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제국의 멸망

2005. 12. 28. 23:41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서로마제국의 멸망

1] 5현제시대

로마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하며, 이 때는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
이 때의 영토는 북쪽은 라인강, 도나우강,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 사막, 남쪽은
사하라사막까지 광대한 영토였다.

네르바(96-98): 사회복지 정책을 폈다.
트라야누스(98-117): 최초로 속주국 스페인사람으로 평생 속주국 순행을 하였다.
하드리아누스(117-138): 그리스문화 애호가이며, 그의 기독인 박해는 자정을 맞이하였다.
안토니누스 파누스(138-161): 경건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로마 성벽을 쌓았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게르만의 침입으로 토지를 주어 제국의 방위를 게르만인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스토아 철학이 담긴 '명상록'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명상록은 60년대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다.
이 때에는 속국에 많은 도시를 로마식으로 건설하고 신전, 극장, 원형극장(경기장), 공중목욕탕,
바실리카는 필수적으로 갖추었다.
바실리카는 공공건물으로 법정, 상업거래소, 집회장, 때로는 궁정 등을 말하며, 건물의 형식으로
직사각형의 건물을 말한다.
도시들의 노화로 시민은 농촌으로 옮겨가고 세금의 부담은 소작인에게 무거워져갔다.
대농들은 노예는 한정되고 비능율화로 생산은 감소되었고, 일반인의 구매력의 감소로 경제는
악화되어 위기시대가 오고 있었다.

2] 군인황제시대
코(콤)모두스(180-192): 아우렐리우스 아들로 전제정치를 하다가 고문관들이 최우수 레슬링 선수
나르시소시에게 시켜 그를 목졸라 죽이게 하였다.
그는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가 검투사처럼 싸우거나 활과 화살로 사자를 죽이기도 하였고,
1,031번의 검투시합에서 승리하고는 자만하여 자신을 헤라클레스처럼 숭배하라고 하였다.
182년 누이 루킬라가 원로원 의원들과 공모하여 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상당수의 원로원들을
황제가 처형하였다.
그의 잔혹한 실정(失政)과 내분으로 인해 84년간 로마 제국이 누려온 안전과 번영의 시대가 끝났다.
동쪽은 사산왕조의 페르시아와 맞서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 '검투사(gladiator')는 황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였으나 조금은 역사와 다르다.
카라칼라(211-217): 세금의 수익를 위하여 제국내의 모든 시민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시민에게 민심을 사려고 큰 *목욕탕을 건설하였는데 1600개의 좌석, 6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목욕탕에 도서관, 휴게실 등을 갖추었고, 바닥은 모자이크하였으며, 벽은 대리석으로 장식하여 조각상과
분수가 있는 화려한 욕탕이었다고 하는데 유적이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세베루스(222-235): 세베루스왕조의 마지막 황제, 살해당한 후 235년에서 285년 사이 50년 동안에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황제 시대가 되었다.
데시우스(249-251)는 그리스도교의 *박해의 새벽이었다.
그는 250년 포고령을 내려 로마 신에게 희생의 제사를 바쳤다는 증명서를 지니고 다녀야 무사하였다.
포고령은 많은 기독인의 이탈자를 낳게 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4두마차를 타고 로마에
입성하는 모습>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유와 멸망의 원인
그리스도교들은 황제가 자신이 신이라는 주장하는 것을 배격하였고, 또 백성들이 섬기는 로마 신을
배격하여 로마 신전은 황폐화하였는데 이 때문에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에 반대하며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하나님에게 평등하다는 것이 못 마땅하여
유대인은 그리스도교를 배격하였다.
이 때에 기독교를 박멸을 위하여 조직적인 시도를 하였다.
로마는 모든 신앙에 자유를 주었으나 그리스도교만은 네로 때부터 박해를 시작하여 콘스탄티우스 황제
때까지 계속되었다.
로마의 멸망 원인은 휴머니즘의 상실로 노예와 식민지인의 평등주장을 탄압하였고,
풍요의 평안함 때문에 전쟁을 게르만인에게 대신 시킨 것이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목욕탕 이야기
로마 멸망의 한 이유로 목욕문화를 말하는데 목욕탕은 군사훈련 용으로 스포츠시설을 갖추고 점령지마다
만들었다.
욕탕에는 당시에도 때밀이와 마사지여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젊은 노예가 하였는데 남자는
여자노예가 여자는 남자노예가하였고, 목욕탕에도 창녀가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사포라는 비누를 사용하였고, 귀족의 여인은 우유에 목욕을 하였다.
사포는 점토나 재를 우지(기름)에 반죽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켈트족은 비누를 사포(saipo)라고
하였고, 이것이 현재의 비누(soap)의 어원이다.
BC 600년경 페니키아 사료에는 산양의 기름에 나무재로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네로의 왕비 포파이아는 당나귀를 젖을 사용하였고, 여행 할 때는 당나귀 떼를 몰고 다녀야 하였다.
로마는 소변비누의 인기 때문에 공중변소의 소변으로 다툼이 생기자 황제가 허가권을 팔았다고 한다.
일본의 목욕탕은 남녀 혼탕을 한 때는 금지하였는데, 여자들이 다시 혼탕을 원하여 복귀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여자들이 목욕 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같은 시간에 몰려 혼잡 한데 반하여 남탕은 비교적
한가하였고, 여자들이 저녁 늦게 목욕 할 때는 무섭워 오히려 남자와 있는 것이 더 편안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욕탕에는 3가지의 돌이 있어 필요한 곳의 털을 제거하였다고 한다.
일본 목욕탕에서는 술도 먹고 유유자적하게 시간도 보내고 토론도 하고 데이트도 하였다고 한다.
터키탕은 원래는 일본의 도루코탕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본은 터키를 도루코라고 부르는데서 기인한다.
도루코탕이 소프란도(비누세계-soap land)란 이름으로 바뀐 데는 터키 정부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우리 나라도 일본과 같이 항의을 받고 터키탕이라는 명칭은 못쓰게 되었다.

3]콘스탄티누스의 제국
28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으며 그는 황제가 하나 뿐이기 때문에 다툼이 계속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로마를 4개로 나누어 다스리기로 하여 로마시 안에 4명의 황제가 있게 되었다.
이것은 황제가 서로 다투는 또한 폐단이 되었는데 심지어 6명의 황제가 있어 서로 다투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강을 잡고 국력을 키우기 위하여 6명의 황제를 하나씩 제거하였다.
갈레리우스, 막시미안, 리키니우스, 또 다른 막시미안을 제거하고 마지막 막센티우스를
AD312년에 격파하고 로마에 입성하였고, 다음해 AD313년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발포하여 기독교는
자유를 얻어 박해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황제는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의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니케아 신경'이 공포되었다.
이 밖에도 부활제의 시기, 이단자에 대한 세례, 서품의 장애, 속죄 및 사제제도 등을 제정, 결의하였다.
AD330년 종교와 통치의 확장으로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게르만을 격퇴하고, 게르만인을 제국 내에 정주하게 하여 국가방위를 맡기고 많은 개혁을 하였다.
그러나 소작인의 이동을 금지하여 자유로운 시민 생활이 구속받게 되었고, 군사국가는 더욱 강화되었다.
율리아누스(361-363)는 흐름을 역행하여 이교를 부흥시키고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카라칼라 목욕탕의 폐허 중에
오페라 무대 일부>


*밀라노칙령
AD313년2월에 주교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회견한 것을 발표한 칙령이다.
기독교의 신앙 자유선언으로 탄압에 종지부를 찍었다.
박해 때에 몰수한 재산반환하고 종교재산과 감독자 세금면제와 병역면제 등을 시행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교회에 대한 세금면제는 지금까지도 모든 종교에 대하여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1세(AD306-337)
아버지 콘스탄티우스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나, 306년에 아버지가 죽고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로마 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막센티우스가 자기가 정통황제라고 자칭하므로 그와 전쟁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310년 10월 27일 전쟁 중 저녁 노을에 '십자가의 깃발로 싸우라'는 글자를 보고
전 군대가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싸워 3배나 많은 적을 무찌르고 승리하였다.
그 뒤로 황제와 어머니 헬레나는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 전파에 노력하였으며,
황제는 의회에 기독교를 권하였으나 의회는 거절하였다.
당시 100만명의 로마를 이교도에서 기독교화 하려다가 실패하여 새로운 종교도시를 만들려고 하였고,
또 확장되는 로마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교통과 해상교역의 요충지인 비잔티움을 완전히
로마식의 대도시로 건설하여 새로운 종교도시를 만들어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도시의 이름을 '신 로마(New Roma)'라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그 이름보다 황제의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의 도시'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
비잔틴제국참조]
현재지명은 터키의 이스탄불이다.
모든 권력의 주체인 황제와 귀족이 떠난 로마시는 빈 도시가 되었으며 서로마를 지키는 군사는 모자라
게르만족들의 남자로 채웠는데 이것이 서 로마가 멸망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또 비잔틴 이전은 로마제국이 동과 서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정치에 기독교를 이용하였다고 어느 역사가는 말하나 기독교가 지금과 같이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은 그의 공로이며 하나님이 로마제국을 이용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로마제국의 재건자로 높이 평가하여 대제라고도 부른다.

4]게르만의 이동, 로마제국의 분열, 서로마제국의 멸망
테오도시우스(379-395) 1세: 라인강과 다뉴브강 쪽에 훈족이 침입하여 AD376년에 서코트족이
정주 할 땅을 찾아 남하하였고, 황제는 정주를 허락하였다.
AD380년 기독교를 국교로 하여 이교도의 탄압과 로마신전에 제사를 금하였다.
황제는 전 로마를 다스리는 마지막 황제이다.
AD395년 황제가 죽은 뒤에 로마는 동, 서로 분리되어 동쪽은 아르카디우스, 서쪽은 호노리우스가
영유하여 로마는 동, 서로 분리되었다.
게르만족이 이동으로 인하여 로마는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함락하였고,
476년 반달족 오도아케르 장군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1,000년 역사의 서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다.
494년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테오도리쿠스)는 동로마 황제 제노의 요청에 의해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에서 쫓아낸 뒤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동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탈리아 재정복하였다.
568년 멀리 스칸디나비아에서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롬바르드족이 침입하여 대부분의 반도를
여러 개의 공작령으로 나누어 지배하다가 프랑크 왕국에 속하였다.
한편으로 409년 서고트족이 스페인인을 침략하여 586년에 왕국을 건설하였고,
그 북쪽으로는 살리 프랑크족이 자리를 잡아 5세기말에는 강력한 두 왕국이 생겼다.
갈리아(현 프랑스)에서는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주교의 지지를 얻어 활발한 정복에 나서
큰 영토를 차지하고 프랑크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5세기 중반에 영국은 앵글족과 색슨족이 점령하였다. 428년 반달족은 스페인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반달족 왕국을 세워 서 로마와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였다.


<막센티우스와 싸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동로마제국을 비쟌틴 제국이라고도 부르는데, 1453(BC753년부터)년 오스만 터키에게 망할 때까지
무려 약 2200년을 지속하였고 신성로마까지 합하면 약 2650년간이나 지속된다.
[동로마제국의 역사는
비쟌틴 제국에서 다룬다]
독수리 이야기
로마제국의 상징은 독수리이다. 유럽에서 지배자들은 로마와 같은 제국을 누리고 싶어 너도 나도
독수리 문장을 가지려고 하였다.
962년 독일의 오토대제는 신성로마 황제가 되어 독수리를 문장으로 삼은 것이 지금까지 독일의
상징이 되었다. 또 신성로마제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로 가게되어 지금도 독수리 문장이
오스트리아에 전해져오고,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이었던 폴란드도 이 문장을 가지게 되었다.
신성로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은 스페인도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였다.
러시아는 로마황제보다 2배나 존엄하고 위대하다고 머리가 2개인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였고,
로마 '카이사르'를 이름을 러시아 황제의 명칭으로 사용하여 '차르'라고 하였다.
나폴레옹이 1806년 신성로마를 멸망시키고 황제에 오르고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였다.
미국도 로마제국을 닮고 싶은지 독수리를 대통령의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럽에서 강대국에 속하는 영국은 사자를 문장으로 하고, 프랑스는 백합을 문장으로 하였다.

5]유럽의 인종
여기서 역사의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유럽의 인종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
유럽 인종은 인도 아리안계로, 아리안(Ariyan)은 '고귀한' 뜻으로 이란, 인도에서는 '아리야'라고 하며,
이란인은 스스로는 아리야(Ariya)인이라고 한다.
아리안은 큰 의미로 인도와 유럽을 말하였으나, 지금은 인도에만 국한되어 사용한다.
유럽의 아리안 순수인종은 게르만의 노르딕인을 말하는데 이들을 코카소이드(북유럽인)이라고도 한다.
이들이 오늘날 문화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우월주의는 유색인을 멸시하고, 독일의 히틀러는
'비 아리안의 청소'를 부르짖으며 유대인과 짚시를 대량학살 하였다.
현재는 유럽어의 어족(語族)으로 인종을 분리하여 지금의 분리는 대개 4부류로 한다.
여기서 제외되는 종족은 유대인, 아랍인, 집시, 바스크족, 몽고족 등이다.

(1)라틴족
라티움에서 유래하고, 낭만적이고 키가 작은 편이며 가정적이고 여자가 가정의 중심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살고 있으나 프랑스는 인간잡종으로 남쪽은 동게르만의 부르군트인,
북쪽은 서게르만의 프랑크인이 살고있다.
스페인은 동게르만의 서코트 인이 살고있으며, 그 외에 포르투갈, 루마니아에도 살고있는데
루마니아는 '로마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2)게르만
키가 크고 엄숙하며, 고집이 세고 성질이 거칠다.
금발머리에 벽안(파란 눈)이며, 남자가 가정의 중심이고 아이와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로 여긴다.
본래 게르만 원시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유틀란트 반도와 북독일에 있었다.
AD375 아시아에서 *훈 족이 침입하여 동게르만의 코트인들이 대이동을 시작하여 각지에
게르만왕국을 세웠다. 게르만을 3부류의 종족으로 나누어 본다.

동게르만- 동코트인(이탈리아 점령), 서코트인(스페인 점령), *반달인(북아프리카 점령)
부르군트인(남프랑스 점령)
서게르만- 앵글로와 색슨(영국 점령), 아라만인, 프랑크인(서프랑크-프랑스, 동프랑크- 독일)
북게르만- 덴마크인(덴마크, 네덜란드), 노르만인(스웨덴, 노르웨이) 이동하지 않은 게르만이다.


<로마와 게르만의 전투>

*반달리즘(Vandalism)
반달리즘은 문화와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5세기초 로마와 지중해 연안에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반달족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침략자들은 점령당한 자들의 항거의 의지를 분쇄하기 위하여 약탈과 문화재를 파괴하였다.
또 침략자들은 문화와 예술을 받아드리는 방법으로 문화와 예술품을 약탈하거나 또 임진왜란 때에
도공들이 끌러간 같이 문화와 예술에 종사하는 자들을 납치하여갔다.
약탈하지 못하는 것은 파괴하였는데 파괴하기 손쉬운 팔, 다리, 목을 파괴하거나 불을 질렀다.
유럽의 박물관에서 팔, 다리, 머리가 없는 동상들은 많은 것은 반달리즘 때문이다.

(3)슬라브족
남자는 백색의 짧은 머리형, 여자는 흰 피부에 머리카락은 블론드(금발), 뚱뚱하고 키는 유럽의
중간인데 현재의 동유럽인이다.
북아시아와 러시아, 폴란드, 첵코, 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이 슬라브족이다.
서슬라브는 카톨릭교이고 동남쪽의 일부는 동방정교회이며 남쪽 일부는 회교도이다.

(4)켈트족
용감하고 게르만인과 비슷하며 지금은 유럽에 동화되었으나 아일랜드가 유일한 켈트족이다.
한 때는 전 유럽을 휩쓸고 다녔고 BC4세기초에는 로마에 침공하여 포 강 유역에 정주하였다.
로마의 시저가 쓴 '갈리아 전기'의 갈리아는 켈트족을 말한다.
전 유럽이 켈트어를 썼다고 하나 로마의 라틴어가 정복하고 뒤이어 게르만어가 정복하여
이제는 그 언어를 찾을 수 없다.

*훈 족 [
스텝루트지도]
훈족은 370년경 유럽 남동부를 침략해 이후 140여년 동안 유럽 남동부와 중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이다.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족이 한족에 쫓겨나 서쪽으로 간 것이 훈족이라고 하는 것에는 학자들이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도 있으나, 흉노족이 훈족이라는 근거도 있다.
그 근거로는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기마민족(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기존에 있던 성을
연장하여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만리장성 밖의 흉노족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것을 근거로 한다.
사라진 이유는 흉노족이 AD350-390년 사이 자연의 재해(추위와 가뭄)로 좋은 환경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여 스텝루트(초원의 길)의 마지막 지역인 유럽의 헝가리까지 이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이 AD395년에 동게르만족의 동코트를 무찌르고, 서코트를 침략하므로 서코트인은 로마로 이주
하였는데 이것을 게르만의 대 이동이라고 한다.
훈족은 전사(戰士)로서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마상사수(馬上射手)들이었으며, 완벽한 승마술, 잔인한 공격과 예측을
불허하는 반격 능력, 그리고 전략적인 기동성 등으로 어떤 싸움에서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헝가리 일대에서 자리잡아 동로마한테는 조공을 받았고, 게르만을 복종시켜 흑해연안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이들은 국가라고 하기보다는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도적떼와 같았다.
서로마는 게르만과 연합하여 아틸라(제위, AD434-453)왕을 무찔렀다.
아틸라를 서구인들은 뿔 달린 도깨비로 여겼으며 그가 갑자기 죽은 뒤 점점 쇠퇴하여 흑해쪽으로
이동하여 타민족과 혼혈하고 동화되어 소멸되었다.
헝거리 사람들은 아틸라의 아들이 헝거리를 세웠다고 믿고 있다.
이후역사는 게르만-롬바르드-프랑크왕국-신성로마 제국-도시국가-이탈리아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