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
2006. 9. 6. 22:42ㆍ목양자료/4.기도자료
본문: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시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였더라"
본문에 등장하는 야베스라는 이름은 미국의 브루스 윌킨스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쓴 이후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야베스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짤막하게 유다 자손임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 두절뿐입니다. 그래서 야베스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과 그의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서 야베스는 태어날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뜻은 고통,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난산해서 죽을 뻔하며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지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이름을 지을 때 의미나 뜻을 부여해서 지었습니다. 딸을 많이 낳는 집에서는 이제 딸은 그만 낳으라는 뜻에서 말순이, 끝순 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름을 지을 때 뜻을 부여해서 짓습니다. 성경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지어주셨습니다. 아브람은 그냥 '아버지'인데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장차 아브라함을 사용하시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고 민족의 아버지로 사용하시려고 그의 이름을 우주적인 차원의 이름으로 고쳐주십니다.
또 그 아내 사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 그것은 걍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래도 '사라'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도 우주적이고 공적인 뜻이 부여된 이름입니다. 또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 먼저 나오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후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도 고쳐 주십니다. “발꿈치를 잡다”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십니다. “하나님과 겨룬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야곱을 민족을 위해서 사용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민족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사기꾼이라는 냄새를 풍기는 야곱이라는 이름으로는 안 된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은 이렇게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의 주인공 야베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 아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 해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베스가 태어날 때 뿐 아니고 그가 자랄 때도 아주 고통스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 말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자랐다는 말입니다. 아주 초라하게 자랐다는 말입니다. 야베스는 그 많은 백성들 중에서 가장 빈약하고 초라하고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후에 야베스는 크게 성공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야베스는 “그 형제들 보다 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야베스가 후에 크게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서 마침내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야베스는 오늘 성공을 바라는 현대인들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서 드디어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야베스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공했습니까. 이 야베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 만나교회도 사람들 눈에는 보잘것없는 작은 처소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역의 계시는 야베스처럼 귀하고 웅장하고 은혜 넘치는 사역의 장으로 만드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하면서 우리 모두 귀하고 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미래의 소망
본문 제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확고한 소망이자 인간의 확신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이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현재의 환경은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고 어려움이 있고 초라하고 빈약합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그런 환경을 보지 않고 먼 훗날을 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내 지역을 넓혀 주소서" 아멘
사람은 누구나 이 같은 미래에 대한 꿈과 계획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이런 기대나 꿈이나 소망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기도하게 됩니다. 키엘 케골이라는 철학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다름 아닌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비전이 없는 삶이고 기대도 꿈도 희망도 없는 깜깜한 미래의 삶을 말합니다. 소망의 빛이 없는 사람입니다. 노숙자도 희망이 있습니다. 다 죽어가는 말기 암 환자도 실날같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 같은 기대나 비전이 없으면 희망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해 말경에 두 아이를 한강에 내다 버린 비정의 젊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내는 가정을 버리고 아이는 짐으로 고통으로 남았습니다. 그 마음 어디에도 소망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또 근래에 와서 자살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해에는 1만 3천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딜 봐도 희망이 없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약을 먹고 불을 질러 죽고 철길에 떨어져 죽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을 것입니다. 산 소망의 믿음이 없었던 게 문제입니다. 절망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꿈과 기대와 소망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면 내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지경(地境)이란 다름 아닌 삶에 터전입니다. 이 터전을 넓혀달라고 소리쳐 외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제발 나의 삶에 터전을 넓혀달라고 아우성치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2002 여름내내 외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꿈이 있으면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모두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는 반드시 이 희망과 꿈과 비전과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야베스에게는 이 희망이 있었습니다. 우리 만나공동체 모두는 하나님께 소리쳐, cring-out하여 우리의 기대와 소망을 들어주실 때까지 우리의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2. 소리쳐 외치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본문 제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울면서 외쳤다고 원문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머리를 두 무릎에 묻고 기도했으며, 한나는 서서 술 취한 듯 넋 나간 사람처럼 기도했습니다.
지금 야베스가 처한 환경은 어려움과 고난과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소망을 이루고자 울면서 소리쳐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는 크리스챤만이 갖는 축복이자 소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굉장한 축복입니다. 기도의 사람이라고 불러지는 조지 뮬러
(1805-1898)는 영국에서 3천 명 이상의 고아를 돌본 목사로서 ‘사랑의 아버지’라 칭송받았습니다. 평생 5만 번 이상을 기도 응답을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10분전에 고아들의 식사가 도착되는 기적을 그는 수없이 맛보았습니다. 할렐루야~~~
조지 뮬러는 자신이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아침 일찍 신약 성경을 처음부터 읽고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 말씀 속에 있는 주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간단히 생각해 본 후, 바로 그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매 구절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축복을 찾았다. 공적사역이나 설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영혼을 위한 양식을 얻으려고 축복을 찾았다.”이어서 말씀을 묵상한 결과를 말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통을 하는 데 이르게 되고, 그 귀중한 말씀 속에서 내게 주신 것들에 대해 나의 아버지께 이야기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큐티입니다. 우리 만나인도 큐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이고 은혜이고 특권입니다. 어떤 때는 답답할 때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격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조용히 기도해서는 시원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산에 가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소리를 높여서 주여, 여호와여, 아버지여 하고 기도하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확신도 주어집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우리들이 어디 가서 누굴 붙잡고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네 입을 크게 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부르짖으면 응답하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야베스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가 그 상황에서 기도할 때 조용조용히 기도했겠습니까. 아마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3.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제 야베스는 마침내 응답을 받습니다. 9절을 보면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응답하셔서 만족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뜻과 기대를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야베스는 아주 초라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우리 만나인은 무엇보다도 응답받는 기도가 있어야 할 줄압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나라를 걱정하면서 성전에서 뜨겁게 기도를 합니다. “이 백성을 기억하소서”. 그때 환상 속에서 하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가 나타납니다. 그 보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옷자락이 자신이 앉아있는 성전지붕을 덮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지키고 있다" 는 바로 그 말입니다.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기도생활에는 이런 응답받는 생활이 주어져야 합니다.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전에 나가 “나에게 아들을 주세요, 주시면 나실 인으로 바치겠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나실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실인이 되면 평생 독주를 마시면 안 되고 몸에 병들어도 약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죽은 시체를 보거나 만져도 안 됩니다. 그 말은 어머니가 죽어도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온전히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한나는 그렇게 서원하면서 내 몸으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독교인의 기도가 어느 것은 절실하고 어느 기도는 지나가는 기도가 되겠습니까 마는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는 아이없는 여자의 애달라는 기도가 아닌가 합니다. 한나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으면 음성도 없이 서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술취한듯한 모습으로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이 그 모습을 보고 오늘도 술 취했구나 하고 제발 술을 끊으라고 큰소리로 책망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때 한나의 심정을 이해한 엘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아들 사무엘을 낳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성경에서 이 "평안히 가라"라는 말은 19회 나타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인데 바로 '네 뜻을 다 이루었느니라' 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눅 8:48)라고 하심으로서 믿는 믿음이 구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만나인은 모두가 자기의 소망을 울며 소리쳐 기도하여 야베스처럼 기드온처럼 엘리야처럼 응답받으시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기원드립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야베스라는 이름은 미국의 브루스 윌킨스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쓴 이후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야베스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짤막하게 유다 자손임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 두절뿐입니다. 그래서 야베스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과 그의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서 야베스는 태어날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뜻은 고통,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난산해서 죽을 뻔하며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지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이름을 지을 때 의미나 뜻을 부여해서 지었습니다. 딸을 많이 낳는 집에서는 이제 딸은 그만 낳으라는 뜻에서 말순이, 끝순 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름을 지을 때 뜻을 부여해서 짓습니다. 성경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지어주셨습니다. 아브람은 그냥 '아버지'인데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장차 아브라함을 사용하시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고 민족의 아버지로 사용하시려고 그의 이름을 우주적인 차원의 이름으로 고쳐주십니다.
또 그 아내 사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 그것은 걍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래도 '사라'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도 우주적이고 공적인 뜻이 부여된 이름입니다. 또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 먼저 나오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후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도 고쳐 주십니다. “발꿈치를 잡다”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십니다. “하나님과 겨룬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야곱을 민족을 위해서 사용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민족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사기꾼이라는 냄새를 풍기는 야곱이라는 이름으로는 안 된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은 이렇게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의 주인공 야베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 아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 해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베스가 태어날 때 뿐 아니고 그가 자랄 때도 아주 고통스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 말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자랐다는 말입니다. 아주 초라하게 자랐다는 말입니다. 야베스는 그 많은 백성들 중에서 가장 빈약하고 초라하고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후에 야베스는 크게 성공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야베스는 “그 형제들 보다 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야베스가 후에 크게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서 마침내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야베스는 오늘 성공을 바라는 현대인들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서 드디어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야베스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공했습니까. 이 야베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 만나교회도 사람들 눈에는 보잘것없는 작은 처소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역의 계시는 야베스처럼 귀하고 웅장하고 은혜 넘치는 사역의 장으로 만드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하면서 우리 모두 귀하고 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미래의 소망
본문 제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확고한 소망이자 인간의 확신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이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현재의 환경은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고 어려움이 있고 초라하고 빈약합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그런 환경을 보지 않고 먼 훗날을 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내 지역을 넓혀 주소서" 아멘
사람은 누구나 이 같은 미래에 대한 꿈과 계획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이런 기대나 꿈이나 소망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기도하게 됩니다. 키엘 케골이라는 철학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다름 아닌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비전이 없는 삶이고 기대도 꿈도 희망도 없는 깜깜한 미래의 삶을 말합니다. 소망의 빛이 없는 사람입니다. 노숙자도 희망이 있습니다. 다 죽어가는 말기 암 환자도 실날같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 같은 기대나 비전이 없으면 희망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해 말경에 두 아이를 한강에 내다 버린 비정의 젊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내는 가정을 버리고 아이는 짐으로 고통으로 남았습니다. 그 마음 어디에도 소망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또 근래에 와서 자살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해에는 1만 3천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딜 봐도 희망이 없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약을 먹고 불을 질러 죽고 철길에 떨어져 죽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을 것입니다. 산 소망의 믿음이 없었던 게 문제입니다. 절망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꿈과 기대와 소망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면 내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지경(地境)이란 다름 아닌 삶에 터전입니다. 이 터전을 넓혀달라고 소리쳐 외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제발 나의 삶에 터전을 넓혀달라고 아우성치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2002 여름내내 외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꿈이 있으면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모두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는 반드시 이 희망과 꿈과 비전과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야베스에게는 이 희망이 있었습니다. 우리 만나공동체 모두는 하나님께 소리쳐, cring-out하여 우리의 기대와 소망을 들어주실 때까지 우리의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2. 소리쳐 외치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본문 제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울면서 외쳤다고 원문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머리를 두 무릎에 묻고 기도했으며, 한나는 서서 술 취한 듯 넋 나간 사람처럼 기도했습니다.
지금 야베스가 처한 환경은 어려움과 고난과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소망을 이루고자 울면서 소리쳐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는 크리스챤만이 갖는 축복이자 소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굉장한 축복입니다. 기도의 사람이라고 불러지는 조지 뮬러
(1805-1898)는 영국에서 3천 명 이상의 고아를 돌본 목사로서 ‘사랑의 아버지’라 칭송받았습니다. 평생 5만 번 이상을 기도 응답을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10분전에 고아들의 식사가 도착되는 기적을 그는 수없이 맛보았습니다. 할렐루야~~~
조지 뮬러는 자신이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아침 일찍 신약 성경을 처음부터 읽고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 말씀 속에 있는 주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간단히 생각해 본 후, 바로 그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매 구절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축복을 찾았다. 공적사역이나 설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영혼을 위한 양식을 얻으려고 축복을 찾았다.”이어서 말씀을 묵상한 결과를 말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통을 하는 데 이르게 되고, 그 귀중한 말씀 속에서 내게 주신 것들에 대해 나의 아버지께 이야기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큐티입니다. 우리 만나인도 큐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이고 은혜이고 특권입니다. 어떤 때는 답답할 때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격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조용히 기도해서는 시원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산에 가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소리를 높여서 주여, 여호와여, 아버지여 하고 기도하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확신도 주어집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우리들이 어디 가서 누굴 붙잡고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네 입을 크게 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부르짖으면 응답하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야베스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가 그 상황에서 기도할 때 조용조용히 기도했겠습니까. 아마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3.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제 야베스는 마침내 응답을 받습니다. 9절을 보면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응답하셔서 만족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뜻과 기대를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야베스는 아주 초라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우리 만나인은 무엇보다도 응답받는 기도가 있어야 할 줄압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나라를 걱정하면서 성전에서 뜨겁게 기도를 합니다. “이 백성을 기억하소서”. 그때 환상 속에서 하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가 나타납니다. 그 보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옷자락이 자신이 앉아있는 성전지붕을 덮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지키고 있다" 는 바로 그 말입니다.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기도생활에는 이런 응답받는 생활이 주어져야 합니다.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전에 나가 “나에게 아들을 주세요, 주시면 나실 인으로 바치겠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나실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실인이 되면 평생 독주를 마시면 안 되고 몸에 병들어도 약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죽은 시체를 보거나 만져도 안 됩니다. 그 말은 어머니가 죽어도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온전히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한나는 그렇게 서원하면서 내 몸으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독교인의 기도가 어느 것은 절실하고 어느 기도는 지나가는 기도가 되겠습니까 마는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는 아이없는 여자의 애달라는 기도가 아닌가 합니다. 한나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으면 음성도 없이 서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술취한듯한 모습으로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이 그 모습을 보고 오늘도 술 취했구나 하고 제발 술을 끊으라고 큰소리로 책망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때 한나의 심정을 이해한 엘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아들 사무엘을 낳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성경에서 이 "평안히 가라"라는 말은 19회 나타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인데 바로 '네 뜻을 다 이루었느니라' 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눅 8:48)라고 하심으로서 믿는 믿음이 구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만나인은 모두가 자기의 소망을 울며 소리쳐 기도하여 야베스처럼 기드온처럼 엘리야처럼 응답받으시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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