro가 네델란드에서 그 파문장을 공표하고, 루터의 모든 서적들을 불태운 것에 대한 대응.

 

1520년                  이 한 해에 출판된 매우 중요한 루터의 글들:

                                    1) Von den guten Werken (선행에 대하여)

                                    2) 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 (독일 귀족들에게 고함)

                                    3) Babylonische Gefangenschaft der Kirche (교회의 바벨론 포로)

                                    4)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1519년 06월 28일   Maximilian의 손자 Karl V.가 21세의 나이로 후임 황제에 선출됨.

1521년 01월 02일      교황이 루터에 대해 2차로 최후 파면장을 내림.

·         교황의 사절 Aleandro가 교회의 최후 파면장이 내려진 이상, 의회에 서 루터를 불러 다시 심문할 필요 없이, 바로 처형할 것을 주문함.

·         선제후 Friedrich 3세가 루터를 처형하기 전에, 의회가 그를 한번 더 심문하고, 본인에게 의회 앞에서 자기를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황제에게 청원함. 

·         황제는 두 편의 정반대 입장 사이에서 저울질함.

 

= 제국의 재판 (Reichstag zu Worms) =

1521년 04월 17일 황제의 명령으로 Worms에서 열리는 의회에 출두함.

·         황제가 신변안전을 보장하는 친서를 주었지만, 루터의 지인들은 모두 그의 신변을 걱정하였고, 루터도 죽음을 각오함.

·         루터가 Worms로 떠나면서, 그의 제자였던 Melanchton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함: "형제여, 내가 만일 돌아오지 못하면, 만일 내 원수들이 나를 죽이게 되면, 그대는 진리에 굳게 서서 끝까지 진리를 가르치라. 만일 그대가 살아 있다면, 나의 죽음 같은 것은 걱정할 것도 없다."

·         그리고 그를 배웅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함:  "비록 궁전의 기와장 같이 많은 원수들이 나를 가로 막을지라도, 나는 꼭 보름스까지 가고야 말 것이다."

·         루터는 4월 16일 동행하는 친구 몇 명과 함께 앞 뒤로 구름같은 군중들의 호위를 받으며 Worm에 도착.

·         St. Johannes Kirche에 속한 Gemeindehaus에서 투숙.

·         4월 17일 16시 회의장에 들어갈때, 암살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다른 길로 돌아서 감. 그 때 궁전 앞 뜰에서 기다리던 군중들이 루터를 격려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함: "남자답게 맞서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죽일 수 있는 것은 몸 뿐이다! 영생이 있는 것을 잊지 말아라!"

·         루터가 황제가 배석한 의회 앞에 서자, Eck가 황제를 대신하여 그를 소환한 이유를 설명하며, 책상 위에 올려진 책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는 이 책들을 포기할 것이냐, 고집할 것이냐?"

·         루터의 답변: 자신이 격렬한 논쟁으로 남의 감정을 상한 표현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은 성서에 의해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얻기 전에는 절대로 철회할 수 없다.

·         황제는 공의회의 권위와 완전성을 부정하는 무례한이라고 루터를 비난하며, 그 자리에게 논의를 중단시킴.

·         그 때 루터가 한 유명한 말: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

·         회의결과: 황제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비타협적이 되면서, 결국 회의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결렬됨.

·         하지만 황제는 공개적으로 루터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그의 서적을 불태우도록 명령을 내림.

 

= Wartburg 성에서 은거 =

1521년 04월 26일 선제후 Friedrich 4세가 루터를 은밀하게 빼돌려, Wartburg 성에 피신시킴. 1522년 3월 1일까지 거주.

1522년 09월             신약성서 번역 완료 (그 전 해 12월에 시작하여 10개월 만에)

1522년 03월 06일   Wartburg에서의 은둔생활을 마치고 Wittenberg로 돌아옴.

 

                                    * 루터가 없는 동안 Wittenberg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종교개혁운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는데, Andreas Karstadt와 Gabriel Zwilling이 주도하면서 매우 과격한 경향을 띠게 된다. 

                                    * Die Zwickauer Propheten 3인(Nikolaus Storch, Thomas Dreschel, Markus Stübner)이 1521년 12월 27일에 Wittenberg에 도착하여 큰 소동을 일으킴: 이들은 신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며, 세상의 종말을 주장함. 멜랑히톤도 잠시 이들에게 빠짐.

 

= Wittenberg에서 종교개혁 주도 & 종교개혁 세력의 분열 =

 

                                    * 루터에 대립하였던 종교개혁 세력들

                                1) Andreas Karstadt (1480-1541)

                                2) Thomas Münzer (1488-1525)

                                3) Huldreich Zwingli (1484-1531)

 

1523년                       농민전쟁 시작

1525년 03월            농민들이 12개 조항 선언을 발표

1525년 02월 24일 농민전쟁 끝

 

= 종교개혁 운동의 수습 =

1529년 02월            Speyer에서 열린 의회에서 카톨릭 세력과 약화된 종교개혁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의회 다수의 결의로 루터파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됨. 여기에서 소수의 루터파 영주들이 1529년 04월 19일에 정식 항의서(Protestatio)를 제출하였는데, 거기에서 개신교(Protestant)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됨.

1529년 10월 01 - 11월 05일   

                                    Philip I. von Hessen이 분열된 종교개혁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인 Marburg 성에서 회의를 개최. 거기에서 마틴 루터와 Zwingli가 성만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함. 함께 토의한 15개 의제 가운데 14개 의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았지만, 결국 성만찬 문제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해 분열하게 됨. 성만찬에 관하여 루터는 공존설(Konsubstantiationslehre)을 주장하였고, 쯔빙글리는 상징설을 주장함.

1530년 06월 25일 Karl V.가 제국 내에 일고 있는 신앙으로 인한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Augsburg에 의회를 소집함. 하지만 황제는 로마 카톨릭 세력을 지지하는 편에 있었음. 이 회의에서 Melanchton이 개신교의 신앙적인 입장을 정리한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er Bekenntnis)을 독일어로 황제 앞에서 낭독함. 멜랑크톤이 비교적 온건한 입장에서 로마 카톨릭 측과의 화해를 염두에 두고 작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이 신앙고백문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여, 개신교측이 반발함.

1531년 2월              이에 개신교측이 Schmalkaden에 모여 동맹을 결의함. 이것이 그 유명한 슈말카덴 동맹(Schmalkadischer Bund)이며, 결국 개신교측과 카톨릭측이 정치무대에서 대결하는 계기가 됨. 이 갈등이 결국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손꼽히는 30년 전쟁(1618-1648년)으로까지 발전하게 됨.

 

= 마틴 루터의 여생 =

1525년 06월 13일 수녀 출신 Katharina von Bora와 결혼.

1546년 02월 18일   Eisleben에서 운명.

                                    루터의 무덤: Wittenberger Schlosskirche.

 

 

 

출처 : familyna
글쓴이 : 거들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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