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말기 교회사와 중세교회사

2005. 11. 28. 00:20교회사자료/2.초대교회사

 

초대말기 교회사와 중세교회사

 

 

1. 초대교회 말기 교회사

 

교황권의 증대

 

2세기에서 4세기 교리논쟁에서 로마교회가 승자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바티칸 교황의 권위가 획득되었다. 교황 레오 1세(440-461)는 영적 권위는 자신에게 있다며 교회에서의 우위권을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사도의 계승 교리였다. 원래 사도의 계승 교리는 모든 주교들을 사도들의 계승자로 인정하는 클레멘트의 교리였는데, 레오 1세는 사도들 중 베드로가 첫 번째이니 베드로의 후계자인 자기가 주교들의 우두머리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 멸망 후 이 주장은 보류된다. 그러나 침입자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미 비시고트, 오스트로고트, 반달, 부르군디, 롬바르드 족등이 아리우스파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되어 있었으므로 교회는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수도원운동의 발흥

 

사회와 격리된 수도원 운동은 3세기 말에 생겨났다. 이들의 시조는 이집트의 Korma에서 출생한 Anthony였다. 그는 금욕생활, 사막에서 은둔생활, 금식과 기도, 내핍을 실천하는 한편, 개인적 수도의 위험성에 대한 자각에서 공동생활 수도원을 조직하게 되었다. 가이사리아의 주교 Basil이 이들을 후원하며 수도원의 규칙을 제정했다. 서방 수도원 운동은 게르만족 침입 후 혼란기에 생겨났다. 이들 수도원들 중에는 방탕한 수도원도 있었다. 그러나 6세기 베네딕트 수도회가 출현해, 육체노동, 기도, 독서, 엄격한 생활을 특징으로 하는 수도원주의를 정착시킴으로써, 수도원의 제도화를 진전시켰다. 그후 수도원 출신으로 주교, 교황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St Augustine(354-430)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 Hippo의 주교였다. 그는 종교적 방황후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안정 후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었다. 개종후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했으며, 자신의 다양한 사상적 경험을 통해 그의 신학은 다른 경향들을 종합시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에 대한 개인적 신비적 체험을 기반으로 신을 순수, 추상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신플라톤주의적 신관념도 제시했다. 신은 절대적 실재이며 선하며 유일, 영원한 존재이며, 모든 다른 존재들의 원천이라는 것, 물질계는 파생적 실재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신 관념을 삼위일체에 적용시켜, 삼위의 동등성을 제시했다. 그의 인간관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결함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같은 경험적 배경에서, 자비한 신은 선택한 사람들을 은총으로 구원한다는 은총론을 펼쳤다. 그것은 인간이 은총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이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수도승 펠라기우스가 도전하기도 했다. 그는 원죄는 없으며 모든 사람은 선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고, 인간의 도덕적 결함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편 어거스틴은 교회는 은총의 수단인 성례전을 행하기 위해 신이 만든 제도라고 주장했고, 따라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형성했다. 하잘 것 없는 사제에 의해 거행된 성례전은 효력 없다는 북아프리카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성례전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수행하는 사람의 무가치성과 상관없이 효력이 있다고 반박했다. 역작 [신의 도시]에서는 지상의 도시(로마)는 멸망할 수 있으나 신의 도시는 문명의 종말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을 제시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이슬람이 침입한 후 성상에 대한 우상적 숭배를 비판하자, 콘스탄티노플 주교 레오 3세는 726년 성상숭배를 금지시켰다. 그러자 로마교회는 레오 3세와 그 지지자들을 파문해 버렸다. 그러자 레오 3세는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를 교황의 정신적 관할구역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하지만 Pippin과 Charlemagne의 지원으로 로마 교회는 번창한다.

 

필리오케 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 논쟁

 

서방교회는 589년 니케아신조의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말 뒤에 필리오케를 첨가했다. 그러자 동방 신학자들은 신이 모든 것의 원천이라는 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필리오케의 삽입을 반대했다. 서방교회는 대체적으로 필리오케지지했고, 876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는 필리오케 반박을 천명한다. 이는 교황의 교회 지배권을 거부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 이루어진다. 교황의 특사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파문하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교황을 파문함으로써 분열이 구체화된 것이다. 그후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을 자행함으로 완전히 분열

 

동방교회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옥은 이슬람에 지배당해 신학적 발전은 8세기 이후 사실상 중단되고 만다. 대신 예배의식과 종교적 실천에서의 실제적 변화에 주력했다. 교회의 주도권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멸망하자 주도권은 슬라브교회, 특히 러시아교회로 넘어갔다. 하지만 동방교회의 통일성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편의주의 교리에 따른 관용 때문이었다.

교리적 입장도 일치성을 보였는데, 그 중심은 마지막 교부인 John of Damascus의 교리적 입장을 고수한 것이었다.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은 생명을 주는 화신이며, 교회의 7개 성사와 다른 예배의식을 통해 현재에도 전달된다는 신비주의적 주장을 했다. 한편 그는 성상을지지했고, 성상이 성례전과 유사한 효과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책은 지식층을 위한 것이고 성상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차이점

 

우선 성상에 대한 차이를 들 수 있다. 동방교회는 성상을 인격적 존재로 여기지 않고 오직 상징, 즉 본질적 의미의 단순화된 표상으로 여겼다. 때문에 로마교회의 성상은 환조, 동방교회는 희미한 양각의 형태로 발전했다. 동방교회는 성상을 신의 본성과 영을 표상한 것으로 여긴 반면,  로마교회는 일반적으로 성상에다 마리아와 성인들의 실체성을 부여했다. 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의견 차이로 발전했다. 로마교회는 마리아는 자기 아들을 사랑하고 동정적이며,  자기에게 기도하는 이들에게 자비로운 자로 간주했다. 반면 동방교회는 마리아는 신의 성스러운 어머니, 인성과 신성이 합치된 고귀한 존재였다. 그후 성례전, 필리오케 문제, 독신생활, 연옥교리에 있어서 차이점이 가시화되었다. 동방교회는 하위성직자들은 결혼을 허용하고, 연옥교리를 부정했다.

 

2. 중세의 가톨릭 교회

 

소위 콘스탄틴의 증여로 교황이 서방 전역의 신권자임을 주장했다. 교황은 세속적 군주와 동등한 권력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세속 군주들도 교황의 정신적 우위권은 인정했지만, 교황이 세속적 일에 간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권력다툼이 발생한다.

한편 왕과 영주에 의해 임명된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 즉 성직매매, 성적 타락이 문제를 일으켰고, 교회법과 시민법의 갈등이 초래되었다. 교황권과 세속군주의 갈등을 가장 극명히 드러낸 사건은 그레고리 7세와 헨리 4세의 갈등이었다. Hildebrand가 1073년 그레고리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된 후, 독일의 왕 헨리 4세는 자신이 선출한 성직자를 Milan의 주교로 임명하고 자기 통제하에 두었다. 그러자 그레고리 7세는 헨리 4세를 파문하고, 헨리 4세는 교황을 비난했지만, 심한 타격을 받고 결국 카놋사 Canossa성으로 교황을 찾아가 3일동안 흰옷을 입고 눈을 맞으며 맨발로 회개하여 파문 취소를 받았다. 그러나 3년 뒤 교황이 다시 헨리를 파문하자 헨리가 로마로 공격 교황을 내쫓고 다른 교황을 임명한다. 그후 헨리 5세와 Calixtus 2세의 타협으로, 주교는 지역이나 상황을 막론하고 교회에 의해 선출되게 하고, 대신 독일의 주교들은 왕의 승인을 얻어야만 했다.

Pope Inoscent 3세(1193-1216)는 영국, 프랑스 등의 세속권력을 좌지우지하며 절대 권력을 누렸다. 그는 4차 Lateran 회의(1215)에서 화체설 교리, 정기적 고해, 참회식, 성찬식이 가톨릭교회의 필수적이라는 규칙을 승인했고, 종교적, 세속적 면에서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다.

 

중세의 대성당 Cathedral

 

Cathedral은 주교의 좌를 의미했다. 대성당 건축은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3가지 양식이었는데, 비잔틴은 기둥 위의 돔이 특징이고, 로마네스크 양식은 반원의 아아치와 둥근 천장, 고딕양식은 뾰족한 지붕과 아아치가 특징이었다. 이러한 대성당 전체가 신앙의 체계화된 상징이고 요약이었다. 사실상 인쇄술 발달 이전의 대성당은 교회의 성상 및 모자이크와 함께 가난한 자를 위한 바이블이며 종교 교육의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Mass

 

미사가 수세기에 걸쳐 발전되면서 여러 가지 상징과 제스쳐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자들은 라틴어를 몰라도 미사의 중요성과 다양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사의 핵심적 의식은 거의 동일했다. 미사 후 평신도는 포도주는 빼고 성체 wafer만 먹었다. 한편 화체설 발달에 따라 영국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기도를 위한 시간에는 산사람을 위한 기도는 화체 이전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그 후에 드렸다.

 

스콜라 철학

 

샤를레망 이래 대성당과 수도원들은 소년들과 청년들 교육 위해 학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교사가 유명해지면 학생들이 모여들어 대학 설립 분위기 조성되어 12세기에 최초의 대학이 설립된다. 볼로냐 Bologna는 교회법과 시민법, 살레르노 Salerno는 의학, 파리와 옥스퍼드는 신학으로 유명했다.

스콜라 철학은 신앙의 논리에 주로 관심을 기울여 이성과 계시를 조화시키는 문제, 과학과 종교, 철학과 신학 조화에 집중했다. "신앙은 지식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fides quaerit intellectum 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스콜라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Anselm(1033-1109)은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credes ut intelligam고 주장했다.

스콜라철학은 경전과 신조에 나타나있는 불완전하게 체계화되어 있는 교리들을 일반적 진리의 구조에 맞게 정리하고, 완전히 체계화된 신학 구성을 위해 연역과 추론의 방법과 계시된 도그마를 검증의 원리로 사용하고, 일반적 진리의 구조에 맞지 않는 부분을 재정리했다. 그러나 어떤 논리에 의해서도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는데, 불변하는 사상과 보편적인 것이 지니는 지위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것은 실재하는가(중세 실재론), 아니면 단순히 이름에 불과한 것인가(唯名論)의 문제는 대부분 답변에 달려 있었다. 교회는 모든 개별 교회들 이전의 이상적인 형태이며, 개별 교회들은 교회의 본성을 예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는 어떤 확실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개별적 제도들에 대한 이름이며 존재 이후에 부여된 것인가? 전자의 입장은 교회는 진실로 신이 만든 제도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결론을 의미했다. 중세 교회는 실재론을지지했다. 그러나 그러나 유명론이 의아심과 문제점을 야기시키며 동조자들을 얻어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만들려 했던 스콜라철학의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이런 철학적 논쟁의 배경은 14세기, 가톨릭 신학은 철학의 자유로운 지적 활동을 인정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한편 12세기 말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발견에 따라 서구세계는 700년만에 처음으로 체계적인 자연과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는 1227 이탈리아에서 출생으로, 로마와 독일 혈통 이어받은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처음에 도미니크 교단의 수사가 되었으나, 파리와 꼴로뉴로 가서 Albertus Magnus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이성과 계시, 철학과 신학,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도를 조화시키기 위해 자연적 이성과 신앙은 각기 상이한 이해의 형태이며, 전자는 저차원적이고 후자는 고차원적이지만 양자는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했다. 자연적 이성은 신의 존재 증명에도 유효한 것이다. 제1원인의 필연성 추론, 가능자에서 필연자 추론, 사물의 계층성, 세계의 구조에서 설계자 추론 등 자연적 이성의 역할을 인정했다. 그는 이성은 신의 도움 없이 신의 본성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성은 일반적 진술밖에 할 수 없다는 한계 또한 가진다. 신의 보충적 도움 없이는 신이 역사적으로 이룩한 업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결론을 내리기 전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사실을 참조해야 한다. 한편 신앙도 이성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의 계시는 모든 부분이 이성과 합치된다. 이는 신학과 철학의 절충을 의미했다. 철학은 감각적 경험세계에서 출발하여 이성(과학적 사고)로 신에 도달하는 것이고, 신학은 신으로부터 나온 계시된 진리에서 시작 인간과 세계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와 영혼(질료와 형상)은 기능적으로 상호 필요한 존재라고 보았다. 영혼은 불멸성을 지니고 있지만 육체 없이는 발전할 수 없고, 영혼 없이 육체는 살 수 없다. 이는 기독교의 계시인 육체의 부활을 고무하는 철학으로 이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급한 요소와 고급의 요소 구분을 성례전 사상에 도입했는데, 성례전에는 질료적 요소(물,빵,포도주,기름)와 형상적 요소(의식 행하는 방식)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은총의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참회는 고차원의 성례전아 아니라 낮은 단계라고 설명되었다. 아퀴나스의 신학은 dogmatic하나 과학의 유용성을 인정했다.

 

중세의 수도원 :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회

 

10세기 클루니 운동에 의한 수도원 개혁이 시도되었고, 중요한 수도회들이 창시되었다. 도미니크회(the Dominican Order)는 원래 선교운동으로 시작했다. 이들의 주 목적은 프랑스 남부의 이단적인 Cathari 카타리파 개종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인 설립자 Dominic(1170-1221)는 바울을 모방래 설교자들을 유럽의 각지역, 특히 대학도시에 파견 급속히 신장했다. 도미니크회 수도승들은 수사(friar)라 불리웠는데, 특히 학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처음에는 탁발(구걸) 수도 행각을 주로 했다. 그러나 귀족층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어 유력한 수도회로 성장했고, Albertus Magnus, Thomas Aquinas, Eckhart 등을 배출했다.

반면 프란시스코회(the Franciscan Order) 주로 평민층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성 프란시스코(St. Francis of Assisi(1182-1226))가 창시한 이 수도회는 청빈의 실천을 주로 했으며, 이노센트 3세로부터 수도회 인정을 받아 운동이 더욱 확산되었다.

 

중세 신비주의

 

시토회 지도자 베르나르드는 아가에 대한 설교를 통해 후세의 신비가들이 체험을 묘사할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혼의 신랑으로 여겼으며, 예수에 대한 사랑은 훈훈하고 인격적인 것이라 가르쳤다. 그러므로 애정, 열정, 달콤함 등이 종교적 실천의 중요한 동기로 부각되었다. 한편 12,13세기 Hugo St. Victor와 Bonaventura는 신비주의를 대학으로 확산시켰다. 그리고 13,14세기 도미니크회 설교가 Meister Eckhart와 John Tauler는 중부 유럽의 신비주의 운동을 발전시켰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가톨릭의 형식주의에 반감을 나타냈다. 특히 에크하르트는 '개성'조차 버려야 할 어떤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 것은 모두 '무'이고, 영혼 안에 있는 신적 불꽃 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도미니크회 고행가인 Henry Suso는 극단적 고난을 체현했다. 즉 극단적 고행을 통한 마음의 내적 평화를 추구했다. 또한 독일 신비가들 중심으로 신의 형제단(the friends of God)이 결성되었다. 이 운동은 스위스, 네덜란드로 확산되어, 네덜란드에서는 공동생활을 하는 형제단(the Breden of the Common Life)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섹스를 포기하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격리된 집에서 신비적 훈련을 했다. Thomas a Kempis는 [그리스도를 따르며](Imitation of Christ) 저술했고, Catherine of Siena(1347-1380)은 천상의 신랑인 그리스도와 결혼이라는 신비체험을 하고 흑사병 환자를 돌보았다. Teresa of Avila(1515-1582)도 비슷한 체험 후 Carmelite Order를 개혁했다. 그녀는 John of the Cross의 안내와 도움을 받았다.

 

교황권의 쇠퇴

 

13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교황권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민족주의 대두에 따라 영국, 프랑스가 서서히 독립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이 붕괴하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성직자들은 교황의 세속적 권위와 정신적 권위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Philip는 의회를 소집하여 교황권에 도전했다. 그러자 교황 Boniface 8세(1294-1304)는 '거룩한 교회'(Unam Sanctam) 교서를 발표하여 로마교황의 권위를 강조했다. 이에 필립은 의회를 소집 교황을 범죄자, 이단자, 부도덕한 사람으로 단죄한다. 결국 군사력 없는 교황은 필립의 지지자들에 의해 감금당하고 교황권이 심각히 실추한다. 뒤를 이어 프랑스인 교황들이 계속 임명되고 소위 대분열의 시대를 맞이한다.

 

르네상스의 영향

 

십자군운동과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멸망 후 많은 학자들이 그리이스 원서들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도망해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난다. 지리적 발견에 따른 인식의 변화와 인간적 표현의 강조에 따라 평민들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반감과 의혹을 공공연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바이블에 대한 관심도 생겨, 영국인 사제 John Wycliff는 화체설 교리를 성서에 입각해 부인했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의 John Huss는 종교반란을 일으켜 1415년 콘스탄스 종교회의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고, 15세기 플로렌스에서 도미니크회 수사 Savonarola도 개혁운동을 벌이다 교수형을 당했다.

 

'교회사자료 > 2.초대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의 신학  (0) 2006.01.11
神學  (0) 2006.01.05
유럽의 고대역사 (BC300-AD500)  (0) 2005.12.28
서(西)아시아의 왕국들(BC358-AD0)  (0) 2005.12.28
續師導 時代  (0) 200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