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스코팔리즘

2008. 1. 16. 17:17교회사자료/5.근세교회사

에피스코팔리즘

“주교단이 교황보다 우위” 주장

로마의 중앙집권주의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반대와 저항은 프랑스로부터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갈리아주의는 「프랑스 교회를 위해」 교황의 수위권을 크게 제한하려고 시도했다.
갈리아주의와 함께 국가절대주의, 얀세니즘, 에피스코팔리즘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이같은 저항은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까지 교회를 격렬하고 끈질지게 괴롭혔다.
주교주의
그 중에서 에피스코팔리즘(Episco palismus)은 세계의 전체 주교들, 또는 공의회에서의 주교들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운동을 지칭한다. 「주교주의」 또는 「주교단 우위설」로도 불리는 에피스코팔리즘은 13세기 절정을 이룬 교황권의 정치적 발전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반동에는 아우구스티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교회 중심적인 고대의 영성적인 교회 이념이 12세기 영성주의자들에 의해 새롭게 각성되고, 비슷한 시기에 존속된 단체적 교회 이념에 대한 의식이 주요한 이유를 형성했다.
여기에 13세기, 교황청 교회법 학자들이 교황 권력의 증대와 교황의 전권을 주장하는데 대한 반발이 극단적인 공의회 우위설로 발전했고 14세기 프랑스와 독일에서 국교회적이고 왕권 절대주의적인 이념이 관철됨으로써 에피스코팔리즘은 그 본격적인 틀을 갖춘다.
서구대이교(1378~1429)로 인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는 공의회 우위설이 일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기도 했으나 그것이 갖는 비상수단적인 성격으로 교부들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이어 바젤 공의회(1431~1437)에서 다시 한 번 공의회 우위설이 제기됐으나 교황권은 다시금 보편교회에 대한 재치권적인 수위권을 새롭게 확립하고 에피스코팔리즘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에피스코팔리즘은 갈리아주의, 얀세니즘 등과 함께 다시금 재연돼 나타났다. 갈리아주의가 교황의 재치권 제한으로 교구에서 주교직의 자주성을 지키려는데 그침으로써 상대적으로 온건했던데 반해 에피스코팔리즘은 「페브로니우스 주의」(Febroniani smus)나 「요셉주의」(Josephinismus)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극단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페브로니우스 주의
에피스코팔리즘의 옹호자들은 로마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해 자신들의 주교직의 자립을 주장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이미 17세기에 독일교회에 큰 위기를 가져오게 한다.
18세기에 트리어의 보좌주교인 혼타임(J. N. von Hontheim, 1701~ 1790)은 「유스티노 페브로니우스」(J. Febronius)라는 가명으로 「교회의 상황과 로마 주교의 적법한 권한」(1763)이라는 저서를 펴내면서 공의회 지상주의적이고 국가주의 교회적인 원칙을 기반으로 에피스코팔리즘의 사상을 종합했다.
당시 유행하던 계몽주의와 얀세니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 책에서 교황의 군주적인 체제 대신에 교회를 대표하는 신자단과 교회의 최고 기관인 공의회로 대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황에게 극히 제한된 통치권만을 인정했고 교황은 각 주교보다는 상위에 있지만 주교 전체보다는 하위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즉 교황은 교회 안에서 수위권을 행사하지만 교회를 초월해서 수위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며 교황의 모든 결정은 주교들의 동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또한 보편 공의회 역시 교황보다 우위에 있고 따라서 교황을 반대하는 상소를 공의회에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브로니우스 주의라 불린 이 사상은 급속하게 보급돼 많은 추종자가 나타났다. 쾰른, 트리어, 마인츠, 짤츠부르크의 독일 대주교들은 1786년 엠스 회의에서 전년에 신설된 뮌헨의 교황대사관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할 것을 합의했다.
이들의 목표는 교황대사가 대표하는 교황의 전권을 근본적으로 격퇴시키려는 대담한 의도였다. 같은 해에 열린 피스토아 교회 회의에서는 얀센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이러한 이념을 알리고 이탈리아에서 그 기반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요셉주의
요셉주의는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요셉주의는 계몽주의자인 황제 요제프 2세(1780~1790)의 이름을 따라 요셉주의로 불리게 됐다.
그는 자신의 절대주의적인 국가 권력 제도를 이용해 독재적인 개혁을 실시하고 교회의 재치권을 자기 권리로 요구했으며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 시설들을 폐지했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이 정책은 1850년까지 무려 60년 동안이나 계속 적용됐다.
비오 6세 교황(1775~1799)이 중재를 위해 직접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그는 쓰라린 실망과 심한 모욕까지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직의 위신은 이 무렵 또다시 크게 실추됐던 것이다.
에피스코팔리즘적 조류들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가톨릭의 부흥과 함께 그 의의를 잃었고 공격의 주 대상이었던 교황 재치권의 수위권이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신조로 선언됨으로써 결국 에피스코팔리즘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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