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원한 보상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 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 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5~8)
우리는 ‘면류관’ 하면 왕들이 쓰는 보석 달린 거대한 금관을 생각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썩지 않을 면류관(고전 9:25),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등의 가가 여러 가지의 다른 면류관으로 천국에 가면 번쩍번쩍하는 큰 면류관들을 쓰고 있는, 그것도 몇 개씩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어떤 분이 간증을 하는데, 꿈에 천국에 가서 보니 남들은 번쩍번쩍 빛나는 금 면류관들을 여러 개를 쓰고 있어서 자기는 어떤 면류관을
주실 것인가 하고 기다리고 있던 중 “너는 이것을 써라” 해서 보니 개털모자를 씌어 주시는데 부끄러워서 벗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꽉
죄어서 “개털모자, 개털모자” 하다가 깨었고, 그 후에는 자기를 “개털모자 장로” 라고 부르면서 회개하여 열심히 봉사했다는 유명한 간증이
있습니다. 물론 참으로 은혜가 되고 감명 깊은 간증이며 그 전체가 의미하는 내용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면류관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신약성경의 구절들에 잘못된 개년을 부여하는 것이며 참으로 중요한 가치 있는 진리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시대의 생활과 당시의 언어를
이해한다면 성경의 메시지는 보다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의 성경구절 들에서 스테화노스는 머리에 쓰는 번쩍번쩍하는 왕관보다는 승리자에게
주어진 보상의 의미로 쓰여진 것입니다.
신약에서 면류관으로 번역된 다른 말이 있는데 디아데마 입니다. 이 것은 왕의 머리에 쓰는
장식들이었고 나아가서 왕관을 의미했던, 글자 그대로 왕의 관 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3절에 사단의 머리에 일곱 면류관(디아데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계시록 13장 1절에 적그리스도 뿔에 열 개의 면류관(디아데마)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주 예수님이 최고 통치자로 다스리실
많은 왕국을 나타내며 진정으로 만 왕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디아데마에 비해서
스테화노스로 번역된 면류관은 머리에 쓰는 왕관보다는 전쟁의 승리자에게 씌어준 승리의 보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라톤 경기나 원반
던지기나 레슬링 시합의 승리자에게 주어졌으며 또 명예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국가유공자-예를 들면 전쟁에서 승리해서 돌아오는 장군-에게
씌워졌습니다. 따라서 스테화노스는 승리의 상징이었고 가치 있는 명예와 축제의 상징이었습니다. 또한 이 말이 직접 보상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2년경에 쓰여진 고대문서에는 어떤 사람의 특별한 봉사 때문에 구리 5달란트의 보수(스테화노스)를 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스테화노스는 은을 오우크 나무, 파아슬리, 올리브, 장미 등으로 엮어서 만들었습니다.
앞에 인용한 디모데후서 4장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스테화노스)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a)
여기에서 선한 싸움 앞에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상을 받게 되는
그 유일한 선한 싸움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관객들이 레슬링 경기를 벌이고 있는 두 선수를 정신을 집중해서 보고 있는 레슬링 경기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에서 영어단어 agony(고민)가 나왔습니다. 이 싸움은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그야말로 사력을
다하는 혈투인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싸웁니까? 시들어 버릴 오우크 나무로 된 스테화노스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야유를
보내며 조롱할 변덕스러운 군중들의 박수갈채를 위해서입니까? 그들의 이 싸움을 생각하며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봉사에 있어서 게으름, 나태,
미지근한 태도 등을 깊이 회개하여야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의 사명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선한 싸움에서 “선한”은 원문에서
칼로스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내적, 본질적으로 좋은 것보다는 외형적으로 좋게 보일 때에 사용된 단어였습니다. 곧 관객들이 감탄한 탁월한 기술과
힘의 아름다움(칼로스)을 말할 때 사용된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세력과 대항해서 싸울 때 주님께 돌릴 기술과 영적 능력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고통의 순간까지 상대방과 끝까지 생명을 내건 이러한 싸움을 사도 바울은 싸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달려갈 길은 마라톤 경주로를 의미합니다. 마쳤다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현재
완료형입니다, 로마에서 순교를 기다리고 있는 사도 바울이 이제 경주를 끝내고 우승의 결승점에서 휴식하며 승리를 향하여 질주해 온 그 경주로를
뒤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경주는 끝났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의 스테화노스인 것입니다. 관객들이 경기가 끝나면 경기장을 떠나고
면류관을 쓴 승리자들이 기뻐하듯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삶의 경기장을 떠나서 하나님의 갚아 주시는 스테화노스를 받아쓰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도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수고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그리스의 마라톤 경주라는 예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경주 자들은 곧 시들고 말라버릴 오우크 나무 잎사귀로 된 스테화노스를 얻기 위하여
필사의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봉사의 대가로 받는 것은 영원히 썩지 않는 영원히 빛나는 스테화노스 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것을
위해서 자기 몸을 쳐서 그 몸을 노예상태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 했습니다. 버림이
된다는 것은 원문에 ‘아도키모스’ 로서 “시험을 치른 후에 그 시험에 적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절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도 그리스의 운동경기에서 온 것으로 “선수가 훈련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스테화노스를 위한 경주에 참가할 자격을 박탈한다”라는 뜻에서 온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선포한 말을 자신은 실행하지 않는다면, 즉 아무런 수고와 봉사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격을 박탈당해 스테화노스를
얻기 위한 경주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직분이 박탈당해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수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승리의 면류관 스태화노스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에서도 생명의 스테화노스 입니다. 악을 행하도록 유혹을 받아온 하나님의 자녀가 죄 짓기를 거절하고 시험에
성공적으로 대처한 합격증명서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원문에는 생명 앞에 정관사가 있으며 이것은 특별한 종류의 생명, 곧 신자가 죄의 유혹을 이게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저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의 보상을 이 생명의 스테화노스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에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에서도 영광의 스테화노스 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에서도 생명의 스테화노스입니다.
그런데 왜 의의
면류관이라 했을까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다 살펴보시고 꽤 뚫어보시고 잘 알고 계시는 하나
님께서 인간은 몰라도 끝내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른척하신다면 하나 님이 불의하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안심하고 충성하며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다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성하다가 중간에 시험이 들어서 “하니님 이 살아계시긴 무엇이 살아계셔! 웃기지마!” 하며 중도 탈락하시는 분들은 너무 억울해서
통곡하며 심히 울 때가 올 것입니다. 남이 안 알아 주어도 주님은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 하셨나니” (히 6:11~17)
주님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수고와 봉사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면 또 영원한 보상인 의의 면류관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상을 얻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충성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우리의 영원한 보상-스테화노스
2006. 1. 8. 23:57ㆍ목양자료/2.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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