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가문

2006. 5. 16. 23:23목양자료/1.기독교자료

헤롯 가문

 B.C. 63년 동방이 로마제국에 편입되었을 때 폼페이는 힐카누스라는 한 제사장을 세워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대와 베레아를 다스리게 하였다. 힐카누스는 교활한 신하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그 신하는 이두매사람 안티파테르였다. 안티파테르는 자기의 세력을 그의 가족에게 유리하도록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아는자였다. 그는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롯을 요직에 앉혔다. B.C. 43년에 안티파테르가 살해당했을 때 그 두청년은 힐카누스의 조정에 대신으로서 공동참예할 수 있게 되었다.

파사엘은 국경을 진정시키고자 했던 율리오 가이사(JULIUS CAESAR)가 찬탈당한 뒤에 있은 파르디아 족의 침입시에 곧 희생당하고 말았다. 헤롯은 로마로 도망하여 옥타비안(미래의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감명을 끼쳐서 팔레스타인을 회복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이 명령을 B.C. 39-36년 어간에 수행하였다. 그는 34년간 로마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의 행정을 맡아 성공적으로 관장하였고 그 동안에 가이사랴에 로마의 항구와 기지를 건설하고 사마리아에 아우구스투스에게 돌리는 신전을 세우는 등 공적을 쌓았다.

도나텔로의 <헤롯의 향연> : 세례반의 부조 금방청동 60*60cm 시에나의 세례당 소장.

동시에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에돔의 피가 섞인 자신을 증오하는 유대인들과 화해를 시도하였다. 그는 뛰어난 외교가였다. 그는 옛 귀족정치를 그 귀족 중 하나인 마리암네와 결혼하였고 관직에 귀족제도를 두었다. 그는 친헤롯 유대당 곧 "헤롯당"을 신설하여 그의 왕가에 충성하도록 유도하였고, 애굽의 톨레미 왕조를 모방하여 관료제도를 세웠으며,용병으로 편성한 군대와 산성과 요새를 세워(그 중 하나가 마사다였다) 그의 권세의 안전을 꾀하였다. 위태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가 치룬 희생은 그의 가족 안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살인을 불러 일으켰으며 끝내는 그로 하여금 피해망상증 환자가 되게 만들었다. 이 자가 바로 예수님 탄생 당시의 유대 왕 헤롯이었다. 새 "경쟁자"에 대한 헤롯의 질투와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은 우리가 그의 성격에 관하여 아는 바와 일치된다.

     안티파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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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엘           헤롯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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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켈라오   헤롯안티파스  빌립 아리스토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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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 아그립바 I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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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 아그립바 II세
헤롯의 뜻은 그가 그처럼 오래동안,그처럼 능란하게 그처럼 무자비하게 다스려오던 나라를 분할하는 것이었다. 사마리아 여자 말다케에게서 난 아들 아켈라오는 가장 좋은 몫인 유대와 이두매를 차지하였다. 같은 어머니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받았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하는 유대 여자에게서 난 아들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과 그 주변의 갈릴리 북동편 땅을 받았다. 재능이 없이 아버지의 악한 면만을 물려받은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혼란을 잔인하게 진압시켰다. 그 결과 더 크고 광범위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끝내는 수리아 총독 바루스의 강력한 개입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아켈라오가 우매한 통치는 A.D.6년까지 계속 되다가 유대인의 항거를 인하여 추방당함으로써 종식되었다. 유대는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갔다(총독은 로마 당국의 직속 집정관이었다). 한편 헤롯 안티파테르(안티파스)는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오래도록 그의 권좌에 앉아 있었다. 디베료가 황제의 위에 있을 동안 헤로디아의 외교적인 솜씨가 그의 꼭둑각시 통치를 지속케 해주었다. 그러나 안티파스는 노한 칼리굴라를 오해하였다. 왕의 칭호를 구한 그는 폐위당하고 유배되어 악명높은 헤로디아와 더불어 호된 고생을 하였다. 이 자가 바로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가 죽인 헤롯이었다. 그는 또한 빌라도가 재판 중에 그에게로 보낸 예수님을 잠시 대면한 일도 있다.

첫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I세는 로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칼리굴라를 더 잘 다루었고 그리하여 세 형제 중 가장 훌륭했던 빌립이 죽었을 때 그 자리를 얻어낼 수가 있었다. 안티파스가 유배당했을 때 갈릴리와 베레아가 그의 영토에 편입되었고 A.D. 41년에 아그립바 I세는 글라우디오 황제에게서 그의 할아버지가 다스리던 전 영토를 받았다. 이 자가 바로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헤롯이다. 그는 A.D.44년에 34세의 나이로 급사하였고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은 완전히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아그립바 I세는 10대의 아들을 남겼는데 그 아들은 A.D. 48년에 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해서 갈기스의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A.D. 53년에 글라우디오는 분봉왕 빌립과 루사니아스의 영토에 새 성읍 디베랴를 포함하는 갈릴리 서편지역과 함께 이 지역 일대를 덧붙여 주었다. 그러한 영토의 확대편입은 왕의 칭호를 동반하였고 따라서 A.D.53년에 아그립바 I세인 아들은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인 아그립바 II세가 되었다. 그는 사도행전 25장의 놀라운 이야기에서만 나타난다. 거기서 그는 총독 베스도의 손님으로서 바울의 변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