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회 ‘이주선교’로 복음화 확산
2006. 7. 4. 21:54ㆍ선교자료/2.중국선교자료
중국교회 ‘이주선교’로 복음화 확산
중국 교회가 선교에 나서고 있다.199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중국 가정교회의 ‘이주선교’는 새로운 선교 동력으로 현재 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주선교’란 교회로부터 유사문화권 또는 타문화권으로 파송된 선교사 가정이 장기적으로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교회는 사역경험이 풍부한 부부 선교사를 선발,공동체 훈련을 시킨 후 각 지역으로 파송하고 초기 3년은 재정 지원을 해주고 그후 자비량 선교에 나서게 한다.선교사 대다수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변경지역,소수민족 지역 등으로 떠나 언어장애,이단의 훼방 등 어려움을 극복하며 교회 개척에 성공하고 있다.시창(西藏) 칭하이(靑海) 신장(新疆)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 스촨(四川) 광둥(廣東) 하이난(海南) 푸젠(福建) 장시(江西) 후난(湖南) 등 12개 성에 폭넓게 퍼져 사역하고 있다.
이주선교에 나선 교회들은 소수민족 선교는 물론 미얀마와 인도,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에 이르기까지 해외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연약하게만 알려졌던 중국 가정교회가 세계로 나갈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중국교회는 지난 100여년동안 지역을 뛰어넘어 선교사역에 힘써왔다.1949년 이래 정부의 반기독교 종교정책에 따라 선교 열기를 눌려왔지만 한족을 비롯,55개 소수민족을 향한 선교 열정은 남다르다.
중국교회의 100년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중국교회의 역동성을 짐작케 한다.중국 교회는 1900년 의화단사건 이후 자립(自立)과 자전(自傳)에 집중했다.1906년 상하이(上海)에서 세워진 ‘중국자립회(中國自立會)’의 딩리메이(丁立美) 왕정팅(王正延) 등 전도자들은 대중전도를 선도했다.1910년 산둥(山東)성 광원학교에서 창립된 ‘중화학생입지전도단’은 딩리메이의 지도하에 총단원이 1170명에 달했으며 그중 530명은 전도자로 헌신했다.
1911년에 창립된 ‘호남축호전도단’은 5년간 10만7000여 가구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 상하이 푸저우(福州) 등 각지에 선교단체를 세워나갔다.특히 1918년 전국 기독인의 역량을 결집,‘중화국내전도단’을 창립해 윈난성에서부터 헤이룽장(黑龍江)성 몽골까지 진출하는 등 선교범위를 확장해갔다.이후 1931년에 세워진 ‘보터리전도단’은 지즈원(計志文) 송상제(宋尙節) 등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전도자들을 배출,현재까지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중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해외선교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29년 광시성 우저우(梧州)에 총본부를 둔 ‘중화국외전도단’이 결성된 이후다.이 단체는 1호선교사로 주싱훈(朱醒魂) 목사를 베트남에 파송한데 이어 린정예(林證耶) 렌광린(鍊光臨) 목사 등을 인도네시아를 파송했다.1930년엔 선교사 64명을 파송,남태양평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또 1940년대 중국내지선교회가 세운 서북성경학원 교수와 학생들이 중심으로 ‘편전복음단’을 창립,간쑤(甘肅) 닝샤(寧夏) 칭하이 시창 신장지역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다.하지만 1950년 신장이 중국에 점령되자 이 사역도 정체됐다.1970년대 후반 편전복음단의 사역자들도 한 사람씩 사역 현장으로 돌아왔으며 그들이 사역 초기 품었던 소망과 열정을 손자 손녀 중 일부가 계승,현재 카스에 정착해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전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한편 장구췐(張谷泉) 목사에 의해 창립된 ‘서북영공단’은 1947년부터 49년까지 신장 하미에서 사역에 힘썼다.하지만 1951년 카스의 사역자가 제일 먼저 체포되었고 그후 장구췐 목사 등도 하미에서 체포됨에 따라 사역은 완전히 중단됐다.1970년대 들어 백발노인이 된 일부 서북영공단 사역자들이 시창으로 돌아와 가정집회를 시작,복음의 횃불을 지피고 있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중국 교회가 선교에 나서고 있다.199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중국 가정교회의 ‘이주선교’는 새로운 선교 동력으로 현재 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주선교’란 교회로부터 유사문화권 또는 타문화권으로 파송된 선교사 가정이 장기적으로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교회는 사역경험이 풍부한 부부 선교사를 선발,공동체 훈련을 시킨 후 각 지역으로 파송하고 초기 3년은 재정 지원을 해주고 그후 자비량 선교에 나서게 한다.선교사 대다수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변경지역,소수민족 지역 등으로 떠나 언어장애,이단의 훼방 등 어려움을 극복하며 교회 개척에 성공하고 있다.시창(西藏) 칭하이(靑海) 신장(新疆)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 스촨(四川) 광둥(廣東) 하이난(海南) 푸젠(福建) 장시(江西) 후난(湖南) 등 12개 성에 폭넓게 퍼져 사역하고 있다.
이주선교에 나선 교회들은 소수민족 선교는 물론 미얀마와 인도,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에 이르기까지 해외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연약하게만 알려졌던 중국 가정교회가 세계로 나갈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중국교회는 지난 100여년동안 지역을 뛰어넘어 선교사역에 힘써왔다.1949년 이래 정부의 반기독교 종교정책에 따라 선교 열기를 눌려왔지만 한족을 비롯,55개 소수민족을 향한 선교 열정은 남다르다.
중국교회의 100년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중국교회의 역동성을 짐작케 한다.중국 교회는 1900년 의화단사건 이후 자립(自立)과 자전(自傳)에 집중했다.1906년 상하이(上海)에서 세워진 ‘중국자립회(中國自立會)’의 딩리메이(丁立美) 왕정팅(王正延) 등 전도자들은 대중전도를 선도했다.1910년 산둥(山東)성 광원학교에서 창립된 ‘중화학생입지전도단’은 딩리메이의 지도하에 총단원이 1170명에 달했으며 그중 530명은 전도자로 헌신했다.
1911년에 창립된 ‘호남축호전도단’은 5년간 10만7000여 가구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 상하이 푸저우(福州) 등 각지에 선교단체를 세워나갔다.특히 1918년 전국 기독인의 역량을 결집,‘중화국내전도단’을 창립해 윈난성에서부터 헤이룽장(黑龍江)성 몽골까지 진출하는 등 선교범위를 확장해갔다.이후 1931년에 세워진 ‘보터리전도단’은 지즈원(計志文) 송상제(宋尙節) 등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전도자들을 배출,현재까지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중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해외선교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29년 광시성 우저우(梧州)에 총본부를 둔 ‘중화국외전도단’이 결성된 이후다.이 단체는 1호선교사로 주싱훈(朱醒魂) 목사를 베트남에 파송한데 이어 린정예(林證耶) 렌광린(鍊光臨) 목사 등을 인도네시아를 파송했다.1930년엔 선교사 64명을 파송,남태양평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또 1940년대 중국내지선교회가 세운 서북성경학원 교수와 학생들이 중심으로 ‘편전복음단’을 창립,간쑤(甘肅) 닝샤(寧夏) 칭하이 시창 신장지역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다.하지만 1950년 신장이 중국에 점령되자 이 사역도 정체됐다.1970년대 후반 편전복음단의 사역자들도 한 사람씩 사역 현장으로 돌아왔으며 그들이 사역 초기 품었던 소망과 열정을 손자 손녀 중 일부가 계승,현재 카스에 정착해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전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한편 장구췐(張谷泉) 목사에 의해 창립된 ‘서북영공단’은 1947년부터 49년까지 신장 하미에서 사역에 힘썼다.하지만 1951년 카스의 사역자가 제일 먼저 체포되었고 그후 장구췐 목사 등도 하미에서 체포됨에 따라 사역은 완전히 중단됐다.1970년대 들어 백발노인이 된 일부 서북영공단 사역자들이 시창으로 돌아와 가정집회를 시작,복음의 횃불을 지피고 있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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