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종교개혁 영웅 얀 후스 지지파의 최후 항거 군사거점: 체코의 종교개혁지 타보르

2010. 4. 21. 14:17운영자자료/종교개혁지 순례

프라하의 남쪽 약 80km 지점에 위치한 타보르는 15세기에 체코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 운동 (후스운동)의 군사적 거점이었던 도시이다. 1370년경 보헤미아 남부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얀 후스는 까를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카톨릭의 사제가 되었다. 그후 카를대학에서 철학을 가르키다가 1409년에는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사제로서 베들레헴 교회에서 체코어로 설교를 하였는데 당시는 프라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어가 공용어였다. 그래서 그의 체코어 설교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하여 민족주의적 공기가 팽배하던 체코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카톨릭 교회의 세속화와 교회의 면죄부 판매등을 맹렬히 비판하였단 이유로 로마 교회의 노여움을 사서 1415년에 화형당한다. 또한 로마 교회는 민족운동의 색채를 띄기 시작한 얀 후스의 지지자 집단인 후스파 탄압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에 후스파는 격렬하게 저항을 하였다. 얀 후스가 화형당한 사실에 분노한 체코 민중과 얀 후스에게 호의를 품고 있던 귀족 계급은 이윽고 1419730일 시청사에 모여 카톨릭 의원 7명을 창에서 떨어뜨려 살해를 하는데 이 사건이 후스 전쟁의 발단이 된다. 후스전쟁을 지휘한 사람은 애꾸눈의 영웅 얀 지줵이다. 그는 1410부터 얀 후스의 지지자가 되었으며, 후스의 죽음 후 지지자들을 모아서 군사 공동체를 만드는 한편 공화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들의 활동 중심지가 바로 타보르였던 연유로 그들은 타보르파로 불리기도 했다.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성장한 타보르 파에 대항하여 당시의 로마 황제 지그문트는 5회에 걸쳐서 십자군을 파견하였으나 매번 패배하게 되자 결국에는 화해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한때 승리를 쟁취한 후스파였지만 1620년 프라하 교외의 빌라호라 전투에서 합스부르크가의 군대에게 패배하여 보헤미아 전역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한편 타보르는 그 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쉽도록 도로가 가늘고 구불구불하게 놓여져 있다.
l 볼거리 l
l 코토노프성(Kotonov Hrad)
이 성은 지지코브 광장이 끝나는 곳에 이르러 아담한 규모로 서있다. 지지코브광장에서 성까지는 약 300m의 내리막 길이다. 성이나 탑의 건물은 오랜 세월 동안 풍화가 진행되어 보수공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현재 탑과 성의 일부가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개방되고 있다. 후스 운동이 한창이던 15세기경의 서민들의 생활모습을 전시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다.
l 후스 운동 박물관(구시청사)
지지코프 광장의 서쪽에 있는 박물관은 초기 르네상스 양식을 이용한 아름다운 건축물로 1521년에 완성되었다. 건물 내부는 후스 운동 박물관으로서 일반에게 공개되어 후스파의 활동 및 후스 전쟁에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거리에는 지하도가 그물처럼 펼쳐져 있는데 파악된 길이만 해도 약 12km에 이른다. 장소에 따라서는 2~3층으로 되어 깊이가 8~15m에 이르는 지하도도 있다고 한다. 원래는 와인이나 맥주 양조장으로 이용되던 곳이었으나 식량 저장에도 이용되고 하였다. 구시가지의 건물이나 거리 곳곳에 지하도의 출입구가 있으나 현재 후스 운동 박물관의 입구 옆에서 성 에리제베트교회 정면으로 나오는 코스가 공개되어 있다. 사고를 막기 위해 정원을 한정하며 가이드가 안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