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여호수아)

2008. 7. 3. 23:40신학자료/5.성경신학자료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여호수아)
 
1. 신명기 사가의 권두언

   모세가  죽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 의 해 드디어 가나안의 입성이 시작된다. 여호수아는 대장정을 내딛기 전에 백성과 함께 상고할 일이 있다. 그것은 야훼의 약속이다. 레바논과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헷족속(the Hittites)의 온 땅과 서쪽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까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다(여호수아 1:4).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야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켜 행해야만 한다(수 1:8; 신 28:1-14).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는 길목에서 야훼의 율법이 강조되고 있다. 신명기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율법 준수는 구약 역사서의 핵심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삶속에서 율법을 준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야훼의 축복과 심판이 결정된다. 그래서 학자들은 여호수아와 열왕기하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이야기를 신명기사가(Deuteronomic Historian)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신명기사가(DH)는 신명기저자(혹은 편집자)는 아닐지라도 신명기 정신에 입각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한 역사가를 말한다. 그렇다고 본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도 어떤 구체적인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기록한 이스라엘 특유의 역사서술을 반영한다. 야훼의 율법을 준수하라는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그 말에 따를 것을 다짐하는 엄숙한 의식이 행해진다(수 1:18). 가나안으로 진군하기 전에 행해지는 이 엄숙한 의례는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율법준수를 매개로 하여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호수아 1 장은 이렇게 서론을 형성하며 신명기 역사서의 전문(前文) 구실을 한다.
 
 

2. 가나안 기생 라합의 역할
 

    이야기는 사실 2장부터 시작된다.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내 가나안에 있는 여리고성의 동정을 살피게 한다.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 숨어 들어간 것을 본 사람이 여리고의 왕에게 밀고하였으나 라합의 기지로 정탐꾼들은 무사하게 된다(수 2:1-24). 우리는 가나안의 기생 라합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라합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발생했던 갖가지 이적과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이미 알 고 있다. 겁에 질린 그 여인은 자기가 속한 여리고 성이 함락 당할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돕는데 온 정성을 기울인다. 정탐꾼들을 지붕에 숨기고 그들을 창문을 통해 대피시키면서 그녀는 다짐받는다.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공략할 때 라합의 가족만은 살려 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약속의 징표를 만들어 주고 진으로 돌아온다. 기생 라합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지켜 도망 나온 정탐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에게는 자신만만하게 보고한다. 가나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 앞에서 간담이 녹았다고 전하는 그들의 보고(報告)는 어딘지 모르게 앞뒤가 맞지 않다(수 2:24). 간담이 써늘했던 사람은 오직 기생 라합뿐이었다.
 

3. 제 2 의 모세 여호수아는 어떤 인물인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고자 한다. 가로놓인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이 후계자 여호수아도 요단강을 마르게 한다. 제사장들을 불러 야훼의 율법이 들어 있는 언약궤를 매고 요단강 물에 발을 담그라고 명한다(수 3:13-17).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담그자 강이 말라 백성들이 무사히 강 건너편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이처럼 모세와 여호수아는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가나안을 살피기 위해서 정탐꾼을 보냈으며(민 13; 신 1:19-46; 수 2), 마른 홍해와 요단강을 건넜으며(출 14:21-31; 수 3), 유월절을 기념하고(출 12; 수 5:10-12), 신을 벗으라는 야훼의 음성을 듣는다(출 3:5; 수 5:15). 그 밖에도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모세는 손을 계속 들고 있어야 했으며, 여호수아는 '단창'을 들어야 했다(출 17:12; 수 8:18, 26). 이것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동일한 권위를 지닌 인물임을 강조하려는 성서기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된다. 죽기 전에 행한 고별연설까지 같은 형식으로 진행된 것을 볼 때(신 34, 수 23), 모세와 여호수아는 '서로 다른 인물의 동일한 임무수행자'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요단강 동편까지 이끌었던 지도자요,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에게 땅을 분배한 장본인으로 등장한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약속의 땅을 향한 진군은 여호수아에 의해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모세는 민족의 죄악으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여호수아에 의해 인도되는 새로운 새대는 약속의 땅을 밟는다. 다분히 신명기사가다운 발상이다. 죄지은 백성은 복을 누리지 못하고 죄없는 세대는 약속의 땅에서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다.
 
 

4. 가나안에서 할례를 행하다


    이스라엘의 지파 수대로 열 두개의 돌을 취해 요단강을 건넌 것을 기념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할례(circumcision)를 명한다(수 4:1-24). 이집트를 나온 백성들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광야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 태어난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설명이다(수 5:1-5). 왜 그들은 광야생활동안 할례를 받지 못했을까?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자마자 8일만에 할례를 베풀었다(창 21:4).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요시되었던 의식가운데 하나였다. 바벨론 포로기에는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안식일과 더불어 할례의식이 강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탈출한 무리들의 후손들은 왜 할례를 받지 못했을까? 우선 광야생활의 불안정한 상태를 들 수 있다. 모든 것이 체계화되지 못하고 어수선한 정황 때문에 할례의 의식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견해는 타당성이 없다. 할례는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래 전부터 행해진 흔적이 있으며(참조. 창 34장), 그 의식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요하게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생활을 하는 도중에 할례의식을 모르는 무리가 이스라엘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이집트를 탈출했던 무리들의 직접적 후손은 아니지만 그 다음세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성서의 보도와 일치한다. 새로 합류한 무리들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이스라엘과 연합했을 뿐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전통의식인 할례를 몰랐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여호수아에 의해 전열이 정비된 다음에야 할례의식에 참여하였으리라.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여호수아 23-24장에 소개되고 있다. 나중에 자세히 밝힐 일이지만 거기서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에 참여했던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불러 모아 야훼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길 것이지를 결단하도록 촉구한다. 결국 이스라엘 무리는 출애굽한 무리와 다른 무리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합류했던 복합적인 집단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또 다른 견해는 할례의식이 이스라엘에 의해 받아들여진 때가 훨씬 후대였을 가능성이 많다. 나중에 이스라엘을 블레셋족속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할례유무을 따졌던 것은 할례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제도화되었음을 보여준다(삼상 14:6).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진격해 들어가기 전에 온 백성에게 할례를 치르도록 명령함으로써 할례의식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체감을 도모하고자 했다.
 
 

5. 여리고성이 무너지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에 당도한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야훼의 명령대로 여리고성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 엿새 동안 돌고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면서 일곱 제사장은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기적이 발생한다(수 6장). 불가사이한 일이 눈앞에 전개된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일들은 출애굽기를 연상하게 한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열 가지 재앙으로 혼이 나는가 하면, 홍해가 갈라져 이집트 군대가 바다에 빠지지 않았는가? 여호수아도 말라붙은 요단강을 건너는가 하면 여리고 성이 그 주위를 돌자 힘없이 무너진다. 이스라엘이 하는 일이란 언약궤를 매고 함성을 지르며 나팔을 부르며 성주위를 맴돈 것 뿐이다. 여호수아는 이점에서 볼 때 출애굽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서 금세기의 탁월한 신학자인 폰 라트(G. von Rad)는 육경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오경은 신명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모세의 활약이 기적적인 방식을 통해 이집트를 제압하는 것이었다면, 여호수아는 같은 방식으로 가나안을 제압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수아 사건을 모세 사건과 관련지어 해석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사실기록으로서가 아닌 '의미 있는' 사건으로서 재해석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여호수아의 명성은 온 땅에 퍼진다(수 6:27).

    무너진 여리고성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소위 '성서고고학자'라고 불리는 일련의 사람들이 여리고를 탐사한 결과 파괴된 건물 잔해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서둘러 여리고성의 붕괴를 기정사실화하고 그것은 성서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반세기도 지나가기 전에 타당성이 없는 증거로 밝혀졌다. 여리고성 주위에 발견된 폐허더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시기인 주전 13세기의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시대(대략 주전 2,000-1,550년경)의 것으로 짐작된다. 그와 동시에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된 많은 도시 안에 당시 많은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메르넵타 비문(Merneptah Stela; B.C.E. 1230년경)은 이스라엘의 활동을 최초로 증언하고 있다. 이집트 왕 메르넵타는 그의 승전비에서 아직 정착하지 못한 이스라엘을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성서기록 처럼 완벽한 군사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사건은 좀더 추이를 지켜보면서 차근차근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대체로 일치하는 결론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모든 사건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훨씬 이후의 정황을 반영하는 회고록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그림: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된 이집트 왕 메르넵타(1212-1202B.C.E) BR91-1-30]
 
 
 

6. 아간의 죄


    여리고성의 공략에 이어 아이성으로 쳐들어간 여호수아 군대는 아이에서 참패를 당한다(수 7:1-7). 숫적으로 열세에 있던 아이성의 군대에 의해 무참히도 참패한 이스라엘은 그 원인을 찾는다. 아간이라는 자가 전리품을 숨긴 것이 죄가 되어 이스라엘이 패한 원인이 된다(수 7:11). 아간이 전리품을 훔친 것이 죄가 된 건지 아니면 하나님께 바칠 성물(聖物)을 훔친 것이 죄가 된 건지 불분명하지만 아간과 그의 가족은 남모르게 훔친 죄때문에 몰살을 당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제비뽑는 절차를 통해 아간이 죄인으로 지목된 점이다. 먼저 12지파가운데 한 지파를 뽑고 한 지파가 지목되면 지파안에 있는 한 가문이 뽑히고 그 다음에 한 가정이 뽑혀 최종적으로 죄인이 지목되는 절차를 보여준다(수 7:14-18). 제비뽑기는 죄인을 색출할 때나 국가의 중대사 혹은 제물의 선택 등에 널리 사용되었다(참조. 삼상 14:24-46). 죄인을 지목하는 절차는 아니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관습이 있었다. 신라 51대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아찬 양패(良貝)가 후백제의 해적(海賊)을 무찌르기 위해 궁수(弓手) 50인과 함께 곡도(鵠島)에 이르자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었다. 그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활쏘는 사람 하나를 그 섬에 남겨 두면 풍랑이 잔잔해질 것이라 하여, 마땅한 인물을 가려내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기로 결정한다. 나뭇조각 50개에 궁수들의 이름을 적고 물에 띄웠더니 거타지(居陀知)란 사람의 이름이 적힌 나뭇조각이 물에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를 남겨 두고 길을 떠나자 풍랑은 멈추고 순풍이 갑자기 불어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삼국유사』에 소개된다. 전쟁 중에 부정한 사람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 그 전쟁에서 패한다고 믿었던 것이 고대인의 사고방식이다. 어떤 형태로든 부정적 요인은 제거되어야 하는 바 그것은 범법을 행한 죄인을 가려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임의적으로 뽑힌 사람을 희생 제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아간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7. 가나안  정복과정
 

    죄인을 색출한 여호수아는 다시 아이성으로 진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아이 왕을 비롯한 그 지방 사람의 남녀가 12,000명이라니 그 숫자는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수 8:25). 이스라엘이 아이 군사에게 패할 때 36명이 죽은 것에 비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서의 기록은 남녀불문하고 아이의 거민 모두를 사살했다고 전해진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한 성의 모든 사람을 일시에 죽일 수 있으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린아이와 약자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의 손에 죽어 갔단 말인가? 하나님은 무조건 이스라엘 편인가?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겨우 목숨을 건지는가 하면(수 9), 아모리 족속은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우박에 맞아 많은 사람이 죽는다(수 10:11). 기브온과 싸울 때 이스라엘이 승리할 때까지 해와 달은 중천에 떠서 지지 않았다(수 10:12-13). 이 모든 신화적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 예비되었으며 가나안 족속의 생명이나 인권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막게다, 라기스, 헤브론에서도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승리하면서, 싸울 때마다 각 성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진멸했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수 10:28-39).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산지와 남방의 평지 및 경사지에 있는 왕을 쳐죽이고 그 땅에 있는 호흡(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진멸했으니 이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었다(수 10:40). 성서를 처음 대하는 이들이나 성서의 문자적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은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건지기 위해 하나님께 간청했지 않는가?(창 18장). 그런데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거민들을 그렇게도 무참히 학살하라고 명하실 수 있는가? 가나안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두가 죽어 마땅하단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그것이 죄없는 사람까지 죽여야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된 많은 도시와 가나안 사람들의 떼죽음을 정당화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과연 참다운 기독교인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여호수아 더러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라고 명하셨을까? 우리는 성서의 보도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기 보다는 성서기자를 통해 '해석된 말씀'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서기자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민족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이스라엘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게 되고 그 외의 다른 사항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가나안의 북방도시 하솔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의 군대는 남방과 고센, 그리고 아라바와 산지 및 평야를 탈취하였다(수 11:16).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단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다. 여호수아 12장은 여호수아가 점령한 지역의 왕들을 열거하고 있다. 신명기사가는 여호수아를 모세와 버금가는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시키는데 일단은 성공한 듯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여호수아가 북방계열의 에브라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므나쎄와 에브라임의 영토인 사마리아에서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남쪽으로 유다정복의 길을 연 첫번째 전투와, 갈릴리를 해방시킨 두번째 전투 역시 일관성 있는 전투로 여겨지지 않는다. 여호수아에 의해 수행된 가나안 정복은 이쯤해서 볼 때 재검토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에 의해 성서해석학이 대두되기 전까지만 해도 성서의 증언은 의심받지 않았다.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수 1-12장)은 무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이면에 하나님의 초월적인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대로 믿어졌다. 그런데 성서비평학이 확립되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게 대두되었다. 우선 성서내부의 불일치에 관한 점이다. 사사기 1:1-2:5의 보도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때론 무력에 의해 때로는 평화적인 이주나 가나안 원주민과의 협력체제하에 서서히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평화적인 이주방법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평화적인 이주는 정복설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점차적으로 가나안에 이주했다는 것이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은 농업을 영위하는 가나안의 원주민과 계약을 체결하여 공존공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적인 인구증가에 의해 이스라엘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지역을 중심으로 생활하다가 점차적으로 원주민의 거주지역에 침투했다는 평화적 이주설은 무력에 의한 정복설이 보여준 비합리적 보도를 거부하는 내용이어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갈등요인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서 문제점을 야기한다.

    여호수아 1-12장의 무력정복보다는 사사기의 증언이 보다 합리적인 보도로 받아들여지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가 가속화되었다(삿 1:1-2:5). 멘덴홀(G. E. Mendenhall)과 같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기형성사를 재건하면서 사회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였다. 이스라엘의 가나안정착을 설명하기 위해 멘덴홀은 '농민혁명가설'을 세웠다. 이집트를 탈출한 무리들과 가나안의 하층계급이 연대하여 가나안의 봉건제후에 대항한 것이다. 가나안의 농민, 몰락한 제사장, 부역꾼, 장인 등의 하층계급 사람들은 당시 이집트의 봉신으로 있었던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제후들에 의해 강제부역과 과다한 공물징수에 시달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과 이들의 연대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그 결과 세력을 결집하여 가나안의 도시국가 체제에 도전한 것이다. 멘덴홀이 주장한 농민혁명가설은 여호수아서에서 보여준 무력에 의한 정복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아 왔다. 동시에 이스라엘과 가나안 원주민과의 연대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 이 가설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농민계급이 연대하게 된 배경이 불분명하며 고고학적 증거 역시 가나안 도시들이 무너진 연대에 의심을 갖게 한다. 어찌됐건 이젠 더 이상 '가나안 정복'이라는 말은 학계에서 통용되기 어렵게 됐다. 대신 '가나안 정착'이라는 용어가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급진적이고 갑작스런 무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점진적인 방향에서 납득할 만한 사회적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을 뜻한다.

    갓월드(N. K. Gottwald)는 멘덴홀이 제시한 사회학적 연구방법을 한층 발전시킨 사람으로 유명하다. 『야훼의 지파들』(The Tribes of Yahweh)이라는 책을 써서 일약 세계적인 학자로 등장한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배경을 매우 진보적인 방향에서 제시한다. 그는 멘덴홀과는 달리 출애굽 사건이 가나안 진입의 주된 동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갓월드에 의하면 출애굽 사건은 너무 미미한 사건이거나 역사적으로 신빙성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가나안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나안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만약 출애굽한 무리가 있었다면 당시 이집트의 영향권 아래 있던 가나안의 도시국가체제에서 노예와 유사한 생활을 했던 무리일 것이다. 가나안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감소된 틈을 타서 사회저변에 깔려 있던 하층계급이 연대하여 가나안의 봉건제후에 대항한 것이다. 이들은 원주민의 거의 80퍼센트에 달하는 유목민과 농민들, 용병과 해적들, 그리고 각종 장인들과 배교한 제사장들로 구성된 잡다한 무리들이었다.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던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수탈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이들이 힘을 합하여 자치체제를 형성하고자 한 사건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모인 정치·경제적 집단이 지역별로 모여 이스라엘의 12지파체제를 갖추게 되고, 나아가서 국가형성의 토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갓월드가 주장하는 '사회종교적 재부족화설'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출애굽한 무리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내부에서 갑자기 출현하였다고 하는 '사회종교적 재부족화설'은 성서의 출애굽 사건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 되기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아직까지도 일부에서는 이 이론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월드의 사회학적 분석은 나름대로 근거를 지닌다. 우선 성서의 증언이 역사적으로 입증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갖가지 기적적인 사건들이 가나안 정복과정중에 발생했으며 사건의 진행과정도 초자연적이며 신비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을 전멸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점 역시 실재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하고 있기보다는 후대 사가의 해석에 더 의존한 것이다. 이 모든 점을 들어 무자비한 무력정복은 납득하기 힘들다. 또 하나 결정적인 근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성서의 증언대로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살았다면 그들이 가나안에 살면서도 얼마 동안 이집트 문화에 젖어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견된 고고학적 근거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아주 미미하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과정에서도 이집트의 종교상황은 거의 모르는 듯 했으며 오히려 가나안의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내부에서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최근의 고고학 연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주전 14세기에 크게 성장했던 가나안의 도시 라스샤므라(우가릿)에서 발견된 문헌은 고대 가나안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을 잘 보여준다. 그 문서에 나타난 종교사상과 구약성서의 내용에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구약의 히브리어와 당시 우가릿 언어 역시 유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둘 사이에 음과 뜻이 동일한 단어가 많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가나안의 생활과 이스라엘의 초기 생활은 이질적이라기 보다는 거의 동질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출애굽한 무리들이 갑작스럽게 가나안을 공략했다면 경제적 수단을 비롯한 사회 시설물들이 한꺼번에 파괴되었을 것이며 생활 수단 역시 가나안 원주민들과 현저한 차이가 나야 한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증언은 가나안 정착이 이루어진 주전 13세기의 상황은 이전 시대와의 단절보다는 오히려 계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즉 가나안의 상황은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에
의해 지속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림: 기원전 14세기 경에 사용된 우가릿 알파베트로서 초기 가나안 문자의 영향을 받은 서기관들이 이와같은 쐐기문자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BAR83-5-70).]
 
 
 
 

[우가릿어의 알파베트-주전 14세기]
 

참고: 우가릿문화와 관련된 그림자료

<그림: 우가릿의 바알신전에서 발견된 금접시]

<그림: 우가릿의 귀중품>

<그림: 우가릿의 여인 가면상>

<그림: 우가릿에서 발견된 바알상>

<그림: 우가릿에서 발견된 아스다롯 여신상>

<그림: 우가릿의 청동제의도구>

<그림: 우가릿 대제사장의 제단>
 
 

    이렇게 보면 갓월드의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출애굽 사건이다. 만약 출애굽 사건이 역사적 사건으로 증명되기 어렵다면 이스라엘은 왜 그토록 출애굽 사건을 역사의 매 순간마다 강조하는가? 사실 출애굽 사건은 이전에도 밝힌 대로 이스라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이 왜 그토록 출애굽 전승에 매달려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록 성서외적인 자료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건은 이스라엘의 이전 경험을 밝혀 준다는 데서 그 의미가 있다. 사회저변층으로서 오랫 동안 압제를 받아 온 이스라엘은 그 경험을 간직할 필요가 있었다. 종족간에 쉽게 혼합될 수 있는 팔레스타인의 지형적 구조는 이스라엘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하였다. 압제받은 하층민으로서의 경험과 유리하는 아람사람들이 자기 선조였다는 공동의 경험은 같은 처지에 있던 잡다한 무리들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신 26:5). 이 무리들을 하나로 맺어 준 것이 모세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는 야훼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도시국가 체제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이 승리는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며 그것을 미화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그들을 압제하는 무리들은 이집트의 파라오요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상대로 승리한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때의 파라오는 압제자의 대명사요,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준 분은 야훼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자연 파라오와 하나님과의 대결이 출애굽 사건의 저변에 깔리게 되고 그 모든 과정은 초자연적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압제받은 경험이 있는 무리들이 정치·종교적으로 결집해서 가나안의 봉건세력을 물리친 사건이 가나안 정복사건이며 이 사건은 실제보다는 훨씬 갑작스럽고 무력적인 방법에 의한 무자비한 공격의 모습으로 전승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강력한 모습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고대인들은 믿었던가 보다.
 
 
 


 

[지도: 가나안의 주요도시-여호수아의 정복시기]
 
 
 

8. 여호수아의 고별설교와 세겜에서의 계약재갱신
 

    그러나 새로 형성된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했고 지파간의 느슨한 동맹체 형태를 유지하였다. 야훼신앙도 아직 확립되지 못하였으며 가나안의 원주민들과 유사한 생활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야훼께 충성하기를 촉구한다. 점령한 땅들을 지파별로 분할한 다음에(수 13-22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온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고별설교를 한다(수 23-24장).
 
 


 

[그림: 여호수아는 에발산(우)과 그리심산(좌) 사이에 있는 세겜에서 마지막 고별연설을 한다. 당시 세겜은 전략적인 요충지였으며 종교중심지였다(BR89-1-39).]
 

    죽음이 임박한 여호수아의 모습에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정복하기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한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여호수아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이제는 야훼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노라"(수 24:14-15). 여호수아는 자신의 신앙고백과 함께 이제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야훼를 섬기겠다고 이 자리에서 결단하라는 것이다. 만약 야훼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이스라엘 조상이 바벨론과 이집트에서 섬겼던 신이나 가나안의 신을 섬기든지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은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몰랐단 말인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지파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연설에서 야훼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길 것인지를 택하라고 재촉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야훼를 모른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 아닌가? 사실이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아직 야훼에 대해서 모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자 마자 이스라엘의 전 장병에게 할례를 실시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수 5:2-9). 그들은 광야시절에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들이었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새로운 무리들이 합류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여호수아의 고별연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림: 언약의 돌기둥: 수 24장]
 
 

맺음말
 

    갓월드의 지적대로 봉건제후들에게 억압당한 경험이 있는 무리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야훼신앙이 자연스럽게 소개되고 나중에는 야훼 신앙이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이 있기 전까지 모세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 그룹의 노력이 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야훼를 모르고 여전히 구습이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여호수아는 더 이상 양다리 걸치지 말고 어느 한 쪽을 택할 것을 촉구한다. 다행히도 거기 모인 이스라엘 부족들은 한결같이 야훼를 섬기겠노라고 응답한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 49장에 열거되는 야곱의 12아들은 후대에 이름지어진 것일 수도 있다. 야곱의 12아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나뉘어진 후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12지파의 이름이 확정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단순한 가장의 범위를 넘어선 한 부족의 지도자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의 아들이 반드시 혈연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정통성 있는 계보를 위해 짜 맞춘 흔적이 여기 저기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야훼 하나님을 섬길 것을 촉구한 사건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처음부터 야훼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인 일사불란한 집단이 아니라, 정치·종교적 관계에서 출발하여 서서히 종교공동체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적'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서 안에는 서로 상반되는 이야기가 동시에 출현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성서해석은 합리적인 근거와 사고를 바탕으로 보다 타당성 있는 방향에서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검증되고 그것이 보편타당한 진리로 판명될 때 '믿음직한 신앙'으로 자리잡는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되는 어떤 이론이나 학설을 만나더라도 거부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새로운 이론을 면밀히 분석하고 타당성 있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하고 그렇지 않는 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전통이 우리의 신앙을 결정짓거나 진리를 대변할 수는 없다. 전통은 진리를 위해 최소한의 범위에서 그 맥락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사고만이 성서를 보다 진실한 방향에서 재해석 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