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에 다가온 시험

2006. 1. 20. 22:47목양자료/3.강해설교

제목:동산에 다가온 시험
본문:(창3:1-7)
주요내용:타락과정론
작성자:한성진(합동총신졸)
자료출처:http://cafe.daum.net/agaser

요 약
에덴 동산의 죄악이 침투한 과정은 타락 과정의 원리를 보여준다. 가장 교활한 뱀을 사용하듯 시험은 생각을 타고 들어온다. 무지하고 약한 여자를 상대했듯 인간의 무지 연약 미련과 대화한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여 지성을 정복하고 감정을 정복한 후 일차 마음의 범죄와 이차 행함의 범죄로 나아가 의지까지 정복하고 회개의 기회를 주지만 회개하지 않고 외식으로 자기를 포장한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음의 결말은 심판인 것이다.

설 명

◎ 죄악의 침투 과정
(시험 드는 과정)

1단계 - 생각에 침투(1절)
원인 - 사단
뱀 - 생각의 상징

2단계 - 미련 연약 무지와 대화(2-3)
연약한 여자

3단계 - 지성을 정복함(4-5절)
단호한 거짓말

4단계 - 감정을 정복함(6절)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움

5단계 - 마음의 의지를 정복함(6절)
여자가 따먹음

6단계 - 행함의 의지까지 정복함(6절)
아담에게도 주매 먹음

7단계 - 외식하며 회개치 않음(7-13절)
무화과 잎 - 책임전가 - 하나님을 범죄의 원인자로

8단계 - 최종 결과(15-20절)
심판

(본문)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1-7)


(강해)
이 시간에는 에덴동산에 다가온 무서운 시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아주 조용하고 잔잔하며 평범한 대화처럼 보이지만 이 뱀과의 대화 속에는 사단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형상이요 지구의 통치자인 인간을 넘어뜨리려는 악한 음모가 있었습니다. 이 때 뱀의 말에 속지 않고 타락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성도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궤계를 발견합니다.

1. 사단은 늘 우리 속의 가장 영특한 도구인 생각을 사용합니다.

1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했습니다.
이 말씀을 사단이 뱀을 통하여 여자를 시험하는 장면입니다. 사단이 시험의 도구로 사용한 것은 뱀이었습니다. 그런데 뱀을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러므로 안심해도 될 대상으로 보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더구나 가장 간교했는데 여기 간교하다란 역시 '영리한, 신중한'이라는 좋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동산에서 가장 똑똑하고 영리하기로 유명한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대단한 신뢰성이 가는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심령의 에덴동산의 뱀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 뱀은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 우리에게 각종 의심과 불신앙을 주는 생각을 예표합니다. 어쩌면 사단이 뱀을 통해서 하는 시험과 우리 생각을 통해서 되어지는 시험과 그렇게 모양이 흡사합니까? 나도 모르게 슬며시 의심이 들거나 악한 생각이 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우리 속에서 우리를 만나 온갖 인간의 생각으로 시험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영리하고 합리적이며 확실한 것을 요구하는지 하는 짓이 틀림없이 에덴동산의 뱀과 같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 말씀 가지고 우리 생각 속에서부터 역사하는 사단의 역사부터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자기를 영특하고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생각에 그 비중을 크게 두므로 사단의 시험에 크게 노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지 않고 머리로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단의 미혹을 받아 시험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지 않고 머리로 믿었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백 번이면 백 번 의심하고 불평하고 대적하고 배반하다가 실족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다 생각하는 자는 스스로 미련한 자가 되어 겸손히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생각이 우리 속에 자리잡고서 이제까지 온갖 거짓선지자 노릇을 다 하며 우리를 속인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왜 그토록 인간의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치 못할 각자가 경험자요 증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생각이 뱀이다는 것을 깨닫기만 해도 대단한 영적인 진보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생각 관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2. 사단은 생각을 통해 우리의 연약과 무지와 감성을 상대로 대화합니다.

2-3절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1절에서 뱀이 하나님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강한 질문을 던지자 여자의 말씀에 대한 확신은 상당 부분 무너져 "만지지도 말라"는 내용을 덧붙임으로서 금지 규정의 엄격성에 개하여 불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라는 말로서 완화시킴으로서 금지 규정의 절대성에 대해 의심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 여자란 신령한 측면에서는 무엇일까요? 여기 여자는 문자적으로는 물론 아담의 배필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의 심령의 에덴 동산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여자는 우리 속의 연약과 무지와 미련 비뚤어진 감성 등의 상징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다 보니 제 2의 성경이라는 죤 번연의 천로역정의 내용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비록 신령하고 유익한 체험들이지만 인위적인 그런 문학작품보다는 성경을 신령한 측면에서 이해함이 더 좋지 않을까요?
본문을 해석한 주석가들의 견해와도 같이 이 여자는 얼마나 무지한 상태에 와 있는지 모릅니다. 먼저는 자기의 주인인 남편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또 그녀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한 말씀들을 간접적으로 들었을 것이므로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필이면 금단의 선악과 나무의 곁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감성이 예민하여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에 심히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범죄의 환경을 멀리함이 지혜라고 교훈합니다(잠4:15).
6절의 "자기와 함께 한 남편"이란 줄곧 함께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문맥으로 볼 때 선악과를 먹은 후에 만났다고 이해함이 옳습니다. 아담이 함께 있었으면 아마도 타락하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여자보다 하나님께 말씀을 들은 언약의 당사자요 선악과의 열매에 대한 결과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했고 동물에게 이름을 줄만큼 통찰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후에 나오는 기사이지만 아담은 다른 부분은 약하지 않았는데 아내에게만은 그녀를 사랑하여 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연약한 부분 때문에 여자가 주는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사단은 생각을 이용하여 우리 속의 미련과 무지와 연약함 등과 대화하게 만들어 그것을 통하여 시험을 들어오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말씀이 부족해서는 안됩니다. 신령한 체험도 필요합니다. 세속을 가까이 하려는 미련한 육신적인 취향 등을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부족하거나 육신적인 취향이 강한 사람들은 항상 인간의 생각에 사로잡혀 갈등하며 온갖 시험 속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충만하셨기에 사단의 시험을 말씀으로 다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시험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는 뱀이 "참으로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며 의심을 증폭시키려 하듯 진리를 증험코자 하는 심리가 생겨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증험했다고 했습니다(신 6:16, 시 78:18, 시 78:41, 시 81:7, 시 95:9, 시 106:14). 이것은 곧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 확신을 약화시키고 변질시키면 그 때부터 시험은 이제 급속도로 진전하게 됩니다.

3. 사단은 지성을 정복하여 하나님을 불신하도록 만듭니다.

4-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사단은 하나님이 마치 인간의 행복과 명예를 질투하고 두려워 한 나머지 선악과 금단 명령을 내린 이기적 신이요 거짓의 신이요 이기적인 비겁자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뱀의 전술에 말려들어 하나님을 의심하고 말씀에 대한 확신을 잃은 여자에게 뱀은 이제 하나님을 불신하도록 확고한 말을 던집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단계는 사단이 생각을 통하여 지성을 정복하는 장면입니다 이 지성의 정복이란 선이냐 악이냐 맞느냐 틀리느냐 그러니까 믿음의 사고가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의 정점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심령동산에서 이러한 사단의 음성은 꼭 내 생각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뱀의 말은 자신의 독백과 같은 것으로 사단이 지성을 정복한 장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의심이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수없이 사단에게 속고 또 속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자실 목사의 나의 목회 여화를 보면 그 목사님은 자기 생각을 철저히 하나님 말씀으로 잘 관리했습니다. 그 분은 인간 육신의 생각이 오면 사단의 시험으로 인정하고 강하게 물리쳤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이제부터는 최목사님과 같이 영 분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서지 못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과 탄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이것은 복음을 모르고 진리를 묵상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면 말씀에 서서 생각을 통제하고 온전히 믿고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말하고 행하게 되기에 형통의 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신앙훈련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사고와 가치관을 변화시키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얼마나 발전하는 속도가 빠른지 모릅니다. 생각 속에서 온갖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의 귀재입니다. 하룻밤만 생각하면 온갖 것을 다 만들어 냅니다. 어떤 이는 작은 문제도 확대시켜서 열 배 백 배 문제를 만들어 고통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모두 스스로에게 불행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했다란 시험은 있을 수 있되 그것이 시험인 줄 속히 깨닫고 마음속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즉시 추방한다는 점이 그 특징입니다. 우리 생각 속에서 더 이상 잘못된 생각들을 용납지 않고 자라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은 심령 동산에서 어떤 현상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선악과를 양심의 법의 상징으로 말한 적이 있으니 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 심령 동산에서 하나님처럼 되는 자아주권적인 사고 혹은 지성의 정점인 합리적인 사고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합리적인 사고란 하나님을 머리로 이해하려는 과학적 사고로 지성적이지만 믿음과는 반대되는 특징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었다란 이 합리적인 사고를 취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현명한 듯하지만 하나님을 과학적인 틀에 가두고 마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면 신앙이 온통 오해 투성이로 보입니다. 이런 지성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출13:11에는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죽게 하느냐 출15:24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출16:3에는 고기와 떡이 없다 출17:2에서는 마실 물이 없다 출32장에서는 인도할 신을 만들라 민14장에서는 애굽으로 돌아가자 등 등 그들의 불신은 셀 수 없습니다. 이 원망은 모세에게 한 것이 아니오 곧 여호와께 한 것입니다(출16:8). 그래서 믿음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4. 그런데 생각은 발전하여 감정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랬습니다.
실상 에덴 동산의 모든 실과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나무였습니다(창2:9). 특별히 선악과만이 더 아름다운 것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교만과 탐심의 욕망의 눈으로 선악과를 보았을 때 유난히도 아름답게 보였던 것입니다. 즉 그 생각은 발전하여 감정까지도 정복하고 만 것입니다.
선악과가 독약으로 보여야 마땅한데도 이처럼 아름답게 보였다는 것은 감정까지 정복당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롯의 눈에 죄악의 동산 소돔이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였던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이 감정을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요일2:16, 벧전2:11). 정신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면 사람이 짐승으로 보이거나 악마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정신병 상황에서 살인이 저질러집니다. 하나님의 원수인 죄악이 우리의 원수로 보여야 합니다. 남녀를 보아도 이성으로 보이지 않고 형제 자매로 보여야 합니다.

5. 감정이 정복 당하고 나면 의지가 정복 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6절 하 반절에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그랬습니다.
이제 여자의 의지까지 정복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의지에는 마음의 단계와 실행이라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여자가 따 먹은 상황을 심령 동산의 시험의 과정에 비유하여 본다면 전자인 마음으로 범죄하는 단계로 봅니다. 왜냐하면 나중 아담의 선악과 따먹음이 인류 타락의 결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죄가 죄이듯이 마음의 범죄도 분명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간음도 간음이요(마5:28) 마음의 미워함도 곧 살인입니다.

6. 그런데 마음의 범죄는 나아가 행함의 범죄로 발전합니다.

6절 하 반절에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했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요 에덴 동산의 통치자요 최종결재권자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에게 못 이겨 그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심령 동산에서 마음의 범죄는 곧 행위의 죄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눅6:45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하셨고, 행5:3에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했습니다.
잠23:7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한 대로 행동은 마음 앞에 지극히 무력합니다. 그러므로 마음만 사로잡으면 몸을 포함하는 그 인격을 사로잡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죽더라도 함께 죽자는 마음이었듯이 마음과 행동은 일체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인류는 아담 안에서 영생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언약하신 대로 죽느냐 사느냐가 있을 뿐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7. 그런데 범죄는 외식하고 회개하지 않는 데까지 발전합니다.

7절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찾아든 수치를 가리우기 위하여 무화과나무의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회개와 외식은 반대적인 의미입니다. 회개는 드러내 놓는 것이고 외식은 감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외식은 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마23:13, 마23:15, 마23:23, 마23:25, 마23:27, 마23:29). 그런데 이러한 외식을 보여준 것은 범죄가 외식하고 회개하지 않는 데까지 발전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한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불러야 함에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음성이 먼저 들렸습니다. 따뜻하던 에덴 동산이 싸늘하게 변하여 찬바람이 불 때까지도 그들은 회개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회개치 않음을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회개는 은혜의 해가 지기 전에 속히 해야 합니다. 싸늘한 심령 상태에서 회개하려고 하면 아주 힘듭니다. 회개는 속히 할수록 좋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성도들은 새 언약 가운데 살기 때문에 넘어져도 회개하면 용서하여 주십니다. 사실 믿는 자는 영원한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는 에덴 동산에 다가온 타락의 과정을 통하여 심령 동산의 타락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에덴 동산이나 심령 동산이나 타락의 과정은 같은 원리입니다. 시험의 침투는 여러 과정을 거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빠릅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사단이 준 것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물리칠 때 심령 동산에는 사단이 틈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범죄에 이르렀다면 진실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이 진리를 배웠으니 우리 성도들은 한 사람도 마귀의 꾀임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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