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18. 02:01ㆍ목양자료/6.교회행사 자료
성찬설교 모음(초교파 목회자)
성찬에 참예할 자-고전11:23-32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고린도전서 11:23~32)
현대 교회에서는 목사 안수식, 장로 임직식, 성전기공식, 성전 입당식 등 많은 예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식을 성례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성례전은 세례식과 성찬식을 가르킵니다. 침례식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는 온 몸을 완전히 물에 담갔다가 물속에서 나오는 의식을 통해 옛사람은 완전히 장사지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되었음을 증거해 줍니다. 이와 같은 성찬식과 세례식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시고 지키라 명령하신 예식이기 때문에 오늘날도 그 의식을 신성하게 여기며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찬에 담긴 의미와 그 속에 담겨진 축복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무의미하게 형식적으로 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찬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올바른 성찬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찬의 기원
첫 번째, 성찬의 기원은 구약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압제자의 강포와 압박으로 인해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모세를 바로에게 보냈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아홉가지 재앙이 내릴 때까지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1년된 흠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기름 뺀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번째 재앙으로 죽음의 사자가 애굽 전역으로 돌게 했습니다. 이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죽음의 재앙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넘어갔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아니하는 집은 임금으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가 죽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가축의 첫번째 난 생축들도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날을 유월절이라 하고 매년 이날을 기념했는데 바로 이 유월절이 오늘날 성만찬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즉 유월절은 신약시대에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기 전 날에 제정하신 성만찬으로 성례화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4절로 25절에 보면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 26절로 28절에 보면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 6장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의 살과 피로 애굽에서 해방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죄악에서 해방되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믿고 참예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찬에 담겨져 있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
오늘 본문 말씀 27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찬에 참예할 때 성찬이 주고 있는 깊은 뜻과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담겨진 축복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무의미하게 아무 감동도 없이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은 신성한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
운 주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기억하면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로 나 때문에 형벌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는 회개하는 심령으로 성찬에 참예해야 합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주셨기 때문에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단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합당하게 참예하여 믿음이 돈독해지고 은혜가 충만하고 더 큰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주의 몸을 분변하고 참예해야 합니다
또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보배로운 피와 살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사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살과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전에 심장병으로 사형선고 받은 사람에게 심장을 이식 시켜 준 사람과 이식 받은 학생이 함께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진에 나타난 그들의 진지하고 평온한 표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형 선고 받아 앞날에 희망도 없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심장을 이식 받아서 사망에서 새 생명을 얻었을 때에 자기에게 심장을 준 사람이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리고 심장을 이식시켜 주는 사람은 심장을 이식받은 그 사람이 오래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의 피를 다 흘려서 그 피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된 우리를 바라보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의 고백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찬을 뗄 때마다 이것은 나를 위하여 살찢고 피흘리신 피라고 하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찬에 참예해야 할 것입니다.
3. 성찬의 축복을 알아야겠습니다.
창세기 14장 13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성찬을 예표한 사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돌라오매라고 하는 포악한 왕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소돔과 고모라를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그들의 제물을 다 약탈했습니다. 그 중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가족이 함께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사병 318명을 이끌고 그돌라오멜을 쫓아가 그들을 섬멸하고 빼았겼던 재물과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때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들고 나와 아브라함에게 먹고 마시게 한 뒤에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옵소서"라고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멜기세덱은 제자상으로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권위있게 축복하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성경 전체를 보면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라고 했는데 히브리서 6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주어 먹게한 후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지만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찢어 우리를 먹고 마시게 하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케 되는 축복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뗀 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우리 심령에 은혜와 기쁨이 넘치며 생활 속의 저주 사슬이 끊겨지고 병든 육체가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성찬 속에 이와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담겨져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때에 그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거룩한 의미와 성스러움을 옳바로 알고 분변된 합당한 심령으로 참예하여 성찬에 담긴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의 의미 본문 고전11:17-34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죤 칼빈(John Calvin), 그리고 쯔빙글리(Zwingli) 등과 함께 종교개혁을 시도하면서 1520년 4가지의 유명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첫 번째 작품은 당시 부패한 천주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특별한 설교를 시리즈로 설교한 것으로서 그것은 1520년 3월에 시작하여 5월 까지 실시한 십계명 설교였습니다.
그후 이 십계명 설교 시리즈는 '선행에 관한 설교'(Sermon von den guten Werken)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그것이 종교개혁을 시도하면서 남긴 첫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종교개혁 두 번째 작품은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이란 것인데 1520년 7월 20일에 급히 완성되어 8월 18일에 출판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은 '크리스챤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란 작품으로서 1520년 10월에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편지에 첨가된 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의 작품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Von babylonischen Gefaengnis der Kirche)이라는 작품으로서 그의 종교개혁 초기에 발표한 십계명 설교인 '선행에 관하여'라는 글은 일반 교인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종교개혁의 메시지이고, 그 다음으로 발표한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은 귀족을 대상으로 한 종교개혁 메시지였으며, 그 다음에 발표한 '크리스챤의 자유'란 글은 정치권을 향한 종교개혁의 메시지였다면, 마지막으로 발표한 이 '교회의 바벨론 감금'이라는 글은 특히 종교계 특히 신학자들과 지식인들을 위하여 라틴어로 쓴 성찬예식에 관한 글로써 1520년 10월에 발표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의 저서 중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신학적인 논문 중의 하나로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말은 교회가 어떤 외부에 감금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가 성례전의 교리(敎理)와 의식(儀式) 밑에 감금당하여 영적인 손상이 초래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 점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로마 교회가 가르치는 성례전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를 7성례(聖禮)를 중심으로 비판하면서 주로 성찬과 세례를 논하였는데, 그 중 성찬과 관련된 사항으로서는 세 가지 과오가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첫째 성찬식을 거행할 때 사제들은 떡과 포도주를 다 먹지만 평신도들에게는 떡만 주고 포도주는 주지 않는 당시의 성찬 제도가 잘못되었고,
둘째 성찬예식을 거행할 때 집례자가 기도를 하고 나면 성찬상 위에 있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이 잘못되었으며,
셋째 성찬예식을 매번 행할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다고 믿고 해석하는 성찬을 '희생'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틴 루터와 죤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 등 개혁자들이 시작한 종교개혁 운동은 결국 구교(舊敎, Roman Catholic Church)와 신교(新敎, Protestant Church)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오늘 이런 말씀을 서두에 드리는가 하면 이 시간 우리가 행하려고 하는 거룩한 성찬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기독교 역사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나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찬이란 거룩한 식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성찬예식은 인간이 만든 작품이 아니라 주님께서 명하셔서 시작된 거룩한 예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예식은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이란 늘 넘어지고 쓰러지는 죄인이지만.... 성찬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영적인 체험을 갖게 하며 또한 성찬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끼리 비록 겉모습은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하나이고 또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할 사람들임을 깨닫게 하는 거룩한 식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는 이러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성찬예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며 인간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단 한번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린 것 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부서지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담이 부서지게 되어...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가?
그러한 논리(論理)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하려고 하면 안되고...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바로 그 때.. 그 믿음 위에... 이해의 역사가 일어나며... 신비한 역사 곧 하나되는 역사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이란 신비스러운 거룩한 식사이며 영적인 식사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이란... 아무리 깊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수양하여도...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고 이웃과도 하나가 될 수 없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하나됨을 위하여 찢기신 그 살을 상징하는 빵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먹고....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 마심으로... 그 조그마한 떡과 잔이... 믿음으로 먹은 그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먼저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이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의 몸을 다 연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신비한 역사가 일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이루는 예수님을 다른 성경에서는 '모퉁이 돌'이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퉁이 돌이란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인 바로 그 곳에 그 기초에 세워지는 돌로서 거기서 부터 서로의 건물 벽을 쌓아가기 때문에 모퉁이 돌이란 건물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까닭에... 건물의 중심이 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요 모퉁이 돌이며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고리이요 모퉁이 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같이 앉아있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렇게 함께 모여 앉아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서로 거룩한 식사인 성찬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도 함께 앉아 있지만,... 서먹서먹한 사람도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함께 앉아 있고
전혀 모르는 사람도 함께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형제자매입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하나로 묶었으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가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셨기 때문에... !!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그분의 그 아름답고 숭고한 십자가 사건을 함께 기억하며... 기념하며... 성찬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24절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린도교회(Church of Corinth)는 그리스의 고린도 지역에 AD 50년 경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교회가 위치하였던 고린도라는 시(city)는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도 매우 번성하는 항구 도시였으며 상업 도시였습니다. 대부분의 대도시나 특히 항구 도시가 그러하듯 이 고린도시도 상거래가 활발하여 재정이 잘 돌아가는 부유한 도시였으며, 거기에다가 각종 문화도 공존하였으며, 특히 그리스의 각종 철학적 종교들과 이방 신전이 즐비한 우상숭배의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금권주의 물량주의 제일주의 혼합주의 분파주의와 이방종교 속에서 빈부격차 등... 좋지 않은 사회적 풍습이 교회 안에까지 파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이 고린도 전후서이며 오늘의 본문도 그 중의 일부분입니다.
교회는 일치(unity)와 하나됨(oneness)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됨과 일치를 반드시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을 말로 가르치고... 몸으로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찬예식을 거행한 것이며 이렇게 실시하기 시작한 성찬예식은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 시대까지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찬예식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에 대하여도 점점 과대하게 의미를 확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이다'라고 하는 이 명제를 놓고 논란하기를 '그렇다, 아니다, 단순한 기념일뿐이다, 상징만이다... 기도하면 영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복잡한 토론과 격론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중세시대까지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이며(요 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6:54) 선언하신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요. 이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성찬예식에서 경계해야 할 두 가지 점은... 떡과 잔을 경시함으로서 성찬예식의 신비를 너무 격하시켜서도 안되며 또한 떡과 잔이라는 것을 과도하게 격상시키고 찬양함으로써 물질을 신비 자체로 만들어가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24절에서도 말씀하시듯이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만 하셨지... 그것에게 '절하라' 하거나 그것에게 '예배하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단론자들은 주장하기를.... "만일 그것이 주님의 몸이라면 몸에는 영혼과 신성이 함께 있으며 몸에서 분리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예배해야 된다"고 하면서 소위 떡과 잔을 과도하게 성별하고 기도하기만 하면 그 후에는 화체(化體)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에 절하거나 경배하며 기도하도록 전시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정말로 잘못되었으며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찬의 바른 의미란 무엇이며 성찬에 바르게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그 후에 기도하는 가운데 참여할 때 놀라운 은혜와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의 복 본문 마26:26-28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은 대단히 정확한 것 같아도 때로는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람을 판단할 때입니다. 우리는 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노부부가 생의 말년에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헌납할 생각으로 명문대인 하버드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총장실에 들어가 총장을 만나려 했지만 총장실 비서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부부를 아주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노부부가 물었습니다. "이런 대학 하나를 설립하려면 얼마나 듭니까?" 그 질문에 비서는 더 업신여기면서 들은 척도 않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두 노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전 재산을 다 털어 대학재단을 세웠습니다. 이 부부가 세운 대학이 그 유명한 스텐포드대학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하버드 대학에서는 매우 아쉬워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 하버드 대학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여러분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람을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를 외몰 취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에 주님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볼 때 어떤 마음으로 보십니까? 하나님은 이 시간 여러분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예배에 참여하는가에 따라서 여러분에게는 복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느냐에 따라서 복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의미없는 행사로만 끝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성찬의 예식이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과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똑 같은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여 아무런 은혜도 주지 못하지만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고 거기에 기념비를 세우라고 지는 않으셨습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날이라고 기념식을 해본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하나 주님과 함께 같이 나누었던 성만찬 예식을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기에 이 일을 지금까지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도 설명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이 의미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1.떡을 떼는 일과 포도주를 나누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2.그 행위에 대한 설명이 중요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눅22:19) 그리고 포도주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막14:24)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성찬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이 왜 복입니까?
1.성찬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15년 전 저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희 가정은 지금까지도 그 날이 되면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식사도 하곤 합니다. 이렇게 추도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날 먹는 음식이 뭔지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니면 예배시간의 길이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분이 일생동안 사실 때 전해주신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게 생명을 전달해 주신 분이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을 때 예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뿐 아니라 목사가 되게하기 까지 늘 배후에서 기도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할 때, 아이를 낳아 키울 때에 늘 잘되기를 바라면서 눈물로 기도하셨던 분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저는 그 날에는 아버지가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생각할 때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없겠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감사한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생각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노르웨이 어느 시골마을 교회 종탑에 어린양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수 많은 조각 가운데 왜 어린양의 조각을 세웠을까요?
그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를 건축할 때 돈이 많이 없어서 건축회사에 의뢰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직접 예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거의 다 지어져 갈 즈음 한 교인에 교회 종탑을 세우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그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적같이 살았습니다. 때마침 그 아래에로 지나던 양떼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죽고 대신 그 사람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상 다 죄인이었고 마땅히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자랑할 이유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가문과 학문 그리고 행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러한 일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살게 한, 새 생명을 얻게 한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를 멸망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신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고,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살아난 인생,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와 감격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그 자체로만 봐도 우리는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서 끝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이 일에 감사해서 늘 성도들에게 인사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평강은 주님이 함께 하심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선물이 가지고 있는 그 액수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분의 마음이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이란 은혜를 선물로, 공짜로 주셨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무엇을 먹일까 고민합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이에게 무엇을 먹여야 튼튼할까를 고민하면서 음식을 가리기까지 합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어떤 우유를 먹일까를 생각하면서 이 회사, 저 회사를 알아보면서 결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크면 어느 학교를 보내야 잘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의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하실 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없으시겠습니까?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이 당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종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만 있으면 이 자리에서 더 높은 자리까지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비록 고난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계획이 있기에 여기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나를, 나 자신이 나를 어떻게 볼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귀하게 보시고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다 되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리고 내게 어떤 것이 복된 것인지를 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생각하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까지 바라보면서 그 안에 소망을 두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2.성찬은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까지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9장에서 시내산에 내려오셔서 20장부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너희를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난 이후에 말씀하신 것은 십계명, 제사의 방법, 종의 규례, 사형의 죄, 손해배상법, 성 도덕법, 사회 정의 복지의 법 등을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백성들은 산에 오르지 못하고 평지에 있었고 장로와 제사장들은 산 위에 까지 올라왔고, 그리고 모세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12지파를 상징하는 돌 기둥을 세우고 청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표시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관계 속에 살려고 하는 결단의 의미로 드렸습니다. 이때 모세는 짐승의 피 절반을 하나님의 단 위에 뿌립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짐승의 피에 나머지 반을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출28: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들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제사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약속을 체결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행했던 것처럼 자신의 피 흘림으로 제자들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고 남은 자들과 새 언약을 세울 것을 렘31:3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여
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바로 그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새 언약의 제사를 드린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새 언약을 세우시는 제사로 보았고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신앙으로 받아 드리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행하질 때는 반드시 그 행위와 함께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씀이 늘 동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시기 위함인데 우리는 과거에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형벌과 죽음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그 죄가 해결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대속, 곧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 들어갈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곧 피흘리신 죄 씻음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가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작업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 사함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실재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구체적인 열매로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와 죽음을 신앙 고백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확인했는데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교회는 규칙적으로 세례와 성찬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예식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비록 성례예식이 행해지고 있더라도 참여하는 자들이 그 예식의 내포된 의미를 모른채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만 바른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례를 시행함으로서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된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이루리라"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놀라운 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의미를 바로 알고 참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복이 되고 은혜가 될 것입니다.
우리말에 짐승의 머리에 달린 뿔과 나무의 뿌리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위로 솟아난 뿔과 아래로 뻗어 있는 뿌리가 같은 어원이라니 얼마나 신기합니까?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소싸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소 들이 싸울 때 뿔이 부러지는 것을 본 적은 있어도 뿔이 뽑히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뿔은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너무나 보이는 것, 겉으로 나타난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누가 높은가, 공부 잘했는가, 많이 가지고 있는가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이 뭔가, 누가 나를 알아주느냐, 교인이 몇 명이고 얼마의 예산을 가지고 운영하느냐를 얘기하면서 그것이 목회의 성공의 기준인 것처럼, 성공한 교회의 기준처럼 여깁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나무는 높이 자란 만큼 아래로 뿌리는 내린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뿔 만큼이나 뿌리도 중요합니다. 성찬의 참여는 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조그마한 빵조각 하나를 먹고, 포도즙을 마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바르게 이루어 질 때 우리의 신앙은 든든히 서가고 그 신앙 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과 은혜를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성찬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의 의미
저자 이상돈목사
본문 고전11:23-29
참고사항 군포영광교회
설교내용
1. 성찬의 제정
성찬예식은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처음 행하시면서 그 후 모든 성도들이 기념
하라고 하였습니다(마26:26-29)바울 사도도 "내가 너희에게 권한 것을 주께 받은 것이니"
(고전11:2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은 사람에 의한 제도가 아니라 친히 "주 예수님"께서 제정하시고 이를 기념하라고 명하신
거룩한 예식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지켜야 할 영구적인 예식입니다.
성찬식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이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성도들은 감사로 영광
돌리며 기념해야 합니다.
2. 성찬의 내용.
성찬식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즙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고난 당하시고 피흘리신 은총에 대한 표현으로 떡과 포도즙을 통해
기념하는 것입니다.
① 주님이 축사(축복)해주신 시간입니다.(마 26:26)
②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전입니다(고전11:24)
③ 주님과 맺은 새언약의 표징입니다.(고전11:25)
④ 주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시는 기념입니다.(전파,감사,소망,고전11:26)
3.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성도의 자세
성찬예식은 애찬이 아니며 거룩한 성찬 예식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고져 하는 모든 세례교인들은
자신을 살피고 성찬예식에 참여해야 합니다. 상대방보다 '나 자신'을 먼저 살펴 보아야 합니다.
① 습관적을 참여하고 있지느 않은지 (형식,외식,애찬) ② 미신적인 신비주의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화체설,죄용서) ③ 탐식과 무질서하게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④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죄를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엡5:22-24) ⑤ 믿는 자로서 본을 보이고 있는지 (고후13:5) ⑥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지 (예배,기도,십일조,전도,봉사) ⑦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시키는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살전5:19,엡5:30) 다시 한번 고전11:27-29절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성찬예식을 통하여 주님과 연합되었고 모든 성도들과 연합되었기에 주님을 사랑하고
모든 성도들과의 교제가 더욱 친밀해지며 하늘 나라의 주님을 소망하며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991128
제목 세례와 성찬
저자 박우택목사
본문 고전10:1-13
참고사항 한샘교회
설교내용
기독교의 세례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베풀어졌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으로 보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성령주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지어 설교하였습니다. 이때 베드 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회개 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7-38)고 도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세 례를 받는 일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연관지어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세례는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적인 표현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받는 신자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 즉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였습니다. 하지만 떡과 잔을 마시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우리 가운데 임재하 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중요한 외적인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인됨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외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한다고 하여서 그 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행함에 있어서 신자됨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 다. 바울이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게 쓸 당시에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몸으로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중요한 사건을 가지고 신자됨의 모습이 무엇인지 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와 그 삶의 상관관계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 니다.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첫 번째로는 어떻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는가, 두 번째로는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세 번째로는 어떻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한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들을 살펴보 도록 하겠습니다.
1. 어떻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는가
이 본문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왜냐하면"( , For))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 점은 참 중요한데, 이 내용은 앞에 내용에 대한 이유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9장 후반부의 내용의 핵심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래서 그는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선수의 예를 들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리기 선수가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갑니다. 하지만 상을 얻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기기를 원하는 자마다 모든 일에 자신을 절제해야 합니다(고전9:24-25). 바울은 이러한 예를 들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기를 원하는 자도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로 바울 자신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다." 이 말씀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최후의 면류관을 얻기까지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을 실례로 들면서 절제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1에 있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절제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보여주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절제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 본문 고린도전서 10:1-3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 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 나타난 의미대로 번역 한다면 "모든 사람이 모세와 합하여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았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연합하여 그 길을 지나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이 연합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가 죽었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일과 연합하여 우리가 부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물이라는 외적인 수단을 통하여 성령으로 세례받음을 인치는 일입니다. 이 일과 비교해 본다면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 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나타난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서 인도하던 구름기둥을 의미합니다(출13:21). 그리고 바다 는 홍해를 의미합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홍해가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큰 능력으로 바다 를 가르시고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이 구름기둥이나 홍해 바다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 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모세와 연합하여 모세의 인도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능력으로 구원하셨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이들은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식물이라는 것은 만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 령한 음료 역시 그들이 광야에서 마신 물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 마셨으매 그 반 석은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정된 반석의 개념이 아니고 그들과 항상 함께 동행하신 구약의 그리스도로부터 마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은 후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신약의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물을 마신 사건을 언급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물을 마시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구원을 경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과거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지고 당시에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며 성찬에 참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우 리 신자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합니다.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구원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로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세례와 성찬 에 참여하는 자는 아주 특별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바울은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에 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예를 들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 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 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 람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우리의 거울이 되는 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거울이 된다"는 말은 "본보기가 된다," "표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을 표본으로 삼아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문제와 우리 성도들의 문제를 지적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을까요? 가장 먼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우상숭배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 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서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 이 말씀은 구약의 출애굽기 32:1-6에 기록된 사건을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이후에 빨리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가리켜 "우리 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신을 섬기는 방식대로 먹고 마시며 뛰어 놀았습 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이들 중에 약 삼천명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 습니다. 우상숭배는 십계명 가운데 제 2 계명을 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은 인간의 사색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 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 생각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명한 방법에 따라 섬겨야 합니 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의 고린도교회는 우상의 신전에 참여하여 그들과 함께 뛰며 즐겼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방인들의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 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0:2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 지 않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참된 신자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인간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거나 우상에 축 제에 참가하여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술마시고 뛰어 놀아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절대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포스터모던(postmode rn) 사상을 종교에 적용한 종교다원주의는 불교, 유교, 샤머니즘 등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최종적인 목표는 하 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우상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간음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 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여기에 바울이 표본으로 제시한 간음사건은 민수 기 25:1-9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싯딤이라고 하는 곳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서 모압 여자 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알브올의 제사에 초청하였습니다. 이 바알브올은 처녀들의 행음을 통하여 숭배되었던 모압 족속의 신 이었습니다. 그래서 간음 사건으로 인하여 하루에 이만 삼천명이 죽었습니다. 이 사건 역시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삶과 연 관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에 있었던 비너스 신전에 참여하여 다른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문제는 이 행위를 비너스에게 드리는 제사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이방신전에 참여하면서 간음을 행하 였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상하게 오늘날 성도덕에 대한 분위기 는 남녀간의 성관계는 사랑의 표현일 뿐이지 죄악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의「제 3 물결」(1980)이라는 책 에서 미래 사회에 가정문제를 많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고 자유로운 성생활을 강조하는 시대적인 분위기로 흘러가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점차적으로 우리 사회에 전통적인 성도덕이 자리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 가운데 이 본문의 간음의 문제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성도들은 시대적인 분위기가 어떻게 변화된다고 할지 라도 여전히 성경적인 윈리가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하고, 그 원리를 생할에 적용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주를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 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이 말씀의 표본은 민수기 21:1-9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에돔 땅을 둘러서 조금 멀고 돌아가는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 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하면서 원망하였습니다 . 이 일로 인하여 사막에 불뱀이 나타나 죽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한 이유는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는 것이 그들 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돌아가게 하신 것은 에돔이라는 나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조바심을 극복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시험하였습니다. 역시 이 일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가 더디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분명하 게 나타나지 않을 때 원망하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에게 비록 더 디고 어렵게 보이는 일조차도 궁극적으로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주를 원망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 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 말씀의 표본은 민수기 14:2 이하에 있는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 기도 하고, 16장에 나오는 고라 자손이 반역하여 원망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14장의 사건이 더 적절하 다고 봅니다. 민수기 14장에서 보면 열 두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탐지한 이후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이 부정 적인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외부 적인 상황만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다 가나안에 들어가 서 구원의 은혜들을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나 사건을 가리켜 고린도전서 10:1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당 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 고 광야에서 신령한 양식과 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간음을 행하며, 하 나님을 시험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믿고 그리스도와 연 합하여 세례를 받고 주의 은혜의 상에 참여하는 우리가 이러한 행동을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삶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상을 숭배하거나 간음을 행하거나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3. 어떻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러면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는 어떻게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울은 두 가지 중요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여기에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 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상황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답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일이 정말 어렵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위장하고 교회 안에 들어온 종교다원주의 사상들 이 있습니다.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일들을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통문화라고 하는 미명하에 무당을 우 리의 고유한 놀이문화인양 위장되기도 합니다. 부부 외에의 남녀간에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국가에서 사창제도를 인정하고 있다면 창녀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는 정직하고 올바 른 길을 걸으면 손해를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받은 자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모릅니다. 또한 많이 기도 해도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단히 자신의 삶을 말씀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면서 경솔하게 유혹에 뛰어들 지 마십시오. 그레이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는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성도의 궁극적 구원" 또는 "성도의 인내"로 알려진 교리에 대하여 아주 적절하게 말했습니다. 이 교리가 믿는 자의 안전보장을 말하는 것은 사 실이지만 이 교리는 자신의 중생체험을 믿고 죄를 자유로이 범하며 경건을 무시하게 만들기도 하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 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사상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인내라는 것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어떤 어려움 과 유혹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부단히 자신의 삶을 훈련하면서 넘어 질까 조심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이 찾아옵니다. 물론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하는 시 험(trial)도 있고,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시험(temptation)이 있습니다. 이 본문의 헬라어 성경에 나타난 시험(( )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서 감당치 못할 시험 외에는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 야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사람이 감당 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 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어 주셔서 능히 감당케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약속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일은 모든 시험을 이기는 방법입니다980301
제목 부활과 성찬
저자 윤정현목사
본문 막14:17-31
참고사항 대선교회
설교내용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여러 번 주님께서 십자가에 고난받으실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입니다. 그 만찬 석상에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가롯 유다를 향한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21절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가롯유다에 의해서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 속하셨습니다. 주님이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주님은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브리셔 기자는 말씀하시기를 "피 흘리심이 없으면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 하시더니 주님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씀하신 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때문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길은 이 길 말고 없기에 주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 때 하늘과 땅이 어두워지고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 영혼을 맡기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Ⅰ. 주님의 부활
그리곤 곧장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무덤에서 사흘을 계셨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이는 막14:27,28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하신 대로 주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고전15:3절 이하에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자는 마지막 때에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요, 빼앗길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도 주님 부활하심 같이 주님 오시는 그날에 다 부활할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요14:1-3)
주님은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다가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때의 모습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약 오백여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어 가셨는데 구름이 주님을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천사들이 하는 말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주님께서 두 번째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죽은 자는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게 될 것이고, 산 자는 변화하여 우리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여 주님의 승리하심과 같이 우리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 할 줄 믿는 부활신앙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사실을 증거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Ⅱ.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에 떼는 떡은 주님이 우리를 위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몸입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신 주님의 몸입니다. 이렇게 떡을 떼신 후에 또 잔을 가지시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잔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언약의 피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성만찬을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또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고전11;23절 이하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의 성찬 상에 참예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우리에게 내려 주신 축복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떼는 이 성찬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입니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52)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성찬을 참예하면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먹고 마실 때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초대 성도들은 떡을 떼며 교제하였다고 했습니다.(요6:56, 57, 마4:4) 또한 이 성찬을 참예하는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먹고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살이 찌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사는 목적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르고 삶의 행복의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이 예식을 언제까지 했으면 좋겠습니까? 고전11:26에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앞에 두고 주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는 뼈아픈 회개가 있는가 하면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벅찬 가슴으로 바라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 말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 마음 졸이며 살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큰 힘과 능력이 되었습니다. 다시 오마 약속하신 그 주님을 생각하며 저들은 토굴 속에서 이 성찬예식을 행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간절히 고대했기 때문에 토굴 속에서도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시 오시마 약속하신 주님을 굳게 잡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성찬은 우리가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의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한 형제입니다." "당신과 나는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할 그리스도의 영원한 가족입니다" 이런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찬에서 만나는 주님은 나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피 흘리셨습니다. 한 피 받아 한 몸인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이 예식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다" "한 순례 길을 가고, 같은 고향을 가진 형제 자매다" 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있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모임이 잔치 집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떡과 잔을 드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축사하셨습니다. 이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들은 이제 감사가 넘쳐서 우리 성도들이 사는 모든 환경을 축제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의 영이 죽게 되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요6:53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고난받으시며, 나를 위해서 다시 살아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살을 먹듯이! 피를 마시듯이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물을 취하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주님을 믿지 않으면 죽는 줄 알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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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례,성찬, 그리고 감사
저자 윤정현목사
본문 출23:14-17
참고사항 대선교회
설교내용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98년도 추수 감사주일과 성례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금년 한해는 IMF 원년에 해당되는 해로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미친 여파로 직장을 잃고, 사업의 위기와 부도가 연출되고 더 나아가서 가정의 위기로 연결이 되어서 깨어진 가정들이 생산되는 악순환의 궤도에 진입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소망과 의욕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음을 볼 때에 마음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다 이런 고난을 만나게 되었을까! 이것은 이 민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요, 더 잘되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인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소돔과 고모라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화산의 폭팔로 잿더미가 된 폼페이 수도와 같이 되지 않게 하시려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작품임을 우리가 알고 이 시대의 고통을 함께 분담하면서 이 민족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운동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실 것이며, 흩으셨으나 다시 모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가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금년에도 여호와의 절기인 추수 감사절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첫번 추수 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는 퓨리턴들의 감사를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감사는 비록 보잘것도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습격과 풍토병과 기근과 허기에 지친 그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상륙했던 청교도들의 거의 절반 이상이 이미 죽어간 후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얼마 되지 않는 곡식이지만 그들의 손으로 농사할 수 있었고 농사하게 하시고, 그래도 모든 위기에서 건져 주셔서 생명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물질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IMF 상황이지만 과거의 더 어려웠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께 오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하여야 할 규례와 절기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Ⅰ. 할례
할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17:10-14에서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국경 지대인 하란에서 아버지가 데라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세겜 땅에 거주하다(창12:7), 다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겼다가(창12:8),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창13:3). 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하긴 했지만 손바닥만한 땅도 자식도 없이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고 그 땅을 그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에서 번성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언약의 상징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명령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열 두 족장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대대로 모든 남자들은 히브리인이나 돈으로 산 자까지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셨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창17:14) 라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 된 표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 할례는 신약 시대에 세례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할례를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처럼, 이 세례도 우리 주님께서 친히 명하신 것입니다. 마28:19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 요한에게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요, 참으로 소중한 축복된 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례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된 언약의 표가 되는 것처럼! 신자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되었다고 하는 공적인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는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이기도 합니다. 좀더 말씀드리면 이 세례는
. 세례는 육체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는 것을 뜻합니다.(롬6:2)
. 세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마음속에 죄를 씻는 표징입니다.
.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영적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골2:12,3:1-3)
. 세례는 하나님 집의 한 식구가 되었다는 표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딛2:14)
. 세례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표입니다.(롬6:13)
. 세례는 주님만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이 향상됩니다.(골3:1-3)
. 세례 받은 사람만 성찬에 참예 할 특권이 부여됩니다. 구약에 유월절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은 할례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었습니다.(출12:48)
. 물세례를 받음으로 성령 세례까지 받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마3:15,16)
.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의 정회원이 되는 특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Ⅱ. 유월절(출23:14,15)
유월절 절기도 하나님의 절기로서 대대로 지킬 규례입니다. 이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출12:14에 보면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 지니라"
이 유월절은 대대로 지킬 예식인 것입니다. 대대손손이 기억하여야 할 예식인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우신 은혜를 그래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우리의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때에 "이는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라고 대답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살펴봅니다.
1) 양을 잡아야 합니다. 출12:21절 말씀에 양을 잡을 때에 "너희 가족대로 어린양 을 택..."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은 인류 전체를 위한 속죄 사역이지만 하나 님은 구원은 각자의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말씀합니다.
2)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라고 출12:22절 말씀합니다. 그 피의 보호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3)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출12:22c에 말씀하셨습니 다. 이 말씀은 피를 뿌린 문안에 있을 때만이 안전하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 합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4) 그 밤에 하나님의 보내신 멸하는 자가 그 피를 보고...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출23:23) 그 피가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5) 이 유월절 규례는 26절에 보면 "너희....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여 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유월절은 신약에서 성찬으로 대신하게 되었 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과 잔을 가지시고 떼어 주고 나누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요...내 피로 세운 언약이니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11:24-25) 라고 분부하신 예식입니다. 요6:53,54에
"예수께서 이르시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 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 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
성찬의 의미
1)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요6:56)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상하신 몸과 흘리신 보혈의 은총을 입으며 그분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연합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우리도 죽고, 주님이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 같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2) 속죄의 은총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1:7)라고 하셨으니 성찬의 잔은 나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대속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육신의 기갈이 없어지고 배부름이 있듯이, 이 성찬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기갈을 극복하고, 사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강이 넘쳐 나게되는 것입니다.
3) 성찬은 부활과 영생을 소망케하는 예식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셨으니 주님 오실 때에 이 성찬에 참예하였던 모든 이들이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 날 것을 약속하는 예식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이 예식에 참예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월절도 할례 받은 사람만 참예할 수 있는 것처럼 성찬의 상에도 세례받은 사람만 참예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Ⅲ. 맥추절과 수장절
출23:16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년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축함이니라"
맥추절은 칠칠절(신16:10), 오순절, 초실절(출34:22)이라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이는데 밭에 씨를 뿌리고 첫 열매인 보리와 밀을 추수하였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에 50일 째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
고도 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초막절(레23:34), 성막절, 장막절 등과 같은 이름으로 불려졌습니다. 이것은 년 종에! 가을에 추수하고 창고에 거두어들인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과 수장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출23:15c) 라고 하십니다.
우리 대선의 모든 성도들이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더욱 기도하고, 능력을 받아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비록 전쟁의 소리는 들리고, 환난은 연속적으로 우리를 위협한다고 해도,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비록 실직을 당하고 부도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책임지시며, 끝까지 은혜 주실 우리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완성을 이루실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합3:16-18)
모쪼록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여 대대손손 이 절기와 규례를 지켜 복을 받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981115
제목 성찬식의 의미
저자 전천일목사
본문 요6:47-59
참고사항 중앙제일교회
설교내용
우리교회는 매월 첫주일마다 성찬식을 합니다.
우리가 이 성찬식에 참여할 때 하나의 행사로만 여기고 형식적으로 참여해
서는 않됩니다.
성찬식에는 귀중한 의미가 담겨 있고 그 능력또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시간에는 성찬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
씀 드리겠습니다.
本論
1. 두가지 의식
기독교에는 두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의식이고
둘째는 성찬의식입니다.
1) 세례의식
이 의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의식입니다.
세례의식을 통하여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 된 것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다시 태어난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믿는자는 반드시 세례를 주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으므로
모든 믿는 성도들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2) 성찬식
이 예식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심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주님 오실때까지 계속 행하라고 주께서 명령 하셨습니다.
이 성찬식은 세례를 받은 성도들만 참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함으로 정결함을 얻은후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 의식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것이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게 될것입니다.
2. 떡의 의미
주님께서는 " 내가 곧 생명의 떡" 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 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떡은 성찬식의 떡을 의미하며 그떡은 곧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주실 주님의 거룩한 몸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떡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을 미친 사람취급하며 주님의 곁을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대할 때 먼저 주님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떡은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
다.
천하고 부족하며 죄인된 우리가 예수님의 거룩한 몸에 참여한다는
것은 놀라운 영광입니다. 그와 동시에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몸을 대할 때 경솔히 대하면 절대로 않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7에서 3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
다.
[HAN 고전 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HAN 고전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HAN 고전 11: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HAN 고전 11: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따라서 우리는 성찬식에서 주님의 몸을 대할 때 먼저 자기를 살피고
죄를 회개하고 난 연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 예, 초대교회 당시에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와서 떡을 혼자
욕심부리며 먹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사람들이
이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 했다고 합니다.)
이런일이 있어서는 않되겠습니다.
2. 잔의 의미
성찬식의 잔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
시면서 흘리신 주님의 거룩한 피를 의미합니다.
이 주님의 보혈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습
니다. 주님의 보혈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무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AN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1) 하나님앞에 나가려면 반드시 주님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2) 죄사함에는 주님의 피가 절대 필요합니다.
3) 우리가 정결함을 얻는 것도 바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4) 주님의 보혈은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5) 주님의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식의 잔이 주님의 거룩한 보혈을 의미함을
깨닫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경건한 마음으로
이 성찬식의 잔에 참여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성찬식을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
갈릴리 바닷가의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성찬식의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자의 피속에 생명이 있다.
[HAN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2) 영생을 가졌다.
[HAN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3) 마지막날에 다시 살린다. (부활의 능력)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4) 참된양식이요 참된 음료이다. (영생을 주는)
[HAN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 내안에 거하고 나도 그안에 거한다.
[HAN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6) 나로인하여 산다.
[HAN 요 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7) 영원히 산다.
[HAN 요 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HAN 요 6: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結論
우리교회가 한달을 새롭게 시작하는 매월 첫주에 성찬식을 거행하는
이유는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을 힘입어 한달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게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될것입니다.
성찬식이 이와같이 거룩하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성찬예식에 참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제목 성찬의 의미
저자 남호목사
본문 고전11:23-26
참고사항 신탄진침례교회
설교내용
오늘 우리는 성찬을 들면서 성찬에 대한 의미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찬이라 말하기도 하고 성만찬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성만찬이라고 하는 것은 성찬식에 행해지는 식사를 보고 성만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수난절 저녁에 예수님의 피와 살을 의미하는 포도주와 빵을 회중들에게 나누어주는 식사를 보고 성만찬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성만찬을 드는 순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만찬을 행하던 시기는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거행하셨다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저녁에 행한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된 날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는 열 가지 재앙 중에서 마지막 재앙이 행해져서 바로 왕이 모세를 불러다가 너희 백성들이 빨리 애굽에서 나가라고 권면했던 것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저녁에 너희들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라 그러면 저주의 신이 너희들을 지나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에는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을 지나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정은 편안한 잠을 잤는데 애굽 백성들의 가정에는 사람이나 짐승의 초태생(장자)이 죽는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성만찬을 행하신 것은 유월절과 성만찬과는 아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되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동안 종살이 하다가 해방된 것이나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의 자리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과 찢기신 살의 공로로 죄악에서 해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행하시기에 가장 좋았던 시기는 유월절 전날 밤이었던 것입니다.
1.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기념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상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만찬을 들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실이 여러분들 가슴속에서부터 감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죄 용서함 받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전폭적인 공로에 의해서라고 하는 놀라운 신앙의 신비가 가슴속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과 찢겨 주신 살로 인하여 여섯 시간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참아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신 은혜를 기념하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주심 때문에 죄인이 의인 되었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오늘 성만찬을 들면서 우리들의 가슴에 확실한 믿음으로 다가와야 될 것입니다.
2. 성만찬은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1)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 죄의 멍에를 지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죄의 멍에를 매고 마지막에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2) 죽으신 그분이 다시 재림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수치스럽고 낮아진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영광과 높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지나간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앞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미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예수님과 죽음과 재림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성만찬 속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성도들의 과거의 기억과 앞으로 재림하실 그분에 대한 미래의 소망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지나간 과거로만 남아지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재림이 미래의 소망으로만 남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주님의 죽으심과 주님의 재림이 한꺼번에 담겨져 있어서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는 내 죄사함 받고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서는 하늘의 소망을 가지는 축복이 성만찬을 통해서 여러분들 가슴속에 강하게 역동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 사람으로 변화가 되고, 변화된 사람이 소망을 잃고 정처 없이 살던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소망의 믿음을 가지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 성만찬 속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3. 성만찬은 성도들의 믿음과 헌신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입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증거 함으로써 성도들의 신앙을 확신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찢겨 주시고, 나를 위해서 피흘려 주시고, 나를 위해서 죽어 주셨으니 주여 나는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일해야 되겠습니까? 자식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자식을 위해서 죽어 주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지만 자식을 위해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만 입이 있어도 감당할 길이 없어서 주여 이 몸을 드립니다."하는 헌신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야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재림을 증거하므로써 교회는 고아와 같이 버려져 있지 않을 것이며, 죄악과 사단이 완전히 정복이 되고 만물이 새롭게 되며 나아가서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성만찬은 성도들의 신앙에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4. 성도들이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구세주를 만나야 합니다. 이유는 성만찬은 죽으신 주님과 재림의 주님을 가르쳐 주는 예식이기 때문에 예식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시는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 주신 주님을 사모하는 심정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만찬을 드는 성도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아니하시고 그 성만찬을 드는 순간에 여러분들 가슴속에 감동적으로 깨달아지고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신비로운 신앙적 체험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진 성만찬에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태양이 내려 비추고 비가 내리더라도 돌이나 바위는 아무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돌이나 바위는 생명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는 성도는 영적인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까닭에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흘려주신 피를 마심으로 찢겨주신 살을 먹음도 전혀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내 속에 강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귀한 것을 가져다주어도 반응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상에 피흘려 주시고 찢겨 주신 그 주님을 상징하는 성만찬을 들 때에 우리들의 가슴이 떨려와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여섯 시간 십자가에서 매달려서 고난과 죽음과 싸우면서도 끝까지 죽어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해 주신 주님이 우리의 가슴에 뜨겁게 감동으로 이어 와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적인 감동이 강력하기 때문에 감동일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꽃은 햇빛이 비치고 비를 맞으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에 있는 화분에 햇빛을 비춰주고 물을 자주 주었더니 그 중에 하나가 요즘에 꽃을 피워서 우리 가족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속에 생명이 있으니까 햇빛을 쬐주고 물을 주니까 점점 자라서 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으면 아무리 물을 주고 햇빛을 비춰주어도 자라지 아니하고 성장하지 아니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성만찬을 들면서 날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형상이 여러분들 가슴속에 강하게 비춰오기를 바랍니다. 날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주님이 여러분들 가슴속에 강력하게 감동되어 오기를 바랍니다.
성만찬을 들면서 여러분들의 구원에 확신이 다시 한번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16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은 스페인의 필립2세의 잔혹함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습니다. 그러자 필립 왕의 분노로 반란자들이 모두다 처단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필립 2세는 반란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냈습니다. 필립 왕의 진압군들은 시민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 집집마다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몇 사람이 피하다가 모퉁이에 있는 한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숨어 있는데 진압군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도 얼마후면 죽을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모두 숨을 죽이고 머리만 맞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이가 한가지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저밖에 있는 양을 잡아다가 그 피를 이 마당에 뿌립시다." 그래서 얼른 양을 잡아다가 양의 피를 마당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그 진압군이 그 집에 오더니 그 피를 보고 "여기는 우리 동료들이 지나갔군."하면서 그냥 지나가더랍니다. 이 집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양의 피에 의해서 살아 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죄용서함을 받고, 의인이 되고, 하늘나라 생명 책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흘려주신 피공로 의지하여 우리의 생명이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구원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을 기념하며 그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성만찬을 드는 것입니다.
오늘 성만찬을 드는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이런 믿음이 불일 듯이 일어나는 축복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980405
제목 성찬
저자 황규록목사
본문 고전11:23-26
참고사항 창영감리교회
설교내용
구약에서는 성례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할례의식이고, 하나는 제사장이나 왕에게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입니다. 이 성례식에 참여하는 이들이 그런 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차이가 있는데 천주교에는 성례가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세례가 있고, 성찬이 있고, 혼인도 성례라 하고, 임종 직전에 베푸는 성례가 있고, 그리고 견신례라 하는 입교의식도 성례라 하고, 참회하는 의식도 성례라 부르고, 사제서품도 성례라 합니다. 개신교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직접 지시하신 것만을 성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가 세례의식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의식이 있고, 성찬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잡수시던 날밤에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잡수셨는데 그 자리에서 떡을 떼어서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먹어라 하면서 주시고, 포도주를 한잔씩 주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피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이 성찬입니다. 성찬에 대한 이해도 조금 다른데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떡을 나누어 줄 때 그 떡이 바로 그리스도의 살이 된다고 얘기를 하고, 잔을 나누어 줄 때 그 포도주가 바로 그리스도의 피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주님 말씀하신 데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고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런 의미로서 봅니다. 오늘은 세계의 신교, 구교 모두가 세계성찬주일로 지킵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는 우리가 성찬예식을 베풀겠습니다. 성찬과 관계되는 중요한 단어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하는 말이 있습니다. 또하나는 그것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떼어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주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에는 가지사=took, 축사하다=blessed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시고, 떼어주다=broke, 주었다=gave 그 말을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 그 네 가지 말을 잘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첫 번째는 봉헌입니다.
1549년 영국교회 성공회에서는 성찬을 받을 때는 각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찬을 받았습니다. 종이화폐로 변화하면서 그런 의식이 없어졌습니다. 봉헌한다고 하는 것 주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누군가가 봉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떡에다가 얘기하시고, 자기 피를 포도주에다 비교하시는데 성찬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봉헌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른 말로 말하면 자기의 생명을 송두리째 드렸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봉헌하고, 몸도 봉헌하고, 시간도 봉헌하고, 그리고 물질도 봉헌하고 하여튼 내 것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살과 피를 하나님께 봉헌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감사기도입니다.
떡과 잔을 가지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받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내 살과 내 피를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은 어린아이가 가져온 떡 다섯개, 물고기 두 마리를 먼저 봉헌하셨습니다. 그것을 받으시고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사기도를 합니다. 저는 공군에서 군대생활을 하였는데 공군에서의 하나 전통이 식사에 대해서 묵념 그럽니다. 누구한테 묵념을 하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묵념을 통해서 그런 것을 허락하신 분에게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려야 하고, 교회학교를 위해서 헌신하게 된 것을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주를 위해서 쓰게된 것을 감사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성찬분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 때문에 영혼이 다 죽었습니다. 안 죽은 사람이 없이 죄로 인하여 그 영이 다 죽었습니다. 안 죽은 사람이 없이 죄로 인해서 그 영이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들에게 죽은 영을 살리시는 당신의 살을 다 먹게 한 것입니다. 살을 하나 하나 다 떼어서 영이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해서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는 살을 찢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서 하시는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들, 도덕적으로 죽은 우리들에게 하나하나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떡을 먹는다고 하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을 먹는다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양심에 거리끼거나 믿음에 위배되는 일을 했을 때는 예배는 드렸지만 성찬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살을 먹기에는 너무나 죄송스럽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많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나는 성찬분배를 안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떡을 받을 때마다 죄로 인해 죽은 내가 바로 그것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시 산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다고 하는 의미를 되새기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천주교에서 떡을 받아먹는 순간 그 떡이 그리스도의 살이 되다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오늘 교독하였는데 내 살을 먹는 자마다 영혼이 죽지 않는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떡을 뗄 때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믿음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는 성찬배수입니다.
잔을 가지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마시게 한 것을 성찬배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내가 마심으로 말미암아 내 생명이 소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것은 나무든 풀이든 짐승이든 다 죽습니다. 사람도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말씀을 우리가 교독했는데 내가 주는 물은 영생에 이르는 물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는 분들께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시기를 바라고 장래 주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991003
제목 성찬의 의의 및 주의점
저자 박상훈목사
본문 고전11:23-34
참고사항 승동교회
설교내용
우리 예수님이 말씀으로나 또는 친히 본을 보이심으로 제정하신 성례, 곧 거룩한 예식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몸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친히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마28:19의 말씀입니다.
ꡒ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ꡓ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주일 성삼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세례와 더불어서 우리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거룩한 예식이 바로 성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잡히시던 그 날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 때 준비되어진 떡과 포도주로 예수님은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ꡒ너희는 성찬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ꡓ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것을 성찬을 행할 때마다 되새기면서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성찬을 행하고자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뜻깊은 성찬을 통해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성찬의 의의와 또 우리가 성찬에 임할 때 명심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ꡓ
바울은 성찬에 관한 가르침을 주께 받은 그대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성찬의 기원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성찬은 사람들이 제정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만들어낸 예식도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이 만들어낸 예식도 아닙니다. 교회가 만들어낸 종교 의식도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세우신 것이 바로 성찬 예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언제 성찬 예식을 제정하셨습니까? 23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ꡒ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ꡓ
그 날 밤에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 때 준비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예수님은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만찬을 다 드시고 난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앞으로 지셔야할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피땀 흘리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우리 예수님은 검과 몽치를 들고 온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잡히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은 주변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욱더 선명하게 비취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찬이 우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잡히시던 바로 그 날 밤에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슴을 더욱더 뭉클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성찬을 제정하셨습니까? 23절 끝부분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ꡓ
축사라는 말은 축복과 감사가 합친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찬에 참예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또 ꡒ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ꡓ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시간 성찬에 참예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성찬에 임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아낌없이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축사라는 말에는 감사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엄청난 감사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감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갖 고통을 다 겪으실 것을 미리 아시고 감사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인 소와 양은 울부짖으면서 끌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신 우리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입을 다무셨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셨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주를 믿는 모든 백성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신 뒤에 ꡒ떼어ꡓ라고 했습니다.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기워질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살이 어떻게 찢겨졌습니까? 로마 군병들이 사정없이 휘두르는 채찍에 의해서 살이 찢겨졌을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실 때도 살이 찢겨지셨을 것입니다. 손과 발에 굵은 못이 박히셨을 때도 살이 찢겨졌을 것입니다. 로마 군병이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허리를 찌를 때도 찢겨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찢어주신 살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성찬에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ꡒ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주셨습니다. 오늘 성찬에 임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합니다.
ꡒ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나는 너를 위하여 내 몸을 찢어 주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고 너를 위하여 죽었다.ꡓ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성찬 예식을 허락하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둘째로, ꡒ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ꡓ고 말씀하셨습니다. 잊지 말고 되새기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며 그 몸을 아낌없이 찢어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고 성찬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야 될 줄 압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다시금 불태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헌신을 다시금 다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ꡒ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ꡓ
먼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그 뒤에 잔을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자들을 위하여 축복하셨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내려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 예수님이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주를 믿는 우리와 하나님이 다시금 화목하게 될 것을 생각하시면서, 또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사해질 것을 생각하시면서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ꡒ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ꡓ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 때 성도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마다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 그것은 옛 언약을 맺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곧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인 우리들은 더 이상 짐승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보혈을 다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된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이 언약은 영원합니다. 결코 폐하여 지는 법이 없습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구원은 영원합니다. 한 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인 영생이 보장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둘째로, ꡒ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ꡓ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뜨거운 보혈을 아낌없이 쏟아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곧 이어 바울은 26절 말씀에서 성찬의 의의를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ꡒ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ꡓ
우리가 성찬에 참예할 때마다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의 죽으심입니다. ꡒ주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그 몸을 아낌없이 찢어주셨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뜨거운 피를 흘려주셨다.ꡓ 어떻게 우리가 그 사실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거룩한 성찬의 예식을 언제까지 거행할 것입니까? 주님 ꡒ오실 때까지ꡓ입니다. 내 생명 다할 때까지 우리는 성찬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세상 만방에, 또 우리의 자손들에게 계속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결코 부끄럽게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결코 수치스럽게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담대하게 입을 열어서 전합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모든 성도들이 성찬을 통해서 주의 죽으심을 지금까지 전해 왔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 충성스럽게 전해 왔습니다. 우리도 성찬을 행하면서 주의 죽으심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전파할 것입니다.
곧 이어서 바울은 우리가 성찬에 참예할 때에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ꡓ
성찬에 합당치 않게 참예하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주의 몸과 피를 받으면서도, 아무런 마음의 감동없이 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ꡒ그저 교회에서 때가 되었으니까 하는가 보다!ꡓ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관습적으로 생각없이 참예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태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진지한 자세로 참예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없이 가볍게 성찬에 임하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는 마음없이 그 죄를 그대로 품고서 성찬에 참예하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형제에 대한 미운 감정을 그대로 품고서 성찬에 참예하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이런 합당치 못한 태도로 성찬에 임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 국기인 태극기를 땅에 놓고 짓밟는 행위는 단순히 하나의 천 조각을 짓밟는 행위로 끝나지 않습니다. 태극기가 상징하고 있는 우리 나라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찬에 합당치 않는 자세로 참예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경멸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ꡓ
우리가 성찬에 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가?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되어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 주시고, 내게 귀한 사명을 주셨는데 과연 충성 되게 사명을 잘 감당해 왔는가? 하나님을 내 목숨과 내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것들을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잘못된 것이 생각나거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먼저 다 남김없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아래에 놓고, 회개하고 죄의 사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요일1:9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ꡒ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ꡓ
성찬에 임하기에 앞서서 먼저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ꡓ
자기의 자신을 살펴보지 아니하고 합당치 아니한 태도도 함부로 경망스럽게 성찬에 임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행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행위를 할 때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ꡓ
고린도 교회 안에 약한 자, 병든 자, 그리고 잠자는 자가 적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만 했습니까? 성찬에 합당치 않은 자세로 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함부로 먹고 마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시는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몸을 약하게도 만드시며, 병으로 고통 당하게도 하시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우리의 목숨을 잃게 만들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3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ꡒ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ꡓ
만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성찬에 참예하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들을 잘 살피기만 했더라도, 저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ꡒ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ꡓ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이제 더 이상 잘못된 태도로 성찬에 임하지 말고 바른 자세로 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들도 주님 앞에 깨끗함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몸된 우리 교회가 다시금 성찬 예식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ꡒ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ꡓ
성찬이 거룩한 예식이 되도록 서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다함께 떡을 떼고, 다함께 잔을 나누면서 성찬이 거룩하게 행해지도록 협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떡이나 잔을 받으시고 개별적으로 들지 마시고, 같은 시간에 다함께 들도록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3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ꡒ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ꡓ
성찬은 결코 우리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ꡒ아니 목사님, 이왕 주시려면 좀 빵도 큰 것으로 주시고, 잔도 큰 잔으로 주시지, 이게 뭡니까?ꡓ 물론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찢기신 살을 조금만 받아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뜨거운 보혈을 우리가 마시는 것입니다. 피 한 방울도 소중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자세로 임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찬에 대한 불경한 태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판단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ꡒ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ꡓ
성찬과 관련해서 자신이 못다한 가르침은 그가 고린도에 갈 그 때에 올바른 지침을 주겠다는 약속으로서 성찬에 대한 가르침을 끝맺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성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과연 준비가 되었습니까?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고 합당치 않은 태도로 먹고, 마시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이천년 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던 군중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는가?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는가? 내 마음속에 회개하지 못한 죄가 도사리고 있지 않는가? 이것을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다는 심정으로 진지하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990328
제목 성찬의 의의 및 주의점
저자 박상훈목사
본문 고전11:23-34
참고사항 승동교회
설교내용
우리 예수님이 말씀으로나 또는 친히 본을 보이심으로 제정하신 성례, 곧 거룩한 예식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몸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친히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마28:19의 말씀입니다.
ꡒ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ꡓ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주일 성삼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세례와 더불어서 우리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거룩한 예식이 바로 성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잡히시던 그 날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 때 준비되어진 떡과 포도주로 예수님은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ꡒ너희는 성찬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ꡓ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것을 성찬을 행할 때마다 되새기면서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성찬을 행하고자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뜻깊은 성찬을 통해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성찬의 의의와 또 우리가 성찬에 임할 때 명심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ꡓ
바울은 성찬에 관한 가르침을 주께 받은 그대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성찬의 기원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성찬은 사람들이 제정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만들어낸 예식도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이 만들어낸 예식도 아닙니다. 교회가 만들어낸 종교 의식도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세우신 것이 바로 성찬 예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언제 성찬 예식을 제정하셨습니까? 23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ꡒ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ꡓ
그 날 밤에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 때 준비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예수님은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만찬을 다 드시고 난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앞으로 지셔야할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피땀 흘리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우리 예수님은 검과 몽치를 들고 온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잡히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은 주변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욱더 선명하게 비취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찬이 우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잡히시던 바로 그 날 밤에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슴을 더욱더 뭉클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성찬을 제정하셨습니까? 23절 끝부분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ꡓ
축사라는 말은 축복과 감사가 합친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찬에 참예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또 ꡒ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ꡓ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시간 성찬에 참예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성찬에 임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아낌없이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축사라는 말에는 감사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엄청난 감사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감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갖 고통을 다 겪으실 것을 미리 아시고 감사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인 소와 양은 울부짖으면서 끌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신 우리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입을 다무셨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셨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주를 믿는 모든 백성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신 뒤에 ꡒ떼어ꡓ라고 했습니다.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기워질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살이 어떻게 찢겨졌습니까? 로마 군병들이 사정없이 휘두르는 채찍에 의해서 살이 찢겨졌을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실 때도 살이 찢겨지셨을 것입니다. 손과 발에 굵은 못이 박히셨을 때도 살이 찢겨졌을 것입니다. 로마 군병이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허리를 찌를 때도 찢겨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찢어주신 살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성찬에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ꡒ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주셨습니다. 오늘 성찬에 임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합니다.
ꡒ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나는 너를 위하여 내 몸을 찢어 주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고 너를 위하여 죽었다.ꡓ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성찬 예식을 허락하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둘째로, ꡒ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ꡓ고 말씀하셨습니다. 잊지 말고 되새기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며 그 몸을 아낌없이 찢어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고 성찬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야 될 줄 압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다시금 불태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헌신을 다시금 다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ꡒ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ꡓ
먼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그 뒤에 잔을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자들을 위하여 축복하셨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내려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 예수님이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주를 믿는 우리와 하나님이 다시금 화목하게 될 것을 생각하시면서, 또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사해질 것을 생각하시면서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ꡒ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ꡓ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 때 성도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마다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 그것은 옛 언약을 맺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곧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인 우리들은 더 이상 짐승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보혈을 다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된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이 언약은 영원합니다. 결코 폐하여 지는 법이 없습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구원은 영원합니다. 한 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인 영생이 보장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둘째로, ꡒ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ꡓ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뜨거운 보혈을 아낌없이 쏟아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곧 이어 바울은 26절 말씀에서 성찬의 의의를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ꡒ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ꡓ
우리가 성찬에 참예할 때마다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의 죽으심입니다. ꡒ주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그 몸을 아낌없이 찢어주셨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뜨거운 피를 흘려주셨다.ꡓ 어떻게 우리가 그 사실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거룩한 성찬의 예식을 언제까지 거행할 것입니까? 주님 ꡒ오실 때까지ꡓ입니다. 내 생명 다할 때까지 우리는 성찬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세상 만방에, 또 우리의 자손들에게 계속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결코 부끄럽게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결코 수치스럽게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담대하게 입을 열어서 전합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모든 성도들이 성찬을 통해서 주의 죽으심을 지금까지 전해 왔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 충성스럽게 전해 왔습니다. 우리도 성찬을 행하면서 주의 죽으심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전파할 것입니다.
곧 이어서 바울은 우리가 성찬에 참예할 때에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ꡓ
성찬에 합당치 않게 참예하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주의 몸과 피를 받으면서도, 아무런 마음의 감동없이 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ꡒ그저 교회에서 때가 되었으니까 하는가 보다!ꡓ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관습적으로 생각없이 참예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태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진지한 자세로 참예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없이 가볍게 성찬에 임하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는 마음없이 그 죄를 그대로 품고서 성찬에 참예하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형제에 대한 미운 감정을 그대로 품고서 성찬에 참예하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이런 합당치 못한 태도로 성찬에 임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 국기인 태극기를 땅에 놓고 짓밟는 행위는 단순히 하나의 천 조각을 짓밟는 행위로 끝나지 않습니다. 태극기가 상징하고 있는 우리 나라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찬에 합당치 않는 자세로 참예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경멸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ꡓ
우리가 성찬에 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가?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되어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 주시고, 내게 귀한 사명을 주셨는데 과연 충성 되게 사명을 잘 감당해 왔는가? 하나님을 내 목숨과 내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것들을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잘못된 것이 생각나거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먼저 다 남김없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아래에 놓고, 회개하고 죄의 사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요일1:9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ꡒ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ꡓ
성찬에 임하기에 앞서서 먼저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ꡓ
자기의 자신을 살펴보지 아니하고 합당치 아니한 태도도 함부로 경망스럽게 성찬에 임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행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행위를 할 때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ꡒ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ꡓ
고린도 교회 안에 약한 자, 병든 자, 그리고 잠자는 자가 적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만 했습니까? 성찬에 합당치 않은 자세로 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함부로 먹고 마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시는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몸을 약하게도 만드시며, 병으로 고통 당하게도 하시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우리의 목숨을 잃게 만들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3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ꡒ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ꡓ
만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성찬에 참예하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들을 잘 살피기만 했더라도, 저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ꡒ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ꡓ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이제 더 이상 잘못된 태도로 성찬에 임하지 말고 바른 자세로 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들도 주님 앞에 깨끗함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몸된 우리 교회가 다시금 성찬 예식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ꡒ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ꡓ
성찬이 거룩한 예식이 되도록 서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다함께 떡을 떼고, 다함께 잔을 나누면서 성찬이 거룩하게 행해지도록 협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떡이나 잔을 받으시고 개별적으로 들지 마시고, 같은 시간에 다함께 들도록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3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ꡒ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ꡓ
성찬은 결코 우리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ꡒ아니 목사님, 이왕 주시려면 좀 빵도 큰 것으로 주시고, 잔도 큰 잔으로 주시지, 이게 뭡니까?ꡓ 물론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찢기신 살을 조금만 받아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뜨거운 보혈을 우리가 마시는 것입니다. 피 한 방울도 소중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자세로 임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찬에 대한 불경한 태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판단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ꡒ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ꡓ
성찬과 관련해서 자신이 못다한 가르침은 그가 고린도에 갈 그 때에 올바른 지침을 주겠다는 약속으로서 성찬에 대한 가르침을 끝맺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성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과연 준비가 되었습니까?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고 합당치 않은 태도로 먹고, 마시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이천년 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던 군중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는가?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는가? 내 마음속에 회개하지 못한 죄가 도사리고 있지 않는가? 이것을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다는 심정으로 진지하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990328
제목 감사(感謝)와 성찬(聖餐)
저자 최영환목사
본문 snr22:14-20
참고사항 재건후암교회
설교내용
대체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둡다.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에 그러하며 자기를 살피는 마음으로 나아오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이 성찬의 자리가 감사와 찬미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 교회에서 추수감사절과 아울러 성찬예식을 행하면서 그 점을 같이 생각해 보려 한다.
1. 성찬의 전신인 유월절 만찬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찬식은 유월절 예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이다. 430여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이 출애굽 했던 날이다. 애굽에 마지막 재앙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에게 준비를 시키셨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게 하시고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나물과 아울러 먹게 하였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다.
그 밤에 애굽인 가정마다 장자를 잃은 슬픔에 애곡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양의 피를 바른 집에 거하던 히브리인들은 안전했다.
어린양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예표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사망의 형벌을 면하게 한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히브리인들은 성찬식 때 할렐루야 시를 봉창 하듯이(시111:-118:) 우리도 그 피의 공로를 찬미하며 성찬에 임하도록 하자.
2. 사례하시며 주신 떡과 잔
예수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사람이 제공한 넓은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다.
이 날이 지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주(主)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가룟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며,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이며, 모든 제자들이 다 달아날 것이며 자신은 고난을 당한 후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떡과 잔을 사례(謝禮)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례(謝禮)는 좋은 일이 있을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비록 좋은 일이 없을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는 각각 다르다. 어떤 이는 형통한 날들을 보냈을 것이며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시련으로 인하여 아픈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선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선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눈 앞에 두고서도 아버지께 사례하며 떡과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시던 주님을 생각하면서 내일의 염려를 주께 맡기고 감사에 동참하자.
3. 이 떡과 이 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 떡과 잔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피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3-54)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 떡과 잔이 실지로 주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화체설).
그 말씀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려고 자신을 희생하실 것을 가리키며 그의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생명의 축복에 참예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찬식에 임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생각지 않고 자기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성찬에 임하면 죄가 된다(고전11:27-29).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주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생각해 보라. 어찌 감사와 감격의 찬송이 아니 나오겠는가?
4. 찬미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의 마음에는 큰 눌림이 있고, 예수를 빼앗길 제자들의 마음에는 큰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만찬을 나누신 후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찬미하셨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감람산길로 올라가면서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고 행하였으며 따라가는 백성들은 각각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갔는데 만왕의 왕 예수는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그 길을 가신 것이다.
우리의 입술에 찬미의 제사가 있는가?
* 결실기를 주셔서 수고한 자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다. 계속되는 풍요로운 삶에서 감사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는가?
구원받은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대한 감격을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성찬을 받을 때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영육간에 베푸시는 은혜를 사례하고 찬미하자.
제목 성찬의 은혜
저자 전덕열목사
본문 눅22:13-20
참고사항 한영교회
설교내용
기독교에서 행하는 예식중에 가장 거룩한 것이 성찬식이며 개신교에서는 성찬식과 세례식을 성례로 본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것 중에서 성찬에 참예하므로 받은 은혜가 가장 귀한 은혜라고 하겠다.
Ⅰ. 성찬의 의미
A. 예수님께서 베푸신 마지막 만찬
(1) 마지막 만찬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나눈 만찬이 성찬식의 기원이다.
이 만찬은 예수님께서 원하셔서 준비되었고 예수님께서 친히 정하신
곳에서 베풀어졌다.
(2) "나를 기념하라"
예수님은 떡을 떼어 나누시고 포도주를 나누시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나누어진 떡은 인류를 위하여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져 스스로 흘리신 피를 의미한다.
B. 성찬식의 특성
(1) 공동체성
성찬식은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행하여 진다.
(2) 나눔
성찬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C. 성찬의 의미와 효능
(1) 주님의 고난을 되새기므로 속죄 받음에 대한 기쁨과 치유를 맛본다.
(2) 받은 사랑을 재확인 함으로서 감사의 삶을 누리게 된다.
(3) 관계 회복을 통한 평화를 맛본다.
- 용서와 화해의 삶 -
Ⅱ. 성찬의 은혜를 누리자!
(1) 감사의 결의로 참여하자!
(2) 헌신의 결의로 참여하자!
(3) 사랑의 결의로 참여하자!
991003
제목 성찬의 은혜
저자 송영충목사
본문 눅22:19~20
참고사항 새롬교회
설교내용
이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복있는 사람입니다.
행복감은 가장 귀한 것을 받았을 때 옵니다.
남 보기에 별볼일 없는 사람일지라도 나는 행복하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로마서 4장 6절에서 8절 말씀에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나쁜 생각만 해도 죄인입니다. 비록 행동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생각한 것 자체도 죄입니다.
따라서 죄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아담의 죄, 조상의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하나님과 영영 이별하고 죄 때문에 재앙이 계속 생기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이 죄를 가지고 행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원인이 되는 죄를 모두 해결받은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우리의 죄가 가리워지고 불법을 사하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죽을 죄인이고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두 덮어지고 가리워졌습니다.
죄를 지었으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죄값을 갚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즉,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 받아 천국에 가게 된 것을 기뻐하고 행복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것이요, 모든 영광이 우리의 것인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에 겨워 기뻐하고 찬송할 것을 믿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성찬은 뜻을 모르고 참여하면 안됩니다.(고전 11:23)
떡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몸이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시에 찔리고, 채찍에 맞고, 창에 찔리는 온갖 고통을 받으며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힘들게 죽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안 믿어지면 떡과 잔을 받으면 안됩니다.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면 생명이 생깁니다.(요한복음 6:33)
신앙의 배고픔이 해결됩니다. 신앙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우리 영혼의 물이 바로 예수님의 떡이요 잔입니다.
믿음으로 받으셔서 믿음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갖고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믿고 참여하여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되고, 제자가 되고,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 열매가 많이 맺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응답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믿어지지 않는 분은 믿음이 생기도록 기도하고 성경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990411
제목 주의 성찬
저자 유병의목사
본문 눅22:14-20
참고사항 한양교회
설교내용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v19-20)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기록한 책을 복음서라고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 선포다. 하나님의 나라 선포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창조하는 일과 그들을 모아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마16:16-18). 사도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세웠다.
참된 교회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고백함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교회가 이와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은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성찬과 세례다. 그렇다면 세례와 성찬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라 할 수 없다. 물론 성례를 거행한다 하여도 성례의 의미를 모른 체 참여한다면 이 역시 바른 교회라 할 수 없다. 물론 성례가 구원의 방편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는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하나의 도구요 방편이 된다.
성례가 주는 유익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됨이요, 그의 백성 혹은 그리스도에게 소속됨을 확인하게 된다. 개혁파는 천주교와 달리 성례의 종류를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 인정한다. 성경이 그것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례란 물을 뿌리며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를 씻는 의식이다.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한다. 바울은 골2:12, 롬6:3-8에서 세례의 효능에 대해 언급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 '합하여', '함께'라는 단어를 동원하여 그리스도와 동일시 동질화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성찬의 의미와 요소 그리고 그 효능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성찬은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 성찬의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떡을 떼는 일과 잔을 붓는 일이다. 떡은 예수님의 살이요 몸이다(눅 22:19). 잔,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막14:24).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하였다. 이는 이사야 53:10-12을 인용하신 말씀이다.
출애굽기 24:8을 보면 최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모세는 그 언약 위에 피를 뿌렸다. 그런데 예레미야 31:31-33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언약을 갱신하여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성찬을 베풀 때, 잔을 나누면서 이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였다. 성찬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사를 통한 새 언약의 효능이 우리에게 실제로 적용되도록 성령이 역사 하시는 축복과 은혜의 시간임을 잊지 말라.
이와 같은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참여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요,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다.
주님오실 때까지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고백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만인에게 전파하는 교회 되기 바란다.
991114
제목 성찬에 참예할 자
저자 변한규목사
본문 롬6:1-5
참고사항 광주중앙교회
설교내용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성례'라는 말은 기독교의 '거룩한 예식'이라는 뜻인데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입니다. 성찬은 떡과 잔을 들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 상하신 몸,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고전 11:20에서는 이 성찬을 "주의 만찬"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거행하려는 이 성찬 예식은 비록 눈으로 보이는 떡과 잔을 들기는 하지만 '기념하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찢기신 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보배로운 피를 기념 하려는 예식인지라 너무도 거룩하고 송구하고 소망이 넘치는 매우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자가 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첫째,예수와 합한 자
롬6장의'합한다'는 말은 '접목한다 접붙인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접붙임 받으면 인생이 가치 있게 됩니다. 없었던 힘이 생기고 잃었던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 있고,예수님 안에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예수님때문에 사는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지만 의 되신 예수님과 합하여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으며,죄 씻음 받았고, 의롭다 함을 입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고,천국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찬 예식에 참여 하면서 우리의 심령 속에 평화, 기쁨,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신령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찢기신 살과 예수님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심정으로 이 예식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종일관 기도하는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인 생이 힘을 얻고 재기할 수 있는 비결은 기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심정으로 이 성찬예식에 동참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세례를 받은 자
성찬에는 세례를 받은 자만이 참예할 수 있습니다.
(1)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입니다. 본문 2절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서 해방 받았다는 말로 이제는 죄의 종 일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내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내 죄도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죄 가운데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이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면서 죄사함받은 찬송, 감사,감격 속에서 참회하면서 성찬예식에 참예해야 할 것입니다.
(2)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본문 3절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성도는 예수의 죽음과 함께 세례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장사지 낸 바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의 혈기, 교만, 욕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살아 있어야 될 것 살지 아니하고 이미 죽었어야 될 것 죽지 아니할 때 덕스럽지 못한 일이 생겨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워 집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를 받을 때의 서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례의 의미 속에 이러한 서약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찬 예식에 참예하면서 서약한 것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세례는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했다는 뜻입니다. 본문4절이 그 내용입니다. 사랑 하는 성도여, 내 안에 내가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 속에 주님만이 살아 계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자기를 살핀 자
고전11:28"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사랑하는 성도여, 성찬 예식에 참예하면서 자기를 살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네가 누구냐?" 물으면서 진실한 인생을 배우는 신령한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짓이 없고 부정이 없고 더러운 것 냄새나는 것이 전혀 섞이지 아니하는 진실한 인생을 배우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복된 예식에 참예하면서 가난한 심령,애통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조용히 자신을 향하여 물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와 합한 자인가?" 내가 참으로 세례를 받은 자인가?"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까?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 입니다.
본문 1절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그럴 수 없느니라"를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성찬예식에 참예할 때 "나는 믿음이 너무 약하고, 의지, 육신도 약하지않는가?" "나는 전도에 있어서는 병들어 있지는 아니한가?" "나는 성전건축에 있어서는 잠자는 자가 아닌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 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자기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거룩 거룩한 성찬예식에 참예하려고 할 때에는 자기를 살핀 자만이 이 예식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해야 될 것입니다.
20일 홍해작전 특별 새벽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 능력 받을 만한 때, 심령이 부흥할 만한 때, 그래서 가정이 부흥하고 교회가 능력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동참 하셔서 은혜 많이 받고 믿음의 생기를 얻고, 새롭게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동참하셔서 은혜 많이 받고 믿음의 생기를 얻고, 또 새롭게 능력 얻는 우리 모두들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은혜 충만한 이 시간 되어지기를 소원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상에 오신 예수님
저자 변한규목사
본문 요3:16
참고사항 광주중앙교회
설교내용
봉독한 요3:16은 성경전체의 요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약하면 '기독교는 주셨으니'의 종교입니다.
'주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냈다는 의미요. 예수님 편에서는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첫째, 어디에 오셨는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세상'은 죄악 된 인간을 의미하며 어둠이 짙은 세상, 죄악 된 세상, 고통이 많은 세상, 눈물이 있고 근심이 있는 세상, IMF 세상, 죽음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사 예수님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셨습니다. 교회를 주신 것은 모이기를 힘쓰기 위해서입니다. 루터는 교회를 어머니처럼 여기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가? 교회를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흥사경회를 할 때에 양식을 싸 짊어지고 이부자리를 어깨에 메고 열심히 좇아 다니면서 은혜를 사모하지 않았습니까?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셨으니'의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오늘 성례주일 성찬예식에 동참하면서 떡을 들고 잔을 들 때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성찬예식에 동참하는 성도들 모두 모두에게 이러한 사랑과 축복이 넘칠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 육신은 살과 피가 있는 우리와 똑같은 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죽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비밀한 이름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로고스" 곧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말하려고 오신 말씀이요. 하나님을 나타내고 또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오신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눈에 뵈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을 수 없지만 예수님은 육신, 곧 사망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아니했더라면 육신인 내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영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그 몸을 찢기시고 피를 쏟으셨으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가 사니 너희도 살리라"말씀하셨습니다. 요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성찬예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예수님을 모셔야 될 바로 나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하려는 성도들이여, 떡과 잔을 들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소망이 넘치는 찬송을 마음으로 불러야 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내 약한 육신이 강하게 하옵소서"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외면한 자는 불행한 자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주님 예비하신 넘치는 축복을 우리의 심령가운데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어째서 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 "이처럼"이란 뜻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실 만큼 사랑하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나의 구원을 성취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본문에도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루터는 성찬상에 놓인 떡과 잔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죄악 된 인생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얼마나 많이 넘어졌고 새로워 졌으며 새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성도여, 떡과 잔을 들면서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을 주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과 같이 죄의 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들이 짐승의 형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거듭나지 아니하면 안되는 인생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죽으신 우리 주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친히 성찬예식을 마련하사 성찬상에까지 오신 우리 주님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죄를 회개하라 인자의 온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예식에 참석하면서 떡을 들 때에 잔을 들 때에 내 가슴이 뭉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주님, 내 남은 날 주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갈꼬 생각하면서 재헌신을 다짐하는 거룩한 예식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비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십시다. 우리 주님과 함께 먹고 함께 마시는 복스러운 성찬예식이 되어질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에의 초대
저자 안영모목사
본문 시136:1-7 요6:53-59
참고사항 경주성화교회
설교내용
한해동안 받은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진정한 감사를 우리 하나님께 드리며 성례예배에 동참한 우리 성도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은혜가 충만하시고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교회의 샘 줄기가 되게 한 예식이 있다면 바로 성찬예식입니
다. 근대신학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독일의 쉴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가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하나는 기도이고,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는 성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성찬예식 입
니다. 성도는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
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새로운 약속의 관계를 맺고 복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초대하신 성찬예식에 참여했습니다. 성찬의 의미와 뜻을 생각해보면서 신령한 교
제를 나누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찬은
첫째 / 내 자신을 살피며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고전11:28에 보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하
였습니다. 성찬에 참여한 우리는 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살필 때 허물이 있고 혈기가 남아 있고, 아직도 마음 가운데 불의한 것
이 남아 있다면 이것을 다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참여해야 합니다.
둘째 / 성찬은 생명을 얻게 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지 아니하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
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롭게 태어날 때 우리의 모습이 달라
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언어가 달라지고 얼굴이 달라지며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셋째 / 성찬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고 잔을 나누어주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
씀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습니
다.
넷째 / 성찬은 새 힘을 얻게 되는 예식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밥을 먹어야 힘이 생깁니다.
우리의 심령과 영도 먹어야 영적인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은 예수 그
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하여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포도즙을 먹음으로써 믿음이 생기고 새 힘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새 힘을 공급받아야 어떤 고난도 고통도 이겨나갈 수
있으며 세상도 마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새 힘을 공급받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잘
감당해 나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목 거룩한 성찬
저자 이석권목사
본문 마26:26-30
참고사항 순천성북교회
설교내용
우리 기독교에는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두 가지 성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례와 성찬을 말합니다. 오늘은 그 두 가지 성례 중에 성찬에 관해서 피차에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⑴ 성만찬의 역사적 내력
성만찬의 기원은 아무래도 유월절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유월절은 장막절,
오순절과 함께 유대 나라의 3대 절기 중의 하나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인 출애굽을 하기 전날 해질 무렵에 미리 준비했던 1년 된 흠 없
는 양들을 매 사람 수대로 잡고, 그 피를 자기들이 살던 집의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발랐습
니다. 그리고 양고기는 불에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과 같이 먹고 남은 것은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먹
게 되어 있습니다.
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은 고기의 체질을 파상시키지 않기 위함이니 민족의 단합과 일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② 쓴 나물을 먹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생하던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
니다.
③ 무교병을 먹는 것은 옛날의 죄악을 제거하고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됨을 상징합니다.
④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을 예표하는 것입니
다.
⑤ 유월절 음식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것은 성물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출애굽 사건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구속받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유
월절 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진 다락방 만찬으로 끝나고 그후의 유월절 기념은
성찬 예식으로 거행하게 된 것입니다.
⑵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진 만찬
① 마지막 만찬입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서 식탁에 둘러앉은 제자들은 그 자라가 어떤 자 리인지, 그 다음
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지만 예수님은 이 만찬이 끝나고 나면 곧 체포되어서 십자가
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화가 레오날드 다빈치는 예수님께
서 제자들과 함께 만 찬 석에 둘러앉은 그림을 그려서 마지막 만찬(The Last Supper) 이라
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② 주님을 기념하는 만찬입니다.
고전11:24-25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 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세
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찬을 행할 때마다 주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기념해야 합니다.
③ 거룩한 만찬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찬을 잡수시다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자마다 "주여 내니이까? 주여 내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죄 중에 주님을 배신하는 죄가 제일 큰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을 행할 때마다 "
주여 내니이까?" 하면서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만찬은 거룩한 만찬이오 동시에 자신
을 살피고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목 성찬의 메시지
저자 이신복목사
본문 눅22:14-23
참고사항 서울제일교회
설교내용
성찬, 혹은 성만찬(The Holy Communion)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서 유래(由來)된 것으로 초대 교회이래 교회가 지켜온 거룩한 예식이다. 초대 교회시대에는 모일 때마다 거행했는데 일부 생각없는 사람들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일이 있어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에 이를 책망하고 권면한 내용이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찬예식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 그러면, 이제 성찬의 의미는 무엇이며 성찬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자.
I. 주께 받은 것이다(고전11:23-25)
주 예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또 이것을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성찬은 주 예수께로서 온 것으로 거룩한 것이다.
Ⅱ. 떡과 잔(고전 11:23-25)
주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다.
오늘까지 우리가 떼는 떡은 주님의 몸을, 나누는 잔은 주님의 피를 의미한다.
Ⅲ. 피로 세운 새 언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최초의 언약은 에덴동산에서 체결된 선악과 언약이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범죄로 이 언약이 무참히 깨어지자 하나님께서는 곧 무조건적인 언약, 즉 "여자의 후손"(창3:15)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아브라함(창12:1-3)을 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의 성문화(成文化)가 430년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의 사이에 체결된 십계명 언약이다.(출20:1-17)
이 십계명, 즉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므로 새 언약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요3:16) 구원의 길이 열렸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요 1:12)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게 되었다.
피로 세운 새 언약의 의미를 알자. 보혈의 능력을 알자. 예수 십자가의 피로써 죄와 저주는 끊어지고 흑암권세는 깨어졌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이다(롬8:1-2).
Ⅳ. 구원받은 자들의 신앙 고백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이 구원의 신앙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주님의 몸과 흘리신 피가 내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믿고 고백하는 행위가 성만찬이다.
Ⅴ. 보이는 예배
일반적으로 예배는 말씀의 예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우리는 아멘으로 응답한다. 여기에 성찬은 보이지 않는 말씀에 비하여 보이는 예배로써 의미를 가진다. 떡과 잔을 들 때에 더욱 생생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속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Ⅵ. 재림 신앙의 보전(保傳)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주님 다시 오실 것을 굳게 믿으며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신앙을 굳게 가지게 하는 것이다.
Ⅶ. 유월절 어린양
예수께서 이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때가 유대인의 절기로 유월절이었다. 성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으셨다고 하는 깊은 의미가 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36) 한 말이 바로 그 뜻이다. 이사야 53:1-6이 말씀하신 대로 대속제물(代贖 祭物)이 되신 것이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의 피를 바른 그 날, 바로는 꺾이고 이스라엘은 해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흑암권세는 꺾이고 모든 죄인들이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다.
- 그러므로, 주의 떡이나 잔을
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지 말자(고전11:27).
②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들자(고전11;28).
③ 함부로 하면 죄가 있다(고전11:29).
④ 잘못하면 죽는 수도 있다(고전11:30).
- 이제 성찬의 의미, 성찬이 주는 메시지를 바로 깨닫고 온전한 마음과 믿음으로 참여하여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주시는 넘치는 은혜와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자! 아멘.
제목 성찬과 영원한 생명
저자 손영화목사
본문 요6:47-58
참고사항 광주영림교회
설교내용
미국 듀크대학의 제임스 클리란드 박사는 소년 때, 어머니에게서 성찬에 대하여 처음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동이 수십 년이 지났으나, 지금도 새롭다고 말했습니다. 제임스는 어머니께 성찬에 대하여 설명해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제임스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을 먹고 마시며 나를 잊지 말라고 부탁하셨단다. 제임스야, 나는 주님의 제자야. 나는 주님을 잊을 수가 없어. 그래서 과거 수십 년간 한 번도 주님의 부탁을 잊지 않고, 반드시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마시며 주님을 기억했단다."
우리도 오늘 주님의 분부하심을 받들어, 성찬에 참예하려고 합니다. 성찬을 받기 전에 먼저 성찬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그 전날 밤에 언제나 같이 했던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주님의 그 거룩한 식탁 앞에서 제자들은 결점과 허물의 먼지들도 그대로 묻은 채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팔려는 유다까지도 그 곳에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세상 먼지가 낀 채로 나왔어도 좋습니다. 마음과 영혼의 먼지를 씻어 내고, 주님과 만남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의 제자들은 성찬의 감격을 간직하고 어디서나 주님의 제자로서 살다가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마태와 요한은 생생하게 성경에 기록해 두고,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받게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주림이 있습니다. 음식을 얻지 못한 육체의 주림과 음식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주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기근, 생명에 대한 기근, 사랑에 대한 기근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보다 그 앞 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영혼의 주림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25-27절).
예수님은 진리와 생명과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생명과 사랑에 기근당한 자들은 예수님만이 치료하고 구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믿으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온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한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왔다면 하늘에서 떡을 내려 먹게 하라. 그러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떡은 생명을 지탱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얻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1. 이 생명은 어떻게 받습니까?
우리 함께 53~5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여기서 '먹는다', '마신다'는 말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기를 즐깁니다.
전에 한 달 동안 "성경답사연구"를 하며, 애굽의 남쪽 룩소르에서부터 시내 반도를 거쳐,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돌아서 터어키의 이스탄불까지 20여 일이 지나는 동안 거의 아랍 사람들의 노린내 나는 음식을 먹고 지냈습니다. 일행 목사님의 친구집에서 한국음식을 먹고, 우리는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세상에서 다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음식은 극히 평범한 한식이었는데도, 우리를 무척 행복하게 했습니다.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맛있고 즐겁게 먹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맛있게 먹고 마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맛있게 먹고 마실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맛있는 음식처럼 즐겁게 영접하여 모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음식처럼 먹고 마시며,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믿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으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라."라고 하셨습니다(55절).
2. 이 생명은 예수님과 연합된 생명입니다.
5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육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걸림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사람을 잡아 먹는 식인종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몸과 흘린 피를 말합니다. 그 살과 피로 우리의 죄값을 갚고, 속죄해 주신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시면, 그리스도와 영접한 그 사람과는 하나가 됩니다. 마치 음식을 맛있게 먹고 마셔서 그 음식이 내 속에서 내 살과 피가 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가 받아들여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살고, 나도 너희 안에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신 말씀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처럼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와는 생명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가지가 나무에게서 끊어지면 죽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우리는 끊으려 해도 끊어질 수 없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영원토록 함께 살아야 할 한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한 생명체로서 사시기 바랍니다.
3. 이 생명은 영원합니다.
57절에서 "……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로 인하여 산다."는 말씀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얻어진 생명의 근원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또한 58절에서 "……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을 배부르게 한 음식은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양식은 잠깐뿐입니다. 먹고도 배고프고, 먹고도 죽을 음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음식 삼아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은 죽되 영원히 죽고, 영접하여 살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으로 된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아난 우리 모두, 예수님을 위해 살아갑시다.
제목 주님의 성찬에 참예하는 바른 태도
저자 William Powell Tuck
본문 출16:14-21 막14:22-25
참고사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설교내용
우리들이 성찬식에 참예하는 태도를 돌이켜 보면 대부분 성찬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는 것인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찬식의 신성함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참에는 하지만 그 의식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 라든지 신비스러움 또는 경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성찬에 참예하는 바른 태도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하며 우리가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1. 우리들이 첫 번째로 기억해 두어야 할 젓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찬의 주인'이 되신 다는 사실입니다. 성찬은 우리가 베푼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베푸신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시고 잔을 돌리는 자리가 성찬의 자리였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참예할 떡과 산에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의 초대로 성찬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찬을 위 해 자기에게로 오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영접하기 위해서 손을 펼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며"너희 중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찬의 참예는 받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을 받기 위한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찬에 참예할 때 먼저 우리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그리고 죄사하심의 수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 베드로, 너 안드레와 야고보, 너희 여기 모인 열두 명의제자들, 너희를 위해 내가 내 생명을 버린다. "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여러분과 저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는 "진정한 종교란 인칭대명사로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추상적으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으며, 모두 그 사랑을 지금 받을 수 있습니다.
(2) 구약의 본문말씀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만나에 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내일을 위해 저장할 수 없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새롭고 신선한 만나를 모아야만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많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새롭고 신선한 힘을 공급받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힘을 저장해 둘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예배에 참석하면서 자신들의 삶이 무기력하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의아해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역경에 처해 있었을 때에 자신들의 신앙이 그들을 지탱해 주지 못했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날마다 신선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분이 베푸시는 식탁으로 와서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힘을 얻어야하는 것입니다. 그의 용서와 사랑과 은총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는 보다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위해 보다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성찬에 참예하여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분이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일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성찬에 참예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이라는 말로 영어에 '유카리스트'(Eucharis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감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그 위대하신 일을 감사하는 자리가 바로 성찬의 자리입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는 또한 '성찬이 주님이 세우신 언약의 증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잔은 새 언약의 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만찬이 열리던 그날 밤은 옛 언약이 끝나고 새 언약이 시작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예래미야는 돌에 새겨진 언약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질 언약으로 바뀌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주님이 떡을 베푸시고 잔을 돌리시던 그 다락방에서 새 언약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그 시점부터 인간의 마음에 새 언약이 새겨졌고, 새로운 공동체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자신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온전히 섬긴다면 우리는 이 언약의 공동체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지체들과 어려움과 고통을 함께 나눌 것을 언약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른 지체들로부터,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주님의 성찬에 참예하는 매순간이 언약의 증표를 되살리는 순간입니다. 성찬식은 주님과 우리들, 우리 자신들과 우리들 사이에 세워진 것이므로 이 아침에 성찬에 참예하기 전에 잠시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마땅할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 성찬에 참여하는 마음(세계성찬주일)
저자 김영태목사
본문 고전11:23-26
참고사항
설교내용
신앙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면서 출발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출발하려면 출발하기 전에 먼저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 기계들이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기름은 있는가? 타이어는 정상인가? 이런 것들을 모두 점검한 후 이상이 없으면 자동차는 출발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이름에도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것은 없는가?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의 생명에 동참하여 살고 있는가? 구원받은 확신을 갖고 사는가? 등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점검해 보아야 할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짐으로써 신앙은 출발하고 생명에 참여합니다. 신앙은 영적인 교제와 체험 없이는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체험 없이 아무개가 믿으니 나도 그렇게 믿겠지 하는 신앙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지 않고는 음식의 맛을 모르고, 먹지 않고는 배부를 수가 없습니다. 옆 사람이 먹었다고 해서 내가 그 맛을 알고 배부를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먹은 사람이 먹고 난 후에 참 맛있다고 할 때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직접 먹어 보아야 맛을 알고 배부름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관계를 가지지 않고서는 믿는 사람들의 기쁨과 감격을 알 수가 없습니다. 흉내는 낼 수가 있겠지요. 맛있는 척하고, 배부른 척 하고, 믿는 척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 하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예식에 참여합니다.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에 떡과 잔을 가지고,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과 피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확증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1.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모든 제자에게로 나아가서 모든 믿는 신자에게로 나누어 졌습니다. 그것은 곧 한 몸 되게 하심입니다. 즉 예수님의 형상이 믿는 모든 사람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된 모습으로 살아갈 때 예수님의 몸은 온전해지십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연합할 때 모든 기능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성찬을 나눌 때마다 늘 생각할 것은 우리는 하나요, 서로 떨어져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이면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마음은 주님 앞에 겸손히 "이제 내가 작은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세상에 주의 뜻을 이루겠다. "고 다짐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모습으로 사는 것, 그리고 하나되어 사는 것, 이것이 몸을 나누는 마음입니다.
2.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피는 곧 생명을 말합니다(레 17:ll). 주님은 자신와 생명을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 : 53 이하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내가 아버지를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속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에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생명 안에 내 생명이 하나가 되어 버리니 내 생명은 영생의 생명이 됩니다. 밝은 전등불 밑에 촛불은 있으나 마나 합니다. 그 촛불이 꺼졌다 해도 나는 밝음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끝이 나지만 이제 주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없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성찬은 단순한 빵조각과 포도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아무런 생명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마치 먼 옛날 아프리카의 원시인들이 보석을 가지고 놀면서도 보석인 줄을 몰라 백인들이 가져다주는 빵조각과 보석을 바꾼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눈이 떠 있고 신앙의 눈이 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주님과 내가 하나된 것과 성도와 성도가 하나된 것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빵만 먹으면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우리에게는 신령한 양식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 신령한 양식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요 6: 55). 이 신령한 양식을 먹는 자들이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은 몸과 피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찬에는 나눔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나눔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찢으시고 자신의 피를 다 쏟으셔서 이 세상 모든 사람과 나누셨습니다. 성찬에서 떡을 나누고 잔을 나누어 마시게 함은 곧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나누어 갖도록 교훈하심인 줄 압니다. 이 세상에는 생명을 나누어야 할 자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과 함께 그가 가지고 계신 생명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병든 자, 죄인, 창녀, 세리, 가난한 자, 고아, 과부들,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찬을 나누는 이 시간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나누어야 하는 주님의 부름에 초대되길 바랍니다.
제목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세계성찬주일)
저자 김동익목사
본문 고전11:23-29
참고사항 서울새문안교회
설교내용
2000년 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교회의 본보기 예식이 있다면 성찬식이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영합되면서 새로운 삶을 다짐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약속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성찬상 앞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단순히 떡과 잔을 가진다는 생각보다는 우리 주님이 친히 오셔서 우리를 위해 찢기진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떡과 잔을 직접 우리 입에 넣어 주신다고 생각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새로운 약속을 다짐할 수 있는 성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성찬을 통해서 어떤 약속을 우리와 맺기를 원하시고 계시겠습니까? 동시에 성찬의 떡과 잔을 가진 우리들은 주님 앞에 어떤 약속을 해야 하겠습니까?
1. 성찬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새로운 언약입니다.
마태복음 26 :28에 보면,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의 떡과 잔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시 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감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사야 53 :6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이 떡과 잔을 받을 때,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주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올바른 길을 걸으려 하였지만, 이런 저런 실수와 잘못, 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요." 우리들의 잘못, 허물, 실수와 분노, 죄를 주님 앞에 겸허하게 고백하면서 주님의 손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 떡과 잔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성찬을 통해서 회개와 용서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2. 성찬은 화해를 이루기 위한 언약입니다.
에베소서 2 : 13~15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이 떡과 잔을 가지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생활,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떡과 잔을 가질 때 이제는 새로워지겠습니다. 옛 것을 정리하고 새 사람이 되겠다는 이 다짐, 이 약속 가운데 성찬을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멀리 있던 사람들을 서로 가까이 하게 합니다. 서로 서먹서먹했던 사람, 거리감을 느꼈던 사람, 때로는 분노와 섭섭함과 감정의 손상을 가졌던 그 사이를 가까이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셋째, 화평케 하고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이 떡과 잔을 가지면서 멀리 있던 사이를 가까이 하겠습니다. 서먹서먹했던, 서로 원망했던 사이를 가까이 하겠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서로 화해하겠습니다. 이러한 다짐과 더불어 화평케 하신 그 주님의 몸과 피를 가집시다.
가족 관계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 서로 섭섭한 관계가 있습니까? 마음상하는 일이 있습니까? 감정에 손상을 입고 있는 관계가 있습니까? 성찬의 떡과 잔을 가지면서 화해를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화해의 마음의 준비가 없으면 성찬의 떡과 잔을 받지 마십시오. 이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흘리신 피, 찢기신 살을 기념하는 이 떡과 잔을 가지시면서 화평케 하신 그 주님의 사역을 내가 감당하겠다는 다짐 속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성찬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화평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대접하는 자가 대접을 받을 수 있으며, 먼저 낮아지는 자가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성찬은 상처를 치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53 :5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어떤 분이 예수님을 이사야 선지 예언에 의해 바라보며, "고통당한 자와 함에 울고 괴로워하고, 슬픔에 잠긴 자와 함께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상처받은 사람의 그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수가 성 여인의 상처받은 마음을 싸매주셨습니다. 남들로부터 증오와 버림을 받던 세리 마태의 마음을 감싸 주었습니다. 상처받은 자의 그 심령을 감싸 주고 위로해 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성화의 떡과 잔을 가지는 우리에게도 역사하셔서 상처받은 심령, 상처받은 마음, 여러 가지 감정에 손상을 입고 있는, 실패와 좌절을 가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상황을 치유해 주시고, 우리들의 연약을 도와 주십니다. 치유케 하시는 능력이 주님의 성령을 통해 전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듯이 우리도 남이 당하는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가르쳐 주셨듯이 우리 역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세 종류의 인간상이 있습니다. 즉 상처를 입은 자, 상처를 입힌 자, 상처를 싸매 주는 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상처를 입고 산다. 피해를 입고 산다. "고 생각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으로부터 피해를 입고 산다고,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에 대한 불평을 말합니다. 때로는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 환경이 나쁘다, 친구를 잘못 만났다, 여러 가지 자기의 상처, 실패, 좌절, 고통이나 괴로움을 모두 남의 탓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자처합니다. 자신은 남에게 상처를 하나도 입히지 않은 것처럼 어떤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는 분명히 상처를 입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상처받은 사람의 곁을 지나가는,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곁을 지나가는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겉으로 보기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면 그 사람들 역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입니다. 상처입은 사람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상처받은 자를 방치해둠으로 인해서 또 상처를 더 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상처를 입힌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제사장처림 상처를 방치하는 자로서 상처를 입힌 자가 되지 않습니까? 아니면 상처받은 자의 그 상처를 싸매 주려고 하는 주님의 사랑과 그 긍휼의 손길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말씀에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 말씀하십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가지실 매, 우리 주님이 오셔서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 육신의 고달픔, 사업의 실패, 감정의 손상을 치유해 주시고 성찬의 잔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작은 예수가 되어 고통과 고달픔과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는 상처받은 이웃의 상처를 감싸주는 따스한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을 가지며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언약의 관계를 새롭게 맺기 위해서 우리 입에 떡을 떼어 주시고, 우리 입에 잔을 부어 주신다고 생각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 주님 앞에 새로운 약속을 다짐하셔야 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회개와 용서'의 약속을 합시다. 멀리 있던 사람과 가까워지는 '화해'의 약속을 하십시다. 상처를 입히는 자가 아니라 상처를 감싸 주는 사람으로 사랑과 긍휼을 다짐합시다.
제목 사람들을 제자리에 두심에 관하여(성찬예배)
저자 H. Alden Welch
본문 눅14:7-11
참고사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설교내용
어느 나라에서든 최고의 만찬회에서는 우리가 어디에, 누구와 함께 앉도록 좌석 배정을 받느냐가 몹시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만약 여러분이 누가 성공 도상에 있으며, 누가 내리막길에 있는가 알고 싶으면 손님들이 어느 좌석을 배정받았나를 보라고 말합니다.
1세기 경에도 좌석 배정에 대한 비슷한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명 인사들이 앉는 가운데 자리를 원했습니다. 예수께서 어는 유력한 바리새인의 집의 이러한 최고의 만찬회 중 하나에 초대받으신 일이 있습니다. 도착하신 주님은 자신의 높은 지위를 확신하여 스스로 영예로운 자리에 앉은 일부 손님들을 홍미를 갖고 주시하셨습니다. 그는 주인이 도착할 때 재빨리 몇 사람을 자리를 바꾸어 앉게 할 것이고, 이 먼저 온 사람들이 크게 망신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에서 한 교훈을 보셨습니다. 그는 또 하나의 비유를 만드셨습니다. 그 교훈은 무엇이었습니까?
1. 손님들은 기다렸다 앉아야 합니다.
(1) 언뜻 보기에 이 비유는 연회에 가는 사람들을 위한 예절상의 교훈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고, 기다렸다 앉으십시오. 그리고 만약 기다릴 수 없으면 주인의 의사를 알 때까지 말석에 앉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좋은 예의가 전부는 아닙니다-그것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고, 우리의 개인적 혹은 세계의 문제를 풀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마는 그것이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얼마간 제거하고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더욱 유쾌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회적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군의 주는 우리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실로, 그가 비난을 받은 것 중의 하나는 그가 기꺼이 누구하고나 식탁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2. 겸손은 기릴 덕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 아무도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적극적인 나섬에 공개적으로 갈채를 보내지만, 속으로는 그것에 분개하고 은밀히 그것에 저항합니다. 주제넘게 나서는 사람은 결국 제자리로 가게 마련입니다.
(2) 역사 이래로 어느 시대에나 겸손은 기림을 받는 덕이었습니다. 잠언 기자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하였습니다(잠11:2). 성 어거스틴은 "사람을 천사로 만드는 것은 겸손이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머슨(Emerson)은 '겸손한 자만이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3) 예수는 겸손을 가지셨습니다. 그는 너무 교만해서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기지 못하며, 너무 교만해서 가장 낮은 자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봉사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며, 어린 아이 같은 겸손과 결백을 기리셨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늘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자기를 낮추시고"(빌2:6,8).
(4) 그러나 이 비유를 단지 좋은 충고로 여기는 데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겸손을 개발하려고 착수하고, 다른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자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실은 자기 멋대로 행동하면서도 얌전한 척 한다면 우리는 결국 덕이 아니라, 계산된 종류의 겸손을 보이는 것으로 그것은 속이는 죄이기 때문에 가장 나쁜 종류의 죄입니다. 이 비유의 참 의미를 알려면 우리는 아직 더 깊이 파헤쳐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사람들을 제자리에 두시는 분이십니다.
(1) 예수의 모든 비유가 그러하듯이 이 비유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및 우리와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며, 이것은 그의 연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제자리에 두시는 분이십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낮추거나 높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그가 바라보시는 그대로 우리에게 세상과 인생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리고 일의 구성에서 우리의 자리를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를 겸손케 하실 것입니다. 흔히 사용하나 부정확한 표현은 "욥의 인내"입니다. 사실 욥은 그렇게 인내심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푸념하며 불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불평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은 그의 시각에서 본 세상과 그가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그에게 보이십니다. 그것이 욥을 제자리에두며 그로 침묵하게 합니다. 우리가 전능자 앞에 나아와서 그가 보시듯 우리 자신과 인생을 볼 때에 우리도 겸손해질 것입니다. 타이런 에드워즈(Tyron Edwards)가 말하듯이 "진정한 겸손은 비굴한, 자기를 경멸하는 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듯 우리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대조하여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에 교만이 죽고 겸손이 자랍니다.
(3) 그러나 자신의 임재로 우리를 겸손케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그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습니다. 헌터(A. M. Hunter)의 말이 맞습니다 : "가장 좋은 자리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주제넘는 생각을 할 때에 우리를 우리의 자리에 두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의 연회 식탁에 한 영예로운 자리를 따로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 또한 겸허하게 하는 사상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겸손이 있습니다. 자기 머리를 숙이는 종의 겸손과 자기 부모의 얼굴의 미소를 보려고 자기 머리를 드는 아이의 겸손이 있습니다. 우리로 절하게 하는 겸손과 우리로 솟구치게 하는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겸손을 다 주십니다.
제목 새 언약은 실로 모험적이다(성찬예배)
저자 Robert T. Young
본문 렘31:31-34 벧전2:4-10 눅22:14-20
참고사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설교내용
1. 성서적 의미의 언약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고서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알아 봅시다.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는 우리가 자유로이 들어가는, 자유로이 머무르는, 또한 우리가 자유로이 취소하는 관계입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언약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심을-하나님이 창시자이시요, 제 1차적 행위자이시요, 동기 부여자이시요, 발기인이시요,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심을-보여 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 (1) 우리는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받고 인익을 얻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2) 우리는 남과 세상을 돌봄에 있어서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초대를 받습니다. 따라서 언약은 하나님의 행위와 우리의 응답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의 계약에 참여하라고 부르심은 창조 그 자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 부르심은 노아, 모세, 아브라함, 이사야, 예레미야, 예수, 제자들 및 초대교회 교인들의 생애와 체험에서 보여집니다. 언약에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악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우리의 순례의 길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십니다 길을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징조를 주십니다.
2. 우리에게 계약을 맺으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항상 정상에 오르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우리로 즉시 약속된 땅에 들어가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모신다는 것은, 주님의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큰 모험입니다 !
3.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언약 경험에 대하여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으로부터 즉시 약속된 땅으로 이동하였다는 경험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언약과 약속된 땅 사이에 광야가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계약을 관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그 요구와 그 주장과 그 계약은 종종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때에 임합니다. 신약에 계약 하든가 받는 세 표상(image)-세례, 성찬, 성령-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종종 우리는 리가 그것을 관리한다고 느끼는데,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아주 평이하게 보여집니다. 우리는 세례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고, 성찬을 우리가 먹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다(do), 먹다(take), 가지다(have)-이 셋은 몹시 소유적인, 지배적인 동사들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왜 그것들이 우리 담당이라고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것이며, 성찬은 우리가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 언약은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를 의미합니다.
4. 그러나 그것은 모험적인 일입니다. 종종 언약은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때에 임하며, 종종 언약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 때와 곳에 임합니다 ! 종종 언약은 우리가 내키지 않는 책임을 의미합니다 ! 모세와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예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함께 얼하고 실지 않은 사람들과 일하며, 남들이 알아 주지 않는, 상관하고 싶지 않는 명분을 위해 싸우며, 우리가 전혀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문제들을 다루게 될지도 모릅니다.
5. 그러므로 만약 다음 몇 주가, 내년이, 혹은 심지어 여러분의 여생이-모세의 경우에서처럼-새 삶하고, 새 언약을 실행하려 할 때에 광야처럼 보인다면 있어도 괜찮습니다 ! 모세, 아브라함, 예수 같은 분들이 그곳에 계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그곳에 계십니다 ! 바로 그곳 광야에 그 여행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과 실재가 있으며, 순례 중인 우리를 위한 상징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녀를 위한 만나가,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그러한 표적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낮에 EM는 무지개와 떡과 포도주와 수건과 대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다. ꡒ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ꡓ ꡒ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ꡓ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계약은 모험적인 일입니다. 정말로 모험적인 일입니다!
제목 자신을 시험하라(성찬예배)
저자 J .A . Davidson
본문 고전11:28
참고사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설교내용
1. 만약 우리가 신약의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주의 만찬이 ꡒ죄인들을 위한", 실로 죄인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영적, 도덕적 시험에서의 우리의 높은 명성에 대한 일종의 대가로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성찬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선의 상징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로 오십시오"(Come as yon are) :이것은 성찬에의 초대에 항상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이 부주의하게 혹은 무심코 성찬에 오실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 이 아닙니다.
2.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그의 첫 서신에서 바울은 예배자의 성찬식 준비를 위한 이 규정을 말했습니다 .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이 잔을 마실지니." "살피다"의 헬라어 원어에 "시험하다"(test)의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금속을 시험함을 언급하였으며, 그것은 기본 품질의 세밀한 점검과 평가 및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성능 평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점수를 매기는 종류의 시험을 요구하지 않으시며, 다만 그는 시험되는 것의 참 본질을 드러내는 종류의 시험을
요구하십니다.
3. 아마 때로 우리는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만큼 충분히 선하지 않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이 가상할 만하며 정직할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왜곡된 감수성의 문제이며, 성찬의 본질과 목적의 심각한 오해를 보이는 것입니다. 종교상의 이러한 완전주의는 우리가 영적,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어떤 기독교 예식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약 거의 완전함의 표준이 요구되어진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참으로, 성찬식에 참여할 만큼 층분히 선합니까?
4. 우리는 완전해야 한다거나, 완전에 가까워야 한다는 요구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참회하라는 요구를,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거기서 본 바에 대하여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바울은 이 참회가 성찬식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16세기의 위대한 영국의 성직자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는 회중의 고백기도는 각 예배자가 "자신의 개별적 차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입에서만 구르는 말뿐인 기도나 고백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말들이 우리 자신의 믿음없고 사랑없는 행위를, 우리 자신의 교만과 이기의 경향을, 우리 자신의 악의와 시기를-우리 자신의 피를-일깨우게 해야 합니다.
5. 존 칼빈(John Calvin)은 그 문제를 매우 현실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 "만약 우리가 여전히 믿음 혹은 생활의 고결함에 있어서 약하다는 것을 우리가 성찬에 오지 않는 구실로서 주장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그가 아프기 때문에 약 복용을 삼가는 핑계를 대는 것과 같다. " 성찬에 와야 할 자는 불완전한 자, 궁핍한 자, 근심하는 자 뿐이요, 죄 많은 자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찬에 올 때에 비유의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하고 말할 수 있다면 거기서 여러분은 자애로우신, 용서하시는 주님을 만날 것이며, 거기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의 상처에 대한 치유를, 그리고 여러분의 생의 여로를 위한 힘과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요한 일서에 이것이 보증되어 있습니다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1:9)
우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 전에 자신을 시험해야 합니다. 이 시험은, 이 고백은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자기 정죄에 빠지는 것도 아니며, 자신에 대한 슬픈 비관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에 패한,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의 문제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들이시며, 우리를 도우시어 의미와 목적의, 평강과 성취의 삶을 얻게 하심을 신뢰함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먹을 가치가 없음을 인정함에 의해서만 성찬을 먹을 자격을 우리 스스로가 부여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창조적 역설중의 하나입니다. 성찬을 먹으십시오! 성찬은 죄인들을-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을 통해서 속죄와 성취에 이르는 길을 보게 된 죄인들을-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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