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신학자 전 철 >

2007. 12. 12. 21:46참고자료/5,영성 자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신학자 전 철 >


1. 서론 : 에크하르트 신비주의 연구의 의의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신비주의의 역사와 그 내용을 탐구해 왔다. 우리는 기독교 신비주의가 헬라사상을 그의 기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헬라사상>은 "다자의 일자를 향한 연합"이라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주조음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후 우리는 "하나님 ―그리스도를 향한 연합"인 <성서적 신비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순교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순교시대의 신비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초월적 일자와의 연합"인 <오리겐의 신비주의>, "금욕과 지식을 통한 연합"인 <수도원의 신비주의>, "순결을 통한 일자와의 연합"인 <라틴교부의 신비주의>, 마지막으로 "영혼의 상승을 통한 인식"인 <어거스틴의 신비주의>를 살 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신성을 향한 돌파와 무화"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를 만나 게 된다.

에크하르트의 삶과 사상에서 전개되는 신비주의를 조명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우리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를 통하여 중세 스콜라 사상의 진면모를 조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는 사변(思辨)의 시대이다. 중세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혹은 <이성과 계시의 종합>이라는 장중한 정조 위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중세의 황혼기를 장식하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어떠한 문양으로 사상을 새롭게 형성해 나아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우리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와 그를 둘러싼 여러 갈등과 이단논쟁을 통하여 당시 프란치스코 사상과 도미니크 사상 사이의 긴장과 대립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이단으로 정죄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정죄의 행간에는 에크하르트의 사상 자체의 정당성 여부를 넘어선, 도미니크와 프란치스코 서클 사이의 불협화음이라는 역사적인 상황이 관여되어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셋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철저한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는 고유한 방법을 통하여 전개된다. 위 디오니소스 이래 전개되는 부정신학은 중세 신비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에크하르트에게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후 본문에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의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안에서 부정신학이 어떻게 스며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넷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다른 종교의 신비주의와 매우 깊은 관련성을 맺고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1] 이는 에크하르트 자신이 구체적인 삶 가운데에서 신비체험을 깊이 갖았다는 것과,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신앙적인 사색과 사변(思辨)을 통하여 총체적으로 융합시킨 성과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자신이 직면한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신비 체험을 종교의 보편성의 영역으로 깊이 심화, 확대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사변과 체험의 궁극적인 조화를 구현해 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그의 삶 가운데 어 떠한 모습으로 전개되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신비적인 체험과 현실적인 삶의 괴리를 극복하고 새 롭게 양 요소를 구현해 내야 할 오늘 우리들의 과제를 더욱 수월하게 조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2. 에크하르트 신비주의의 배경

13세기는 로마 카톨릭주의의 황금 시대였다. 교황의 권위는 이노센트 3세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교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적 존재였고, 카톨릭은 바벨탑의 신화에 다시 도전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교황과 카톨릭의 화려한 첨탑의 배후에는 탁발수도단과 고파 스콜라주의 학자들에 의한 경건한 신학이 든든하게 놓여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극단적인 일부의 사람들이 검소했던 예수의 지상생활과 로마에 있는 그의 대리자의 호사한 생활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의 이념은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1182-1226)에서 비롯되었다. 프란시스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예수의 비천한 생활을 본받아 성실하게 그대로 따른다. 프란시스의 정신을 계승한 프란치스코회 사상가들은 13세기 수도회 안에서 커다란 조류를 형성한다.[2] 이들은 어거스틴적인 사상의 흐름을 계승하며 학문적인 성격은 보수적이며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하여 처음에는 뚜렷한 적의를 나타내었으나, 점차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달라져 갔다.[3]

13세기 수도회의 학파를 전개해 나아가는 또 다른 조류는 도미니쿠스(Dominicus, 1170-1221)가 창설한 도미니크 수도회이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상을 견지해 나아간다. 이 사상의 정 점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형성된다. 이들은 인문주의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고, 이후 대학의 번창과 학문의 발전에 커다란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4] 우리는 여기에서 이 두 서클, 즉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칸 수도회는 중세기 말의 기독교 사상의 두 흐름으로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옴을 발견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사상적 세례를 받으며 자신의 신비주의 사상을 전개해 나아간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인간의 정서적 본성을 희생시키고 이성만을 강조하는 스콜라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며 새롭게 신비주의 사상을 전개한 정신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5] 즉 에크하르트는 이성의 빛을 추구하는 스콜라 사상에, 어두움과 그늘진 곳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주의의 정서를 탁월하게 접맥시킨 자였다.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분명한 개념적 사고와 황홀한 종교적 감정은 결코 해리(解離)되지 않았다.[6]

당시 스콜라신학의 싸늘한 체계에 의해 숨을 죽이고 있었던 종교적 감정의 그림자들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를 기점으로 하여 새롭게 빛을 보게 되었고, 이후에는 종교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렇다면 "중세시대의 종말과 현대시대의 출현의 경계선"[7]에 서 있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어떠한 특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가. 우선 에크하르트의 삶을 조명해보고,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의 내용을 접근해 들어가도록 하자.


3. 에크하르트의 삶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 더 잘 알려진 요하네스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 1260-1327/8)는 호크하임에서 1260년경에 태어난다. 당시는 초기 스콜라시대가 끝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서구세계에 도입하여 13세기 스콜라신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이고, 교육기관도 체계를 이루어 대학이 성행하며 학문운동이 매우 왕성하던 시기이다.

이러한 학문적 전성기에 태어난 에크하르트는 15세에 에트푸르트의 도미니칸 수도회에 들어가 9년 동안 사제를 위한 공부를 한다. 그는 여기에서 스콜라 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0)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이후 1300년에 에크하르트는 콜로뉴의 스투디움 제네 랄레(Studium generale)에 보내진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도미니크 수도회의 회원은 전문적으로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이 과정을 밟게 된다. 이 연구소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세운 곳이며, 토 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도 에크하르트와 같이 이 연구소의 가장 뛰어난 문하 생으로 기록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에크하르트의 동료였고 그보다 3년 일찍 죽은, 동시대의 인 물이다. 이후 1302년 에크하르트는 파리에 있는 도미니크 생자크 수도원에서 신학을 가르치게 된 다. 여기에서 그는 그 당시 학문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인정을 받게 된다. 즉 1302년에 그 는 라틴어 "선생"의 의미를 지니는 마기스터(magister)를 획득한다.

1303년에 그는 마흔 일곱개의 남자 수도회와 많은 수도원을 포함하고 있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작 센수도원 관구장(1303-1311)으로 임명된다. 관구장으로서의 에크하르트의 임무는 자신이 돌보는 지역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 안녕이었다. 동시에 그는 1307년에 보헤미아의 주교대리가 되어 보헤 미아 도미니크 수도회를 개혁하는 일을 위임받게 된다. 1309년에는 독일 도미니칸 지구 최고위치 로 임명되었고, 1313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의 설교자와 수도원장으로 일을 한다. 스트라스부르그 와 그 주변에는 아주 많은 수녀원들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는 마치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장소였다. 에크하르트는 라인 계곡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던 명상 수녀원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고 헌신적으로 활동한다. 1320년에는 코로냐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 면서 가장 유명한 시대를 이루었고 매우 저명한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각광받았다.

만년에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사상에 대한 커다란 저항과 공격을 받게 된다. 1326년 당시 프란체 스코 수도회 소속인 콜로뉴의 대주교 하인리히 비르네부르크(Heinrich von Virneburg)는 도미니 크 수도회를 대표하는 에크하르트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다. 에크하르트는 일반대중에게 위험한 교리를 유포하는 사람으로서 이단적 설교를 했다고 고소당하고, 이후 에크하르트는 교회재판에 오르게 된다. 에크하르트는 이단혐의로 조사되고, 아비뇽 위원회의 재판 진행 과정은 철학적 교리적인 차원의 공정한 검증보다, 오히려 주변적인 입김에 의해서 전개된다. 생애 말기에 비극적인 국면을 접하게 되는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정통성을 변론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던 도중에 사망한다. 결국 1329년 3월 27일, 교황 요한 22세는 In agro dominico라는 교서를 통하여 에크하르트의 저작중 28개의 명제를 정죄하며, 그 중 15개를 이단적인 것으로 선포하고, 나머지는 경솔하고 편 협한 것으로 판결한다. 이러한 까닭에 그의 저작은 금서로서 폐기처분 되어 오늘날 일부분만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그 교서에서는 에크하르트를 "자신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 이상을 알고자 하여 교회라는 발에 엉겅퀴와 가시를 심은 사람 중의 하나"로 묘사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당대에 이단으로 낙인찍혔으나, 그의 사상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도미니크 수도회를 중심으로 많은 공감대를 얻게 된다. 또한 복음주의적 신비주의자인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 신비주의 시인인 수소(Henry Suso, 1295-1366)에게 계승되고 이후 독일 신비주의 전통을 새롭게 열고 독일 관념론의 조상이라는 영예를 얻게 된다.[8]


4.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4.1. 부정의 길

<부정의 길>via negativa, 즉 피조물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성을 하느님으로부터 제거하는 길은 에크하르트의 <신비신학>의 특징이다. 부정의 길은 위 디오니시우스를 통하여 전개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온전히 초월적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잘 찬미할 수 있는 길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제거하는 일이며, 이 제거에 의해서만 어둠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즉 부정의 길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급을 부정하는데서 시작하여, 점차 피조물이 지니는 여러 속성들과 성질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초 본질적인 암흑"에까지 이르게 하는 여정이다.[9]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에 있어서도 부정의 길을 통한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은 매우 강렬한 맥박으로 계승된다.[10] 에크하르트 신비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 모두가 이 부정의 길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첫째, 에크하르트의 존재론에서부터 조명해보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에크하르트의 존재론은 결국 일자와의 통일이다. 이 궁극적인 일자는 에크하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신성>Gottheit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성이 궁극적인 일자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자와 관여되어 있는 일 자, 즉 <하나님>Gott은 결코 궁극적일 수 없고 잠정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유한한 피조물인 다자는 일자로서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이 하나님은
결코 궁극적인 일자가 아니다. 이 하나님은 유한한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만 출현한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다자와 관련된 일자를 넘어선 궁극적인 일자로서의 <신성>은 결코 다자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 신성은 존재Esse의 최상의 상태이다.[11] 그렇기 때문에 다자가 신성을 지시하는 유일한 길은 신으로부터 다자성을 제거하는 방법 밖에 남지 않는다. 에크하르트의 존재론은 피조물의 본성을 ― 애초부터 피조물의 본성은 무(無)이다 ― 제거함으로서 궁극적인 신성으로의 귀환을 촉구한다. 다자는 참된 <하나 님>으로서의 일자에 근거하고 이는 더욱 근원적인 <신성>으로서의 일자에 근거한다. 이렇게 존 재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다자에서 신성으로까지 끊임없는 부정의 과정을 통해 돌파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에크하르트의 인식론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인식하는 유한자의 인식은 결코 온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보여주고 있다.[12] 하나님이 유한자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존재론적 원리는 하나님은 유한자의 인식을 넘어선다는 인식론적 원리로 적용된다. 이제 유한자의 인식은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기보다 하나님이 무엇이 아니라고 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3] 그는 말한다
: "하나님의 존재는 초월해 있기 때문에 그 분은 모든 지식을 초월해 있습니다."[14]

하나님은 개념과 사유와 논리를 벗어난다. 오히려 "이름 붙여질 수 있는 모든 것이 폐기되는 그 곳"[15]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바로 유한자가 무한자를 인식할 수 있는 그 길은 오직 영혼의 불꽃에서만 열린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도 끊임없는 정화를 통하여 유한자의 모든 결핍을 제거해야만 은총을 통하여 열리는 무한자의 빛을 인식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 혹은 시간과 공간의 모든 표상은 피조물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이런 유한한 인식을 돌파해야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유한자의 모든 인식은 잠정적일 뿐이다. 이제 유한자의 인식은 부정하고 초극해야 할 대상이 된다. 피조물의 모든 인식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은 드러나기 때문이다.

셋째, 에크하르트의 윤리학에서는 유한자의 삶의 순결하고 가난하면 가난할 수록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고귀한 윤리는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관상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고 실천적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실천이 이론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었다."[16]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에크하르트는 정통적인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덕목인 <자비>를 넘어선다. 그는 <무심>無 心을 자비보다 더욱 고귀한 것으로 평가한다.[17] 자기 부정으로서의 자비를 다시 부정함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루어내는 에크하르트의 고유한 윤리학[18]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2. 하나님과 신성

무한자와 유한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은 종교의 신비주의 경험의 유형을 구분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단 거시적으로 이 양자의 관계를 조명해 본다면, 힌두교와 불교와 같은 동양종교의 신비체험에 있어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는 상호 대칭적이며 상호 수렴된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나 유대교와 같은 서양종교의 신비체험에 있어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는 상호 비대칭적이며 수렴점을 설정하지 않는다. 즉 다시 말해서 서양종교에 있어서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며, 신 또한 인간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기 독교에서도 무한자와 유한자,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다.

그렇다면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조명되는가? 우선 오토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하나님의 의지에 대면하여 인간의 의지가 포기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19] 우리는 일단 에크하르트가 피조물의 자기비움[20]을 통하여 창조주와 합일을 이루어낸다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거대한 주조음을 충실히 반영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영혼의 불꽃을 통한 합일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초 극되는 국면이 존재한다. 이에 우리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를 더욱 분명하게 조명하기 위해서 그가 구분한 하나님(Gott ; God)과 신성(Gottheit ; Godhead)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에크하르트는 하나님과 신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신성(Godhead)의 근거요, 토양이요, 물줄기요, 원천에 거하였을 때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질문할 어느 누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는 순간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God)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수도사 에크하르트여, 그대는 언제 그대의 집을 떠났는가?"고 묻는다면 ― 이것은 내가 언젠가는 집에 있었던 것이 틀림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일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God)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신성(Godhead)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신성 속에는 오로지 일치만 있어서 이야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활동하십니다. 그러나 신성은 활동하지 않으십니다. 신성은 활동 해야 할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신성은 해야 할 일을 찾 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신성은 활동하심과 활동하지 않으심으로 구별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돌아갈 때 나는 하나님 안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나의 귀환은 나의 유출보다 훨씬 고귀한 것 입니다. 내가 신성의 근거와 토양과 물줄기와 원천으로 귀환할 때, 아무도 나에게 내가 어디에서 왔는 지, 어디에 있었는지를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내가 있음을 알아채지 못할 것입니다. 왜 냐하면 하나님조차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21]

신성은 <자연화되지 않은 자연>unnatured Nature이고 하나님은 <자연화된 자연>natured Nature 이다.[22] 즉 에크하르트의 신성은 유한자의 언어와 지식과 인식을 넘어서 있는 그 불가해한 존재 를 지시한다. 다시 말하여 신성은 순수하며 절대적인 의미를 지시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인 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활동적이다. 반면에 신성은 활동 적이지 않다. 인간이 소극적으로 이름 붙이고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이실 지언정 결코 신 성은 아니다. 신성은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한, 절대적 초월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반대로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피조된 모든 것은 전적으로 무(無)일 뿐이다. 피조세계는 결코 우리의 고향이 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삼위일체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에 있어서 삼위일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부는 이 신성의 현시이다. 성자는 성부의 상(像)이자 현시이다. 그리고 성령은 현시의 빛이며 성부와 성자에 대한 사랑이다.[23] 영혼은 성부의 영원한 지혜를 신성으로 받게 된다. 또한 영혼은 성령의 빛을 통하여 영혼의 죄가 씻겨지며 자아와 사물들이 망각된다.[24] 그리고, 영혼 안에서 성부는 성자를 끊임없이 낳는다.[25]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영혼이 거룩한 삼위일체를 통하여 상승할 때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영혼은 그 자유와 고귀함을 가지고 <삼위>persona의 구별 마저도 초월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영혼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즉 영혼이 <한 처음에>in principio, 곧 모든 시작의 시작이자 모 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자 원천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저물고 어두워진 그 곳에는 <신 성>Gottheit만이 침묵 가운데에서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과 신성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즉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은 유한자에 관여하는 측면이고 신성은 유한자의 배후에 은폐된 측면이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피조 물과 관여하고 있는 창조주는 하나님이고 피조물과 관여하고 있지 않은, 그것을 넘어서는 감추어진 그 무엇을 에크하르트는 신성으로 보았다. 이렇게 에크하르트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논할 때 출현하는 분리와 일치의 패러독스와 긴장을 필사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유한자인 피조물은 무한자와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가?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불꽃을 통하여 인간이 무한자인 하나님과 관계맺는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에크하르트의 영혼의 불꽃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자.

4.3. 영혼의 불꽃

우선 에크하르트는 모든 피조계의 근원을 무(無)로 본다. 피조물은 전적인 무이다. 그러나 에크하 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관여되는 것은 영혼이다. 그렇다면 영혼이란 피조물이 아니란 말인가?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영혼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성의 일부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 자신의 형상에 따라 영화롭게 지으신 것"[26]이 영혼이다. 그는 말한다 : "영혼은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자생적>sui generis입니다."[27] 에크하 르트는 영혼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혼은 자신의 최고의 기능을 수단으로 해서 하나님께 가 닿습니다. 그럼으로써 영혼은 하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모방합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형상을 자신에게서 취하시는 것이지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에서도 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idea)은 자기지식(self-knowledge)이며 오로지 빛이십니다. 영혼이 참된 지식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하게 될 때 영혼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을 닮게 됩니다.[28]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다.[29] 에크하르트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말 씀에 이르는 길은 영혼에서 가능하다고 이해한다. 이 통로가 소위 <영혼의 불꽃>scintilla animae 이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은 이 영혼의 불꽃을 통하여 연결된다.[30] 인간이 하나님과 교감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영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에 상반되는 무엇인가도 있다. 그 대립자가 선과 악, 검다든지 희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바로 이런 것들은 존재의 일부분이 아니 다. 결국 인간은 온갖 가치관념들에 둘러싸인 육체를 정화시키고, 영혼을 비움으로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 영혼과 하나님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일치를 이루게 되는가? 에크하르트는 <숭고한 인간> The Nobleman과 <초연에 대하여>On Detachment라는 저서에서 이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이 단계는 <차이> Dissimilarity, <유사>Similarity, <합일>Identity, <돌파>Breakthrough의 4단계 과정으로 전개된 다.[31]

첫째, <차이>의 단계는 하나님과 피조물이 대조적으로 놓여지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모든 피조물 은 순수한 무이다. 피조물들이 작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 부터 <존재>Esse를 소유한다. 피조물은 파생적으로 존재를 획득하게 된다.

둘째, <유사>의 단계는 인간이 <영혼의 불꽃>을 통하여 개별적인 것을 극복하여 보편적인 존재로 나아감으로 그가 하느님의 형상임을 발견한다. 이는 동시에 하나님과 비슷하게 되어감을 의미 한다. 에크하르트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인간의 영은 결코 쉬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발생시키는 근원인 소용돌이 속으로 강력하게 나아갑니다. [ ] 하나님께서 나에게 스며드 시는 것같이 나도 하나님께로 스며드는 것입니다."[32]

셋째, <합일>의 단계는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자칫하면 오해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에크하 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영혼 사이의 일치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향과 인간의 의지를 하나로서 여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 밖에 있지 않고 온전히 내면으로 스며든다. 이때 영혼의 불꽃 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어떠한 매개도 없이 하느님을 소유한다. 바로 인간 영혼의 정수와 하 나님의 중심이 하나가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에게 알려지는 것이고, 하나님을 보 는 것은 그에게 보여지는 것이다."[33] 에크하르트는 하나님과 영혼 사이의 합일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만일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면 영혼은 즉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어떤 매개도 사용치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어떤 간섭(매개)에 의해서도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영혼의 모든 껍질이 벗겨지고 또한 하나님의 모든 껍질이 벗겨질 수 있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남김없이 직접 영혼에게 주실 것입니다."[34]

넷째, <돌파>의 단계는 인간이 그 어떠한 것도 추구할 수 없는,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버리게 되는 단계이다. 영혼이 진정으로 정화된다면, 즉 하나님과의 합일의 단계를 넘어간다면 이제 하나님은 어둠으로 사라지고 신성만 남게 된다. 동시에 인간도 어둠으로 사라지고 신성만 남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에크하르트는 내가 없이는 하나님도 없다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 "나는 나의 영원한 존재와 나의 시간적인 존재 양자에 대한 나 자신의 제1원인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내가 태어났 으며, 나의 영원한 탄생으로 인하여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영원히 있었고, 지금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있으리라는 것은 이 영원한 탄생의 본성에 속합니다. 시간적인 피조물로서의 나는 죽어서 무로 돌아갑니다. [ ]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 어떤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35] 실로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이란 "하나님의 씨앗"[36]이다. 그리고 에크 하르트의 신비주의의 정점은 영혼의 불꽃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37] 동시에 그 일치는 모든 구별을 사라지게 하고, 그 때야 비로소 하나님과 영혼은 온전히 동일해진다. 결국 인간과 하나님은 일치를 이루어 그들은 모두 어둠으로 사라지며 이제 암흑의 고요한 신성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4.4. 가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결국 신성에의 돌파를 통한 공(空)과 무(無)를 지향한다. 이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궁극적으로 지향할 수 밖에 없는 가장 고양된 수렴점이다. 시간과 공간에 드리 워진 창조주와 피조물은 갈등하고 긴장한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의 특징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조화롭게 해명하고 극복하는 데 있다. 그는 신적인 것만이 진정한 것이라고 믿었고, 엑스타시의 체험 속에서 인간의 본질이 신적인 본질과 하나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 요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신성에 다가가는 과정은 다름이 아닌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부정의 대상이 된다. 어떤 사람이 에크하르트에게 하나님을 즐기는 것 마저도 극단적으로 포기해야 하는가? 라고 물어본다. 에크하르트는 "그렇다"라고 대답한다.[38] 이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갖고 있는 매우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표이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의 성격을 온전히 드러내는 성서 말씀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 다"(마 5:3)는 구절이다. 에크하르트는 자신을 버리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을 가장 고귀한 신비주의의 단계로 이해한다. 인간의 눈은 색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색깔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색에 민감한 영혼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다른 영혼들에 대해 민감한 것이라고 에크 하르트는 강조한다.[39]

그렇다면 에크하르트가 말한 가난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신비주의가 가장 심오하게 담겨져 있다고 여겨지는 마지막 설교인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에서 가난한 사람 이 만나는 단계를 다음 세 가지의 여정으로 보여주고 있다.[40]

첫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원래 인간은 하나님도 가지지 않았으며 단지 나 자신이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의지에 있어서 가난해져야 한다.

둘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이 단계는 진리와 하나님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 듯이 살아가야 한다는 첫째 단계를 극복하는 차원이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의지나 지식도 버려야 하는 차원이다.

셋째,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이 단계는 신성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제거해 버리게 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과 신성이 하나임을 발견하는 차원이다. 결국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가난의 기나긴 여정은 인간의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신성에까지 육박해 들어간다. 거기에는 피조성과 유한성과 깨달음과, 심지어 하나님도 초극되고 돌파되어 버린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의 정점은 바로 신성만 고요히 남아있는 영원한 암흑인 것이다.


5. 결론 : 에크하르트 신비주의의 현대적 의미

우리는 지금까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를 살펴보았다. 이에 우리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를 오늘의 개인적, 교회적, 신학적 맥락 안에서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오늘을 향해 던져주는 소중한 의미를 나름대로 결론으로 제시하면서 글을 마감하려 한다.

첫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비움의 신비주의>이다. 그의 신비주의의 정점은 영혼의 불꽃을 통한 신성의 경지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고 자신마저도 비워야 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을 나누는 것, 그리고 자신을 비우는 것은 결코 사변(思辨)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실천적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이 결코 프로메테우스적인 삶의 양식이 아니라 헤르메스적인 삶의 양식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자기 비움을 통한 나눔과 섬김은 근원적 신성을 향한 숭고한 과정이라는 자명한 사실은, 오늘 우리 한국의 신앙공동체가 범할 수 있는 물량주의적-소유지향적 사고를 진지하게 반성하게 한다.

둘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감정의 신비주의>이다. 물론 에크하르트는 프란시스 수도회와 도미니칸 수도회, 안셀름과 아퀴나스, 주의(主意)와 주지(主知)의 양대 조류 가운데 역사적으로는 후자에 속해 있었지만, 그는 신앙의 생동감과 풍부한 감정의 지평을 새롭게 전개하였다. 더 나아가서 숨막히는 합리주의의 스콜라신학을 넘어 새로운 신비주의의 지평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개간하였다. 이는 신앙과 이성의 종합을 구현하였던 스콜라 신학이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를 중심으로 종말을 고함을 의미한다. 제3의 밀레니움으로 다가가는 문명전환기는 감정과 체험을 통한 영성 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의 중요한 모티브가 될 것이라고 하비콕스는 예견한다. 신앙, 그리고 신비주의는 근원적으로 감정과 일란성 쌍생아의 운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감을 견인하는 <감정>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의 한국의 신앙공동체의 상황에서 감정의 문제를 숙고해 볼 때, 한국인의 풍요로운 감성은 한국교회의 세계적인 부흥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는 이 땅의 신앙공동체가 지닌 가능성과 역동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성 없는 감정은 맹목적이고 감정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는 고리타분한 양비론의 대지를 넘어서서, <감정>에 대한 깊은 신학적 숙고를 통하여 오늘의 신앙공동체가 개혁하고 갱신해 나아갈 수 있는 모색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강렬한 파토스는 무엇보다 더욱 근원적이며, 값진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의인과 성화가 결코 분리되지 않은 <조화의 신비주의>이다. 그에 의하면 전적인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기에 살아갈 수 있으며, 인간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합일을 통하여 성화를 구현해야 할 과제가 있다.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의인적 신비주의> ― <의인>이라는 용어는 신비주의의 맥락에서 볼 때 절대자와 피조물 사이의 질적 차이를 은밀하게 전제한다 ― 를 에크하르트는 넘어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완전하게 하나되는 삶, 그리고 그 <성화>의 가능성을 에크하르트는 어떤 신비주의보다 더욱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신앙공동체가 은총의 감격과 기쁨 안에 안주 한 나머지 성화의 과제를 망각해 왔음을 ― 혹은 망각할 수 있음을 ― 반성하게 한다. 에크하르트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의인으로서의 고백과 "내가 하나님으로 간다"는 성화로서의 고백은 매우 근본적이며 또한 급진적이다. 에크하르트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저 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회상하게 한다.

넷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주체적 신비주의>이다. 우리는 독일철학의 연원이 에크하르트의 신비사상에까지 소급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라틴의 풍부한 유산을 소화하면서도, 동시에 <영혼의 자유>라는 게르만인 고유의 에스프리로 자신의 사상을 직조해 나아갔다. 또한 그는 이단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변론하고 "내가 가르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이다"[41]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철저하게 사변적이고 신비적이었던 에크하르트는 역설적으로 사상사의 새로운 맥을 틔웠다.

에크하르트의 투철한 혼과 사상은 루터의 프로테스탄티즘, 칸트의 독일관념론 등 서구 사상사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소인은 역사를 읽을 뿐이지만 군자는 역사를 몸으로 쓴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신비주의의 역사, 신학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형성해 나아가야 함을 에크하르트를 통하여 새삼 깨닫는다. 또 하나, 에크 하르트의 사상이 끼친 놀라운 영향력은 <영혼의 불꽃>이라는 그 자신의 내밀한 신비체험에 근거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신비는 진정한 혁명과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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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1] 쓰즈끼(D.T. Suzuki)는 Mysticism : Christian and Buddhist라는 책에서 에크하르트의 사고방식과 대승불교, 특히 선 불교(禪佛敎)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저서에서 에크하르트의 <신성>Gottheit과 불교의 <空>??nyat?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하면서, 엑크하르트를 매우 비범한 기독교인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에크하르트와 선불교의 비교연구 작업은, 일견 기독교 신비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엑트하르트의 사상을 선 불교라는 관점 속에서 유형적으로 재해석한 듯 하다. 이는 스티브 오딘(Steve Odin)이 서양의 형이상학으로 한국 의 화엄불교를 재해석한 경우와 마찬가지의 "의미"와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루돌프 오토 (Rudolf Otto)는 Mysticism East and West에서 엑크하르트와 인도의 상카라(Sankara)의 신비주의가 갖고 있는 유 사성과 차이성을 논의해 나아간다. 여기에서 오토는 아트만(?tman)과 영혼(Soul)이, 브라만(Brahman)과 신성(Godhead)이 유사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로버트 엘우드(Robert S. Ellwood, Jr)는 윌리엄 블레이크, 프리드리히 니 체, 토마스 알타이저 등과 같은 현대의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자들의 주장이 일견 에크하르트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D.T. Suzuki(강영계 역), {엑크하르트와 禪} (서울 : 도서출판 주류, 1982),
pp.17-31. Steve Odin, Process Metaphysics and Hya-yen Buddhism (Albany :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Rudolf Otto, MysticismEast and West (New York : Collier Books, 1962), pp.97-104. 로버트 엘우드(서창원 역),
{신비주의와 종 교} (서울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p.180.
[2] J.L.니브 / O.W. 헤이크(서남동 역), {기독교교리사}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2), pp.388-389.
[3] F. 코플스톤(박영도 역), {중세철학사} (서울 : 서광사, 1988), p.288.
[4] Ibid., p.706.
[5] "에크하르트는 추상적인 스콜라적 사고[개념]에다 따뜻한 종교적 감정과 힘찬 종교적 사랑의 행위를 가진 부 란 혼을 결합시켰다." I.C. 헤넬 엮음(송기득 역),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3), p.258.
[6] 변선환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보여주는 이러한 조화를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 "깊은 사변을 통하여 자아의 근저에 이르려는 영혼의 충동을 철저화시킨 에크하르트의 사변적 신비주의는 토마스처럼 이성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신의 근저에 이르기 위하여 영혼의 내적 근저를 조명하기 위하여 어거스틴 계통 특히 아레오파 키타의 디오니소스의 신플라톤주의에서 배워나갔다." 변선환, "이용도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한국적 신학 의 모색 - 변선환 전집 3} (천안 : 한국신학연구소, 1997), p.339.
[7] 케이른즈(Earl E. Cairns)는 에크하르트를 포함한 그 당시의 신비주의가 갖고 있는 시대사적-교회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 지도자들에게서 부터 시작된 것 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교황권의 명성과 세력의 쇠퇴를 정지시키려는 다양한 개혁 시도가 있었다. 1305년부터 1517년 사이에 로마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항의와 개혁 시도가 있었다. 로마를 떠나 프랑스에 주재하고 있던 타락하고 사치한 교황청, 그리고 교황을 로마로 복귀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분열에 자극을 받아 14세기에 신비주의자들, 종교개혁자들, 개혁 공의회들, 그리고 로마 교회 내의 신앙부흥을 일으킬 방법을 추구하는 성경적 인 문주의자들이 생겨났다. " 케이른즈(엄성옥 역), {세계교회사 上} (서울 : 은성출판사, 1995), p.385.
[8] 에크하르트의 삶에 대한 조명은 다음을 참조하였음. Michael Cox, Mysticism (Wellingborough : The Aquarian
Press, 1983), pp.97-99.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Eckhart, Meister" Frank Tobin, Meister Eckhart
: Thought and Language (Philadelphia : University of Pensylvania Press, 1986)[이민재 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2} (서울 : 다산글방, 1994), pp.140-159.] 노종해, "중세 후기 기독교 신비주의에 대한 연구", {신학과 세계 5호} (서울 :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1979), pp.262-263.
[9] {중세철학사}. p.135.
[10]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형태는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Mysticism, <삼위일체 신비주의>Trinitarian mysticism, <부정 신비주의>Negative mysticism로 나뉘어진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알수 없는 분으로서 강조하는 부정 신비주의의 유형에 속한다. 이 부정신비주의는 위 디오니시우스에서 에크하르트를 거쳐 야 콥 뵈메로 계속 이어진다.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Christian Mysticism"
[11] Raimond B. Blakeny, Meister Eckhart : A Modern Translation (New York and London, 1947)[이민재 역, {마이스 터 엑크하르트 1} (서울 : 다산글방, 1994), p.304. 이하 ME I로 표기.
[12] 에크하르트의 인식론의 특징은 그의 언어관을 통하여 극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언어가 실재를 온전히 반 영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그의 설교에서는 풍부한 은유와 상징을 통하여, 언어를 넘어 선 실재를 지시하려는 노력에 천착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에크하르트에서 중요한 것은 문자가 아니라 의도였다.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언어관에 기인하여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문자적 의미>prout verbasonant 원리의 우위를 주장하는 당시의 위원회 와 교황청에 의해서 이단으로 최종적인 판결을 받았다.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언어관과 이단판정에 관련하여 루돌프 슈타이(Rudolf Steiner)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에크하르트는 그리스도교의 진리 내용을 단 한 줄도 가 감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교의 진리 내용을 <새롭게>anew 그의 고유한 방식으로 제시하기를 원 했던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정통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남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Rudolf Steiner, Mysticism at the Dawn of the Modern Age(1901), in
http://www.elib.com/Steiner/Books/GA007/Mysticism/Meister.htm.
[13] Johan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I (Freiburg, Basel, Wien, 14, Aufl., 1987), p.553.
[14]ME I, p.240.
[15] Ibid.
[16] Geschichte der Philosophie I, p.556.
[17] 에크하르트는 자비와 관련하여 무심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또한 무심을 자비보다 더 차원 높은 것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비는 동료의 결핍을 향해 밖으로 나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럼으로 써 마음은 어지렵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심은 이러한 마음의 혼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모든 덕들을 살펴보건대, 무심만큼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흠없는 덕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ME I, p.152.
[18] 에크하르트는 "왜 사는가"라는 물음이 천 년 이상 동안이나 제기되어 왔다며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그는 "나는 단지 살기 위하여 살 뿐이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에크하르트의 부정의 길을 통한 신비주의에서 던질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적 언명이라고 여겨진다. 동어반복(tautology)은 더 이상 부정이 요청되지 않는 절대 무한자의 자리에 서 있을 때에만 가능한 가장 고양된 언명이기 때문이다. Ibid., p.217.
[19] MysticismEast and West, pp.225-226.
[20] 자기자신 자신을 부정하는 것의 소중한 의미를 엑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꺼려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 자신조차 넘어서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거룩한 삼위일체 속으로 변형되었다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ME 1, p.327.
[21] Clarke, James M., Meister Eckhart(1957), p.184. in Michael Cox, Mysticism, p.100.
[22] Ibid.
[23] Ibid.
[24] ME I, p.325.
[25] Ibid., p.338 ;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버나드나 프란시스가 주장한 그리스도 중심적 신비주의 사이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두 사람들은 성자를 역사적 인간으로서,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명상하는 가운데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성경적 사건들의 역사적 시간이나 지리적 장소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는 인간이 내면적인 영혼의 불꽃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며, 아무런 중재 없이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다. cf. 유스토 L. 곤잘레스(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서울 : 은성, 1990), p.222.
[26] ME I, p.241.
[27] Ibid., p.279.
[28] Ibid., p.270.
[29] "Meister Eckhart",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1996) in
http://www.utm.edu/research/iep/e/eckhart.htm.
[30] 휠스베르거는 엑크하르트의 <영혼>Seele이 유한한 세계와 무한한 신의 중간자인 인간이 진정한 관여에 의하여 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깨달은 지점이라고 강조한다. Geschichte der Philosophie I, p.558.
[31]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Eckhart, Meister"
[32] ME I, p.316.
[33] Mysticism, p.101.
[34] ME I, p.277.
[35] Ibid., p.371.
[36] "하나님의 씨앗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씨앗은 슬기로운 농부와 부지런한 일꾼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씨앗인 그 씨앗은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무성하게 자랄 것이며 이로써 그 열매는 하나님의 본성이 될 것입니다. 배 심은 데 배나고, 밤 심은 데 밤 나듯, 하나님의 씨앗은 하나님이 되는 법!" Ibid., p.140.
[37] Mysticism, p.101.
[38] ME I, p.77.
[39] Ibid., p.107 ; 에크하르트의 설교 가운데에서 신비체험과 역사적이고도 현실적의 삶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부분은 별로 눈에 띄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시간적이고 공간적이며 유한한 역사적 삶은 초월과 돌파의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신비와 삶, 정관과 생활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단서를 염두섭은 다음에서 제시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
"그대는 사막에 찾아 들어가 금식할 필요는 없다. 백성들의 생활은 때때로 광야보다 더 쓸쓸한 곳이요, 적은 일은 큰 일에 비해 한층 더 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죽은 성자의 유골이 무슨 역할을 해낸단 말이냐. 죽은 자는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엄두섭 저, {신비주의자들과 그 사상} (서울 : 은성, 1992), p.135.
[40] ME I, pp.365-371.
[41]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Eckhart, Meister"


□ 1차 참고문헌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Eckhart, Meister"
Frank Tobin, Meister Eckhart : Thought and Language (Philadelphia : University of Pensylvania Press, 1986)
[이민재 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2} (서울 : 다산글방,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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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mond B. Blakeny, Meister Eckhart : A Modern Translation (New York and London, 1947)
[이민재 역,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1} (서울 : 다산글방,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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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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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토 L. 곤잘레스(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서울 : 은성,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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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논총 8호 107-124쪽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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