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상학 연구(1)

2005. 3. 29. 22:53신학자료/1.신학자료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상학 연구

??카파도키아의 비잔틴 교회를 중심으로??


                               조 수 정



             . 들어가는 말: 지리적․역사적 배경

             Ⅱ. 몸말

                1. 성녀 헬레나의 생애

                2. 도상학적 분석

                   1) 10세기의 초상

                   2) 11세기의 초상

                   3) 13세기의 초상

                3.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 초상의 역할

             Ⅲ. 맺는말


I. 들어가는 말ː지리적․역사적 배경


카파도키아(Cappadocia)는1) 이미 4세기경부터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우스2)와 니싸의 그레고리우스3), 그리고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4)와 같은 저명한 주교들이 활동했던 곳으로서, 그리스도교 성지로도 이름이 높았던 지방이다. 카파도키아라는 지명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태수가 통치하던 ‘카트파투카'(Katpatuka)5)라는 구역 명에서 유래하며,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지리적, 행정적 단위를 지칭해 왔다.6) 본 연구의 대상이 되는 비잔틴교회들은 터키의 내륙, 아나톨리아(Anatolia) 고원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카이세리(Kayseri), 서쪽으로는 악사라이(Aksaray), 남쪽으로는 니이데(Niğde), 그리고 북쪽으로는 크즐 으르막(Kızıl Irmak) 강으로 경계 지어지는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7) 이 지역은 울창한 산림을 자랑했었으나, 고대말기에 이르러 경작지확대를 위한 벌목 등으로 인해 훼손된다.8) 주요한 건축자재인 목재의 부족으로 인해서, 부드러운 응회암(凝灰巖)으로 이뤄진 절벽과 작은 봉우리를 깎아 만든 건축물??주거․창고․교회․수도원 등??이 등장하기 시작한다.9) 이런 암벽 건물들은 기존의 공사법과 비교해 볼 때 건축자재 면에서 유리했고,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비교적 수월하게 완성시킬 수 있었으며,10) 단열 효과가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11) 일반적으로 카파도키아의 비잔틴교회는 주요 도로나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12) 기둥 위에서 고행하는 수도자(스틸리트, stylite)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 은수자들도 조용한 장소를 찾아 바위 꼭대기에 거처를 정하고 구도의 길에 정진하는 것이 당시 보편적인 양상이었다.13) 암벽 건물이라는 건축적 특성과 대도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서, 카파도키아 지방의 비잔틴교회는 후대의 파괴를 모면할 수 있었고, 상당히 많은 수의 교회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내부를 그림으로 장식한 교회는 300여 개가 넘는 것으로 보고 되어 있으며, 그 외의 장식이 없는 단순한 교회를 합하면 천여 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잔틴 역사상 흔히 ‘변모의 시기’라고 불리는 7세기부터 9세기 전반 동안,14) 카파도키아는 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는 못하였으며, 남아 있는 작품의 수도 극히 빈약하다.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초상은 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카파도키아에 등장하는데,15) 이후 13세기말에 이르기까지16) 많은 교회의 내부에서 발견된다. 본격적인 도상학 연구에 앞서, 이 기간 동안 카파도키아의 역사적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한다.17)

바실레이오스 1세(Basileios I)로부터 시작된 마케도니아 왕조 (867-1056)18)는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I) 치하의 정치적․문화적 부흥에 견줄 만한 황금기를 맞게 된다. 성공적인 영토의 재정복 사업19)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성상지지자의 승리로 성상 파괴 운동이 일단락된 후 더욱 확고해진 그리스정교회의 세력20)은 예술 활동의 재개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21) 제국의 여러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카파도키아 역시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맞게 되는데,22) 종교, 예술 활동은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새로 지어 지거나 보수되고, 다수의 예술품이 제작되는데, 현재까지 보존된 자료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제르파니옹(G. de Jerphanion)에 의해서 아르카익(archaïque) 그룹으로 분류된 암벽교회들23)과 11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은 제2의 황금기 또는 ‘마케도니아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비잔틴 중기의 문화적 양상을 대변하고 있다.24)

그러나 바실레이오스 2세(Basileios II) 이후, 카파도키아의 중요성은 점차로 감소한다: 소아시아 지방은 1040년 이후 셀주크 투르크의 압력을 받게 되는 반면, 제국의 정치적 구심력은 발칸반도로 옮겨가게 되고,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다.25)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Konstantinos X, 1059-1067)의 재임 기에 셀주크 투르크는 근동지방과 아르메니아지방을 장악하게 되고, 1071년이 되자 술탄 알프 아르스란(Alp Arslan)은 만치케르트(Mantzikert)에서 황제를 포로로 잡는다. 1082년 카이사레이아가 점령당하는 수난을 겪은 카파도키아는 이후 룸(Rûm) 회교 왕조의 일부로 편입된다.26) 카파도키아 지방의 종교건축 활동은,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점령되던 11세기말까지 지속되는데, 으흘라라의 성 미카엘교회(Saint-Michel, Ihlara)와 카라바슈 교회(Karabaş kilise)는 각각 1055년과 1061년에 완성되었다. 한편, 수도공동체의 집성촌이었던 괴레메(Göreme)에서는 으란르(Yılanlı) 그룹에27) 속하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종교, 예술 활동이 계속 유지되었으나, 빈약한 경제 사정을 반영하듯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그림들로 장식되었다.

12세기, 터키의 지배 하에 놓인 카파도키아는 예술 활동의 공백기를 보이면서, 사회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28)

회교권 정치체제로의 편입이라는, 사회의 전 분야에 걸친 근본적인 변모에도 불구하고, 13세기에 이르러 카파도키아는 다시 한번 예술 분야의 부흥기를 마련한다.29) 이시기의 예술은 카파도키아지방 전통, 투르크 문화, 그리고 니케아왕조의 영향30)을 복합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귈셰히르(Gülşehir) 근방에 남아 있는 교회??카르슈킬리쎄(Karşı kilise, 1212), 아측사라이(Açık Saray), 육세클리 1번 교회(Yüksekli), 타틀라린 교회(Tatalrin)??는 정치적 안정과 활발한 경제활동을 바탕으로 회교사회에 비교적 잘 적응하여 13세기의 3/4분기까지 존속했던 희랍정교공동체의 존재를 반증하고 있다.31) 벨리즈르마(Belisırma) 계곡의 성 게오르그 교회(1283-1295)도 회교 사회에 적응한 부유층 희랍인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카파도키아지방의 비잔틴 회화는,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파손되어 가고 있다.32) 본 연구를 위해서 2000년과 2002년 사이에 걸쳐 답사한 비잔틴교회는, 유네스코나 터키정부의 지원 하에 복원된 몇몇 운 좋은 교회를 제외하고는,33) 거의 대부분 방치된 상태로 버려져 있었으며, 때로는 고의적인 훼손도 목격되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카파도키아지방의 비잔틴교회34)는 196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35) 최근에도 새로운 교회가 해마다 발견되어 보고 되는 상황이다. 방대한 자료를 제공하는 이 지역의 성녀상 연구는 아직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각 교회의 개별적 연구서에서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 정도이다. 본 연구는 카파도키아의 비잔틴교회에 그려진 헬레나(Helena)와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 Gaius Flavius Valrerius)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춰, 각 조형적 요소의 기원과 의미, 그 변화 양상, 그리고 교회 내부 장식에서의 위치와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현재까지 알려진 이 지역의 모든 비잔틴교회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아직 학계에 보고 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를 개인 연구로 보충하였다. 중재자, 보호자, 그리고 때로는 치유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던 성녀 헬레나와 성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제단이나 입구, 천장의 돔처럼 중요한 곳에 주로 그려지는데, 단순한 장식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건물의 용도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고, 기증자36)의 역할이나 당시의 사회적 상황, 일반 백성의 종교심을 알려주기도 한다.


I. 몸말


1. 성녀 헬레나의 생애


콘스탄티누스 대제37)의 어머니인 헬레나의38) 출생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일치하지 않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비티니 지방의 드레파눔 (Drepanum, 후대에는 헬레노폴리스 Helenopolis라 불림)에서 태어났다고 하기도 하고, 영국 콜체스터(Colchester), 또는 요오크(York)에서 248년에 출생했다고도 한다. 평민 출신인그녀는 장교였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결혼하여 274년 아들을 얻는데, 이가 바로 훗날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다. 292년 카이사르(caesar)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우스는 황제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Maximianus Herculius)의 의붓딸 테오도라(Theodora)와 재혼하는데, 이후의 헬레나의 거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312년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권좌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대제는 제국 내에 그리스도교를 용인하고, 헬레나에게 아우구스타(Augusta)의 칭호를 내린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헬레나는 이 새로운 종교의 전파에 헌신하게 되는데, 루피누스(Rufinus)의 기록에 의하면 326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리스도가 처형되었던 십자가를 찾아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39) 많은 교회를 새로 세우거나 장식하도록 후원하였다. 헬레나는 328년경 사망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성사도 교회에 안치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더불어 헬레나는 교회 내에서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으며, 5월 21일을 기념일로 지내고 있다.


 
가져온 곳: [연어알]  글쓴이: 북극해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