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운동

2008. 1. 16. 17:19교회사자료/5.근세교회사

경건주의 운동

 

 

정수영 목사

 

 

 

경건(敬虔)이란 무슨 뜻인가? 또 경건주의(敬虔主義)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이 경건주의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경건주의가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그리고 경건주의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 모든 것을 이 장에서 살펴 보도록 하겠다.

1. 경건이란 무슨 뜻인가?

경건이란 헬라어는 유세베이아이다. 이것을 영어로 옮길 때 Godliness가 된다. 이 말이 성서 이외의 희랍 문헌에서 사용되었을 때의 뜻은 신들이나 인간들에 대한 당연한 존경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거의 한결같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1) 인간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쓰일 때

이 말이 딤전5:4에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라는 말로 쓰인 '효'가 곧 유세베이아이다. 이 원문을 흠정역에는 '경건'(Piety)으로 번역했고 R.S.V.에는 '종교적 의무'(religious duty)로, 한글 개역성경은 '효'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글 공동번역에도 '종교적 의무'라고 하였다.

'유세베이아'라는 말이 인간에 대한 태도라는 말로 쓰일 때는 사람이 자기 가족을 위한 적당한 관심과 의무를 표현하는 말을 뜻한다.

(2)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쓰일 때

신약 성경에서 '유세베이아'라는 말은 거의 예외 없이 '경건'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다 같은 영어 성경인데도 '유세베이아'를 놓고 행 3:12을 흠정역에서는 '거룩'(holiness)라고 번역했고, R.S.V.에서는 '경건'(piety)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나라 한글 개역 성경은 '경건'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는 모든 곳에 '경건'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의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태도와 자세를 표현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위선적인 경건이라는 말도 함께 나온다. 딤후 3:5에 참된 경건과 대조되는 형식적인 경건을 '모르포신 유세베이아스' 라고 했다. 이 말을 흠정역과 한글 개역은 '경건의 모양'(form of godliness)라고 하였으나 R.S.V.에서는 '종교의 모양'(form of religion)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경건은 하나님과의 생생한 결합에서 오는 말과 행동 그리고 모든 삶의 태도를 말한다. 그렇지만 거짓된 경건은 외형적 모습만 갖췄을 뿐 그의 삶에 아무런 능력이 뒤따르지 않는 것을 뜻한다.

2. 경건주의(Pietism)란 무엇인가?

경건주의는 17세기 독일 루터교 안에서 새로운 종교 개혁운동의 양상으로 시작되었다. 이 같은 경건주의 운동은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점차 여러 나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경건주의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경건주의가 어떤 성격을 드러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경건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4가지의 성격이 있다.

(1) 경건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개인적으로 체험되는 내적 변화라고 확신한다. 개인적 신앙을 여타의 다른 것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2) 경건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는 것을 그 이상으로 삼고 있다. 즉 낡은 옛 생활을 깨끗하게 단절하고 새로운 삶으로, 거룩한 인격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경건의 훈련을 강조한다.

(3) 경건주의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경의 역할에 새로운 관심을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정통 교회에서는 성경을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근거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리를 가르쳐 주는 규범도 되지만 영적 생활의 근거이기도 하다.

경건주의자들은 성경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초래하는 성령의 수단으로 이해하였다. 성서는 사람의 죄를 비추어 주며,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며,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거듭난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자라며 풍성한 삶을 사는 것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주의자들은 성경을 영적 생활의 활력 지침으로 소개하였다.

(4) 경건주의는 기존 세력에 대한 하나의 저항 운동이었다.

즉 기존 세력들이 기득권 안에서 안주하면서 문제를 보지 못하는 요소들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래서 기존 교회론에 관한 것, 신학적인 문제점들, 종교적인 현실 등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러다보니까 당시의 지배 세력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경건주의자들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교리우선주의와도 마찰을 일으켰다. 또 이들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이성주의와도 마찰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주의자들은 모두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 경건주의는 신비주의보다 더 깊고 많은 영향력을 후대에 남겼다. 이제 우리는 경견주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엄밀한 의미에서 경건주의라고 하면 독일의 스페너와 프란케가 이끌었던 독일의 운동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젠돌프까지 포함시켜 살펴보겠다.

3. 경건주의의 역사

(1) 경건주의의 배경

경건주의는 왜 생기게 되었는가? 그것은 앞서 13장에서 30년 전쟁을 설명하면서 이미 언급하였다. 경건주의가 30년 전쟁(1618-1648)의 산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물론 경건주의가 30년 전쟁 때 생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거기서부터 무엇인가 새롭게 갱신 되어야 한다는 강한 욕구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인구는 대폭 감소되었고 산업은 핍절되었다. 교회는 불타 버렸고 거리에는 병자와 가난한 자들이 버려져 있었다. 물질문명의 폐허와 함께 영적, 도덕적 타락이 일어났다. 모든 국민은 술취함, 성적 문란, 도둑질, 탐욕 등에 빠져 어느 곳을 봐도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목사나 평신도들이 실망을 하고 있었다. 저들은 위안의 방법으로 신비주의자들의 작품들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타울러(Tauler)의 설교집이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저서들을 즐겨 읽었다.

그리고 쉬벵크벨트(Schwenckfeld)나 바이겔(Weigel) 그리고 뵈메(Boehme)의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루터교와 칼빈파는 이 같은 신비주의를 반대하였다. 그렇지만은 대중들은 고갈된 영혼의 피로를 저들의 작품 속에서 위안을 찾고자 하였다.

이때 영국 청교도주의도 영향을 미쳤고 리차드 박스터(Baxter)의 「이교도를 부르심」,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 1565-1631)의 「경건의 훈련」, 존 번연(Bunyan)의 '천로역정' 등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운동의 여파들이 경건주의를 탄생시켰다.

경건주의는 19세기까지 계속 되었으나 지면상 여기서는 17,8세기의 사람들로 국한시키도록 하겠다.

(2) 경건주의 아버지 스페너

경건주의의 아버지하면 대체로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 Jacob Spener:1635-1705)를 꼽는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경건주의 아버지로 스페너보다는 요한 아론트(Johann Arndt:1555-1621)를 꼽기도 하나 스페너가 훨씬 괄목할 공헌을 하였다.

스페너는 독일 알사스(Alsas)에서 출생하였다. 스페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철저한 루터교 신앙의 분위기 속에 성장하였다. 스페너의 신앙의 대모(God mother)는 신앙심 두터운 백작부인이었다. 그는 요한 아론트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ity:1610)를 백작부인으로부터 교습받았다. 스페너는 소년 시절부터 신앙의 책읽기를 즐겨하였다.

스페너는 스트라스부르크와 제네바 등지를 유학하면서 칼빈파 교회들을 교제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리용에서 공부도 하고 독일의 여러 대학도 순방하였다.

1663년에서부터 1666년까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를 하면서 대학 강사 생활중 신학박사 학위를 얻는다. 1660년 프랑크푸르트 교회에 초청받아 목회를 한다. 그는 여기에서 '경건의 모임들'(Colleges of Piety)이라 부르는 성경 공부 중심의 경건회 모임을 설립하였다.

스페너가 경건회 모임을 시작한 지 5년 후 1675년에 「피아 데시데리아」(pia desi-deria;경건의 욕망)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는 신자들의 경건성을 양육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진술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가 개혁되어야 함을 주장하였고 참된 기독교는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영적 생명력이 생활 속에 나타나야 된다고 하였다.

스페너는 이 책 속에서 현실 교회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목회자나 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후보자들은 그들이 깊은 개인적인 신앙을 갖춘 진정한 기독교 신자인지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설교자들을 향해서는 지나치게 학문적이고 논쟁적인 것은 억제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그 까닭은 설교란 설교자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도록 자극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스페너는 기존 교회의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 평신도에게도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 술취함도 가벼운 죄로 예외 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매음이나 간음, 우상숭배, 동성연애, 도둑질, 폭력이 근절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국가가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하면서 교회를 지배하려고 드는데 대해서도 담대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스페너의 '경건의 욕망'은 곳곳에서 열광적으로 수용되었으나 스페너의 개혁의 초점이 평신도에게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과 신학 교수의 학구적 신학 활동을 비판하는 개혁이라는 비난과 함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반발에 부딪히자 스페너는 더욱 더 열심히 '경건의 모임들'인 성경 공부에 전력하였다. 그런데 스페너의 뜻과는 반대되게 성경 공부 모임은 분열되었다. 그들은 '교회 내의 작은 교회(little churches in the church)'로 분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너의 경건운동은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 보다 많은 집단과 귀족들까지 스페너의 경건 방법을 모방하게 되었다. 스페너는 경건의 훈련으로 카드놀이, 춤과 극장 출입을 금하고 음식과 의복에서 절제하는 규율을 가르쳤다. 매주일 오후에는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교리 문답교실을 인도하였다. 그리고 주일 오후에는 주일 아침의 설교를 정리하고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대화나 책을 읽도록 권하였다.

스페너는 계속된 반대와 논쟁에 지쳐서 1686년에 드레스덴(Dresden)의 법정 목사로 옮겨간다. 여기서 그는 법정의 무책임성과 야비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정통파 목사들이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큰 적개심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스페너에게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그가 「신학 연구의 장애물들」(Impediments to Theological Study)을 펴낸 것이고(1690), 다음으로 또 중요한 일은 스페너의 후계자가 된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Franke)를 알게 된 것이다. 프랑케는 스페너의 후계자가 되어 제 2의 위대한 경건주의 지도자가 된다.

스페너는 드레스덴에서 법정 목사의 사역을 하는 중에 삭손의 대학교인 라이프찌히와 비텐베르그로부터 적대적인 대접을 받게된다. 예를 들면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단은 스페너에게서 284개의 탈선행위를 들어 그를 비난하였다.

1691년 그는 베를린(Berlin)으로 옮겨간다. 스페너는 그의 여러 논문을 모아 「신학사상」(Theologische Bedencken)을 펴낸다. 그리고 프랑케와 함께 '할레'(Halle)에 새로운 '할레 대학'을 세운다(1694).

이 할레 대학의 신학 교수진은 스페너와 프랑케의 영향으로 경건주의의 학문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스페너는 니콜라스 진젠돌프(Zinzendorf)가 세례 받을 때 대부(代父) 역할을 하였다. 스페너는 1705년 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스페너에게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스페너보다 나이가 아래인 프랑케에 의해서 더욱 크게 발전하게 된다.

(3) 경건주의의 중심인물 프랑케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ke:1663-1727)는 루벡(Lubeck)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키엘(kiel)에서 학생 시절에 스페너의 감화를 받고 경건주의자가 된다.

그는 라이프치히(Leipzig)대학교에서 학생으로서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는 중 특별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가 참석했던 모임은 성경연구를 통해 학문적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모임이었다. 그렇지만 프랑케는 성겨연구는 경건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라이프치히를 떠나 스페너를 따르게 된다.

프랑케는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가서 스페너 방식에 의한 새로운 성경 연구 운동을 시작하였다. 프랑케는 스페너처럼 경건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서는 프랑케를 싫어하는 세력이 많았다. 왜냐하면 프랑케의 경건주의를 기존 루터교나 칼빈파에서 매우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에 집착하였다. 그래서 루터파는 신앙인들의 태도보다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루터파는 인간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개인적 성결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칼빈파도 이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칭의에 관한 이론은 루터파를 동의하였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노력해서 성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야만 사람이 성결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경건주의자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이들 경건주의자들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단지 일반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도덕 생활 정도를 따라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불신자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생활을 해야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 전통적 루터파나 칼빈파의 견해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확한 교리와 일반 사회 규범에 맞는 도덕 생활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경건주의자들의 견해는 달랐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회나 일반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경건주의자들의 주장 때문에 기존 기성 교회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프랑케가 라이프치히에서 배척을 받고 엘푸르트 목사에게로 갔으나 그곳에서도 반대를 받고 베를린으로 옮겼다. 1687년에 프랑케는 더욱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그 체험 후 더욱더 확신을 얻게 되었으며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불신자를 구별해 내는 규범을 깨닫게 된다. 프랑케의 경건주의는 더욱더 금욕적인 생활 방식과 율법적 생활 방식을 강조함으로 스페너의 정신을 능가하게 되었다.

1694년에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선제후가 할레(Halle)대학을 세우면서 베를린을 강력한 영적운동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독일의 종교적 지도권을 경쟁자인 작센(Saxony) 공으로부터 빼앗아 오려고 하였다. 그래서 경건주의자인 스페너를 불러 들였고, 스페너는 프랑케를 할레 대학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프랑케는 1698년에 할레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의 소굴이 되게 되었다.

프랑케는 할레 대학에서 목사 겸 교수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다른 기관들을 설립하였다. 프랑케는 할레 대학보다도 다른 할레의 기관들 설립으로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하였다. 프랑케가 세운 기관은 고아원, 출판사, 성서 출판소, 선교사들의 언어 학습을 위한 신학대학, 의과 대학 부속 진료소 등을 설립하였다.

이 기관들은 점차 여러 방면에서 좋은 사회적 기여를 하게 된다. 고아원은 프랑케가 죽을 당시인 1727년에 170명의 교사에 2천 2백 명의 고아를 양육하고 있었다. 또 출판사를 통해 찬송, 설교, 저술 등을 출판보급함으로 경건주의 확장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외국 선교에 있어서도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16세기 개혁주의자들은 매우 한심한 신학사상에 빠져 있었다. 어떤 신학자는 현대의 기독교 신자들이 다른 국가나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가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전하라(마28:18)는 지상명령은 사도들 시대에 이미 다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사도시대에 로마로, 서반아로 땅 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완성하였으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선교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 돌아오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한심한 신학사상 때문에 세계 선교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경건주의자들에게서 선교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났다. 신앙은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라 생활이라고 믿는 이들은 다시금 타민족선교에 관해 새로운 장을 열어갔다.

1707년 덴마아크 왕 프레드릭 4세는 인디아에 있는 그들의 식민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할레 대학의 프랑케에게 의뢰하였다. 이때 프랑케는 할레 대학 졸업자인 바돌로메우스 지덴바르그(Bartholomaeus Ziegnbalg)와 하인리히 플루르차(Heinrich Plutschau) 두 사람을 인디아 선교사로 보낸다. 그 뿐만 아니라 덴마아크 왕의 지원과 경건주의 지도자들의 인도 아래 그린랜드(Greenland)와 람랜드(Lapland)에 선교사들의 훈련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경건주의 신학자로 유명한 요한 알브레흐트 벵겔(Johnann Albrecht Bengel:1687-1752)이 있다. 벵겔은 12년간 노력으로 「신학 주해」를 완성하였다. 벵겔의 성서 주석은 간결 명료하고 심원한 해석으로 지금까지도 크게 사랑받는 고전으로 전해 온다.

경건주의는 독일의 루터파 안에서만 국한되어 일어난 운동이 아니었다. 비텐베르그 대학이 루터파의 정통 운동이었다고 하면 경건주의는 할레 대학을 중심한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그 특징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4) 진젠돌프와 모라비안들

경건주의는 스페너를 세례 때 대부로 삼았던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돌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1700-1760)(주 : 모라비아교회의 창설자. 그는 종교적 표현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고, 많은 찬송시를 썼는데 그중의 일부는 영어로 번역되었다.)에게 영향을 미쳤다. 진젠돌프는 열렬한 경건주의자들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경건주의 학교인 할레 대학에 보내어 프랑케 아래 수학하도록 하였다.

진젠돌프는 1710년부터 1716년까지 할레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는 일찍이 대부였던 스페너로부터 매력을 느꼈었고 프랑케로부터는 큰 자극을 받았다. 진젠돌프는 14살짜리 소년으로 '겨자씨 모임(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조직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모든 인류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루터파의 중심지인 비텐베르크에 가서 법학 공부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교수들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그후 화란과 프랑스를 여행하였다.

1721년에 색슨 공의 정부관리가 되어 드레스덴(Dresden) 궁정에서 일을 하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그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모라비안(Moravians)을 만나게 된다(1722년). 모라비안들은 원래 모라비아에 살던 후스파(Hussites)들로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피난온 난민들이었다. 또한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진젠돌프는 망명자들을 보고 평소 '겨자씨 모임'에 대한 그의 소망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진젠돌프는 자기 사유지를 제공하여 모라비아 피난민들을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 모라비안들은 진젠돌프가 제공한 사유지를 거류지로 정하고 보헤미안 형제단(Bohemian Brethren)을 조직하였다.

이들 보헤미안들은 루터교회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베르텔스도르프(Berthelsdorf)에 있는 시골 교회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저들이 목회자가 필요할 때는 그 지방에 있는 루터교 목사를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의식은 일반 교회와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소금'이라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믿는 교회는 세상의 평범한 교회가 아니라 참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로 부터 비롯된 교회 안의 교회라고 믿었다. 그래서 국가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교파적인 일반 교회와는 다르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모라비안들의 삶을 보고 진젠돌프는 궁정의 직위를 사임하고 이들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라고 하였다. 이 헤른후트 공동체는 진젠돌프의 감독 아래 점점 독특한 모습으로 갱신된 모라비아 교회가 되었다.

진젠돌프는 '있는 그대로 나아오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모라비안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다. 그러자 루터교회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진젠돌프는 1734년에 목사 자격을 얻었고 1737년에는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루터교의 계속된 압력 때문에 헤른후트를 떠나게 된다. 이때 독일 서부지방과 영국, 미국 등을 여행하게 되었다. 특히 전에 루터란 선교사에 의해 개종한 에스키모인을 만난 것이 그의 가슴에 선교열을 뜨겁게 하였다. 그래서 1732년에 카리비안(Caribian)에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수년 후에는 아프리카, 인디아,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진젠돌프가 미국을 여행하면서 펜실베니아의 베들레헴(Bethlehem)과 나사렛(Nagareth) 그리고 노스 캐롤라이나의 살렘(Salem) 등에다 선교부를 설치하였다. 이들 모라비안들은 겨우 200명 가량의 피난민들이었는데도 해외로 1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1749년에 진젠돌프는 다시 헤른후트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가 죽는 1760년까지 모라비안 교회를 관장한다. 이 모라비안 교회는 진젠돌프의 죽음과 함께 루터교 교단과 결별한다. 모라비안 교회는 많은 수의 교세를 자랑한 적도 없고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숫자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19세기에 일어날 선교의 열정에 큰 자극을 주는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모라비안들이 존 웨슬레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 그것이 감리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더욱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의 복음적 각성운동은 모라비안 형제단의 큰 영향을 받았다. 1755년에 영국 안에는 15개의 모라비안 형제단이 있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John Wesley)가 저 유명한 '올더스게잇의 참회 체험(Aldersgate Street Experience:1738)'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모라비안 형제단의 한 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웨슬레는 런던의 훼터 레인(Fetter Lane)에 있는 모라비아 교회에 가입하였다. 1738년 웨슬레는 그가 존경했던 사람들에게 배우기 위해 헤른후트로 여행을 하였다. 후에 웨슬레는 모라비안파로부터 떨어져 나오지만 그가 최초에 구원을 얻는 중생의 체험은 모라비안 형제단에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체험은 존 웨슬레만 아니라 찰스 웨슬레 그리고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까닭에 모라비안 형제단의 가치는 그들 자체 운동에 의한 파급 효과로 인해 세계 선교열을 일으킨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 그 파장이 길게 연결된 것이다.

4. 경건주의의 영향

경건주의는 17세기에 시작하여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경건주의가 현대에 끼친 영향과 공헌은 무엇인가? 앞서 신비주의는 현대에 끼친 영향이 퀘이커 외에는 별로 공헌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여러 면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1) 경건주의는 20세기 종교계에 성서신학을 출현하게 하였다.

전에 전통적 교회들은 교리학, 신조학, 또는 교회론 등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나 신학보다도 경건한 삶에 관한 신학을 수립하기 위해 새로운 성서 연구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종교개혁 당시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여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기 위해 원전 연구를 많이 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관한 원전 연구는 성서의 고등비판의 결과 성서의 권위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경건주의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되 성서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위한 새로운 성서 연구 방법을 만들어 놓았다. 이 점에 있어서 경건주의자들의 공헌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 경건주의자들은 현대 에큐메니즘(Ecumenism)에 큰 공헌을 하였다.

스페너나 진젠돌프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놓는 교리나 신학적 차이 같은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저들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무엇이 다른가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무엇이 같은가를 찾아 연합시키려는 운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교리학에 대한 단순화를 추진하였다. 정통신학에는 신학적으로 체계화된 논리는 있었으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었다. 물론 경건주의자들에게도 신학적인 실수가 있었으나 분열보다는 일치를 이루는 능력이 드러났다.

(3) 경건주의는 사람이 종교적인 인간이 됨으로써 저절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깨뜨렸다.

종교나 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 애호가들의 주장이다. 참된 신앙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인격적 만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인격적 체험 신앙을 저들 경건주의자들이 일찍이 가르쳐 주었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 보편화된 진리가 되었다.

이들 경건주의는

① 개인적이고도 체험적인 것으로써의 종교
② 전 인격적인 참여에 의한 삶의 증거
③ 하나님 말씀에 의한 능력이 나타나는 생활
④ 영혼 없는 제도, 생명력 없는 몸, 내용 없는 형식 등에 대한 저항

등이 전체에 흐르는 핵심을 이루었다.

우리는 이들 경건주의 역사를 보면서 오늘의 교회들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저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만나는 중생의 체험이 이뤄졌는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의 삶에서 능력이 나타나는가? 오늘날의 교회들은 얼마나 내용도 없고 생명력이 없는 상태에서 형식만이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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