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선교사의 경건생활

2005. 6. 23. 15:37선교자료/5.선교자료

선교사의 경건생활
- 한도수 선교사 (바울선교회 본부장) -



들어가는 말



선교사역의 승패가 얼마나 현지어를 잘 하는가? 얼마나 현지문화에 잘 적응되었는가? 후원교회가 든든학가? 처세술이나 인간관계는 좋은가? 학위는 있는가? 라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인 기준이다. 어쩌면 이러한 것들은 선교사역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와같은 것들을 갖추기 위하여 선교사들은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훈련하고, 편지쓰고, 방문하고, 보고서 작성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아무리 언어를 탁월하게 구사하고, 현지문화에 잘 적응되었으며, 후원교회가 든든하고 인간관계가 좋고 박사학위가 있다고 해도 선교사의 경건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 모든것들은 인간적인 사업이 될 것이고 선교사역은 패배로 끝나고 말 것이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경고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로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트니라(딤전6:3~5)'고 했다.



오늘날 선교지에서 들려오는 부정적인 소리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언어가 문제인가? 문화가 문제인가? 선교비가 문제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근원은 우리의 삶의 뿌리가 되는 경건생활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렇게도 중효하고 귀중한 선교사의 경건생활이 선교사역에 기본이 됨에도 불구하고 별로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고 있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1. 경건생활의 위기



1) 언어 및 문화적응
선교사가 타문화권에 파송되었을때의 영적 상태는 순교를 각오한 뜨거운 영적 최고의 상태일 것이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가오리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오리다" 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속에 파송예배를 드리고 어쩌면 이 땅위에서는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모님과의 헤어짐과 일가친척, 성도들과의 이별이 사뭇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미래에 펼쳐질 선교의 벅찬 꿈과 더불어 타문화권에 대한 불안감과 긴장감에 휩싸여 선교지에 도착하게 된다. 모든 것이 신비하고, 흥미롭다. 조금 불편한 것은 뜨거운 믿음이 녹여버린다.

그러나 한달 두달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려운 문제들이 산처럼 쌓여옴은 물론 후원교회들의 은근한 선교사역의 압력에 한층 스트레스가 쌓인다. 한국에서처럼 드리는 새벽기도나 통성기도가 점차 약해져가고, 설교대상자도 없으니 성경을 보는 시간도 줄어들고, 현지교회에 나가도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와 이해할 수 없는 예배 분위기에 예배드린것 같지도 않고 무엇인가 잃어버린듯 허전하고 영적인 갈증을 느끼게 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나라 안에와 문화에는 익숙한데 영적상태는 고갈되어 영적 싸움의 현장에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되어가는 것이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2) 사역에 대한 부담감
한국교회의 사역에 대한 기대감과 요청은 아직 날지도 못하는 새에게 날아보라고 하는것과 같이 초임선교사에게 엄청난 부담감과 불안을 안겨준다. 아직 언어 문제나 그 나라 문화에 대하여 익숙하지도 않은 "살아가는 것 조차도 어려운데" 교회를 개척하라는 등의 요청은 참으로 곤욕스러운 일이다. 만약 못한다고 거절하거나 미루었을 때에 오는 결과에 대해서 선교사는 불안한 것이다. 주위에서 후원교회의 의사에 따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선교비를 중단하거나 보류하는 사례들을 많이 보기 때문이다.

언어도 서툴고 건축에 대한 정보도 별로 알지 못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교회 건축에 열을 올린다거나 기타사역에 열심히 뛰다보니 경건생활에는 자연히 느슨하게 된다. 따라서 현지인들과의사이에서 언어와 문화에 대한 차이로 말미암아 오해가 생기고 불신 및 불화가 발생하게 되어 결국 선교사의 경건된 모습이 아닌 세상적인 모습들이 현지인들에게 나타나게 된다.



3) 경건시간의 부족
사역이 시작되면 몹시 분주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조용히 갖는 시간이나 여각가 거의 없게 된다. 현지인들과의 관계, 사역자들과의관계에서 그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교제함은 물론 요사이는 한국에서 방문하는 청년, 대학생, 성도들이 많아 그들을 안내하고 보살피는 일까지 늘어 더욱 시간을 빼앗기고 피곤에 지친다.

나라에 따라서 다르겠으나 필리핀의 경우 모든 사역의 여건이 비교적 어려움이 적기 때문에 (비자의 관계나 다른 종교와의 관계 등) 언어 문제와 문화적응이 어느 정도 되면 사역의 열매를 보게 되어 사역의 늪에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때분터 선교사는 주의 종보다 일의 종이 되어 버린다. 주님을 중심한 사역이 아니고 일을 중심한 사역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니 경건시간은 형식적이 되어 버리고 경건생활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러한 일 중심의 생활은 경건생활에 금이가게 하므로 결국 불평과 불만이 싹이 트고 극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며, 선교사간에 현지의 동역자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고 나아가 가족에까지 불화가 잦아지게 되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경건생활이 유지되지 못할 때 사탄이 역사하며 가정을 파괴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박살내 버린다.

그러므로 사탄은 선교현장에서 더욱 강열하게 저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공작하는데 타켓트가 곧 선교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과거 사탄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의 방해공작의 전략이 선교사가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철야하며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므로 오히려 선교사에게 능력을 안겨다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여 이제는 선교사로 하여금 일을 많이 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 바쁘게 만들어 경건생활을 못하게 하고 영적으로 둔화시켜 교만하게 만들고 자랑하게 만들고 결국 스캔달을 만들어 자멸하게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가 넘어지면 그동안 이루어 놓은 사역들은 물거품이 될 뿐아니라 오히려 예전보다 더 못한 잡초가 무성한 선교지를 만들게 될 것이다.



2. 경건생활의 결여에서 온 결과



1) 다툼이 일어난다.
선교지에서 제일 많이 문제되는 것이 다툼이다. 선교사와 선교사와의 다툼, 선교사와 현지인과의 다툼은 지금도 계속 들려오는 비극의 소리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간에도 다툼이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도 심히 다투어 갈라서기도 했다. 이처럼 사탄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종들간에 이간질을 하여 다툼을 만들어 내고 다툼을 통해 서로 미워하게 하여 결국은 화평을 깨고 불화하게 하여 서로 갈라서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방해한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 서구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었다. 선교사들 간에는 늘 갈등과 다툼이 있었고, 어떤 때는 같이 살면서도 이틀동안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새로 그곳에 온 선교사와도 얼마 안되어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신참의 선교사는 너무도 부끄럽고 괴로워 의자에 앉아 울고 있었는데 나이많으 아프리카의 하녀가 조용히 다가와서 "나는 이 선교센터에서 15년간 일해 왔는데 당신들은 항상 우리에게 구세주를 주러 왔다고 말해왔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한 번도 선교사 여러분의 사이가 구원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다툼은 선교를 방해하는 크나큰 요소로 작용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어 갈라섰기에 선교의 장이 더욱 넓어진 것처럼 한국교회도 다툼으로 교단이 분열되었고 그 분열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며 다툼과 분열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방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극히 비성경적인 발로이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이기에 어떤 말로돋 다툼과 분열은 정당화 될 수가 없다.
다툼의 원인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나를 주장하는 이유는 십자가의주님과 깊은 영적인 관계가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교만이 생긴다.
사람에게 최고의 무서운 적은 교만이다. 이 교만이 이 세상에 무서운 죄와 사망을 가지고 왔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16:18)"라고 했다.

교만의 양태는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첫째로 지식의 교만이다. 학위를 갖고 있거나 혹은 영어를 잘한다거나 기타 어떠한 지식을 남보다 조금 낫게 가지고 있다면 여기에는 선배도 후배도 없고 어른도 아이도 모르고 사람들을 무시하며 업신여긴다. 이러한 교만이 협력을 저해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한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 앉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는 경험의 교만이다. "내가 최초로 왔고", "내가 최초로 시작했고", "내가 최초로 세웠다"고 하며 토주대감 노릇을 한다. 물론 처음으로 선교지에 와서 고생도 많았을 것이고 힘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늘 과시하며 선임자임을 자처하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가 된다.

세째로는 사역의 교만이다. "교회를 몇 개 세웠다", "신학교를 크게 세웠다", "선교센터를 세웠다"는 등 사역에 대하여 과시한다. 성령님은 뒷전에 가 버렸고 후원교회나 후원성도들의 기도와 후원은 아예 무시해 버리고 모든 것을 자기가 다 했다고 한다.



3) 부정직성이 나타난다.
삶의 자리에 성령님이 좌정해 계시지 않기에 인간적인 것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도 재빨리 마음속에 파고드는 것은 부정직성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하기 보다는 인간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하기에 선교보고에서 부정직한 모습이 나타난다.

지금부터 7년 전 모 나라의 현지인 목회자가 필자의 집에 와서 몇일간 쉬고 간 일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신학과 일반대학 과정을 이수했기 때문에 꽤 한국말도 잘했고 특히 그의 아내가 한국여자이기에 한국문화에 대하여 잘 이해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서 발간하는 어느 월간지에 기재된 선교사의 선교보고서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 보고서는 90% 이상이 거짓이다. 이 선교사는 내가 초청해서 왔는데... " 나는 깜짝 놀랐다.

어느 선교대회에서 슬라이드를 통하여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중 가운데서 소리가 나기를 "그 사역은 나의 사역인데 왜 네가..." 참석한 모두는 어안이 벙벙하게 되었는 이러한 사례는 심심치 않게 있다.

둘째로는 선교비 수입과 지출에 대한 부정직이다. 과연 선교비에 대한 보고가 바르게 되고 있는가? 파송받은 선교사에 대하여 분명한 관리기관이 없을 경우 선교사의 선교비에 대하여 확인할 길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누가 체크하든 안하든 성령안에서 바르게 정직하게 쓰여져야 될 터인데 경건생활에 문제가 있게 되면 크게 시험에 들 수가 있다.



4) 제국주의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선교사의 삶의 모델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라 하셨다. 또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하시며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요13:12). 종의 태도를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내적인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선교지에 가서 현지인들을 섬기는 자로서 일해야 한다. 그러나 섬기는 것보다 보스로서 군림하고 섬김을 받으려 호령하면서 제국주의적인 모습으로 사역에 임한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서구선교사들에 의하여 자행되어 왔기에 '양키 고우 홈(Yanki go home)'이란 단어도 만들어지게 된 것인데 한국선교사들 가운데서도 이같은 일이 있다는 것이다.



5) 협력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우리는 현재 서로 협력하지 못하므로 엄청난 인력낭비, 재정낭비, 신간낭비를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더욱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보다 나의 고집을 앞세우며 자기 중심적으로 매사에 임한다. 또한 경쟁적으로 사역에 임하며 영웅주의적으로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으려고 한다.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위하여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날마다 자신을 죽여야 하는데 경건이 빠지게 되니 인간이 나타나서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생활에 문제가 있게 되면 이처럼 다툼과 교만과 부정직성과 제국주의적인 모습이 나타나며 이로 인해 결국 협력이 안되어 하나님 나라 건설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3. 경건생활의 극복을 위한 제안



오늘 영적으로 깨어있다고 해서 내일도 깨어있다고 하는 보장은 없다.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란 주님의 경고를 들으며 순간순간 깨어있지 않으면 금방 넘어지고 만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여기 본문을 보면 한때는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어느순간 경건생활에 금이 가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교만에 빠지게 되었고 스캔달을 일으키게 되었다.

'제자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듯이 경건생활은 훈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그러므로 경건생활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시간이 있으면 하고, 시간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경건생활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경건생활은 훈련을 통해서만 극복이 되며 지속될 수 있다. 이 훈련은 스케줄에 따라서 매일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건생활의 훈련을 우리의 삶과 모든 사역에 우선권을 두어 지속적으로 해 가야만 한다.



1) 기도훈련과 습관
기도란 영적인 호흡과 같다. 죽은 자란 호흡이 끊어진 자를 말한다. 기도가 끊어짐은 곧 영적인 죽음을 말한다. 기도란 40일 동안 실컷하고 그 후에는 계속 쉬어도 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숨을 쉬듯이 항상 쉬지말고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눅18:1, 살전5:17)

그러므로 기도훈련은 매일의 스케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해 가야 한다. 불규칙적으로 기도생활을 하게 될 때 경건생활도 불규칙적으로 되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게 된다. 스케줄을 세워놓고 기도하려 하는데 스케줄을 거스리는 두가지의 기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일이 많아서 시간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게 되면 기도시간이 소홀해진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한번 소홀해지게 되면 그것을 극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도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본능은 반대로 작용한다. 사람이 본능을 오래 부인하면 할수록 그것은 배고픔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압도하여 그 갈망을 만족시킬 때까지 본능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기도는 그와 같지 않다. 기도는 습관이지 본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란 훈련되어서 습관이 되어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유달리 기도에 힘쓰신 분이시다. 새벽기도를 하셨고(막1:25) 저녁기도를 하셨다(막6:46). 금식기도를 하셨고(눅3:21) 철야기도를 하셨다(눅6:12, 마14:23). 울며 통곡하시며 기도하셨는가 하면(히5:7)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애절한 기도를 드리셨다(눅22:44). 하나님이신 그 분이 진액을 짜내는 간곡한 기도를 드렸다면 비천한 우리야말로 정신 가다듬고 기도해야됨을 절실히 요청받게 된다.

바운즈(E. M. Bounds)는 그의 기도의 능력이란 저서에서 "이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아침 일찍 무릎을 꿇은 사람이다."라 외치며 "또한 기도의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단정했다. 성령은 방법을 통해 흘러나오지 않고 사람을 통해 역사하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과 밀통하고 있느냐가 능력의 척도가 됨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동휘 목사는 "사람을 내놓아라"란 저서에서 기도에 대하여 강조하기를 "우리는 오늘 기도 쉬는 죄(삼상12:23)를 범하고 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설교를 할 것이고 죽은 설교는 사람을 죽인다. 기도없는 설교가 살인행위임을 경고한다. 교육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기도의 실패를 방지할 수 없고 진지함과 부지런함과 연구와 은사도 기도의 결핍을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기도가 없는 전도자느 하나님의 진리를 빙자한 사업가요, 사무원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습관적으로 생활화하여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기도의 생활화는 곧 경건생활의 기초가 된다.



2) 말씀읽는 훈련과 묵상
우리의 육신이 살기 위해서는 매일끼니때마다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이 살기 위해서는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전쟁터에서의 검과 같아서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선교사에게 무기가 되어 사탄의 궤계를 무찌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규칙적으로 말씀을 릭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들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남을 위해 설교준비하는 식의 성경묵상은 경건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기대의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해야 한다. 시편기자는 "복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2)"라고 하여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여호수아 1장에서는 "율법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고 지켜 행하게 될 때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죄성이 있어 조금만 느슨하면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기에 고삐를 늦추지 말고 성화를 향하여 가는 훈련생으로 늘 생각하며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는 일을 모든 사역보다 우선으로 두어야 할 것이다.



3) 경건서적 읽는 훈련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과 더불어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의 글들을 읽을 때 경건생활에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주석보다 "허드슨 테일러 생애"의 책이나 "위대한 헌신", "죠지 뮬러"같은 책들은 나에게 영적인 생활과 헌신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요사이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영적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들도 많다. 이러한 경건서적을 읽는 것 역시 훈련의 입장에서 2주에 한권을 읽는다든가 한달에 한권을 읽는다든가의 계획을 세워서 꾸준히 읽어가야 한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상당히 바쁘게 움직인데도 일주일에 한두권씩은 읽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선교지에서는 더욱 영적으로 고갈되기 쉽기 때문에 이러한 경건서적 독서가 필요하다.



4) 가족 경건훈련
타문화권에서 어려움과 스트레스가 더 많이 쌓이는 자는 선교지에서 일하는 선교사보다 집에 있는 가족이다. 대화의 상대나 교제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이웃이 없는 가운데에서 많은 날들을 제한된 생활을 하다보니 어것이 병이 되기도 한다. 가족이 원하는 것은 물질도 보석도 아니다. 친구가 필요하며, 대화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지에서 가족을 돕는 일은 날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평안을 얻는 것이다. 왜 이곳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가족경건회 역시 하루도 쉬어서는 안된다. 스케줄에 따라 돌아가면서 예배를 인도하며 서로 말씀을 나누는 이시간을 가정에서 제일 귀중한 시간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화목하고 경건생활이 유지된다.



5) 수련회나 집회를 통한 재충전
선교사 수련회나 부흥사경회 등에 참석하여 새롭고 신선한 영적양식을 공급받으며 성도들과 동역자간에 교제를 통하여 영적재충전의 기회를 삼는다. 그러나 이러한 집회의 참석이 오히려 영적으로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새겨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열린 마음이 될 때 재충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6) 쉼을 통한 재충전
타문화권에서 수년을 지나다보면 전혀 다른 언어, 문화, 기후, 음식 등에서 오는 긴장감과 스트레스 그리고 대인관계, 자녀교육, 재정관리 등으로 인한 또다른 스트레스로 인하여 영육간에 심히 어려운 딜레마에 빠질 수가 있다. 이때는 휴가나 안식년을 얻어 쉼을 통해서 영적으로 회복이 될 수도 있다.

기초(Foundation)가 튼튼한 건물은 어떠한 태풍이 불어와도 무너지지 않는다. 선교사의 기초는 곧 경건생활이다.

경건생활이 잘 이루어질 때 선교사역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을 때 능력의 주님께서 힘이 되어주시고 위로자가 되어주시며 친히 함께 하셔서 당신의 뜻을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성령보다 앞서지 않고 기도보다 앞서지 않으며 자기의 지식과 경험과 능력을 뒤에 두고 겸손히 주님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앞세울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왕성하게 세워져 갈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유익하던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겠노라"고 한 바울선교사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경건이 빠져버린 선교사의 모습은 향기없는 꽃과 같고 생기없는 뼈와 같다.

우리의 경건생활을 회복하자. 경건생활로 돌아가자. 주님없이 내 힘으로 내 지식으로 내 능력으로 내 경험으로 사역함으로써 일꾼으로 전락해 버린 우리의 모습을 주님께 내어놓고 회개하자. 감사보다는 불평, 불만, 원망했던 일들을 회개하자. 주님께서 긍휼이 여기사 치료하시고 새롭게 해 주실 것이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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