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에 대하여 /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2012. 3. 9. 12:18참고자료/5,영성 자료

'주님의 기도'에 대하여 /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주님의 기도'에 대하여

                                                                                              
"우리의 아버지."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기에 앞서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로, 우리가 하느님의 일에 관해서는 게으른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먼저 구하고 기도해
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하신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끌어당기시기 때
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주실 수밖에 없을 만큼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훌륭합니다. 우
리는 [주님의 기도]가 덧없는 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참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기도]에는 그러한 것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그분
께서 업신여기라고 가르치신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덧없는 것을 주는 것은 영원하신 하느
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덧없는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것에 견주어 보건대
덧없는 것은 무(無)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무를 구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 무엇보다도 우리는 크리소스톰이 말했던 요점, 곧 하느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보
다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주님"으로
시작되지 않고, "우리의 아버지"로 시작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람은 이 한 마디의 부름을 통해
서 죄의 용서, 양자 결연, 자녀의 상속권, 독생자와의 우애, 성령의 관대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
니다." 참된 자녀라면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으로 대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영광을 사랑하고, 그것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청구하는 사람은 확
신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녀의 청을 귀담아 듣게 마련이니까요.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너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될 줄로
믿어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나의"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라고 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기도가 즐거운 까닭은 그
것이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유발되기 때문입니다. 예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합
니다: "기도가 서로 소통되면 소통될수록, 효과는 점점 더 커진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분은
나의 아버지도 아니고, 너의 아버지도 아니며, 모든 사람의 아버지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
과 땅에 있는 만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라고
말하는 까닭은 모든 사람이 우리의 형제이자 공동 상속자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그
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끝까지 형제로 받아들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라고 한 구절을
명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에 계신." 먼저 크리스소톰이 말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모
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우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려고 했던 것에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 것이다." 대수도원장 아이작은 자신의 첫 번째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
다: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우리는 이 세상을 멀리해야 할 것이
다." 그리고 시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사는 날이 길기만 하니, 아 슬프다."

우리는 이러한 언질들을 새겨듣고, 우리가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고 공언할 수 있는 그 자리
로 온 마음을 다해 서둘러 가야 할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수금이 눈물의
기슭 바빌론에 걸려 있으니, 우리가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르랴!"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하고, 그 무엇도 위엄이 넘치는 고귀한 유산을 우리에게서 앗아가지 못하게 해
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를 우리 안에 모셔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늘이 될
것이고, 하늘 가운데 진정한 하늘이 될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벗어나 저기 하늘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주해
한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라는 말은 '성인들과 의인들에 둘러싸여'라는 뜻이다. 왜
냐하면 하늘과 땅이 물리적으로 다르듯이, 의인과 죄인도 영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에"라는 말의 동일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이 사용된 것
은, 혼이 자신의 보다 뛰어난 본성, 곧 하느님께로 향해야 함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
냐하면 하늘에서는 혼의 세속적인 몸이 보다 고차적인 몸, 곧 영적인 몸으로 변모되기 때문이
다." "보잘것없는 사람과 위대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어느 정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가장 뛰어난 사람들조차 하느님을 영적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하느님이 지상보다는 하늘에 계신다고 믿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즉, 당신의 이름을 알리셔서, 온 세상 사람들이 이
보다 더 거룩한 것이 없음을 알게 하소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는 말은 "당신의 이름
이 영화롭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누구나 다음과 같은 심정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드
러내는 증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바람이자 기쁨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서에서 이
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다. 그 사람 안에
는 거짓이 없다." 바울로도 이렇게 잘라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하느님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일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지는 것조차 달게 받
겠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바랄 만큼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도
생명 자체를 위해 죽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는 기원에는 또 다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아버
지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소유하게 하소
서."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를 통해서 당신의 이름이 영화로워지고 거룩해지
도록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소서." 우리는 마태오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습니다: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또 다
른 의미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
하게 자리잡도록,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서 매일의 잘못을 일소하게 하
소서." 우리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기도하는 까닭은, 우리가 하느님
에 대하여 아는 만큼 그분의 사랑과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
니다: "당신을 알고,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게 하시며, 어쩌다 잘못을 범해 당신의 거
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온 마음을 다해 깨어 있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이 기원에 앞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는
기원이 먼저 등장했으니, 이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로니무스 성인이
말한 대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믿음과 순수한 양
심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고 기원하는 까닭
은, 우리의 악행이 소멸되고 악마가 추방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혹은 이 세계 안에
서 풍부한 덕으로 다스리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로, 이 기원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장
차 임할 그 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그 나라를 차지하여라." 성도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면, 자기
도 그 나라에 참여하리라는 것을 자기 양심의 증거로 알 것입니다.

"당신의"라고 한 것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나라는 물질
적인 것도, 현세의 것도, 이와 비슷한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보다 훨씬 더 고귀
합니다. 그 나라는 "당신의" 나라라고 불립니다. 이는 그 나라가 영과 영원 안에 있으면서 하느
님의 권세와 지혜와 선하심과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크리소스톰은 이 기원을 앞의 두
기원과 같은 부류라고 말합니다. 이 기원들은 "신성하게 하소서"(명령형)라고 하거나, "우리를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하거나, "우리를 당신의 나라에 데려다 주소서"라고 하거나, "우리로 하
여금 당신의 나라를 얻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은 "당신의 뜻을 이루소
서"(명령형)라고 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기원들은 "그것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하거나 "그것이 오게 하소서"라고
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하는 식의 비인칭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가 온 세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목할 것은 세 번째 기원이 두 번째 기원과 관
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기원은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말함으로써
천상의 것을 얻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하소서"라는 기원은 우리가 하늘에 이르기 전에 먼저 땅이 하늘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
다. "잘못을 버리십시오. 덕을 쌓으십시오. 악을 던져 버리십시오. 선을 회복하십시오. 그러면
하늘과 땅이 같아질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 번째 기원의 으뜸가는 설명입니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원의 또 다른 해석에 의하
면, 땅엣 것들도 하늘에 있는 것들과 같아지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은 하
늘에 있는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땅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져
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염려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많이 염려하
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꺼이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
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신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
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 하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이 구원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땅에 있는 자들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기원의 의미를 보다 잘 알 수 있
습니다. 은총에 의해 지금 당장 임하든 아니면 장차 영광을 통해 임하든 간에, 하느님의 나라
가 임하기만 하면,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니까요.

"하늘에서와 같이"라는 말은 의인을 가리키고, "땅에서"라는 말은 죄인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기원에서 희구되
는 미래에, 곧 최후 심판의 때에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늘은 영을 가리
키고, 땅은 육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
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마음, 곧 영이 하느님에게 복종하듯이, 육도 영에게 복
종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라
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이 모든 교회 안에서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뜻이 하
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우리가 땅에 있는 동안 마음이나 영
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맛보듯이, 죽음에서 부활할 때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몸으로 그것을 맛
보고 정신과 육체의 구원에 이르게 해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마태오복음서 6장에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라고 되어 있지만, 루가복음서 11장에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daily) 양식을 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자신이 쓴 마태오복음서 주석에서
"일용할"이라는 단어를 취하여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고 소비하게 하셔서 날마다 자양분을 공급받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소비하거나 얻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런 식
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욕에서 비롯된 것
이거나 아니면 악마에게서 온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양식이 우리에게 오늘을
선사한다는 것입니다. "일용할"(daily, 날마다)이라는 말이야말로 성별 되고 온전하고 축복 받
은 말입니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서에서 말하는 "필요한 양식"과 딱 들어맞습니다. 셋째로, "오
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는 "우리가 그 날 그 날에, 곧 하루에 필요로 하는
것을 날마다 주셔서, 한 사람이 백일 동안 먹을 것을, 혹은 백 사람이 하루에 먹을 것을 한 사
람이 단 하루에 소비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그 날에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오늘 우리에게 한 사람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것을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넷
째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되," 될 수 있으면 필요한 만큼만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이 갖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앞서 언급한 주석에서 "우리의"라는 말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우리
의"라는 말이 쓰인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양식이 우
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만 먹을 것이 아니라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
서입니다. 아무도 "나의 양식"이 나에게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지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나에게 주어집니다. 비단 양식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
한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다른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남의 것을 남에게 주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양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제 것과 함께 남의 양식까지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양식을 바르게 먹는다면, 그것은 우
리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양식을 악하고 죄스럽게 먹는다면, 그것은 우
리의 양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남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당하게 얻은 것
은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식." 이것은 우리가 날마다 구하는 양식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에 필요
한 온갖 것을 다 얻으려고 날마다 몸부림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뜻입니다. 복음서는 히브리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고 넌지시 말합니다. 예로니무스에 의하면 히브리 사람들은 마태오복음
서의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소서."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이 기도는 우리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필요
로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순간에 혹은 현세에서 순례를 하는 동안에
오늘의 양식을 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고 깨지기 쉬운 인간
으로 있는 동안에는 물질적인 양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교부들의 설교
에도 이와 동일한 요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식"이라는 말은 현재의 넉넉한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프로
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삶의 재화가 넉넉
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로 그것만 바랄 뿐 그 이상을 바라지 않
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두 벌 옷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한 복음서의 말씀도 이와 같은 방
식으로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양식"이라는 말
에서 천상의 가르침이나 영감과 같은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가 "가장 좋은 양
식"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몸소 모든 피조물에게 언제 어디에서나
자양분을 공급하시니 말입니다. 우리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라고 한 요한복음서
의 구절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체 성사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성체 성사에서, 우리는 (성체를 가리켜) "우
리의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날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습니다. 성
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 우리가 참 사랑 안에서 그들과 한 몸을 이루기만 한
다면, 우리는 성체 성사에 훨씬 효과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사도들에 관해 기록된 바와도 일치합니다. 사도들은
다음 날에 쓸 것을 결코 지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돈이나 사치품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양식을 달라
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모름지기 그리
스도의 제자라면 그 날에 필요한 양식만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길
어지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그분의 나라가 속히 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아아, 슬프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으
니"라고 한 맥락에서, 그리고 "내가 죽기를 바라노라"고 한 바울로의 정신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인 양식을 우리에게 주소서. 영원
은 언제나 오늘을 의미합니다." 혹은 "필요한 양식을 오늘, 곧 영원 속에서 주소서." 우리는 이
러한 전망을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한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
백록] 11권의 말미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세월은 하루와 같고, 당신의 날은 지나
가는 매일이 아니요, 항상 오늘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오늘은 내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제의 뒤를 잇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영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영원
히 그분을 낳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
게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현세적인 것도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음
을 보여주십시오. 첫째로, 이것은 마니교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입장입니다. 둘째로, 여러분은
맛없는 양식을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지닌 것이 아무리 작을지
라도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이것은 우리에게 기도의 방법을 일러주고, 윤리를 가르치고, 분
노와 슬픔과 모든 악의 뿌리를 없애주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 우리
를 향하신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 어떻게 누그러뜨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를 용서하
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이라고 말합
니다. 왜냐하면 크리소스톰이 지적한 대로 인격적인 모욕을 당했을 때 이것을 참는 것은 훌륭
한 일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께 잘못한 것을 감추는 것은 불경스러운 짓이기 때문입니
다. 많은 사람이 동료나 하느님께 자신이 범한 잘못을 쉽게 용서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입은
손해에 대해서는 쉽게 용서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손해를 입은 사람이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헛되이 기도한다면, 손해를 끼친 사람의 기도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라는 구절을 어물쩍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들은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참 제자도 아닙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지
않는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말은 물론이고 아들이 의도하는 것까지
주목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라는 이 다섯 번째 기원과 관련하여, 우리는 몇 가지 사항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우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날마다 기도하고, "우리의 잘못
을 용서하여 주소서" 하고 날마다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순진한 사람들이
자기 만족에 빠져 자화자찬하다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바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용서를 위해 기
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그분께서는 또한 자비를 약속하신 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
은 "우리가 용서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용서하듯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자
신처럼 우리가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빌 때 우리를 용서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용
서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범했다고 합시다. 내가 그 사람에
게 용서를 구한다면, 나는 더 이상 원수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
는 [엔키리디온Enchirid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라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때, 우리가 믿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기
도를 듣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원수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처음 세 기원에서는 하느님에 관한 것을 말할 때마다 "당신의 이
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과 같이 단수 인칭이 쓰였다는 것이고, 그 이후의 네 기원에서
는 "우리의 양식," "우리의 잘못,"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를 구하소서"와
같이 복수 인칭이 쓰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것은 여섯 번째 기원입니다. 이것은 유혹을 받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욥도 유혹을 받았고, 아브라함과 요셉도 유혹을 받았기 때
문입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은 상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유혹에 무릎꿇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
이 타는 불꽃을 느끼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꽃에 의해 자신이 불타서
없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원에는,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니
면,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유혹하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한
결같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해달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뒤를 잇는 기원, 곧 "우리를 악
에서 구하소서"라는 기원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을 받지 않게 하시고, 유혹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기원, 곧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를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
다. 그것은 거룩한 인내심을 구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야보고 성인은 하느님이 우리를 악으
로 이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인내라는 선물에 대하여
Concerning 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아
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를 유혹에 빠지
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이것이 일곱 번째 기원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우리가 악과 죄
에 맞서는 기도를 하고 있으며, 아직 범하지 않은 악행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사
실입니다. 우리는 "∼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미 범한
죄와 악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유혹의 위협 속에는 악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악에서"라는 말은 "악마에게서"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악한 것을 말하고,
우리와 맞서 끔찍한 전쟁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악에서"라는 말은 "속되거나 덧없는 것을 구
하는 못된 습관으로부터"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부끄럽지 않을 것을 구할 때에도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탐심에 무릎꿇었거든, 바로 그 악한 탐심에서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십
시오. 이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잘못된 것을 구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것은 속되거나 덧없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