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6. 23:28ㆍ목양자료/5.절기자료
[추석설교 (7편)]
/ 감사를 원하시는 하나님 (1)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삼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만을 주시거나 영혼만 잘 되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범사가 다 형통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만 잘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손 만 대까지 잘 되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하셨을까요? 우리에게 더 주시려고, 넘치게, 더 크게, 지금보다 더 많이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더 사랑받고, 더 은혜 받고, 더 축복받는 비결이 되는 줄 믿습니다.
감사는 또한 하나님께서 제일 받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감사이기도 합니다. 마귀의 종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죽어도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병도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었기 때문에 받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감사는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감사의 제목들
추석은 우리나라 명절 중에 제일 큰 명절입니다. 그래서 추석명절을 가리켜 말하기를 ‘한가위’ 라고 하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추석은 감사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감사하면서, 하나님 은혜로 잘 익은 햅쌀과 햇과일을 추수하고, 이 햇곡식으로 송편, 인절미, 절편도 만들어 먹습니다. 추석은 추수에 대해 감사드리는 제일 큰 명절인 것입니다. 이러한 추석을 앞두고 ‘감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가 사는 자연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거니와,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라도,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교만하지 아니하면 자연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또 돌보시고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삼라만상이 정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며,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옵니다. 또 하나님은 때에 따라 비를 주십니다. 맑은 하늘과 좋은 햇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확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생활을 너무 많이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6장 5-1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 가지고 남자만 5천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을 먹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천국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병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녁이 되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허기가 졌습니다. 그들이 먹여야 할 사람은 자그마치 남자만 5천명, 부녀자까지 합쳐서 수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손에 들려진 것은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어린 소년이 한끼 먹을 양식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까? 감사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먹어야 할 사람은 수만 명이요, 고작 어린 소년의 한 끼 먹을 양식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시고 우리 예수님은 “축사하셨다”고 합니다. 축사가 뭡니까? 감사입니다. 먹을 사람은 남자만 5천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떼어 주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모두가 원대로 배불리 다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기적이 있는데, 그중 제일 큰 기적이 뭡니까? 죽은 지 나흘 되어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묻혔습니다. 죽은 지 나흘 되었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말씀을 합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요 12:39). 그 마리아와 마르다와 동네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 죽은지 나흘 되어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은 것을 보시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하시고 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 무덤을 향해서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4).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죽은 나사로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수의를 입은 채로, 수건을 동여 맨 채로, 걸어나왔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시니까 죽은 나사로가,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가 살아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을 ‘열 문둥병자의 치료사건’을 통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유대인 아홉 명, 사마리아인 한 명.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주고 오라”(눅 17:14)고 했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여주니까 깨끗하게 치료받았습니다. 그때에 유대인 문둥병자 아홉 명은 문둥병만 치료받고 “가자! 세상으로!” 하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었던 문둥병자는 치료받은 모습을 보니까 너무 감격해서 “가자! 예수님께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러 가자!”고 돌아왔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5-17절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 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유대인 문둥병자 아홉 명은 문둥병만 치료받고 세상으로 가 버리고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문둥병을 치료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감사했더니 영혼까지 구원받은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은 자가 마땅히 취할 태도인 것입니다. 또 감사는 은혜를 받은 자가 보답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또 감사는 구원받은 자가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구약에서의 제사는 신약에서 예배입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또 감사로 예배로 드리면 주께서 구원받는 역사뿐 아니라 보이는 구원을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하고, 불치의 병을 치료해주고,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 그런 사랑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감사는 응답받는 기도 속에 들어갈 내용인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세상에서 힘든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2. 부모와 조상께 감사하자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며 수고하시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모는 누구를 통해서 나셨습니까? 조상을 통해서 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분들이 계심으로 인해서 육신을 얻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성어에도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부모님들의 손길과 희생, 피와 눈물과 땀이 없었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5천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모와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은 아름다운 예절이요,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나으신 은혜, 기르신 은혜, 돌보신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라서 어린 자녀에게 정성을 쏟을 때 부모님의 은혜를 그때서야 새삼 깨닫고 철이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면 부모 마음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병이 들었다든지, 좀 말썽을 부린다든지, 부모 마음을 괴롭게 하면 그때서야 ‘우리 아버지도, 우리 어머니도 이렇게 고생하셨지. 내가 그렇게 말썽을 부릴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하면서 부모님 마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감사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표시해야 합니다. 그냥 마음만 먹으면 안 됩니다.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또 형편이 허락되면 여행도 시켜 드리십시오. 이것이 정말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요,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이요, 이것이 효행인줄 믿습니다.
또한 조상의 선한 업적을 기리는 것도 아름다운 인간의 도리요,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이 됩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역사’와 ‘뿌리’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수많은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조들의 옳은 행실은 우리 삶의 방향을 지시해주고, 선조들의 잘못된 행실은 우리의 방향을 수정해줍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작은 나라인데도 세계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민족이 되었을까요? 그들은 조상과 역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조상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뿌리와 핵심이 되는 교훈을 언제나 존중해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신 6:1-3).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유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명령하셨습니다. “지키라.”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씀대로 살고, 이 말씀대로 교육받고, 이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과 1천 5백 명밖에 안 되는 민족 이 세계에 제일 영향력 있는 민족이 된 것입니다.
3. 가족에게 감사하자
추석은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민족 고유의 명절입니다. 많은 가족, 많은 친척이 있다는 자체가 즐거움이요, 위로요, 큰 행복이 됩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애정의 표시를 해야 합니다. 서로 감사의 표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서로 감사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귀히 여겨야 될 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또한 아내는 남편과 한 마음 한 뜻을 품고 사랑해야 될 것을 말씀합니다. 만약 나의 아내나 남편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내나 남편이 있음으로 해서 유익한 점을 찾아내고, 그것이 대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오늘 집에 가셔서 큰 백지를 꺼내놓으세요. 그리고 남편과 함께 펜을 잡고 서로가 주는 유익에 대해서 적어보십시오.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으면 외롭지 안잖아요? 서로 힘이 되잖아요? 서로 용기를 주잖아요?
그 뿐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감사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그들이 잘한 점을 자주 칭찬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또 자녀는 부모에게 늘 보은의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어떻게 하면 부모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부모님 마음의 근심을 덜어들일까?’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형제와 자매간에도 서로 감사해야 됩니다. 혼자 있다는 것은 편하기도 하지만 외로울 때가 더 많습니다. 형제나 자매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겁니다. 그들이 때로는 도움도 되고, 위로도 되고, 인생의 친밀한 상담자도 될 수 있습니다. 십년 전에 저보다 6살 적은 친동생이 심장병으로 천국을 갔습니다. 그 때는 정말 한 팔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허전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형제가 있다면 혹시 그 형이 나에게 도움을 못 주었다든지, 말썽꾸러기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형제간에 자매간에 서로서로 감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이웃에게 감사하자
이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농사도 함께 짓고, 마을의 문제를 함께 상의하면서 이웃 간에 서로 희생하고, 양보하고, 협력할 때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함께 품앗이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도 구역성도들끼리 서로 품앗이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같은 생활권에 이웃이 있다는 것, 교회에 같은 성도가 있다는 것, 같은 교역자, 동역자가 있다는 것뿐 아니라 직장에서 같은 동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냐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서 이웃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 무엇을 받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베풀어주는 삶을 살아봅시다.
사도행전 20장 3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웃을 만날 때마다 인사하고 항상 친절한 태도를 보여주는 삶, 불쌍한 이웃을 먼저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대가 있다면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언서 19장 17절에 보니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 나보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돌보아주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어려운 이웃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감사할 거리가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감사입니다. 왜 감사를 원하십니까? 왜 감사를 명하십니까?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는 추석명절을 맞이해서 정말로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와 조상께 감사하고, 가족들끼리 감사하고, 이웃 간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힘으로 되지 아니 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예수를 믿고, 구원을 확신을 얻으면, 기도해서 성령 충만하면, 창조주 하나님께도 감사할 수 있고, 부모와 조상께도 감사할 수 있고, 가족들끼리 서로서로 감사할 수 있고, 이웃끼리 성도끼리 동료끼리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번 추석이 정말로 감사가 회복되는,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는 축복의 명절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순복음인천교회 최성규 목사
/ 효도와 제사 (2)
정필도 목사(수영로교회)
(고전 10:20-22)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최근에는 미국의 테러사건과 세계경기의 침체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매우 무겁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금년에도 변함없이 이 남한 땅에 곡식과 과일이 넘쳐나는 대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백성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마음이 악해져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하나, 우리 성도들이 날마다 이 백성들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생각하고 간구하는 눈물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된 연고인줄 믿습니다. 특별히 ꡒ하나님 아버지! 이 백성들의 죄를 따라 진노하지 마시고 불쌍히 여겨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성도들 덕분에 이 나라 이 백성들이 이렇게 어려운 중에도 잘 살게 되는 줄 확신합니다.
금년 추석 명절에도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대략 3천만 명 이상 되리라고 정부에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 뵙고 평소에 만나지 못했던 친척 분들을 만나 음식을 나누며 지난 얘기들로 꽃을 피우는 참으로 즐겁고 흐뭇한 시간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모르는 부모 형제들이 죽은 조상 앞에 제사를 지냄으로 해서 본의 아니게 얼굴을 붉히게 되고 때로 큰소리가 나게 되며 급기야는 서로 씁쓸한 마음으로 헤어지게 되는... 명절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안타까운 일을 당하게 되니 참으로 고민이 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이번에는 우리 부모님, 우리 형제들이 모두 다 예수 믿게 해주세요. 전도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제사를 지내는 대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를 많이 해 오신 줄 압니다. 모두 다 예수님을 믿으므로 다 같이 찬양하고 기도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가 꼭 응답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저희 가정에서 가장 먼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핍박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사는 저희 집에, 어느 날 인가 먼 친척뻘 되시는 아저씨께서 저를 방 한구석에 앉히고 저 때문에 우리 집안이 망한다고 하시며, 예수 믿으려면 집을 나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빨래 다듬잇돌을 들어 저를 내리치실 기세로 이놈의 자식, 너 죽고 싶어. 이래도 정말 예수 믿을 거야? 라고 위협을 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겁주려고 하시는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설마 저를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저 자신은 죽어도 예수를 믿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무섭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런 엄청난 시련 이후 두 번째 시련이 왔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때였습니다. 장례식을 치를 때 모두 다 엎드려 절을 하는데 유독 저만 절을 하지 않다 보니 어른들의 눈에 제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저는 이 일로 인해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특별히 누구보다도 저를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시는 할머니로부터 ꡒ너는 내가 죽은 다음에도 절하지 않겠구나, 라고 하시며 너무 너무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돌아가신 분에게 절하면 알아요? 몰라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버럭 소리를 지르시며 죽은 사람이 어떻게 알아. 그래서 제가 절 안 하는 거예요. 살아 계시다면 하루에 열 번 백 번도 하지요. 마찬가지로 할머니 돌아가셔도 저는 절 안 할거 예요. 만약 할머니께서 그 일 때문에 억울하시고 섭섭하시다면 할머니 살아계실 때 열심히 절할 테니 미리 절 받으세요.ꡓ라고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가기 전에 할머니 방에 들려 할머니 미리 절 받으세요, 라고 큰절을 꾸벅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렇게 매일 매일 할머니에게 절을 하고 등교하는 일을 몇 달째 계속해서 하던 중에, 할머니께서 성령의 감동을 받으셨는지 어느 날 저를 보시고 그만해라 됐다. 나도 예수 믿을 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에게 효도를 다 해왔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할머니 방에 들려 팔다리를 주물러 들이고 간혹 눈깔사탕이라도 생기면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와서 할머니! 눈감으세요. 입 벌려보세요, 하고 할머니 입에 쏙 넣어드리곤 했습니다. 그런 손자의 모습이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이렇게 완고하시던 할머니께서도 열심히 교회 나오시다가 예수님을 잘 믿고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추석명절이 되면 죽은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목적은, 금년에도 농사가 풍년들게 해주신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대접하는 효도의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줄 압니다. 어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비춰지지만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추석명절의 문제점은?
1. 제사 문제
성경에서 제사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 앞에 범한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했습니다(창 4:3-5).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제사는 받으셨고 다른 한 사람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아니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기는 했으나 정성이 모자랐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곡식이든 과일이든 무엇을 드리든지 간에 첫 열매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첫 열매를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십의 일조]를 드려도 새 돈을 골라 먼저 구별하여 첫 열매로 드리고 나서, 그 나머지 [십의 구조]를 가지고 각자 필요한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것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열납하실 줄 믿습니다.
피 없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피 없는 제사는 속죄 받을 길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9:22절을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피의 제물을 드리지 않고 땅의 소산물로 제물을 삼아 드렸습니다.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인이 얼마 악독한 인간이었는지 요한일서 3:12절을 보면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악독한 인간이 하루에 제사를 열 번 백 번 드린다한들 우리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나 가인과 달리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성전에 모여 수천 명이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믿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나와 찬송을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피로 제사를 드리므로 해서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벨은 의로운 사람으로 자신과 그의 재물이 함께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번제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해와 달과 별을 섬기고 심지어 산이나 강이나 바다나 바위 고목들을 향해 절을 하고 제물을 바치고, 죽은 조상에게까지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사신우상을 섬기면 망하게 됩니다.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볼 때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믿음이 좋은 왕들은 언제나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축복을 받고 나라가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왕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종교를 따라 우상을 섬기므로 해서 저주를 받고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들은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도 돌아서면 또 죄를 지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려도 여전히 죄를 범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으니 어찌 보면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의 제사를 거듭하여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히 11:10-14, 17-18)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는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한 주간동안도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용서해달라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을 용서해달라는 구체적인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고 많은 이 세상에서 오늘 이 자리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오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그밖에 여러 가지 감사의 제목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과 교훈이 무엇인지 잘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사람의 말로 듣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내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죽은 자는 전혀 의식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아무리 절을 많이 해도 먹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죽은 자에게 제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귀신을 섬기고 제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노 받을 크나큰 죄악입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시 106:28-29)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이 말씀은 민수기 25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다가 싯딤에 머물렀을 때 모압 여자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그들의 제사음식을 먹고 그들과 같이 바알세불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을 격노케 만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여 2만 4천명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염병에 걸려죽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2. 효도 문제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이 과연 효도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효도는 살아계신 부모께 하는 것입니다. 참된 효도는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몸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해도 어머니 아버지 감사해요. 이렇게 키워주신 은혜 감사해요, 라고 늘 감사를 표하고, 부모님 덕분에 성공했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이렇게 잘 삽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은덕을 높여드리면 우리 부모님께서 얼마나 흐뭇해하시겠습니까? 음식을 해도 부모님의 입맛에 맞게 정성껏 만들어 드리고, 또 부모님이 우리를 키우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십일조를 드리듯이 어머니 아버지 두 분에게도 십일조를 나누어 드려보세요. 아마 자식 키운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참된 효도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효도가 산 효도요 실제적인 효도이며 참 효도입니다. 이방종교의 효도는 죽은 효도요, 형식적인 효도이며 거짓 효도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추석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대신 고인을 추모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추모예배를 드릴 때, 이렇게 훌륭한 부모를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추모의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조상의 빛나는 업적과 유덕과 유훈을 되새기며 그대로 살지 못한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그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갑절의 효도를 해드리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형제와 친척 간에 서로 사랑하며 우애 있게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서 천국에서 면류관 쓰고 다 같이 만나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은 비록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자신의 형제들만은 이곳에 오면 안 된다고 안타까워하며, 천사를 그들에게 보내 이곳 사정을 알 수 있도록 부탁한 것같이 지옥에 가신 부모님이라도 이 마음을 가지고 계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추모 예배를 드릴 때 믿음생활 잘하다가 면류관 쓰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덕을 세워서 존경받고, 후손들에게는 좋은 본을 보이며, 날마다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축복을 나누어주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나오미의 귀향 (3)
(룻기 1:19-22)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고향! 듣기만 하여도 정겹고, 생각만 해도 푸근한 말입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추석 명절이 다가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아, 친족을 찾아 이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는 열심은 대단합니다. 아마 세계에서 2등가라면 서러워할 겁니다. ‘귀성 전쟁’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고향길이 고생길이지만, 기어코 고향을 찾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우리 민족인 것입니다. 이따금 고향을 너무 따져서 부작용도 있지만 어쨌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재미 교포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 LA에 고향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작은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 모습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교회 이름은 '언제나 그리운 고향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고향에 대해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른 생각해 봐도 우리에게는 고향 노래가 유난히 많습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부르던 노래 중 오래도록 생각나는 것들도 대충 고향 노래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 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고향의 봄, 홍난파 작),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을 눈에 어리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가고파, 이은상 시/김동진 곡) 모두 다 한국인의 심령 깊숙이 스며있는 노래들입니다.
이렇게 그립고 좋은 고향이기에 모든 이들이 고향을 찾는 것입니다. 특히 흥미롭고 주목할 것이 있는데... 여러분, 언제 우리가 고향 생각을 많이 합니까? 이런 명절말고 괴로울 때, 병들었을 때, 늙어졌을 때 고향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또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종국에는 그 육신이 고향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독 한국인만의 정서는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귀소본능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육신의 고향이 그렇게 소중한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이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 안타까운 그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영적 실향민’은 정말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영혼의 고향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하나님 품’, 그리고 장차 돌아갈 ‘하나님 나라’입니다. 전도서 12장 7절에 “흙(육신)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히브리서 11장 13-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아브라함, 믿음의 조상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비록 고향을 떠나 있지만 항상 마음에 고향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넉넉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가 멀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하늘나라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 하나님이 비록 눈에 확연하게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영혼에 풍성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이 바로 그런 것이죠. 하나님을, 하늘나라를 영혼의 고향 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영혼의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만한 사르트르는 살아생전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갈파했지만, 막상 임종 시에는 자신에게 영혼의 고향이 없는 것은 한탄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아, 아, 나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구나!”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 각자 내 영혼의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에게는 그리워하는, 그리고 푸근한 영혼의 고향이 있는가? 내가 장차 돌아갈 영혼의 고향이 있는가?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고향을 잃었다가 되찾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나오미입니다. 이 사람을 통해 영혼의 고향이 얼마나 소중한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영혼의 고향을 다시 한 번 발견하시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고향을 등진 나오미 가족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읍의 유지로서 비교적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흉년은 자연 재해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당시 사사 시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신을 섬기고 제멋대로 살던 영적, 도덕적 암흑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자연 재해나 전쟁 등을 통해 징계를 하시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징계를 회피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갑니다. 이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게 문제입니다.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서 당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고향을 등지고 떠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그 땅에 머물고 그 땅을 지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땅을 떠나는 것은 종종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는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더욱 모압 땅에 가서 이방 며느리를 본 것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방 결혼을 금한 이유는 전적으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고향을 떠난 것은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요, 신앙의 변질이었던 것입니다.
타향에서 환란 당한 나오미 가족
모압 땅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도 연달아 죽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두 자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10여 년 만에 완전히 파산한 것입니다. 가족 다 잃고, 있던 재산 다 잃어버린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다 이렇습니다. 자기 혼자서 잘 살아갈 것 같지만 결국은 영적 파산자가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큰 소리 쳐도 하나님을 떠나서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영적 타향살이에는 뭔가 문제가 생깁니다. 종국에는 멸망하게 됩니다. 환란을 당한 나오미 가족의 이야기는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해 줍니다.
고향을 되찾은 나오미
나오미는 다행히 환란을 당한 후에 그동안 잊었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기억했습니다. 마침 고향 소식을 들었는데(6절), 그곳에 흉년이 그치고 풍년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참았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생겼을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은 항상 평탄하지만은 않음을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환란도, 고통도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다 회복시켜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롬 8:28, 갈 6:9). 그런데 그걸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세상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등지면 반드시 화가 있습니다. 피하려고 하던 환란과 고통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나오미가 그랬던 것입니다.
늦게나마 그녀는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염치없고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조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단합니다. 그녀의 결단과 귀향 과정이 6절 이하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아가려 하여 ...”(6절), “... 돌아오려고 길을 떠나 ...”(7절), “이에 그 두 사람(나오미, 룻)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 ...”(19절).
나오미의 이런 결단은 분명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였습니다. 그녀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뭐라고 말합니까? 자기를 ‘나오미’(희락, 기쁨)라고 부르지 말고, 이제는 ‘마라’(괴로움, 쓴맛)로 부르라는 것입니다(20절).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 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겸손히 고백합니다(21절). 그녀는 고향 땅에 돌아온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영적인 고향인 하나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귀향한 나오미의 축복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오자 하나님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부끄러워서 겨우 왔는데 고향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이합니다(19절). 또 마침 돌아온 시기가 언제였나요? 보리 추수기(니산월, 양력 3-4월)였습니다(22절). 이스라엘의 율법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삭을 다 베지 않고 남기기 때문에 그것만 주워도 충분히 먹고 삽니다. 살 길이 열린 겁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룻이 찾아간 곳이 묘하게도 나오미 가문을 위해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기업 무른다는 것은 어떤 가문이 망하면 제일 가까운 친족이 책임지는 관습입니다. 후손이 없으면 남은 여인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주고, 재산도 보상해 줍니다. 보아스는 마침 신앙이 좋은 부자여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결국 룻과 보아스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때 나오미가 맛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룻 4:16-17). 씨가 마른 가문에 아들이 생겼습니다. 노년에 자기가 낳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 쓰러진 가문이 일어섭니다. 특히 그 후손 가운데 다윗 왕이 나고, 그리스도가 납니다. 온 동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는 나오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 고향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육신의 고향도 좋지만 영혼의 고향은 더욱 좋은 것입니다. 나오미가 회개하고 영혼의 고향인 하나님께로 돌아오니까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이 놀라운 축복의 사건은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의 ‘탕자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잘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재산 탕진하고 돼지 치고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때 비로소 아버지 집(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회개하고 돌아갑니다. 여러분, 그때 아버지가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동구 밖에 매일 나가 기다리던 아버지가 멀리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얼싸안고 입을 맞춥니다. 가락지를 끼워 주고 새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즐거워합니다(눅 15:20, 22-24). 탕자가 다른 것은 다 잘못했지만 단 한 가지 잘한 게 있는데,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비참에 빠졌던 나오미가 할 수 있었고, 해야 되었던 것은 오직 하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초라하고 부끄럽지만, 면목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돌아온 것 그 한 가지만 보시고 그녀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최선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 생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영혼의 고향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고향이 있습니다. 육신의 고향, 그리고 영혼의 고향입니다. 영혼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잘 살아 보겠다고 방황하면서 지은 모든 죄를 십자가 피로 대속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고향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므로 여러분, 영혼의 고향 하나님 품 안에 안기십시오! 매일 매일.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참 기쁨과 평안을 맛보십시오. 누리십시오. 때로는 인생이 힘들고 피곤할지라도 하나님품 안에 안기면 또 다시 위로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 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언젠가 우리의 인생이 다하는 그 날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먼 것 같지만, 한 시 앞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 예수님 손을 잡고 우리는 영원한 고향에 갈 겁니다. 하늘나라! 그곳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것입니다.
추석 명절!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찾아보는 계절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영혼의 고향에 관한 깊은 묵상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함께 모인 가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가족들이 영혼의 고향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참 기쁨과 소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행을 등진 나오미가 아니라 고행을 찾아 귀향한 나오미의 복된 모습으로 내내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죽음 앞에 선 인생 (4)
(왕상 2:1-4)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단 한 번뿐인 인생
어떤 사람이 병중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노크도 없이 문이 슬며시 열리면서 어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섰습니다. “당신 누구요?” 환자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나는 죽음이다. 너를 데리러 왔다. 일어나 나와 같이 가자.” 죽음은 검은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닙니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환자는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왜? 내가 무서우냐? 소원이라면 더 기다리지... 그리고 이다음에 올 때에는 네가 놀라지 않도록 먼저 사신을 보내마...” 말이 끝나자마자 죽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환자는 다시 건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슬픈 일을 당하고 사업 실패도 맛보고 고통도 많이 맛보고 또 다시 앓아눕기도 하며 사는 동안 그는 꼬부랑 노인이 되었습니다. 침상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언젠가 만난 검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죽음이란 분이 아니십니까?” “오냐, 그렇다.” “왜 기별 없이 오셨습니까? 먼저 사신을 보내고 그 다음에 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아,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그 동안 여러 번 사신을 보내지 않았는가? 슬픔도 보내고 고통도 보내고, 나중에는 노쇠까지 보내지 않았는가? 그게 다 사신일세.” 그 사람은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따라가고야 말았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히브리 기자의 이 말은 대체로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인생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영원한 내세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이 세상의 삶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죽음, 축복 중의 축복
원래 죽음은 죄 값이었습니다(롬 6:23). 이렇듯 저주와 형벌의 대상이었던 죽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리어 축복과 영생의 관문이 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롬 8:2). 그러므로 전도서 기자는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한 것입니다(전 7:1). 과거 우리가 율법 하에 있을 때 죽음은 확실히 우리에게 저주였습니다. 형벌이었습니다.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해서 얻어진 해방으로 인해서(롬 8:2) 죽음은 영광의 세계, 천국으로 가는 관문이 된 것입니다.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죽음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자매 죽음을 인하여 / 주를 찬양할찌라. / 죽음에서 피할 수 없음은 / 축복 중의 축복이니 / 두 번째 죽음이 우리를 해치 못하리라 /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자여 / 그대에게 축복이 있으리라.” 프란체스코의 이 시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초월한 자이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저주와 형벌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은 저주도 형벌도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프란체스코처럼, 죽음을 일컬어 나의 자매요, 축복 중의 축복이라 일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하여 무기력하던 과거와는 달리, 죽음이 우리에게 무력하게 된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일컬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선언합니다(요일 3:14).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를 괴롭히던 사망을 향하여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고 선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잘 죽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말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을 도리어 영원한 천국의 관문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 삶이 죽음 이후에 찾아 올 내세 천국 생활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줍니다. “사람이 왜 죽는가 하는 물음은 곧 사람이 왜 사는가 하는 물음과 직결 된다”고 한 시인 박두진 선생의 말 역시 이와 궤를 같이 하는 말입니다.
다윗의 유언을 통한 교훈
그리스도인은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성군 다윗이 죽음에 임박하여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술이나 국가 간의 외교관계의 비법을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자는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바로 죽기 위해서 바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폴란드 격언에 “죽은 자의 유언은 그의 일생의 거울이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다윗이 남긴 마지막 유언 역시 그의 지나온 일생을 담고 있기에 값진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은 무엇입니까? 이를 통하여 죽음을 바로 준비하는 삶의 지혜를 배우고자 합니다.
1. 죽음을 인식하라
먼저 다윗은 죽음의 일반성에 대해서 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봅시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여기서 다윗이 말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이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성군 다윗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죽음의 일반성과 보편성을 알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지혜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라고 한 히브리기자의 말씀처럼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반적인 재난입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사람과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젠가 사람은 한 번 죽는다고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죽음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오는 죽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서 자신이 누리는 세상 즐거움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여 허랑 방탕하게 삽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통과해야하는 관문입니다. 죽음은 선택사양이 아니라 필수사양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인생의 필수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준비도 없이, 예고도 없이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죽음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므로 잘 죽기 위하여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된 우리들은 한정된 이 세상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듯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처럼 막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히브리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의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히 11:16).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고 말한 것처럼 위엣 것을 찾는 생활입니다(골 3:1-2).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을 완전히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배가 물 위에 있으나 물이 배 안에 들어오지 못하듯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면서도 이 세상 죄악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잠식치 못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쾌락과 즐거움에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2. 용기를 가지라
그러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다윗은 본문 2절 말씀에서 아들 솔로몬에게 이 세상사는 법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다윗의 많은 아들 가운데 솔로몬은 압살롬이나 아도니야처럼 건장하고 강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이 잠언 4장 13절에서 자기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유약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양친으로부터 항상 염려와 근심의 대상이 되었던 약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하였기에 다윗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 어린것이 어떻게 이 나라를 이끌어 갈꼬?”
그리하여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아들 솔로몬을 향한 다윗의 이 당부의 말은 “너는 남자처럼 강하게 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이렇듯 다윗은 자신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려 나갈 막중한 사명을 짊어진 아들 솔로몬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 되는 통치자의 자질이 대장부가 되는 것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옳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대장부처럼 강해야 합니다. 이 세상 죄악과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유약한 존재가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려면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목전에 둔 모세 역시 이와 같은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유언한 것입니다(신 31:6-7). 유약한 심경으로는 죄와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결국 이세벨의 군사에게 쫓기다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처럼 절망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왕상 19:3-4).
연약한 상태로 세상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 부모의 심정처럼 우리가 강한 대장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 16:13)고 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실패, 불행과 낙담에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 바로 삶에 대한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대장부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이며(고전 1:25) 바로 그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7).
3.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해지라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말씀은 때로 찌르는 채찍처럼(전 12:11) 강합니다. 본문 2절 말씀에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며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그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 된 대로 지키라”
말씀의 강한 능력을 체험하며 산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실천함으로써 강하신 하나님에게 붙들려 위대한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어 강대한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마음 속, 생활 속에 있었던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이토록 강하게 하고 힘있게 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들 솔로몬이 지켜 대장부처럼 살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생활에는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 촌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을 일국의 왕 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온전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말씀을 읽는 것,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 말씀대로 사는 것은 능력의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향해 일하시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유익이 됩니다. 정치가가 지키면 통치력을 키울 수 있고, 사업가가 지키면 사업이 윤택해지고, 학자가 지키면 학식이 더하여 집니다. 이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요 1:1, 14).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 죽기 위하여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솔로몬에게 주신 다윗의 교훈처럼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잘 죽는 길이며 죽음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고 상급 받는 길입니다.
왕성교회 길자연 목사
/ 허무한 인생의 고백 (5)
(시 39:4-12)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전 2:17-23)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우리는 추석 명절을 지내면서 고향을 찾아가기도 하고 조상의 무덤을 찾아서 성묘를 하기도 합니다. 추석 명절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는 감회는 인생의 허무와 무상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든지 생존해 계신다 하더라도 살아계신 모습을 보면서 인생이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허무한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윗은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한 시를 우리에게 썼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살려면 세 가지를 알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종말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종말은 죽는 날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날, 이 세상을 떠나는 날입니다. 반드시 사람은 죽는 날이 옵니다. 자기 죽음을 알고 산다는 것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죽음을 압니다. “언젠가 나는 이 세상을 떠난다.” 이것을 알게 되면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둘째로 자기 나이를 알아야 합니다. ‘연한의 어떠함’은 나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더 살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나의 사는 날을 알려주소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는 날은 짧습니다. 얼마쯤 살았으며 또 얼마나 살 것인가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사는 날을 헤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와 미래에 살아갈 날들을 헤아려보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셋째는 나의 연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연약함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 5-6절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5-6절).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 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살아있는 사람일지라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으니 걸어다닌다 하지만 그 한평생이 실로 한 오라기 그림자일 뿐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이니 장차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다 그림자 같은 것이고 우리의 사는 날은 한 뼘 짧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잘 묘사한 솔로몬 왕은 인생의 헛됨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바람을 잡는다’는 말은 전도서에 열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 바람을 손에 잡을 수 있습니까? 못 잡습니다. 바람을 잡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되게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윗 왕의 아들로 인간의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린 사람입니다.
그는 눈으로 본 것을 가졌으며, 입으로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었으며, 몸에 입고 싶은 옷은 다 입어봤습니다. 그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졌습니다. 인생으로서 그의 영화는 전무후무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생의 향락을 누려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말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2-4)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왜 해 아래서 사는 동안 인간의 하는 모든 일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먼저 인생이 바람처럼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5절). 이것은 인생의 짧음과 허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세월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9-10).
실로 인생은 사는 날이 짧습니다. 덧없이 갈 뿐입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내 청춘 누구 주고 뉘 백발 가져온고 백발이 오고가는 길 알았던들 막을 것을 알고도 못 막는 길이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야고보 사도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내가 내 생명을 말기를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같이 하였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치리이다”(사 38:12)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선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6-8).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우리 인생의 한 때 아름다움은 들의 꽃처럼 시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실감합니다. 한 때 아름다웠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쉬 늙어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바람처럼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사람마다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인생 자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시 90:3-5)
이 세상 어느 것도 든든한 것이 없습니다. 지진이 나면 빌딩도 무너집니다. 정권도 무너집니다. 때가 되면 청춘도 내놓아야 하고 건강도 무너집니다. 명예도 빼앗깁니다.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억척스레 모은 재물도 결국은 내 손에서 떠납니다. 돈을 모으는 것은 욕심일 뿐이지 누가 가져가든지 가져갑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벌어서 모으고 또 모았다가 사기꾼 말에 속아서 다 빼앗기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버느라고 과로해서 그만 병들어서 병원에서 다 빼앗깁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모아서 평생에 쓰지 못하고 간직했다가 죽으면 자식에게 빼앗깁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 5:10-11)
솔로몬처럼 영광을 다 누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것이 잘 산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 1:8). 눈으로 보아서 만족한 것이 있습니까, 귀로 들어서 만족한 것이 있습니까? 눈으로 보아서 만족한 것이 없고 귀로 들어서 만족한 것이 없습니다. 예쁜 여자라고 다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람난 남편들을 보면 거의 다 부인이 미인입니다. 또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싶어 세계 일주를 하지만 이 세상 어느 곳을 가봐도 결론은 그것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느 것 하나 만족할 수 없습니다. 바람 잡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것을 바꾸어 살아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바꾸어 타도 그것이 그것입니다. 옷을 바꾸어 입어도 그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자리를 바꾸어 올라가도 그것이 그것입니다. 훈장 바꾸어 달아도 그것이 그것입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이것은 다시 말하면 “그러나 나의 주여 이제 무엇을 바라고 살리이까 당신 외에 또 누구를 믿으리이까?” 이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이 가지고 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돈으로 옷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양은 돈으로 못 삽니다. 돈으로 음식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밥맛은 돈으로 못 삽니다. 돈으로 책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력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약은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침대는 돈으로 살 수 있으나 잠은 돈으로 못 삽니다. 돈으로 물건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세계 일주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천국은 못 갑니다.
돈이 없으면 조금 불편할 뿐입니다. 좁은 집에 살면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어디에 살든지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늘의 행복을 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직 인생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은 모두 목마른 존재입니다. 헛된 일에 헤매다가 목마르고 갈증 나고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헤매다가 죽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터진 웅덩이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심령이 터졌습니다. 죄로 터졌습니다. 욕심으로 터졌습니다.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집어넣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파스칼은 “우리 중심에 한 공백을 두었나니 그 공백에 하나님이 계실 때까지 인간은 만족할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심의 한 공백은 하나님이 앉을 자리입니다. 아무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공허할 뿐입니다. 주 안에서 예수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으로 만족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주는 은혜로 만족해야 합니다. 살아도 예수 안에서 살고, 죽어도 예수 안에서 죽고, 먹어도 예수요, 잠을 자도 예수요, 예수님이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하늘을 우러러 보기만 해도 내 가슴이 하늘로 채워지고 내가 길을 걸을 때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자만이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를 만족시킨 것이 이 세상에 있던가요? 살아오면서 무엇으로 만족했습니까? 아무 것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더 이상 속지 말고, 마음을 이 세상에 빼앗기지 말고, 내 마음을 예수께 빼앗겨 예수로 만족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예수에게서 찾아야 됩니다.
20대, 30대까지는 눈으로 보는 세계를 즐기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춘기라고 말합니다. 사춘기는 봄을 생각하는 때입니다. 그때는 인생이 눈으로 보고 남이 가진 것 나도 갖고 싶고 남이 보는 것 나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40대부터는 사춘기입니다. 사춘기 인생은 가을을 생각하는 때입니다. 가을에는 아름다운 꽃이 없습니다. 그때는 열매가 가치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이가 40이 넘어갑니까? 이제는 자기 삶의 의미를 맛보아야 됩니다. 40이 넘은 사람이 꽃을 따라 다니면 불쌍한 것입니다. 그래서 40이 넘어서 바람나면 추합니다. 40대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빅터 프랭클린의 단편 소설 중에 <곡예사의 헌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난쟁이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이 난쟁이가 거꾸로 서서 공을 돌리고 접시를 돌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돈을 던져 주어서 그것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그나마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쌍히 여긴 신부님이 성당에 데려다가 심부름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난쟁이가 성당에 온 뒤로부터 차츰 차츰 얼굴에 생기를 잃어갔습니다. 그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미사를 드리면서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가진 재능을 가지고 주님께 드리는 자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다.”
그때 난쟁이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거꾸로 서서 공 굴리는 것 밖에 없는데, 접시를 돌리는 것 밖에 없는데 이것이라도 주님께 드리자.” 밝은 낮에 드리자니 창피해서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성모 마리아상 앞에 가서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발가락으로 접시를 돌리고, 자기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재주를 부렸습니다. 난쟁이는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주를 부렸습니다. 이 일을 매일 매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난쟁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삶에 보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청소부가 성당에 가서 청소를 하려고 하는데 난쟁이가 거룩한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신부님에게 달려갔습니다. 청소부의 얘기를 들은 신부님이 사실을 확인하려고 새벽에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난쟁이가 무릎을 꿇고 “성도 마리아님, 제가 가진 재주는 이것뿐이옵니다” 하면서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며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쇼를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신부님이 혼을 내려고 가는 순간 성모 마리아가 내려오더니 무릎을 굽혀 한쪽 손으로 그 곡예사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대가 나를 기쁘게 했노라. 그대 땀을 내가 받았노라. 그대 눈물을 받았노라. 그대의 재능을 내가 받았노라” 하고 말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신부님이 무릎을 꿇고 “오, 주시여. 나도 저 난쟁이와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땀을 쏟아 주께 드릴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말했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주님을 위해서 땀 흘려 보았느냐, 마음을 바쳤느냐, 너는 나를 위해 무슨 일로 최선을 다했느냐?” 혹시 한 번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눈물을 쏟은 적이 있습니까? 한 맺혀 울던 때는 있었겠죠. 서러워 울었던 때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격해서 가슴에서 눈물을 쏟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게 있는 것을 아낌없이 쏟아 바쳐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내가 죽고 싶은 감동이 오는 때가 있습니까? ‘내가 순교해야지’ 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때가 있습니까? 날마다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어느 한 순간만이라도 그럴 때가 있어야 합니다.
눈물을 쏟아 주님께 드려지는 마음, 땀을 쏟아 바치는 그 마음, 내게 있는 재산을 가지고 한번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쏟아내는 그 손길이 있을 때 주님이 ‘아, 그대가 바람을 잡으려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성령의 바람을 탔구나!’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바람을 잡아 흔들리는 사람되지 말고 내 속에서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 그 바람 타고 그 바람으로 살고 그 바람으로 능력을 얻어 주께로 나아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우리의 사는 날은 길지 않습니다. 분명히 종말을 알아야 됩니다. 연약함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대해 물을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바람 따라 산다 말하지만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바람 따라 가야 합니다. 이번 추석에도 이러한 은혜의 감격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
/ 모세의 죽음과 교훈 (7)
(신 34:1-8)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마ᄎ도록(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열두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갑자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는데,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경이롭고 좋았든지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저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5절)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인물로,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엘리야는 한번의 기도로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심한 기근이 오게 했고, 다시 기도하자 3년 반만에 비가 내리도록 했습니다. 엘리야도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하늘 문을 닫기도 하고 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850명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임을 확실히 증거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려 올라가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승천했습니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가 나이 많아졌을 때 구스 여인 다시 말해서 피부 빛이 검은 에디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그의 누이 미리암과 형인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더니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6-8절)고 하시며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셨습니다. 그 결과 미리암이 그 자리에서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선지자들은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이상을 통해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세만은 하나님과 면전에서 말씀을 주고받을 정도로 특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출애굽기 4장 16절과 7장 1절을 보면,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은 최강대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모세를 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안수했더니 지혜의 신이 충만하여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모세는 하나님이 높이시고 큰 능력을 주셔서 사용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과정을 통해 모세가 애굽 왕 바로 앞에서 행한 큰 기사와 이적과 권능과 위엄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한 선지자였지만 왠일인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를 불러 가셨습니다.
모세의 죽음을 통한 두 가지 교훈
1. 율법으로 구원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100% 다 지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인간으로서 전혀 죄를 범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고 한 것입니다(전 7: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지 아니하셨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요 14:6).
2. 예배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본문 6절을 보면, 모세가 죽어 모압 땅 어느 골짜기에 장사되었으나 후세에 모세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30일 동안 애곡하는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을 것이며, 그의 묘 또한 대단히 웅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의 묘를 흔적도 없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평소에 모세를 신과 같이 생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시 모세의 묘지에 찾아가 제사를 지내고 죽은 모세를 숭배하게 될까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제사를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훌륭해도 인간이지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신의 존재가 아닙니다. 신과 같은 행세를 하며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도적질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며 심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사도행전 12장 21-23절을 보면, 악독한 왕 헤롯이 하나님과 같은 행세를 했습니다. 헤롯이 어느 날 왕복을 입고 백성들 앞에 나아가 한 마디 교훈을 했습니다. 이 때 아첨하는 무리들이 이는 신의 소리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그를 치켜세웠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어깨가 으쓱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했습니다. 주의 사자가 그 자리에서 그를 치니 충(蟲)이 먹어 죽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충이 먹었을까요?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여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뇌염모기에게 물리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헤롯이 벌레로 인해 죽은 것은 네가 하나님처럼 행세하고 큰소리 치지만 너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에 가서 전도할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얼마나 말씀을 잘 듣는지 사도 바울이 그를 자세히 보니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를 향하여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행 14:10)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뛰어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사람들이 놀라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하며, 신당의 제사장들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겠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지요. 이에 바나바와 바울은 앞서 말한 헤롯처럼 신으로 행사하지 않고 오히려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가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행 14:15)고 소리 지르며 겨우 사람들을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 지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인간이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성찬 예식에도 참여하여 떡과 잔을 받고 제사 지내는 사람들 집에 가서 그곳에서도 떡과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이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20-21절)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주었습니다. 제사는 오직 하나님께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제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명목으로 죽은 조상들을 위해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효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문제입니다. 효도는 부모님 살아계실 때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아무리 천 번 만 번 제사를 잘 지내면 무엇합니까? 부모님이 오셔서 떡을 잡수십니까, 물 한 잔을 드시기라도 하십니까? 이 세상을 떠난 조상들에게 제사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 믿기 전에 조상들에게 제사 지내온 사람들이 갑자기 제사를 안 지내니 허전하고 뭔가 섭섭한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 날에 맞추어 음식을 준비하고 대신 추도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추도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좋고, 온 가족이 모여 찬송을 하고 말씀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뜻 깊은 추도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1. 유훈
고인의 유훈을 되새기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렇게 훌륭한 분이셨고, 살아계실 때 이런 말씀을 늘 하셨다고 자손들에게 알려주면서 우리도 그분들이 말씀하신 교훈을 따라 살자고 다짐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2. 효도
남아있는 어른들에게 효도하기로 결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는 효도할 길이 없으므로 이제 남아 있는 분에게 갑절의 효도를 하기로 결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3. 형제우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님께 용돈을 많이 드리고 잘 지내시도록 효도를 한들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울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잡수시는 밥이 마치 모래알 씹는 것 같고 조금도 마음이 기쁘지 않으실 것입니다.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우애있게 사는 것이 진짜 효도입니다.
4. 신앙생활
천국에 가서 모두 다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하기로 결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한 사람도 지옥에 가는 사람 없이 모두가 천국에서 만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복을 받으며 살기로 결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4가지를 결심하며 갖는 추도예배라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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