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료

2005. 11. 16. 23:56목양자료/2.설교자료

자료출처/ 기둥교회 홈페이지

 

목 차 : 나는 하루살이 입니다

출판일 : 1994.11.30

 

수금 나오셨지요?

밀물 때가 오리라

죽을 준비는 되셨나요?

화장실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멋지게 쓰자

사랑의 우선순위

어떤 말이 진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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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 : 14)

    공부 잘 하셨었습니까?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좋으셨는지요? 혹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이 학생이시라면 지금 성적이 어떠하십니까? 대답하기가 곤란하십니까? 아니면 자랑하고 싶으십니까? 사실 저도 누가 제게 성적에 대해서 물어 보면 곤란합니다. 저도 한때는 반장도 해 보았고 1등도 해 보고 우등상도 타 보았습니다. 하지만 남이 상을 받을 때 박수를 쳤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의 성적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평생 꼬리표처럼 쫓아다닌 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제가 성적표 때문에 몸부림치면서 후회한 적이 있는데,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국에서 받았던 성적표들을 미국의 학교로 보낼 때 학생들이 직접 가지고 간 성적표는 받지 않습니다. 성적을 고치고 변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대부분 한국의 학교에서 미국으로 직접 보내 주는 것만을 받습니다. 그래도 미국 대학에 입학할 만큼은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갔는데, 어느 날 학교 사무실에서 저를 부르기에 갔더니 당신이 한국에 있는 대학원에서 공부한 것 가운데 우리 학교의 교육과정과 일치되는 과목 중 평균 85점 이상되는 것은 인정을 해 줄 테니 확인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의 과정과 일치되는 과목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평균 85점이 넘는 것은 인정을 받았지만 평균 85점이 못 되는 과목 중에 아주 골치 아픈 과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정을 못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인정받으면 수월하게 모든 과정을 끝낼 수 있는데 학점이 모자라는 그 과목만은 인정해 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그 과목을 공부하느라고 혼이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성적이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를 좌절하게도 하고, 또 승진의 기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좋은 성적 때문에 앞으로의 인생에서 주어지는 기회가 많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성적과는 무관하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날 저희 집 큰아들이 다니고 있는 심곡국민학교의 신문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글들 가운데 5학년에 재학중인 어린이가 쓴 글을 읽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경희라는 어린이가 쓴 글인데 '어떤 말이 진짜일까?'라는 제목입니다.

      점수 낮은 내 시험지 앞에 놓으시고
      엄마가 꾸지람 주실 때마다
      엄마는 너만할 때 일등만 했다.
      퇴근하신 아빠가 역정 내신다.
      엄마 닮아 그런 걸 어떻게 하랴.
      아빠는 너만할 때 일등만 했다.
      그럼 그땐
      2등, 3등, 4등, 꼴등은 누가 했을까?
      돌이 아빠, 엄마도 일등했는데,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이 세상에는 자신의 허물을 깊이 감춘 채 남을 향해서만 채찍을 드는 폭군 같은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정치가나 교육자, 때로는 목회자들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채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의 허물만 채찍질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흘러가 버린 세월을 탓할 수는 없다고 해도 지금의 순간순간들은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공부 못한다고 자식을 야단 치는 그 부모 자신도 예전에는 공부를 잘 못 했으면서 일등만 했었다고 거짓말해야 하는 그 심정은 아마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점수로 평가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 가운데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고했습니다. 목적지를 향해서, 평가받을 그 때를 위하여, 정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이십니까? 아내에게 믿을 만한 남편이십니까? 자식 앞에 부끄럼 없는 부모이십니까? 지금 이 순간 각자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감추고 위장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나는 몇 점짜리 남편인지, 몇 점짜리 아내인지, 부모인지, 자식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 모든 사람들 앞에 부끄럼 없이 살다가 마지막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받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받는 아름다운 자리에 꼭 참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쥐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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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 : 7∼8)

    옛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뜻합니다. 성경에도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심고 사셨습니까? 아니, 어떤 것을 심고 사실 계획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는다"고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육체만을 위해서 심는 자는 그 육체를 취해서 김은 것 때문에 썩어진 것을 거둔다"고했습니다. 여러분은 썩은 것을 심으셨습니까? 일생을 심으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리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은 큰 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 보기에 쉽고, 좋은 것 같고, 자연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인 것 같아 보이는 것들 향해 치닫다가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립니다.

    어느 날 아주 작은 책에서 재미있는 시 한 수를 발견하였습니다. 쥐약 먹고 죽어 가는 쥐의 유언에 대한 시였습니다. 시의 제목이 (어느 쥐의 유언)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 말 귀담아 듣거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은 저마다 다른 무서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무서움의 형식을 감추고 있는 무서움이 가장 무서운 무서움이다.
      내 말 잘 알아 듣거라.
      고양이와 쥐덫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로 있고,
      쥐덫은 언제나 쥐덫으로 있으니,
      내 나이가 되면 고양이쯤이야 차라리 같이 늙어 가는 이웃일 수도 있고,
      쥐덫쯤이야 내 슬기의 시험대 정도로 그친다.
      내 말 뼈아피 새겨들어라.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고양이도 아니고 쥐덫도 아니고,
      무서움을 다채롭게 위장한 쥐약이다.
      쥐약의 외형은 탐욕의 혀끝과 코끝을 유혹하기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이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취약의 외형이 어떻거나 간에 쥐약은 취약이다.
      이 바보들아.

    이것은 '송현'이라는 사람이 쓴 아주 깊은 의미가 담긴 시입니다.

    우리가 우리 육체를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하고 우호적으로 보이는 일들을 찾다가 영생의 길에서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삼가합시다. 하나님이 섭섭해하실 일들을 삼가합시다. 그것이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 작은 일들이 우리들에게 영적인 취약일 수 있습니다. 육체의 썩어질 것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영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쥐는 쥐약을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영적인 쥐약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죽음을 가져옵니다.

행함 있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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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 : 26)

    혹시 집에 양식이 떨어져 가고 돈이 메마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양식과 돈이 떨어져 가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이 막막할 때 우리는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미국은 살기 좋은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먹고 살기에 풍요로운 나라입니다. 그러나 미국 어린이들의 4분의 1이 배고픈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하루에 어린이들에게 소요되는 식비가 200만 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기르는 고양이들이 먹는 밥이 하루에 600만 달러 정도가 소비되고, 개들의 먹이 비용도 하루에 800만 달러치가 소비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미국 전체의 어린이들이 하루 먹는 것보다 미국 전체의 개들이 먹는 비용이 4배 이상이나 됩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개나 고양이의 팔자는 상팔자입니다.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또 미국 안에서 4분의 1의 어린이들이 배고픈 생활을 하고 있다는 데도 미국 사람들은 고양이 먹이에 600만 달러, 개 먹이에 800만 달러를 하루에 쓰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 사람들이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줍니다. 그대표적인 예가 우리 나라 아닙니까? 우리 나라도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반미운동을 하고 미군의 한국 주둔을 반대해도, 저는 어렸을 때 미국 사람들이 보내 준 청바지를 입고 자랐습니다. 또 미국인들이 신다가 벗어서 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맞지도 않는 큰 구두 속에 솜을 넣어서 신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에 가서 살아 보니 미국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만큼 베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베풀었다는 이유로 나중에는 착취(?)해 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를 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드리고 얼마나 남았는가가 중요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하나님께 축복 받았습니다. 그들은 식탁문화도 야만스러워서 칼과 창을 가지고 식사를 합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먼저 믿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밥 먹는 양반들이 하나님을 빨리 믿지 못했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해서 그 사람들보다 조금 못 사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어떻습니까? 미국의 큰 교단의 전체 교회에 일 년 동안 들어온 헌금 액수가 미국의 50개 주 중의 하나인 캘리포니아 주에서 마약을 먹기 위해 소비되는 돈보다 더 적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교회가 뭐하느냐, 교회가 이래서 되겠느냐" 하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들이 이름 없이 빛 없이 좋은 일을 많이 합니다. 제가 남미에 가 보니 그 곳에 선교사를 보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는 한국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교, 양로원, 고아원, 나병환자 돕기… 등에 수많은 돈을 들이고 정성을 기울이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 년에 술을 먹어 없애고 담배 피워 없애는 돈이 우리 나라 전체 교회의 헌금액수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미국 사람들처럼 아주 많은 물질적 축복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적은 것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가며 살아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나라는 개를 먹이는 돈이 어린이를 먹이는 돈보다 더 많은 미국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또 우리는 그렇게 부자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적은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리고 어려운 이웃을 살펴보는 '행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살아야 합니다. 조금씩만 아끼고, 조금씩만 모으고, 조금씩만 나누면 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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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죄의 깊은 수렁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보내 주셨던 하나님께서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서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지는 못할 망정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슬프고 애통할 일입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하나님께 미움을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럼 하나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미워하실까요?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 교만이라는 말은 뽐내고 으스대는 것을 말합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없어도 좋다고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교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하나님께만은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사람이 친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겠습니까? 교만이라는 말과 겸손이라는 말은 서로 반대되는 말입니다. 교만이나 겸손은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필요 없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이 될까 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나치게 아는 척을 하고 남을 무시하고 자기 자랑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 부리면서 으스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미움받는 교만한 사람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일터에서나 교회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때로 괴로운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뜻하지 않은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 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라는 찬송도 있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오히려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나보다 먼저 남을 앞세우고 더욱이 예수님을 앞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산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우뚝 세워진 자존심과 고집을 꺾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서로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금씩만 양보하고 자기 자신을 낮추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미움받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언 16장 5절에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하셨습니다. 교만한 사람끼리 손잡아서 잘 되는 법이 없습니다.
     

수금 나오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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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 : 2∼3)

    편지는 무엇입니까? 편지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편지는 생명력이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불러일으킵니다.

    낙심했던 사람이 한 장의 편지를 받고 용기를 내는 수가 있습니다. 실의에 빠져 무의미한 삶을 살던 사람에게 보내진 한 장의 편지가 그에게 용기를 주고, 꿈과 희망을 갖고 웃으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입원해 있는 환자에게 보내어진 한 통의 편지가 병을 낫게 만들기도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을 죽게도 만드는 것이 편지입니다. 편지는 참으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놀라운 칭호를 받았는데 어떤 편지 노릇을 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번은 제가 인천 부개동에 심방을 가게 됐습니다. "○○호에 찾아왔습니다" 하고 아파트 경비실에 이야기했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교회에서 왔습니다"고 대답했더니 저를 아래 위로 자꾸 쳐다봅니다. 그래서 "왜 그러십니까7" 하고 물었더니 "교회에서 온 것 같지 않은데요?"라고 반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 저는 교회에서 왔습니다. 저는 교회 목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꾸 위아래로 쳐다보면서 "목사님 같지 않은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손에는 집을 찾기 위한 교적부를 들고 있었습니다. 경비원은 내가 들고 있는 그 교적부를 보더니 "수금 나오셨지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가방을 하나 들었겠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인데 카드는 한 장 들었겠다, 보아하니 무슨 월부책값 수금 나온 사원같이 보인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제 옆에 서 있던 전도사님이 "아녜요. 이분은 우리 교회 목사님이십니다. 여기 심방 오셨습니다. ○○ 호에 가려고 합니다. " 경비원은 그제야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올라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마음속에 그 경비 아저씨가 자꾸 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잘생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사람들에게 "신문 기자' 같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습니다. '학교 선생님" 같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수금사원이냐는 말을 들어보기는 그 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왜 그 사람의 눈에 제가 수금사원처럼 보였는지, 제가 왜 월부책값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보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집에 돌아와서 거울을 몇 번이나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정말 내가 그렇게 수금사원처럼 생겼을까?" 제가 수금사원처럼 보였다는 그 자체가 섭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분명히 목사라고 밝혔는데 그 사람은 목사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처음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왜 그 사람에게 제가 목사같이 보이지 않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면서 저 자신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목사가 목사같이 보이지 않았을까요?"

    제가 왜 이 일에 대해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제가 목사라고 밝혀도 나를 목사로 봐 주지 않았던 그 사람의 눈과 그 사람의 자세도 문제이긴 하겠습니다만, 저는 제가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목사로 보이지 않을까 봐 염려되는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목사로 보여지지 않고, 제가 제 가족에게 목사로 보여지지 않고, 특별히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리고 제 자식들에게 목사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사는 강대상에서 설교할 때 제일 신경을 써야 할 분이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그 다음은 아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멋진 설교를 유창하게 한다 한들 뒷자리에 앉아 있는 아내가 코방귀를 뀌고 있다면 그 설교는 잘못된 설교입니다. 아무리 멋진 말로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자식이 앉아서 코방귀를 뀌고 있다면 그 설교는 잘못된 설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편지는 쓴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편지의 사명은 쓴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본다면 우리는 편지의 사명을 잘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다른 사람들에겐 바르게 전하셨습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분명히 전하셨습니까? 그래요. 그까짓 외모야 외판원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닙니까?
     

거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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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 : 32∼33)

    교회라는 곳은 각, 계 각층의 사람들, 다양한 성격을 소유하고 각기 다른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일면으로 말들도 많고, 교인간에 서로 불쾌한 일을 겪는 곳이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고 싶지 않도록 교회를 떠나가게끔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거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도움이 된다고 하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정말 교회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교회에서 분란과 시기와 다툼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주위가 항상 기쁘고 즐겁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에는 다 신실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 진실되고 좋은 사람으로 믿고 싶어서 혹은 그러한 기대 때문에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이해하면 좋겠지만, 이 세상에 교회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엉터리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기꾼이나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어디까지이며, 어떤 기준으로 정의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명확히 대답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때로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분을 내지만 인간이기에, 또 스스로 나약함을 알기에, 예수님처럼 변화하려고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이기에 교회에 '거치는 자'가 많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별다를 바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교회라는 곳은 신실하고 거룩하고 착한 사람들만 선택받아서 모이는 곳은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죄인들이 모여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고 예수 이름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또 세상에 나가 죄를 짓고 다시 와서 회개하고 용서받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를 가리켜 일반적으로 '구원의 방주'라고 말합니다. 노아 시대 때 40일 동안 쏟아질 홍수를 피하기 위해서 만든 방주에는 노아의 식구뿐만 아니라 여러 짐승들로 팍 찼습니다. 소, 돼지, 양, 염소, 뱀, 개 등 각종짐승들이 들어있습니다.

    요즘의 구원의 방주인 교회에도 별의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와 같이 묵묵부답 말 한 마디 없이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웃고, 누가 뭐라고 해도 좋은 표현만 하는 양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염소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염소가 뿔로 물건을 치받듯이 탁탁 치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뱀같이 교활한 사람도 있고 원숭이처럼 재주를 잘 부리는 재주꾼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돼지 같이 자기만 아는 욕심꾸러기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앵무새처럼 남의 이야기를 반복하며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며 다른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말썽꾼들이 있어서 항상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또 개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의 방주 안에는 이처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교회가 칭찬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비판의 소리를 더 많이 듣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돼지 같은 사람, 개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그것이 참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각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이해하며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하여 져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일에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는 모임이 되도록 서로서로 노력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범사를 예수 이름 앞에 내려놓고 예수 이름으로 하나되고 예수 이름으로 화목하기 위해서 애쓰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 앞에서 말씀드린 그 짐승들과 같은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낙심한 경우가 있으신지요? 어느 교회든지 그러한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바라기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신앙에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양 같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소 같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긍정적인 면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히려 개와 같고 돼지와도 같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며 유익을 주고,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도와주는 참되고 진실한 믿음을 가진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범사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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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살전 5: 10)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계십니까? 감사하며 생활하십니까? 아니면 감사는커녕 온통 괴롭고 힘든 일만 가득하십니까? 눈물 나는 일만 생깁니까?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사람은 각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생은 '볼 탓'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보기 탓'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이야기를 아십니까? 다람쥐 망을 보면 다람쥐가 빙글빙글 돌리는 쳇바퀴가 있습니다. 다람쥐들은 바퀴를 돌리면서 놉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왜 다람쥐가 계속 쳇바퀴를 돌릴까?'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뚱뚱해서 살을 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던 정씨라는 사람은 그것을 보고 '저 다람쥐는 살을 빼기 위해서 저것을 돌리나 보다. 다이어트하면서 에어로빅 대신 하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정 불화가 심한 어떤 사람은 '저 다람쥐는 아마 저 환경에서 탈출하기 위해 도망 갈 방법을 찾느라 바퀴를 돌릴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은 '저 다람쥐는 사람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쇼를 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똑같은 상황을 두고도 생각하는 바가 틀리게 마련입니다. 똑같은 물에 손을 넣어도 어떤 사람은 미지근하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따뜻하다고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차갑다고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별 감각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의 온도는 똑같습니다. 다만 각자의 체온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뿐입니다.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에 대해서도 각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표현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기 환경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의 생활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축복과 영적인 발전이 되며 영적인 기쁨을 누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젊어진다"고했습니다. 마틴 루터도 "마귀(사탄)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고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한 일이 아무 것도 없으십니까? 이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가,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위치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에 따라서 감사할 수도 있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시부모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형제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십시오.

    여러분 한번 감사한 조건들을 찾아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를 찾을 줄 아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매 순간, 어떤 환경에서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생활 속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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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 : 21)

    지금부터 약 100여 년 전에 로버트 잉거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를 얼마나 비난하고 조롱하고 욕하는 사람인지 그런 점에서는 참피온이 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는 언제나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다만 피상적인 지식만 갖고 있으면서 성경부분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지적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만 지적했습니다.

    제가 단골로 쓰는 용어 하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시작한 말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한번 마음속으로 따라 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교회의 정문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교회의 정문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교회의 정문에 계신 것처럼 교회 문 안에 들어가서는 거룩한 신자처럼 행하고 교회 문 밖에만 나가서는 하나님과 작별한 사람처럼 마음대로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가지고 비난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는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 가운데는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신앙고백하는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했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도신경대로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 자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을 철저히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생활 속에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인들에게 한 가지 모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생활화되지 않은 신앙입니다. 우리의 언행이 일치되는 생활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 먼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이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집사님들이나 권사님들이나 동갑내기 또는 친한 친구들이 "야, 이놈아, 이 새끼야" 하면서 반말이면서 욕같은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축복의 말이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말이 나와야 하고 또한 용서의 말이 나와야 하며, 칭찬의 말이 나와야 하고 감사의 말이 나와야 합니다. 아무리 다정한 사이라 해도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저 사람은 참 예수 믿는 사람 같구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보니까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답구나. 점잖은 사람이구나. 경건한 사람이구나"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너무 친하다고 같은 신자끼리 말을 막하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말이 달라질 뿐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링컨 아시죠? 아마도 못생긴 사람 중에 링컨이 제일 못생겼을 것입니다. 길쭉하고, 얼굴이 쑥 들어가고, 정말 못생긴 사람인데 그가 "40세가 넘은 뒤의 얼굴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얼굴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의 모습, 우리의 자세, 우리의 얼굴 표절 하나하나가 예수 믿는 사람처럼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시장에 가든지, 찻집에 가든지, 친구와 같이 있든지, 어떤 위치에서든지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는 달라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생활 가운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한 것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은 없었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았는가? 내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지는 않았는가? 한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로버트 잉거슨이 다시 나타난다고 하면 "너 예수 믿는 놈, 엉터리"라고 지적하지 않을는지 자기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고요히 묵상하면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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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 25 : 21)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에게는 네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 교육을 받아야 할 교육의 의무,
      둘째, 일을 해야 할 근로의 의무,
      셋째, 나라를 지켜야 할 국방의 의무,
      넷째, 세금을 내야되는 납세의 의무가 있습니다.

    의무라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국민에게 의무가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도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에 4대 의무가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첫째는 교육을 받아야 할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예배 중에, 성경 공부 시간에, 각종집회 때마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못하면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운전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까? 배우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대로 살겠습니까? 예배에 불성실하고 교회에서 하는 교육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배울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법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참석은 물론 교회의 모든 배우는 일에 열심히 참석해야 합니다.

    둘째로 국민에게는 일해야 되는 근로의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일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전도하는 일, 봉사하며 사랑을 베푸는 일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상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상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종 직분과 재능을 맡겨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둘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일해야 할 의무를 주셨습니다. 만일 이 일을 잘 감당하지 아니하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국민에게는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국방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도 국방의 의무가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꿈꾸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곳,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과 가정이 하나님의 주권이 주장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교회가 어떤 특별한 사람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특별한 개인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마귀에게 침범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해야 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넷째로 납세의 의무가 있습니다. 국민이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별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 첫 열매, 주일 등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황해도에 '정찬호'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남의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청년은 김익두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부흥회를 마친 뒤 그는 김익두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주일성수하시오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하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아니, 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일성수를 합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 목사님은 "주일을 지키고, 일한 대가로 쌀 열 섬을 받기로 하였으면 아홉 섬만 받으시오 아니 여덟 섬만 받으시오 그리고 십일조를 하시오" 했습니다. 청년은 기가 막혀 "아이구, 목사님, 전 절대로 못합니다. 이리 떼고 저리 떼고 나면 전 뭘 먹고 삽니까?" 청년의 반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김 목사님은 소리쳤습니다. "새벽기도도 하시오" "아이구, 목사님, 남의 집 사는 사람이 어떻게 새벽기도를 합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부자되기 싫으면 관두시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청년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도 김익두 목사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해 지키고 노력하였습니다. 부자로 알려진 어떤 집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 청년을 데릴사위로 삼았습니다. 너무도 좋은 아내를 맞이한 청년은 더욱 열심히 일했고 후에는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 쌀 만 석을 거두어 들이는 부자 '만석꾼'이 되었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되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되기 원하십니까? 여러분 모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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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 : 3)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내가 들어주겠다"하신다면 무엇을 구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약속하신다고 가정하십시다. "얘야. 내가 지금 너한테 당장 응답해 주마. 뭘 들어주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한 번 가정해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해서 잘 모르시겠습니까? 아니면 구할 것이 너무 많습니까? 뭘 구하시겠습니까? 아마 쉽게 대답하기 어려우시겠지요?

    '헤리 웬트'라는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너무도 비슷한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전체 내용을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읽어 보시고 자신은 어떤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저로 하여금 계속 자리에 눕게 하옵소서. 아파트 값이 계속해서 치솟아 오르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진 주식의 값이 계속 오르게 하여 주시기 원하오며, 내 증권 담당자에게 증권 시세를 잘 분석할 수 있는 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내 목욕탕에는 항상 따뜻한 물이 넘치게 하시며, 내 자동차에 있는 전화기를 잘 작동하게 하시고. 나의 경력이 펑크 나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사는 집 값이 떨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내가 잠을 자기 전에 파산할지라도, 내가 비록 망한다 할지라도 나의 볼보 승용차는 빼앗기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 모든 기도를 당장 들어주옵소서. 아멘. "

    이 기도는 헤리 웬트 목사님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미국 사람들의 이런 기도제목'이라는 기도를 써 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참 욕심이 많죠? 이건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도하셨습니까? 뭘 기도하셨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 이런 것도 주시고, 저런 것도 주시고,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시고…"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는 대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려면 이 세상을 아마 몇 십만 개는 창조하셔야 할 겁니다. 왜냐 하면 모든 사람이 갖고 싶은 것이 너무너무 많으니까요. 남들이 가지고 있는 땅만큼 가지고 싶고, 남들이 가지고 있는 넓은 아파트도 가지고 싶고, 남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자동차도 가지고 싶고, 남들이 가지고 있는 멋진 시계, 다이아 반지… 등 고급스러운 것은 다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것들을 다 들어주려면 하나님이 창조해 내신 이 세상 가지고 되겠습니까? 모자라지요.

    그러나 지금도 골방에 엎드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주의 종들을 위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나라의 통일을 위해서, 세계평화를 위해서, 복음을 들고 나간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입술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기도를 해도 좀 멋진 기도를 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이른 아침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남편의 손을 잡고 문간에 서서"하나님, 오늘 하루도 지켜 주옵소서. 어느 곳에 가든지 우리 부부의 사랑이 끊이지 않게 하시고 피차 기억 날 때 기도하는 부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기도하세요.

    책가방을 들고 바쁘게 문을 나서려 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하나님, 사랑하는 우리 딸 오늘 한 날을 지켜 주시옵소서. 엄마의 마음이 늘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 학교에 가더라도 선생님과 여러 친구들에게 본이 되는 아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기도해 보십시오.

    정말 살아 있는 기도, 멋진 기도, 하나님이 들어주실 만한 기도 그리고 나와 내 가정과 이웃과 형제와 교회와 나라와 민족과 세계평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의 폭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아니 정확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실 만한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 기도 내가 들어줘야 하겠구나' 하실 만한 기도를 오늘, 아니 지금 무릎 꿇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혁자, 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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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약 2 : 14)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좋은 이야기로 접어 두어서는 안 되는 말씀입니다. 악한 사람들을 바르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그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하셨는데 빛은 어둠을 쫓아내는 개혁자이고 소금은 부패를 막는 보수자 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어둠을 내어 쫓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참되고 바른 것을 지키는 보수자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혼자서만 예수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교회만 정통이고, 자기 교회만 보수이고, 자기 교회만 진리이고, 자기만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십일조 드리고, 큰 소리로 아멘 하고, 머리 잘 숙여 무릎 꿇어 기도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 모든 기도회 때마다 잘 참석하는 사람이면 훌륭하고 박수 받을 만한 교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빛되고 소금되는 삶을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월세 방에서 살아 보았기 때문에 월세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압니다. 월세를 내는 사람은 월세 내는 날이 얼마나 빠르게 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월세를 받는 사람은 월세를 내는 사람의 초조함과 불안함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월세를 사십니까?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실망하지 마시고 열심히 노력하셔서 하루 속히 전세로, 아니 좋은 집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세를 놓고 계십니까? 남보다 더 넉넉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든 사람이 가슴 아픈 일을 당하지 않도록,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진 자들도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진 사람이 얼마나 가진 책임을 다하느냐 하는가를 지켜 보셨습니다. 신앙생활 잘하고 할렐루야 잘하고 아멘 잘하는 것이 모든 분야의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국 교회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골목마다 교회가 많아졌고 십자가가 많아졌습니다. 성경을 끼고 교회 다니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흉악한 범죄, 과소비, 향락, 퇴폐, 빈부의 격차들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본 훼퍼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른 말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고 착한 이야기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를 변화시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 있는 말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왜 하십니까? 이 글에서 무엇을 보고 듣기 원하십니까? 생명 있는 말씀, 생명력 있는 말씀을 보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왜 나가십니까? 생명 있는 말씀을 들으시러 가시는 줄 압니다. '생명이 있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들은 말씀에 '아멘' 했으면 '아멘' 한 사람이 그 말씀을 생활에 그대로 옮기는 말씀이 생명 있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아멘' 하지만 실제 생활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교회의 정문에 계시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는 교회에서 '아멘' 하는 말씀을 그대로 세상에 나가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끼리, 이웃에게, 직장에서, 학교에서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시기 바랍니다. 잘못되고 부패된 것을 막는 보수주의자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행함을 멋지게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는 반열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지켜 보십니다. 마지막 날에, 선악간에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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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람이 삼십이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을 치리하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저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조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 하였더라(대하 21 : 20)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에게 아낌을 받는, 다시 말해서 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있으나마나한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는 사람입니까? 사람마다 이 세상에서 보다 알차고 행복되고 보람찬 삶을 살길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지 못하고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역대하 21장에 보면 여호람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뒤에 남쪽 유다에 다섯번째 왕으로 즉위해서 8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서른 두 살에 왕 위에 올라서 8년 동안 통치하다 죽었으니 마흔 살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아는 자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인생을 불쌍히 여기고 귀한 인물이 죽었다고 안타까워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기르던 짐승 하나가 죽어도 아까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 아닙니까? 그런데 일국의 왕이 죽었는데, 그것도 8년 동안이나 치리 하던 사람이 죽었다는데 아까워하는 사람,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역대하 21장 전체를 살펴보면서 특별히 11절부터 보면 여호람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살인자였습니다. 모든 아우와 방백 중에 몇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여호람에게는 일곱 형제가 있어서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이 그들에게 은금과 많은 보물과 견고한 성음들을 나눠서 물려주었고, 여호람에게는 왕위를 물려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동생들과 그 밖의 신하들에게 나누어 준 것을 탐을 내었는지 악정을 베풀고 그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모두를 귀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인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데서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여호람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살인까지 했습니다.

    여호람은 아합의 딸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여호람은 죄악의 원흉인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배우자를 만나든지 그 배우자와 행복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며 생명을 귀히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결혼은 맞춤옷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기성복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기존해 있는, 이미 형성된 인격, 이미 20년 이상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과 어울려 한 쌍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에서 만나 결혼을 했든지 그 행복과 불행의 책임은 두 사람에게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남편 때문에 가정이 불행하십니까? 아내 때문에 불행하십니까? 핑계 대지 마십시오 핑계는 인류 최초의 자기 방어를 위한 언어였습니다. 모든 원인은 '나'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귀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 때문에, 내가 죄악과 타협하기 때문에, 죄악의 원흉과 결탁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은 것입니다. "

    여호람은 아끼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가 우상을 성기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결국은 살인했으며, 죄악과 타협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남들이 아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먼저 다른 사람을 아껴 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가 먼저 남에게 대접을 하라"고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아껴 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귀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신 것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껴 주시는 사람이 됩니다. 여호람처럼 왕으로 지냈다 할지라도 죽을 때 아끼는 자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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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살후 1 : 3)

    이제 저는 목사가 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공부도 남들보다 더 많이 해 보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성경말씀을 어떻게 하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잘 전할 수 있을까 고심합니다. 그런데도 누가 제게 "성경말씀에 대해서 좀 묻겠습니다" 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제가 충분하게 알고 설명드릴 수 있는 말씀도 있지만 사실은 모르는 말씀이, 아직도 깨닫지 못한 말씀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누가 성경에 대해 묻겠다고 하면 아주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그때 그때마다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도록, 또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잘 떠오르게 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한번은 재미있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젊어서 남편과 사별을 하셨답니다. 그 때 남편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신 상태에서 돌아가셨답니다. 옛날 할머니들은 어릴 때 결혼을 하는 것이 보통 이지요. 물론 그 할머니도 어려서 결혼을 하셨답니다. 그 어릴 때인데도 남편은 예수를 믿으셨고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고생고생하며 자식 하나를 키워 오셨고 이제 늙어서 70이 다 되어 하나님 나라에 갈 때가 거의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목사님, 난 이렇게 쭈글쭈글 늙었는데 우리 남편은 아주 젊어서 돌아갔습니다. 아직 채 자라지도 않은 상태에서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가면 우리 남편은 애처럼 젊은 모양 그대로일 테고, 난 이렇게 쭈글쭈글 할텐데 우리 남편이 날 알아볼까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참 저는 그 질문을 받고는 어떻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회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별의별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그 할머니의 질문에 대해서 답해 줄 말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에 대한 답이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려서 하나님 나라에 간 남편과 이젠 늙은 할머니가 된 분이 하나님 나라에 가면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몇 살이나 돼서 천국에서 만날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국에서는 몇 살쯤으로 만날 것 같습니까? 저도 굉장히 궁금합니다. 예수님은 33세까지 살다가 가셨다고 하는데 그럼 젊은이의 모습으로 계실까?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는데 그냥 969세로 있을까? 낳자마자 하나임의 부름을 받은 어린 심령들은 그냥 아기인 채로 있을까?

    한 가지 제가 답해 드릴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 나라에 가 보면 다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답이 시시합니까? 그러나 제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 보아야 알지요.

    서유석이라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활동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학생 때 서유석 씨가 활동했었는데, 그 때 그 사람이 부른 노래 가운데 "가 보지 않고야 어떻게 느낄까? 어떻게 말할까?" 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 할머니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서유석 씨가 노래한 것은 다른 방향의 이야기지만 어쨌든 하늘나라에 가 보지 않고야 제가 어떻게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하나님 편에 맡겨 두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자리서 정말 어느 정도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10년, 20년을 해 왔어도 마치 처음 믿은 어린아이와 같이 한결같은, 변화와 성장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말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지금 얼마만큼 자라셨습니까?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아직도 철부지입니까? 믿음이 자라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몇 살이 되었을까, 내 얼굴이 쭈굴쭈굴 할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얼만큼 자라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늘나라에 갔을 때 "야, 이놈아. 너는 내가 준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냥 왔구나" 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으시겠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받는 사람이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읽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면 그 말씀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 이 글을 그 할머니께서 읽으신다면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모두 맡기시고 신앙의 연령이 자라도록 기도하세요"라고 말입니다. 나이가 70,80이 되면 뭐합니까? 신앙생활의 연령, 믿음의 연령이 자라야지요. 믿음이 자라야지요.
     

죽을 준비는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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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 : 3)

    전도해 보셨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해 보셨는지요?

    복음을 전하고 증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셨습니까? 아니, 아직 예수를 믿지 않으십니까? 혹 누가 예수 믿으라고 전하지 않던가요?

    어떤 이발사가 예수를 영접하고 전도를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전도를 하고 싶어도 전도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말재주도 없고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지를 돌릴 만큼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굳게 결심을 하고 이발하러 오는 손님에게 전도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한 손님이 의자에 앉았습니다. 이발사는 이발을 하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결국 말 한 마디 못 건네고 말았습니다. 요즘에야 자동 면도기를 많이 사용하지만 이발소에 가게 되면 여전히 칼을 이용하여 면도를 합니다. 이발사는 면도를 위해 칼날을 가죽에 갈면서 그 손님을 향해서 용기를 내어 이야기했습니다. "손님,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하죠?"라고 묻자 그 손님은 "예, 허무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발사는 더듬거리며 "손님,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거죠?"라고 물었고 손님은 "예,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가만 생각해 보니 이발사가 가죽에 칼을 갈면서 인생이 허무하다느니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느니 하며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발사가 꼭 자기를 죽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발사는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같은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발사는 "손님, 이제 죽을 준비는 다 됐습니까?"라고 이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손님은 기겁을 하며 "사람 살려, 이발사가 날 죽이려고 해요"라고 소리치면서 도망을 갔습니다. 이발사는 어이가 없어서 자신의 무능함과 무지함과 둔한 입술을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손님은 이발소에서 들었던 "손님, 인생은 참 허무하지요? 사람은 한 번 죽지요? 손님, 죽을 준비는 되셨나요?"라는 이발시의 세 마디 말이 항상 귓가에 계속 맴돌아서 '인생은 허무하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교회를 찾아 나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유식한 말로 유창하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를 따라 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게서 예수님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이 세상에선 부자로 학자로 명예와 권세를 누린다고 해도 인간은 결국 죽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허무하며, 우리는 죽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변하여 새사람이 되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영생을 허락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누구나 한 번씩 죽음을 맛보게 되지요? 그렇다면 죽을 준비는 되셨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오늘 하루뿐일지도 모르는 삶'을 참으로 멋지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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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살후 3 : 10)

    이 세상에 정말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일하기 좋아하십니까? 가끔 일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랑들은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땀흘리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해야 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땀 흘려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일 하지 않으면 편안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은퇴를 하고 나면 바싹 늙는답니다. 은퇴하기 전에는 "이제 내가 은퇴를 하고 나면 편안히 쉬어야지" 하지만 은퇴를 하고 나면 할 일이 너무 없어서 '무슨 일이 없을까' 하고 일을 찾는다고 합니다. 원로 목사님들이 은퇴를 하고 나서도 교회를 개척하시거나, 전도를 하러 다니시거나 하시면서 교회를 맡아 담임하셨을 때보다 더 많이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보나르고'라는 사람은 "모든 쾌락 중에서 노동의 열매가 가장 감미롭다"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바빠 죽겠다, 바빠 죽겠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바빠서 죽었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쁘게 일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은 지 며칠 뒤에 눈을 떠보니 천국에 온 것 같았다고 합니다. 출근하라고 깨우는 사람 없고, 잔소리하는 상관도 없고, 시중 드는 하인이 옆에서 무슨 일이든지 거들어 주었습니다. 물먹고 싶으면 물 떠다 먹여 주고, 밥 먹고 싶으면 밥 먹여 주고, 옷 갈아입고 싶으면 옷을 갈아 입혀 주고…, 모든 것이 편안해서 좋은 것 같았는데 막상 며칠 지나니까 싫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여보게,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뭐 없나? 나도 일거리를 좀 주게. 나도 뭘 좀 해야지." 그랬더니 그 하인이 그 청을 거절했습니다. "여기서는 무엇이든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다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직접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화가 잔뜩 나서, "그럴 바엔 차라리 지옥에나 보내 주지. 여긴 어디 심심해서 견디겠소?"라고 소리를 쳤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하인이 깜짝 놀라서 하는 말이 "아저씨, 여기가 천국인 줄 아셨수? 여기는 지옥이우" 하였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땀 흘려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즐거운 일임을 말해 줍니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바쁘셨습니까? 하나님께 일할 수 있게 건강을 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일'이라는 것은

    1.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
    2.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일,
    3.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
    4.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일을 말합니다.
       

매 순간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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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 : 14)

    얼마 전 참으로 서글픈 뉴스와 기쁜 뉴스가 미국의 텔레비전에 함께 등장했습니다. 하나는 한국이 북한과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것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서 경찰관이 쏜 총에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는 젊은이가 죽어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비극의 소식이 함께 전해진 것입니다. 미국의 교포들이 즐겨 보는 고국 신문 속에서도 이 두 가지 보도 내용을 함께 볼 수가 있었습니다. 유엔에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된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환호를 올리는 사람들의 반대편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의 원인제공으로 인하여, 아니 그것을 방어한다는 이유로 총을 쏜 경찰관에 의하여 한 젊은이는 정말 너무너무 아깝게 그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신이 그렇게 될 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박사가 되어 자기가 그 동안 노력한 것을 보상받는 시기가 다가온다는 기쁨을 앞두고 사랑하는 아내 옆에서 죽어 가야만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사람이 즐거워하는 일을 다른 사람은 싫다고 반대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을 저 사람은 싫다고 합니다. 내가 정의라고 말하는 것을 저 사람은 불의라고 말합니다. 내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을 전 사람은 비 진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 모든 것을 결론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우리 인생은 마무리 지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원 박사 과정에 다니면서 남에게 피해 준 일 없이 단간 셋방에 살면서 과외를 가르치며 노력을 하면서 살던 젊은이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그는 죽어갔습니다.

    어느 주말에 미국 LA에서는 살인 사건으로 인해 31명이 죽었습니다. 미군이 이라크와의 지상전을 벌였을 때에 낸 희생자의 수를 능가한 것입니다. 한 주말에 31명이 죽어갔습니다. 88년 한해 동안 독일에서는 살인 사건이 96건 일어났습니다. 캐나다에선 580건이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자그마치 25,000건이나 있었습니다. 웬만한 작은 도시 하나만큼의 인구가 살인 사건으로 죽어갔습니다. FBI의 발표에 의하면 사람이 살면서 살인 사건에 관련되어서 죽을 확률이 133:1이라고 합니다. 평생 동안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이나 기타 폭행이나 흉악한 사건을 만날 확률이 83%나 된답니다. 이것은 물론 미국에 대한 통계입니다. 미국 전체 여성 중에서 12명 중에 한 명은 강간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런 통계를 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찔합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은 안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길 가다가 데모하는 학생들을 막는 경찰관의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가야할, 아니 더 쉽게 표현해서 죽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천년 만년 살 것 같이 큰 소리치며 살아가지만 천년 만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는지, 언제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서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14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듣기 좋은 이야기, 옳은 이야기, 박수 칠만한 이야기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삶에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안함 가운데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사십시다. 어느 순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에 주님이 오신다 할지라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니면 "주여, 내가 여기에 왔습니다. 말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이 없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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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9 : 12)

    요즘에 여러 가지로 실망되고 좌절될 만한 일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해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실패하고 어려운 경지에 있다 할지라도 다시 한 번 노력하고 다시 한 번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고개를 들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노력하고 주를 섬기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졌습니까? 자신의 떨어진 모습을 인정하십시오. 내가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인정하세요. 내가 나이를 먹었습니까? 인정하세요. "예전에는 예뻤습니다. 처녀 때 동네 총각들이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세요. 죄를 많이 지었습니까? 현실의 모습을 인정하세요. "나는 실패했습니다. 예, 나는 떨어졌습니다. 예, 나는 지금 나이가 몇입니다. 예, 나는 지금 이런 위치에 있습니다. " 이렇게 현실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지금부터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남들이 열 계단 올라갔습니까? 뒤떨어진 것을 인정하시고 지금부터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습니까? 그것도 인정하시고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어 구문 가운데 "결코 늦지 않았다(Never too late)"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앞서가는 사람들을 충분히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십시오 현실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실패했습니까? 죄를 지으셨습니까? 지금 형편이 하나님 부끄럽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는 말로 용서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골인 지점에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 어떻게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뛰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를 받았습니까? 둘을 받았습니까? 다섯을 받았습니까? 자신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린다면 마지막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힘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십시오 지금부터, 지금 자신의 모습에서부터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사시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순간에 승리하는 자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으며….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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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 : 17)

    사람마다 선한 일을, 행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만 합니다. 마음으로 '에이, 내가 마음 같아서는 저 사람에게 이렇게 해 주고 싶은데….' '내가 마음으로는 이렇게 해 주려고 했었는데….' ' 목사님께 맛있는 것 좀 대접하고 싶었는데….' '야간학교를 돕고 싶었는데….' '세계선교를 돕고 싶었는데….' '이웃의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었는데….' 하며 늘 마음으로만 하고 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마음으로만 부자입니다.

    그런가 하면 입으로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진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입만 살았습니다. 입으로는 봉사 잘합니다. 입으로는 사랑도 잘하고 입으로는 대접도 잘합니다. 입으로는 칭찬도 잘합니다. 입으로는 도와주기도 잘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정말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의심이 갈 만큼 입으로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묵묵히 이름 없이 빛 없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은 나타내지도 않으면서 봉사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핑계가 무엇입니까? 시간이 없어서 못 한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못 한다고 합니다. 참된 봉사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진실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참된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던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는 나치 독일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저항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의 어떤 사람이 자기는 저항운동을 해 본 적도 없고 아무런 잘못도 한 적이 없는데 죽게 되었다고 한탄을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저항운동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내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해야 되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때 그 사람의 소리를 가만히 듣던 한 저항운동가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려 죽었습니다.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갔고, 조국과 민족이 멸망의 직전에 놓여 있고 이젠 완전히 패망인데,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큰소리 칩니까? 당신은 그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때문에라도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크고 대단한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를 원하십니다.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아무런 직분도 없이 그냥 교회에 출석하십니까? 출석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집사입니까? 권사입니까? 장로입니까? 목사입니까? 주일마다 청소를 합니까? 아니면 교회에 출석하여 설교 듣는 것밖에 없습니까? 좋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그 작은 일에 충성하고, 믿음 안에서 말씀을 듣다가 혹은 성경을 읽다가 찬송을 부르다가 '이런 것을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기꺼이 그 일을 행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음은 죄라고 했습니다. 기꺼이 하십시오 눈치 볼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를 원하십니다.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헛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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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업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 : 10)

    지금 소유하고 계신 재산이 얼마를 되십니까? 땅은 몇 평쯤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 사시는 집은 얼마나 크신지요? 전세를 사시는지, 월세를 사시는지요? 그동안 힘쓰고 애써 모은 것으로 아파트를 마련했는지요? 마련했다면 몇 평짜리 인지요? 가지고 계신 보석들은 얼마나 되시는지요? 한번쯤 자신의 재산목록을 파악해 보시기 바랍니다.

    많습니까? 다행입니다. 그러나 저는 잉여물이 많은 것은 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무 많이 가짐으로 다른 사람이 못 가졌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갖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그것은 자로 저울로 재서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힘쓰고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이 넉넉하게 사는 것과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어렵게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내가 힘쓰고 애썼다고 해서 너무 많이 움켜쥐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베풀면서 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여류 작가 펄 벅의 작품 중에「대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중국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쓴 농민소설인데 그 내용을 보면 가난한 소작농 왕룽이 대지주 황가집 계집종인 아랑을 아내로 맞아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거듭되는 흉년 때문에 살 길이 막연해 졌습니다. 할 수 없이 도시로 나가 남편은 인력거를 끌고 아내는 구걸을 하여 돈을 모아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지주가 되었고, 마침내 몰락한 황가네 대궐 같은 집까지 사서 호화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룽이 대지주가 되고 보니 자기 아내 아랑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죠 고생하고 살 때는 그런 여유가 없었겠습니다만 돈이 좀 생기고 나니 고생으로 찌든 아내의 얼굴, 고생으로 엉망이 된 손등이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창녀를 첩으로 들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손녀 딸쯤 돼 보이는 어린 소녀를 첩으로 얻어서 향락에 도취해 살았습니다. 늙은 아내 아랑은 부엌 데기로 일만 하면서 땅 한 평 없이 소작을 할 때와, 도시에서 인력거를 끌며 구걸을 하며 살던 때의 행복을 그리워합니다. 아랑에게 있어서 땅이라고 하는 것,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행복을 빼앗아 간 원수와 같았습니다.

    인간의 행복이 과연 땅의 넉넉함에, 재산의 넉넉함에 있습니까? 넓은 아파트에 살면 행복합니까? 큰 집에 살면 행복합니까? 사람의 행복이 재산의 부유한 데에 있다면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행복이 재산의 넉넉함에 있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이 재산 때문에 다툼으로 서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롯은 넓고 부요한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악하고 죄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의 멸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욕심 없이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고하면서 양보만 했던 아브라함은 후에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전도서 5장 10절 말씀에도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고했습니다. 서너 평의 땅도 갖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보처럼 양보만 하고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잠언 16장에도 "불의한 많은 소득보다 의로운 적은 소득"에 더 귀한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사람, 많이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착하고 충성되다고 칭찬 듣는 사람, 그리고 진실되게 살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는 하루살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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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아제라 때가 악하니라 (엡 5 : 16)

    "우리가 근심에 빠질 때는 작업이라는 전통적인 치료법을 기억하자"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버드 대학의 임상 전문가인 리처드 케보트 박사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케보트 박사는 "나는 의사로서 사람들의 지나친 의심이나 주저함, 공포, 마음의 흔들림 등으로 인한 무서운 정신적 미비가 작업, 다시 말해서 일로써 치료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바쁘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시무룩하게 무엇인가 생각만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를 허전하게 만들고 우리의 머리 속을 텅 비게 만들어서 행동력과 의지의 힘을 마비시킵니다. 이렇게 우리의 행동력과 의지가 마비되면 거기에 마귀들이 알을 까놓게 됩니다. 버나드 쇼는 "자기가 행복한가? 불행한가?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인가? 불행한 사람인가? 이것을 곰상스럽게 생각하는 여가를 갖는 데서부터 근심이 시작된다"고했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일까? 나는 불행한 사람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행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혈기왕성한 삶을 살아갑니다. 바쁘게 지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값싸면서도 가장 좋은 일입니다. 바쁘지 않기 때문에 남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바쁘지 않기 때문에 남의 말을 하고 다닙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 중에 내일을 약속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일'을 기대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지만 세상에서 '오늘' 이후의 삶을 보장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생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들 모두의 삶은 '하루살이'와 같은 삶입니다. 지난날 많이 살아 본 것처럼 오늘을 살지만 오늘은 그 누구도 살아 보지 못한 새날입니다. 수십 억의 인구가 한 지구 위에서 숨을 쉬지만 그들 중 오늘을 전에 살아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은혜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기회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선택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희망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축복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환희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최후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승리의 날입니다.

    단지 '하루살이'임을 부정하고 보장되지도 않은 '내일'에 기대를 걸고 있는 바보들에게 '오늘'은 의미 없이 지나버려 '어제'가되는 날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했습니다. 이 말을 원문에서 보면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바쁘십니까? 바빠서 죽겠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사망진단서 기록 가운데 "바빠서 죽었다"는 것은 없습니다. 바쁘면 더 바쁘게 될 일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최선을 다해 하시는 일에 정성을 다 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알을 까놓을 시간이 없습니다. 자신이 행복한가 불행한가 생각할 여유도 없을 만큼 시간을 쪼개어 사십시오 하루살이 아닙니까?

    매 순간 고백 하십시오 "나는 하루살이입니다"라고….
     

가장 못생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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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 (마 6 : 14-15)

    늙으셨습니까? 괜찮습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임이 보시기에는 참으로 좋으실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조금 못생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명인사들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유명인사는 아마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링컨의 사진을 보셨습니까? 광대뼈는 툭 튀어나왔고 코는 크고 턱은 주걱턱입니다. 더군다나 비쩍 말라서 아주 볼품이 없습니다. 링컨 대통령을 이렇게 평하는 저 자신도 잘생긴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만들어 놓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링컨도 저도 하나님 보시기엔 만족스러운 작품일 것입니다.

    링컨은 대통령 시절에도 비난과 미움, 배신을 많이 당했습니다.

    앤더슨이 쓴 링컨의 전기에는 "그는 좋아한다든가 싫어한다는 것에 의해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았다. 어떤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의 정치적인 적들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비난하고 불평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지위에 적합하면 친구에게 주듯이 그 자리를 선뜻 내어 주었다. 싫다든지 그의 정치적인 적이라든지 하는 이유 때문에 누구를 면직시킨 일이 없었던 것 같다"라고 링컨에 대해 말했습니다. 링컨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고 정치적으로 원수일지라도 그러한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사람들을 멀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도 같은 태도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디언들의 기도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 신령이여! 우리가 남의 신을 신고 보름 동안 걸어 보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삼가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보름 이상 그 사람처럼 살아 보기 전에는 그를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적을 미워하는 대신에 그들을 동정하고, 저주와 복수심을 갖기 이전에 이해와 동정심과 원조와 용서를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다 보면 마음에 안 드는 미운 사람도 있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해 주시지만 우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용서하시지 않는다"고했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평화와 행복을 창조하기 위해서 원수 갚으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일지라도 미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덮어 줍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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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 : 5)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자기의 이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어느 때 많이 불리워집니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 이름이 '고신일'이라 '신일 고(Shin il Ko)'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친숙해지면 '일(il)'자는 부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을 부르지도 않습니다. 제일 많이 불리어 지는 이름이 '신(Shin)'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름이 '신(Shin)'이라고 가르쳐 주면 'sin(죄)'이라는 단어를 생각해서인지 "당신은 무슨 죄가 많아서 '죄'라는 이름을 가졌느냐"고합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 'Shin'이라고 알려주면 왜 하필 그렇게 이름을 지었느냐고 합니다. 'Shin'이라는 단어는 무릎과 발꿈치 사이를 말하는 '정강이'라는 뜻이 있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 이름을 영어로 표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진 이름은 대부분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명소나 점쟁이 집에서 돈을 주고 이름을 짓습니다. 저도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아기를 낳으면 이름을 많이 지어 주었습니다. 개업하게 되면 상호도 지은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이것저것 따져 보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야 좋은 이름이 나오고 부탁한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좋다고 해서 팔자를 고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름대로 되는 것은 아니고 이름이 좋다고 다 유명해지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양, 칭찬'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살로메'라고 하는 헤롯의 딸이 있었습니다. '살로메'는 '평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살로메는 왕을 위해 춤추고 받은 상품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극악한 여인이었습니다. '살롬'하면 평안이라는 뜻이고 '압살롬'은 '평화의 아버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평화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고재봉'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히틀러'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이름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선자'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사나운 여자도 많고, '정자'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소란을 떠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용 '龍'자, 범 '虎'자가 붙은 '용호'라는 이름을 가진 겁쟁이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이름은 '본디오빌라도'일 것입니다. 그 이름은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불리어질 때, 쓰일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름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은 훗날에 주님에 의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와 천사들 앞에서 불리어지는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그 이름이 어디에서 많이 불려집니까? 그 이름이 어떤 사람들에게서 많이 불려집니까? 그 이름이 어디에 많이 기록됩니까?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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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 : 4-5)

    유행을 좋아하십니까? 요즘에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유행을 따라가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유행이 없습니다. 유행을 따라 사는 것도 멋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만큼은 유행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체크 무늬로 양복을 맞추었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던지 어색하면서도 그 옷을 입고 갖은 폼을 내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옷을 지금까지 입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양복의 깃이 넓은 것이 유행이었는데 제가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깃이 좁은 것이 유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탁소에 가서 고쳐서 유행에 맞추어 잘 입고 다녔습니다. 그 후 미국에서 살다가 돌아와 보니 다시 깃이 넓은 것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넓은 깃을 좁게 고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좁은 깃을 넓게 고칠 수는 없으니 이제 그 양복은 지금 입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고치지 말고 가만히 두었으면 입을 수도 있었을 텐데 유행에 맞추어 살다보니 결국 못 쓰게 되었습니다.

    유행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한때 미니 스커트가 유행하더니 그 다음에는 미디, 맥시라고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것, 그리고 요즈음에는 발목까지 내려 오는 스커트가 유행합니다. 언제 또 어떤 모양으로 바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행을 따라가다 보면 자기만의 개성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만의 분위기와 개성이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쌍둥이라 할지라도 각기 개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를 다르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각자 자신이 타고난 신체조건에 맞게끔 옷을 입어야 하며 얼굴형에 맞는 헤어스타일을 갖춰야 합니다. 탤런트, 영화배우, 모델들이 입어서 멋있어 보이는 옷도 다른 사람이 입었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취향과 분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편지한 말씀의 내용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처음에 가졌던 주님께로 향한 마음, 지금도 그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계십니까? 언제나 새해가 되면 가지게 되는 '새로운 출발을 하리라'는 마음 그대로 지금까지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유행이 없습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처음의 마음으로 회복하셔야 합니다. 유행에서 벗어난, 변함이 없는 마음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행 따라, 변덕스럽게 사는 것만이 신세대는 아닙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진실함도 변하지 않아야 '참'입니다.
     

말의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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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 4 : 6)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왜 예수 믿으면 말을 잘한다고 할까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매주일 설교말씀을 통해 새로워지므로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에 있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에 대해 조심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너무 말을 쉽게 하고 아무렇게나 함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도 많이 있습니다. 눈으로 확인한 정확한 것이 아니라면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쉽게 남의 이야기를 듣고 쉽게 남의 이야기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그냥 듣고 있는 것도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그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잘못된 이야기, 죄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는 그 입을 막든지 그 자리를 피해서 듣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했습니다. 나쁜 소리나 사탄의 소리를 들으면 잘못된 믿음,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흔들어 놓는 잘못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말할 때에 소망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고, 축복된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거나 남을 조롱하거나 실망을 주는 그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유명한 신학자 중에 '아담 클라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아담 클라크가 학교에 다닐 때 얼마나 공부를 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담 클라크를 가르치던 선생님도 "아담 클라크는 틀렸어. 저 아이는 도저히 가르칠 방법이 없어"라고 단정을 지어 버렸습니다. 한번은 아담 클라크의 학교에 어떤 신사 한 분이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그 손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아담 클라크를 가리켜서 "저 아이는 희망이 없습니다. 저 아이는 우리 학교에서 가장 공부를 못하는 아이입니다"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담 클라크는 선생님께 실망했고, 좌절하여 눈물을 홀리며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손님이 학교를 다 돌아보고 떠나가려다가 아담 클라크가 그때까지 쭈그리고 앉아서 훌쩍훌쩍 우는 것을 보고는 아담 클라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용기를 내. 너는 장차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어. 열심히 노력해 봐. 넌 틀림없이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고 돌아갔습니다. 아담 클라크는 그 손님의 격려의 말을 듣고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그는 근대의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손님의 그 말 한 마디가 공부를 못하여 바보 취급을 받던 아담 클라크를 유명한 신학자로 변화되게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 남편, 아내, 부모님, 또는 친구에게 용기를 주는 말과 시정이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17장 27절에 보면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고했습니다. 이 말씀은 해야 할 말, 바른 말, 들어야 할 말들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아끼라"는 것을 그저 입을 꼭 닫고 있으라는 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하여야 할 말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하지 말아도 좋을 말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짧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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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시 89 : 47)

    인생이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생에 대해서 짧고 허무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요즘 세상은 눈만 뜨면 엄청나게 큰 일들이 시시각각 터지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할 수 있는 한 주님을 만나는 일이나 주님을 찾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황이십니까?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십니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극히 짧습니다. 시편 기자는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을 사는 우리가 '내일 하자, 모레 하자, 내년에 하자' 하고 미룰 수는 없는 일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어느 여름 방학 때 알래스카에 있는 '훼어 뱅크스'라는 지역에 있는 교회에서 저에게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고 초청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래스카에 일부러 구경을 가기도 하는데 그 곳에 있는 교회에서 부족한 저에게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고 하기에 기꺼이 가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알래스카까지 비행기를 타고 갈까 자동차로 갈까 망설이다 자동차로 가기로 하고 하루에 10시간 이상 꼬박 7일간 운전을 하여 알래스카의 훼어 뱅크스 지역에 있는 '델타 정션'이라는 조그마한 동네에까지 갔습니다. 지도 한 장 들고 일주일 동안 운전을 하면서 캐나다를 지나서 그 곳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고 가는 길에 겪었던 많은 경험들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알래스카는 참으로 아름답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미국의 보물창고와 같은 곳입니다.

    알래스카는 미국 땅입니다. 미국의 텍사스 주의 두 배가 넘고 미국 본토 전체의 5분의 1에 해당될 만큼 큰 땅입니다. 알래스카는 원래 소련의 영토였습니다. 그랬던 것을 1867년에 미국에서 720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던 것입니다.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는 것은 국회의 동의없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 둘만의 합의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안 국회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얼음덩어리 알래스카가 그렇게 필요했으면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미시시피 강의 얼음을 깨다가 안방에 둘 것이지 아무 쓸모 없는 땅을 720만 달러나 주고 샀느냐?"고 퍼부어댔습니다. 그 때 대통령이 국회에 나가 많은 국회의원들 앞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미 사 버린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된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매스컴에서 떠들게 되고, 소문이 퍼지게 되면 소련에서 팔지 않겠다고 하거나 값을 비싸게 달라고 할 것 같아서 국무장관과 의논해서 사게 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국회에서는 조사단을 조직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이럴 수는 없다"라고 분개하여 조사단을 파견해서 알래스카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조사해 본 결과 알래스카는 백금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또한 풍부한 어장이 있어서 고기잡이가 얼마든지 가능한 곳이었고, 삼림도 무성하였으며, 석유가 무한정으로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발견한 의원들은 코가 납작해 졌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의회에서 있었던 당신의 사과를 돌려 드립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그랬습니다. 알래스카는 얼음창고가 아니라 보물창고입니다. " 사람들은 그제야 대통령과 국무장관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희생이 따르고 다수가 원하는 일이 아닐지라도 좋은 기회는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알래스카를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대통령은 자신이 비난을 받을지언정 사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주변을 맴돌기만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그저 감동하기만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셔들이고 구주로 영접하면, 그 곳에 마치 알래스카에 담긴 보물과 같은 엄청난 보물들이 담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데 그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도 짧고, 허무한 인생이기 때문에 '알래스카를 살 것이냐, 말 것이냐'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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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롬 13 : 11)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칭찬하기보다는 비방하고 낮게 취급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일에 성공을 하거나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었다면 "그까짓 거 누구나 다 하는 건데 뭐"라고 빈정대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렵게 돈을 모아서 불쌍한 사람을 도왔다고 하면 칭찬하기보다는 "에이, 그 사람 그렇고 그렇지 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있어서는 어떤 일에든지 무엇을 하든지 인정받기를 원하고 칭찬받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면서 남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인색합니다. 그리고 얕잡아 봅니다.

    우리는 그저 쉽게 "아! 그까짓 거 누구나 하는 일이지 뭐. 저만했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 당사자는 참으로 어렵게 그 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호랑이도 토끼를 잡을 때 최선을 다해서 뛴다고 합니다. 토끼가 호랑이 코 앞에 가서 "날 잡아 잡수시우"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또 내일로 미루는 말을 하기는 참 쉽습니다. "이거 꼭 오늘 해야 하나? 나중에 하지." "다음에 하지"라는 말은 우리를 게으르고 나태해지게 만듭니다.

    파스칼은 "무위도식하는 자의 두뇌에는 악마가 즐겨 집을 짓는다"고했습니다.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머리 속에는 마귀가 즐겨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공로를 낮게 생각하며 '얼마든지 나도 그 일을 할 수 있지만 단지 내가 하지 않는 것뿐이지, 그리고 아직도 날이 많다' 하는 생각들이 화목을 깨뜨리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되며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죄짓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뒤로 미루는 사람, 그리고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쉽게만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해 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낮게 평가합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건실한 기업체에 취업한 사람들은 그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남들 잘 때 잠을 줄여 가며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까짓 거 나도 하면 하지, 내가 안해서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의 공로를 결코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떤 일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직 날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하루도 이웃을 비방하거나 원망하지 마시고 이웃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주를 섬길 뿐 아니라 하루하루 지극히 작은 일에까지 충성하며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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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 : 9)

    탈무드에 보면 임금님이 어떤 사람에게 빨리 자기에게 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임금님이 자기를 찾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떨려서 세 명의 친구에게 임금님 앞에 갈 때 같이 가자고 요청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찾아갔습니다. "여보게, 임금님이 나를 오라고 하시는데 큰일 났네, 같이 좀 가세." 그랬더니 이 친구는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한 마디로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싫어, 자네 혼자 가게"라고 말입니다. 실망한 이 사람은 두 번째 친구에게 찾아갔습니다. "여보게, 임금님이 날 오라고 하시는데 큰일 났네.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니면 무슨 상을 주시려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오라 하시는데 무섭다네. 같이 좀 가세." 그랬더니 그 친구는 가기는 하겠지만 대궐 문 앞에까지만 따라가지 더 이상은 못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너무 실망한 이 사람은 세 번째 친구에게 찾아갔습니다. 세 번째 친구에게 "임금님이 날 오라고 해서 지금 찾아가야 하는데 나와 같이 가지 않겠나?"하고 애걸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세 번째 친구는 "참, 좋고 말고 자낸 아무런 나쁜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별로 무서워할 것 없네. 내가 같이 가서 임금님께 자네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리겠네." 라고 말하며 따라 나서더라는 것입니다.

    세 명의 친구 중에 어떤 친구가 참다운 친구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친구를 가지고 계십니까? 탈무드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첫번째 친구는 '재산'이라는 친구입니다. 재산은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귀하게 여겨도 죽을 때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재산이라는 친구는 죽을 때 남겨 놓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친척'이라는 친구입니다. 친척들은 어떻습니까? 장례식을 치를 때 보면 장지까지는 길이 가지만 그 이후에는 다 돌아갑니다.

    세번째 친구는 '선행'이라는 친구입니다. 착한 일은 평상시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죽은 뒤에도 그와 줄곧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사는 것 이상 필요한 것이 또 있을까요?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선한 생활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 심판을 받을 때도 우리의 '선행'을 심판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재물을 세상에 쌓아 두면 거기에는 도둑이 있고 좀이 슬고 또 동록이 생기지만 하나님 나라에 쌓아 두면 거기는 안전하다"고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선행을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아니 언젠가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하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하는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속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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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 15 : 33)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속아서 억울한 일을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이 세상에 남에게 속아 손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남에게 속아 보시기도 하셨겠지만 남을 속여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만우절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장난으로 하는 거짓말이 아닌 정말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 "아니요,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어떤 약속이 되어 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지키지 못할 때는 그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세상은 자기의 이익과 자기 만족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남을 속이고, 그것이 들통 나도 자기는 잘못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런 결과로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이 세상에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세상은 서로가 속이지 않고는 살수 없을 만큼 서글픈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참 뻔뻔하게 잘 속입니다. 선거 유세 때 보십시오. 아주 굉장들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막상 당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싹 씻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큰 죄를 짓고 그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자기 잘난 이야기만 하고 깊숙이 들어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남을 속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남과 거래할 때에 진실성 없이 속인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자기 속임수로 남을 속이려다가 결국은 자기가 비참한 지경에 빠져 버린 사람들도 사실은 많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속이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속인다면 속죄의 길이 막막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야 됩니다.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이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저 자신도 가끔 본의 아니게 어떻게 말하다 보니 거짓을 말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바로 회개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잘못을 뉘우쳐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 제가 이렇게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꾸짖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거짓을 말한 것은 곧 용서를 빌어야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속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젠 예수 믿는 사람도 믿을 수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한번 믿을 만한 사람들이 되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믿을 만한 성도님, 서로 믿을만한 집사님, 서로 믿을만한 권사님, 서로 믿을만한 장로님, 믿을 만한 목사님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자기 이름과, 자기 직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 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일하여 양식을 먹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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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살후 3: 10∼12)

    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미국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살면서 주변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을 바라볼 때 제가 축복받은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좋은 아버님을 두었고. 사랑하는 성도들, 정말 좋은 성도들을 두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피땀 흘려 일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느낀 것 가운데 하나는 미국에 이민 가서 사는 교포들, 특별히 유학생 신분의 젊은이들 가운데 어마어마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유학생들 가운데 BMW, 벤츠, 캐딜락 등 엄청나게 좋은 스포츠 카를 굴리면서 떵떵 거리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공부는 잘 못합니다. 어떤 때는 배가 아플 때도 있었습니다. 뭐 저런 것들이 다 있나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유학생이 제게 찾아오더니 "선배님, 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닙니까?점심 걱정 마십시오 제가 매일 사 드릴 테니 그냥 오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절약하자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맞지는 않습니다. 학교 안에 있는 식당에서 돈 조금 내면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음식, 또 학교 주변에 가면 각종 음식점들이 많았습니다. 맥도날드도 있고, 버거킹도 있고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도 있고, 그 밖에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먹기가 싫었습니다. 입에 맞지도 않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고 해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제 처지가 불쌍해 보였는지 자기가 저의 먹을 것을 사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얼마나 잘사는 집, 부잣집 아들인지는 잘 모르지만 참 기가 막혔습니다. 제가 그 학생에게 점심을 얻어먹고 살만큼 그렇게 형편없는 처지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제 유학생활이 아끼고 살아야 하긴 했지만 비참한 상황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미국에는 놀고 먹는 한국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유학생들 가운데 떵떵 거리는 철부지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거나 사위거나 손자이거나, 혹은 엄청난 권력층의 자녀이거나 친척이거나 하겠지요. 미국 사람들 가운데 부자는 결코 놀고 먹지 않습니다. 놀고 먹는 사람,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나라에서 먹여 줍니다. 유학생이라곤 하면서 공부는 하지 않고, BMW, 벤츠, 오만불, 육만불, 칠만불하는 비싼 차를 타고 다니면서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며 아끼면서 공부하는 사람 불쌍하다고 점심 책임지겠다고 떵떵 대는 그 사람들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일한 대로 먹고 사십시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한 대로 땀흘린 대로 먹지 않고, 땀 흘린 것보다 일한 것보다 더 잘 먹고 더 잘살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나라, 영화로운 그 땅에 가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며 살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는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들인데 왜 세상 기준으로 판단하고 일합니다? 성경에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했습니다.

    벌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불안해하고, 땀 흘리고, 애를 쓰고, 걱정하고, 때로는 신경질도 나고. 때로는 모욕적인 말도 듣고, 정말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지만 애써서 모은, 애써서 얻은 그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이웃에게 베풀고 자녀들을 키울 때 그것이 값진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일하지 않고 명명거리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일하지 않고 명명거리는 사람 때문에 괴로우셨습니까? 돈 때문에 힘드셨습니까? 정말 벌기 위해서 땀 흘리시고 애쓰셨습니까? 자식들이 아니 남편이 나가서 버는 것이 안타깝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이 기쁨이요 그것이 감사입니다. 놀고 먹는 것, 일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 말씀 가운데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넉넉하지 않고 많지 않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땀 흘려 일할 수 있고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땀 흘린 사람만이 동전 한 개의 귀중함을, 쌀 한 톨의 귀중함을, 범사에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멋지게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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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 8: 18)

    복권을 사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당첨되면 엄청난 돈을 얻게 되는 복권 말입니다. 저도 한 번 사 보았습니다. 복권을 사 보니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제가 산 복권이 1등에 당첨될 것 같아서 복권을 산 날부터 추첨하는 날까지 얼마나 신이 나던지…. 이게 맞으면 무엇을 할까?' 생각만해도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해 교인이 조금 모였을 때 대지를 구입하고 성전건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짓기 시작해서 거의 마무리할 때가 됐는데 지붕을 못 덮게 되었습니다. 교인들도 성전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해 헌금을 할 만큼하였고, 정말 눈물겨울만큼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장마철은 다가오는데 지붕은 덮어야 하겠고 걱정은 태산인데 돈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제 아내와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복권을 팔기에 남들이 볼까봐 눈치 보며 한 장을 샀습니다. 그 때 생각에는 복권만 맞으면 교회 지붕을 덮고 봉헌식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그 때 목사인 제가 복권을 사기는 쑥스러워서 제 아내보고 사라고 했더니, 사려면 자기가 사지 남보고 사라고 한다며 투덜대는 것을 남편 말을 안 듣는다고 윽박질러 겨우 샀습니다. 물론 끝 번호도 안 맞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만 합니다. 누구든지 한번쯤은 복권을 사서 당첨되었으면 하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있을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가 보니 많은 나라에서 이 복권을 팔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제각기 물질을 소유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법을 모색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는 빈 몸으로 왔지만 많은 것을 소유하며 삽니다. 그러나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욕심을 부립니다. 사람들은 소유하려는 것 때문에 노력하고 그것 때문에 싸우고 서로를 죽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물질을 많이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너무 없어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소유하는 주인이 아닙니다. 많이 벌어서 하나님 앞에 많이 드리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물 얻을 능력을 우리들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물질을 얼마나 유용하게 쓰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돈이 많으십니까?" 그 많은 물질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면으로 쓰시기 바랍니다.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닌 헛것이 되고 맙니다. 능력이 있으시다면 많이 버십시오 그러나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끝내는 불쌍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빈손으로 왔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고, 갈 때는 그 모든 것을 두고 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이렇게 잘 사용하고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여기 저기에 쌓아 놓고, 은행에 넣어 두고 땅에 투자하고, 그래서 저 세상에 다 그대로 있습니다." 보고 하면 하나님께서 잘했다고 하실까요? 아마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야단 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사회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힘을 다해 많이 버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지만 벌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넉넉하게 쓰시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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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 : 20-27)

    하루에 화를 얼마나 내십니까?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화를 내실 것 같습니까? 우리는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화를 많이 냅니다. 특별히 운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를 많이 냅니다. 자기가 남에게 잘못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남이 내게 잘못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남을 흉보고 남에게 손가락질하고 남에게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 화내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분노, 화내는 것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친구를 잃어버리고 좋은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목사님은 화내시는 것 하나만 고치시면 더없이 훌륭한 분인데 화를 잘 내는 성격 때문에 목회에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회자뿐 아니라 어떤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을 자주 내면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여러 번 진노를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는 '거룩한 분노'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4장 14절이나 34장 6절에 하나님이 분을 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그저 가만히 참아 주시며 끝까지 참아 주시는 분 같으나 때로는 분을 내시고 진노하셔서 인생들을 처벌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은 어떠하신지요?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예 기간을 두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입으로 한 말 한마디까지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분 내는 것 그 자체가 죄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9절에 보면 분 내기를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아마 분은 사람마다 내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에베소서 4장 26절에 말씀했습니다. "분을 내기는 해도 죄는 짓지 말라"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분을 내지 말아야 되는가 하면 마귀가 이런 때를 노려서 죄를 짓도록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가 분을 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싸움을 하고 분을 냈습니다. 분을 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풀지 않고 각기 다른 방을 씁니다. 베개를 들고 이방 저방으로 갑니다. 등을 돌리고 잡니다. 그러면 마귀가 틈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분을 내긴 내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풀라는 말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 왜 그럴까요?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이 저녁 시간이시면 오늘 하루 종일 화낸 일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토록 화낼 일이었고 그토록 분을 낼 일이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밤늦은 시간이 되었는데도 풀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면 푸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에게 화해를 구할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스스로 풀고 주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죄도 짓지 않는 것이 되고 건강상에도 좋습니다. 이른 아침이십니까? 이제 기도하세요. "오늘 한 날 동안 분 내지 않고 살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로 하여금 마귀가 틈탈 기회를 주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부부싸움도 다 사소한 분 냄 때문입니다. 친구 사이가 멀어지는 것도 사소한 분 냄 때문입니다.

    가끔 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빨리 풀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고했습니다. 매는 자가 아니라 푸는 자가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먼저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 사람이 내게 하겠지….'가 아닙니다.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도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전할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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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 : 16)

    사람이 동물들과 다른 것은 여러 가지 생김새나 사는 환경이 다른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에게는 책임이라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할 줄 아는 데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동물처럼 본능에만 의지해 살지는 않습니다. 동물들은 본능에 의해 살고 인간은 본능적인 면도 있지만 당위성에 의해서 삽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 이웃에 대해서 또 사회에 대해서 더 나아가서는 국가와 세계에 대해서도 어떤 책임을 지고 살아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인간에 대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혹시 로빈슨 크루소가 모험을 하고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다는 얘기나 어떤 생존,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것 자체는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삶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가족, 이웃과 여러 가지 주변 조건과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관계를 맺으며 상호 작용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모든 환경과 사람들과 단절된 상태에서 사는 것은 큰 징벌이고 무서운 형벌입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간다고 해도 밥은 먹을 수 있습니다. 목숨은 붙어 있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다운 삯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을 주셨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할 수 있고 추리할 수 있고 무언가 연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술이나 문화, 과학, 철학 등을 통해서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그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일에 대해서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특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이고 특권이므로 그 특권을 받은 우리는 권리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의무,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참된 신앙생활, 빛되고 소금된 생활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면 동시에 우리는 반드시 심판의 때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 즉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깁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떤 책임이 따를까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바로 우리는 빛되고 소금된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늘나라의 소망의 빛을 깨닫게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사명이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삶,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전도지를 들고 "예수 믿으시오"라고 전철 안에서나 명동 한복판에서 외치는 그것만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삶 전체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누릴 뿐 아니라 우리가 받은 그 축복만큼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축복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만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감당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축복도 받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무를 감당하는 자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반드시 생활 속에 복음의 증거자가되어 빛되고 소금된 삶을 나타낼 수 있기를 바라며, 마지막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과 특권을 가지고 마음껏 누리며 살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잘 감당하는 아름답고 귀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평화를 깬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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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 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 : 20)

    어느 날 갑자기 생각하지도 못했던 행운이 떨어지기를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저는 철들면서부터 이제까지 어떤 공상에 젖어 본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밑바탕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큰 횡재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 횡재를 통해서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존 스타인 백'이라는 사람이 「진주」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티누와 조안나라는 부부인데 늘 진주 잡이를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티누와 조안나는 늘 허탕만 치다가 하루는 깊은 바다 속에서 오색이 영롱한 조개를 주웠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얼마나 큰지 모를 정도로 아주 엄청나게 크고 좋은 양질의 진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놀란 티누와 조안나는 그 진주를 팔아서 부자가 되어 자식들도 잘 교육시키고 행복하게 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몸이 아파서 병원에 찾아갔더니 악덕 의사가 그 티누와 조안나의 진주를 빼앗을 생각으로 병이 빨리 낫도록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오래가도록 약을 썼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꾸 담 너머로 기웃거리면서 진주를 구경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밤중에는 강도가 침입하는가 하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친척들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성당의 신부까지도 큰 헌금을 기대하면서 티누의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티누의 주변에는 공포의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고 말았습니다. 티누와 그의 아내 조안나는 행운으로 발견한 진주 때문에 평안이 깨졌습니다. 불안에 떨었고 공포에 휩싸여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 티누 부부는 그 진주를 깊은 바다 속에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진주」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많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지만 그것으로 평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이라는 것을 돈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가져 본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졌을 때 평안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참다운 평안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떤 평안을 원하십니까? 복음성가에 보면

      "초가 삼간도 나는 만족하네.값진 재물도 내겐 없지만,
      언젠가 내가 하늘나라에 가면, 순 황금 길을 거닐겠네.
      날 가난하다 외롭다 말아요, 천국길가니 실망 없다네.
      이 세상 수고 모두 끝이 난 후에 저 천국 가서 면류관 쓰리,
      저 하늘 너머 주 계시는 본향 영원한 기쁨 넘치는 그곳.
      언젠가 내가 빛난 천국 길로 주님과 함께 거닐겠네. "

    영원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초가삼간에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가난하다고 손가락질하여도 실망치 않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원하지만 참 평안은 세상적인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모셔들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소망을 가짐으로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신 사람은 비록 세상의 낮은 곳에 처해 살고 남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했어도 영원한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높은 담을 쌓아야 되고 튼튼한 금고를 가져야 되지만 많이 갖지 못한 사람은 담이 없이도 금고 없이도 평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염려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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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 : 27)

    제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큰 아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자기는 목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제 자신이 어릴 때 목사 아들이라는 것이 기쁨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아이에게 이 다음에 목사가 되라는 소리를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늘 목사가 되겠다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치과의사가 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큰 아이는 어릴 적부터 치아가 좋지 않아서 우리 교회의 치과의사이신 권사님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아마 그 권사님이 꽤 멋있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치과의사이신 그 권사님이 우리 큰 아이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목사가 되겠다던 아이가 갑자기 치과의사로 돌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그러니? 왜 목사가 되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치과 의사가 되겠다고 하니?" 그러자 아이가 심각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할아버지도 목사님이고 아빠도 목사님인데, 할아버지도 아빠도 높은 강대상에 올라가서 말도 잘하고 얼굴 표정도 잘 짓지? 그런데 나는 거기 올라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걸 내가 어떻게 목사를 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면 이 다음에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고 달랬습니다. 그 뒤로 아이의 이야기가 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성도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우리 집 큰 아이같이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말로는 표현을 안했겠지만 마음속으로는 많이 했을 것입니다.

    염려는 많이 하셨죠? 많은 사람들의 염려가 우리집 큰 아이의 염려와 같습니다. 지금 당장하지 않아도 될 염려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진로까지도 바꾸는 사람을 우리는 곧잘 봅니다.

    성경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했습니다. 우리는 다만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전혀 노력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지도 아니하고, 미리부터 염려해 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혹시 지금 어떤 염려를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지금 어떤 걱정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호와께 모두 맡기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할까 그런 것을 마음속에 염려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사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 보시지 않겠습니까? 어제까지 안 됐다 구요? 오늘은 맡기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맡기고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를 그대로 방치해 두시지 않습니다. 잘 가졌던 꿈을 지금 당장 안 해도 되는 걱정 때문에 바꿔 버린 우리집 큰 아이가 이 다음에 무엇이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는 목사도 되고 대학교수도 되겠다는 말을 하는 변덕장이(?) 큰아들(성민),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작은아들(영민)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이들 위에 충만케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의 장래를 주님께서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훗날 아이들에게 이 말을 하면서 웃는 날이 있을 겁니다.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어." 웃음으로 들어야 할 이 이야기가 우리들 생활 속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께 다 맡기고 기도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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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 2: 1∼3)

    하박국 2장 1∼3절에 우리가 신앙적으로 바르게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에는 이 당시에 만여 개의 망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망대는 바깥의 동정을 살피고 감시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파수꾼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항상 깨어서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은 물론 주변의 영적인 상태도 바르게 살피고 바르게 듣고 바르게 전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고 우리를 죄된 곳으로 인도하려는 무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잘 살피고 잘 듣고 잘 전하여야 합니다. 이런 유혹 많고 죄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깨닫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도록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에는 교회와 관계없이 교회 밖의 밀실 모임에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상한 곳에 가서 찾으러 하고 이상한 곳에 가서 들으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는 성경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여러분을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려고 애쓰는 목자들의 음성 속에서 충분하게 영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하박국 2장 3절에 있는 말씀처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의 대부분은 여호와 앞에서 잠잠히 참고 기다릴 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간혹 응답이 늦는다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목회자를 향해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의 표준에 맞춰야 하는데 자기 자신의 표준에 맞춰 놓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 가장 적절할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파수꾼의 자세를 가지고 잘 살피고 잘 듣고 잘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잘 듣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비록 더딜지라도" 잠잠히 기다리고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는 영적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낙심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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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 : 28)

    사람은 살다보면 실망하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설교하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고 저 자신도 낙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종종 소리 없는 한숨을 쉬어야 하고 무엇인가에 눌려 있다고 하는 압박감에 젖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엔 끊임없이 우리들을 방해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 없는 곳에서 살면 좋겠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만들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때로 기진맥진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 69장 3절에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르짖음으로도 피곤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피곤하고 목이 마른 갈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공부하고 책을 쓰는 학자들도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12절에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끝이 없는 탐구입니다. 배울수록 모르는 것뿐이고 더 무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도무지 '언제까지 배워야 되는가' 하는 한숨만 나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욕먹고 핍박받는 일에도 피곤합니다. 시편 6장 6∼7절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탄식하고 곤핍하여 눈물로 침상을 적실 만한 일들이 이 세상에 살다가 보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도도 잘 되지 않으며, 탄식만 나오고 괴로움, 한숨, 눈물을 가지게 됩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 아내를 잃어버린 사람, 부모 형제를 잃어버린 사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게 길렀던 자녀를 잃어버린 사람, 그런 사람들의 눈물을 어떻게 인간이 씻을 수 있겠습니까?

    '잃어버렸다'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은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없다 할지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주 안에서 만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오라고 주님이 불러 주십니다. 그러면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해 주시는 분입니다. 결코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처한 모든 상황을 잘 아시는 주님이 항상 함에 계십니다.

    이사야 44장 3절에 "대저 내가 잘한 자에게 물을 주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필요한 은혜를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혼자 계십니까?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슬프십니까? 아니면 기쁜 마음이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불러 주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 세상에 있다면 같이 하여 주시며,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지 않고 행복한 순간을 보내신다면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영원히 누리도록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맡기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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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 37 : 5-6)

    우리집 큰아들 성민이는 여기저기서 용돈을 많이 받습니다. 외할아버지에게, 또 친할아버지에게, 외할머니에게, 친할머니에겐, 작은 아빠에게, 고모에게, 이모에게 용돈을 굉장히 많이 받습니다. 가끔 선물을 사 가지고 오지 못한 분들이 준 돈까지 합하면 꽤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을 언제든지 "아빠, 이거 아빠가 갖고 계셔요" 하며 저한테 맡겨 놓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찾아간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제가 수입을 잡은 거죠. 그러나 실제로 따져보면 제가 아이를 위해서 쓴 돈이 더 많습니다. 아이는 저에게 맡긴 돈의 액수를 대충 기억하여 자기 돈의 얼마가 아빠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자기가 쓴 돈을 자기가 맡긴 것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게 한번 맡긴 것은 영원히 그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는 한 푼도 안 쓴 것으로 여깁니다. 아마 앞으로 돈이 또 생겨도 제게 맡길 것입니다. 아이가 철이 들어 눈치가 생겨서 안 맡길 때가 되면 그 때부터 골치가 아파지겠죠

    저는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린다고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총이 더 많고 하나님께 얻어 쓰는 것이 더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 사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는 것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호와께 맡기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도, 마음도, 정성도, 물질도, 모든 계획하는 일도, 장래까지 여호와께 맡기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맡기면 아버지께서 꿀떡(?) 하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에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누가 해 주십니까? 맡기는 것은 내가 맡기는 데에 이루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희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맡기고 살아가야 할 텐데,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께 맡겼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다 맡기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 혼자 염려합니다. 우리집 아이가 제게 돈을 맡겨 놓고는 그 돈을 잃어버렸는지 어쩠는지 신경도 안 씁니다. 아버지에게 맡겼으니까 '언제든지 그 돈은 있겠지' 하고 지냅니다. 제 주머니에 아무 것도 없어도 아이는 '아빠의 주머니에 자기 돈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삽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면 얼마나 평안하고 든든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다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없는 채로 있는 척 하시는 운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주관자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괴로운 일도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저희를 권고하심이라"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까지도 맡기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0절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맡기오 하나님을 의지하면 범사가 다 해결됩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가 부둥켜 안고 벌벌 떨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은행에만 맡겨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1억이라는 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는 것하고 은행에 맡겨서 통장으로 가지고 있는 것하고 어떤 것이 든든합니까? 물론 은행에 맡긴 것이 더 든든하죠 하물며 하나님께 맡기면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삶 전체를 하나님에 맡기세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세요. 무거운 일들, 괴로운 일들까지도 하나님께 맡기세요. 심지어 원수 갚는 일, 때려 주고 싶은 일, 미워할 만한 사람까지 모두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하셨습니다. 용서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그냥 잊어버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부르짖는 것까지도 응답은 누가 해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과까지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범사를 맡기시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든든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자신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활기 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낙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맡기면 됩니다.
     

밀물 때가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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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 12∼13)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활기 있게 사는 사람은 언제나 당당하고 담대합니다. 말한 마디를 해도 떳떳하고 힘이 넘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항해서 말하기를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가지 환난에 대해서 낙심하지 말아라. 왜냐 하면 이것은 오히려 너희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사도 바울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담대함이 있으십니까?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도 이런 담대함과 당당함이 필요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으며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우리가 째 째하고 나약한 모습을 가지고 살면 안 될 것입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세상 근심과 걱정은 다 짊어진 것처럼 산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자신의 사무실 한쪽 벽에 낡은 그림 하나를 일생 동안 걸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어느 모래사장에 배 한 척이 놓여져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배에는 노가 걸쳐져 있고 쓸쓸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밀물 때가 오리라." 이 말에는 "지금은 모래 위에 있지만 밀물 때가 되어 물이 차면 그 때는 바다로 나가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카네기가 청년 시절에 세일즈맨으로 이 집 저 집으로 물건을 팔러 다닐 때 어느 노인의 집에서 그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쓰여져 있는 '밀물 때가 오리라'는 글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그 그림의 주인인 노인에게 그 그림을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했습니다. 노인은 그 청을 들어주었고, 카네기는 일평생 그 그림을 자기 사무실에 걸어 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밀물 때가 오리라." 지금 당장은 모래 위에 있고 희망이 없으며,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물이 들어오면 망망대해 저 넓은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을 수 있고 목적지를 향하여 갈 수 있다는 희망한 그림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배는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일하고 있는데 나만 모래 위에 앉아 있습니까? 나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드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이 밀 때가 있습니다. 담대함과 당당함을 가지십시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도하며 믿음으로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노력하십시오.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지금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담대함과 당당함을 가지고 밀물 때를 준비하십시오. 찢어진 그물을 꿰매고 배를 보수하고 기관을 정비하여 어느 때든지 물이 밀면 저 넓은 바다를 향해서 마음껏 노 저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안에서 담대함과 당당함을 가지고 밀물 때를 기다리며 현재 모래 위에 앉아 있음을 탄식하지 마십시오 지금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배가 아니라 밀물 때에 일하기 위해 준비하는 배가되십시오.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며 밀물 때를 기다리십시오. 이제 곧 물이 밀려 들어올 것입니다.
     

가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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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전 7 : 21)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 들어서 기분이 좋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좋은 말만 듣기 원하십니까? 물론 저도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좋습니다만, 불 순종한 인간은 반드시 대가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최초로 불 순종하게 된 원인은 욕심에 있었습니다. 야고보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했습니다.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꿈'과 다릅니다. 정당한 자신의 노력을 들이지 않고 얻으려고 하는 것, 시집이 해서는 안될 하나님의 범위를 침해하는 것, 그것이 욕심입니다.

    최초의 인간은 피조물이 조물주와 동등됨을 취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 이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고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외의 소리에는 관심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성경말씀을 읽는 중에, 찬송을 부르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예배가 진행되는 순서순서 속에 때를 따라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말씀하십니다. 그 때 예리하고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는 하나님의 명령이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발견될 때, 아니라고, 없었던 것이라고, 못들은 것이라고 외면해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 앞에서만 솔직할 수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인간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 앞에서는 죄악과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 되는데….'라는 양심의 소리가 들리고 찔림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칠 때, 하나님의 명령임을 확인해야 됩니다.

    현대 교인들은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에만 '아멘' 합니다. 저는 언젠가 이런 기도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논리적인 사람이 못됩니다. 논리적인 설교를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는 학술적인 설교를 할 만큼 넉넉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는 조직적인 설교를 할만큼 체계적인 사람이 못됩니다. 저의 산만함을 붙들어 주시옵시고 체계적인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는 감동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감각이 무딘 사람입니다. 하나님 둔한 저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만한 감동적인 설교를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말씀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

    제게는 정말 귀를 즐겁게 할 만한, 기가 막히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 줄 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하려고 하는 노력은 늘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보다는 듣기 싫어하는 설교를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적당히 타협하는 융통성을 갖지 않게 하옵소서. 고지식하다는 평가를 받고 너무 차갑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대로 전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

    여러분!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것, 그것은 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것이라고 하신 것, 그것은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 그것은 하지 미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학생이 숙제 많다고 투덜대는 것은 대학에 못 간 사람이 보기에는 행복한 고민입니다. 부모의 간섭이 많다고 투덜대는 것도 고아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행복한 고민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군대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은 몸이 약해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행복한 고민입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너무 많다고 투덜대는 사람은 지옥에 있는 사람이 보기엔 얼마나 행복한 고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며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사십시다. 사람에게서 듣기 좋은 이야기만을 들으려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아 견디는 사람이 완전한 승리자가 됩니다. 편안함과 세상의 죄된 길로의 유혹에 약한 우리에게는 그 길을 막는 찌르는 가시가 필요합니다. 말씀의 가시에 찔릴 때 감사하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된 삶, 참된 기쁨, 참된 길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참된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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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 : 24)

    만족한 삶을 사십니까? 만족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면 소망이 있어도 헛된 것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라는 사람은 "인간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으로 이어진다'고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인간의 우주에로 향한 도전은 공상에서부터 현실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계속해서 우주 왕복선을 쏘아 올리고 있습니다. 이미 달을 밟았고. 금성에도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 계속해서 우주개발계획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에 갔다고 해서 인간이 추구하는 꿈, 소망이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제각기 추구하는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고. 꿈이 없는 민족은 소망이 없는 민족이고, 꿈이 없는 교회는 죽어 가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고, 삼일밤에 예배 드리고, 철야 예배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꿈도 소망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하면 누가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신앙생활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만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거미'와 같은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 보호를 위한 거미줄을 쳐 놓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킵니다. 그러고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나 괴로움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자기의 웃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눈물 흘리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설령 얻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만족하고 평안한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개미'와 같은 소망을 가졌습니다. 목적 성취를 위해서 굉장히 노력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다른 사람을 울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거미와 같은 사람은 눈에 보이는 죄인이지만 개미와 같은 사람은 무관심의 죄를 짓고 사는 사람입니다. 거미나 개미와 같은 사람들도 그 삯 속에서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겠지만 그것은 참된 소망도 아니고 또 만족한 삶을 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가 하면 '꿀벌'과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배부른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까지 기쁘게 해 주는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소망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망입니다. 참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에게는 기쁨이 되고 이웃에게는 사랑을 베풀며 사는 사람입니다.

    만족한 생활은 보이는 것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많이 가졌느냐 적게 가졌느냐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소망을 가진 사람은 초가삼간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도 오히려 더 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합니다. 궁궐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 물론 평안할 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불안하면 높은 담을 쌓고 살겠습니까? 궁궐 같은 집에 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한 끼 밥을 놓고 평안히 기도할 수 있는 가정,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소망을 두는 가정,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사시겠습니까? 만족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이나 권력이나 그 밖의 보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많은 것을 소유해서 만족했다 할지라도 더 은 욕심 때문에 늘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 보지 못한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세상을 보면 예수 안 믿고 못된 짓만 하는 사람이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할 그 때에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랑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 생명의 나팔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참 만족을 누리며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참 만족은 보이는 곳에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왜 다투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사십니까?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하고 이해하며 덮어 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팔, 보이지 않는 곳에 소망을 둔 사람처럼 사십시다. 남 모르게 감춰 둔 보물이 있는 사람은 지금 부자처럼 먹지 못해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참으로 복된 땅,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귀한 그 곳을 꿈꾸며 늘 행복하고 평안하게 기쁨으로 사십시다.
     

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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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사 42 : 3)

    "사람은 한 줄기 갈대와 같다"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갈대와 같다. 사람은 한 줄기 갈대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이것은 파스칼이 쓴「팡세」라는 책 제 6장 철학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원문에 더 가깝게 표현한다면 "사람은 본디 매우 연약한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입니다. 갈대가 정말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까? 약한 갈대. 그래서 여자들을 흔히 갈대에 비유합니다. 그렇지만 이 갈대는 풀 중에 매우 질긴 그리고 아주 억센 풀이기도 합니다. "갈대는 습지나 냇가에서 숲을 이루며 자라는 식물이며 매우 억센 풀"이라고 사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대는 왜 연약할까요? 그 속이 비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자를 이 속이 비고 허약한 갈대에 비유했습니다. 여자의 마음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고 했고, 베르디의 가곡 '리골렛토'에 '여자의 마음'이란 아리아가 있는데 그 '여자의 마음'이란 아리아 속에서도 여자를 갈대와 같은 존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보면 여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은 게 아니라 남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저 자신입니다. 왜냐 하면 저 자신이 스스로를 종잡을 수 없는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생각하며 망설이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 갈대에 비유할 만한 인물이 우리 나라 정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세찬 바람에 이리 밀려다니고 저리 밀려다니고, 이 당에 들어갔다가 저 당에 들어갔다가,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금방 아니라고 뒤집고… 이런 우리 나라 정치하는 사람들에게서 가끔 갈대와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지조 있고 신념에 찬 정의로운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정치인들이 우리 나라엔 필요한 것 같은데 이런 사람들이 언제쯤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갈대는 허약합니다. 잘 흔들리고, 쉽게 꺾입니다. 또 불에 넣으면 금방 타 버립니다. 흔들리고, 꺾이고, 그리고 한 번 꺾인 것은 다시 세워지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상한 갈대, 그것을 성경에서는 우리 인생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고 우리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견고하지 못하고 지조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믿음이 생겨나는가 싶으면 꺼지는 것 같고…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라고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이라고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파스칼이 이야기한 것처럼 '생각하는 갈대'가 아닌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의 연약함을 가진 갈대'라면 괜찮습니다.

    우리 주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물론 흔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세상이 너무나 세차고 험해서 흔들린다 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잡은 그 줄만 놓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주님은 오히려 우리들의 손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잡으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주님이 우리들의 손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놓으려고 해도 내가 믿음 안에 있으면 주님이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스스로를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연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라도,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소망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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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 : 20)

    1980년 3월, 파리 브뤼셀 병원에 '폐수종'이란 병으로 '장 폴 사르트르'라는 사람이 입원을 했습니다. 사르트르는 한 달 동안 '폐수종'이라는 병으로 발악을 하다가 죽어 갔습니다. 자신의 병에 대해 묻지도 않고 자신의 병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도 하지 못한 채 소리소리 지르며 괴로워하다 죽어 갔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에게까지도 병명을 묻지 못한 채 공포 때문에 발악만 하다가 갔습니다. 사르트르의 최후의 삶은 엉망진창의 삶이 되었습니다. '사르트르'는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그의 글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있고 또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많은 수필을 썼습니다. 또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입원한지 한 달여 만인 80년 4월 16일 사망했습니다.

    사르트르는 왜 이렇게 죽어야 했을까요?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그렇게 외쳐댔던 그가, 참된 자유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던 그가, 왜 그렇게 죽음에 대해 자유하지 못한 채 죽어야만 했을까요? 많은 신문기자들과 그 밖의 매스컴에서 사르트르의 죽음에 대해서, 사르트르의 공포에 대해서, 사르트르의 발악에 대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독자가 신문에 투고를 했습니다. 그 투고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장 폴 사르트르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사르트르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 죽음의 길을 맞이하고 나면 그 후에 어느 곳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알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발악을 하다 죽어 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마리'라고 하는 제목을 가진 글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노벨상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인간은 가진 것의 총아가 아니라 가질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가능성의 총아"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대해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이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 말은 인간은 지금의 모습으로 그 사람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것을 가질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훌륭한 말을 남겼던 사르트르는 그 말을 남긴 이후의 삶이, 아니 죽음을 맞이함에 있어 형편없는 지경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죽음 이후의 삶에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신분이 세상에 속한,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영에 속한 하늘나라의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장래 소망이 없고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사르트르와 같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서에도 "만일 우리의 삶이 이생뿐이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표현대로라면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가장 한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가진 하늘나라 시민권자로서의 우리 삶은 분명 한심하지도 불쌍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겐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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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 : 16)

    여러분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믿는 것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말씀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셨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돌무덤에 묻히셨으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고, 그리고 다시 오실 것 등 예수님에 관한 모든 사건들, 그것을 믿는 믿음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제외된 어떤 것도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사실을 부인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계획과 섭리가 있으며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빛되고 소금되라는 명령 이외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하여야 할 책임과 그에 따른 보상 및 징벌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믿으면 구원이요, 아니면 멸망입니다. 그 이름 '예수', 그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청춘을 바친 사람이 얼마입니까? 우리에게 예수님은 절대적 지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예수 이름으로 범사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와이트 헤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 운전을 하며 가는데 그만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움푹 패인 곳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만 빠졌는 줄 알았더니 어떤 노인도 빠져서 차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것이었습니다. 와이트 헤드는 안간힘을 다해 기어 나와서 그 노인이 있는 곳에 가서 노인을 일으키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손을 잡으면서 "당신 예수를 아십니까?"하며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와이트 헤드는 기가 막혀 '아니 지금 자기가 사는 게 중요한데, 살려 주려고 손 내밀어 준 사람에게 예수를 아느냐고 물어보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와이트 헤드는 그 노인의 말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고 자꾸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아십니까",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그 한 마디가 계속 와이트 헤드의 뇌리 속에서 끊임없이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와이트 헤드는 가까운 교회에 찾아갔습니다. 그 교회는 성공회였습니다. 성공회의 젊은 신부는 신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유명한 수학자요, 철학자인 와이트 헤드가 자기 교회의 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신부는 그 날부터 더욱 설교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다음 주 주일 설교 제목은 '수학과 신학'으로 정하고 그 다음 주는 '철학과 신학' 그 다음에는 '수학과 철학에서 보는 진리' 그 다음에는 '철학에서 보는 진리', '수학에서 보는 진리' 이런 식으로 수학과 철학을 자꾸 연결시켜 설교 제목을 정하고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명한 수학자요, 철학자인 와이트 헤드를 생각하고 설교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와이트 헤드가 그 교회에 나간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그는 그 젊은 성공회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신부님, 수학이나 철학에 대해서는 제가 신부님보다 훨씬 더 잘 압니다. 제가 교회에 왜 오는지 아십니까? 수학이나 철학이야기를 들으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느 날 눈보라 속에서 어떤 노인에게서 들었던 "당신 예수를 아십니까?"라는 그 말, 그 말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가 누군지 알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싶어하는 예수 이야기를 좀 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설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와이트 헤드'의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도 철학을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아니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철학을 이야기하더라도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만 증거하면 됩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범사에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봅시다.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신앙의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항상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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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를 드리고(민 28 : 20)

    자신에게 유익되고 기뻐할 수 있는 행복한 일이라면 언제까지라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장사가 잘되는 길목에서 자리를 잡고 장사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매상이 많이 올라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동일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워합니다.

    요즘은 물건을 살 때 보증기간이 있고 품질 보증서가 있어서 마음 편안하게 물건을 살 수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보증기간 동안에는 무료로 수리를 해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악덕업자들 가운데는 보증기간도 어기고 수리도 제대로 해 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때 힘있는 누군가가 삶에 대한 보증을 해 주고 완벽하다고 서류까지 만들어 준다면 우리는 마음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어떤 낯선 장소에 갔을 때 함께 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편안하고 마음이 든든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은 사람들 모두 혼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속에 언제든지 누군가가 우리의 편이되어 주고. 또 우리의 편이되어 주되 끝까지 한편이 되어 주길 바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미국 생활에 가장 필요한 자동차 운전면허를 내야 될텐데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가 같이 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모두들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라 누구에게 부탁을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고마웠던지, 그때 그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부터 학교에 등록을 한다든지 무슨 물건을 사거나 혼자서 모든 일들을 할 때마다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 말 잘하던 사람이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곳에서 살게 되니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는지 그 때는 제가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도움이 되어 줄 때 참으로 큰 용기를 갖게 되고 그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얼마 지난 뒤에 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참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혼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이 있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은 혼자 사십니까? 여러 식구들과 함께 사십니까? 외로우십니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같이 동행하여 주십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도 혼자만 당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주님이 눈물 흘려 주십니다. 그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십시오 주님이 곁에 계십니다. 어른이 옆에 있는 것을 아는 어린아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큰 소리칠 수 있습니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주님께서 우리 편이되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천국 입국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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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 : 10)

    '만약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 요건으로 시험을 본다면 과연 무슨 과목으로 시험을 볼까?'라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런데 과연 천국 입국 시험이란 것이 있을까요? 바보 같은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생각들이 저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만듭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평가하는 어떤 목표에 있어서 그 기대 치를 높이기도 하고 실망하게도 만듭니다. 저도 수없이 많은 시험을 치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중 몇 번은 떨어져 보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시험이라는 관문에서 떨어져 본 사람은 대개 얼마나 자기가 무능한지 자신의 한계가 어디인지 또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마련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가운데 시험에 떨어져 본 경험이 있으신 분 계십니까? 떨어졌기 때문에 낙심하고 괴로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승승 장구 성공만이 내 인생에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세상이 살기 싫고 그래서 죽음까지도 생각하며 사는 세월도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 한 번도 실패나 좌절의 경험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면 아마도 그런 사람 가운데는 교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10년이 넘게 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러 갔습니다. 저의 집사람과 같이 시험을 보았는데 운전을 한 번도 안 해 본 저의 집사람은 실기시험에서 붙고 10년을 넘게 운전한 저는 실기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세상에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가득찼습니다. 아마도 시험관이 보기에 제가 너무 잘해서 사고 낼 것 같아 떨어뜨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 떨어졌던 경험으로 미국 생활 4년 동안 운전하면서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내다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떨어졌던 경험이 오히려 저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천국에 입국하는 데 필요한 자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태권도 5단쯤은 되야 된다든지, 돈이 5억쯤 있어야 된다든지 하는 겉으로 드러난 조건이 붙는다면 어떨까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정말 값진 것은 돈이나 어떤 물건으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공짜입니다. 광산에서 나오는 다이아몬드도 사실 공짜로 캐내는 것입니다. 광부들의 인건비나 그것이 세공되어 소비자인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과정 중에 드는 비용이 무척 비싼 것이지 사실은 공짜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산소도 공짜입니다. 숨을 쉰다고 돈을 내는 것 보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정말 귀하고 값진 것은 다 공짜입니다.

    여러분, 정말 귀한 사랑에 값을 지불하나요? 부부간의 사랑에 대가를 지불합니까? 부인이 애기를 낳았다고 수고비를 주는 분 있으십니까? 어머님께 나를 낳아 주셨다고 수고비를 드리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정말 귀한 것은 아무 대가도 원하지 않고 또 필요도 없는 공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것이 천국에 입학할 수 있는 시험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이 간단한 시험에서 낙오자가 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복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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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 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눅 5 : 5-6)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고기잡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와 함께 고기 잡던 사람들이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날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 그는 그 갈릴리 호수에 대해서 너무너무 잘 알고 있었고, 언제 고기를 잡아야 하는지, 언제 그물을 내려야 하는지, 어떻게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잘 잡히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수고를 하고도 고기를 못 잡는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낚시하러 떠난 사람이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았다고 하면 그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이겠습니까?

    저는 고향이 경기도 강화입니다. 제가 어릴 때 강화에 가면 망둥이 낚시질을 자주 했습니다. 가끔 할아버지하고 낚시를 가면 제가 더 많이 잡을 때도 있었습니다. 망둥이 낚시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을 하고 제 아내와 강화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제 망둥이 잡는 실력을 보여 주기 위해 낚싯대를 들고 어릴 때 낚시하던 곳으로 갔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분명히 망둥이가 잘 잡히는 장소였고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망둥이가 잡혀야 아내에게 망둥이 잡는 실력을 보여 줄 텐데 망둥이들이 외출을 나갔는지 아니면 저를 놀려 주려고 그랬는지 한 마리도 안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을 앉아 있었는데 망둥이는 안 잡히는 겁니다. 도무지 창피해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망둥이 낚시를 가서 한번도 망둥이를 못 잡아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날, 결혼하고 아내와 함께 고향에 가서 처음으로 낚시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하는데 안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참 그때 그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왜 망둥이가 안 잡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뒤로도 망둥이 낚시를 해 봤습니다만 허탕을 쳐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결혼하고 처음으로 고향에 간 제게 얼마나 큰 망신이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베드로의 그 심정, 밤이 맞도록 고기 한 마리도 못 잡은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는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고기가 잡혔습니다.

    예수를 한 번 만난 사람은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삶과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 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사람은 그후부터 예수 없는 땀흘림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면 평생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꿔서 남자가 좋은 아내를 만나면 평생 행복한 삶을 삽니다. 그뿐 아닙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좋은 친구를 만난 사람이 좋은 이웃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고기를 많이 잡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밤새도록 실패했다고 해서, 고기를 못 잡아서 그물을 거두어 두고 배를 떠나려고 하는 마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를 만난 베드로는 다시 고기를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오늘 이 말씀을 읽는 분 중에 실패하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를 진심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재기할 수 있습니다. 내 경험으로 밤새도록 노력했는데, 아니 지금까지 일생 동안 노력했는데도 안 됐습니까? 내 기술, 내 경험, 내 나이, 내 돈, 내 지식,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내어 던지고 말씀에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전문 고기잡이였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부가 목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수의 조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될 것은 어부였던 베드로가 목수인 예수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실패한 베드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타 포기하고 다만 주님의 말씀만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어디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까? 위험하고 가기 힘들고 고기가 별로 없을 것 같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진실된 자세로 겸손한 자세로 "주여, 내가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라는 자세로 주님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르게 만나고 주님께 바르게 순종하면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구주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갚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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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계 22 : 12)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구절의 앞 부분은 잘 믿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말씀"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은 자꾸 부정하려고 합니다.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나는 죽음을 빼놓고는 무슨 일에나 시간과 생각을 바쳤다. 그러나 죽음은 내가 가장 심사숙고해야 했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현대교회의 설교자들이 인생의 행복은 설교하지만 인생의 종말은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말씀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계시의 종결 부분에 해당되는 말씀인데 여기 보면 아주 무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속히 올 것인데 그 때는 내가 사람들의 일한 대로 갚아 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일한 대로 갚아 주신다면 얼마만큼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갈라놓는 것을 말합니다. 목자가 저녁 때가 되면 짐승들을 모아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나눠 놓을 때가 되면 언제든지 핑계가 있는데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내가 언제 그렇게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까?" 하며 항변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 칭찬받은 사람은 "내가 언제 주를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하며 놀라면서 이야기를 한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지극히 작은 일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부자의 헌금보다는 과부의 동전 두 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큰 일보다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일꾼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커다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보다는 보이지 않는 세균에 감염되어 죽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소홀히 하기 때문에 큰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15절에 보면 "말세에는 공력을 세우고 그 공력 세운 대로 나타나면서 그 공력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했습니다. 에이벨이라는 사람은 '아 그렇게 했더라면. 아!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후회하기 전에 작은 일부터 해야 합니다. 핍박받고 사는 그리스도인, 천대받는 그리스도인,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 미련하게 보이는 사람, 약하게 보이는 사람, 천하게 보이는 사람, 사실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노라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무시하며 예수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일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는데 정말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일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다섯, 어떤 사람은 둘,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둘과 다섯을 받은 사람은 갑절로 남겼고 하나를 받을 사람은 땅에 묻었다가 주인이 왔을 때 그대로 돌려드렸더니 주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주어진 달란트, 주어진 조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지 않고 그것을 방치해 두는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자라는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낮아진 것 같고 예수님 때문에 눈물 흘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 때문에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일하는 대로 갚아 주시는 주님께, 과부의 두 렙돈을 귀하게 보신 주님께,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보신 주님께 하루하루를 부끄러움 없이, 하늘을 우러러 땅을 향해 부끄럼 없이 살아 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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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다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 : 31)

    오늘 어떤 음식을 드셨습니까? 어떤 것을 마실 계획이십니까? 또 무슨 일을 하실 계획이십니까? 아마 계획이 많으시겠지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 또 내가 한 일이 정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는 일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시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또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연애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교회에서 연애하는 것을 나쁘게 여겨 옛날에는 교회를 '연애당'이라고 했습니다. 또 일부는 연애를 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어떻습니까? 그것이 죄입니까? 아닙니다. 생각이 문제입니다.

    한때 영화나 TV보는 것을 죄로 여긴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TV를 '마귀상자'라고 하면서 보지 말라고 광고까지 하신 목사님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분들도 TV를 다 갖고 계십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술이나 담배, 키스 자체가 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죄를 범하는 기회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권력을 가지면 나쁜가요? 아닙니다. 가능하면 출세해서 국회의원도 되시고, 시의원도 되시고, 대통령도 되시고, 될 수 있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그 권력 때문에 싸움을 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남을 괴롭히고,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의 유익만을 찾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아닙니까?

    고구려가 망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재상 연개소문이 아주 훌륭하게 일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아들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에 고구려가 망했습니다. 백제는 또 어떻습니까? 의자왕이 주색에 눈이 어두워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백제의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지만 사실 그것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저는 제발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갔는데 낙화암이라는 곳을 갔었습니다. 삼천 궁녀가 물에 빠져 죽었던 곳, 물론 거기에는 역사적인 여러 가지 사연이 있겠지만, 한 왕이 3천의 궁녀를 거느렸다면 정치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조선은 어떻습니까? 권력 때문에 당파 싸움을 해서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토인비는 "한 나라의 멸망의 원인은 외세 침략보다는 내부의 부패가 더 큰 원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권력은 권력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을 이용해서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무엇을 하셨습니까? 무엇을 드셨습니까? 무엇을 마셨는지요? 무엇을 먹고 마시며 또 무엇을 하실 계획이십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이 없는 것인가요?

    어떤 분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술 먹는 게 뭐 그리 나쁩니까? 먹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그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성경에 술 먹어라 말아라 하는 이야기가 있느냐 없느냐, 좋으냐 나쁘냐를 말하기 전에 그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어서 자식들에게도 적극 권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제 질문에 그분은 대답했습니다. "아, 그건 그렇게 할 수 없죠" 왜 그럴까요?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술 먹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 일이 있었는가 찾아보십시오. 유익을 준 것이 없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부 싸움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면 계속하십시오. 그러나 아니라면 해 저물기 전에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좋지 않고 자녀들에게도 악영향을 주며 사탄이 틈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도 부끄럼 없는 생활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범사에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사람들은 나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칭찬할까?" 한번쯤 생각하면서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한 날의 삶, 또 지금이 새벽시간이든지 밤늦은 시간이든지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화장실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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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 : 15)

    제 사촌 동생 중에 둘이 목회를 하는 목사입니다. 그 중 한 명은 강원도 철원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고신원 목사로 구수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 밑의 동생 고신복 목사는 평택 쪽 농촌의 덕우 중앙교회라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합니다.

    제가 고신복 목사의 집을 방문했을 때 동생으로부터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전해 들었습니다. 그 교회의 주변에는 오래 전부터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산답니다. 그런데 교인들에게 고용봉 목사님이 지으신 「교회생활의 표준」이라는 작은 책을 나누어 주었답니다.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을 모시고 사는 한 부인이 그 책을 집에 가져갔더니 그 남편이 못된 책을 가져왔다고 집어 던지고 야단을 쳣다고 합니다. 그 남편은 그 책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웠던지 화장실에 갖다 놓았답니다. 시골에서 매번 화장지를 사다가 쓸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우리 나라 경제가 좋아져서 요즈음 보들보들한 고급 화장지를 쓰지만 15년, 20년 전에 어디 고급 화장지를 썼습니까? 시골에서는 부드러운 풀을 사용했고 조금 낫다고 해야 신문지를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교회에 나오지 않는 그 남편은 그 책을 그냥 버리기보다는 화장실에서 휴지로나 쓰자는 마음으로 화장실에 갖다 놓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화장실에 앉아서 심심하니까 그 책을 읽었던 모양입니다. 읽어 보니 거기 '십일조를 해야 한다', '첫 열매를 드려야 한다'는 등의 글이 있으니까 코방귀를 뀌면서 책을 읽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화장실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이 그 책을 찢어서 휴지로 쓰지 아니하고 화장실에 갔다 나올 때마다 그것을 화장실 꼭대기의 어느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 다음에 들어갈 때 보고, 또 위에 처박아 두었다가 또 보고, 이렇게 해서 거기서 감동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교회에 나오지는 않지만 농사를 지어서 첫 열매를 그 아내에게 주면서 "야, 이거 니네 하나님 갖다 드려라. 처음 익은 것은 하나님 것이란다. 갖다 드려" 하면서 주더라는 겁니다. 그 마음속에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첫 열매는 자기가 먹을 수 없다고 결론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후에 교회에 찾아 오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첫 열매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직 쑥스러워 나오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기 수입 중의 첫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며 자기 부인의 손에 들려 준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꼭 길거리에 다니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가 될 때마다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책으로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자기의 행실로 하는 것이든지 또는 말로 하든지 전도를 하면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제 명함에 작은 글을 써 가지고 다닙니다. "이것을 드린 저는 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잊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잊으신다면 당신은 영원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과 명함을 교환할 때 이 글이 쓰여 있는 부분을 먼저 보여 주면서 명함을 교환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명함을 교환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이 문구가 그 사람에게 보이도록 전해 줍니다.

    전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화장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 내일 만날 사람,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책자, 작은 전도지 하나,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한 번 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한 번 순종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전도하면, 전도 한 사람 자신에게 오히려 큰 기쁨과 축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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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 : 14)

    하나님의 말씀은 아름다운 말(beautiful word)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른 말(right word)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한 말(good word)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를 변화시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본 훼퍼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름다운 말이나 바른 말이나 선한 말이 아니라 생명있는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이 말에 관심을 갖고, 이 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에 처음으로 취임한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첫 예배 때 아주 멋진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먼저 계시던 목사님보다 설교를 잘하시는 목사님을 모시게 된 교인들은 모두 말했습니다. "야, 새로 오신 목사님 너무 설교를 잘 하신다. 정말 멋있다. 우리는 매주일 엄청난 설교를 듣게 될 것이다"고 요란을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정말 잘 모셔왔다. 이번에는 정말 멋진 목사님을 모시게 됐다"고 말입니다.

    교인들은 주일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목사님이 강단 위에서 예배를 인도하십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성경말씀을 봉독한 후에 교인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과 지난 주의 성경 본문이 똑 같았습니다. 그래도,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면서 지난 주일 설교가 그대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마치 레코드 판을 틀어 놓은 것처럼 그대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교인들은 점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이 지난 주일에 저 설교를 분명히 하셨는데 왜 그러시지? 혹시 지난 주일에 설교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나? 아, 아무래도 바쁘고, 이 교회에 처음 왔으니까 어리둥절해서 지난 주에 설교한 설교 원고를 또 가지고 나왔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일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세번째 주일이 됐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또 똑같은 성경 본문에 똑같은 설교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또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답답한 어떤 교인이 찾아와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왜 이러 십니까? 도대체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실 계획입니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은 "당신이 이 말씀을 정말로 당신의 삶 속에 적용하고 말씀 그대로 사는 것을 볼 때에 내가 새로운 설교를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셨답니다. 그 후에 그 목사님이 그 교회에 계속 계셨는지 아니면 그 교회를 떠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목사인 제 생각으로는 그분이 정말 목사라고 느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요즘엔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가 이곳 저곳 많이 퍼져 있습니다. 교회마다 예배를 마치면 목사님의 설교를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전국으로 퍼뜨립니다. 제가 집집마다 가보면 목사님 설교 카세트 테이프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 적게는 대여섯 개에서 많은 집은 수십 개까지 있습니다.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은 좋습니다. 자기가 정들었던 목사님의 설교를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지난 주일에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셨는지요?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다는 기억 안나도 좋습니다만, 무엇을, 어떻게 살라는 말씀이었습니까? 말씀 그대로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아름다운 말, 바른 말, 선한 말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고,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에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자가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 밭에 심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셨습니까? 그대로 사시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 하셨습니까7 그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천만 마디의 말을 들으면 무엇합니까? 천만 번 고개를 끄덕이면 무엇합니까?
     

말씀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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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 : 103)

    가끔 목사님들을 통해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듣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무슨 예배 시간에 설교하신다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다면 사람들이 덜 모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 초대 받아가서 설교하게 될 때 그 교회 목사님이나 예배를 인도하는 사회자가 광고 시간에 "오늘 고신일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신다고 하니까 교회가 꽉 찼습니다. 참 많이 모였습니다'라고 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기분 좋아하는 사람이나 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모여들어야 하는데 오늘날은 말씀을 전달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모여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책임은 큽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그만큼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전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변질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850년 1월 6일이라는 정확한 날짜까지도 기억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작은 도시에 눈이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 전체가 마비되다시피 했습니다. 거기 한 소년이 자기가 늘 다니던 교회에 눈 때문에 갈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깝게 있는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하필 그 교회 목사님은 다른 교회에서 설교하시기 위해 출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평신도가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평신도는 그 때 이사야 45장 22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본문의 내용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서툴게(목사님도 아니니까 얼마나 서툴겠습니까?) 설교를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본문만 자꾸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신도가 설교하다 말고 이 소년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보게. 자네는 참으로 피곤해 보이는군. 예수를 바라보게. 예수를 바라보게." 예수를 바라보는 것을 위해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을 위해서는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을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주를 바라보는 데는 누구의 권세를 빌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의지로 예수만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소년을 향해 계속해서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날 그 소년의 마음속이 편안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회심했습니다. 변화됐습니다. 그 날 이후 그는 일평생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목사가 됐습니다. 다름 아닌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의 회심의 경험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떠듬거리고 재주도 없고 공부도 시원찮게 한 것 같은 사람이 설교를 하면 골치가 아프십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속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속회를 인도하거나 구역을 인도하는 책임을 맡던 사람들, 혹은 비슷한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별 볼일 없어 보이고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않았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이 떠듬거리며 성경 이야기하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부족한 제가 비록 천사처럼 말하지 못하고 바울처럼은 못하지만 이렇게 전하는 말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말씀으로 인해 스펄전 목사님이 변화됐던 것처럼 말씀으로 변화되시고,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고백했던 시편 기자의 고백이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는 좋습니다. 기도 많이 하시고 능력 있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떠듬거리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전하는 말씀 속에서도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말씀을 듣는 중에, 말씀을 전하는 중에, 읽는 중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하는 고백이 나을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역사해 주십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변하였던 것은 능력 있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음으로서 가 아니었습니다. 떠듬거리는 평신도의 설교를 통하여서 변화되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 구역 또는 속회 인도자, 혹은 작은 모임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 혹은 그런 곳에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오묘한 진리와 그 오묘한 진리의 말씀의 단 맛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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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지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 : 16)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대부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3 장 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은 전적인 신뢰가 필요한,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라는 축복의 대명사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 여러 곳을 보아도, 우리 현실을 보아도 또 과거에 살았던 위인들을 보안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사람들이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평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34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으신 것이므로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고했습니다. 또 말씀에 "사사로이 성경말씀을 풀지 말라"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오류를 감추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는 것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심으로 독생자를 우리들에게 보내 주셔서 누구든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황인이나 미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고 하늘나라가 없는 멸망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모든 피조물보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존재이며, 내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귀히 여기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라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게는 맡겨진 사명이 있고 나는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확신과 자기 사랑이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근거가 됩니다. 믿음이 우리 삶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27장 1∼26절에 보면 유라굴로 광풍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하든지 풍랑을 잠잠케 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백부장도, 선원도, 풍랑을 잠잠케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풍랑을 잔잔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권세 있는 사란, 기술자, 힘을 가진 사람, 물질을 가진 사람도 풍랑을 잔잔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사람 바울 앞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요즘 불경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역사나 하나님의 역사는 불경기를 호경기로 바꾸는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그 때부터 불경기에 시달리게 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히 주님께 간구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케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 염려를 다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지 않으시렵니까?

노력해야 행복한 가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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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 : 9)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이루어진다는 얘기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원천을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믿어 주는 가정입니다. 믿어 주는 가정,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믿는 것도 믿음이지만 가족끼리 믿어 주고 이해하는 것도 깊은 의미는 다르지만 믿음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고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한다면 비극이 발생하게 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믿지 못하고 부모들이 자녀를 믿지 못한다면 불안과 불만의 요소가 쌓이게 됩니다. 청소년들을 상담해 보면 대부분 부모님들이 자기들을 믿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서로서로 믿어 주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자가 신뢰가 갈 만한 행동을 해야 됩니다. 의심받을 짓만 열심히 하고 다니면서 믿어 달라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쨌든 서로서로 믿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믿는 가정이 될 때에 만사가 형통하는 가정으로서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좀 늦었어도 아내가 편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고, 어머니가 시장에 가셔서 좀 늦게 돌아오셔도 자녀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믿으며 기다릴 수 있어야 됩니다. 자녀들은 또 부모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무엇을 하든지 화목을 으뜸으로 삼고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 우리 가정의 화목이 깨지지는 않을까?' '내가 늦게 들어감으로 우리 가정의 화목이 깨지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가정의 화목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 서로 다툴까요? 다툴 만한 말을 시작했거나 누가 그 화목을 깨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곤에 지쳐서 돌아오는 남편에게 위로의 말은커녕 바가지만 긁는다면 그것도 화목을 깨는 일입니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하든지 화목을 전제로 해서 할 때에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감사를 마음으로만 품지 말고 표현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참 고맙다'라고 느꼈으면 마음속으로만 품지 말고 표현을 합시다. "여보, 참 고맙소." "여보, 오늘 저녁은 반찬이 참 맛있네." …이런 말이 모두 감사의 표현입니다.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부름을 하나 시켰어도 "그래, 수고했다. 참 착하지." 이런 감사의 말을 표현해야 합니다. 늙으신 부모님들께도 감사의 표현을 해야 됩니다. 서로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가정은 대개 행복하지 못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시간에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나 부모님께 감사의 말씀, 고마운 말씀, 칭찬의 말씀을 한번쯤 드려 보는 것이. 시어머니께도 "어머니, 참으로 좋은 아들을 낱아 주셔서 제가 좋은 남편을 모시고 살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모두가 어머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씀드려 보십시오. 이런 말을 들은 시어머니는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이런 가정엔 고부간의 갈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한번 실천해 보십시오 잘못해도 잘한다고 하면 다음부터 잘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는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했습니다. 반대로는 다투는 남자와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가길 원하신다면 가족 모두가 서로 노력해 보십시오. 서로 믿어 주고 사랑하며 화평한 가정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화목을 깨는 일이라면 말하지 마십시오 행동하지 마십시오 감사의 표현을 하며 서로 칭찬해 주십시오. 그러면 행복하지 말라고 누가 부채질하고 깨뜨려도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용기를 내야 행복한 가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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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지 자기 친족을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예수 믿는 사람 중에 교회에서는 싹싹하고 인정이 많고 충성된 일꾼이면서 가정에서는 쌀쌀 맞고 냉정한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겐 인정도 많고 친절하고 그리고 웃음 짓는 사람들이 가정에 돌아가서 식구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얼굴을 하고 무게만 잡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밖에서 아무리 훌륭한 사회인이고 생활에 충분한 돈을 벌어 온다고 해도,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면 0점짜리 남편, 0점짜리 아빠입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일등을 해도 가정에서 좋은 자녀가 되지 못하면 그는 꼴등 자녀입니다.

    요즈음 한 지붕 밑에 살아도 부모와 자식들이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이 드문 세상이 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들과 따뜻한 대화 한번 제대로 못하고 지나가는 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노력해야 되고 용기를 내야만 합니다.

    쉬는 날이면 온 가족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하고 평상시에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집은 있지만 가정은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집은 있는데 가정이 없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잘 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려고 하는 자녀를 붙들고 "난 너를 사랑한단다. 얘야","난 너를 좋아한단다"라고 한 마디 해 보세요. 물론 자녀들이 머쓱해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학교에 가는 발걸음은 가벼울 것입니다.

    시어머니에게도 식사를 다 마치시고 나면 "어머니 감사합니다. 잘 만들 줄도 모르는 음식인데 이렇게 맛있게 다 잡수셨네요. 고맙습니다." 하며 인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용기를 한번 내 보시기 바랍니다. "여보, 오늘 반찬이 유난히도 맛있군." 그 한 마디에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한 번 이야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보, 정말 오늘 새롭게 느끼네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편입니다. 당신이 참 멋있어요"라고 말입니다. 그 한 마디가 화목한 가정을 만들 것입니다.

    사랑과 행복은 용기를 내고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아무리 예수 잘 믿고 교회 잘 다녀도 가족들에게 소홀하고 부모님에게 소홀한 사람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생전 해 보지 않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한 번 용기를 내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가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우리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가정이 되게 주님 도와 주옵소서. 행복한 가정을 만드시고 축복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우리의 가정을 지켜 주실 줄 믿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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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엡 5:29)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행복한 가정을 이루셨습니까? 아니면 나이 드셔서 자녀들에게 공양 받으시면서 하나님께 갈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이가 들었는데도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 살고 계십니까? 어떤 조건에서 사시든지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우리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떼어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가족을 귀히 여기고 그리워하며, 또 가족관계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행복한 가정인가 불행한 가정인가 하는 두 가지 길에서 어느 길을 가는가 하는 것은 자기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지는 조건 가운데 하나는 원만한 부부관계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이 세상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보다는 묵묵부답 그저 의미 없이 살며 누가 물으면 "어쩌다가 만나서 사니까 사는 거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부부는 악착같이 행복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천년 만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다른 인생을 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다시는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했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했습니다. 남편을 경이함으로 섬기면서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대개 남자들이 가정에서 존경받고 인정받지 못하면 나가서도 존경받지 못합니다. 아내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남편은 자식들에게도 존경받지 못합니다. 집에서 아빠의 권위가 무시된 가정은 그 자녀들이 결코 올바른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남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사랑하시어 자신을 주심같이 희생적인 사랑의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사랑한다면 무엇을 못 해 주겠습니까? 손님들을 초대해 음식을 잔뜩 차려서 먹고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후 아내는 부엌에서 그 많은 설거지를 하며 계속 치우고 있는데 남편은 가만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론 한국적인 남편의 권위를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접시 하나를 닦아 주고 쓰레기를 정리해 주는 작은 행동이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의 작은 표현입니다. 엄청난 다이아반지를 해 주고 귀금속을 갖다가 얹어 주어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에 관심을 가져 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부모와 올바른 관계, 자녀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부모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요즘에는 시어머니, 시아버지께서 안 계신 집으로 시집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라기는 그런 분들은 시집 가서 아이를 낳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 하면 그 아이들이 이 다음에 절대로 부모를 모시고 살지 않으려고 할 텐데 뭐하려고 낳겠습니까? 만일 장남에게 시집가지 않으려거든 이 다음에 시집 가서 장남은 절대로 낳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남부터 낳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지고 험해져도 부모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장래는 결코 명쾌하지 않습니다. 핵가족 제도로 유명한, 또 그것의 시초가 됐던 미국도 이제는 부모를 모시기 위해서 부부가 일하는 것을 줄여서 한 사람만 일하거나 아니면 일을 해도 서로 부모를 올바로 모시기 위해서 시간을 조절하는 풍토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나라나 제대로 된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그 부모를 귀히 여기며 공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우선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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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아내를 사랑하십니까?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가족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워하는 감정이 저주하는 마음으로까지 확산되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처리해야 될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것에도 반드시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우선순위가 무시될 때 사랑하는 남편과 아래 사이에 틈이 생기고. 낳아주신 부모님과 사랑스런 자식들과 처가 혹은 시댁 식구들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에게 사랑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안 사랑'이라고 대답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안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사랑의 반대되는 것은 '무관심'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정에서의 우선순위는 촌수별로, 촌수 순으로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촌수가 없는 부부간의 사랑입니다. 이상하게도 가장 가까워야 할 자기 아내나 남편과는 의논하지 않고 아내 몰래 남편 몰래 다른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며 의논하고 부부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둘째로 부부간에 화목한 후에는 1촌 지간인 부모자식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간혹 폭군 같은 남자들이 자기의 아래에게는 큰소리 치면서 함부로 대하고 자식이나 부모님에게는 지나칠 만큼 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촌수 없는, 무촌지간인 부부간의 사랑이 좋아야 자식이나 부모님이나 그 밖의 형제에게 정말 잘하게 되는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연결되어질 때 그것이 사랑의 우선순위요 사랑의 질서라고 생각됩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의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의 가정을 한번 돌아볼 수 있기 바랍니다.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그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이 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가장 가까운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는 사랑을 진실함으로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를 기억하며 ‥‥
     

모이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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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초대교회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모든 일에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모인다'는 말은 한마음으로 한 장소에 모인다는 뜻입니다. 그 한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인 마음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했습니다. 부흥되고 성장하는 교회는 성도들이 모이기에 열심을 내고 적극적인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이지 않고 모이는 횟수를 줄여가는 교회는 결코 부흥되지 않으며 오히려 퇴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교회들도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를 보면 모이기에 열중하고 일주일 내내 교회가 바쁘게 돌아갑니다.

    요즘 우리 나라 교회에서도 모임이나 집회의 숫자를 줄여가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속회나 구역예배가 방학을 합니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자연환경이 좋아지면 모이는 데 게을리 합니다. 요즘 이상한 현상이 교회에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고 또 날씨가 좋지 않으면 교회에 사람이 덜 모이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많이 모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비가 오고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날은 교회가 사람들로 꽉 찹니다. 그러나 날씨가 좋으면 교인들이 많이 빠져나갑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여행이나 야외에 소풍을 가거나 낚시, 등산을 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비가 오게 되면 투덜투덜 하면서 교회에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곳이 야외로 놀러 갈수 없게 되었을 때 마지 못해 가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환자가 건강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직장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돈을 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첫번째 단계는 힘써 모이고 열심히 참석하는 것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야외로 나가고 날씨가 궂으면 교회로 나오는 믿음이 바른 믿음일까요? 들로 산으로 나가기 좋은 쉬운 계절이라고 놀러 가는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일 성수를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힘들고 어려워도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참으로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그 당시로부터 얼마되지 않은 초대교회가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였다면,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의 우리는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자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박해받던 교회입니다. 당시는 예수님을 믿으면 잡아 죽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잡아 죽이지도 않고, 예수를 믿는다고 잡아 가두고 멸시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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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벧후 1:20)

    한동안 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되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나라안이 떠들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종말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과 666이라는 사탄의 권세에 대한 징조가 어떻다는 이야기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성경말씀 가운데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덮어둘 줄 아는 겸손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짜를 지정해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날짜를 가지고 논쟁을 벌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숫자가 나옵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그 숫자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실제의 숫자가 아닌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도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징조는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징조나 연도가 계산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전천년설'이니 '후천년설'이니 '무천년설'이니 하고 학자들이 구분 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각각의 설명들 나름대로 논리가 타당하고 성서적인 근거가 있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 신학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어떤 때는 후천년설을 가르치는 교수 밑에서 공부했고, 어떤 때는 전천년설을 가르치는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천년설을 가르치는 교수 밑에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는 그저 오묘한 진리대로 받아들이고 모르는 부분에 관해서는 덮어둘 줄 아는 겸손히 요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과연 문자대로, 글자대로 해석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이 부분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고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을 전부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손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이야기인지?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데 하나님께 입과 폐가 있다는 말인지? 요한복음 4장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했고, 요한 일서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다 문자대로만 해석할 수 있는지? 또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나오는 14만 4천이라는 숫자도 문자대로 해석해야만 하는가 말입니다.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으로, 구름을 타고 다니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만 해석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들에게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여러 가지 우리들이 해석할 수 없을 만한 신비로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 34장 16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빠진 것이 없고 다 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이는 하나님이 모아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 중 모르는 부분은 겸손하게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은 사사로이 해석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날짜 때문에 큰소리치고, 날짜 때문에 염려하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언제든지 깨끗이 청소해 놓고 사는 가정 주부는 손님이 어느 때 온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집안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믿음과 신앙생활이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이 없다면 언제 주님이 오신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시험 날짜가 언제인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늘 공부하고 준비하는 학생에게는 시험날짜가 언제인지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이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잘못한 것이 있으면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고 바르게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녀로서, 자기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 특히 가족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맡겨진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는 매일매일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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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구정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큰 명절입니다. 구정은 특별한 의미를 가져서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 충족이 가능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구정이 되면 고향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저는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했습니다. 하점면에 있는 망월리라는 갯벌을 막아서 만든 동네입니다. 동네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바다가 있어 망둥이 낚시를 하기가 좋고, 농사가 잘되어 쌀밥이 맛있는 동네에서 출생을 했습니다. 제가 고향에 가 본 지도 퍽 오래 됐습니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서 가끔 한 번씩 들르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향' 하면 웬지 마음이 푸근해지고 가 보고 싶고, 누군가가 기다릴 것 같아서 좋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곳은 어디신지요? 집이신지요? 혹시 고향을 찾아가셨나요? 아니면 고향이 찾아갈 수 없는 곳인가요? 어떤 분은 고향에 갈 수 있어서 좋지만 어떤 분은 고향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설날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구정이 되면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입니다. 보고 싶었던 사람, 그리워했던 얼굴을 확인해 볼 수 있어서 좋아합니다. 서로 지난날을 이야기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만나서 다투고 섭섭하게 헤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만나는 것은 사람들에게 주는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 옷을 입는 날이라 설날을 좋아합니다. 요즘에는 원하기만 하면 아침 저녁으로 씻으며 살 수 있지만 예전에는 명절 때나 되야 한 번씩 목욕할 수 있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설날은 몸도 마음도 새롭게 하는 날이었고, 또 새 옷을 입는 날이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설날이 기다려졌던 것은 새 옷을 입을 수 있어서 였습니다.

    설날이 좋은 다른 이유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음식이 많습니다. 평상시에는 상상도 못 하던 음식들을 먹습니다. 물론 요즘은 경제적으로 좋아져서 맛있는 음식이 생각나면 사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아직 이 땅에는 명절이나 돼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명절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됩니다.

    명절이 고향에 갈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겐 언제나 영원한 고향, 영원한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을 기대하고 살아야 합니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분 많으시죠? 복음을 증거하다 간 믿음의 선조들, 사랑하는 아내 또는 남편,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등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님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명절에 새 옷을 입듯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 세상 죄된 것들은 다 벗어 버리고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보낼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주님 나라에 가면 이 세상에서 배고프고 춥고 병들고 아팠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좋은 명절, 좋은 때 영원한 복된 곳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그 곳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믿음을 잃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힘쓰며 사십시오, 넉넉함과 풍성함을 가진 사람은 작은 일에 조바심 내지 않습니다. 잔칫집에 가는 사람은 길에서 강아지가 씹는 뼈를 보고 침을 흘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믿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복된 나라를 소개하십시오.

영광, 평화(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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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 14)

    해마다 성탄절 전후에는 참으로 복잡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즐겁고 좋은 일이 있어야 할 성탄절 전후에 좋은 일들보다는 나쁜 일, 나쁜 생각들을 많이 갖게 됩니다. 또 불미스러운 사건들도 많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성탄절을 전후해서 타락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성탄이라는 말은 한 아기의 태어남, 곧 그리스도의 나심을 축하하는 거룩한 날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이'는 '아들'이라는 단어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이와 아들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아이로는 태어났고 신의 아이로는 보내진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신의 아들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를 나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전세대를 주전(Before Christ)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이후의 세대를 주후(Anno Domini, 이것은 영문 표현으로는 In the Year of Our Lord)라고 합니다. 이 세상 역사를 나누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땅이 예수 이후의 세대가 되었지만 예수 이전의 세대의 모습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세대,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세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 오시기 이전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탄절을 단순히 축제와 휴일로 알고 맞으며 또 보냅니다.

    여러분은 성탄절을 어떻게 맞으셨으며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또 성탄절을 어떻게 맞으시며 어떻게 보내실 것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모르는 사람들이 성탄절을 엉터리로 보냅니다. 이천 년 전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던 날 하늘에는 천군천사의 노래가 있었고, 예수 나신 곳을 알리는 큰 별이 있었습니다. 들에는 목자들의 경배가 있었고, 동방으로부터 온 점성가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 예물을 드렸습니다. 성탄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점이셨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류의 구세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고 평화의 왕이십니다. 길이시고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고 그가 곧 구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탄절을 맞고 보내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가대의 찬양을 빼놓지 않고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사람,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탄절을 참으로 맞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탄절에는 "평화로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탄절에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땅은 평화로운 것 같았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는 서러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평화의 구세주인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요즘 어디가 평안한 나라입니까? 미국입니까? 소련입니까? 어디가 평안한 나라입니까? 우리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그 나라에도 완전한 평안함 이란 없습니다.

    돈이 많으면 평안합니까? 부잣집이 평안하다면 부잣집 담장을 강제로 넘어서라도 평안한 집에 들어가 살아야 되겠지요. 권세 많으면 평안합니까? 그들은 쓸데없는 사람들의 보호 속에서 오히려 불쌍하게 살아갑니다. 저는 경호원 없어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권세가 많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늘 불안해합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방탄차를 타고 다니고 방탄조끼를 입고 다닙니다.

    참된 평화는 돈이나 명예나 권세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하는 찬송처럼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복하는 곳에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궁궐 같은 곳에 살아도 예수 없으면 소망이 없지만, 슬프고 괴로움 많고 어려운 이 세상 초막 같은 곳에 살아도 예수를 모셨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성탄절을 맞고 보내는 여러분들,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는 평화가 넘치는 복된 성탄절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송구영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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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9: 19)

    사람은 자기가 누리는 행복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구촌 한쪽 구석에는 먹지 못해서 말라 죽어 가는 사람이 있고, 한쪽 구석에는 배가 나와 걱정이 되어 헬스 클럽에 다니면서 배의 군살을 빼고 체중을 줄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풀죽이라도 먹으면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찬이 입에 안맞아 못 먹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도 못 가서 눈물을 흘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다니는 학교가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규제하는 법이 너무 많다고 투덜댑니다. 술 먹고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는 것을 막기 위해 음주운전을 단속합니다. 그런데 한 잔쯤은 괜찮지 않느냐며 투덜댑니다. 철도 건널목에서 일단 정지하고 좌우를 확인하라고 하고 이를 어기면 단속을 하고 딱지를 뗍니다. 그런데 급할 때는 좀 봐줘도 되지 않느냐고 투덜댑니다. 미성년자는 유흥업소에 들어가지 말라고 단속을 합니다. 그러면 즐기는 것은 자유인데 뭐 어떠냐고 항변을 합니다.

    왜 성경에 그리고 이 세상에 하지 말라는 것이 그렇게 많습니까? 그것은 보호하고자 하는 축복의 제재입니다. 하나님이 규제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이 없어서 규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품안에 두시기 위해서 규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규제 아래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축복입니다. 규제 아래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은 축복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고 명하는 것은 보호의 가능성 안에서만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왜 하지 말라고 합니까? 또 왜 하라고 귀찮게 합니까?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금년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새해에는 어떻게 살아가실 것입니까?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라는 말씀은 축복인 줄 믿고 순종하지 않으시렵니까? 하지 말라는 말씀도 축복인 줄 믿고 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시렵니까?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때 사람들은 한편으론 기쁘지만 한편으론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합니다. 지난 해에 보람있게 잘 살았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하고 가슴은 콩콩 거리며 잘못 살아온 자신을 괴롭히게 됩니다.

    이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모두를 위해 기도해 드리고 싶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언제나 저희를 주님의 은총 가운데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크신 은혜였던 것처럼 남은 날들, 새롭게 맞는 날과 새해에도 언제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광야에서의 연단이 필요하다면 아멘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지만 주님께서 목마를 때 생수를, 배고플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광야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를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해에는 이전보다 더 기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세월을 허송하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 감사의 조건이 충만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글을 읽으시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멘 하는 성도들을 주님 붙들어 주시고, 그 눈을 통해 읽는 모든 말씀이 복된 말씀이 되게 하시고, 입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귀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40은 불혹(不惑)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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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는 많은 수(數)가 나온다. 그리고 그것들은 종종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 중에 40 이라는 수는 대략 한 세대(世代)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빈번히 사용되었으며, 시험·회개·처벌… 등에서의 장기간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 때에는 40주야(晝夜)로 비가 내려 지면을 휩쓸었고 홍수가 땅에 40일 일었다(창 7:4, 12, 17, 8:6). 모세가 자기 형제를 방문했을 때 40세였고(행 7:23), 미디안땅에서 40년을 지냈으며(행 7:29∼30),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있었고(출 24:18), 이스라엘을 위해 40주야 기도했다(신 9:25).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고(민 14:33, 32:13), 다윗과 솔로몬은 각각 40년간 통치했으며(삼하 5:4 ; 왕상 11:42), 요나는 니느웨 백성에게 40일 내에 회개하라고 경고했다(은 3:4).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앞두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고(마4:2), 부활 후에는 40일 동안지상에 계셨다(행 1:3).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광야생활에서 빵보다 우선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배웠고, 예수님께서는 40일 광야 금식기도를 통해 빵보다 우선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재확인했다. 이렇듯 성경에서의 40일이라는 수는 무엇인가를 구별하는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 한 기간·세대 ·과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40세에 이르러 세상 일에 미혹(迷惑)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 공자(孔子)의 '불혹(不惑)', 곧 '40'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을 쓰는 필자는 공자의 40세 '불혹'이라는 말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자는 이번 송구영신예배를 드림으로 반갑지 않게 벌써 40이 되었지만, 여전히 갖가지 유혹이 매일 매 순간 연약한 내 신앙의 양심을 괴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와 너무도 시대가 다른 때에 살아서 일까? 공자만큼 괜찮은 사람이 못 되어서 일까? 아닐 게다. 공자의 판단이 공자의 결론이 잘못 되었을 게다. 40을 불혹이라 할 만큼 인간은 40이 되어도 성숙한 인격과 완전한 성품을 그리고 세속과 방종을 물리칠 지혜와 용단을 갖지 못한다. 40이후에 추악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지 않은가? 이런 현실에서 갖는 보통 사람들의 의문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어떻게 하면 웨슬리(Wesley)가 말하는 완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행 13:22) 자가될 수 있을까?"

    출생 직후 살 것 같지 않게 비실 거려 서인지, 바쁘고 고달픈 부모님들의 초년 목회 때문이었는지 양띠 해 5월에 낳은 아이를 출생 후1년 뒤에야 호적에 올렸다. 필자의 출생에 대한 완벽한 증인이시고 아들이 40이라고 편하게(?) 말씀하시는 부모님만 못 들은 척해 주신다면 "아직은 서른 아홉"이라 하고 싶은 마음도 이제 나이가 먹은 탓일까?

    은은히 풍기는 그윽한 향 때문에 마시는 커피 한 잔처럼, 비록 작지만 누구에게 인가 따끈함을 주는 중년이고 싶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1994년 봄,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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