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 속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다양한 이해

2007. 12. 17. 21:20참고자료/5,영성 자료

중세 교회 속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다양한 이해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1
1. 문제 제기 3
2. 연구방법 및 목적 4
Ⅱ. 중세의 시대적 상황 6
1. 초기(500~950) 6
(1) 역사적 상황 6
(2) 종교적 상황 7
2. 중기(950~1350) 8
(1) 역사적 상황 8
(2) 종교적 상황 9
3. 후기(1350~1500) 10
(1) 역사적 상황 10
(2) 종교적 상황 11
Ⅲ. 중세 신학에서의 성령 이해 14
1. 중세인 들의 성령 이해 17
(1) 보에티우스 17
(2) 안셀름 19
(3) 피요르의 요아킴 22
(4)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24
(5) 도미니크파의 토마스 아퀴나스 26
1) 스콜라 철학의 이해 27
2)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와 신학 사상 31


2. 중세 교회 수도원의 영성(AD 10세기 전후) 39
3. 독일의 신비주의 영성 43
(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43
(2) 헨리 수소 46
(3) 요한 타울러 48
4. 필리오퀘(Filioque)논쟁 49
(1) 배경 49
(2) 논쟁 50
(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54
(4) 현대적 논의 57
1) 칼 바르트 57
2) 몰트만 58
3) 새로운 접근 59
Ⅳ. 중세 성령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이해 62
1. 본체론적 성령이해 62
2. 성례주의적 성령이해 63
3. 주의주의적 성령이해 64
4. 공동체론적 성령이해 64
Ⅴ. 나가는 말(신학의 새로운 모색) 66
Ⅶ. 참고문헌 69

Ⅰ. 들어가는 말
중세 교회란 그레고리 1세 교황이 즉위한 590년부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1517년까지 약 1,000년 간을 일컫는다.
중세 교회의 시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 이상이 실현되어 가는 듯한 역사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도성과 현실적인 교회를 동일시함은 지상을 천국화해야 할 소임을 암시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는 지상의 도성을 정복하고 신의 도성 즉,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이것이 중세시대 교황 권과 황제의 권력간의 분쟁의 요인이기도 하다.
중세시대의 동방교회는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고 기독교의 중심은 서방교회로 쏠리게 되었다.
중세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특징은 대개 다음과 같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한 국민성은 중세 기독교의 장엄한 기풍과 신비를 산출케 하였다. 수많은 성자와 위인들이 나타나서 신앙의 감화를 끼쳤다. 하지만 교리 적으로는 고대개회의 주요한 논의들을 거의 답습하였으므로 큰 발전은 11~13세기까지의 스콜라 철학의 부흥을 제외한다면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중세교회의 심각한 타락에 대한 반동작용으로 수 차례의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그 중심은 거의 언제나 수도원에서 일어났다. 당시의 수도원은 학문과 지성의 요람이요, 신학과 교회제도가 만들어지는 중세 문명의 중심지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신학, 특히 성령론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중세의 정태적이고 실체론 적인 관심과 제도화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보다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고대의 성령론 교리들을 서방교회의 전통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형이상학적인 교리가 아니라 신자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 즉 성령의 내적 증거, 성령의 조명, 그리고 칭의, 중생, 회심, 성화 등에서 성령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대개 주류 종교개혁에서 강조된 점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구속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등이었고, 따라서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가 강조되었다. 그런데 신앙, 성경의 권위, 칭의 등은 성령의 역사와 불가분의 것이었다. 칭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지만, 신앙이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면 그것 역시 인간 자신의 행위와 성취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개혁자들이 그렇게도 싸웠던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결국 하나님의 절대 은총을 강조하는 것이요, 은총은 하나님 곧 성령께서 친히 하시는 일에 달린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단순히 자연적 인간 이성과 동일시하거나 성령이 인간 이성의 활동으로 해소되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써 지성을 가진 인간의 영을 무한히 초월한다. 그러나 성령은 여전히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하나님 인식론과 관련되며,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하나의 해석학적 통로로 간주되기도 한다.
성령에 대한 이해의 이러한 경향에서 자주 강조되는 관련 주제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성경 말씀의 영감과 주어진 외적 말씀에 대한 내적 증거 혹은 조명등이 매우 강조되어졌다.

1. 문제 제기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삼위이시며,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아리안(Arians)이나 사벨리안(Sabellian), 소시니안(Socinians)들은 성령님을 단지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힘으로만 간주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통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낙인 되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가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자기 소유를 팔아서 받은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그 나머지 돈만 가지고 사도들 앞에 와서 마치 전액을 다 가져온 것처럼 가장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때 사도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아나니아를 꾸짖었다(사도행전 5:3,4). 여기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성령님을 속인 것이 곧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 하였다.
성령은 암시와 지시 그리고 조명을 통한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깨우치신다. 이처럼 성령은 많은 사역 중 우리를 가르치시는 교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전 이해의 부족으로 과거 많은 논쟁의 모습이 현재까지도 지속되어 오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특히 현대 오순절 운동을 통해 성령의 사역을 새롭게 조명하게 됨으로써 과거 잘못된 것으로 해석되었던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우리의 삶의 자리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로 오순절 교단의 범주를 넘어 루터교, 감독교회, 장로교회, 로마 카톨릭교회 등 수 많은 주요 교단에서 성령의 은사인 방언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오순절 교단에 가입하기를 거절하고 자기 교단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강조하며, 은사 집회를 가지며 방언을 중시하는 새로운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교단간의 이해 차와 정확한 성령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개혁교회의 입장에서는 성령을 다분히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오순절 교단 입장에서는 성령을 감정적인 것에 기인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있어야 하며, 성령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시고자 하는지 겸손히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인 것 같다.

2. 연구방법 및 목적
성령의 이해를 위해서는 초대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본 글은 중세 교회사 속에 드러난 성령의 다양한 모습, 즉 역사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 하에서 드러난 모습을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서 세밀히 살펴봄으로써 동방과 서방 교회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조명해 보고, 재인식코자 한다.
아울러 중세의 영성을 지배했던 수도원 운동의 의의를 살펴 본 후, 중세를 지배했던 신비주의와 동방과 서방의 분열의 원인이었던 필리오퀘 논쟁을 배경과 당시의 찬 반론 그리고 현대의 재해석되어지는 부분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에 재해석되어져야 할 성령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중세 교회의 역사를 주 텍스트로 하여, 중세 교회의 역사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을 살피면서 현대적 상황 하에서 중세 교회에 나타났던 성령운동을 재 이해해 보고자 한다.
본 논고 서두에 인용하였던 중세의 시기 문제에서 중세기는 루터의 종교개혁까지의 상황이지만 본 논고에서는 종교개혁의 주 모토였던 루터와 토마스 뮌처, 칼뱅의 상황은 제외시켜 연구하고자 한다.
특히 역사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은 역사 신학적 입장에서 기술하려 노력하였으며, 아울러 시대 상황 속에서의 성령 이해는 조직신학적 입장을 삽입하여 정리하였으나 조직신학적 관점에 의한 분류는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현대적 입장에서 재조명하여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철학과 실천신학적 면을 첨가하여 개혁교회와 오순절 교단 사이의 성령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Ⅱ. 중세의 시대적 상황
1. 초기(500~950)
(1) 역사적 상황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이 넓은 지역에서 기독교의 놀라운 실패들 가운데 하나를 발견한다. 이 지역은 그리스도께서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신 지역을 포함하고, 성지로부터 가까운 곳들이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복음이 설교되었고, 최초의 기독교회들이 탄생하였고,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대 카톨릭 교회의 5교구 중 3교구(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다. 그리고 초기에는 창조적인 신학사상들도 나왔다. 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이상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실현코자 했던 수도원 운동의 발상지도 이 지역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상 이곳은 기독교가 가장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처음 1,000년 동안 그 어느 곳에서보다 분열을 경험하였고, 사랑의 일치에 미치지 못했던 곳이다.
어떤 지역들은 다수가 기독교인들이 되기도 했으나 피상적 기독교에 머물렀고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없었다. 이슬람교가 압도해 왔을 때 이 지역의 기독교는 지반을 잃었다. 물론 아람 점령 지역의 동쪽에서 네스토리우스적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약간의 개종자들이 생겼으나 이들은 소수 무리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나라들에서 기독교는 이슬람 지배 하에 있는 그 어떤 다른 종교들보다도 훨씬 힘있는 생존 능력을 과시했고, 새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2) 종교적 상황
592년 교황 그레고리 1세로 시작하는 교황 권의 확대로부터 800년 신성로마제국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중세 교회의 선교와 수도원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정리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소위 말하는 반-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의 정립으로 중세 전반에 걸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하는 구체적인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중세 교회가 외부적인 침입을 받아서 기독교권의 침체와 축소를 맞이하였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의 기독교는 수적으로 기울어졌고 생기 넘치는 신앙 운동을 펼치지 못했으며, 교회의 도덕적, 영적 자질에 있어서 크게 퇴보 하였고, 인류에 대한 공헌에 있어서도 그 몫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
특히 야만족들의 침입과 로마제국의 붕괴와 희랍·로마 문화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수도원 운동과 교황주의의 형태 등으로 살아 남았다.

2. 중기(950~1350)
(1) 역사적 상황
신성로마제국의 설립과 더불어서 교황 권이 확대를 꾀하던 기간으로 각종 문서의 조작으로 인한 교황 권의 확립을 이룩하였다. 더 나아가서 교회가 황제와 세력 다툼을 벌여서 교권의 확보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교회의 세력 확보는 내부적인 부패를 의미하였다.
중세 교회는 정치적인 결탁에서 오는 재력의 확보를 인한 시몬주의(Simony), 교황 권을 둘러싼 음란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패를 반대하는 개혁으로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오토 대제의 개혁 운동, 수도원의 개혁 운동 등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권 내에서의 개혁 운동은 한계가 있었으며, 이 시기 동안에 제도권 교회에 대한 각종 반항 운동이 있었다.
첫째는 제도권에 도전하는 개혁 운동으로서 영국과 폴란드에서 일어난 운동, 둘째는 제도권을 떠나서 도피적인 입장을 취하는 수도원적 공동체 운동, 셋째는 각종 이단 운동, 그리고 넷째는 신비적인 미신 신앙의 유행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운동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도미니크 교단과 프란체스코 교단 등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였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자 결국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서 중세 교인들의 반발을 해외로 돌림으로써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2) 종교적 상황
서방 교회는 유럽의 공식적인 기독교 국가들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소수 교회들도 신약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이나 어떤(카톨릭 입장에서 볼 때) 이단적 성향을 띤 기독교 운동들이 일어나 보다 완전한 기독교를 지향하려 했던 것은 아시아의 소수 기독교에서보다 유럽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수세에 몰리는 소수 기독교 공동체들보다도 압도적으로 다수 기독교인들을 지녔거나, 아주 소수 기독교인들을 지닌 기독교 공동체들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완전히 실현시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특히 십자군 운동으로 인한 동·서 문화와 통상 교류 이외에 서방 쪽의 세계를 향한 시야가 넓어짐과 동시에 지적 계몽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회 내에 개혁 의지를 가진 종교 운동이 일어났고, 대학들이 건립되었으며, 중세 서방 교회의 신학으로 발전 될 스콜라주의 신학이 발달되기 시작했고, 사회 개혁이 일어났으며, 근대 자국어 문학이 생기기 시작했고, 예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동방 교회는 대체로 950-1350년(400년) 동안에 동방 기독교의 확장이 있었는바, 특히 13-14세기에 그러했다. 기독교 신앙은 발칸반도의 슬라브족들 사이에 깊이 뿌리 내렸다. 러시아의 대평원에도, 그리고 1350년에는 북부 몽고 점령 지역의 접경과 그 너머로 기독교 신앙이 확산되었다. 유라시아를 넘어 대서양과 지중해 서부 해안과 동부 해안으로부터 중국 해안에까지,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와 모스크바 북쪽으로부터 남 인도에까지 기독교 공동체들이 확산되었다. 이 같은 기독교의 동부 진출 가운데 일부는 프란시스 칸과 도미니칸 선교사들의 노고였는데, 이는 서유럽 기독교의 대각성의 열매였다. 그러나 동부로 행한 기독교 확장의 대부분은 동방 교회들, 특히 희랍 정통교회와 네스토리우스파 사람들에 힘입었다. 하지만 동방의 기독교는 대단히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동방 기독교의 주된 정치적 보루인 비잔틴 제국이 무너져 갔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대부분에서 기독교는 소수가 되었고,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배 세력이 된 모슬렘 세력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들 가운데 새로운 갱신 운동을 보이는 공동체는 거의 없었다. 아시아의 기독교는 서유럽의 기독교가 경험했던 생동성과 갱신의 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동방 교회는 1350년 이후 서방 교회보다 더욱 내리막길을 달렸다.

3. 후기(1350~1500)
(1) 역사적 상황
후기에 들어서면 교회는 십자군 전쟁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교황 권이 확대되는 목적을 달성하였으나, 곧바로 아비뇽 교황청으로 교황 권이 둘로 나뉨으로 인해서 교권의 실추가 가속되었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회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유명론 신학이론을 들여옴으로써 교회의 타락을 더욱 가속시켰다.
중세 교회는 신학적으로 인간의 힘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교회가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부담 없이 판매하기 시작하였으며, 각 종 미신적 신앙을 그대로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기에 덧붙여서 중세 교회는 문예 부흥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의 사치와 치장이 극에 달하기 시작하였으며, 소위 말하는 문예 부흥 교황들은 앞을 다투어서 화려한 교회당을 건축하고서 각종 조각품과 미술품으로 치장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곧바로 중세의 패망을 가져오게 하였다.

(2) 종교적 상황
1350-1500년 어간의 서유럽의 교회 역사는 기독교적 이상에 도달하려는 사람들과 기독교를 명목상으로만 받아들이거나 기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의 대조를 보여 주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과 '땅의 도성', 루터의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 왕국'의 대조에 해당한다.
기독교를 명목상으로 받아들이거나 실제로는 기독교를 거부하는 일들이, 사람들을 기독교적 이상에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찍이 만들어진 제도적 교회들 안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예외가 많기는 했으나 교구 성직자들, 사제들, 주교들, 대주교들, 교황청 및 교황 자신이 부패하였다.
서유럽의 많은 지역들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섬기고 그것을 기독교적 표준에로 고양시킬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발전해 왔었던 구조들이 이 같은 목적에 도움을 주기 보다 장애물이 되는 경우들이 많았다. 특히 교황주의가 초기에는 전 교회 개혁의 진원지 역할을 했고, 사회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에 순응하도록 만들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교황제도 자체가 목적 수행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이 약 2세대에 걸쳐 로마를 떠나 아비뇽에 포로로 잡혀갔었고,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한 나라(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이 같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아비뇽 포로로 인한 대분열 이후 교황청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상 적 측면에 굴복하게 되었고, 이태리의 정치 게임에 말려들었다. 본래 교회의 구조를 통해서 이상적인 기독교 세계를 실현하려던 제도적 카톨릭 교회가 이 같은 이상의 실현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황청의 대분열을 치유하고 교회를 정화시킬 것으로 기대했던 공 의회주의 역시 성공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서유럽은 교회를 지배하고 교회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려는 절대 군주들을 통한 민족 국가들의 발흥을 경험하였다.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에게 이는 교회에 대한 위협으로 보였음에 틀림없었다. 교회의 세속화를 막으려는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싸움은 여러 전선에서 일어났는데, 이중에는 새로운 싸움들도 있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어느 정도 성취된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이 위협을 받았다.
완전한 기독교적 삶을 갈망하여 생긴 수도원 운동 역시 활기와 생기를 잃었고, 도덕성과 영적 비전을 줄 수 없었다. 심지어는 4-5세대 이전만 해도 명목상의 기독교인 무리들을 그리스도께 헌신케 하며 불신자의 세계를 선교하려고 등장했던 구걸 승단 역시 서방 기독교 세계의 울타리를 넘어서기를 멈추었고, 이 울타리 안에서도 사기를 잃었다.
950-1350년 어간 동안에 서유럽에 발흥했던 수많은 기독교 신앙 운동의 불길은 1350-1500년 어간에는 더 이상 타오르지 못했다. 그나마도 타오르려던 불길은 민족주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통해서 부활한 이교주의 및 무질서의 서유럽을 복음에 의해서 회복하고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건설할 꿈을 품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불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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