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랍사태와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오해[펌]
2007. 10. 4. 12:16ㆍ선교자료/1.글로벌선교회
피랍사태와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오해[펌]
(아프간 피랍사태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안타깝고 비통한 심정이었습니다. 지금 피랍된 인질들과 그 가족들의 심정이 어떨까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전해지는 소식들과 그 댓글들을 보면서 너무나 답답하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여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난 짧은 글실력에 마음으로만 홀로 삭이다가 우연히 이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시간 누구보다 가슴아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계시는 줄 모르겠지만 주님 뜻 가운데 모든 것이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toham84-)
아프간 피랍 사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독교와 교회, 기독교인을 향한 비난은 달게 받아야 할 줄로 압니다. 또한, 피랍사태를 계기로 그동안 기독교가 얼마나 인심을 잃었으며 소위 기독교인으로서의 잘못된 처신으로 인해 기독교인을 향한 사회의 불신과 실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겸허하게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피랍자들과 교회, 기독교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비난 역시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잘잘못을 가리고 정당한 비판과 비난을 통한 반성과 개선이 있어야겠지만, 넘쳐나는 글들 중 많은 글들이 하나님과 교회, 기독교에 대한 몰이해와 선입견에 의해 침소봉대 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제 소견대로 몇 가지 부각되고 있는 오해에 대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관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선교냐? 봉사냐?
두 말할 나위 없이 당연히 선교입니다. 이슬람 국가에 개종을 목적으로 한 선교를 갔다는 사실이 부각되며 비기독교인들로부터 비난에 쌓이자 선교를 봉사로 순화해서 비난의 강도를 낮추려는 행동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는 더 더욱 어이없는 행동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까지 정당성을 잃는 한심하고 비겁한 변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봉사일 뿐 선교는 아니다” 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어리석든지 비겁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선교라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선교’ 라는 단어가 논쟁의 중점에 서자
언론에서 ‘봉사’로 순화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2. 아프간 선교 등 각종 해외선교가 교회 세력 확장을 위한 도구이다?
교회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의 가장 큰 오해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교회로서는 당연히 감당해야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교회의 사명이랄 수 있는 일이지만 각 교회 입장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 선교입니다.
많은 교회가 동남아, 중국, 인도, 아프리카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이번 피랍자들과 같은 단기선교 팀을 파송합니다. 선교사들은 그 나라에서 살면서 선교를 하시는 분들이고 단기 선교 팀은 대부분 1주-2주 동안 말 그대로 단기간 그 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귀국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교사의 경우 대부분의 선교지 재정상황이 열악하기 때문에 선교사의 생활비를 파송한 교회에서 대부분 책임지며, 단기선교의 경우에도 대부분 교회의 보조 + 개인 사비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선교는 교회 입장에 상당한 재정적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 교회가 얻는 것은 교회의 사명을 다 했다는 명예와 자부심 외에 경제적 이익은 전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선교가 국내에서 교인을 모으는데 효과적이지 않느냐 말씀하시는데 이 또한 전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수평이동입니다. 믿지 않는 분이 새로 신자가 되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게 아니라 이미 기독교인인 분들의 이동에 의해 교회가 커지고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평이동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 인지도, 교회의 규모, 조직 등입니다.
현실적으로 큰 교회가 소위 말씀이 좋은 목사님, 많은 교인들을 통한 사업상의 이익, 교회 학교를 통한 자녀교육 등 장점이 많기 때문에 큰 교회는 더 커지고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는 기독교 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는 비기독교인은 물론 기존 기독교인에게도 교회 선택시의 고려 사항이 아닙니다.
3. 주변의 이웃은 무시하고 다른 나라 선교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계의 10억 이상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고 12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미화 1달러가 채 못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또 다른 28억 명의 사람들은 하루 생활비가 2달러가 채 되지 않으며 매일 4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 전염병으로 죽어갑니다
반면, 전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데 미국에서만 한 해 애완동물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410억 달러, 한화로 약 38조원입니다.
전 세계에서 애완동물에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이고 이 돈이면 전세계에 굶어죽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게 만들 수 있는 돈입니다.
댓글에 많이 등장하는 수준으로 비약하자면 자기 개 새끼 기름진 음식 먹이고 옷 입히고 미용실 데려가느라 수많은 사람 굶어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다 이웃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들이라고 비난 받아야 합니까?
주변의 불우한 이웃부터 도와야 한다는 말씀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에서 주변의 이웃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교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는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성격상 항상 지속적으로 병행되어야 하는 일이지 어떤 일부터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은 아닙니다.
부모 공경, 자식 교육, 사회생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우리 삶 속에서 매일 감당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부모 공경부터 끝내 놓고 자식 교육하고 그 다음에 사회생활하고 이처럼 순차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닌 것입니다.
4. 자기의 욕심을 위해 아프간에 갔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께 묻겠습니다. 당신께서 아프리카 우간다에 2주간 봉사활동을 다녀오셨다 칩시다. 그 사실이 당신의 사회생활에 얼마나 큰 유익을 줄 수 있습니까?
취직, 승진, 비즈니스 등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요? 1년, 2년씩 어학연수를 다녀와도 취업 승진 시에 큰 유익이 없는 게 현실인데... 직장에서 1년에 한 번 있는 휴가를 사용해서 자기 돈 들여 잠자리, 먹는 것 모두 불편한 오지로 다녀올 만큼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가 있을까요?
물론, 사람에 따라 개인적인 명예나 과시욕 혹은 객기에 의해 가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극소수요 일부일 뿐입니다.
단기선교는 다녀 온 사람이 다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처럼 평생 못 가는 사람도 있고... 환경은 힘들고 어렵지만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그들의 작은 미소에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했다는 기쁨에 다시 가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처럼 슈바이처처럼 평생을 그들과 함께 하진 못하더라도 내 시간의 일부, 내가 가진 것의 일부라도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저는 피랍자들의 동기가 이처럼 순수했다고 믿습니다.
5. 정부에서 극구 말리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야만 했는가?
이 부분은 저도 상당히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독교계 내에서도 여러 가지 이견이 있습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곳만 간다면 무슨 선교의 의미가 있겠는가? 진정한 선교는 전혀 선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라도 갈 수 있는 신앙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라는 분들과 “무리한 욕심에 의한 선교는 금번 사태와 같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만 끼칠 뿐이다” 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두 의견 다 맞는 말씀들인 것 같습니다.
남미 에콰도르 아우카 식인종에게 죽임을 당했던 짐 엘리엇과 4명의 선교사들... 그들의 죽음은 당시 어처구니 없는 개죽음으로 비춰졌지만 그 아내들과 자식들에 의해 식인종들이 식인 습관을 버리고 결국 기독교인이 되었던 사실이나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400여명의 선교사들 이 분들의 죽음 역시 당시에 보기엔 다 무모해 보였지만 결국 값진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리한 선교의 이면에 인간적인, 또 개 교회를 위한 교회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이는 지탄 받아 마땅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전 국민에게 걱정과 염려를 끼친 일은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겸손하게 고개 숙여 용서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6. 기독교인이 더 한다?
이 부분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부끄럽게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본을 못 보이고 더 악한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 영광까지 가리게 된 것입니다.
말이나 안하면 다행인데 입으로는 사랑, 겸손, 봉사 떠들면서 하는 행동은 갖가지 추한 짓들을 일삼으니 가식적인 이중인격자들로 낙인찍히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몇 대 쥐어박고 싶은 목사, 장로, 권사 등등이 얼마나 많은지...
성경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구원은 ‘칭의’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칭의’는 의롭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전혀 의롭지 않지만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봐서 의롭게 여겨줘서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인격이 훌륭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엄청나게 거룩한 양 훌륭한 양 꼴값을 떠는 것들은 결코 참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성경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만명의 성도가 있지만 소매 끝이 닳아빠진 옷을 입고 버스를 타며 산꼭대기 20평짜리 국민주택에 머무르기를 자처했던 바보같은 목회자로 일컬어지는 목사님.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을 받으실 때 “나는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입니다” 라며 자신의 잘못을 겸손히 고백했던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도 계십니다.
반면에 교회 팔아먹고 사기치는 목사, 장로들도 있습니다.
법정 스님 말씀 중에 “세상에 중이 많다 보니 별 놈의 중이 다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기독교인이 많다 보니 별 놈의 기독교인도 다 있는 것입니다. 무신론자 유영철이 연쇄살인을 했다고 무신론자들은 다 연쇄살인자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경상도에서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경상도 사람들을 다 강도 취급하거나, 전라도에서 강간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라도 사람들은 다 강간범 취급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처럼 한심하고 교만한 덜 떨어진 기독교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7. 교회는 세금을 안 내도 된다?
현행법상 성직자는 소득세 면제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소득에 대해 자진신고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00명 교인 미만의 교회 목회자들은 세금은 커녕 생활고에 시달릴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직자에 대한 갑근세 부과를 의무로 하지 않는 것은 목회활동을 근로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것과 이미 소득세를 낸 성도들의 기부금에 의해 주어지는 사례비에서 소득세를 내게 되면 이는 이중과세에 해당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직자의 세금에 대해 일반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소위 말하는 대형 교회들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목회자들에게 세금에 대한 부담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경제 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는, 생활수준이 중산층 이상인 대형 교회 목사님들 중에도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비영리 단체로서 과세 면제에 대한 혜택 아래 교회사용 목적 외의 부동산 등을 통한 수입의 전용 등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자청년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교회가 이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온 정성을 다해 주위의 가난한 이웃을 도왔다면 교회가 세금 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반대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사회 앞에 바르고 당당해야 합니다. 법이 규정하고 있지 않더라도 교회의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야할 세금은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세금은 스스로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많은 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8. 기독교는 독선적이다?
진리는 독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1 + 1 = 2 라는 진리가 융통성을 발휘해 3도 되고 4도 될 수는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에게는 성경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타 종교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종교를 무시하거나 박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신념으로 타협될 수 없는 것입니다. 조상님들에 대한 제사에서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로 욕을 많이 먹는데, 이는 성경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은 활동할 수 없으며 잠자고 있다가 예수님 재림 시에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조상님에 대해서 불경해서가 아니라 절을 하는 행위가 결코 돌아가신 조상님을 기리고 감사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피랍자들과 교회, 기독교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비난 역시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잘잘못을 가리고 정당한 비판과 비난을 통한 반성과 개선이 있어야겠지만, 넘쳐나는 글들 중 많은 글들이 하나님과 교회, 기독교에 대한 몰이해와 선입견에 의해 침소봉대 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제 소견대로 몇 가지 부각되고 있는 오해에 대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관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선교냐? 봉사냐?
두 말할 나위 없이 당연히 선교입니다. 이슬람 국가에 개종을 목적으로 한 선교를 갔다는 사실이 부각되며 비기독교인들로부터 비난에 쌓이자 선교를 봉사로 순화해서 비난의 강도를 낮추려는 행동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는 더 더욱 어이없는 행동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까지 정당성을 잃는 한심하고 비겁한 변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봉사일 뿐 선교는 아니다” 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어리석든지 비겁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선교라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선교’ 라는 단어가 논쟁의 중점에 서자
언론에서 ‘봉사’로 순화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2. 아프간 선교 등 각종 해외선교가 교회 세력 확장을 위한 도구이다?
교회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의 가장 큰 오해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교회로서는 당연히 감당해야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교회의 사명이랄 수 있는 일이지만 각 교회 입장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 선교입니다.
많은 교회가 동남아, 중국, 인도, 아프리카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이번 피랍자들과 같은 단기선교 팀을 파송합니다. 선교사들은 그 나라에서 살면서 선교를 하시는 분들이고 단기 선교 팀은 대부분 1주-2주 동안 말 그대로 단기간 그 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귀국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교사의 경우 대부분의 선교지 재정상황이 열악하기 때문에 선교사의 생활비를 파송한 교회에서 대부분 책임지며, 단기선교의 경우에도 대부분 교회의 보조 + 개인 사비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선교는 교회 입장에 상당한 재정적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 교회가 얻는 것은 교회의 사명을 다 했다는 명예와 자부심 외에 경제적 이익은 전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선교가 국내에서 교인을 모으는데 효과적이지 않느냐 말씀하시는데 이 또한 전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수평이동입니다. 믿지 않는 분이 새로 신자가 되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게 아니라 이미 기독교인인 분들의 이동에 의해 교회가 커지고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평이동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 인지도, 교회의 규모, 조직 등입니다.
현실적으로 큰 교회가 소위 말씀이 좋은 목사님, 많은 교인들을 통한 사업상의 이익, 교회 학교를 통한 자녀교육 등 장점이 많기 때문에 큰 교회는 더 커지고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는 기독교 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는 비기독교인은 물론 기존 기독교인에게도 교회 선택시의 고려 사항이 아닙니다.
3. 주변의 이웃은 무시하고 다른 나라 선교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계의 10억 이상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고 12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미화 1달러가 채 못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또 다른 28억 명의 사람들은 하루 생활비가 2달러가 채 되지 않으며 매일 4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 전염병으로 죽어갑니다
반면, 전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데 미국에서만 한 해 애완동물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410억 달러, 한화로 약 38조원입니다.
전 세계에서 애완동물에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이고 이 돈이면 전세계에 굶어죽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게 만들 수 있는 돈입니다.
댓글에 많이 등장하는 수준으로 비약하자면 자기 개 새끼 기름진 음식 먹이고 옷 입히고 미용실 데려가느라 수많은 사람 굶어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다 이웃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들이라고 비난 받아야 합니까?
주변의 불우한 이웃부터 도와야 한다는 말씀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에서 주변의 이웃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교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는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성격상 항상 지속적으로 병행되어야 하는 일이지 어떤 일부터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은 아닙니다.
부모 공경, 자식 교육, 사회생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우리 삶 속에서 매일 감당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부모 공경부터 끝내 놓고 자식 교육하고 그 다음에 사회생활하고 이처럼 순차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닌 것입니다.
4. 자기의 욕심을 위해 아프간에 갔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께 묻겠습니다. 당신께서 아프리카 우간다에 2주간 봉사활동을 다녀오셨다 칩시다. 그 사실이 당신의 사회생활에 얼마나 큰 유익을 줄 수 있습니까?
취직, 승진, 비즈니스 등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요? 1년, 2년씩 어학연수를 다녀와도 취업 승진 시에 큰 유익이 없는 게 현실인데... 직장에서 1년에 한 번 있는 휴가를 사용해서 자기 돈 들여 잠자리, 먹는 것 모두 불편한 오지로 다녀올 만큼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가 있을까요?
물론, 사람에 따라 개인적인 명예나 과시욕 혹은 객기에 의해 가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극소수요 일부일 뿐입니다.
단기선교는 다녀 온 사람이 다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처럼 평생 못 가는 사람도 있고... 환경은 힘들고 어렵지만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그들의 작은 미소에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했다는 기쁨에 다시 가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처럼 슈바이처처럼 평생을 그들과 함께 하진 못하더라도 내 시간의 일부, 내가 가진 것의 일부라도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저는 피랍자들의 동기가 이처럼 순수했다고 믿습니다.
5. 정부에서 극구 말리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야만 했는가?
이 부분은 저도 상당히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독교계 내에서도 여러 가지 이견이 있습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곳만 간다면 무슨 선교의 의미가 있겠는가? 진정한 선교는 전혀 선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라도 갈 수 있는 신앙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라는 분들과 “무리한 욕심에 의한 선교는 금번 사태와 같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만 끼칠 뿐이다” 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두 의견 다 맞는 말씀들인 것 같습니다.
남미 에콰도르 아우카 식인종에게 죽임을 당했던 짐 엘리엇과 4명의 선교사들... 그들의 죽음은 당시 어처구니 없는 개죽음으로 비춰졌지만 그 아내들과 자식들에 의해 식인종들이 식인 습관을 버리고 결국 기독교인이 되었던 사실이나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400여명의 선교사들 이 분들의 죽음 역시 당시에 보기엔 다 무모해 보였지만 결국 값진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리한 선교의 이면에 인간적인, 또 개 교회를 위한 교회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이는 지탄 받아 마땅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전 국민에게 걱정과 염려를 끼친 일은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겸손하게 고개 숙여 용서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6. 기독교인이 더 한다?
이 부분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부끄럽게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본을 못 보이고 더 악한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 영광까지 가리게 된 것입니다.
말이나 안하면 다행인데 입으로는 사랑, 겸손, 봉사 떠들면서 하는 행동은 갖가지 추한 짓들을 일삼으니 가식적인 이중인격자들로 낙인찍히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몇 대 쥐어박고 싶은 목사, 장로, 권사 등등이 얼마나 많은지...
성경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구원은 ‘칭의’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칭의’는 의롭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전혀 의롭지 않지만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봐서 의롭게 여겨줘서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인격이 훌륭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엄청나게 거룩한 양 훌륭한 양 꼴값을 떠는 것들은 결코 참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성경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만명의 성도가 있지만 소매 끝이 닳아빠진 옷을 입고 버스를 타며 산꼭대기 20평짜리 국민주택에 머무르기를 자처했던 바보같은 목회자로 일컬어지는 목사님.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을 받으실 때 “나는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입니다” 라며 자신의 잘못을 겸손히 고백했던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도 계십니다.
반면에 교회 팔아먹고 사기치는 목사, 장로들도 있습니다.
법정 스님 말씀 중에 “세상에 중이 많다 보니 별 놈의 중이 다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기독교인이 많다 보니 별 놈의 기독교인도 다 있는 것입니다. 무신론자 유영철이 연쇄살인을 했다고 무신론자들은 다 연쇄살인자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경상도에서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경상도 사람들을 다 강도 취급하거나, 전라도에서 강간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라도 사람들은 다 강간범 취급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처럼 한심하고 교만한 덜 떨어진 기독교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7. 교회는 세금을 안 내도 된다?
현행법상 성직자는 소득세 면제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소득에 대해 자진신고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00명 교인 미만의 교회 목회자들은 세금은 커녕 생활고에 시달릴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직자에 대한 갑근세 부과를 의무로 하지 않는 것은 목회활동을 근로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것과 이미 소득세를 낸 성도들의 기부금에 의해 주어지는 사례비에서 소득세를 내게 되면 이는 이중과세에 해당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직자의 세금에 대해 일반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소위 말하는 대형 교회들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목회자들에게 세금에 대한 부담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경제 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는, 생활수준이 중산층 이상인 대형 교회 목사님들 중에도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비영리 단체로서 과세 면제에 대한 혜택 아래 교회사용 목적 외의 부동산 등을 통한 수입의 전용 등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자청년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교회가 이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온 정성을 다해 주위의 가난한 이웃을 도왔다면 교회가 세금 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반대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사회 앞에 바르고 당당해야 합니다. 법이 규정하고 있지 않더라도 교회의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야할 세금은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세금은 스스로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많은 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8. 기독교는 독선적이다?
진리는 독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1 + 1 = 2 라는 진리가 융통성을 발휘해 3도 되고 4도 될 수는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에게는 성경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타 종교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종교를 무시하거나 박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신념으로 타협될 수 없는 것입니다. 조상님들에 대한 제사에서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로 욕을 많이 먹는데, 이는 성경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은 활동할 수 없으며 잠자고 있다가 예수님 재림 시에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조상님에 대해서 불경해서가 아니라 절을 하는 행위가 결코 돌아가신 조상님을 기리고 감사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9. 기독교 전파 이전에 죽은 우리의 조상들은 모두 지옥에 간다?
이는 정말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오해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돌아가신 우리 조상들, 혹은 평생에 한 번도 예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야 한다면 어찌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0-31)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행 14:16-17)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19-20)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2:14-16)
위의 성경 구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도 우주의 질서와 하나님의 능력이 깃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등등 하나님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양심이 법이되고 기준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성경적인 질문이 있겠지만 최소한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노력도 없이 본인의 지식과 상식 아래 이해되지 않으면 무조건 비난을 쏟아 놓는 자세는 지양 돼야 할 것입니다.
IQ 150인 사람이 3초 안에 푸는 문제를 IQ 100인 사람은 평생 못 풀 수도 있습니다. 한 낱 인간의 능력에서도 이 같은 차이가 나는데 전능하신 신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이해한 후에 인정하겠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교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0. 순교하면 천국 간다면서 왜 슬퍼하느냐?
초청 받아 유학 가는 사람들도 공항에서 웁니다. 좋은 기회에 자신의 밝은 미래를 위해 기뻐하며 가지만 당장 헤어지는 슬픔에 울게 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이 기쁜 일이라지만 당장 다시는 살아서 얼굴 볼 수 없음에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특히, 이런 말로까지 피랍자와 그 가족들을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어쩜 이렇게까지 인간성이 상실돼 가는 걸까 하는 한탄과 함께...
11. 피랍자들을 어찌해야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최선을 다 합시다. 지금은 어떻게든 피랍자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피랍자들의 잘못을 철저히 따져야 한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국가에서 가지 말라고 한 곳에 가서 국민들께 심려를 끼치고 정부가 곤욕을 치르게 했으니 잘잘못을 따져서 처벌 받을 부분이 있다면 받아야겠지요.
하지만 인명 구원이 우선입니다. 살아 돌아온 후에 지겹도록 따져도 늦지 않습니다.
말썽꾸러기 동생이 가지 말라는 윗동네에 갔다가 불랑배들에게 잡혀 죽도록 맞고 있습니다. 형은 말합니다. “그렇게도 가지 말라는 걸 억지로 우기고 가더니 잘 됐다.” 말하며 욕만 하고 있습니다. 형의 말은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최소한 형의 도리를 했다고는 말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얼마 전, 세 명의 청년이 탈레반을 비롯한 전 세계의 언론에 피랍자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과장된 자료를 제작해 전송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대 초반 청년들의 혈기라 하기엔 너무나 어이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랍자들은 이미 극도의 공포 속에서 생명을 위협 받고 있습니다. 그 가족들 또한 밤잠을 못 이루며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눈물로 지새고 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다 한들 더 이상 무슨 징계가 더 필요하고 얼마나 더 많은 비난을 받아야 합니까?
피랍자와 가족들의 난도질 된 상처 위에 소금을 뿌려대며 조롱하는 것이 그리도 정의로운 행동이며 그리도 자랑스러운 행동입니까?
조승희가 벌인 어이 없는 참극 앞에 미국인들은 총기구입 절차 등에 대한 재고 및 소위 왕따 학생들에 대한 관리를 문제 삼았지 민족적 문제로 한국인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작금의 피랍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난과 네티즌들의 행태 앞에서는 한국인에 대해 같은 민족 같은 형제에 대해 어찌 저럴 수 있냐며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금번 피랍 사태에 대한 본질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비난을 그치고 피랍자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그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말씀은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구하자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21명 피랍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무고한 다른 생명들이 희생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무조건적인 비난의 자제, 탈레반에 메일을 보내는 등 무모한 행동의 자제, 피랍자 가족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무사귀환을 기원해 주는 등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을 통해서 그들의 무사귀환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사태로 인해 야기된 무조건적인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비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조금이나마 해소되고 누그러지기를 바라며 글을 올립니다
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 오늘도기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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