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12. 28. 23:48ㆍ교회사자료/2.초대교회사
유럽의 고대역사 (BC300-AD500)
헬레니즘제국 [제국지도] |
<로마를 찿아 온 알렉산더> |
*에페이로스 에페이로스(에피루스, Epeiros)는 그리스 핀도스 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고대에는 그리스 본토에 속하지 않았으나 이 지방의 도시 도도나에 있던 제우스 신전의 신탁은 예로부터 유명하였다.많은 부족이 분립해 있었으나 BC 5세기부터 몰로소스족의 왕가가 이들 부족을 지배하고 그리스 문화의 도입에 힘썼으며, BC 3세기초의 피로스 왕(재위BC297-272) 때 그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피로스(Pyrrhos)는 BC 319년에 태어나 어려서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뒤 추방되었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어 복위하였다. 그는 마케도니아로부터의 독립하기 위하여 전력하였다. 마케도니아의 내분을 틈타 마케도니아왕 데메트리오스를 공격하여 테살리아의 태반을 빼앗고 아이톨리아 및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으나 BC 283년 격퇴 당하였다. BC 280년에는 이탈리아에 있는 동족 타렌툼의 청원에 따라 돈 받고 원정하여,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에 그는 코끼리를 이용한 전쟁을 잘하여 한니발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코끼리 전법은 피로스 왕에게서 배운 것이다. BC 280년 아스쿨룸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로 진격하여 카르타고군을 추격하였다. BC 276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의 군대는 오랜 전투로 지쳐서 BC 275년 베네벤툼에서 고전한 후 귀환하였다. BC 273년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펠로포네소스에 원정하였으나, BC 272년 스파르타 공격에 실패한 뒤 전사하였고, 피로스가 죽은 후 에페이로스는 급속히 쇠퇴하여 BC 168년 로마군의 침입을 받아 15만 명의 주민이 노예가 되었다. BC 31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싸우기 위하여 이집트군을 이곳에 집결하였으나, 크레오파트라의 간청으로 악티움 해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후 로마 제국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15세기 전반부터 투르크령이 되었다. 1913년 그리스에 병합된 후 이탈리아에게 공격당하였고 곧이어 독일이 점령하였으나 , 연합군에 의해 회복되었다. * 모기 이야기 알렉산더, 징키스칸은 누구도 그들의 목숨을 해할 수 없었지만 작은 모기는 두 사람의 꿈을 접게 하였다. 또 콜롬버스는 모기만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고 하여 '모기제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모기는 푸른빛에 2배의 유혹을 받기 때문에 모기를 잡는 고압의 기구(유아등)도 푸른등을 켠 다고 한다. 모기는 입으로 찌르는 것이 아니고 톱날 같은 입으로 피부를 썰어서 피를 빨고 또 피를 빨기 전에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액을 주입한다고 한다. 이 액은 피부를 가렵게 하는 특성이 있는데, 피를 빨 때에 같이 액도 흡수되는데 다 빨기 전에 모기를 쫓아 버리면 이 액이 남아 더 가렵다고 한다. 가려운 증세는 3분 후에 나타나는데 만일 3분 안에 배를 채우지 못하면 손바닥에 맞아 죽게 된다. 모기는 자기 체중의 2배의 먹이를 먹고도 날을 수 있다고 한다. 모기는 추운 캐나다와 시베리아에서 적도까지 분포되어 있다. 모기에게 잘 물릴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면, 영양이 좋은 사람, 유산과 요산이 많은 사람, 수술을 하였거나 약을 먹는 사람, 화장품을 바른 사람, 숨쉴 때에 이산화탄소가 많이 나오는 사람이다. 모기는 60Km의 밖의 먹이도 찾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모기는 클레스톨과 비타민B를 만들 수 없어 다른 동물의 혈액에서 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모기 쫓기 위하여 풀을 태우는 것은 모기가 도망 간 것이 아니고, 암모니아의 향기를 좋아하여 연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 주위의 모기가 적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
<디오게네스를 고린도로 찾아 온 알렉산더> |
알렉산더의 이야기 1, 2, 3 1: 그는 잔인하였고, 폭음과 폭주로 유명하여 부하도 폭음으로 죽게 하고 폭주 대회도 열었고 한다. 승리를 할수록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남다르게 행동 하였다. 자신이 '이코르'라는 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하여 자기 피는 일반사람과 다르다고 믿고 있었는데 전쟁 중에 상처로 붉은 피가 나오자 몹시 놀랐다고 한다. 기생의 요청으로 수사궁을 불지는 기행과 친구가 죽으면 치료하던 의사도 같이 죽였다. 연속으로 36시간이나 술 먹고 말라리아로 죽었다. 그는 전염병으로 죽은 인간이나 동물의 사체를 석궁에 걸어 적진에 발사하여 전염병을 퍼뜨려 전력이나 전의를 약화시키는 세균전을 벌인 세균전의 원조이기도하다.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단한 애서가 이다. 그는 스승의 사상을 물려받아 20만 권의 책을 보유하여 '세계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종족, 종교, 계급을 떠나, 종족의 혼혈 결혼으로 종족의 통일, 언어의 통일, 땅의 통일, 화폐의 통일을 통하여, 세계의 국가, 하나의 정부를 구상하였으며, 지금의 U.N 같은 구상이었다. 2: 알렉산더는 이집트의 아몬 신전에서 받은 신탁에 부응한자로 여겨 신의 계열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에 큰 세력을 가진 자들도 알렉산더를 모방하여 대 제국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 중에 셀레우코스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BC247-187)는 알렉산더가 간 길을 따라 인도까지 침공한 사람이 이다. 또 신으로 섬기는 모방은 로마 황제에까지 성행하였다. 그 중에는 외부 모양까지 흉내를 내게 되었는데 가장 흔히 모방한 것이 그의 머리색깔 이라고 한다. 알렉산더는 헬라인에게는 흔하지 않은 노란색의 머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왕들이 머리를 노랗게 물 들리었다고 한다. 사포는 그리스어로 비누라는 의미이지만 머리에 노란 색깔을 물들이는 비누를 말한다고 한다. 머리카락의 수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것 같다. 3: 코린트 도시에 디오게네스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살았는데, 알렉산더의 승리를 전부 찾아와 축하하였으나, 디오게네스는 안 찾아 왔다. 그러므로 알렉산더가 직접 찾아 갔다. 가난하여 통 속에 있는 그에게 알렉산더는 경멸의 목소리로 '당신 소원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그늘지니 좀 비켜주시오'라고 대답 하였다. 사람들이 비웃었으나 감명 받은 알렉산더는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라고 하였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어떤 권위에도 굽히지 않고, 무(無)욕심에 통속에서 산 철학자다. 알렉산더와 고르디아스 매듭은 그리스 신화 편의 '황금손 미다스'에서 이야기하였다. 빌립포스(필리피, 성경: 빌립보) 알렉산더의 아버지가 이 도시를 개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것이 유래이다. 아들이 화려하게 증축한것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점령하였다. 네압볼리서 8마일 떨어져 있고 험준한 산 때문에 도로는 험악하였다. 빌립보(행20:1-2) [위치지도(페르가몬)] 바울의 2차 전도 시 루디아가 유럽의 첫 열매이다. 루디아는 자주(비단=명주)장사를 하는 부자이며, 두아디라에도 집이 있었다고 한다. 빌립보에 가계를 가지고 있었고, 가계는 교회로 쓰인 것 같다. 여점쟁이가 고침을 받아, 주인이 수입이 없게 되자 군중을 동원시켜 송사 하였고, 바울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다. 바울은 실라와 옥중에서 찬송가를 부르니 지진으로 옥문이 열리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간수가 도망간 것으로 여겨 자결하려고 하는데, 바울과 실라가 만류하고 전도하여 온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16:16-34). 3차 전도 때에 감사하여 여러 번 이 교회는 바울을 도왔다 (빌14:15-16).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에바브라와 디도가 위문품을 전달하였으며, 바울이 이들을 가리켜 형제요, 고상 한자요, 군사 된 자요, 너희의 사자요, 쓸 것을 돕는 자이고 예수님을 목숨걸고 섬기는 자라고 하였다.(골1:7, 4:12) 빌립보서(AD62)는 옥중 서신이며, 율법의 맹종을 비난하고 그리스도의 아는 지식에 비교할 때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다. 누가는 이곳에서 6년 목회하였고 병원도 개업하였다고 전한다. |
<빌립포스의 아레스(군신)법정, 로마 아구스도 시절의 유적> [위치지도] |
헬레니즘 알렉산더가 자기가 지배한 영토에 70개의 알렉산더라는 도시를 건설하여 그리스인을 이주시키고 그리스문화를 동방에 펼쳐서, 동서문화 융합 되도록 힘썼다. 오리엔트문화를 서방문화에 흡수하여, 그리스 식의 문화라는 뜻으로 헬레니즘 이라 하였다. 문화의 중심지는 아테네를 대신하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되었다. 물리학의 아르키메데스, 수학자 유클리드가 활약하였고 헬레니즘문화는 지중해를 떠나 오리엔트 일대에 번지고, 인도의 [간다라] 미술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에까지 오게 된다. (2)프톨레마이오스왕조(* 돌레마이, BC305-BC30) 알렉산더가 죽은 후 부장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배권 다툼에서 이집트 헬라를 지배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게 되었다. 수도는 알렉산드리아로 정하고 영토를 넓혀 갔으며, 수도는 헬레니즘의 중심지로 삼았다. *클레오파트라가 7살 때에 로마의 속국으로 있다가,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하므로 이 왕조는 끝났다. BC30-AD395 까지는 로마제국시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로마에 속한 하나의 주로 기사계급이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로마의 황제는 파라오의 후계자로 군림하였다. 후반에는 그리스도교화가 추진되었다. AD395-AD641 이 기간에는 동서분열로 동로마지배하에 들어가 비잔틴제국의 속하여 있을 때에 전염병과 기근에 고생하는 민중을 비잔틴제국은 더욱 중압을 가하여 회교를 해방 자로 받아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여 기독교국이 지금의 회교국으로 바뀌는 동기가 되었다. 이집트의 기독인을 코프트(곱트)파 라고 부르고, 이들은 삼위일체를 반대하여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단성만 믿는데, 칼케톤공회서(AD451) 이단으로 선언하였다. 로제타석 (Rosetta Stone)이야기 높이 1.2m, 너비 75cm, 두께 28cm 이다. 이 비문은 3단으로 위에는 이집트 상형문자 이고, 중간에는 이집트의 민용문자 이며, 아래는 그리스 문자로 되어있다. 이 때문에 그리스 문자를 해독하여 이집트의 민용문자와 상형문자를 해석하게 되었다. 이집트어로는 라시드(로제타)라는 곳에서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때에 발견되어 이 비석 문자가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라고 생각되어 매우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1801년 영국군이 아부키르 전투에서 승리하여 평화조약 대가로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얻은 전리품을 영국에 넘겨 줄 때에 로제타석도 포함되어 현재는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은 학자들의 연구에 제공되었다. 비석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독실한 신앙과 덕행을 칭송한 송덕문으로 BC 196년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비석은 후세에 가장 오래된 광고간판으로 간주되었다. 프랑스의 J.F. 샹폴리옹은 1808년 로제타석(石)의 사본을 입수하여 상형문자 해독에 착수하여 로제타석과 오벨리스크(고대 이집트의 건조물)에 새겨진 비문을 비교 연구한 결과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왕명(王名)을 실마리로 하여 1822년 성각문자의 해독에 성공하였고, 이것을 길잡이로 하여 이집트문자의 비밀을 해독하는데 성공하였다. 1828-1829년에는 직접 이집트를 방문하여 많은 각명(刻銘)을 복사하였고 이집트학의 창시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돌레마이 (행2:7) [위치지도(페니키아)] 돌레마이(Ptolemais) 돌레마이는 구약성경 사사기 1장 31절에 '악고'라고 불렀으며, 여호수아가 아셀지파에게 분배하였으나 성읍이 워낙 견고하여 쉽게 정복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었다. BC305, 알렉산더의 부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서 왕조를 열면서 BC181년까지 유대를 지배할 때에 프톨레이(Ptolemy) 관할지라 돌레마이라고 불렀다. 사도행전 21장 7절에 바울이 마지막 전도 여행인 3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올 때에 이곳을 방문하여 하루를 유숙하였다. 1189년 3차 십자군 원정에서 승전을 거둔 곳으로 탈환 후에는 100년간 십자군의 거점이 되었다. 이때에 부상병을 구호하던 병원에서 튜턴(튜튼)기사단이 생겼으며, 이들이 중에 독일기사단은 프로이센 왕국의 건설하여 독일의 골격이 되었다. 당시 지명은 아콘(Accho)이라고 하였으며, 먼 뱃길에서 지친 십자군이 첫 발을 내디딘 곳이기도 하였다. 1291년 아콘이 함락되어 십자군 운동은 막을 내렸으며, 현재 십자군의 유적지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곳은 갈릴리 지방 지중해연안에 있는 천연요새로 방비가 견고하여 가나안 정복 때에도 정복하지 못하였고, AD1799년 육로를 열기 위하여 이곳에 온 나폴레옹 실패하였으며, AD1840년 세계무적 영국도 점령하지 못하였다. 현재는 레바논의 항구로 지명은 '악기'라고 한다. 성의 동쪽에는 평원이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고 유리가 유명하다. |
<프톨레이마이오 5세 송덕비로 (위)이집트 상형문자 (중간)이집트 민용문자 (아래)그리스 문자, 로제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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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하는 클레오파트라> |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이야기 안토니우스는 삼두정치의 반대파를 도운 그녀를 문책할 생각으로 호출하였으나, 그녀는 그를 사로잡으려는 계산으로 응하지 않았다. 몇 번의 독촉을 받고 난 그녀는 금빛 찬란한 장식, 아름다운 보랏빛 돛, 감미로운 음악의 선율, 은으로 만든 노를 젓는 노예, 사랑의 신 큐피드로 분장한 미소년들이 타조 깃털로 부채질하고, 요정의 님프 같은 여인들이 시중드는 속에 29살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 그녀가 금빛 천막 안에 비스듬히 누워 있어 마치 천상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황홀하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배를 타고 그에게 접근하였다. 저녁식사에 초대된 안토니우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는 말할 것도 없고 식탁에는 금 접시, 금 술잔에 바닥은 온통 꽃이 깔려 있어 향기와 아름다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넋이 나간 그는 그녀에게 '이런 파티는 막대한 비용이 들겠군요.'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이 정도는 적은 비용이지요. 정말 사치스런 파티를 원하신다면 1만 세스텔치아(약2억 4천 만원)가 드는 파티를 열어드리지요.'라고 말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어떻게 그런 큰돈을 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녀는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였고 안토니우스는 좋다고 승낙하여 부하 중에 한 사람을 심판관으로 정하였다. 그녀는 식초 잔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녀에 몸에는 6개의 보석이 달려 있었는데 두 귀걸이가 돋보였다. 그녀는 한 쪽의 귀걸이를 떼어내어 잔에 넣고 마셔버리고 다른 한쪽의 것을 떼어내자 심판관이 제지하면서 '승부는 끝났습니다. 여왕님의 승리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박물지 기록에 의하면 남은 한쪽의 진주는 로마로 보내져 비너스 상의 귀걸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화려한 함대를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훗날 러시아의 예카데리나 2세는 흑해에서 크림반도를 횡단 항해하여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라고 불린 호화스러운 행사를 하였다.[ 예카데리나 2세 참조 ] BC36년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이집트, 키프로스, 리비아, 시리아의 독립왕국 군주로 대우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에게 땅을 나누어 준것을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 한다. 이 사건은 로마제국의 영토를 축나게 하였고, 그녀의 하수인으로 놀아나는 안토니우스를 두고 볼 수 없어 BC 31년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악티움 해전이다. 그녀는 목적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으며 2명의 권력자를 잡았으나 잘못 선택하였다. 돌이켜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셈이었다. 그녀의 야망이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그녀는 헤롯(헤로데)이 그러했듯이 로마 속왕으로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욕심을 부려 모든 것을 망쳤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실패 덕분에 10년 동안의 안토니우스와 그녀의 사랑은 더욱 유명해졌다. 옥타바누스는 그녀가 시저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낳은 자녀들을 후한을 없앤다는 명목하에 모두 처형하였다. *악티움해전(BC 31년) [그리스지도] 배 500척과 보병 7만 명을 거느린 안토니우스는 악티움에 진을 쳤다. 400척의 배와 8만 명의 보병을 거느린 옥타비아누스는 북쪽에서 악티움에 도착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동맹세력의 일부가 전쟁터에서 빠져나가고, 보급품도 모자랐기 때문에 작전을 서두르다가 육지에서 패배하였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충고에 따라 함대를 동원하였고 클레오파트라의 소함대도 합세하여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부장 아그리파가 바람의 방향을 계산한 교묘한 전술로 기선을 제압하였다. 이윽고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 갤리선을 이끌고 달아나면서 안토니우스 함대는 격파 당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남쪽으로 달아나는 클레오파트라 함대에 실려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안토니우스의 육군도 1주일 뒤에 항복하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죽고 옥타비아누스는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
<미인의 대명사 클레오파트라> |
3]이집트의 그후 역사(BC30-현대) BC 30-AD 642년 로마가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이 관할하였다. AD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여 교회의 발전이 촉구되었다. 642년에 아라비아가 점령하였고, 300년 내에 이집트는 아랍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642-909년 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집트는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일부였다. AD909-1171 파티마 왕조는 북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시리아까지 지배한 시아파(派) 이슬람왕조이다. 창시자인 이스마일파의 비밀운동원 우바이드 알라 알마흐디(재위 AD909-934)는 튀니지에 건국할 때에 마디(구세주의 뜻)인 부르고, 칼리프라고 자칭하여 동방의 아바스왕조와 서방의 후(後)우마이야왕조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AD969년 이집트를 정복하여 카이로를 건설하여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시리아에도 지배력을 넓혀가다가 십자군에 패하여 쇠퇴하여 갔다.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하였으나 푸스타트와 카이로 등은 이슬람 세계의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1171년 살라딘에게 멸망당하였다. 1169-1250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딘이 건설한 이집트의 이슬람 왕조이다. 왕조의 이름은 살라딘의 부친 아이유브 이븐 샤디에서 유래되었다.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재위 1169-1193)는 아이유브왕조의 창시자로 별칭 살라딘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다. 그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누레딘왕조를 섬겼고, 1169년경 파티마왕조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1169년 살라딘은 파티마왕조의 재상으로서 이집트의 실권을 잡고, 1171년 칼리프 아디드가 죽자 시아파에서 수니파를 부활시켜 신 왕조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카이로를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예멘 등을 지배하였다. 군사체제를 정비하고 1174년 알렉산드리아에 내습한 십자군을 격퇴한 다음 시리아의 십자군 도시를 차례로 빼앗고 1187년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그는 제3회 십자군의 리처드 1세와 휴전협정을 맺어,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티나에서 권력을 확보하였다. 살라딘이 죽자 그 영토는 일족들에 의해 이집트, 다마스쿠스, 하마단 등으로 분할되었다. 얼마 후 살라딘의 아우 아딜의 의하여 이집트와 다마스쿠스는 귀속되었다. 1250년 왕권은 술탄 사리프가 고용한 맘루크 군인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1250-1517년 아랍군대의 증강을 위하여 아라비아와 회교가 아닌 용병(노예)들로 구성된 군대를 창설한 것을 '맘루크'라 한다. 이들이 강대하여 아이유브(1240-49 재위) 술탄국 때 맘루크 장군들이 술탄의 자리를 찬탈하였고, 이들이 세운 '*맘루크' 왕조가 1517년까지 지배하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는 파라오 보다 거대한 왕조를 세웠다. 모스크, 학교, 수도원, 특히 영묘(靈墓) 등의 많은 종교 건물을 세운 맘루크는 카이로에 매우 인상깊은 기념물들을 세웠고, 이것은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투르크 참조] 맘루크의 주요업적은 십자군을 축출한 일과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몽골족을 참패시킨 일이다. 1400년 투르크의 정복자 티무르에게 시리아를 점령당하였다. 1426년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명예를 다시 한번 드높였다. 1500년경 결정적인 경제 타격은 홍해 무역에 대한 포르투갈인의 공격이다. |
<카이로의 모하메드 알리 모스크 회교 사원> |
1517-1882년 오스만투르크가 점령하여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서 다스리게 되었다. 1789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일시 점령하였다가 돌아갔고, 알바니아 사람으로 알려진 무하마드 알리가 오스만제국을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섬기는 왕조가 생겼으나 내란을 틈타 1882년 영국이 점령하여 하였다. 1869년에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수에즈운하를 완성하여 유럽과 인도양 및 서태평양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의 항로를 만들었다. 1914-22: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22년 명목상 독립을 얻고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952-현재 쿠데타로 군주를 타도하고, 에스겔 예언(30: 13,) 데로 본토인의 왕이 나오지 못하였다가 나세르가 대통령이 되어 BC 525년 이후 최초로 이집트 본토 출신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1956년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고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하였다. 1956, 1967년에 이스라엘과 2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패하였다. 그의 후계자 사다트는 나세르가 시행하였던 사회주의 정책을 파기하려 하였고, 1973년 이스라엘을 공격해 시나이 반도의 일부 영토를 되찾았다. 그후 중동평화회담을 하다가 1981년 10월 회교주의자들에게 암살 당하여 부통령 무바라크가 그 뒤를 계승하여 사다트의 평화정책을 계속하였다. 1982년 이집트는 1967년에 잃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하였다. *쿠르드족 옛날에 메디아왕국을 건설한 메디아(메데)족이라고 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래 아리아 계통의 종족으로서 전통적인 종족제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대부분이 이슬람교의 수니파에 속하며 시아파는 소수이다. 산악지대의 주민은 재빠르고 사나운 반 유목민이며, 평야의 주민은 농경에 종사한다. 민족의식이 강하고, 사용 언어는 일반적으로 이란 어계의 한 방언으로, 외래어휘를 포함하고 있다. 쿠르드족의 역사는 문헌도 거의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중세에는 아라비아인의 지배를 받았으나 11-12세기에는 자립하였으며, 그 일족에서 아이유브왕조(1169-1250)가 출현하였다. 16세기 초엽에 오스만투르크제국에게 정복되었으나, 현재는 터키와 이란 및 이라크 등지로 나뉘었다. 이란령의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치정부를 수립하였으나 현재는 해체되었다. 이라크령의 쿠르드족은 자치를 요구하여 현재도 무력항쟁을 전개하였으나 그 때마다 진압 당하였다. 그러나 현재 이라크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용어로 인정되었으며, 의회와 기타의 공직에서는 인구비례에 의해서 의석수와 공직자의 수를 인정받고 있다. *맘루크 맘루쿠 왕조가 탄생한 이유는 칼리프(황제)들이 연고가 없는 그들을 선호하여 투르크인, 키르카시아인을 중심으로 몽골인, 쿠르드인 등을 계약제 노예로 구입하여 군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너무 의지하고 자국의 군대를 키우지 않아 그들에게 황제의 찬탈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그들 중에 이집트의 아이유브(1240-49 재위) 술탄국 때 맘루크 장군들이 1250-1517년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는 파라오 보다 거대한 왕조를 세웠다. *수에즈운하 이 운하에 의해 지중해와 홍해가 연결되고,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가 나누어 졌다. 운하길이는 지중해의 포트사이드에서 남쪽 수에즈 만까지 168㎞이며, 여러 호수 등을 연결하여 호수의 물을 이용하였다. 1869년 프랑스에 의해 건설되어 유럽과 인도양 및 서태평양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의 항로가 되었다. 수에즈운하는 수로 폭이 가장 좁은 곳이 54m, 수심은 운하 전체가 일정하게 거의 16m(간조)에 달한다. 1956년 7월 *나세르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를 선언하여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군대가 침략하였으나 소련의 반발과 세계여론 앞에 물려나게 되었다. 1978년 하루 평균 58척의 선박이 통과하였다. 1967년 6월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전쟁 중에는 거의 모든 주민이 다른 곳으로 이주되었으며, 주거지도 큰 피해를 입거나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재건사업이 시작 되었고, 1978년까지는 거의 모두 옛 거주지로 돌아왔다. |
<수에즈 운하> |
나세르(1918-70) 그는 왕립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소위로 졸업하였고, 영국 세력과 이집트 왕조를 타도할 목적으로 '자유장교단'이라는 비밀 혁명조직을 하였다. 신생 이스라엘과 1948년 1차 아랍 전쟁에서 그의 대대는 '팔루자'라는 아랍마을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몇 주 동안 포위 당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아 그의 명성이 알려지고 후에 대통령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52년 7월에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몰락시키고 파루크 왕 일행의 망명을 허용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아스완댐 공사 2억 7,000만 달러를 원조하기로 하였으나, 1956년 7월에 미국과 영국원조를 취소하자 5일 뒤 알렉산드리아의 대중집회에서 그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통행세로 댐을 건설할 것을 약속하였다. 10월 29일에 2차로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를 침입하고 이틀 뒤 프랑스와 영국 비행기가 이집트 비행장을 공격하여 이집트공군이 전멸하였고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였다. 소련은 영, 불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난하고 즉각 철수하지 않을 때는 소련군을 보내 이집트를 지원하겠다고 하여 이불 속에서 큰소리치던 그를 구제하였다. [예루살렘역사 참조] 식민지 이집트를 독립시켜 준 후에도 그 이권은 계속 챙기겠다는 지나친 욕심 때문이 국제 여론으로 욕만 잔뜩 먹은 영, 불의 연합군은 11월 6일, 이스라엘은 영, 불의 배신행위에 울분을 삼키며, 피 흘려 점령한 도시들을 도로 비워주고 유엔이 중재한 휴전에 동의하고 엉거주춤 철수를 하였다. 그는 수에즈운하를 얻어 아랍 세계에서 명예에 전혀 손상 받지 않고 치욕스러운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차 전쟁에서 패한 후 사회복지에 써야할 재정을 군사대국 정책에 사용하여 그동안 준비한 전력을 과신한 그는 유엔 평화유지군의 가자지구와 샤름앗샤이흐로부터의 철수를 요구하고, 이스라엘의 해상 운송을 막기 위하여 아카바 만을 봉쇄하였다. 이것은 전쟁을 하자는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것으로 전쟁은 이집트에서 먼저 요청한 것이다. 1967년 6월5일에 3차(6일 전쟁)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이집트 공군기가 비행장에서 파괴되고 이집트군은 수에즈를 넘어 퇴각하게 되었다. 나세르는 사의를 표명하였으나 그를 지지하는 대규모 가두시위가 일어나고 국회의 투표에서 신임을 얻게 되어 대통령직을 유지 하였다. 소련의 원조로 아스완댐이 1968년에 가동되기 시작하였고, 이집트군의 포대를 엄호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지대공 미사일을 설치하였으며, 군사 원조에 대한 대가로 이집트의 정치적 독립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만 하였다. 그는 1970년 미국이 제안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안을 잠정적으로 받아들인 뒤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는 외국의 지배로 짓밟혔던 국민의 존엄성을 되찾아 준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진정한 이집트 지도자였다. [이집트 이전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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