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통치(사무엘하)

2008. 7. 3. 23:43신학자료/5.성경신학자료

    다윗의 통치(사무엘하)
     

    1. 다윗 왕조의 시작
        한 많은 세월을 살다 죽어간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이 역사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윗이 아멜렉 사람을 물리치고 시글락에 머무르는 동안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쳐 나온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전사소식을 알린다. 전쟁중에 사울이 부상을 당하여 자기더러 죽여 달라고 하기에 그를 죽이고 면류관과 팔고리를 벗겨 다윗에게 가져왔노라고 보고한다(삼하 1:1-10). 다윗은 아직 사울의 죽음을 모르고 있으며 아말렉 소년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 그런데 사무엘상 31장의 이야기에 의하면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되어있다. 어느 내용이 진실일까? 사울의 죽음에 대한 두가지 전승이 함께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쩌면 아말렉 소년이 다윗에게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죽은 사울의 시체에서 면류관과 팔고리를 벗겨 다윗에게 가져옴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일개 이방인이 죽였다는 것은 다윗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추격할 때도 그를 두번이나 살려준 다윗이 아닌가?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아말렉 소년은 다윗에게 죽고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비통한 노래를 부른다(1:11-27).
     

    2. 헤브론의 왕 다윗

        다윗은 야훼께 유다로 갈것인지를 묻고 유다의 헤브론으로 갈 것을 지시받는다(삼하 2:1). 역시 신점(神占)에 의해 야훼의 계시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이 구절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추대된 사건을 정당화하고 있다(2:1-7). 아직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아닌 유다 한 지파의 왕이 된다. 다윗이 40세에 유다의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동안 그곳에 머문다(2:11). 그동안 북쪽의 10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아직 다윗의 수중에 들어오지 못했다. 사울(대략 1030-1009 B.C.E)의 아들 이스보셋(대략 1008-1007 B.C.E)이 아브넬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된다(2:8-10). 이로써 이스라엘은 북쪽 중심의 11지파와 남쪽의 유다지파가 둘로 나뉘어 존속하면서 다윗의 통일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가 비록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삼상 16:13), 아직까지 이스라엘 전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역성혁명을 감행한 것이며 사울이 죽고 난후 사울 가문을 정식으로 몰아내기 위한 수순으로 유다의 왕이 된 것이다.
     

    3. 사울가의 종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들을 겁탈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스보셋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한 아브넬은 다윗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다윗은 이전에 아내였던 사울의 딸 미갈을 데려오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와 협약을 맺는다(3:6-21). 아브넬은 결국 다윗의 부하인 요압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스보셋 역시 자기 부하 레갑과 바아나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전권은 다윗에게 귀속된다. 갑자기 출현한 이스보셋은 사울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울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이름이 한번도 거론된 적이 없으며 사울은 세 아들과 함께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기 때문이다(삼상 31:3).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스보셋은 사울이 활약할 때 어린 아이였거나 어쩌면 손자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아뭏튼 이스보셋은 자기 부하들의 반란으로 죽고 그를 따르던 북쪽 중심의 11지파는 다윗의 휘하로 들어 온다. 다윗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준 사람은 요압이다. 다윗이 죽는 순간까지 그와 함께한 요압은 용맹스러운 장수면서도 때론 지혜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삼하 14:1-24). 전체적으로 볼 때 요압은 냉정한 정치꾼이었으며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그의 손에 의해 죽는다(삼하 18:14). 다윗 역시 요압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며 그를 무척 신임했던 것 같다.
     
     

    4. 다윗과 통일왕국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을 처형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앞에서 다시 왕으로 추대된다. 이제야 명실공히 통일왕국의 제왕이 된 것이다(삼하 4:9-5:3). 다윗(대략 1006-967 B.C.E)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 년을 다스렸다고 전해진다(5:4-5). 하지만 솔로몬 통치까지의 연대는 학자간에 다소 이견이 있다. 성서의 기록은 다윗과 솔로몬이 대략 한 세대(약 40년)를 다스렸다고 보도한다(삼하 11:42).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하기 위해 시온 산을 공략하여 그곳을 개인 산성으로 만든다(5:6-10). 원래 가나안의 원주민인 여부스 족이 살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다윗이 수도로 정함으로써 가나안의 종교가 예루살렘 성전에 유입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한 것은 북쪽과 남쪽 모두를 다스리기 위한 중간지점을 택한 것이었으며 그곳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 지역에 있었다. 예루살렘은 이제 다윗의 도성이 되었으며, 하나님이 거하는 성산(聖山) 곧 시온 산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제 야훼의 집이 되고 다윗왕국의 방패막이가 된다. 나중에 하나님은 다윗과 계약을 맺고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신다(삼하 7장). 결국 다윗왕가를 중심으로 한 제왕신학(royal theology)은 시온신학(Zion theology)을 형성하게 되고 이 시온신학은 다윗계약과 함께 유다를 지켜주는 정신적인 지주가 된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두로의 왕 히람은 백향목을 들여다가 다윗의 궁전을 지어주는 민첩함을 보인다(5:11-12). 블레셋이 쳐들어 오자 다윗은 야훼께 신점을 구한다. 도읍을 정할 때나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당시의 일상적인 통례였다. 이번에는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블레셋 군대 뒤로 돌아가서 뽕나무 맞은 편에서 엄습해야 한다. 뽕나무에서 걸음걷는 소리가 들릴 때 행동을 개시하면 야훼께서 블레셋을 무찌르게 한다는 것이다(5:17-25). 가끔 나무가 신성시 되어 신점(神占)의 수단으로 활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지도: 다윗왕국의 경계-1025-1006 BC]
     
     
     

    5.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법궤

        블레셋을 물리친 다윗은 이제 야훼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자 하여 사람들을 바알레 유다로 보낸다. 블레셋의 진영에서 내보내진 야훼의 법궤는 그곳에서 20년동안 안치되었다가(삼상 7:1-2)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그동안 궤를 모시고 있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에 궤를 싣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수레가 다곤의 신상이 있던 타작마당에 이르자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궤를 붙들자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삼하 6:7).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야훼의 궤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또 다시 오벧에돔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웃사가 왜 죽었을까? 수레가 움직이자 궤가 땅에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붙잡은 것이 죽을 죄를 진 것일까? 현대인이 보기에 이해되지 않은 이 사건은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웃사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야훼의 현존을 상징하는 궤를 만짐으로써 야훼께 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생각했다. 일전에 하나님의 궤를 보기만 했던 사람들도 모두 몰살당하지 않았는가?(삼상 6:19). 오늘날까지 그 궤가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꼬. 생각하면 끔직하다. 법궤가 석 달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동안 그 집안이 잘된 것을 보고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긴다(삼하 6:9-12).

        다윗이 법궤앞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고 베 에봇을 입고 춤을 춘다. 춤추는 도중 아마 속살도 보인 것 같다. 다윗이 어린 아이처럼 춤을 추자 그것을 보고 있던 미갈이 다윗을 비난한다. 마치 방탕한 자가 자기의 몸을 드러낸 것과 같단다(6:20). 야훼의 법궤가 다시 돌아와 기뻐서 그 앞에서 춤춘 것이 무슨 허물이 되느냐고 다윗은 항변한다. 다윗의 행위는 스스로 낮아지고자 하는 종교적 의식으로 여겨진다(6:22).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지금도 행해지는 추장즉위식에서 흔히 볼 수있는 의식이다. 추장이 되려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철저히 낮아지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성실하고 겸손한 지도자가 될 것을 다짐한다. 어쨌든 이로 인해 다윗과 미갈은 평생동안 별거했다고 전해진다(6:21-23). 다윗이 법궤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야훼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하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각각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 그리고 건포도 떡덩이를 한 조각씩 나누어 주자 그들이 집으로 돌아간다(6:17-19). 야훼께 제사를 드린 후에 제물을 백성들과 나누는 모습은 무전통에서의 굿판에서 이루어지는 장면과 유사하다. 굿이 끝나면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간다. 이것은 신으로 부터 부여된 축복을 함께 나누는데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6. 영원한 다윗계약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온 다윗은 성전을 세울 계획을 한다(삼상 7:1-12). 야훼는 다윗과 언약을 체결한다(7:1-29).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약속하시는 야훼는 다윗의 아비가 되고 다윗은 야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7:13-14). 하나님이 다윗을 양자로 삼은 것이다(비교. 시 2:7). 갑자기 쏟아지는 야훼의 축복을 다윗은 감당할 수 없어 "내가 누구이며 무엇이관대 이런 축복을 받게 하시느냐"고 감격해 한다(7:18). 우리는 다윗과 하나님간에 체결된 이 언약을 '다윗계약'(Davidic Covenant)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것을 계약(契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계약은 쌍방간에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대등한 입장에서 주고 받을 때 형성되는 일종의 거래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말로 '베리트'라고 하는 이 계약(covenant)은 일상적인 거래행위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서 축복과 언약이 확인될 때 사용되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계약(covenant)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의무조항을 삽입하는 조건부 계약이다. 이스라엘이 야훼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축복하실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저주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조건부 계약으로 '시내산 계약'(Sinai Covenanat)을 들 수 있다. 신명기사가의 정신이 대체로 이 조건부 계약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약속형태의 무조건적인 계약이 있다. 상대편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인 행위만 있을 뿐이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으로 갈 것을 명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임을 약속하신다(창 17:1-14). 아브라함과 하나님간에 맺어진 언약의 징표로 이스라엘은 할례를 행한다(17:10). 이 할례는 언약의 징표이지 언약을 위한 조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아브라함 계약은 무조건적인 계약으로 분류된다. 다윗과 맺은 계약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의 말씀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인 계약에 속한다.

        이 다윗계약은 유다백성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구실을 했으나 나중에는 유다의 올무가 되기도 한다. 북쪽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보고도(722 B.C.E.) 다윗계약을 철저히 신봉하는 다윗왕가와 그 추종자들은 안일한 태도를 견지한다. 당시의 예언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통열히 비난했다. 아무리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약속이라도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고 그들은 역설했던 것이다. 예언자들은 결국 다윗계약을 조건부계약으로 재해석한 수정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7. 영토를 확장하는 다윗

        야훼의 축복을 받은 다윗은 이후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공략한다(8:1-12). 모압이 다윗왕국에게 조공을 바치게 되며 멀리 다메섹 역시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고 종으로 전락한다. 다윗은 이제 명실공히 왕다운 왕이 된다. 더 나아가 제국의 황제(emperor)라고 불릴 만큼 강대한 국가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이집트와 바벨론의 침략이 없는 틈을 타서 영토를 확장한 다윗은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을 장악한다.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정치적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실권도 장악한다. 법궤를 성소에 안치하고 에비아달과 사독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예루살렘을 정치·종교의 중심지로 만든 장본인이다(삼하 8:13-18). 주변국을 차례차례 정복한 다윗은 그 아들 솔로몬과는 달리 외국으로부터 들어 온 조공으로 나라살림을 꾸려나갔고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사이 다윗은 사울 가문에 남은 자를 찾아 은총을 베풀고자 한다.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생명을 구해준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므비보셋으로서 절뚝발이였다(삼하 9:3).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이전에 사울에게 속한 모든 땅을 주었고 그를 왕자처럼 대하고 왕궁에서 식사하도록 배려한다(9:1-13). 이것은 요나단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고자 하는 다윗의 노력이다. 요나단의 호의에 감사한 다윗은 그에게 사울가문을 멸절시키지 않을 것을 이미 약속한 바 있다(삼상 20:14-17). 다윗의 자비로운 모습을 부각시키려는 성서기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동시에 다윗의 계교가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사울 가문에서 살아 남은 유일한 혈족인 므비보셋을 가까이 둠으로써 그가 역모를 꾸미지 않게 하려는 다윗의 숨은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므비보셋에게 왕궁의 진수성찬이 감옥에서의 콩밥과도 같았을 것이다.
     
     

    8. 다윗과 밧세바
     

        이어 암몬과 아람을 물리친 다윗은(삼하 10장)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 예루살렘궁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저녁에 다윗이 왕궁 지붕을 걷다가 우연히 한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한다(삼하 11:1-2). 다윗이 어떤 연유로 예루살렘에 남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맥카터는 다윗이 이제 너무 나이가 들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의 침대는 옥상에 마련된 것으로 보이며, 저녁산책에 좋은 적당한 장소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목욕하는 여인이 우리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다윗은 그녀와 동침함으로써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11:3-4). 사건이 일어나자 마자 밧세바는 곧 임신하게 되고, 이 사실은 다윗에게 고해진다(11:5).


     

    [그림: 밧세바가 목욕하고 있는 모습. 렘브란트 작(Rembrandt, 1606- 1669).]
     

        밧세바가 임신한 사실을 듣고, 그것을 감추고자 하는 다윗의 계교와 그 결과가 삼하 11:6-26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1절을 이야기의 시작으로 잡더라도 전체 27절로 구성된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사실 "다윗과 우리아의 이야기"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과 우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의 80 퍼센트에 이르기 때문이다. 다윗은 전쟁중에 있는 우리아를 불러 직접 전쟁에 대한 안부를 묻고, 그를 집으로 보내어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유도한다(11:6-8). 다윗의 호의에 우리아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왜냐하면 헷 사람(the Hittite)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고 있는 우리아의 처지로는 왕의 직접적인 위로와 후사(厚謝)를 쉽게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아는 다윗의 어색한 처분에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아는 말없이 물러나와 집으로 가기를 마다하고 왕궁 문에서 다른 병사와 함께 잠을 잔다(9절). 왕은 다시 우리아를 불러 그 사연을 물은 즉, 다른 병사들이 전쟁 중인데 자기 혼자만 아내와 동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11절).

        다윗의 계교와 우리아의 우둔한 순진성과의 싸움은 계속된다. 우리아가 이틀 밤이나 홀로 밤을 지내자, 다윗은 더 이상 그를 설득시킬 수 없음을 알고 두번째 계략을 세운다(12-13절). 그것은 우리아를 전쟁터에 다시 보내 싸움터의 선봉에 서게 함으로써 그를 죽게 한다는 것이었다(14-15절). 요압의 협조로 다윗의 계략은 성공하게 되고 우리아는 죽게 된다(16-26절). 다윗의 잔인한 처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소개한 성서기자는 "다윗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고 증언한다(11:27). 우리는 다윗의 파렴치한 모습을 보고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느냐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성서기자 역시 다윗과 밧세바와의 불륜관계보다는 다윗이 우리아에게 행한 비인간적 행동에 주시한다.

        다윗의 행위에 대한 나단 선지자의 날카로운 비판이 이어진다(삼하 12장). '나단의 비유'로 알려진 가난한 사람과 양 한 마리에 대한 이야기는 다윗을 회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양과 염소가 많은 부잣집 옆에 아주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암양 하나가 있었는데 마치 한 식구처럼 같이 먹고 같이 잘 정도로 애지중지 했단다.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왔는데 그 부자는 자기 양을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암양을 잡아 손님을 대접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윗은 노발대발하고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역설한다(12:5). 바로 이 때다 싶어 나단은 다윗에게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요"라고 말함으로써 다윗의 회개를 이끌어 낸다(12:13). 다윗의 죄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이의 죽음으로 이어진다(12:14-23).
     

    9. 나단의 활약
     

        예언자 나단은 누구인가? 그는 늘 왕 가까이 있으면서 왕에게 조언을 해주고 종교적인 일을 주도했던 소위 '궁중예언자'(roral prophet)에 해당된다. 문서예언자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전까지 예언자들은 산당이나 성전에서 예언활동을 했던 직업예언자가 있었으며(참조. 삼상 10:5), 나단처럼 왕궁에서 활동했던 궁중예언자가 있었다. 나단은 왕 옆에 있으면서 다윗의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한 의식있는 예언자였다. 이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다. 왕에게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담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이라고 모두 의를 위해 앞장서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나단과 같은 예언자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겠다. 나단은 다윗정권의 안정을 위해 앞장섰으며, 후에 솔로몬이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궁중예언자는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때론 자기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정쟁(政爭)에 끼어든 경우도 종종 있었다.
     

    10. 솔로몬의 탄생과 압살롬의 반역

        시간은 흘러 솔로몬이 탄생하고 다윗은 암몬 지역의 랍바를 탈취한다(삼하 12:24-31). 다윗이 나이들어 밧세바와의 불륜을 저지르는 등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가 이어지자 아들들 사이의 암투가 벌어진다. 맏아들인 암논이 이복누이 동생인 다말을 욕보인 것이다.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척하고 다말더러 음식을 가져오게 하여 강간한 사건이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을 자극한다(13:1-19). 이년동안 잠잠하던 압살롬은 양털깍기가 시작되자 다윗을 비롯한 자기 형제들을 초청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암논이 있어야 한다(13:26-27). 우리의 추수기처럼 이스라엘에서 양털깍기가 시작되면 친지들을 모아놓고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다. 이 때를 이용하여 압살롬은 암논을 죽일 계획을 한 것이다. 계획대로 암논은 살해되고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에서 삼 년을 보낸다(13:30-39).

        다윗의 마음이 피신해있는 압살롬에게 있는 것을 눈치챈 요압은 드고아의 여인을 통해 다윗을 설득하게 한다. 그 결과 압살롬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 온다(삼하 14:1-24). 하지만 아직 다윗은 암논이 죽은 것에 대한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압살롬과 대면하지 않는다. 이러기를 2년 후 압사롬은 요압을 통해 다윗과 재회하게 되고 자기 세력을 서서히 확장한다(14:25-33). 그 첫 단계로 자기의 친위대 50명을 확보하고 스스로 백성들의 재판관으로 나선다(15:1-6). 이러기를 4년, 압살롬은 다윗에게 간청한다. 야훼께 서원할 것이 있으니 저를 헤브론에 보내달라는 것이다. 헤브론에 도착하자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200명을 초청한 자리에서 압살롬은 스스로 왕이 된다(15:7-12).
     
     

    11. 다윗의 도피와 예루살렘 귀향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 세력에 기울자 다윗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광야로 도망간다(삼하 15:13-23). 예루살렘에 돌아 온 압살롬은 다윗의 무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다윗 편에 섰던 후새의 말을 신뢰함으로써 결국 다윗군대에 의해 패배한다(16:15-18:8).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한 다윗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도망가다가 나무에 걸린 압살롬을 살해한다. 이로써 압살롬의 반역은 끝을 맺는다(18:9-33). 자기를 반역하고 생명까지 위협했던 압살롬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다윗에게 충격적이었다. 맏아들 암논에 이어 압살롬마저 잃게 된 것이다. 슬퍼하는 다윗 앞에 나타난 요압은 울음을 그칠 것을 강요한다. 다윗이 우는 것을 보면 백성들이 동요한단다(19:1-7). 다윗의 군대장관으로 있던 요압은 다윗의 왕권을 지켜준 결정적인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그 는 다윗을 견제하기도 했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한 다윗의 명령을 무시했으며 나이든 다윗을 위협하면서 자기 뜻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 올 때 유다 온 백성과 이스라엘의 절반정도가 다윗을 호위한다(19:40). 이 때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와 다윗에게 항의한다. 다윗을 왕으로 다시 오게 하려면 온 이스라엘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유다지파 마음대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입씨름은 유다지파의 승리로 끝난다. 압살롬이 일시적으로 왕노릇할 때 상당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 편에 있었다(삼하 15:12). 다윗은 이미 늙었고 이스라엘은 새로운 왕을 요구할 때라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지파의 세력이 워낙 강해서 나머지 지파들이 밀린 것이다. 그러나 갈등의 앙금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법! 북쪽의 10지파들은 솔로몬이 죽자 따로 독립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게 된다. 이점에서 볼 때 다윗시대는 통일왕국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과 북의 갈등이 상존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사이 세바의 반란이 있었지만 다윗은 무사히 예루살렘에 귀환한다(삼하 20:1-2). 예루살렘에 기근이 닥치고 그것은 다윗의 죄악때문이란다. 그도 그럴것이 사울가문을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다윗은 속죄하고 야훼의 자비를 구한다(21:1-14). 다윗은 야훼를 찬양하고 마지막 연설을 한다(22:1-51).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상고하면서 사악한 자는 멸망할 것이라는 당부의 말이다(23:1-6). 블레셋을 물리친 다윗은 인구조사를 끝으로 왕의 직임을 거의 끝낸듯 하다(삼하 24장). 인구조사는 야훼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것은 지상의 세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상의 권력이 강해질 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전염병의 재난을 겪고 예언자 갓의 조언대로 다윗은 야훼를 위한 제단을 쌓는다. 야훼는 이제 노여움을 풀고 이스라엘에서 재앙을 해제했다는 이야기로 사무엘하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맺음말

        다소 어정쩡하게 끝나는 사무엘하는 다윗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다윗은 말년에 가서 자기가 저지른 죄의 댓가를 거의 치룬것 같다.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인해 자식들의 죽음을 맛보아야 했고, 급기야는 자식을 피해 도망다녔던 다윗! 그는 당대의 영웅이었다. 그는 야훼의 은혜를 독차지하고 영원한 나라를 약속받은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던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된다. 그의 남은 과업은 솔로몬에게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열왕기서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