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4. 09:56ㆍ목양자료/2.설교자료
여호와께 감사(민 15 : 17 - 21)
추수감사주일
어느 여집사님이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늘 술시중을 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술이 만취되어 들어오는 날이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곤 해서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술취한 남편이 어지럽혀 놓은 것들을 다 정리하고 나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편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신세타령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저는 언제까지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합니까? 해도 해도 너무 하십니다.” 슬피 울며 탄식하면서 기도를 드리는 갑자기 성령님이 감동하셔서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이 났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셨지....”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할 일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그런데 순간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술고래 남편이 살아 있는 것이 그래도 과부 신세보다야 낫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은 저 꼴이지만, 언젠가는 사람이 될는지도 모르잖아.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제 집 찾아오는 것 하나는 신통하니 다행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감사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더랍니다. 토요일은 특히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 와서 주일날은 꼼짝 못하고 누워서 교회 가라고 하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이렇게 감사할 일들을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있는데, 남편이 순간 눈을 떴습니다. 밤중에 혼자 앉아 실실 웃고 있는 아내를 보자 남편이 부인이 드디어 자기 때문에 돌아버린 줄 알고 놀라서 묻습니다. “여보, 왜 그래? 왜 그렇게 웃고 있어?” 그러자 집사님이 더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합니다.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그리고 집사님은 조금 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남편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예수 믿어줄게” 그 여집사님은 이렇게 간증했다고 합니다. “내가 10년을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시던 하나님께서 한 번의 감사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은 수시로 우리에게 축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 축복의 기회 중에서 가장 소중한 기회가 바로 감사의 기회입니다. 정말 복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감사의 기회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합니까? 재빠르게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그 기회를 축복으로 연결시킵니다. 반면에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감사의 기회가 생겼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오히려 “내가 잘해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행복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감사의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진정 복된 존재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감사의 기회를 주셨을 때 감사의 손길을 펴서 그 감사의 기회를 꼭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거제를 통해서 이처럼 우리에게 감사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8-19절 말씀을 일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얼른 보아도 본문의 거제는 추수에 대한 감사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제란 제물을 높이 들어서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거제를 드릴 때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 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
거제는 처음 익은 곡식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제일 먼저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에게 집중된 마음을 하나님께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삶의 모든 방식을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과 나를 비교하고, 내 소원과 현실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물이나 환경에 집중해도 감사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기에 결국은 천하의 어떤 것도 결코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직 그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진정한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특별히 무엇에 집중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항상 기본적인 감사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 다른 구체적인 열매가 아직 풍성하게 나타나지 않아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의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게 결과를 가지고 평가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감사도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결과를 보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와 상관없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결과를 보고 감사하는 것은 감사의 질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풍성한 무엇인가를 보고 감사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감사가 아닙니다. 아직 결과는 보이지 않고 풍성한 무엇이 없어도 장차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요한복음 11장 41절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돌만 옮겨 놓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미리 감사하십니다. 그리고 감사기도 후에 주님께서 나사로를 부르시자 곧 바로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살아서 걸어 나옵니다. 여러분! 열심히 기도하고, 소망했는데 아직 내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감사하십시오. 처음의 조그만 은혜를 감사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인생 전체가 감사의 조건들로 채워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감사는 ‘그래서의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이처럼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던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3장 17-18절에서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제부터는 결과를 보고 감사하지 마시고 첫 열매만으로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차지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내게 주신 작은 것, 낮은 가능성만 가지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진정 그것을 보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셋째, 작은 것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즉, 양이 많지 않아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추수를 다 한 후에 제사를 드리라고 했으면 더 많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 익은 곡식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양과 상관없이 미리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진 것이 비록 작고 초라해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부족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다보면, 머잖아서 더욱 많은 감사의 내용이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미래에도 풍성한 결실이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사실 상관없습니다. 이미 감사했기에 그의 삶은 항상 감사가 충만한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가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 가진 것이 많아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부요한 사람입니다.이제는 물량적인 것, 외적인 것을 가지고 감사를 저울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가장 많이 비판받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기복주의는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물량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많이 받아야 은혜를 받았다는 생각, 그리고 커야지 은혜를 받았다는 생각들, 바로 그러한 사고가 문제입니다. 많이 받아야만 복입니까?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한 바울사도나 스데반과 같은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까?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복은 인생의 결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헐벗고 굶주려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그 삶은 복된 삶이요, 은혜 받은 삶입니다. 적게 받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누릴 수 있습니다. 많지 않아도 그것을 가지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요6장). 그 구절에서 축사하셨다는 말은 축복하고 감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그 감사 속에서 5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풍성함이 예비되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 것에 대한 감사가 지닌 놀라운 능력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 그것은 분명 얼마 되지 않는 양입니다. 나 혼자 먹기에도 부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과 넉넉함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감사를 통해서 놀라운 풍요와 기적의 은혜를 예배하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있는 작은 것, 바로 그것이 바로 축복의 씨앗입니다. 작지만 하나님이 주셨음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가꾸어 보십시오. 그러면 삶 전체가 감사와 은총으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항상 새롭고 큰 무엇인가만 기대하지 마시고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은혜가 더해지게 될 것입니다.
넷째, 지금의 모습 속에서 진솔한 감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 그 적은 양을 생각하면 사실 아쉽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왕이면 조금만 더 주시지. 그러면 더 많은 감사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지금의 적은 양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앞으로 많은 양을 가지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가 힘듭니다. 왜 사람들이 불평합니까? 현재의 모습을 보고 너무 속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어떻게 그렇게 속단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은 눈에 보이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느 대학에서 윤리학 교수가 아주 어려운 한 가정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남편은 매독에 걸렸고, 아내는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이 가정에는 네 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한 아이가 죽었고, 부인은 지금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인 상태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 임신 중인 아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경우에는 낙태를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학생들도 그 학생의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베토벤을 죽였네.” 악성 베토벤이 바로 그 가정의 다섯 번째로 태어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앞날을 너무 쉽게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쉽게 결정하고, 너무 쉽게 절망합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복잡한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모습만 보고 그것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흔히 현실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더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보면 얼마나 보며, 들으면 얼마나 듣겠습니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속단하면 편협 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의 관심영역 안에서만 보고 듣습니다. 그래서 그 관심 밖에 있는 것은 못 듣고 못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도는 지금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의 현실이 못마땅하고 양에 차지 않고 속상하더라도 지금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내일에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처럼 처음 익은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거제로 드릴 때, 거제는 흔히 두 단계로 나뉘어져서 드려지게 됩니다. 먼저, 떡을 하나님 앞에 들어 올리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감사를 받으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떡을 내리는 단계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떡은 제사장, 즉 사람을 위해 준비되는 떡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식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를 올려드리면 하나님은 그 감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 감사로 주어지는 은총은 다시 우리들에게 돌려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감사하면 결국 그 감사는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마땅히 감사할 것 외에, 심지어는 고난과 고통까지도 하나님 앞에 거제로 들어 올리는 자세가 성도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인생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하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고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의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축복된 미래를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주님을 원망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저의 손을 꼭 붙잡아 주옵소서. 진정한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시고, 복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본심은 저와 여러분이 고난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감사를 생활화하므로 축복을 예비하면,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운 은혜와 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시고, 일상의 삶 속에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통해 진정한 성도의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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