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하문명

2005. 12. 28. 23:52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중국문명은 황하와 양쯔강 두 큰 강이 있다. [4대문명지도]
BC30 세기경 전에 황하 강 중류에 기름진 황토 땅이 농업에 알맞아 이곳에서 문명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전설로 3황5제의 요순(이 시대를 '요순의 치'라 하여, 가장 이상적인 지배자 상)의 평화 시대를 거쳐
하, 은, 주3대가 계속 되었다.
춘추전국시대를 진나라가 천하 통일한 황제가 진시황제(황제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夏, BC 22~ 19/18세기, 전설상으로는 BC 2205경~1766경)
전설로 전해지나 역사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황허 강의 치수에 큰 공을 세운 우(후에는 수확의 신으로 신격화되었음)가 창건했다고
하며, 우는 최초의 세습제(상속제)왕조를 세웠다고 한다.
순은 죽은 후 천자(지배자)가 되었다고 한다.
걸(桀)까지 이르는 왕계가 전설로 전해진다.
17대 걸은 매희(喜)에게 빠져 정사를 게을리 하였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일삼으며 잔학행위를
자행하여 결국 분노한 백성들이 탕(湯)을 지도자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탕은 은(殷)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중국의 제후를 오랑캐와 구별하여 중화(中華)라고 한다.)


<거북이 뼈의 '갑골문자'>

(殷, BC?- 1100?)
가장 오래된 왕국,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겨서나 BC 20대 반경 왕이 하남성 안양현 *은허로 수도로 정한
뒤로 망할 때까지 도읍 했다.
은나라 왕들은 점을 쳐서 점괘에 의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왕들이 자신이 신과 같은 절대자라고 믿어 방자하며, 혹독하여 죽을 때에 시종과 시녀 외에
군대(500-1000)까지 함께 산채로 묻었다.
합리적인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하였고, 무왕은 주 왕조를 세웠다.

*은허 유적
청동기와 거북이 뼈 및 짐승의 뼈에 글자가 적힌 것이 발견되었다.
이 글자는 모양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다.
이것을 상형문자라고 하고 한문의 바탕이 되었다.
이것을 '갑골문자'라고 하였으며, 갑골 문자는 점괘로 쓰였다고 한다.
은나라 왕들은 선조의 제사에 점을 쳤는데, 여기에 나오는 여려 왕의 이름이 사기에 내려오는 계보와
대게 일치한다고 한다.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는 전설에 의하면 지나친 방탕으로 나라를 잃었다고 한다.
애첩 달기(己)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을 만들고,
그 주변에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서로 잡으러 다니는 놀이를 하게 하였다.
또 대단히 잔혹해서 호수 근처 나무에 사람고기를 걸어놓았고 또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는 포락(怏烙)의 형을 구경하면서
웃고 즐겼다고 한다.
게다가 7년에 걸쳐 건축한 호화로운 궁전 녹대(鹿臺)의 공사를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그 궁전은 높이가 180m, 둘레가 800m에 이르고 문과 궁실들은 정교한 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주(周 : BC 1111-255)의 창건자인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무너뜨림으로 주(紂) 왕은 자신의
궁전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 하였다.
BC 14세기 경, 1년 360일을 12개월로 나누었으며, 1개월을 30일로 하는 고도로 발달된 달력이 있었다.
이 시대부터 중국인의 문자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달'(moon)이 '달'(month)의 상징이 되었다.
달력은 양력과 음력을 모두 인정하였으며, 양력의 계절적인 현실성에 음력을 근본적으로 조화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는 윤달을 더하였다. [
달력 참조]







<왼쪽의 갑골과 갑골문자>


(周 : BC 1111-255)
은나라 서쪽변두리에 문 왕이 지배자가 되었고, 아들 무왕이 은나라 치려고 할 때에 *백이 숙제
반대하였으나, 목야 전투에서 승리하여 주 왕을 죽이고 은을 대신하는 주 왕조를 세웠다.
이 때가 BC11 세기이며, 수도는 서안에 정하고 신하에게 땅을 나누어주는 봉건제후를 시작하였다.
신하들은 영주가 되었는데 이를 중앙집권제라고 한다.
점차 나라가 문란하여지고 유목민이 침입이 시작 되여, BC770년 13대 *평 왕 때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는데 수도를 옮기 전을 서주라 하였고, 이후를 동주라 한다.

*백이 숙제
주나라의 전설적인 형제으로 왕위를 둘 다 마다하고 나라를 떠나 주나라에 머물 때에
무왕이 은을 치려 하자 의리에 위배된다고 만류하였다.
주나라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였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다가 고사리도 주나라 것이라고
굶어 죽었다.
유가에서는 '청절지사'로 표본을 삼았다.

*평 왕
평왕은 유왕의 아들이며 신씨 왕후의 소생으로 태자로 있었다.
아버지 유왕은 총애하는 포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신후왕비와 태자를 폐하였고,
포사를 정식왕후로 삼았으며, 포사의 아들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포사는 아름다운 후궁으로 그녀는 본래 길에 버려진 고아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포나라 왕의 눈에 들었다.
포나라 왕은 유왕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대신 사죄의 선물로 포사를 유왕에게 바쳐졌다.
어려웠던 과거의 일로 그녀는 절대로 웃지 않았다고 한다.
유왕은 그녀를 웃게 하려고 별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실수로 봉화가 올라가고 제후들은 긴급사태에 놀라 군사를 이끌고 급히 왕국으로 달려왔다.
허겁지겁 달려온 제후들이 봉화가 잘못된 것을 알고 그만 맥이 풀렸다.
그 모습을 보고 어찌나 우스웠던지 포사는 그만 웃고 말았다.
유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일부러 봉화를 올리게 하였다.
숨차게 달려온 제후들은 투덜거리며 여러 번 돌아가게 되었다.
BC770년 신씨 왕후의 아버지 신후(申侯)는 견융과 연합하여 유왕을 공격하였고,
유왕은 봉화가 올렸지만 제후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유왕은 '리산'산에서 죽고 서주는 멸망하였다.
평왕은 신씨 왕후와 제후들에 의해 옹립되어 허난성 난양시에서 즉위하였다.
당시 주의 수도 종주는 야만족의 침입을 빈번하게 받고 있었다.
평왕은 이를 피해 수도를 동쪽의 낙읍(洛邑:지금의 허난성 뤄양시)으로 옮겼는데,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이때부터 주 왕실의 힘은 약해졌고 정권은 제후에 의해 유지되어 중국은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춘추시대로 접어들었다.


<주나라(서주) 기원전 11세기 종교의식에 사용된 용기'얀'>


춘추, 전국 시대(BC770-220)

춘추(BC770-420)
춘추관을 맡은 공자가 자기의 나라, '노'나라 역사를 쓸 때에 이 시대를 '춘추'라 이름지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낙양'시대 350년 동안을 말한다.
제후의 세력이 커지자 왕권은 약해져서 명맥만 유지되었고, 침략을 받으면 힘있는 제후가 물리쳤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야기
춘추시대 말, 월나라 왕 구천과 오나라 왕 부차가 원수처럼 싸웠다.
오왕 부차의 아버지가 월왕 구천에게 싸움에 패하여 죽자, 부차는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풀 섶 위에 자면서 복수를 다짐하여 이것에서 '와신'이란 말이 생겼다.
2년 뒤에 다시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 이번에는 월나라가 패하였다.
월왕 구천은 쓸개를 옆에 두고 혀로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하여 이것을 '상담'이란 말이 생겼다.
그래서 '와신상담'은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의 고사성어가 생겼다.
오왕 부차가 새 궁전을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구천은 사치와 방탕에 빠지기를 바라고,
좋은 목재와 미녀 50명을 선물로 보냈다.
그 미녀 중에 '서시'라는 여인은 미천한 태생의 여인으로 부차는 서시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월에게 패하여 자결하였다.
이래서 경국지색(傾國之色, 여자 때문에 나라가 기울러진다)란 고사성어가 실감난다.

전국(BC420-220)
BC420-220 사이를 전국 '7웅' 시대라 한다. 7제후가 세력을 키워 제후 국가를 만들었다.
'7웅'은 한, 위, 조, 제, 연, 초, 진으로 제후는 왕이라 자칭하고 영역을 통치했다.
그중 서쪽의 진나라는 정치를 개혁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모든 제후 국가를 통일 시킨 사람이
'진시황제'이다.(BC221)

<뤄양(낙양: 洛陽)있는
'룽먼석굴'>

시대적 배경
전쟁이 심하여 지면서 식량이 필수가 되였고, 농업에 힘을 기우려 쇠로 만든 연장이 쓰이기 시작 하면서
쟁기가 발명되어 생산량이 증가하게 되었다.
또 상공업 발달로 청동기 화폐가 쓰였고, 상공업 중심의 대도시가 생겼으며,
경제권을 지배하는 세력의 상인이 생겼다.
상공업은 씨족사회를 이탈시켜 가족 단위로 바뀌면서 가문의 배경 없이도 출세가 가능하여 졌다.
몰락하는 귀족과 가족은 다른 나라로 옮겨다니게 되었다.
사람이 모자라 필요한 인재는 출신과 관계없이 채용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상가도 나왔는데, 이들을 '제자백가'라 한다.
그중 유명한 사람이 *공자와 *노자이다.

*공자 (BC 551-BC 479)
공자는 노나라 사람으로 전쟁이 되풀이되는 세상을 평화로 만드는 방법은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가족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사랑을 남에게도 베풀 것을 가르쳤다.
이 가르침의 기본인 사랑(착한 것)을 인(仁)이라 부르며, 효와 예의 바탕이 되었다.
후에 제자들이 공자의 대화를 책으로 만든 것이 '논어'이며, 이 가르침을 '유교(儒敎)'라하고 한다.
이것을 배우는 사람을 유가 또는 유생이라 하며, 후에 맹자, 순자가 유교를 더욱 발전시키고,
우리나라의 이조 역사의 바탕이 되었고, 일본에 전해주어 큰 영향을 끼쳤다.

공자와 인육
공자는 인육(사람의 고기)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인육 해(소금에 절인것)'를 좋아 했다고 하며, 인육 해가 없으면 식사를 잘하지 않을 정도라고
'예기'와 '장자'편에 기록이 나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르침에 모순이 생긴다.
당시에는 정육점에서 인육도 같이 팔았고, 인육을 먹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제자 중에 '자로'는 어머니를 죽이고 아들의 영토를 빼앗은 괴외의 반란에 맞서 싸우다가 죽어 시체는
살점이 잘게 토막내어져 해가 되어 그들의 식탁에 인육 해가 되어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공자는 자기 집에 담아 둔 인육 해의 독을 모두 깨버렸다고 하며, 공자도 자로가 죽은 뒤 1년이
안되어 눈을 감았다.
옛날에 인육은 동서양이 다 먹었다고 한다.

*노자(BC 6세기경)
공자보다 백년 늦게 시작 되였으며, 노자 사상은 공자의 사상과 정 반대의 사상이었다.
효도와 예절은 생활에 불편하게 하므로,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연 그대로가 좋다는 사상으로 노자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이 '장자'이다.
두 사람의 사상을 합쳐'노장사상'이라 한다.
이 사상을 '도가'라 하고, 이 가르침을 '도교(道敎)'라 한다.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