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와 타종교 이해
2006. 7. 4. 21:55ㆍ선교자료/2.중국선교자료
중국선교와 타종교 이해
이동주 교수
Ⅰ. 서론
먼저 부족한 저를 너무도 귀한 자리에 서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적도 없고 다녀온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배워야 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선교학을 한 관계로 이 자리에 서게된 것 같습니다. 먼저 성경말씀 한 귀절 을 읽고 강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회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이 시간에는 과거의 중국 종교의 특징과 그 상황들 조명해 봄으로써 선교전략에 대한 힌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선교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과거의 선교사들이 어떻게 중국에서 선교했는가를 거울 삼아보고, 중국종교라 할 수 있는 유·불·선교의 세계관과 그들의 공통점을 보겠습니다. 특히 유교의 종교철학이나 무속신앙과의 결합, 예수회 선교단체가 조상숭배문제 등과 같이 부딪쳤던 문제들은 오늘날 중국선교를 희망하는 우리와도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하나의 case study로써 깊이 다루었으연 합니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세계관과 그들의 선교 발자취를 더듬어 본 다음, 선교의 전략적 이론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기독교를 중심으로 중국의 종교가 어떻게 확산되어 있었는가를 살펴 봅시다.
Ⅱ. 중국의 선교역사
1. 경교의 선교
중국선교하면 네스토리우스, 경교의 선교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경교는 7C (635년) 당나라때 중국의 중심부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 자료로는 17세기에 발견된 경교비와 돈황석굴에서 “하나님께 영광" (글로리아 인 엑셀시스/Gloria in Exelsis) 이라는 삼위일체를 찬미하는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635년에 알로펜이 장안시에 도착해서 황제의 숭인을 받고 포교활동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2세기 동안 존속된 것으로 보고있는데, 당시 교회의 형태는 수도원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수도원적 성격이 불교적인 중국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9C(845년)에 도교신자들이 불교와 경교를 박해하연서 lOC에 이르러서는 (어느 수도숭에 의하면) 경교신자를 하나도 발결할 수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후 인도, 중국까지 여행하다가 중국에서 세상을 떠난 포르투갈 사람인 프랜시스 싸비어 (Francis Xavier)의 선교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싸비어는 포르투칼 영토인 마카오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당시 마카오는 교역소였기 때문에 하충민과 혼혈아가 많았고 종교도 혼합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마카오는 선교의 출발점이요, 종착지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마태오 리치에 대해서 언급해 보겠습니다.
마태요 리치는 중국의 ‘천자’인 황제를 잘 섬기지 못하면 입국할 수 없음을 알고 중국인의 우월감에 맞춰서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 선물을 바치기 위해 먼 서방에서 왔습니다. 저는 중국의 훌륭한 제도와 명성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폐하의 한 시민으로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리치는 시계수선, 지도제작, 성경번역 등의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번역시 대체로 용어가 어려웠습니다. 예수회에서 선택한 하나님에 대한 번역 즉 ‘상제’ 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던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또한 리치는 전통종교에 대해서 아주 신중했고 존경하는 태도를 취해서 공자에 대한 공경의례 참여와 조상숭배, 신주까지도 긍정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는 점진적으로 스며들기 위한 정책을 쓴 것 입니다. 그리하여 마태오 리치가 사망할 때는 예수회에 2천명의 회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리치 사망 후, 후계자로서 요한 마담 살폰벨 (J. Adam Shall von Bell)이 본국에서 신용을 얻어 ‘홈천감’이라는 지위를 얻었으나 본국인들의 시기를 사서 사형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바람에 5명의 신자가 처형되고 모든 산자들은 광통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1661년 14살의 강희제가 등극했는데 그는 예수회에 ‘관용령’ 을 내렸습니다. “유럽인은 소란하지 않고 해를 끼치지 않는다. 교리에는 거짓 종파 와 공통점이 없고 선동내용도 없다.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성전에 들어가 의식을 거행하고 아무도 반대하지 말라" 그리고 1685년 중국의 첫번째 로페즈(Lopeg)의 감독(로웰 사워(Lower Tsao) 이후 20세기까지는 중국에 감독이 없었습니다. 1615년 교황 바오로 5세는 중국어 미사를 허락했으나, 1688년에 중국교회는 미사에 라틴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유는 중국인의 열등의식 때문에 프란체스칸들과 똑같이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라틴어 미사를 통한 복음전도는 어려웠숨니다. 그러는 가운데 강회제기 교황에게 “공자경의는 단순히 입법자에 대한 예후일 뿐이다. 조상을 경외하는 것은 만인의 사랑과 선행의 표현과 기념이다. 천(天)에 대한 제사는 창조주이며 수호신이신 우리의 주권자에게 하는 것이다" 라고 떤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1704년 로마교황이 “하나닝을 천주라 하는 것은 허락할 수 았다. 그러나 공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과 조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그리고 조상의 위패는 간직해도 좋지만 이름외에는 기록할 수 없다’라고 교령을 내렸습니다. 교황은 당시 트루눈(C. M.d. Tournon)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결국 이 트루눈의 파견으로 교황이 예수회로부터 신봉을 받고 있다는 사살을 중국 황제에 알리는 결과가 되어 트루눈은 물론이고 중국의 예수회 특사가 다 추방 되었습니다. 1742년 베네딕트 14세 교황이 다시 1704년의 결정을 지지하면서 중국의 기독교인은 또 다시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1724년 용정황제의 “북경 에 있는 예수회 수도사는 조정에 유효하므로 남아있게 하고 지방에 있는 모든 선교사는 검거하여 마카오로 추방시켜라”는 칙서에 의해 예수회만 18C까지 북경에 머물 수 있었고, 선교사의 수와 교인수는 점점 줄어 들고 교회는 황폐해지고 순교자들은 점접 늘어갔습니다. 앤드류 려(Ly)의 일기를 보면 당시 중국인 사제가 너무 적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수준 또한 낮아서 신앙생활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질병과 모험적인 여행과 탄압에 죽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세기 천주교는 거의 다 망가져서 새로 시작해야하는 형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 개신교
이제 개신교의 중국선교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스페인에서 타이완 통치권을 인수하면서 화란은 타이완에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중국해적들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당시 중국은 기독교를 거부했을 뿐만아니라 중국어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외국인은 마카오, 캔톤 둥지의 포르투칼령에서만 거주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25년동안 캔톤에 숨어서 살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은 중국어를 잘해서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이 되어 드디어 개신교 선교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성경번역 사업에 착수하였습니다. 1813년 신약. 1819년엔 구약을 번역했고, 점차 중국은 다른나라의 정치적. 상업적 압력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1893), 그러한 와중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아편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반대하연서 생긴 영국과 중국간의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 갈 수 있었지만, 중국인들은 기독교를 군함과 대포를 쫓아 들어온 것으료 여기게 되었습니다. 중국어 번역시 어려웠던 것은 어느 계층의 수준에 맞는 문체를 쓰느냐였고 결과적으로 각각 두개의 성경번역서가 1852년 학자층을 상대로, 1862년에 좀 낮은 계충을 상대로한 번역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1853년 중국전도협회를 통해 중국에 갔는데, 후에 그 곳에서 나와 중국내지선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의 선교원칙은 첫째 초교파적이고, 둘째 보수신학이며, 세째 간단한 교리선언으로 누구든지 선앙적 확신만았으면 선교사로 동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째 공식교육이 부족하더라도 문호를 개방한 것이어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다섯째 선교회 지부는 반드시 중국내에 두는 정책과, 여섯째 선교사의 중국식복장 그리고 가급적 선교사 자신을 중국인과 동일시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일곱째 교육사역, 의료사업보다 복음전도가 일차적 임무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드슨 테일러는 본국에서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불성실한 동료들, 좋지못한 건강, 그리고 아내를 잃는 슬픔(1870) 둥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서북변방의 원주민 선교를 하는 등 3개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에 641명의 선교사를 파송 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데이비드 힐 (David Hill) 선교사의 증거를 통해 아편중독자 시 (Hsi)가 목사가 되어 마약환자 수용소를 차리고 의약품과 기도로 그들을 고쳐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19세기 말 중국은 외형상 기독교에 완전히 점령당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선교 전략 중 웨일즈 침례교 출신인 티모디 리챠드(Thimothy Richard)의 전략이 특정적인데, 그는 중국인 개개인을 회십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대두되는 지식충의 사상과 정신속에 기독교적 사상을 침투시켜 언젠가는 중국전체 생활을 기독교적 생활방식으로 철 저히 변화시키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모든 지식이 구속사업에 보탬이 된다고 여겨서 기독교및 일반지식을 보급하는 협회가 만들어 졌습니다. 19세기말 중국인은 영어와 근대지식을 열망하게 되었고 이러한 중국인을 위해 여러 기독교 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상해, 남경, 북경, 광동 등) 그리하여 스티븐 니일(Stephen Naill)의 통계에 의하면 19세기말 기독교 선교사는 1500명이 되어 500개의 지역에 거의 모든 주마다 배치되었다. 추종자는 약 50만명이었고, 그중 정식 교인은 약 8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점차 반외세 감정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선교사들이 위협을 당하게 되었고 특히 교황청에서 내린 비판 때문에 많은 카톨릭 신부들이 순교당했습니다. 그 예로 1900년 6월 24일에 모든 외국인은 다 죽이라는 칙령이 내렸는데 일본인이 침략하는 바람에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배도자들이 생겼고 외국인을 보호하다 순교한 내국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제 중국 그리스도인들은 개인 구원이 아니라 중국이 새로워지는 일에 관심이 일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정치적 표현에 따라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고, 공화정이 들어서 기독교인 손문이 정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초의 중국의 그리스도인은 주로 소수 엘리트층 (1%)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컸던 것으로 봅니다. 그 후 중국은 장개석이 등장하면서 맑스주의냐 기독교냐는 문제가 생겼고, 1937년 일본침략에 이어서 1949년 일본의 패망에 따라 중화인민민주공화국이 선포된 것입니다. 이렇게 공산화되고 1960년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종교인들은 비참하게 핍박당하고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고, 18세 미만은 종교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후 중국 기독교는 수천개의 가정교회로 형성되었습니다. 1987년 페트럭 존스톤(Patrick Johnston)이 오퍼레션 월드(Operation World) 에 나타난 중국인 의 종교현황 통계에 의하면 중국인 중 대략 무종교 50%, 유,불, 선교 28%, 무속 종교 2%, 기독교 5% (개신교:4.3%, 가정교회:3천만~ 5천만)라고 합니다‘
3. 유대교
유대교도 당나라때 역시 상업적으로 광동에 들어왔는데 송나라때는 회당(Synaqoge)이 있었다고 합니다. 1605년 마태오 리치 당시엔 교회와 회당이 공존했고, 유대인들은 중국인과 혼인을 해서 중국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할례, 씻는 문제,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등 중국인과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런던선교회 때문에 유대교는 빈약해져 흩어져 버렸고 히브리어 조차 통용이 되지 않았으며 50년 동안 랍비없이 유지되었는데 후에는 가죽성경(두루마리)까지 영국에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마침내 1851년 회당이 철거되고, 1866년에는 중국에서 유대교가 완전히 사 라진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4. 이슬람교
이슬람교가 중국에 들어온 경유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독일학자 아이히호른 (Eichhorun)은 당나라때 광동에 상인들이 도착하면서 들어왔다고하고, 또 육지로 군인들이 도착하면서였다고 합니다. 「중국 선교 핸드북」에서 죠나단 챠오(Johunathan Chao) 목사님은 경태종때 모하메트의 친척이며 제자인 와카스가 광주에 왔고, 당고종때(651년)는 아라비아에서 사절을 파견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록산의 난때 수천의 군사가 파견되면서 이슬람교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몽고시대때 아라비아 상인들이 중국 남송 해안지방에 많이 드나들었고, 이슬람교의 학교도 셜립되었습니다.(13C)
원나라때 몽고인 다음으로 회교도인을 존중히 여겼고 청나라때는 이슬람교가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이들 이슬람교인들의 강점은 가정생활과 종교생활이 잘 융화되어서 사회 적응력이 높고 단결력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차오 목사님에 의하면 공산화 이전 신도가 5천만이었다고 합니다. 이슬람교의 교파는 구교파, 신교파, 신홍교파 이 3교파로 나뉘는데, 구교파는 코란 중심이며 문관이라는 교주가 있고 신교파는 개혁파라 할 수 있고, 신홍교파는 1910년초 코란을 과학적 시각으로 해석한 교파를 말합니다.
Ⅲ. 중국 종교의 세계관(종교철학)
1. 주역적 세계관
중국의 세계관이 나타나있는 가장 오래된 책이 바로 「주역」입니다. 미신적인 미술, 점술까지 포함되어 있는 이 「주역」은 중국인들의 가장 오래된 지혜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사상은 노자, 공자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샤머니즘권에서 나타난 하나의 철학체계로서 중요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자도 주역을 해석하여 후세에 전달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유교의 경전이 되고 있습니다. 주역에 나타난 사상은 존재론, 음양이론입니다. 이 세계와 우주의 생성 뿐아니라 인간, 신, 귀신까지도 모두 음양의 조화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역에 공자가 토를 단 것을 보면 “태초에 태극이 있었는데 태극에서 양의(음양)가 났다. 그리고 양의에서 사상이(춘하추동), 이 사상에서 팔패가 나오고, 팔패에서 천하만물이 나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역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이 음양의 조화에 의해서 생겨난 일종의 ‘귀신’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오늘날 유학자들은 하나님과 ‘귀신’을 혼돈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상제가 제일 높은신이고 그 밑에 잡신들이 있습니다. 다신론 또한 무신론자들에게는 자연적인 원칙, 윤리적인 원칙이 되고 창조가 진화론적인 것으로 왜곡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2. 도학적 세계관
도학이란, 유교와 도교의 혼합형인 ‘신유교’를 말합니다. ‘도’는 노자에 의해서 절대시 된 개념으로서 신유교학자들, 즉 송때의 성리학자들이 ‘도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초기의 유교는 당시 지도자들이 부패, 탐관오리 등으로 타락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윤리적인 면에 관심이 많았던 공자가 어떻게 하면 바른 지도자가 될 것인가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에 관한 것보다 윤리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해 무관심하던 유교가 도학에 와서는 세계관과 인간관,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자(朱子)의 「태극도셜」에 그 개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태극은 음양으로 되어있고 태극을 또한 무극이라고 합니다. 태극과 무극은 같은 것입니다. 주자의 이러한 구상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노자는 「도덕 경」에서 도를 ‘무명’, 즉 개념이 없는(알 수 없는) 절대자로 설명하는데 ‘도’는 가명입니다. 그리고 유교엔 성리학자들이 발전시킨 ‘이기론(理氣論)’ 이 있습니다. 이기론은 통일되지 않은 학설 때문에 굉장히 복잡합니다. 우리나라의 율곡과 퇴계도 이기론을 가지고 당파싸움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주자는 음양이 기에 속한 것으로 보고 기가 뭉치변 만물이 생기고 기가 흩어지면 만물이 사라져버린다고 믿었습니다.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子)는 ‘이’를 태극과 동일시 하여 세상 운명을 좌우하는 신적존재로 보았습니다. 즉‘ 인격화하면 ‘신’ 이고 비인격화하면 ‘태극’ 입니다. 또 주자(朱子)는 사람을 ‘인극’ 이 과해서 태극과 같은 궁극자와 동일시 하였논데 그것은 범선론적 세계관을 기초로 한 신인동격 사상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이 접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의 인간완성 즉 자기실현자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3. 도교적 세계관
도교의 특성은 ‘도’ 가 근원자이기 때문에 천, 상제 등을 ‘도’ 밑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신도 ‘도’ 에서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때 神을 하나의 ‘도’의 생산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도교의 혼합주의는 진시황제가 이루었지만 이미 장자 때 도교는 무속문화에 빠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자는 ‘도인’ 을 가리켜 “이적을 쫓고 불사에 힘을 얻는 초인간적 마술사 같은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성인”의 개념은 공기와 이슬을 먹고 살며 바람을 타며 용을 말로 삼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자의 예술론을 통해서 어떤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의 자의식이 용해되어 버리고 도와 동일시 되어버린다는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북문성이라는 사람이 황제가 만든 음악을 들으면서 체험을 하는데 첫째 두렵고 놀라며 지칠대로 지치며, 그 후에 고독해지고 혼돈되며, 바보같이 되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도와 합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큰 것에 개념을 만드는 것 (무명)에 사로잡히어 저항력을 상실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당이 체험하는 자기 부정과, 귀신에게 사로 잡혀서 죽음과 재생을 체험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나라 때 도인은 주로 바람을 불게하거나 불과 물 사이를 지나가는 마술사로 표현됨으로써 도교는 점점 바늘적 통속 종교로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불교적 세계관
불교적 세계관, 구원관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보아야겠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중국에서 확대되어 다르게 발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교설로는 삼법인, 사성체, 팔정도, 12인연 등이 있습니다.
*삼법인(3가지로 변함없는 진리)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든 존재가 변하므로 불변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
제법무아(諸法無我,) - 모든 법에 아(我) 가 없다.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
열반적정(涅槃寂靜) - 열반에 들어 고요하다. 모든 번뇌와 고통을 끊어 불생불멸의 해탈에 이른다는 것
*사성체
고체(苦諦) - 현상세계가 모두 고통이다.
집체(集諦) - 고통의 원인은 욕망, 집착하는 마음이다.
멸체(滅諦) - 고통을 벗어남, 열반에 이름
도체(度諦) - 열반에 이르는 길
*8정도 - 열반에 이르는 8가지 투 행법
인도의 불교는 중국에 들어가서 도교적인 일원론 및 범신론과 유교적인 유출론과 합쳐지면서 대숭불교로 크게 발전되었습니다. 불교는 본래 무신론적이며 有와 生을 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중국. 대만의 불교는 기복신앙적인 것이 많습니다. Nagarjuna는 열반을 ‘공’ 이라 하였고, 또한 H.v. Glasenap? 나 K. Jaspers는 이 ‘공’을 절대적 허무나 불가지론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추리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이원적 현상을 극복하는 ‘무이(無二)’ 의 신비한 경험적인 사실 경험적인 사실을 말합니다. ‘무이’ 란 일원론으로 나와 절대자가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하는 것. 이것이 무이의 상태입니다. 야스퍼스는 무와 유의 이원적 현상계를 통일하는 ‘무이’의 상태를 ‘포괄자'라 하며, 완전히 논쟁할 수 없고, 무차별하며, 문제가 되지않는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대립과 모순을 극복하고 참과 거짓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포팔자’인 것입니다.
4C에 Asanga도 너와 나, 신과 나, 세상과 나의 대렵적 인식은 망각이며 요가연습을 통해서 이 대렵적 인식을 없애자고 하였고, 이 주체화 대상의 구별의식을 극복한 것이 바로 ‘열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황벽(선불교 학자)은 이 불성을 ‘일심’ 이라 했습니다. 한국 에서는 원효대사가 이보다 약 200년 앞서 ‘일심’ 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일심’이란 무엇입니까? 독일 사람들은 心을 Geist 또는 듣 Nichtgeist, 다른 한편으로는 Weltgeist, 개인영이라고 여러가지들로 해석했는데, 이것은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칼 야스퍼스의 ‘포괄자’ 번역이 타당성이 있습니다. 모든 현상계는 다 착각이며 단수와 복수의 구별을 극복하고 오든 것을 E팔할 수 있는 신비의 상태가 바 로 ‘일섬’ 이고 열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Suzuki나 Gesber와 같은 불교학자는 황벽의 일심을 아마곳에도 없는 것, 즉 안에나 밖에나 중간에도 머물러 있지 않은 ‘공’ 이라고 하고 ‘불성’ 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의 구원관은 한마디로 나의 신격화, 나의 불격화, 자력 구원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신론적이며 일원론적이고 피조물 됨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사상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사해준다는 것이 의미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불도에 심취한 학자들은 자신을 절대시하므로 예수가 죄를 사해주고 구원해 주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를 제외한 동양종교의 공통점은 창조주와 피조물이 없는 범신론입니다. 기독교가 시작과 끝이 있는, 창조와 종말이 있는 일직선상의 역사성을 가지고있는 반면, 불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원형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역사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전략적인 측면에서 볼때, 핸드릭 크래머(Handrik Kraemer)는 중국인 들의 관용과 포용성을 가상적 관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중국인들이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것은 공동체가 파괴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문제가 불타오르면 곧 핍박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관용은 가상적 관용 ; 표면적 관용인 것입니다.
Ⅳ. 예수회의 선교전략
위와 같은 종교적인 터 위에서 어렵게 선교전략을 펴나갔던 예수회의 발자취를 한번 점검해 봅시다. 고대로부터 중국에는 무속신앙이 있고, 백신(만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회생제를 드렸습니다. ‘백신’ 이 란 일월성신, 사방신, 천지산천, 죽은 사람의 혼 등을 다 포함 합니다. 그리고 그 최고신이 ‘상제’ 인데 마태오 리치가 하나님을 상제라 번역하였습니다. 마태오 리치는 또한 과거의 유교와 기독교, 천주교에 대해서는 비슷한 점을 발견했지만 “과거 의 유교는 인간본성에 따라 천주교를 경외하고 천리에 순응하는 종교로서 천주교의 기본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신유교는 무신론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유교학자들의 비위를 상하게했습니다. 리치는 조상제사를 감사와 추모, 애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허락했으며, 산주까지도 조상의 혼이 깃들어 오는 젓이 아니라 산 사람들이 그 마음을 의지하는 것으로 여겨 허락했습니다. 또한 공자 숭배도 공자를 신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선사로 생각해서 감사를 드릴 뿐이고 그에게 기도문을 염하거나 어떤 청원을 드리는 것이 아님으로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리치는 유교를 천주교와 접목시켜 천주가 존재한다는 것, 영혼은 불멸한다는 것,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것, 주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다 설명하려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조상제사가 과연 우상숭배와 분리되느냐하는 점에 있습니다 신유교 신앙에 의하면 사람이 성경(誠敬)하면 귀신이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조상이 거쳐하던 것, 즐거워하던 것, 웃으며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조상 이 목전에 계심을 보는 듯 생각하 게 될때 산화된 기가 다시 소멸됐더라도 당시 뭉쳐져서 격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제사와 정성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효의 측정기준이 바로 제사인 것입니다. 첫째로 생시에 부모를 봉양하고 둘째 부모가 죽은 직후에 상례, 그리고 그후에 제사를 얼마든 규칙적으로 경건하게 드리냐가 바로 ‘효’의 측정기준입니다.
제사와 효의 문제 조상제사가 효냐, 우상숭배냐에 대해서 오늘날까지 논쟁을 계속하였던 그 한쪽만을 지지하고 다른 쪽은 무시하는 경향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효는 좋은 문화이므로 살려야 하고 제사는 우상숭배임으로 허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중국의 종교관은 기독교의 창조와 종말이 있는 일직선적인 세계관과는 달리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는 원형적인 세계관엽니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는 중국종교의 세계관, 신관, 구원관과 하나의 불연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이의 간격은 우리 자신이 ‘성 육신’ 하면서 문화의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그대로 간직하며 왜곡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몇몇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했듯이 말입니다.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어디까지 수용하느냐 하는 것 은 성경말씀과 성령의 조명 없이는 정확히 판단하기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선교의 출발이요, 시행이요, 마침입니다.
우리는 중국 문화권에 들어가서 그들의 공통체를 살리는 일을 해야 하고, 효행을 능가하는 행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효도행위를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현장에서 말과 행실을 통해 참 신앙을 제시해 주어야 하며 중국인 결신자가 핍박을 받을 때라도 그는 그 공동체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 믿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며 효도하는 것이며,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교문화권에서 현지인들의 오해와 불신을 극복해나가며, 속히 충성스런 제자를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교를 계속하게 함으로서 문화적인 이질감을 덜어야 하겠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마술사들이 스스로 나와 그들의 책을 불사르듯(행19:18),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들 스스로 악습과 우상숭배를 폐지할 것입니다.
이동주 교수
Ⅰ. 서론
먼저 부족한 저를 너무도 귀한 자리에 서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적도 없고 다녀온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배워야 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선교학을 한 관계로 이 자리에 서게된 것 같습니다. 먼저 성경말씀 한 귀절 을 읽고 강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회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이 시간에는 과거의 중국 종교의 특징과 그 상황들 조명해 봄으로써 선교전략에 대한 힌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선교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과거의 선교사들이 어떻게 중국에서 선교했는가를 거울 삼아보고, 중국종교라 할 수 있는 유·불·선교의 세계관과 그들의 공통점을 보겠습니다. 특히 유교의 종교철학이나 무속신앙과의 결합, 예수회 선교단체가 조상숭배문제 등과 같이 부딪쳤던 문제들은 오늘날 중국선교를 희망하는 우리와도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하나의 case study로써 깊이 다루었으연 합니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세계관과 그들의 선교 발자취를 더듬어 본 다음, 선교의 전략적 이론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기독교를 중심으로 중국의 종교가 어떻게 확산되어 있었는가를 살펴 봅시다.
Ⅱ. 중국의 선교역사
1. 경교의 선교
중국선교하면 네스토리우스, 경교의 선교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경교는 7C (635년) 당나라때 중국의 중심부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 자료로는 17세기에 발견된 경교비와 돈황석굴에서 “하나님께 영광" (글로리아 인 엑셀시스/Gloria in Exelsis) 이라는 삼위일체를 찬미하는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635년에 알로펜이 장안시에 도착해서 황제의 숭인을 받고 포교활동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2세기 동안 존속된 것으로 보고있는데, 당시 교회의 형태는 수도원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수도원적 성격이 불교적인 중국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9C(845년)에 도교신자들이 불교와 경교를 박해하연서 lOC에 이르러서는 (어느 수도숭에 의하면) 경교신자를 하나도 발결할 수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후 인도, 중국까지 여행하다가 중국에서 세상을 떠난 포르투갈 사람인 프랜시스 싸비어 (Francis Xavier)의 선교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싸비어는 포르투칼 영토인 마카오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당시 마카오는 교역소였기 때문에 하충민과 혼혈아가 많았고 종교도 혼합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마카오는 선교의 출발점이요, 종착지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마태오 리치에 대해서 언급해 보겠습니다.
마태요 리치는 중국의 ‘천자’인 황제를 잘 섬기지 못하면 입국할 수 없음을 알고 중국인의 우월감에 맞춰서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 선물을 바치기 위해 먼 서방에서 왔습니다. 저는 중국의 훌륭한 제도와 명성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폐하의 한 시민으로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리치는 시계수선, 지도제작, 성경번역 등의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번역시 대체로 용어가 어려웠습니다. 예수회에서 선택한 하나님에 대한 번역 즉 ‘상제’ 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던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또한 리치는 전통종교에 대해서 아주 신중했고 존경하는 태도를 취해서 공자에 대한 공경의례 참여와 조상숭배, 신주까지도 긍정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는 점진적으로 스며들기 위한 정책을 쓴 것 입니다. 그리하여 마태오 리치가 사망할 때는 예수회에 2천명의 회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리치 사망 후, 후계자로서 요한 마담 살폰벨 (J. Adam Shall von Bell)이 본국에서 신용을 얻어 ‘홈천감’이라는 지위를 얻었으나 본국인들의 시기를 사서 사형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바람에 5명의 신자가 처형되고 모든 산자들은 광통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1661년 14살의 강희제가 등극했는데 그는 예수회에 ‘관용령’ 을 내렸습니다. “유럽인은 소란하지 않고 해를 끼치지 않는다. 교리에는 거짓 종파 와 공통점이 없고 선동내용도 없다.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성전에 들어가 의식을 거행하고 아무도 반대하지 말라" 그리고 1685년 중국의 첫번째 로페즈(Lopeg)의 감독(로웰 사워(Lower Tsao) 이후 20세기까지는 중국에 감독이 없었습니다. 1615년 교황 바오로 5세는 중국어 미사를 허락했으나, 1688년에 중국교회는 미사에 라틴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유는 중국인의 열등의식 때문에 프란체스칸들과 똑같이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라틴어 미사를 통한 복음전도는 어려웠숨니다. 그러는 가운데 강회제기 교황에게 “공자경의는 단순히 입법자에 대한 예후일 뿐이다. 조상을 경외하는 것은 만인의 사랑과 선행의 표현과 기념이다. 천(天)에 대한 제사는 창조주이며 수호신이신 우리의 주권자에게 하는 것이다" 라고 떤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1704년 로마교황이 “하나닝을 천주라 하는 것은 허락할 수 았다. 그러나 공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과 조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그리고 조상의 위패는 간직해도 좋지만 이름외에는 기록할 수 없다’라고 교령을 내렸습니다. 교황은 당시 트루눈(C. M.d. Tournon)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결국 이 트루눈의 파견으로 교황이 예수회로부터 신봉을 받고 있다는 사살을 중국 황제에 알리는 결과가 되어 트루눈은 물론이고 중국의 예수회 특사가 다 추방 되었습니다. 1742년 베네딕트 14세 교황이 다시 1704년의 결정을 지지하면서 중국의 기독교인은 또 다시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1724년 용정황제의 “북경 에 있는 예수회 수도사는 조정에 유효하므로 남아있게 하고 지방에 있는 모든 선교사는 검거하여 마카오로 추방시켜라”는 칙서에 의해 예수회만 18C까지 북경에 머물 수 있었고, 선교사의 수와 교인수는 점점 줄어 들고 교회는 황폐해지고 순교자들은 점접 늘어갔습니다. 앤드류 려(Ly)의 일기를 보면 당시 중국인 사제가 너무 적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수준 또한 낮아서 신앙생활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질병과 모험적인 여행과 탄압에 죽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세기 천주교는 거의 다 망가져서 새로 시작해야하는 형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 개신교
이제 개신교의 중국선교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스페인에서 타이완 통치권을 인수하면서 화란은 타이완에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중국해적들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당시 중국은 기독교를 거부했을 뿐만아니라 중국어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외국인은 마카오, 캔톤 둥지의 포르투칼령에서만 거주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25년동안 캔톤에 숨어서 살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은 중국어를 잘해서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이 되어 드디어 개신교 선교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성경번역 사업에 착수하였습니다. 1813년 신약. 1819년엔 구약을 번역했고, 점차 중국은 다른나라의 정치적. 상업적 압력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1893), 그러한 와중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아편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반대하연서 생긴 영국과 중국간의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 갈 수 있었지만, 중국인들은 기독교를 군함과 대포를 쫓아 들어온 것으료 여기게 되었습니다. 중국어 번역시 어려웠던 것은 어느 계층의 수준에 맞는 문체를 쓰느냐였고 결과적으로 각각 두개의 성경번역서가 1852년 학자층을 상대로, 1862년에 좀 낮은 계충을 상대로한 번역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1853년 중국전도협회를 통해 중국에 갔는데, 후에 그 곳에서 나와 중국내지선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의 선교원칙은 첫째 초교파적이고, 둘째 보수신학이며, 세째 간단한 교리선언으로 누구든지 선앙적 확신만았으면 선교사로 동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째 공식교육이 부족하더라도 문호를 개방한 것이어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다섯째 선교회 지부는 반드시 중국내에 두는 정책과, 여섯째 선교사의 중국식복장 그리고 가급적 선교사 자신을 중국인과 동일시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일곱째 교육사역, 의료사업보다 복음전도가 일차적 임무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드슨 테일러는 본국에서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불성실한 동료들, 좋지못한 건강, 그리고 아내를 잃는 슬픔(1870) 둥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서북변방의 원주민 선교를 하는 등 3개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에 641명의 선교사를 파송 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데이비드 힐 (David Hill) 선교사의 증거를 통해 아편중독자 시 (Hsi)가 목사가 되어 마약환자 수용소를 차리고 의약품과 기도로 그들을 고쳐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19세기 말 중국은 외형상 기독교에 완전히 점령당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선교 전략 중 웨일즈 침례교 출신인 티모디 리챠드(Thimothy Richard)의 전략이 특정적인데, 그는 중국인 개개인을 회십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대두되는 지식충의 사상과 정신속에 기독교적 사상을 침투시켜 언젠가는 중국전체 생활을 기독교적 생활방식으로 철 저히 변화시키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모든 지식이 구속사업에 보탬이 된다고 여겨서 기독교및 일반지식을 보급하는 협회가 만들어 졌습니다. 19세기말 중국인은 영어와 근대지식을 열망하게 되었고 이러한 중국인을 위해 여러 기독교 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상해, 남경, 북경, 광동 등) 그리하여 스티븐 니일(Stephen Naill)의 통계에 의하면 19세기말 기독교 선교사는 1500명이 되어 500개의 지역에 거의 모든 주마다 배치되었다. 추종자는 약 50만명이었고, 그중 정식 교인은 약 8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점차 반외세 감정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선교사들이 위협을 당하게 되었고 특히 교황청에서 내린 비판 때문에 많은 카톨릭 신부들이 순교당했습니다. 그 예로 1900년 6월 24일에 모든 외국인은 다 죽이라는 칙령이 내렸는데 일본인이 침략하는 바람에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배도자들이 생겼고 외국인을 보호하다 순교한 내국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제 중국 그리스도인들은 개인 구원이 아니라 중국이 새로워지는 일에 관심이 일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정치적 표현에 따라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고, 공화정이 들어서 기독교인 손문이 정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초의 중국의 그리스도인은 주로 소수 엘리트층 (1%)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컸던 것으로 봅니다. 그 후 중국은 장개석이 등장하면서 맑스주의냐 기독교냐는 문제가 생겼고, 1937년 일본침략에 이어서 1949년 일본의 패망에 따라 중화인민민주공화국이 선포된 것입니다. 이렇게 공산화되고 1960년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종교인들은 비참하게 핍박당하고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고, 18세 미만은 종교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후 중국 기독교는 수천개의 가정교회로 형성되었습니다. 1987년 페트럭 존스톤(Patrick Johnston)이 오퍼레션 월드(Operation World) 에 나타난 중국인 의 종교현황 통계에 의하면 중국인 중 대략 무종교 50%, 유,불, 선교 28%, 무속 종교 2%, 기독교 5% (개신교:4.3%, 가정교회:3천만~ 5천만)라고 합니다‘
3. 유대교
유대교도 당나라때 역시 상업적으로 광동에 들어왔는데 송나라때는 회당(Synaqoge)이 있었다고 합니다. 1605년 마태오 리치 당시엔 교회와 회당이 공존했고, 유대인들은 중국인과 혼인을 해서 중국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할례, 씻는 문제,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등 중국인과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런던선교회 때문에 유대교는 빈약해져 흩어져 버렸고 히브리어 조차 통용이 되지 않았으며 50년 동안 랍비없이 유지되었는데 후에는 가죽성경(두루마리)까지 영국에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마침내 1851년 회당이 철거되고, 1866년에는 중국에서 유대교가 완전히 사 라진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4. 이슬람교
이슬람교가 중국에 들어온 경유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독일학자 아이히호른 (Eichhorun)은 당나라때 광동에 상인들이 도착하면서 들어왔다고하고, 또 육지로 군인들이 도착하면서였다고 합니다. 「중국 선교 핸드북」에서 죠나단 챠오(Johunathan Chao) 목사님은 경태종때 모하메트의 친척이며 제자인 와카스가 광주에 왔고, 당고종때(651년)는 아라비아에서 사절을 파견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록산의 난때 수천의 군사가 파견되면서 이슬람교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몽고시대때 아라비아 상인들이 중국 남송 해안지방에 많이 드나들었고, 이슬람교의 학교도 셜립되었습니다.(13C)
원나라때 몽고인 다음으로 회교도인을 존중히 여겼고 청나라때는 이슬람교가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이들 이슬람교인들의 강점은 가정생활과 종교생활이 잘 융화되어서 사회 적응력이 높고 단결력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차오 목사님에 의하면 공산화 이전 신도가 5천만이었다고 합니다. 이슬람교의 교파는 구교파, 신교파, 신홍교파 이 3교파로 나뉘는데, 구교파는 코란 중심이며 문관이라는 교주가 있고 신교파는 개혁파라 할 수 있고, 신홍교파는 1910년초 코란을 과학적 시각으로 해석한 교파를 말합니다.
Ⅲ. 중국 종교의 세계관(종교철학)
1. 주역적 세계관
중국의 세계관이 나타나있는 가장 오래된 책이 바로 「주역」입니다. 미신적인 미술, 점술까지 포함되어 있는 이 「주역」은 중국인들의 가장 오래된 지혜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사상은 노자, 공자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샤머니즘권에서 나타난 하나의 철학체계로서 중요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자도 주역을 해석하여 후세에 전달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유교의 경전이 되고 있습니다. 주역에 나타난 사상은 존재론, 음양이론입니다. 이 세계와 우주의 생성 뿐아니라 인간, 신, 귀신까지도 모두 음양의 조화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역에 공자가 토를 단 것을 보면 “태초에 태극이 있었는데 태극에서 양의(음양)가 났다. 그리고 양의에서 사상이(춘하추동), 이 사상에서 팔패가 나오고, 팔패에서 천하만물이 나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역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이 음양의 조화에 의해서 생겨난 일종의 ‘귀신’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오늘날 유학자들은 하나님과 ‘귀신’을 혼돈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상제가 제일 높은신이고 그 밑에 잡신들이 있습니다. 다신론 또한 무신론자들에게는 자연적인 원칙, 윤리적인 원칙이 되고 창조가 진화론적인 것으로 왜곡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2. 도학적 세계관
도학이란, 유교와 도교의 혼합형인 ‘신유교’를 말합니다. ‘도’는 노자에 의해서 절대시 된 개념으로서 신유교학자들, 즉 송때의 성리학자들이 ‘도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초기의 유교는 당시 지도자들이 부패, 탐관오리 등으로 타락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윤리적인 면에 관심이 많았던 공자가 어떻게 하면 바른 지도자가 될 것인가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에 관한 것보다 윤리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해 무관심하던 유교가 도학에 와서는 세계관과 인간관,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자(朱子)의 「태극도셜」에 그 개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태극은 음양으로 되어있고 태극을 또한 무극이라고 합니다. 태극과 무극은 같은 것입니다. 주자의 이러한 구상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노자는 「도덕 경」에서 도를 ‘무명’, 즉 개념이 없는(알 수 없는) 절대자로 설명하는데 ‘도’는 가명입니다. 그리고 유교엔 성리학자들이 발전시킨 ‘이기론(理氣論)’ 이 있습니다. 이기론은 통일되지 않은 학설 때문에 굉장히 복잡합니다. 우리나라의 율곡과 퇴계도 이기론을 가지고 당파싸움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주자는 음양이 기에 속한 것으로 보고 기가 뭉치변 만물이 생기고 기가 흩어지면 만물이 사라져버린다고 믿었습니다.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子)는 ‘이’를 태극과 동일시 하여 세상 운명을 좌우하는 신적존재로 보았습니다. 즉‘ 인격화하면 ‘신’ 이고 비인격화하면 ‘태극’ 입니다. 또 주자(朱子)는 사람을 ‘인극’ 이 과해서 태극과 같은 궁극자와 동일시 하였논데 그것은 범선론적 세계관을 기초로 한 신인동격 사상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이 접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의 인간완성 즉 자기실현자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3. 도교적 세계관
도교의 특성은 ‘도’ 가 근원자이기 때문에 천, 상제 등을 ‘도’ 밑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신도 ‘도’ 에서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때 神을 하나의 ‘도’의 생산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도교의 혼합주의는 진시황제가 이루었지만 이미 장자 때 도교는 무속문화에 빠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자는 ‘도인’ 을 가리켜 “이적을 쫓고 불사에 힘을 얻는 초인간적 마술사 같은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성인”의 개념은 공기와 이슬을 먹고 살며 바람을 타며 용을 말로 삼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자의 예술론을 통해서 어떤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의 자의식이 용해되어 버리고 도와 동일시 되어버린다는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북문성이라는 사람이 황제가 만든 음악을 들으면서 체험을 하는데 첫째 두렵고 놀라며 지칠대로 지치며, 그 후에 고독해지고 혼돈되며, 바보같이 되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도와 합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큰 것에 개념을 만드는 것 (무명)에 사로잡히어 저항력을 상실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당이 체험하는 자기 부정과, 귀신에게 사로 잡혀서 죽음과 재생을 체험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나라 때 도인은 주로 바람을 불게하거나 불과 물 사이를 지나가는 마술사로 표현됨으로써 도교는 점점 바늘적 통속 종교로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불교적 세계관
불교적 세계관, 구원관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보아야겠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중국에서 확대되어 다르게 발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교설로는 삼법인, 사성체, 팔정도, 12인연 등이 있습니다.
*삼법인(3가지로 변함없는 진리)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든 존재가 변하므로 불변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
제법무아(諸法無我,) - 모든 법에 아(我) 가 없다.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
열반적정(涅槃寂靜) - 열반에 들어 고요하다. 모든 번뇌와 고통을 끊어 불생불멸의 해탈에 이른다는 것
*사성체
고체(苦諦) - 현상세계가 모두 고통이다.
집체(集諦) - 고통의 원인은 욕망, 집착하는 마음이다.
멸체(滅諦) - 고통을 벗어남, 열반에 이름
도체(度諦) - 열반에 이르는 길
*8정도 - 열반에 이르는 8가지 투 행법
인도의 불교는 중국에 들어가서 도교적인 일원론 및 범신론과 유교적인 유출론과 합쳐지면서 대숭불교로 크게 발전되었습니다. 불교는 본래 무신론적이며 有와 生을 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중국. 대만의 불교는 기복신앙적인 것이 많습니다. Nagarjuna는 열반을 ‘공’ 이라 하였고, 또한 H.v. Glasenap? 나 K. Jaspers는 이 ‘공’을 절대적 허무나 불가지론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추리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이원적 현상을 극복하는 ‘무이(無二)’ 의 신비한 경험적인 사실 경험적인 사실을 말합니다. ‘무이’ 란 일원론으로 나와 절대자가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하는 것. 이것이 무이의 상태입니다. 야스퍼스는 무와 유의 이원적 현상계를 통일하는 ‘무이’의 상태를 ‘포괄자'라 하며, 완전히 논쟁할 수 없고, 무차별하며, 문제가 되지않는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대립과 모순을 극복하고 참과 거짓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포팔자’인 것입니다.
4C에 Asanga도 너와 나, 신과 나, 세상과 나의 대렵적 인식은 망각이며 요가연습을 통해서 이 대렵적 인식을 없애자고 하였고, 이 주체화 대상의 구별의식을 극복한 것이 바로 ‘열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황벽(선불교 학자)은 이 불성을 ‘일심’ 이라 했습니다. 한국 에서는 원효대사가 이보다 약 200년 앞서 ‘일심’ 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일심’이란 무엇입니까? 독일 사람들은 心을 Geist 또는 듣 Nichtgeist, 다른 한편으로는 Weltgeist, 개인영이라고 여러가지들로 해석했는데, 이것은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칼 야스퍼스의 ‘포괄자’ 번역이 타당성이 있습니다. 모든 현상계는 다 착각이며 단수와 복수의 구별을 극복하고 오든 것을 E팔할 수 있는 신비의 상태가 바 로 ‘일섬’ 이고 열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Suzuki나 Gesber와 같은 불교학자는 황벽의 일심을 아마곳에도 없는 것, 즉 안에나 밖에나 중간에도 머물러 있지 않은 ‘공’ 이라고 하고 ‘불성’ 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의 구원관은 한마디로 나의 신격화, 나의 불격화, 자력 구원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신론적이며 일원론적이고 피조물 됨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사상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사해준다는 것이 의미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불도에 심취한 학자들은 자신을 절대시하므로 예수가 죄를 사해주고 구원해 주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를 제외한 동양종교의 공통점은 창조주와 피조물이 없는 범신론입니다. 기독교가 시작과 끝이 있는, 창조와 종말이 있는 일직선상의 역사성을 가지고있는 반면, 불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원형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역사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전략적인 측면에서 볼때, 핸드릭 크래머(Handrik Kraemer)는 중국인 들의 관용과 포용성을 가상적 관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중국인들이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것은 공동체가 파괴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문제가 불타오르면 곧 핍박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관용은 가상적 관용 ; 표면적 관용인 것입니다.
Ⅳ. 예수회의 선교전략
위와 같은 종교적인 터 위에서 어렵게 선교전략을 펴나갔던 예수회의 발자취를 한번 점검해 봅시다. 고대로부터 중국에는 무속신앙이 있고, 백신(만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회생제를 드렸습니다. ‘백신’ 이 란 일월성신, 사방신, 천지산천, 죽은 사람의 혼 등을 다 포함 합니다. 그리고 그 최고신이 ‘상제’ 인데 마태오 리치가 하나님을 상제라 번역하였습니다. 마태오 리치는 또한 과거의 유교와 기독교, 천주교에 대해서는 비슷한 점을 발견했지만 “과거 의 유교는 인간본성에 따라 천주교를 경외하고 천리에 순응하는 종교로서 천주교의 기본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신유교는 무신론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유교학자들의 비위를 상하게했습니다. 리치는 조상제사를 감사와 추모, 애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허락했으며, 산주까지도 조상의 혼이 깃들어 오는 젓이 아니라 산 사람들이 그 마음을 의지하는 것으로 여겨 허락했습니다. 또한 공자 숭배도 공자를 신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선사로 생각해서 감사를 드릴 뿐이고 그에게 기도문을 염하거나 어떤 청원을 드리는 것이 아님으로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리치는 유교를 천주교와 접목시켜 천주가 존재한다는 것, 영혼은 불멸한다는 것,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것, 주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다 설명하려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조상제사가 과연 우상숭배와 분리되느냐하는 점에 있습니다 신유교 신앙에 의하면 사람이 성경(誠敬)하면 귀신이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조상이 거쳐하던 것, 즐거워하던 것, 웃으며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조상 이 목전에 계심을 보는 듯 생각하 게 될때 산화된 기가 다시 소멸됐더라도 당시 뭉쳐져서 격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제사와 정성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효의 측정기준이 바로 제사인 것입니다. 첫째로 생시에 부모를 봉양하고 둘째 부모가 죽은 직후에 상례, 그리고 그후에 제사를 얼마든 규칙적으로 경건하게 드리냐가 바로 ‘효’의 측정기준입니다.
제사와 효의 문제 조상제사가 효냐, 우상숭배냐에 대해서 오늘날까지 논쟁을 계속하였던 그 한쪽만을 지지하고 다른 쪽은 무시하는 경향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효는 좋은 문화이므로 살려야 하고 제사는 우상숭배임으로 허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중국의 종교관은 기독교의 창조와 종말이 있는 일직선적인 세계관과는 달리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는 원형적인 세계관엽니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는 중국종교의 세계관, 신관, 구원관과 하나의 불연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이의 간격은 우리 자신이 ‘성 육신’ 하면서 문화의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그대로 간직하며 왜곡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몇몇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했듯이 말입니다.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어디까지 수용하느냐 하는 것 은 성경말씀과 성령의 조명 없이는 정확히 판단하기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선교의 출발이요, 시행이요, 마침입니다.
우리는 중국 문화권에 들어가서 그들의 공통체를 살리는 일을 해야 하고, 효행을 능가하는 행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효도행위를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현장에서 말과 행실을 통해 참 신앙을 제시해 주어야 하며 중국인 결신자가 핍박을 받을 때라도 그는 그 공동체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 믿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며 효도하는 것이며,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교문화권에서 현지인들의 오해와 불신을 극복해나가며, 속히 충성스런 제자를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교를 계속하게 함으로서 문화적인 이질감을 덜어야 하겠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마술사들이 스스로 나와 그들의 책을 불사르듯(행19:18),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들 스스로 악습과 우상숭배를 폐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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