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자손의 계보 1

2006. 1. 20. 22:39목양자료/3.강해설교

제목:아담 자손의 계보 1
본문:(창5:1-32)
주요내용:경건론
작성자:한성진(합동총신졸)
자료출처:http://cafe.daum.net/agaser

요 약
우리는 아담의 경건한 셋 계열의 족보에서 경건한 족장들의 열심과 몸부림을 본다. 그 열망과 몸부림이란 먼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계승을 통해 하나님 형상을 입고 입히기 원하는 거룩한 갈망이요, 또한 여자의 후손 메시야를 낳기 위한 사명의 열심으로 해산의 수고를 일생 감수함이요, 그들의 족보에 나타나는 죽음의 장렬한 기록은 성도들이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넘겨주고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는 죽음의 위대성을 예표한다. 우리에게도 이 거룩한 신앙적 몸부림이 반드시 필요하다.

설 명

★ 경건한 자손들

1. 하나님의 형상을 입기 원함
"아담이 - 자기 모양 곧 자기와 같은 형상을 낳아"(3절)
아담 =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셋 = 아담의 형상과 모양
셋 = 하나님의 형상
그러나 이는 입혀진 의였다.

2. 그리스도의 현현을 갈망함
"팔 백년을 지내며 아들을 낳았으며"(4절)
☞ 여자의 후손에 대한 열망임
① 개인 성화
② 전도 중생

3. 장렬한 죽음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5절)
☞ 승리 장수하다 죽은 명예로운 죽음
내가 죽어지는 날 = 기록될 날

(본문)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 생략 -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1-32>


(강해)
이 시간 "경건한 자손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에는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약 7개의 족보가 나오는데(4:16-24, 5:1-32. 10:1-32, 11:10-32, 25:12-18, 36:1-43, 46:8-43). 본문 5장의 족보는 그 두 번째 족보로서 인간 창조로부터 그 번성의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족보가 가인의 계통과 다른 점은 거룩한 형상을 물려주었고, 중혼이 없었으며, 장수했고, 전쟁도 없었고,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의인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본문 족보에서 무슨 요긴한 내용이 나올 것인지 이 강의를 앞 두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에녹에 관한 간략한 기록 말고는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교훈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래서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족보의 족장들의 열망의 소리를 듣게 하셨고 그 부르짖는 뜨거운 가슴을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즉 이것은 우리 영성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뜨거운 가슴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족보에서 그들의 여호와를 위한 열심과 사명을 위한 몸부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열심은 약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 그들은 하나님 형상을 입는데 열심이었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라고 했고 3절에 "아담이 일 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삼단 논법대로 셋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임을 가르쳐 줍니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의로운 백성들은 이 하나님 형상에 대단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타락한 아담 후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유전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미련이 있었고 그들과 그들 후손에게 이 형상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형상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정확히 말하자면 유전된 의가 아닌 은혜로 입혀진 의였습니다.
그 예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에 대해 성경은 '믿음'이라는 용어를 썼고, 또 노아의 의로움을 성경은 '은혜를 입었더라'(창6:8) 표현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 믿음과 은혜라는 용어는 100% 복음을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이것이 종교개혁들의 슬로건이 아니었습니까? 만약 유전된 의였다면 그들이 의인에 대한 갈망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의는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히시듯 하나님의 은혜로 입혀진 의입니다. 그리고 4:26의 예배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점 역시 예배의 결과가 말해주듯 하나님의 입혀진 의였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줍니다.
창4:26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했습니다. 이것은 셋이 제사장 되어 이루어진 예배 회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 셋도 라는 문구가 바로 신앙 계승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 '비로소'라는 낱말을 통해 얼마나 그 시대 사람들이 그 상황을 추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나이가 나와 있는데 경건한 삶만이 나이로 칠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경건성을 엿보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배의 회복과 함께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 나타남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즉 그들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유전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거나 물려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족보는 다른 족보가 아니라 신앙을 계승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았던 경건한 후손들의 족보입니다.
더구나 아담 부부는 하나님의 원의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형상을 입음이 얼마나 의롭고 영광스러우며 자유롭고 기쁘며 힘과 지혜와 권세와 평안과 행복과 부요가 넘치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천국을 경험한 후 그곳을 결코 잊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빌1:23-24). 또 아담은 반대로 가인이 동생을 죽여 자기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그 사건을 통해 죄악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가 930세 살다가 죽었는데 그 때가 그의 8대 손 므두셀라가 58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러니까 므드셀라도 환갑이 차도록 아담의 감화를 받았고 그 므두셀라가 죽을 때 홍수가 있었으며 아담의 감화를 받은 기랴성 같은 경건한 족장들이 많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이 자손들 모두가 아담과 하와의 직접 간접으로 감화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므두셀라는 아버지의 승천까지도 목격한 사람입니다. 이런 류의 사람을 즉 예수 승천을 본 사람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셋 자손들의 일생 동안의 열심의 목표는 하나님 형상을 덧입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이 열심내야 하고 이 운동해야 합니다.
술 마시는 사람들은 자기 돈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남을 술 먹이기를 쾌감으로 압니다. 이처럼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자신과 모두에게서 하나님 형상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힘썼던 것이 예배 회복이었습니다. 셋이 에노스를 낳고 그 시대의 예배 회복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시는 교훈은 셋의 시대처럼 하나님을 잘 경외할 때 우리도 변화된다는 진리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열심 이것이 곧 영성 회복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내 본질을 변화시킴이 아니라 도리어 내 본질은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하나님 경외함을 배워 성령으로 거룩하신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16:6) 그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욥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1:1)라 하셨고, 렘2:19에는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셋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변화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외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운동이 무엇이냐? 결국 예배 회복입니다. 예배가 은혜가 없어 냉냉하다면 무슨 영성이 되겠습니까? 또한 예배적인 삶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충만한 삶을 유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족보론 소개하기 전에 서론적으로 나타나는 4:26의 문구가 족보론을 푸는 열쇠입니다. 마치 10:21에 히브리 민족의 기원을 보여주는 셈의 자손들의 족보의 서론으로 셈의 손자 에벨을 언급함과 같습니다. 즉 셋으로 말미암는 예배 회복이 강력한 부흥운동을 가져왔고 이 부흥운동은 비로소 영성운동의 탄탄 대로를 이루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초대교회를 비롯하여 무디 펜사콜라 스퍼젼 1907년 한국 등의 부흥운동도 모두 예배 회복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 교회와 합하여 신령한 예배를 드리도록 한 주간 내내 기도하고 준비하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처럼 하나님을 형상을 입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들은 여자의 후손의 나타남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4절에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했습니다.
여기 아담이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자녀를 몇 명을 낳았는지 모르지만 800년을 낳았으니 그 수효란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족보에는 '낳고'라는 용어가 많습니다. 즉 아담은 800년을 낳고, 셋은 807년을 낳고, 에노스는 815년을 낳고, 게난은 840년을 낳고, 마할랄렐은 830년을 낳고, 야렛도 800년을 낳고, 에녹은 300년을 낳고, 무드셀라는 782년을 낳고, 라멕은 595년을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 족보는 모두 10대로 구성되어 있고 또 출산 기간이 길어 고조 증조 할머니 자신 며느리 손자며느리 할 것 없이 여러 대에 걸쳐서 중복적인 출산이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아담이 그의 팔 대 손 므두셀라 58세 시까지 살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기하급수적인 인구의 번성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창조과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노아 시대의 인구를 10억으로 보니까 족장 시대라면 수천 만 명은 되지 않겠습니까? 가령 70명의 야곱 자손이 애굽에 들어가 430년 후에 200만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면 중복적 출산을 이룬 족장시대라면 수천만은 족히 가능한 추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하게 봐서는 안됩니다. 즉 이 의인들의 출산 열심은 인구 증가가 필요한 때라고 하나 단순한 인구 팽창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가 타락 이후이므로 그 고통과 위험이 따르는 해산의 수고를 종신직으로 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는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메시야를 향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하와가 여자 후손 메시야를 낳기를 갈망하여 그 이름을 가인이라 한 것처럼 그들은 출산을 통하여 구속주의 출현을 간곡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낳고 낳는 해산의 수고를 감수하면서 메시야의 출현을 사모했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후손 메시야에 대한 열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요(사9:7) 당시 그리고 구약 전반에 걸친 경건한 성도들의 열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재림을 사모하는 것처럼 구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의 지배적인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율법에 제사제도나 절기나 계대 결혼이나 기업 무르기(고엘, 룻4:1) 등 여러 방향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열심히 어느 정도였는가 협조하지 않으면 죽이실 만큼 혹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도와주실 만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유다의 큰아들 엘이 죽자 계대법에 의하여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에게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다하여 형을 위해 씨가 있도록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손이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땅에 설정(泄精)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임을 당했는데(창 38:4- 10, 46:12) 그 원인은 단순한 위법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메시야에 대한 열심의 결여와 훼방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바로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려 풀어주신 일이나, 또 블레셋 왕이 사라를 취하려 했을 때도 그에게 꿈에 나타나사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신 일 등이 그것을 잘 증명합니다. 저는 그 당시 나이가 80 안팎인데 어떻게 왕들이 탐냈을 정도였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경수가 끊어진 점도 있으나 그러나 나중 다시 잉태하게 하신 점을 미루어 이는 모두가 이 언약의 줄기를 이어가시기 위해서 그의 젊음을 묶어 두신 하나님의 기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들을 낳을 때 꼭 무슨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 역시 이 해산의 수고가 평범한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가령 셋도 아들 에노스를 낳으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에녹도 역시 그랬습니다. 창5:21에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했습니다. 에벨 역시 그렇습니다. 창10:25에 에벨이 벨렉을 낳고 기적이 나타나 그토록 바벨탑을 쌓으며 거역하던 사람들이 아들 형제 모여 살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세상으로 흩어져 나라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녀 낳는 일은 단순한 출산이 아닙니다. 이 속에는 먼저 메시야의 나타남에 대한 기대요, 나아가서는 아직 오시지 않았을지라도 이 메시야를 향한 갈망이 그들을 변화시키는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낳고 낳고를 통해서 영성이 무엇인가를 발견합니다. 영성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 안에 인격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고 표현합니다. 혹시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영성에만 관심이 있다면 근본적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전1:31-32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되려면 예수를 구주로 믿어 기본적으로 하나 되어야 하고 나아가 신랑과 신부처럼 사랑하므로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함이 바로 해산의 수고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격에 예수가 나타나야 합니다. 마치 성도들이 예수님 오실 것을 간구할 때 재림의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지만 주의 오심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거룩한 성화적 의를 입혀주심과 같습니다. 그래서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했고, 요14:18-21에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이 성령으로 임하시는 현재적 강림이요, 이어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습니다. 즉 사랑하는 자에게 인격적인 결합을 통해 나타내심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 낳기를 소망한 그들에게 획기적인 변화가 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기록을 보니까 몇 세에 자녀를 낳았느냐가 꼭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속히 하나님께 순종하여 성숙을 이루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하셨던 것도 단순한 현상을 기록했다기보다 나중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래야 지상 교회에 은혜가 풍성하고 하늘의 상도 많습니다. 나는 나중에 잘하겠다는 그 마음이 우리를 일생토록 속인 것입니다. 은혜의 날은 언제나 현재입니다(고후6:2). 그러므로 경건한 자손들처럼 하나님 앞에 뜨겁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믿음에 충실한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들의 죽음은 영광되고 장렬한 죽음이었습니다.

5절에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했습니다.
우리가 이 족보에서 발견하는 돋보이는 또 하나의 문구는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900년 이상 산 사람이 7명에 이를 만큼 장수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누구나 겪는 사실인데 이 사실을 왜 이토록 기록하게 하신 의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일반적인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다는 점도 있지만 본문을 히브리적인 관점에서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장수는 최고의 명예로서 의로움과 경건함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잠16:31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했고, 잠20:29에는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했으며, 레19:32에서도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65:20에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를 받은 것이라" 한 이 예언을 통해 돌이켜 족장 장수 시대의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중년에 데려가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900살이 넘는 그들의 장수의 기록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들의 경건한 인생을 대변하는 것이요 참으로 명예로운 장렬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럼 맨 먼저 죽은 아담만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아담이 죽을 때 8대손 무드셀라가 58세였다면 그 동안 번성된 인류는 수백 만 명도 더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죽을 때 인류의 왕 아담이 죽었는데 그 장례식에 얼마나 많은 자손들이 몰려왔겠습니까? 외적으로도 조금도 초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장수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전8:13에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했고, 잠10:27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내가 죽은 기록이 하나님 나라의 기념책에 빛나도록 기록되어야 합니다.
족장들의 장수의 기록은 죽음의 장렬성에 강조점이 있듯이 이렇게 내가 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했습니다. 또 "자금(自今)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셨습니다. 여기 스스로 지금 죽는 죽음이란 자살도 아니고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데 주 안에서의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임종한 사람도 가르키나 성경은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가르칩니다. 또 이 죽음은 이제 영혼에 참된 쉼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한 일이 따름이라 대개 행함은 상급과 성화에 관련된 낱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을 단순한 육체적 죽음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신령한 측면에서 이는 우리 자아의 옛사람의 죽음입니다. 이 죽은 사람이 교회에 많을수록 그것은 보배가 그만큼 많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다 살아서 썩는 인간 냄새만 나면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즉 나의 생각과 아집과 죄와 세상에 대하여도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우리 기념책에도 '아무개는 몇 년도에 죽었었더라' 라고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 간증을 들어보면 부흥 현장에서 변화된 사람들의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죄에 대하여 죽는 소극적인 부분이 있고, 매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고난도 기뻐하며 살아가는 적극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위해 충성함을 예수 죽인 것을 짊어졌다고 했는데 이 부분을 주석가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바울의 경험 안에서 지속적으로 재현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의 생명이 그에게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귀히 쓰이지 못한다면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유명한 부흥사 김익두 목사의 청년 시절 깡패 김익두가 예수 믿고 은혜 받아 죽는 날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세례 받던 그 날 동네에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가 죽어 몇 월 몇 일 장례식을 합니다' 그런데 죽었다던 김익두가 살아서 돌아다닙니다. 아니 당신 죽었다더니! '맞습니다. 옛날 익두는 죽고 지금은 그 익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례로서의 세례도 중요하지만 그 세례의 의미인 내가 장자 지내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주 장사지내는 것은 다시는 살아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장렬한 기록이 하나님 나라에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족보에서 의인들의 몸부림치는 신앙적 갈망을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계승하여 입고 입히기 위해, 자기에게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위해, 그리고 온전히 내가 죽어지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한 그들의 갈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한 자손들의 갈망이요 곧 우리들의 갈망입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이제 날마다 힘써 은혜를 받으십시다. 기쁨으로 영의 해산의 수고를 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의인 족장들과 같이 지상에서와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더욱 빛나는 아름다운 일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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