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센주의(Jansenism)

2008. 1. 16. 17:15교회사자료/5.근세교회사

얀센주의(Jansenism)

“선택 받은 자 만이 구원” 주장
극도로 엄격한 신앙생활과 윤리 강조
교회 “극단적인 원리주의” 공식 단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와의 관계는 오랫동안 신학의 대상이었고 정통 신앙과 이단적인 사상과의 많은 논쟁을 야기했던 주제였다. 인간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나 또는 인간의 의지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벨기에 루뱅대학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얀센(C. O. Jansen, 1585~ 1638)에 의해 비롯된 얀센주의는 원죄로 타락한 인간은 죄와 욕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그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칼뱅파의 영향, 특히 예정설을 되살렸으며 일방적으로 과장된 아우구스티노의 원죄설과 은총설을 가톨릭 신학과 신심에 도입했다.
얀센주의 추종자들은 신앙생활에서는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고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오랜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경건한 신앙생활에 대한 엄격성은 교회가 복음적인 삶에서 멀어지고 세속의 풍조에 휩쓸리고 있다고 우려한 많은 열심한 신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으며 19세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비록 1653년 인노첸시오 10세 교황(1644~1655)으로부터 단죄되고 이후에도 여러 교황들에 의해 단죄됐지만 얀센주의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이웃의 여러 나라들로 파급되면서 오랫 동안 신자들의 신심생활, 특히 윤리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우구스티노 사상 강조
얀센은 1602~1604년과 1607~ 1609년에 루뱅대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는 엄격한 아우구스티노 신학을 견지하는 벨기에 신학자 바유스(Michel Bajus, 1513~1589)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사상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된다.
바유스는 은총에 관한 아우구스티노 신학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서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했다. 그의 신학에 심취해 인간 자유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보편성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얀센은 자신의 저서 「아우구스티노」에서 첫째,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둘째, 하느님이 모든 의인들에게 계명과 그것을 수행할 은총을 주셨으며 셋째, 선악에 대한 내적 요청은 필연적이라는 가톨릭의 정통 신학을 부정했다.
그는 특수한 신심과 윤리, 도덕 및 신앙의 엄격성을 가장하고 아우구스티노의 원죄론과 은총론을 극단적으로 이해해 가톨릭의 정통 신학과 신심에 접목시키면서 칼뱅파의 예정설까지 가미했다. 그는 또 인간이 욕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은총으로만 가능한데 이 은총은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얀센은 1636년 이프르(Ypres)의 주교가 되지만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지 2년 뒤 정식으로 얀센의 신학 사상이 「아우구스티노」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면서 그의 이단적인 신학 사상은 본격적으로 파급되기 시작했다. 그의 사상이 프랑스에 전파되면서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근거지는 엄격한 수도원으로 이름난 포르루아얄 수녀원이었다. 얀센의 추종자들 가운데에는 신심이 깊은 사람들이 많아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그 엄격함이 너무나 지나쳤다. 과도한 윤리성이 요구됐고 성사생활에서도 지나치게 엄격한 규범과 기준을 요구해 오히려 고해성사나 성체성사 받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얀센주의는 자신들의 이단적 요소를 논박하는 예수회 회원들을 세속주의에 야합한 타락한 집단이라고 비난했다. 이같은 혼란을 보다 못한 프랑스 교회의 주교 83명은 이에 대해 교황에게 판결을 요청했고 인노첸시오 10세 교황은 1653년 은총과 인간 의지와의 관계에 대한 얀센의 다섯 가지 명제를 단죄했다. 이처럼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단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얀센주의는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며 내적으로 존속했고 후에는 갈리아주의, 에피스코팔리즘과도 연계돼 정치성까지 띠게 됐다. 교황청과의 오랜 대립은 교황직 자체에 대한 격렬한 대립으로까지 야기됐는데 이러한 투쟁은 오라토리오회의 신부로 극단적인 갈리아주의자인 케넬(P. Quesnel, 1634~1719)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루이 14세는 1710년 그를 프랑스에서 추방했고 포르루아얄 수녀원을 폐쇄했다. 그런데 얀센주의자들은 네덜란드에서 지속됐고 교황은 1713년 교황칙서 「우니제니투스(Unigenitus)」를 발표해 케넬의 저서 내용 중 101개 명제를 단죄했다.
이에 대해 일부 주교들은 이 문제를 공의회에서 다루자고 주장했는데 이로써 얀센주의 문제에 이른바 「프랑스 교회의 자유」 문제가 겹쳐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됐고 이들은 교황의 수위권을 격하시켜 교황도 공의회의 결정에 예속된다는 교계 제도적인 면에서 이교적인 경향까지 드러냈다. 교황은 1718년 그들을 파문했다.
얀센주의는 보다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보편성을 존중하는 가톨릭 교회는 적응이라는 구실로 신앙생활을 이완시키거나, 순수성을 수호한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주장하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얀센주의는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교회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이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진말 - 얀센과 루뱅대학교 내 「얀센의 망루」(위). 아래는 얀센주의의 근거지였던 포르루아얄 수녀원.

'교회사자료 > 5.근세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피스코팔리즘  (0) 2008.01.16
갈리아주의(Gallicanism) 태동  (0) 2008.01.16
개혁주의의 삼위일체론  (0) 2008.01.16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0) 2008.01.16
제1차 대각성운동의 지도자  (0) 2007.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