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주일
2008. 5. 4. 23:51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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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ekly Cycle: Sabbath, Sunday and the Lord's Day
- 주승중 교수(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교수) -
I. 들어가는 말: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부활의 능력은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시간 개념도 바꾸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새 창조(부활)는 달력을 위한 새로운 원리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사실 유대교를 비롯한 몇몇 문화 속에서는 년들은 세계가 창조된 날로부터 계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예를 들어 로마제국 같은 곳에서는 년들이 나라의 시작과 관련하여 계산하거나 혹은 역사에 있어서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과 관련하여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로마 같은 곳에서는 아주 오래된 사건들은 로마가 세워지기 전으로 거꾸로 계산을 하였고, 최근의 사건들은 로마가 세워진 후로부터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 관습을 받아들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너무나도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부활은 곧 새로운 창조로서 인식되어졌고, 결과적으로 부활은 모든 날들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서구의 세계에서 역사는 B.C.와 A.D.로 나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기준이 생긴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몇 세기가 지난 후 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역사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초대교회가 한 주간의 첫날에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기뻐하면서 예배를 드리게 된 중요한 동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 강의는 교회력의 기초이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간 주기(The Weekly cycle)의 역사적인 기원과 그 의미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특별히 안식일에서 주일로 이어지는 주간 주기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하며, 그 내용은 안식일의 기원, 신학,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예배와 모임의 변천 과정을 다루고, 주일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역사적인 논쟁에 대해서도 고찰하는 가운데 현대교회가 가져야 할 주일 예배에 대한 태도와 주일성수 방향 등에 대해서도 모색하고자 한다.
II. 몸 말
1. 주간 주기의 역사적 기원
7일을 한 단위로 하는 주(week)는 그 기원이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 기원은 여러 중동 문화의 오래된 유산일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한 주의 마지막 날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의 행위를 기억하는 예배의 때로 확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 날을 "안식일"(The sabbath)라고 불렀으며, 그 의미는 단순히 "일곱 번째"(the seventh)라는 말이다. 그것은 창세기 2:2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창조의 7번째 날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었다. 그런데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부활 사건 속에서 바로 그 첫 창조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첫 창조세계는 인간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결과적으로 창조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부활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였다.(고후 5:17, 갈 6:15). 이 세상에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죄로부터 세상을 구원한 창조주는 없었다. 그러므로 제 7일에 회당에 가는 것에 더해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행 20:7과 고전 16:2절에 기록된 대로 한 주일의 첫날에 함께 모여서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
2. 안식일(The Sabbath)
그런데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주일의 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유대인의 안식일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교인들은 처음에는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주일 예배를 드릴 때에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의 7일이라는 시간개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요슈아 헤셀은 그의 책 "안식일"(The Sabbath)에서 안식일에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에 사용된 말들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낱말은 '거룩한'의 뜻을 가진 '카도쉬'인데, 이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신성의 신비와 위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면 이 세계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거룩한 대상은 무엇이었는가?...실로 가장 최초로 거룩하게 된 것은 창조의 마지막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여 이 '거룩한'이라는 낱말이 시간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말할 수 없으리만큼 의미심장한 말이다...성경에는 거룩함의 최초의 표현이 시간 속의 거룩한 곧 안식일(Sabbath)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거듭되어 왔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해명되지는 않았다. 그 동안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었다.
(1) 바벨론 기원설
(2) 혹성 기원설(The Planet origin)
(3) 만월 기원설(The Lunar origin)
(4) 가나안 정착 기원설
(5) 켄 족속 기원설
(6) 월력 기원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종교생활 중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성일(聖日)이 이방세계나 자연계의 주기 또는 사회적 질서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이런 주장들은 그 근거가 빈약하며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7이라는 숫자인데, 이 숫자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자연에도 이와 같은 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천체에도 7을 단위로 한 주기적인 움직임은 없다. 고대의 사회적 생활 양식에도 7일을 단위로 하는 시간 주기와 정확하게 일치할만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이 성일이 자연계의 주기나 사회적 질서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7이라는 숫자는 어떤 법칙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라기 보다는 무작위적인(arbitrary) 결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7이라는 숫자와 함께 안식일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명령(divine mandate)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7일이라는 개념이 자연의 리듬에 의해서 생긴 것이든, 문화적인 요소에 의해서 생긴 것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이 깃들여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날은 단순히 매 7일째에 쉬도록 명령되어진 날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안식일의 기원은 모세가 기록한 성경에 있다는 말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계시해 준 사실을 전해 준 이가 바로 모세임을 밝히고 있다.(느 9:12-14) 그리고 특별히 에스겔 선지자는 안식일이 주어지게 된 것을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겔 20:11-12) 중요한 것은 이렇게 divine mandate로 주어진 안식일이 후에 이스라엘 역사에 의해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부여(rationales)가 주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3. 안식일의 의미(rationales)
안식일은 (할례와 함께)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표시(mark)이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이 땅의 다른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과 구별지어주는 것이며, 그들이 야웨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
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
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출 31:13, 안식일 규례에 대한 말씀 중 출
31:12-17)
1) 쉼의 날(the day of rest)
이스라엘에게서 안식일은 분명히 원시 동맹(primitive amphictyony:인보동맹, 근린동맹)시대로까지 그 날자가 거슬러 올라간다. 안식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야웨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쉼이다. 진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구약성경에서도 발견되어지는 바와 같이 언제나 "쉼의 날"(days of rest)을 의미하였다. Rordorf는 그의 유명한 책 "Sunday"에서 설명하기를 "모든 나라들 가운데 이스라엘에게만 안식일은 매주일 지켜야 할 것으로 주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쉼의 중요한 의미는 두 가지의 전통에 의해서 다르게 해석되어져 왔는데, 먼저 창조에 관한 P문서(the Priestly account)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사역을 완전히 마치신 후에 쉬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고, 또 하나는 출애굽 사건이다. 이 들 중의 첫 번째 설명은 출 20:11에 나타나고 있는 십계명 속에서 보여지고 있는데;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리고 두 번째 내용은 신명기 5:12-15에서 발견된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 안식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과, 노예들과 심지어는 모든 육축들에게 까지 적용되어 지고 있다. 그런데 위의 안식일에 대한 두 말씀은 상호간에 상충되는 말씀이 아니다. 그 보다는 차라리 "신명기서는 계약의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안식일을 보고 있으며, 제사문서는 계약의 하나님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두 말씀은 동전의 다른 두 양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계약의 표시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세워진 계약(the Covenant) 표시(mark)이다. 여기서 명령된 안식은 야웨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행위이며, 또한 심오한 인도주의적인 의무이기도 하다.(humanitarian duty). 무지개가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언약의 증거였고(창 9:1-2, 17), 할례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의 증거였던 것처럼(창 17:11),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증거(출 31:13, 17)가 된 것이다. 그리고 창 17:9이하에 나타나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출 31:16이하에 보면 안식일도 아브라함과 주의 자손들이 지켜야 할 영속적인 언약임을 알 수 있다.
3) 시간과 역사의 개념을 바꿈
안식일은 또한 이스라엘의 시간과 역사의 개념을 바꾸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모든 원시 고대민족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7일을 한 주간으로 계산하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환적인(cyclical) 그리고 신화적인 (mythological) 시간 개념보다는 직선적인(linear) 그리고 역사적인(historical) 시간개념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역사적인 행위들은 안식일을 지킴 속에서 기억되어졌고, 인류존재의 모든 과정에 대한 아주 급진적인 새로운 시각이 이로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념일로서 지켜지게 되었고, 또한 구속의 기념일로서도 지켜지게 된 것이다.
창세기 천지창조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 이렇게 구약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안식의 이야기는 창조사역 후의 하나님의 휴식으로 시작된다. 또한 계속해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축복하셨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구절이 부연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날에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기 때문이다. 칼뱅은 이러한 안식일을 일차적으로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일하시도록 허락하는 영적인 안식의 모형이라고 하였다. 아무튼 이렇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념일(출 20:11, 31:17)로 지켜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5:14-15)의 기록에 의하면 안식일은 강하신 손과 편 팔로 애굽의 종 되었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즉 이 날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셨던 약속의 땅에서 쉴 수 있게 된 그의 피곤한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4) 종말론적인 의미
역사의 해석을 위한 열쇠로서의 안식일의 역할에 더해서, 안식일은 또한 종말론적인 차원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eschatological dimension). 안식일--한 주간의 7번째 날--은 성취와(fulfillment) 완전(perfection)의 표시였다. 일곱 번째 날은(안식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마침내 반드시 완전함(wholeness)으로, 샬롬(Shalom)으로 인도하실 것에 대한 기대였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 마지막 안식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모두를 향한 구원으로 이해하였다.(이사야 56:1-8) 그래서 랍비들은 안식일 준수는 다가올 시대를 대비하는 필수적인 일이며, 인간사에 등장하는 다른 삶의 여정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다가올 세계가 모든 안식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5) 예배의 날
그런데 후에 포로 기간동안 안식일은 계약의 뛰어난 사인(sign)으로 인식되었다. 성전과 희생제사가 없는 상황 속에서 할례와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로부터 구별된 민족이라는 표시가 되었다. 진실로, 안식일은 이스라엘 민족과 그들의 문화가 생존하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었다. "안식일이 있는 한 유대인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을 만큼 안식일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중요했다. 그 결과로 안식일의 지킴은 더욱 강화되었고 안식일은 종교예배의 날이 되었다. 회당의 등장과 함께, 예배를 위한 모임은 공동체를 위하여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 분명히, 이 때 이전에도 안식일과 연결된 성전예배와 가정예배가 있어져 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예배는 안식의 의무와 함께 안식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벨론 포로 이후 점점 안식일의 이러한 본질적인 정신은 사라져갔다. 이스라엘은 7째 날을 공식적인 휴식 일로서 희생제사와 함께 지키기는 하였지만, 내적으로는 심령의 부패와 탐욕, 우상숭배, 반역 등에 의해 안식은 더럽혀지고 있었다. 선지자들은 이러한 종교적 형식주의를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그 시대의 형식적인 안식일 준수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진정한 안식일의 준수는 자기 길로 행하는 것으로 부터나 자기 오락을 찾는 것으로부터 떠나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정의했다.(사 58:13-14)
4. 예수님과 안식일의 관계
이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이 인식일의 주인이라는 폭탄적인 선언을 하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향한 예수의 태도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것과는 아주 급진적으로 달랐다. 누가의 기록대로(4:14-21),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설교를 위하여 안식일의 회당모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안식일의 쉼의 의무로부터 자신은 자유하다고 알고 계셨다. 이것은 특별히 예수의 안식일의 병고침과 그의 대적 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논쟁에서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예: 눅 6:1-11 참고)
유대인들의 안식일 지킴은 완전하고 전적인 쉼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안식의 명령을 강화하기 위하여 추구되어지고 수세기를 통하여 개발되어진 궤변은 아직도 안식일의 인도주의적인 특성을 방해하고 있다. 정말로 안식일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기쁨의 날이었다. 심지어는 안식일 명령 속에 나타난 율법적인 특성 속에서도 안식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서 인식되어져 왔다. 랍비들은 안식일의 쉼이 범해질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들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주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때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가축의 생명도 구해주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비록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적을 공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지만, 적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기를 잡는 것도 법적으로 간주되었다.
마가복음 2:23--3:6에 나타난 두 가지 이야기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 이야기는 (막 2:23-2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에 이삭을 주운 사건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윗이 하나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을 변호하였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리기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막 3:1-6)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를 물어보셨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이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자, 그 사람의 손을 치료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모두 예수 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의 쉼의 명령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사건에서 (마 12:1-8, 눅 6:1-5 과 평행), 사도들을 위한 어떤 정당성도 주어지지 않았다. (마태는 제자들이 배고파서 먹었다는 근거에 대해서 그들을 비판하고자 한다. 마태 12:1) 비록 몇 가지 정당성이 주어진다 하여도, 그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제자들이 잘 알고 있었듯이, 한 주간의 여 섯번 째 날(금요일)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 어떤 유대인도 다가오는 안식일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것에 대한 변명을 가져다 줄만한 근거가 없었다. 차라리, 안식일의 쉼은 계속해서 지켜져야만 했다. 비록 그것이 하루 종일 아무런 먹을 것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다윗의 행위에 대한 언급은(삼상 21:1-7)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복음서 안에 인용된 삼상 21:1-7은 단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안식일에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이삭을 줍는 행위를 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삼상 21:1-7은 아무리 양보해도, 안식일에 이삭을 주은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가 없다)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응답, 즉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안식일 명령에 대한 강한 도전을 나타내주고 있다.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박애의 표현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응답은 안식일 명령에 대한 최첨단의 공격이었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인간을 노예화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더욱 결정적이다. 예수님의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행위는 이 명령에 대한 긍정적인 경시(a positive disregard)이다. 앞서 밝힌 대로 그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동물에 대한 치료는 안식일에도 허용되었다. 여하튼, 예수님의 치료행위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안식일 명령에 의해 부과된 여러 가지 제한들을 거부하심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스라엘의 전통에 대한 이런 급진적인 단절(break)은 은연 중의 그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acknowledgement)하고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안식일 명령 위에 놓으셨고, 그럼으로 자신을 구원의 최종적인 전달자로서 지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로돌프(Rordorf)는 그의 유명한 책 "Sunday"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파기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도발적인 행동이었으나, 내적인 의미로 볼 때, 거기에는 그의 메시야 의식의 은밀한 선포를 뜻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일에는 사랑, 동정, 자비의 행동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일적 행동" 다시 말해서 메시야적 안식일, 구약적 안식의 완성이 이 세상에 도래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어느 날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병고치는 데 가장 합당한 날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 님께서는 안식일 명령의 종말론적인 약속을 재발견하셨고, 이제 거기에 새로운 차원을 가미하셨다. 하나님에 의하여 약속되어진 샬롬(Shalom)이 인류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 시간은 현재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의 즉각성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함께 만나고 있는 그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지의 현존 앞에 서있는 것이 되었다. 지금이 바로 이 사람을 위한 시간인 것이다. 샬롬(Shalom)--전체성(wholeness), 치료(healing), 그리고 구원이 하나님께서 메시야이신 예수 안에서 인류와 함께 하심으로 현재의 경험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지배는 안식일의 규칙들에 의해 연기되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아니 차라리, 하나님의 나라는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안식을 성취하는 것이다.
5. 안식일에 대한 초대교회의 견해
2세기와 3세기의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유대교의 안식일에 대하여 거의 통일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이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안식일의 전형적인 성격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안식일이 기독교인들에게 구속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혁명적인 행위들에 의한 깨우침 속에서 초대 원시교회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안식일 습관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이상한 교리들이나 옛 우화들에 현혹되지 말라. 우리가 아직도 유대의 율법에 따라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비록 우리는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질서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지만,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새로운 소망을 지니게 된 사람들이다"
2세기 중엽 최초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였던 순교자 Justin은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거나 안식일 준수와 같은 모세의 율법에 따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신약 아래서의 진정한 안식일 준수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으로 성립되는 영원한 안식을 지키는 것이며, 아담 아벨, 노아와 같은 옛날의 의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도 하나님을 기쁘게 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부과한 것을 그들의 의롭지 못함과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3세기초에 터툴리안은 안식일을 지키는 의무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과 아벨, 노아와 에녹, 그리고 멜기세댁과 롯도 이런 것들을 지켰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안식일은 죄로부터의 휴식을 상징하고,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최후로 휴식할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은 율법의 다른 제의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들은 그림자로 삼는 실체들을 소개할 새로운 입법자가 일어설 때까지만 지속되도록 정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안식일이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구속력을 지니지 못하는 유대교 제도의 하나였음을 한 목소리로 증언하고 있다. 사실 종교개혁가 루터도 주장하기를 제 4계명은 과거 특정한 세대와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이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그의 소요리 문답 45문에서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의 신자된 우리들이 안식일(토요일)과 또는 구약에 기록된 성일들을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까?"라고 질문을 제시하고, 답하기를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께서는 신약 성서 중에 안식일과 다른 성일들을 폐지하셨습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될 것은 개혁가들이 안식일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인 것과 미신적인 것이지, 안식일 제도의 근본적인 목적과 본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폐지론에 대해서 안식일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안식일 제도를 유대인에게 주어졌던 율법적 제도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그리고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는 이들로서, 안식일 제도가 본래 의도했던 목적과 내용이 영속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구약의 안식일과의 관계성 속에서 주일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
6. 안식일에서 주일(The Lord's Day)로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가 한동안 구약의 안식일을 그대로 계속 지켜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첫 세기의 초대교회의 모습 속에는 안식일은 할례만큼이나 널리 지켜지고 있었다. 할례가 세례와 병행해서 준수되었듯이(행 2:38-41, 21:20 등) 아마 안식일도 주일과 병행하여 준수되었던 것 같다. 물론 초대교회는 토요일뿐만 아니라, 날마다 성전에 모여 예배와 교제에 힘썼다.(행 2:46-47)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초대교인들은 차츰 "안식후 첫날"을 예배일로 지키기 시작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모이다가 안식 후 첫날로 그 모임의 시간을 점차로 바꾸어 갔을까?
그 발생 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일치하는 견해는 첫날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으며, 첫날을 지키는 것을 부활사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주일이 지켜지기 시작한 날짜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 날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행전 20장에 기록된 드로아 사건보다 약 1년 전인 AD 54년경에 기록된 고린도 전서 16:2에 나타나 있다. 이 때는 대략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지 약 24년 후가 된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교인들은 처음에는 두 날을 함께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주일을 지키는 방법은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곧 안식과 예배에 관한 방법으로 유대인들이 중요한 성일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역사적인 사건에 의한다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회당으로부터 쫓겨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AD 70년) 안식일에는 성전예배와 회당에 참여하여 안식하였으며, 주일에는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1) 부활 기념일로서의 주일
앞서도 질문했듯이 그렇다면 이렇게 안식일에 회당과 성전 예배에도 참석하던 초대 교인들이 왜 언제부터인가 주일로 그 모임이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앞서도 밝혔듯이 그 발생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학자들이 일치하는 견해는 첫날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으며, 첫날을 지키는 것을 부활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유대교의 한 주에 있어서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의 흐름과 첫 날의 기념적인 성격은 기독교에 있어서 시간 개념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첫째 날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경이적인 부활사건은 7째날 대신에, 첫날이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지명된 충분한 이유가 되며, 그리스도가 제 7일에 무덤에 계셨으므로 유대인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무덤 속에 영원히 장사되어 버렸다. 그리고 안식의 완성이 되시며,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7째 날이 아닌, 한 주의 첫날을 부각시키셨다.
물론 예수 님께서 안식일을 적극적으로 지키신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안식일에 회장에 참석하였으며, 가르치셨으며(막 1:21, 눅 13:10), 안식일에 성경을 읽기도 하셨다.(눅 4:16) 그러나 이것은 그가 부활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주님은 우선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셨으며(마 28:1, 막 16:1, 요 20:1), 승천하시는 날까지 모두 열 한 차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으며, 그 중 여섯 번은 첫날(주일)에 나타나셨다(요 20:11-18, 마 28:7, 눅 24:13-33, 요 20:19-23, 요 20:24-29). 약속된 성령님의 강림도 주의 첫날에 이루어졌고(행 2:1-4), 바로 그 주 첫날에 베드로에 의한 최초의 복음 설교가 있었으며, 사도 요한은 수년 후의 주일에 인봉된 계시의 말씀을 받았다. 결국 주일은 예수님에 의해서 아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날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주의 첫날의 변화가 사도들의 승인 없이 이루어 졌을 리가 없으며, 이는 틀림없이 주님 자신의 재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일은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대에 정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날을 완성하셨으며, 제자들과 함께 지키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 이 날을 지킨 것이다.
우리는 그 실례를 2세기 중엽의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의 글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의 변증문에서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일요일 예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요일은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고후 5:17) 기념할만한 날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 하다.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은 어둠의 권세를 무찌르고 승리하셨다. 생명의 주님이 통 치하신다. 예수님을 부활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매 주일 첫째 날 모여 떡을 떼고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 제 여덟 번째 날(복음서에 의하면 첫 째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창조의 작업을 계속하셨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날을 주님의 날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주님의 날은 주님의 말씀과 행위를 회상하며, 주님의 만찬을 통하여 빵과 잔에 임하신 부활의 주님의 현존을 경 축하는 날이다"
그리고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의 2세기 말엽의 작품에서 "주일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든 근심케 하는 일들을 삼가고 악마에게 빠지지 않기 위하여 세상 일을 잠시 제쳐놓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주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초대 교회 성도들 사이에서 지켜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사도요한이 죽은 지 15년이 안되어 마그네시아(Magnesian)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새로운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7째 날을 지키지 않으며 주일을 지키며 산다. 그 날에 우리의 생명이 그의 죽음에 의하여 다시 소생함을 얻는다"라고 말하여 초대교인들이 주일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그는 주의 첫날을 주일(主日)로, 부활로 신성하게 된 날, 모든 날의 여왕 등으로 언급함으로써 주의 첫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4세기 후반 에데사의 기독교 공동체의 아다이(Addai)라는 사람은 왜 자신들이 한 주의 첫째 날 모이는가에 대해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제자들은 안식일 다음날 그들의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성만찬을 나누었 는데, 그들이 이 날 이렇게 모인 이유는 주님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이 그의 천사들과 함께 마지막날 이 땅에 우리에게 오실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날의 기원이 곧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은 이미 신약의 복음서들이 하나같이 언급하고 있다. 즉 부활을 향한 복음서의 증언들은 주께서 한 주간의 첫날인 주일에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네 복음서가 증거하는 한 주의 첫째 날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마태 28:1-10; 마가 16:1-8; 누가 24:1-12; 요한 20:1-10) 그리고 복음서의 기록들에 의하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 역시 한 주의 첫째 날에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부활하신 예수 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은 종종 주의 첫째 날 오후에 일어났거나, 식사를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마태 28:8-9; 요한 20:11-18; 누가 24:13-35 등). 이렇게 한 주의 첫째 날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은 주의 첫째 날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날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한 주간의 첫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사건과 연결이 되면서부터 "주의 날"(kuriake hemera: the Lord's Day, 계 1:10)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부활하신 주께서 바로 이 날에 있었던 성찬에 함께 하심 때문이었다. (신약성경에 kyriakos라는 단어는 단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첫 번째가 고전 11:20이다. 이것은 성찬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어지고 있다. 또 하나는 계 1:10인데, 여기서는 주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여기서 요한 계시록 1장 10절의 "주일 날"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그것은 "주의 날"(kyriake hemera)의 해석이 두 가지로 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 "주의 날"이 "일요일"을 가리키는 "주님의 날"이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종말적인 주의 날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 즉 후자의 해석은 "주의 날"이 성경이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야웨의 날" 또는 "주의 날"로서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종말론적인 "주의 날"은 언제나 "헤 헤메라 투 쿠리우"(he hemera tou kuriou--the Day of the Lord)로 표현되었지, 계시록 1장 10절의 "쿠리아케 헤메라"(kuriake hemera--a Lord's Day)로 표현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주의 날"은 전자, 즉 일요일로서의 주일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 후의 여러 초대교회의 문서들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다. 예를 들어 디다케(Didache) 14장 1절,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마그네시아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9장 1절 등은 모두 일요일을 의미하는 주일을 "쿠리아케 헤메라"(kuriake hemera)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 보아, 한 주간의 첫날은 1세기 말부터 그리고 2세기에 들어서는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연결이 되면서 "주의 날"이 되었고, 이 날은 초대교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감사하며 감격해하며 모여서 예배드리는 날로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
2) 예배 드리는 날로서의 주일
이렇게 해서 이제 매 주일, 한 주간의 첫째 날에 교회는 그들의 공동예배를 위하여 모이기 시작했다. 초대교회가 한 주간의 첫날을 예배드리는 시간으로 채택한 것은 저들의 편의에 의한 결정이 아니었다. 사실 초대교인들에게 첫날은 놀이(leisure)하고는 거의 상관이 없는 정상적으로 일하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쉼의 명령과 함께 있어 온 안식일이 첫날로 옮겨지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초대교인들에게 일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었고, 예배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Rordorf는 말하기를 "주일에 일하지 않는 습관은 그때까지도 안식일을 지키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연적으로 불가능하였고, 또한 이방 그리스도인들 (그 중에는 노예들도 있었다)에게도 불가능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교회를 이스라엘과 그 사회의 나머지 다른 공동체들과 확실하게 구별지어주는 것은 바로 한 주간의 첫날에 드리던 예배의 모임이었다. 함께 모임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성찬을 나누는 것은 (때로는 후보자가 있으면 세례식도 거행) 초대 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날 함께 모인 성도들은 제자들 앞에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회상하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3) 여덟 번째 날로서의 주일
한 주간의 첫날 역시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종말론 역시 다시 승화되었다. 주일은 이제 "여덟 번째 날"(the eight day)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제 8일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6일간의 사역을 하시고 하루(제 7일)를 쉬셨다가, 제 8일 어두움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제 8일은 세례에 의한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결국 주일은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성례전이 베풀어지는 날이 되었다.
성찬과 세례는 모두 교회로 하여금 주님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과 연결되어지게 하였고,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함께 체험케 한다. 세례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등장하게 하였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새롭게 태어난 자녀로 만들었다. 성찬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님의 식탁 교제와 그의 속죄의 희생에 참여하게 하였다. 세례는 또한 창조의 새롭게 함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였고, 성찬은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교회의 종말론적인 결혼 향연을 기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이제 변형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주일은 교회의 예배드리는 날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이루어진 구속의 성례전적인 상징(signs)들, 즉 세례와 성찬을 위하여 함께 모임은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이 된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도 주일은 안식일이 그래왔던 것처럼 쉬는 날로 간주되어질 수가 없었다. 비록 공동체가 첫날에 쉬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안식일의 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첫날은 일곱번 째 날이 아니다.(비록 이 날이 여덟번째 날이라 하여도) 그리고 안식일 쉼은 일곱번 째 날에 와야했다. 새로운 출애굽과 새로운 계약은 새로운 의미와 함께 새로운 날의 일어남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절기로서의 주일
기독교의 주일은 일종의 축일, 즉 하나의 절기로도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초창기부터 아주 널리 퍼져 있었다. 구약성경에 보면 특정한 날들이 축일들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들은 "거룩한 날"일 뿐만 아니라 절기이기도 하다. 그 날에 참여하는 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이 날들에는 "거룩한 성회"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그런데 교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똑같은 어휘가 기독교 주일과 연관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나바서 15: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덟째 날을 경축한다. 이 날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이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기독교의 축일을 이방의 축일과 혼합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면서, 기독교의 축일들을 설명한다. 여기서 터툴리안은 분명히 주일을 일종의 축일로 간주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글에도 "첫 날"과 "제 팔일"은 절기와 안식사상과 연관되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적 축일 사상이 주일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초대교인들은 주일과 유대적 축일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비친 주일은 일종의 절기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테일리(Staley)가 [예배력]에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주일, 곧 주의 날은 교회력에서 나오는 모든 축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요의 초창기부터 지켜왔다. 이 날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주마다 기념하는 날이다"
7. 주일과 주의 만찬(The Lord's Day and Lord's Supper)
주일의 중심적인 의미를 부활에 둔다면, 잡히시던 밤 주님이 제자들과 나눈 주의 만찬에서 그 핵심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성만찬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다. 성만찬은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어졌으며, 여전히 모든 인류를 위하여 효과가 있는 그 분의 희생에 대한 살아있고도 유효한 징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성육신, 종되심, 사역, 가르치심, 고난, 희생,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 등)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신다. 성만찬은 또한 그의 재림과 그 마지막 왕국을 이곳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만찬 때 우리에게 실제로 임재하도록 하시며, 성만찬 제정 때 하신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분명 성만찬의 중심이며, 성찬 제정 때 하신 말씀에 담긴 약속은 성만찬 거행에 있어서 근본이 된다. 성령님은 성만찬을 가능케 하며, 성찬식이 계속해서 유효하도록 만드시는 무한한 사랑의 임이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교인들은 부활을 축하하기 위하여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으며, 모이면 함께 말씀을 듣고 떡을 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주님의 만찬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요약하면, 일요일은 주의 날이 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날이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포도주를 마신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앞으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품고, 그리스도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하는 자들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며, 이들과 교제하는 날이다. 또한 부활과 관련지어 일 주일의 첫날이 바로 주일이며, 이는 창조의 날이라고 말한다. 저스틴의 말처럼 어두움과 문제들을 바꾸시며, 세상을 창조하신 날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세비우스도 이 날은 주님께서 창조의 첫 열매로 시작된 날이며, 그가 부활에 세상의 첫 열매로 주신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날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이전의 "안식" "약속" "그림자" "예언"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옛 언약"으로, 그리스도 이후의 "회복" "성취" "실재" "실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언약"을 통합적으로 실현하는 날이다.
8. 안식일과 주일의 연속성, 불연속성의 문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초대 교회에서 처음에 교인들은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를 예배일로 지켰다. 그러나 복음이 점점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면서 예배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바뀌어 갔다.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토요일과 일요일을 같이 예배일로 지키던 기독교 공동체는 이제 공식적인 예배일로 일요일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처음 약 3세기 동안에는 어떤 기록에도 이 주일을 십계명의 제 4계명(출 20:8-11)과 연관시키는 글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후대에 나타난 제 4계명과 주일을 연관시키는 것은 초대 교부들 사이에서 또한 그들의 지도를 받던 초대 교회에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일이었다.
321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기독교 예배일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연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 칙령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모든 재판관들과 시민들과 장인들은 존경스러운 태양의 날(일요일)에 쉬어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 콘스탄틴의 칙령은 기독교 예배일로서 주일을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소개해 보면,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주일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서는 관습을 통일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회 법안을 통과시켰다. 350년 강그라 회의는 주일날의 금식을 정죄했고, 하나님의 집을 경멸하고 분파적 집회를 자주 개최하는 자들을 정죄하였다. 363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는 기독교인들이 휴일로서 유대교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준수하지 말고, 일요일에 준수하라고 명령하였다. 368년 데오도시우스 1세는 한 칙령을 반포하여 일요일에 노예 석방을 허락한 콘스탄틴의 칙령을 반복하였으며, 거룩한 종교의식들이 "우리 조상들이 올바르게 '주일'이라고 명명했던 태양의 날에" 방해받지 않도록 재판관들의 공판 심문을 금지하였다. 436년 제 4차 카르타고 회에는 설교 중에 교회를 떠나는 자들에게 파문으로 위협하였으며, 주일에 금식을 금지하였고, 일요일에 경기에 참가한다든다 경기장에 가는 일을 만류하였다. 425년 데오도시우스 2세는 일요일과 다른 교회 축일들에 일체 모든 경기들을 금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469년에는 비록 황제의 생일이라 하더라도 일요일에 경기를 벌여 축하하는 일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 시켰다. 538년에 제 3차 오를레앙 교회 회의는 일요일에 일체의 농사 행위 마져도 금지시켰다. 585년 제 2차 마콘 교회 회의는 구약 성경의 인식일 규정들의 권위로 일요일에 노동을 금하였고, 예배를 명하였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중세로 접어들면서부터 교회 안에 안식일 엄수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중세 후기에는 일요일 준수는 점차로 구약 성경의 안식일 계명들 위에 기초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점점 제도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율법주의를 구약 성경의 율법들로부터 정당화시키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되어간 것이다. 그래서 교회 회의들과 지도자들은 유대교 안식일의 준수에 부과된 규정과 유사하게 일요일의 준수에 제약 규정들을 부과하였다. 결과적으로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안식일 엄수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일요일은 기독교적 인식일(Christian Sabbath)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일요일 준수는 제 4계명이나 교회의 교령들 뒤에 기초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안식일"(Christian Sabbath)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쓴 사람은 12세기의 페트루스 알폰수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초대교회는 4세기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도 구약의 안식일 개념을 주일에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밝힌 것처럼 중세 후기를 지나면서 교회는 주일에 대한 개념을 왜곡시키게 되었는데, 그것은 주일을 부활의 날로서 기념되는 날이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의 확장으로서의 주일이라는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 시대까지는 없었던 신학이었던 안식일 엄수주의는 중세 후기의 신학에서 강력하게 등장하였고, 교회는 이것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악식일 엄수주의에 대해서 Baker 신학사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인식일 엄수주의는 주일(일요일)에 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콘스탄틴 황제가 321년에 규칙을 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789년 살레망 대제가 십계명의 제 4계명을 근거로 하여 이를 정당화한 데에서부터 공식적으로 실시되었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적인 외형주의로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1677년에 청교도들은 영국의 "안식일 법"을 제정하였다"
그렇다면 안식일 엄수주의는 어떤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일요일이 기독교인의 안식일이며, 이 날을 지키는 것이 십계명의 넷째 계명에 입각한 도덕적 의무라는 것이다. 그리고 16세기말의 청교도들은 이 안식일 엄수주의를 가장 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이후 주일 신학의 논쟁은 이 "안식일 엄수주의"와 "안식일에 대한 자유로운 입장" 간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1) 주일의 안식일에 대한 연속적 입장(인식일 엄수주의 Sabbatarianism)
후기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
청교도적 안식일 엄수주의
웨스트민스턴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안식일 엄수주의
2) 주일의 안식일에 대한 불연속적 입장
종교개혁가들의 입장.
루터, 칼뱅, 존 낙스
9. 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1) 새로운 창조와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날
2)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신앙고백으로 예배하는 날
3) 하나님의 자녀들이 공동체 의식으로 함께 모여 교제하는 날
4) 신자들의 영적 성장의 날
5) 이웃을 내 몸처럼 돌아보는 구제와 봉사의 날
6) 미래에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날
III. 나가는 말: 설교적 접근
1)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 회복
2) 부활의 사건을 선포하는 케리그마적 설교: 초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나타났던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부활의 기쁨과 감격에 동참하는 교회력에 담긴 주일의 의미를 회복하는 말씀의 선포.
3) 교회력을 따라 교인들의 삶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관계를 맺도록 설교
4) 주일에 대한 올바른 이해: 현대교회가 지니고 있는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의 주일성수가 아닌, 성도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안식에 동참하게 하는 "참 안식에의 초대"가 있어야 할 것.
참고문헌
이 호형. "신약교회에서의 안식일과 주일," 기독교 사상 통권 448호 (1996. 4)
Abraham Joshua Heschel. 안식일: 시간속의 지성소. 오만규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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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ekly Cycle: Sabbath, Sunday and the Lord's Day
- 주승중 교수(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교수) -
I. 들어가는 말: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부활의 능력은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시간 개념도 바꾸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새 창조(부활)는 달력을 위한 새로운 원리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사실 유대교를 비롯한 몇몇 문화 속에서는 년들은 세계가 창조된 날로부터 계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예를 들어 로마제국 같은 곳에서는 년들이 나라의 시작과 관련하여 계산하거나 혹은 역사에 있어서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과 관련하여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로마 같은 곳에서는 아주 오래된 사건들은 로마가 세워지기 전으로 거꾸로 계산을 하였고, 최근의 사건들은 로마가 세워진 후로부터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 관습을 받아들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너무나도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부활은 곧 새로운 창조로서 인식되어졌고, 결과적으로 부활은 모든 날들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서구의 세계에서 역사는 B.C.와 A.D.로 나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기준이 생긴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몇 세기가 지난 후 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역사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초대교회가 한 주간의 첫날에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기뻐하면서 예배를 드리게 된 중요한 동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 강의는 교회력의 기초이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간 주기(The Weekly cycle)의 역사적인 기원과 그 의미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특별히 안식일에서 주일로 이어지는 주간 주기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하며, 그 내용은 안식일의 기원, 신학,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예배와 모임의 변천 과정을 다루고, 주일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역사적인 논쟁에 대해서도 고찰하는 가운데 현대교회가 가져야 할 주일 예배에 대한 태도와 주일성수 방향 등에 대해서도 모색하고자 한다.
II. 몸 말
1. 주간 주기의 역사적 기원
7일을 한 단위로 하는 주(week)는 그 기원이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 기원은 여러 중동 문화의 오래된 유산일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한 주의 마지막 날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의 행위를 기억하는 예배의 때로 확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 날을 "안식일"(The sabbath)라고 불렀으며, 그 의미는 단순히 "일곱 번째"(the seventh)라는 말이다. 그것은 창세기 2:2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창조의 7번째 날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었다. 그런데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부활 사건 속에서 바로 그 첫 창조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첫 창조세계는 인간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결과적으로 창조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부활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였다.(고후 5:17, 갈 6:15). 이 세상에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죄로부터 세상을 구원한 창조주는 없었다. 그러므로 제 7일에 회당에 가는 것에 더해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행 20:7과 고전 16:2절에 기록된 대로 한 주일의 첫날에 함께 모여서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
2. 안식일(The Sabbath)
그런데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주일의 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유대인의 안식일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교인들은 처음에는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주일 예배를 드릴 때에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의 7일이라는 시간개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요슈아 헤셀은 그의 책 "안식일"(The Sabbath)에서 안식일에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에 사용된 말들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낱말은 '거룩한'의 뜻을 가진 '카도쉬'인데, 이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신성의 신비와 위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면 이 세계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거룩한 대상은 무엇이었는가?...실로 가장 최초로 거룩하게 된 것은 창조의 마지막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여 이 '거룩한'이라는 낱말이 시간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말할 수 없으리만큼 의미심장한 말이다...성경에는 거룩함의 최초의 표현이 시간 속의 거룩한 곧 안식일(Sabbath)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거듭되어 왔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해명되지는 않았다. 그 동안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었다.
(1) 바벨론 기원설
(2) 혹성 기원설(The Planet origin)
(3) 만월 기원설(The Lunar origin)
(4) 가나안 정착 기원설
(5) 켄 족속 기원설
(6) 월력 기원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종교생활 중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성일(聖日)이 이방세계나 자연계의 주기 또는 사회적 질서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이런 주장들은 그 근거가 빈약하며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7이라는 숫자인데, 이 숫자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자연에도 이와 같은 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천체에도 7을 단위로 한 주기적인 움직임은 없다. 고대의 사회적 생활 양식에도 7일을 단위로 하는 시간 주기와 정확하게 일치할만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이 성일이 자연계의 주기나 사회적 질서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7이라는 숫자는 어떤 법칙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라기 보다는 무작위적인(arbitrary) 결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7이라는 숫자와 함께 안식일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명령(divine mandate)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7일이라는 개념이 자연의 리듬에 의해서 생긴 것이든, 문화적인 요소에 의해서 생긴 것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이 깃들여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날은 단순히 매 7일째에 쉬도록 명령되어진 날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안식일의 기원은 모세가 기록한 성경에 있다는 말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계시해 준 사실을 전해 준 이가 바로 모세임을 밝히고 있다.(느 9:12-14) 그리고 특별히 에스겔 선지자는 안식일이 주어지게 된 것을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겔 20:11-12) 중요한 것은 이렇게 divine mandate로 주어진 안식일이 후에 이스라엘 역사에 의해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부여(rationales)가 주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3. 안식일의 의미(rationales)
안식일은 (할례와 함께)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표시(mark)이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이 땅의 다른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과 구별지어주는 것이며, 그들이 야웨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
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
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출 31:13, 안식일 규례에 대한 말씀 중 출
31:12-17)
1) 쉼의 날(the day of rest)
이스라엘에게서 안식일은 분명히 원시 동맹(primitive amphictyony:인보동맹, 근린동맹)시대로까지 그 날자가 거슬러 올라간다. 안식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야웨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쉼이다. 진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구약성경에서도 발견되어지는 바와 같이 언제나 "쉼의 날"(days of rest)을 의미하였다. Rordorf는 그의 유명한 책 "Sunday"에서 설명하기를 "모든 나라들 가운데 이스라엘에게만 안식일은 매주일 지켜야 할 것으로 주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쉼의 중요한 의미는 두 가지의 전통에 의해서 다르게 해석되어져 왔는데, 먼저 창조에 관한 P문서(the Priestly account)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사역을 완전히 마치신 후에 쉬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고, 또 하나는 출애굽 사건이다. 이 들 중의 첫 번째 설명은 출 20:11에 나타나고 있는 십계명 속에서 보여지고 있는데;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리고 두 번째 내용은 신명기 5:12-15에서 발견된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 안식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과, 노예들과 심지어는 모든 육축들에게 까지 적용되어 지고 있다. 그런데 위의 안식일에 대한 두 말씀은 상호간에 상충되는 말씀이 아니다. 그 보다는 차라리 "신명기서는 계약의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안식일을 보고 있으며, 제사문서는 계약의 하나님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두 말씀은 동전의 다른 두 양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계약의 표시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세워진 계약(the Covenant) 표시(mark)이다. 여기서 명령된 안식은 야웨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행위이며, 또한 심오한 인도주의적인 의무이기도 하다.(humanitarian duty). 무지개가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언약의 증거였고(창 9:1-2, 17), 할례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의 증거였던 것처럼(창 17:11),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증거(출 31:13, 17)가 된 것이다. 그리고 창 17:9이하에 나타나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출 31:16이하에 보면 안식일도 아브라함과 주의 자손들이 지켜야 할 영속적인 언약임을 알 수 있다.
3) 시간과 역사의 개념을 바꿈
안식일은 또한 이스라엘의 시간과 역사의 개념을 바꾸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모든 원시 고대민족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7일을 한 주간으로 계산하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환적인(cyclical) 그리고 신화적인 (mythological) 시간 개념보다는 직선적인(linear) 그리고 역사적인(historical) 시간개념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역사적인 행위들은 안식일을 지킴 속에서 기억되어졌고, 인류존재의 모든 과정에 대한 아주 급진적인 새로운 시각이 이로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념일로서 지켜지게 되었고, 또한 구속의 기념일로서도 지켜지게 된 것이다.
창세기 천지창조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 이렇게 구약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안식의 이야기는 창조사역 후의 하나님의 휴식으로 시작된다. 또한 계속해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축복하셨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구절이 부연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날에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기 때문이다. 칼뱅은 이러한 안식일을 일차적으로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일하시도록 허락하는 영적인 안식의 모형이라고 하였다. 아무튼 이렇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념일(출 20:11, 31:17)로 지켜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5:14-15)의 기록에 의하면 안식일은 강하신 손과 편 팔로 애굽의 종 되었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즉 이 날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셨던 약속의 땅에서 쉴 수 있게 된 그의 피곤한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4) 종말론적인 의미
역사의 해석을 위한 열쇠로서의 안식일의 역할에 더해서, 안식일은 또한 종말론적인 차원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eschatological dimension). 안식일--한 주간의 7번째 날--은 성취와(fulfillment) 완전(perfection)의 표시였다. 일곱 번째 날은(안식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마침내 반드시 완전함(wholeness)으로, 샬롬(Shalom)으로 인도하실 것에 대한 기대였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 마지막 안식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모두를 향한 구원으로 이해하였다.(이사야 56:1-8) 그래서 랍비들은 안식일 준수는 다가올 시대를 대비하는 필수적인 일이며, 인간사에 등장하는 다른 삶의 여정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다가올 세계가 모든 안식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5) 예배의 날
그런데 후에 포로 기간동안 안식일은 계약의 뛰어난 사인(sign)으로 인식되었다. 성전과 희생제사가 없는 상황 속에서 할례와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로부터 구별된 민족이라는 표시가 되었다. 진실로, 안식일은 이스라엘 민족과 그들의 문화가 생존하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었다. "안식일이 있는 한 유대인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을 만큼 안식일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중요했다. 그 결과로 안식일의 지킴은 더욱 강화되었고 안식일은 종교예배의 날이 되었다. 회당의 등장과 함께, 예배를 위한 모임은 공동체를 위하여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 분명히, 이 때 이전에도 안식일과 연결된 성전예배와 가정예배가 있어져 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예배는 안식의 의무와 함께 안식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벨론 포로 이후 점점 안식일의 이러한 본질적인 정신은 사라져갔다. 이스라엘은 7째 날을 공식적인 휴식 일로서 희생제사와 함께 지키기는 하였지만, 내적으로는 심령의 부패와 탐욕, 우상숭배, 반역 등에 의해 안식은 더럽혀지고 있었다. 선지자들은 이러한 종교적 형식주의를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그 시대의 형식적인 안식일 준수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진정한 안식일의 준수는 자기 길로 행하는 것으로 부터나 자기 오락을 찾는 것으로부터 떠나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정의했다.(사 58:13-14)
4. 예수님과 안식일의 관계
이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이 인식일의 주인이라는 폭탄적인 선언을 하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향한 예수의 태도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것과는 아주 급진적으로 달랐다. 누가의 기록대로(4:14-21),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설교를 위하여 안식일의 회당모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안식일의 쉼의 의무로부터 자신은 자유하다고 알고 계셨다. 이것은 특별히 예수의 안식일의 병고침과 그의 대적 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논쟁에서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예: 눅 6:1-11 참고)
유대인들의 안식일 지킴은 완전하고 전적인 쉼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안식의 명령을 강화하기 위하여 추구되어지고 수세기를 통하여 개발되어진 궤변은 아직도 안식일의 인도주의적인 특성을 방해하고 있다. 정말로 안식일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기쁨의 날이었다. 심지어는 안식일 명령 속에 나타난 율법적인 특성 속에서도 안식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서 인식되어져 왔다. 랍비들은 안식일의 쉼이 범해질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들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주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때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가축의 생명도 구해주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비록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적을 공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지만, 적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기를 잡는 것도 법적으로 간주되었다.
마가복음 2:23--3:6에 나타난 두 가지 이야기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 이야기는 (막 2:23-2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에 이삭을 주운 사건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윗이 하나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을 변호하였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리기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막 3:1-6)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를 물어보셨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이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자, 그 사람의 손을 치료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모두 예수 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의 쉼의 명령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사건에서 (마 12:1-8, 눅 6:1-5 과 평행), 사도들을 위한 어떤 정당성도 주어지지 않았다. (마태는 제자들이 배고파서 먹었다는 근거에 대해서 그들을 비판하고자 한다. 마태 12:1) 비록 몇 가지 정당성이 주어진다 하여도, 그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제자들이 잘 알고 있었듯이, 한 주간의 여 섯번 째 날(금요일)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 어떤 유대인도 다가오는 안식일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것에 대한 변명을 가져다 줄만한 근거가 없었다. 차라리, 안식일의 쉼은 계속해서 지켜져야만 했다. 비록 그것이 하루 종일 아무런 먹을 것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다윗의 행위에 대한 언급은(삼상 21:1-7)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복음서 안에 인용된 삼상 21:1-7은 단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안식일에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이삭을 줍는 행위를 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삼상 21:1-7은 아무리 양보해도, 안식일에 이삭을 주은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가 없다)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응답, 즉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안식일 명령에 대한 강한 도전을 나타내주고 있다.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박애의 표현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응답은 안식일 명령에 대한 최첨단의 공격이었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인간을 노예화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더욱 결정적이다. 예수님의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행위는 이 명령에 대한 긍정적인 경시(a positive disregard)이다. 앞서 밝힌 대로 그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동물에 대한 치료는 안식일에도 허용되었다. 여하튼, 예수님의 치료행위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안식일 명령에 의해 부과된 여러 가지 제한들을 거부하심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스라엘의 전통에 대한 이런 급진적인 단절(break)은 은연 중의 그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acknowledgement)하고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안식일 명령 위에 놓으셨고, 그럼으로 자신을 구원의 최종적인 전달자로서 지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로돌프(Rordorf)는 그의 유명한 책 "Sunday"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파기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도발적인 행동이었으나, 내적인 의미로 볼 때, 거기에는 그의 메시야 의식의 은밀한 선포를 뜻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일에는 사랑, 동정, 자비의 행동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일적 행동" 다시 말해서 메시야적 안식일, 구약적 안식의 완성이 이 세상에 도래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어느 날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병고치는 데 가장 합당한 날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 님께서는 안식일 명령의 종말론적인 약속을 재발견하셨고, 이제 거기에 새로운 차원을 가미하셨다. 하나님에 의하여 약속되어진 샬롬(Shalom)이 인류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 시간은 현재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의 즉각성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함께 만나고 있는 그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지의 현존 앞에 서있는 것이 되었다. 지금이 바로 이 사람을 위한 시간인 것이다. 샬롬(Shalom)--전체성(wholeness), 치료(healing), 그리고 구원이 하나님께서 메시야이신 예수 안에서 인류와 함께 하심으로 현재의 경험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지배는 안식일의 규칙들에 의해 연기되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아니 차라리, 하나님의 나라는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안식을 성취하는 것이다.
5. 안식일에 대한 초대교회의 견해
2세기와 3세기의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유대교의 안식일에 대하여 거의 통일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이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안식일의 전형적인 성격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안식일이 기독교인들에게 구속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혁명적인 행위들에 의한 깨우침 속에서 초대 원시교회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안식일 습관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이상한 교리들이나 옛 우화들에 현혹되지 말라. 우리가 아직도 유대의 율법에 따라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비록 우리는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질서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지만,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새로운 소망을 지니게 된 사람들이다"
2세기 중엽 최초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였던 순교자 Justin은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거나 안식일 준수와 같은 모세의 율법에 따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신약 아래서의 진정한 안식일 준수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으로 성립되는 영원한 안식을 지키는 것이며, 아담 아벨, 노아와 같은 옛날의 의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도 하나님을 기쁘게 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부과한 것을 그들의 의롭지 못함과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3세기초에 터툴리안은 안식일을 지키는 의무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과 아벨, 노아와 에녹, 그리고 멜기세댁과 롯도 이런 것들을 지켰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안식일은 죄로부터의 휴식을 상징하고,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최후로 휴식할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은 율법의 다른 제의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들은 그림자로 삼는 실체들을 소개할 새로운 입법자가 일어설 때까지만 지속되도록 정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안식일이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구속력을 지니지 못하는 유대교 제도의 하나였음을 한 목소리로 증언하고 있다. 사실 종교개혁가 루터도 주장하기를 제 4계명은 과거 특정한 세대와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이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그의 소요리 문답 45문에서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의 신자된 우리들이 안식일(토요일)과 또는 구약에 기록된 성일들을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까?"라고 질문을 제시하고, 답하기를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께서는 신약 성서 중에 안식일과 다른 성일들을 폐지하셨습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될 것은 개혁가들이 안식일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인 것과 미신적인 것이지, 안식일 제도의 근본적인 목적과 본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폐지론에 대해서 안식일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안식일 제도를 유대인에게 주어졌던 율법적 제도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그리고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는 이들로서, 안식일 제도가 본래 의도했던 목적과 내용이 영속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구약의 안식일과의 관계성 속에서 주일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
6. 안식일에서 주일(The Lord's Day)로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가 한동안 구약의 안식일을 그대로 계속 지켜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첫 세기의 초대교회의 모습 속에는 안식일은 할례만큼이나 널리 지켜지고 있었다. 할례가 세례와 병행해서 준수되었듯이(행 2:38-41, 21:20 등) 아마 안식일도 주일과 병행하여 준수되었던 것 같다. 물론 초대교회는 토요일뿐만 아니라, 날마다 성전에 모여 예배와 교제에 힘썼다.(행 2:46-47)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초대교인들은 차츰 "안식후 첫날"을 예배일로 지키기 시작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모이다가 안식 후 첫날로 그 모임의 시간을 점차로 바꾸어 갔을까?
그 발생 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일치하는 견해는 첫날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으며, 첫날을 지키는 것을 부활사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주일이 지켜지기 시작한 날짜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 날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행전 20장에 기록된 드로아 사건보다 약 1년 전인 AD 54년경에 기록된 고린도 전서 16:2에 나타나 있다. 이 때는 대략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지 약 24년 후가 된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교인들은 처음에는 두 날을 함께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주일을 지키는 방법은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곧 안식과 예배에 관한 방법으로 유대인들이 중요한 성일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역사적인 사건에 의한다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회당으로부터 쫓겨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AD 70년) 안식일에는 성전예배와 회당에 참여하여 안식하였으며, 주일에는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1) 부활 기념일로서의 주일
앞서도 질문했듯이 그렇다면 이렇게 안식일에 회당과 성전 예배에도 참석하던 초대 교인들이 왜 언제부터인가 주일로 그 모임이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앞서도 밝혔듯이 그 발생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학자들이 일치하는 견해는 첫날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으며, 첫날을 지키는 것을 부활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유대교의 한 주에 있어서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의 흐름과 첫 날의 기념적인 성격은 기독교에 있어서 시간 개념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첫째 날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경이적인 부활사건은 7째날 대신에, 첫날이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지명된 충분한 이유가 되며, 그리스도가 제 7일에 무덤에 계셨으므로 유대인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무덤 속에 영원히 장사되어 버렸다. 그리고 안식의 완성이 되시며,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7째 날이 아닌, 한 주의 첫날을 부각시키셨다.
물론 예수 님께서 안식일을 적극적으로 지키신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안식일에 회장에 참석하였으며, 가르치셨으며(막 1:21, 눅 13:10), 안식일에 성경을 읽기도 하셨다.(눅 4:16) 그러나 이것은 그가 부활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주님은 우선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셨으며(마 28:1, 막 16:1, 요 20:1), 승천하시는 날까지 모두 열 한 차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으며, 그 중 여섯 번은 첫날(주일)에 나타나셨다(요 20:11-18, 마 28:7, 눅 24:13-33, 요 20:19-23, 요 20:24-29). 약속된 성령님의 강림도 주의 첫날에 이루어졌고(행 2:1-4), 바로 그 주 첫날에 베드로에 의한 최초의 복음 설교가 있었으며, 사도 요한은 수년 후의 주일에 인봉된 계시의 말씀을 받았다. 결국 주일은 예수님에 의해서 아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날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주의 첫날의 변화가 사도들의 승인 없이 이루어 졌을 리가 없으며, 이는 틀림없이 주님 자신의 재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일은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대에 정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날을 완성하셨으며, 제자들과 함께 지키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 이 날을 지킨 것이다.
우리는 그 실례를 2세기 중엽의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의 글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의 변증문에서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일요일 예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요일은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고후 5:17) 기념할만한 날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 하다.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은 어둠의 권세를 무찌르고 승리하셨다. 생명의 주님이 통 치하신다. 예수님을 부활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매 주일 첫째 날 모여 떡을 떼고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 제 여덟 번째 날(복음서에 의하면 첫 째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창조의 작업을 계속하셨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날을 주님의 날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주님의 날은 주님의 말씀과 행위를 회상하며, 주님의 만찬을 통하여 빵과 잔에 임하신 부활의 주님의 현존을 경 축하는 날이다"
그리고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의 2세기 말엽의 작품에서 "주일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든 근심케 하는 일들을 삼가고 악마에게 빠지지 않기 위하여 세상 일을 잠시 제쳐놓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주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초대 교회 성도들 사이에서 지켜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사도요한이 죽은 지 15년이 안되어 마그네시아(Magnesian)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새로운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7째 날을 지키지 않으며 주일을 지키며 산다. 그 날에 우리의 생명이 그의 죽음에 의하여 다시 소생함을 얻는다"라고 말하여 초대교인들이 주일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그는 주의 첫날을 주일(主日)로, 부활로 신성하게 된 날, 모든 날의 여왕 등으로 언급함으로써 주의 첫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4세기 후반 에데사의 기독교 공동체의 아다이(Addai)라는 사람은 왜 자신들이 한 주의 첫째 날 모이는가에 대해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제자들은 안식일 다음날 그들의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성만찬을 나누었 는데, 그들이 이 날 이렇게 모인 이유는 주님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이 그의 천사들과 함께 마지막날 이 땅에 우리에게 오실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날의 기원이 곧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은 이미 신약의 복음서들이 하나같이 언급하고 있다. 즉 부활을 향한 복음서의 증언들은 주께서 한 주간의 첫날인 주일에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네 복음서가 증거하는 한 주의 첫째 날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마태 28:1-10; 마가 16:1-8; 누가 24:1-12; 요한 20:1-10) 그리고 복음서의 기록들에 의하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 역시 한 주의 첫째 날에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부활하신 예수 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은 종종 주의 첫째 날 오후에 일어났거나, 식사를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마태 28:8-9; 요한 20:11-18; 누가 24:13-35 등). 이렇게 한 주의 첫째 날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은 주의 첫째 날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날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한 주간의 첫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사건과 연결이 되면서부터 "주의 날"(kuriake hemera: the Lord's Day, 계 1:10)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부활하신 주께서 바로 이 날에 있었던 성찬에 함께 하심 때문이었다. (신약성경에 kyriakos라는 단어는 단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첫 번째가 고전 11:20이다. 이것은 성찬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어지고 있다. 또 하나는 계 1:10인데, 여기서는 주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여기서 요한 계시록 1장 10절의 "주일 날"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그것은 "주의 날"(kyriake hemera)의 해석이 두 가지로 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 "주의 날"이 "일요일"을 가리키는 "주님의 날"이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종말적인 주의 날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 즉 후자의 해석은 "주의 날"이 성경이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야웨의 날" 또는 "주의 날"로서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종말론적인 "주의 날"은 언제나 "헤 헤메라 투 쿠리우"(he hemera tou kuriou--the Day of the Lord)로 표현되었지, 계시록 1장 10절의 "쿠리아케 헤메라"(kuriake hemera--a Lord's Day)로 표현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주의 날"은 전자, 즉 일요일로서의 주일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 후의 여러 초대교회의 문서들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다. 예를 들어 디다케(Didache) 14장 1절,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마그네시아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9장 1절 등은 모두 일요일을 의미하는 주일을 "쿠리아케 헤메라"(kuriake hemera)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 보아, 한 주간의 첫날은 1세기 말부터 그리고 2세기에 들어서는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연결이 되면서 "주의 날"이 되었고, 이 날은 초대교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감사하며 감격해하며 모여서 예배드리는 날로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
2) 예배 드리는 날로서의 주일
이렇게 해서 이제 매 주일, 한 주간의 첫째 날에 교회는 그들의 공동예배를 위하여 모이기 시작했다. 초대교회가 한 주간의 첫날을 예배드리는 시간으로 채택한 것은 저들의 편의에 의한 결정이 아니었다. 사실 초대교인들에게 첫날은 놀이(leisure)하고는 거의 상관이 없는 정상적으로 일하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쉼의 명령과 함께 있어 온 안식일이 첫날로 옮겨지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초대교인들에게 일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었고, 예배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Rordorf는 말하기를 "주일에 일하지 않는 습관은 그때까지도 안식일을 지키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연적으로 불가능하였고, 또한 이방 그리스도인들 (그 중에는 노예들도 있었다)에게도 불가능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교회를 이스라엘과 그 사회의 나머지 다른 공동체들과 확실하게 구별지어주는 것은 바로 한 주간의 첫날에 드리던 예배의 모임이었다. 함께 모임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성찬을 나누는 것은 (때로는 후보자가 있으면 세례식도 거행) 초대 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날 함께 모인 성도들은 제자들 앞에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회상하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3) 여덟 번째 날로서의 주일
한 주간의 첫날 역시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종말론 역시 다시 승화되었다. 주일은 이제 "여덟 번째 날"(the eight day)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제 8일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6일간의 사역을 하시고 하루(제 7일)를 쉬셨다가, 제 8일 어두움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제 8일은 세례에 의한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결국 주일은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성례전이 베풀어지는 날이 되었다.
성찬과 세례는 모두 교회로 하여금 주님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과 연결되어지게 하였고,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함께 체험케 한다. 세례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등장하게 하였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새롭게 태어난 자녀로 만들었다. 성찬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님의 식탁 교제와 그의 속죄의 희생에 참여하게 하였다. 세례는 또한 창조의 새롭게 함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였고, 성찬은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교회의 종말론적인 결혼 향연을 기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이제 변형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주일은 교회의 예배드리는 날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이루어진 구속의 성례전적인 상징(signs)들, 즉 세례와 성찬을 위하여 함께 모임은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이 된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도 주일은 안식일이 그래왔던 것처럼 쉬는 날로 간주되어질 수가 없었다. 비록 공동체가 첫날에 쉬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안식일의 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첫날은 일곱번 째 날이 아니다.(비록 이 날이 여덟번째 날이라 하여도) 그리고 안식일 쉼은 일곱번 째 날에 와야했다. 새로운 출애굽과 새로운 계약은 새로운 의미와 함께 새로운 날의 일어남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절기로서의 주일
기독교의 주일은 일종의 축일, 즉 하나의 절기로도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초창기부터 아주 널리 퍼져 있었다. 구약성경에 보면 특정한 날들이 축일들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들은 "거룩한 날"일 뿐만 아니라 절기이기도 하다. 그 날에 참여하는 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이 날들에는 "거룩한 성회"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그런데 교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똑같은 어휘가 기독교 주일과 연관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나바서 15: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덟째 날을 경축한다. 이 날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이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기독교의 축일을 이방의 축일과 혼합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면서, 기독교의 축일들을 설명한다. 여기서 터툴리안은 분명히 주일을 일종의 축일로 간주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글에도 "첫 날"과 "제 팔일"은 절기와 안식사상과 연관되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적 축일 사상이 주일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초대교인들은 주일과 유대적 축일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비친 주일은 일종의 절기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테일리(Staley)가 [예배력]에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주일, 곧 주의 날은 교회력에서 나오는 모든 축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요의 초창기부터 지켜왔다. 이 날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주마다 기념하는 날이다"
7. 주일과 주의 만찬(The Lord's Day and Lord's Supper)
주일의 중심적인 의미를 부활에 둔다면, 잡히시던 밤 주님이 제자들과 나눈 주의 만찬에서 그 핵심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성만찬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다. 성만찬은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어졌으며, 여전히 모든 인류를 위하여 효과가 있는 그 분의 희생에 대한 살아있고도 유효한 징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성육신, 종되심, 사역, 가르치심, 고난, 희생,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 등)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신다. 성만찬은 또한 그의 재림과 그 마지막 왕국을 이곳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만찬 때 우리에게 실제로 임재하도록 하시며, 성만찬 제정 때 하신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분명 성만찬의 중심이며, 성찬 제정 때 하신 말씀에 담긴 약속은 성만찬 거행에 있어서 근본이 된다. 성령님은 성만찬을 가능케 하며, 성찬식이 계속해서 유효하도록 만드시는 무한한 사랑의 임이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교인들은 부활을 축하하기 위하여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으며, 모이면 함께 말씀을 듣고 떡을 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주님의 만찬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요약하면, 일요일은 주의 날이 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날이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포도주를 마신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앞으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품고, 그리스도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하는 자들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며, 이들과 교제하는 날이다. 또한 부활과 관련지어 일 주일의 첫날이 바로 주일이며, 이는 창조의 날이라고 말한다. 저스틴의 말처럼 어두움과 문제들을 바꾸시며, 세상을 창조하신 날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세비우스도 이 날은 주님께서 창조의 첫 열매로 시작된 날이며, 그가 부활에 세상의 첫 열매로 주신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날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이전의 "안식" "약속" "그림자" "예언"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옛 언약"으로, 그리스도 이후의 "회복" "성취" "실재" "실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언약"을 통합적으로 실현하는 날이다.
8. 안식일과 주일의 연속성, 불연속성의 문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초대 교회에서 처음에 교인들은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를 예배일로 지켰다. 그러나 복음이 점점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면서 예배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바뀌어 갔다.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토요일과 일요일을 같이 예배일로 지키던 기독교 공동체는 이제 공식적인 예배일로 일요일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처음 약 3세기 동안에는 어떤 기록에도 이 주일을 십계명의 제 4계명(출 20:8-11)과 연관시키는 글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후대에 나타난 제 4계명과 주일을 연관시키는 것은 초대 교부들 사이에서 또한 그들의 지도를 받던 초대 교회에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일이었다.
321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기독교 예배일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연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 칙령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모든 재판관들과 시민들과 장인들은 존경스러운 태양의 날(일요일)에 쉬어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 콘스탄틴의 칙령은 기독교 예배일로서 주일을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소개해 보면,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주일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서는 관습을 통일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회 법안을 통과시켰다. 350년 강그라 회의는 주일날의 금식을 정죄했고, 하나님의 집을 경멸하고 분파적 집회를 자주 개최하는 자들을 정죄하였다. 363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는 기독교인들이 휴일로서 유대교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준수하지 말고, 일요일에 준수하라고 명령하였다. 368년 데오도시우스 1세는 한 칙령을 반포하여 일요일에 노예 석방을 허락한 콘스탄틴의 칙령을 반복하였으며, 거룩한 종교의식들이 "우리 조상들이 올바르게 '주일'이라고 명명했던 태양의 날에" 방해받지 않도록 재판관들의 공판 심문을 금지하였다. 436년 제 4차 카르타고 회에는 설교 중에 교회를 떠나는 자들에게 파문으로 위협하였으며, 주일에 금식을 금지하였고, 일요일에 경기에 참가한다든다 경기장에 가는 일을 만류하였다. 425년 데오도시우스 2세는 일요일과 다른 교회 축일들에 일체 모든 경기들을 금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469년에는 비록 황제의 생일이라 하더라도 일요일에 경기를 벌여 축하하는 일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 시켰다. 538년에 제 3차 오를레앙 교회 회의는 일요일에 일체의 농사 행위 마져도 금지시켰다. 585년 제 2차 마콘 교회 회의는 구약 성경의 인식일 규정들의 권위로 일요일에 노동을 금하였고, 예배를 명하였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중세로 접어들면서부터 교회 안에 안식일 엄수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중세 후기에는 일요일 준수는 점차로 구약 성경의 안식일 계명들 위에 기초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점점 제도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율법주의를 구약 성경의 율법들로부터 정당화시키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되어간 것이다. 그래서 교회 회의들과 지도자들은 유대교 안식일의 준수에 부과된 규정과 유사하게 일요일의 준수에 제약 규정들을 부과하였다. 결과적으로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안식일 엄수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일요일은 기독교적 인식일(Christian Sabbath)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일요일 준수는 제 4계명이나 교회의 교령들 뒤에 기초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안식일"(Christian Sabbath)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쓴 사람은 12세기의 페트루스 알폰수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초대교회는 4세기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도 구약의 안식일 개념을 주일에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밝힌 것처럼 중세 후기를 지나면서 교회는 주일에 대한 개념을 왜곡시키게 되었는데, 그것은 주일을 부활의 날로서 기념되는 날이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의 확장으로서의 주일이라는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 시대까지는 없었던 신학이었던 안식일 엄수주의는 중세 후기의 신학에서 강력하게 등장하였고, 교회는 이것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악식일 엄수주의에 대해서 Baker 신학사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인식일 엄수주의는 주일(일요일)에 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콘스탄틴 황제가 321년에 규칙을 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789년 살레망 대제가 십계명의 제 4계명을 근거로 하여 이를 정당화한 데에서부터 공식적으로 실시되었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적인 외형주의로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1677년에 청교도들은 영국의 "안식일 법"을 제정하였다"
그렇다면 안식일 엄수주의는 어떤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일요일이 기독교인의 안식일이며, 이 날을 지키는 것이 십계명의 넷째 계명에 입각한 도덕적 의무라는 것이다. 그리고 16세기말의 청교도들은 이 안식일 엄수주의를 가장 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이후 주일 신학의 논쟁은 이 "안식일 엄수주의"와 "안식일에 대한 자유로운 입장" 간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1) 주일의 안식일에 대한 연속적 입장(인식일 엄수주의 Sabbatarianism)
후기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
청교도적 안식일 엄수주의
웨스트민스턴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안식일 엄수주의
2) 주일의 안식일에 대한 불연속적 입장
종교개혁가들의 입장.
루터, 칼뱅, 존 낙스
9. 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1) 새로운 창조와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날
2)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신앙고백으로 예배하는 날
3) 하나님의 자녀들이 공동체 의식으로 함께 모여 교제하는 날
4) 신자들의 영적 성장의 날
5) 이웃을 내 몸처럼 돌아보는 구제와 봉사의 날
6) 미래에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날
III. 나가는 말: 설교적 접근
1)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 회복
2) 부활의 사건을 선포하는 케리그마적 설교: 초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나타났던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부활의 기쁨과 감격에 동참하는 교회력에 담긴 주일의 의미를 회복하는 말씀의 선포.
3) 교회력을 따라 교인들의 삶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관계를 맺도록 설교
4) 주일에 대한 올바른 이해: 현대교회가 지니고 있는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의 주일성수가 아닌, 성도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안식에 동참하게 하는 "참 안식에의 초대"가 있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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