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욕심도
2007. 5. 4. 20:13ㆍ선교자료/1.글로벌선교회
최덕훈
· 총신대학교 졸업
· 동 신학 대학원 졸업
· 육군 군목
· 부산 수영로 교회 부목사
· 울산 중남교회 담임목사
· 서울 람원교회 담임목사
· 현, 울산남교회 담임목사
· 총신대학교 졸업
· 동 신학 대학원 졸업
· 육군 군목
· 부산 수영로 교회 부목사
· 울산 중남교회 담임목사
· 서울 람원교회 담임목사
· 현, 울산남교회 담임목사
거룩한 욕심도
선교는 과연 중단될 수 없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어떤 여건과 상황 속에서도 선교는 계속해야 할 당위성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계획하고, 실행하며, 후원하는 제반 일에 기도와 물질과 사람으로써 감당되어야 합니다. 이런 선교를 감당함에 가장 중요한 도구가 있다면 첫째는 교회와 성도요, 둘째는 헌신된 선교사들입니다.
성경에는 ‘열심’이 많이 나옵니다. 주를 위한 열심을 거룩한 욕심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열심은 거룩한 욕심이십니다.
여호와의 열심은 ‘성도들을 구원하는 문제와 메시야를 보내시는 문제’에 대하여 특별히 집중됩니다. 얼마나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입니까? 왕하19: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고 했으며, 사9:7, ‘그 정사와 평강이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큰 열심을 내셨는지, 교회가 교회되게 하시는 일에 나섰습니다.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성전을 청결케 하실 때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열심입니다. 열심을 내면 낼수록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경우가 있으며, 열심을 내면 낼수록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문제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경우든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경우든지 한결같이 하나님을 위한 선한 열심 또는 거룩한 욕심으로 여기고 일한다는 사실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이스라엘의 경우가 한가지 예입니다. 롬10:2,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회개하기 전의 바울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빌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고 했지 않습니까?
물론 신실하고도 꼭 필요한 열심도 성경은 기록합니다.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는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위한 열심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성도가 성도되는 중요한 목표중의 하나는 딛2:14, ‘선한 일에 열심내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도구들인 교회와 선교사들이 이 열심의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갈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 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좋아한다, 본이 된다, 충성한다, 열심낸다, 힘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역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이런 열심을 위한 욕심을 버릴 때에 열심을 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풀어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일은 잘하려는 욕심을 버릴 때에 잘 할 수 있고, 성공하려는 열심을 버릴 때에 성공할 수 있다는 역설적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의 말을 잘 구별해 보십시오. ‘교회를 위한 열심이 나를 삼켰다’와 ‘교회를 위한 열심이 교회를 삼켰다’는 말씀입니다. 전자는 주님의 열심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결국은 교회를 망치는 열심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선교에 적용해 봅니다. ‘선교를 위한 열심이 나를 삼켰다’와 ‘선교를 위한 열심이 선교지를 삼켰다’입니다. 당연히 전자는 선교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한 모습입니다만 후자는 열심을 가지고 선교했으나, 많은 폐해와 방해적 요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사실은 이런 열심을 다같이 ‘거룩한 열심 또는 거룩한 욕심’으로 치부한다는데 있습니다.
목사는 설교를 잘 하려는 욕심을 버릴 때에 설교를 잘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선교사는 성공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오히려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부언한다면, 목사는 대접받으려는 욕심을 버릴 때에 대접받을 수 있고, 선교사는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버릴 때에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역설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런 역설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선교지에 나가서 선교하는 자는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를 대하는 첫 번째 안목이 선교사를 통하여 정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실수가 기준이 되고, 그들의 오류가 표준이 된다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송구한 일이 되겠습니까? 처음의 인식을 재정립하기 위하여서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야 합니까?
선교사는 거룩한 욕심이라는 미명아래, 무슨 일이든지 열심만 내면 된다는 망상을 버려야 합니다. 겸손하게 배울 줄 알고, 겸손히 자신의 무지와 결점을 보충하려고 하는 열심을 배양해야 합니다. 당분간 선교지의 선교대상들은 선교사들의 오류와 잘못을 모를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피난처가 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선교사들의 소위 ‘거룩한 욕심’이 선교지를 삼켜버리면 곤란합니다. 열심도, 욕심도, 조화되고 조절될 때에 아름답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언제든지 좋은 일’이라고 해서 ‘언제든지 열심 내는 것’이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선교사를 믿고, 신뢰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자신의 좌표를 언제나 분명히 하는 절제의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출처: GM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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