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3. 29. 22:41ㆍ신학자료/1.신학자료
☞ 종교회의
1) 제1차 종교회의(니케아)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니케아에서 소집한 최초의 종교회의로, 32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 교회는 예수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분열이 조장될 것을 걱정하여 황제 자신의 주선으로 그 당시 황제의 거주지인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케 했는데, 이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회의를 통해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신(神)이 되어 버렸는데, 기존의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한 점은 11장의 "삼위일체설의 허구성"에서 신약의 기자들도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와 여호와를 동등하지 못하게 기록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초대교회사람들에게 예수는 신의 독생자로 모든 창조물중에 으뜸가는 존재요, 모든선지자중에 으뜸인 인간으로, 신과 인간의 중간에 중보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속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차츰 미트라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미트라의 성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정통파 아리우스파와 미트라의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갈려지게 된다.
미트라의 숭배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하면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하려고 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도 받지않은 상태로 종교회의를 사회하면서 공포적인 분위기로 회의를 주도해갔다.
"교회의 머리(콘스탄틴)가 나타날 때(6월 14일), 그는 '하늘에서 내려 온 하나님의 사자로 금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미와 위엄으로 충만한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에스겔 28장 인용). '제왕의 자주색 옷을 입었고(요한계시록 17:4), 머리에 금 띠를 둘렀으며, 그의 붉은 안색과 내리깐 눈은 그의 옷의 보석들에 반사되었고, 그의 허리에는 제왕의 칼과 목자의 지팡이(스카랴 11:17)가 있었다.'"
위의 말은 당시 회의중에 나왔던 말이다.
참석자들은 콘스탄티누스에게 성경구절로써 온갖 아첨을 하고 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모인사람중 몇명을 추방하고 종교회의의 다수 규칙을 따르지 않는자는 누구나 죽이라고하고, 교회의 불일치는 제국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므로 연합하지 않는자는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 회의를 공포적인 분위기로 주도해 갔다.
이 회의의 참석자는 318명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이들을 감독들이라고 불렀는데,그들은 각자 장로 두 명과 수행원 셋을 거느리고 니케아에 모였다.
감독들중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인물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이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신(神)이 무(無)에서 창조한 존재로,인간의 영(靈) 대신에 로고스가 들어간 존재라고 말했으며,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는 무(無)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전의 영원에서 신(神)이 창조한 존재로 본질은 신(神)이 아니나,신과 비슷한(homoi) 존재라고 주장했다.[성경통신대학 제3권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부 / 1992]
그러나 그들이 제출한 신경(信經)은 폐기되고,황제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어 '니케아신경’(Nicaenum)이 공포되었다.
이 신경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는 ‘호우시우스’인데 그 의미는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와 본질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코르도바의 오시우스(Ossius von Cordoba)의 말을 빌려 한 말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라는 것의 니케아신경이 공포되고, 이 회의에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인간에서 신이 되었으며,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破門), 유형당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은 이때의 투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론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였으며...공의회가 발의한 신조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라고 표현한 결정적인 공식 문을 직접 제안하였다... 주교들은 황제에게 위압되어 단지 두명만 제외하고 신조에 서명하였는데,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또한 이 회의를 통해서 많은 이교도적인 종교의식이 기독교에 도입되었다.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부활절의 시기였는데, 당시 지중해 국가에서 봄의 여신축제(동시에 미트라의 부활절)시기를 부활절로 결정지었다.
이밖에도, 부활절 계란이나 결혼 반지, 종교적인 행사, 촛불을 켜는 것, 까운 복장의 성가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도, 예배 도구로 쓰인 나무 토막이나 천조각, 방에 성수(聖水)를 뿌리는 것,등의 의식이 도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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