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9. 00:36ㆍ목양자료/5.절기자료
[주일낮예배 설교(11.04.17)]
/ 고난주간에 묵상해야 할 사건들(1)
(박한응(朴漢應) 목사)
(마 21:1-11, 26:36-46)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다 같이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주간에 묵상해야 할 사건들』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은 이 제목으로 낮 시간과 밤 시간까지 두 시간에 걸쳐 연속으로 말씀을 증거 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은혜를 사모하여 충만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종려주일을 ‘성지 주일’ 혹은 ‘사죄 주일’ 이라고도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말에 만세 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또 종려나무는 키가 약20여m나 되는데 관상수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구약 아가서 7:7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키와 유방을 가르쳐 종려나무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은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 도시라고도 하고 가톨릭교에서는 종려나무를 성별 하여 성수(聖樹)라고도 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 보면 겟세마네 동산 건너편에 황금의 문(Golden Gate)이 있습니다. 아치형으로 된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이 문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오실 때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들도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 10:40-41)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해 버린 세리와 창기들과 억눌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식사도 같이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배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도둑놈을 영접하여 도둑놈과 같이 어울려 논다면 그 사람은 분명 도둑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량배와 같이 어울려 놀게 되면 십중팔구는 분명 불량배가 될 것입니다. 사기꾼을 영접하면 사기꾼이 됩니다. 간첩을 영접하면 간첩이 됩니다. 노름꾼을 영접하면 노름꾼이 됩니다. 사탄 마귀를 영접하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 1:11-12)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오늘 우리들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배척하는 자가 되지 않고 중심으로 뜨겁게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는 벌써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고 책잡으려는 무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그래도 뜨겁게 환영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부터 한 주간 동안 숨 가쁘게 전개되었던 사건들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고난주간에 이루어지는 사건들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21장부터, 마가복음에서는 11장부터, 누가복음에서는 19장부터, 요한복음은 12장에서부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고난주간에 일어난 사건 중에 가장 먼저 시작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하여 나귀 새끼를 제공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 21:I-9)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전쟁에서는 말을 타고 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말을 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의 농촌에서는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는 나귀가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 BC 520년에 예언자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벳바게 맞은편 마을 베다니로 보내시면서 마을 어귀에 매인 나귀가 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마을로 내려가 보니 정말 나귀가 매여 있습니다. 그 매인 나귀를 풀자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쓰실 것입니다” 라고 하자 이 나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선 듯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 이 말에 선뜻 내어준 것을 보면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나귀의 주인은 고이 길러서 한 번도 타보지도 않고, 부려보지도 않고, 짐을 실어보지도 않은 나귀를 주님께 제공해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큰 교훈은 주님의 필요에 한 인간이 순응했다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의 소유권 문제나 다른 문제는 개의치 않고 바로 나귀를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자신의 아들을 바침으로 그의 신앙은 위대한 신앙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한 말씀 중에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강하게 부딪쳐 옵니다. 벳바게 맞은편 마을의 한 무명의 사람은 예수님과 사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서슴지 않고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무리들이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다 펴고 앞서고 뒤따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지상 최고 승리의 입성을 장식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렸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우리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이 나귀를 드린 사람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드리고 있습니까? 진정 고마운 사람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드려도 그저 늘 아쉽고 부족한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속의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어서 항상 하나님께 인색하기만 합니다. 눅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새 옷과 새신, 그리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까지 하였습니다. 진정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다면 무엇이든지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이 시간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내 마음에, 내 가정에, 그리고 우리교회에 입성하십니다. 그 주님을 이 시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2.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막14:3-9)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죄 많은 한 여인이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그의 장사를 준비하였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주님의 사랑 받은 우리도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념될 만한 아름다운 감사와 믿음의 행함이 있는 축복의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믿음의 큰일은 못해도 단 한 끼씩만이라도 금식하여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리처즈 목사님은 토인들에게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하루 10절씩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누가복음 6장30절-31절 말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을 건너뛰고 가르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에 가책이 와서 다시 그대로 가르치니까 보는 것마다 있는 것마다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요구하는 대로 다 주니까 나중에는 그곳 주민들이 크게 감동을 받아 그것을 도로 가져다가 주면서 당신은 참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그때부터 더욱 따르더라는 것입니다.
3. 고난주간에 처음으로 성만찬 예식이 시작된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26:17-29)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 이르자 제자 중에 두 명을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 하니라”(막 14:13-16)
성내에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던 한 여인은 예수님을 위하여 다락방을 제공하고 또 만찬을 예비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고 탄식하신 예수님께 큰 다락방을 제공하여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지상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그의 몸과 언약의 피를 기념하는 예식을 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다락방은 그 후 120명의 문도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곳이 되기도 하였고, 베드로가 잡혀갔을 때 성도들이 모여 열심히 기도하여 베드로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나올 수 있게 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행 12:12)
그 후부터 예수님의 부탁대로 고난주간에는 교회마다 이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이번 주 목요일 밤에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 거룩한 성만찬 예식을 행할 때마다 속죄와 은혜와 치료가 넘치는 은사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그러면서 다락방을 제공해 드린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림으로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여인의 회생처럼은 못하더라도, 집을 팔아 주님께 다락방을 제공해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땅을 사서 예수님의 무덤을 만들어 드리지 못해도, 우리의 빈 마음을 열어드리므로 내 속에 주님을 모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동족에 감람산이 있고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아주 오랜 감람나무들이 여러 그루가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오래 되었다고 전해지는 나무가 있는데 그 감람나무를 "애통의 나무" 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 나무 옆에는 기념예배당이 있고 그 안에는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가 바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엎드려 기도하신 바위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성지순례 때에 이곳에 가서 그 바위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그만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서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겟세마네란 이름의 뜻은 "기름 짜는 틀"이란 뜻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여기서 자기 몸의 진액을 짜시며 기도하심으로 우리들은 이 겟세마네 동산을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중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셔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몇 시간 후면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실 주님! 그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심혈을 기울인 최후의 기도였습니다.
눅 22: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피와 땀을 흘리시며 하신 기도는「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토록 주님이 피 흘리시며 기도하신 것이 자신의 소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기도였기에 오늘의 우리들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그 어떤 성현들이, 또 위인들이, 종교가들이, 이와 같은 기도를 한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동산을 자주 찾으셨습니다.(눅 22:39-46) 그러므로 가룟 유다도 이곳을 알고 있었습니다(요 18:1-2) 우리는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고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마 26:36-38)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이는 진실로 주님께서 최대의 비통함을 고백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 후 십자가에 달리신 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라고 부르짖으신 바 이 비통의 부르짖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고백과 같은 비통을 하나님 아버지께 고백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을 묘사할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를 올렸다" (히5:7) 라고 기록했습니다.
(2)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엎드려 기도 하셨습니다.(마 26:39, 42-44)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신 사실에 대하여는 공관 복음이 다 취급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가 엎드려 기도하였다고 하였고(막 14:35) 누가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고 기록하였고(눅 22:41) 오늘 본문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다 정성을 드려 간절히 그리고 겸손히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5.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하실 때 제자 여덟 명은 산 아래에 두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명의 제자만을 대동하시고 올라가 돌 하나 던질 만큼 떨어져 기도하셨습니다.
(눅 22:41-43)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가룟유다는 떠나가고 여덟 명의 제자는 동산 아래에 두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겟세마네 동산까지 데려 갔지만 주님과 거리를 띄웠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맡기신 신분과 위치와 사명(使命)을 각기 깨달아 있는 자리에서 자기 책임에 대한 충성함이 마땅한 줄 믿습니다.<아 멘!>
(2)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이같이 명령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고전16:13-14). 그러나 제자들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사56:10참고).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3) "이제는 자고 쉬라" 고 하셨습니다.
(막 14:41)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제자들은 이 위기에서 주님을 따름에 그대로 실패했습니다. 자기의 직분을 못 지키고 깨어 기도하지 아니하던 제자들은 급히 일깨워 같이 가자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말고의 귀를 자르고 다 흩어져 달아났고 마침내 주님을 부인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바로 바라보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 제자들처럼 실패 없는 믿음의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결 론
만왕의 왕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를 부르면서 환영하던 사람들은 불과 일주일이 못 가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며 배신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절대로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주님은 나와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쓴잔을 받으셨고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가슴에, 우리교회에, 여러분의 가정에,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내 가슴으로 뜨겁게 믿어야 합니다. ‘그럴 것이다’ 라고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그렇게 생각지 말고 이 사실이 믿어져서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쏟아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베다니 마을의 나귀를 드린 사람과 같이, 그리고 겉옷을 벗어서 주님 앞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는 마음으로 이 시간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의미가 내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마음속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흘리신 보혈은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죗값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이 보혈로 인하여 죽어야 할 몸이 살았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주님이 대신해 주신, 그 은혜를 받고도 무감각 상태로 있어서야 어찌 하겠습니까?
오늘 고난주간을 통하여 이 주님의 은혜에 만 분의 1이라도 보답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당하신 것을 추상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실지로 내게 체험되어지는 이번 고난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과 같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고 한 것과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체험되어지는 이번 주간이 되어 더욱 은혜로 충만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주일밤예배 설교(11.04.17)]
/ 고난주간에 묵상해야 할 사건들(2)
(막 15:25-41)
할렐루야!! 오늘 저녁에도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이 시간 예배 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이 저녁에는 오늘 낮 시간에 이어서 고난주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에 일어난 사건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낮 시간에는 고난주간에 있었던 사건으로, ① 예수님께 나귀를 제공해 드린 사람과 ②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려서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여인과 ③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을 잡수실 수 있도록 다락방을 예비하고 만찬을 준비한 여인과 ④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고 ⑤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6.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구레네 시몬은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의 그 뜻과 가치가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골 1:24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며 육체적인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과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주님의 사업에 충성하며 주님 때문에 희생과 고통을 받으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마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습니까? 아마 그날 아침까지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북방, 구레네 에 거주한 유대인으로 이때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온 순례자입니다. 그는 예수의 처형되는 광경을 구경하러 나온 수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무 지쳐 십자가를 지시고 가지 못하는 것을 본 로마 병정이 길가에 서서 구경하고 있던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웠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재수 없는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시몬이 주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후에 그 자신도 신자가 되고 그의 아들들도 저명한 성도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억지로라도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까? 기왕이면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기 바랍니다. 기쁨과 감사로 십자가를 질 때 주님은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을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7.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려고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700여 년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사역을 예언하였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지친 몸으로 체포되어 새벽부터 끌려 다니면서 온갖 수모와 천대를 당하시고 대제사장의 군관들의 구둣발에 채이고 뭇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헤롯의 관저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면서 견딜 수 없는 곤욕을 치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습니다.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뺨을 치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히라고 조롱을 합니다. 발길로 찹니다. 갈대로 때립니다. 예수님의 온 몸이 부어오릅니다.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얼굴은 피투성이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으로 가셨습니다. 힘에 겨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기진맥진해졌습니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올라가시다가 쓰러집니다. 무자비한 군인들은 가죽 채찍으로 때립니다. 매 맞은 자국은 터져서 퍼가 흐릅니다. 골고다 언덕길에서 예수님이 걸으신 자국 자국마다 피로 물들여졌습니다. 골고다에 이르러서는 십자가 형틀에 눕히고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 처절한 광경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굵은 쇠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골고다 온 산야를 흔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고통을 참으시면서 오히려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제1말씀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제2말씀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3말씀 요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제4말씀 마27:46 “제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제5말씀 요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제6말씀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제7말씀 눅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갔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십자가의 죽음을 당해야 합니까?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그 죄 값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크게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골고다 언덕에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언덕 위에 우뚝 선 세 개의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을 둘러 서 있는 군중들을 화폭에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다의 광경을 그리면서 그 전체 그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 한사람을 그려 넣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림 중에 있는 어울리지 않는 그 사람을 화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도 이 십자가 주변의 군중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렘브란트 화가처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8. 십자가 아래까지 와서 눈물 짖는 여인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넘어지며 쓰러지며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여인들이 울며, 울며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눅 23:27-28)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죽는 데까지라도 따르겠다고 장담하던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마 27:55-56)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4-25). 고 하셨지만 끝까지 주님을 따라간 사람은 연약한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처럼 말로만 주님을 따른다고 하고 실제 행함은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9.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눅 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간악한 유대인의 제사장들과 교권자들은 예수를 강도들과 함께 처형함으로 예수님을 흉악범으로 매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양편에 있는 강도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나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왼편에 있는 강도와 같이 끝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 불평과 원망만을 하다가 지옥의 멸망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오른편의 강도와 같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영원한 천국의 구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은 지금 어느 강도의 모습입니까? 오른편입니까? 아니면 왼편입니까? 그도 저도 아니면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찬송하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입으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라고 아우성치던 무리들입니까?
10.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장사한 아리마대 요셉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공회원이요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장례 위원이나 되는 듯 위협을 무릅쓰고 당돌히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정한 세마포로 싸서 예비된 자기의 빈 무덤에 안장해 드렸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눅 23:50-54)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은 감히 아무도 엄두도 못 내고 생각지도 못한 큰일을 했습니다.
(막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이 요셉은 마19:21절 이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고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던 사람인데 그 후로 크게 후회하여 재산을 많이 들여서 마련한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도 진실로 예수를 믿는다면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이 모든 사람이 외면하고 비굴해 질 때 요셉과 같은 용기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신 후 30여년이 지난 후에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일컬어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가룟유다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예수님을 팔아먹은 배신자가 있는가 하면 비록 예수님의 제자의 수에 들지는 못했어도 제자들보다도 훨씬 훌륭한 일을 해낸 요셉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결 론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가슴에, 우리교회에, 여러분의 가정에,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내 가슴으로 뜨겁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의미가 내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마음속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흘리신 보혈은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죗값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이 보혈로 인하여 죽어야 할 몸이 살았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주님이 대신해 주신, 그 은혜를 받고도 무감각 상태로 있어서야 어찌 하겠습니까?
오늘 고난주간을 통하여 이 주님의 은혜에 만 분의 1이라도 보답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당하신 것을 추상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체험되어지는 이번 주간이 되어 더욱 은혜로 충만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목양자료 > 5.절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추석설교 (7편)] / 감사를 원하시는 하나님 (1) (0) | 2012.09.26 |
---|---|
고난주간 설교 (0) | 2012.03.29 |
사순절,첫번째 주일설교 (0) | 2012.02.26 |
사순절 설교 - 채찍과 가시면류관(막 15:15-19) (0) | 2012.02.26 |
[스크랩] [주일설교(사순절① 12.02.26)] /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기도(박종태 목사) (0) | 2012.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