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에게서 배우는 목회와 영성

2012. 3. 9. 12:17참고자료/5,영성 자료

헨리 나웬에게서 배우는 목회와 영성

     이정순 (First Congregational Church of Waverly-Senuri 담임목사)

   1. 왜 헨리 나웬인가?

   지난 90년대 한국 기독교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로 많히 팔리고 읽힌 책의 저자로 우리는 서슴 없이 헨리 나웬을 꼽을 것이다.  그 만큼 헨리 나웬이 최근 들어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회 출신 사제인 그가 카톨릭보다 개신교에 더 많이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카톨릭을 이단으로 정죄하기까지 했던 개신교계의 보수적인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헨리 나웬의 책들을 출판하고 있는 현실은 사뭇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이들 출판사들은 헨리 나웬을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소개하고 있기까지 하다. 카톨릭 예수회 사제로서 카톨릭의 수도원적인 영성에 깊이 영향 받았었고, 누구보다도 에큐메니칼적인 사고를 가지고 교파를 초월하여 사회전반에서 다양하게 활동했던 헨리 나웬에게 이제 한국 기독교 출판계는 쉽게 복음주의자라는 편리한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하기야 복음주의를 또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이런 복음주의자들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헨리 나웬에 대한 극보수주의자들의 거부감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에 헨리 나웬의 기도서 『자비를 구하는 외침』 이 번역 출간되었을 때 한 목회자가 찬사의 글을 인테넷에 올린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글에 대한 반응 중 하나는, 왜 기도하면 한국 교회인데 굳이 외국 사람의 기도에 매달려야 하는가 하고 반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기도의 전문가나 마찬가지인데 더 이상 헨리 나웬과 같은 사람한테서 배울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비판에는 한국교회의 외적인 성장이 곧 영성의 성숙도와 일치한다는 자만심이 깔려 있다. 그리고 더 이상 다른 전통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없다는 배타적인 자세도 들어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참된 그리스도교의 영성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말 헨리 나웬과 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충분히 성숙해 있는가? 전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교회 세습과 각 교단장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금품 살포와 같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은 무얼 의미하는가?  지난 이라크 전 때 맹목적으로 전쟁을 지지하며 미국을 신앙의 나라로 찬양했던 많은 극보수 우익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적인 시위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 교회는 사회나 공동체와는 무관한 채 여전히 기복적이고 무속적이고 피안적인 신앙만을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문제, 또 이와 관련된 목회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필자의 이런 물음 한 가운데 헨리 나웬이라는 인물이 서 있다, 그는 보기 드문 영성의 대가로서 그가 주로 활동한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 한 곳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삶을 추구하며 구도자로서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로 부름을 받은 사제요, 신학자요, 상담자요, 활동가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시대에 목회의 의미와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해 준다.  

   2. 헨리 나웬은 누구인가?

   헨리 나웬(Henri Jozef Machiel Nouwen)은 1932년 1월 24일 네덜란드 중부의 작은 도시 니즈케르크(Nijkerk)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형적인 네덜란드의 유복한 카톨릭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이차 세계대전으로 자기 조국과 고향이 나찌에 점령당하면서 전혀 다른 삶의 경험을 하게 된다. 형제들과 멀리까지 가서 식량을 구해오고, 아버지를 부역에 끌려가게 하지 않기 위해 숨겨야 하는 어려운 삶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제에의 소명을 키워갔다. 그는 이미 6세 때에 사제가 되고 싶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밝혔다곤 한다. 나웬은 그 후 헤이그에 있는 예수회 소속 김나지움에 들어가면서, 공식적인 공부를 시작한다. 그 후 중고등학교 교육을 마친 후 리젠버그와 드리버겐 등에 있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마침내, 19657년 네덜란드 우트레히드 교구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나웬은 주교의 허락을 받고 니지메겐(Nijmegen) 대학교에서 6년간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당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심리학이 신앙을 무너뜨린다는 교회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목회와 영성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광산 지역에서 잠시 사목활동을 했고, 군목으로도 활동했으며,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을 위해 목회하기도 했다. 그 후 나웬은 심리학자 고든 알포트(Gordon Alport)의 권유로 미국 캔사스에 있는 메닝거(Menninger) 심리학 연구소에 2년간 유학하기로 결심하고 도미한다. 이 곳에서의 공부를 마친 후 1966년 그는 미국 노틀담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고, 그 후 심리학과 영성에 대한 여러 저작들도 내 놓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마틴 루터 킹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어난 흑인 민권 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을 지지하며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토마스 머튼의 수도원적 명상과 사회적 실천사상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후 1971년에는 예일 대학 신학부로 옮겨 계속 가르치게 된다. 이 때 제안 받은 조건은 박사학위가 없는 것을 문제 삼지 않고, 3년 이내에 종신재직권을 받고, 5년 이내에 정교수직을 보장받으며, 그가 쓰는 글은 어떠한 외부적인 기준으로도 심사받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물론 나웬은 이후 네덜란드의 모교 니즈메겐 대학교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웬은 계속해서 영성과 목회와 심리학 등의 주제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특히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난과 억압의 문제에도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81년 그는 마침내 예일에서의 명성과 지위가 보장되어 있는 교수생활을 박차고 라틴 아메리카의 페루로 건너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 것을 결심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과 평생을 보내리라는 계획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페루에 체류하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새롭게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그들과 동화되어 평생을 다 바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이듬해 1982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 온다.

    그 후 하바드 대학 신학부에서 초청되어 나웬은 다시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알리는 선교사의 역할을 자임하며, 강연과 저술을 통해 이 일을 계속 해 나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안락하게 보장되어 있고, 끊임없이 경쟁하는 지식인의 생활은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다. 그는 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려, 그야말로 예수처럼 살고 싶어했다. 그럴 때 참 안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전형적인 지식인의 삶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좌절감을 느끼며, 새로운 소명의 장을 찾았다. 뜻밖에도 그곳은 정신치체 장애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라르쉬 공동체였다.

나웬은 쟝 바니엘(Jean Vanier)이 프랑스에 세운 라르쉬 공동체(L'Arche Community)에 초청을 받고, 그곳에서 9개월간 머물면서, 자신의 소명을 새롭게 깨달았다. 자신의 남은 여생을 바쳐 일해야 할 곳이 바로 이 곳임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미국으로 돌아와 하바드에서의 교수 생활을 바로 정리하고 1986년 캐나다 토론토 근교에 있는 또 하나의 정신지체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 새벽공동체로 입주 사제로 들어간다. 나웬은 이 곳에서 몇 안되는 정신지체자들을 돌보고 섬기면서 처음으로 마음의 안식과 기쁨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삶은 오래되지 못했다. 그는 조국 네덜란드를 방문하는 도중 심장발작을 일으켜 1996년 9월 21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수십권의 저서와 수 많은 글들을 남겼으며, 평생 쉴 새 없는 강의와 강연으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영성에 많은 자극과 도전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실천적인 삶으로 그리스도교 목회가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영성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헨리 나웬은 평생을 쉼 없이 하느님을 찾고 갈구했던 구도자요 명상가요 학자며 운동가였다. 그가 평생 드린 기도는 그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이루어 졌다.  "저의 피곤한 육신과 혼돈된 마음, 그리고 안식함이 없는 제 영혼을 주님의 팔로 안아 주시고, 제게 쉼을, 소박하고, 고요한 쉼을 허락하소서“  


   3. 목회란 무엇인가?

   최근 한국교회에서 교회와 목회자들의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곳곳에서 목회자들의 윤리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다. 목회자들이 각종 섹스 스캔들로 지탄을 받고 있다. 목회자들이 언론 매체의 주제가 되고, 세상의 법정에서까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계속적인 땅 구매와 여러 가지 비리로 점철된 꽃동네 사건에서 보듯이, 카톨릭도 예외가 아니다. 정말 그리스도교 교회의 존재의의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목회의 본질과도 관계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목회란 무엇인가? 목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는 목회자인 필자 자신의 끊임없는 물음이기도 하다.

    헨리 나웬은 본래 예수외 신부로서 목회(사목)적인 관심에서 자신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신학자요 영성가이기 이전에 서품받은 사제였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라르쉬 장애인공동체에서 목회활동을 한 것은 목회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열정과 관심을 잘 보여준다. 번듯한 연구실 속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그 연구물들을 강의와 저술을 통해 발표하는 이른바 보장된 교수의 삶에 만족하지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위로만 상승해야 하는 대학세계에 회의를 느끼고, 이것이 사제로서의 부름받은 삶과는 거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 대신 그는 세상 속에서 철저히 섬기고 나누는 삶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헨리 나웬은 목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목회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섬김입니다. 곧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고 억압된 자를 풀어주며 주님의 날을 선포하는 것입니다”(눅4:18). 그는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속에서 구체적으로 섬김을 실현하는 것을 목회로 보는 것이다. 이런 섬김의 목회를 위해서 영성도 필요한 것이고 기도도 해야하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신학자 스워드 힐트너(Seward Hiltner)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 목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그 중심적인 단어는 ‘치유하다(healing),’ ‘붙들다’(sustaining), ‘인도하다(guiding)’이다. 목회란 바로 예수를 매개로 하여 사람들을 치유하고, 붙들어 주며, 제대로 인도하는 것을 듯한다.

바로 예수야말로 이런 목회의 중심이며 주제이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그의 책 『살아 있는 상기자』(The Living Reminder)에서 목회자는 예수님의 치유와 붙드심과 인도하심을  생각하게 만드는 자(reminder)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섬김을 실현할 때, 사람들을 치유하고 잘 삶을 지탱하게 하고, 의미 있고 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바른 목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첫째, 현대 목회의 중심과제 중 하나는 인간 치유의 문제이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이런 저런 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필자가 목회하는 이곳 미국 사회의 현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가정이 파괴되고 이혼률이 급증하며, 알콜과 마약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비근한 예로 목회자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몇번씩 이혼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요, 이제 미국에서 태어나는 세대들은 일생에 평균 2.5번씩 결혼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학자들은 진단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두 번 째, 세 번째 결혼을 당연히 축하해 주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파괴되고 병들어 있다. 이제 교회가 신앙공동체로서 어떻게 이들을 치유하느냐가 중요한 목회의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인간치유의 문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이며, 구원의 대체용어라고 생각된다. 최근 이곳 보스톤 지역 신학교들에서 “영적 치유”, “건강과 연성”, “교회간호”(parish nurshing)과목 등을 개설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시대적인 이유 때문인 것 같다.

    헨리 나웬은 이미 그의 초기 저작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 치유의 문제를 감동적으로 서술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목회자는, 기억하는 일을 통해 치유하고, 둘째, 기억하는 일들을 통해 개인의 상처들을 받아들이고 고통 받는 모든 인류의 상처와 연결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인간의 고통과 상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겪으시는 엄청난 고통과 끊임없이 연결시킴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치유가 일어나게 한다. 여기에 기도의 자리가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 현장 속에서 그 자신이 수많은 상처를 받지만, 그 상처가 오히려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동일화하며, 치유할 수 있는 자가 된다. 목회자는 ‘상처받은 치유자’이다. 나웬은 여기서 치유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치유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이 더 큰 고통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슬픔이 더 큰 슬픔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경험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6)고 하신 그리스도의 더 큰 경험의 한 부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웬에게서 특이할 점은 이런 치유가 개인의 고통 뿐 아니라 사회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곧 개인적인 치유 뿐 아니라 사회적인 치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초창기부터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참여해 왔다. 그는 결코 개인의 치유문제를 사회적인 치유의 문제와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전적인 목회는는 아주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즉 병든 사람들이나 슬퍼하는 사람들,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난과 억압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세상이나 종교 기관의 복잡한 망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원사업의 한 부분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둘째, 목회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기억을 통해 그가 돌보시고 지탱해 주시는 그런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나웬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기억하는 일은 과거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는 것보다 휠씬 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기억, 즉 현재 여기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고 세워 주면서 일상의 많은 위기 가운데서 뿌리 내린 참 존재 의식을 우리로 하여금 같게 해주는 기억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란 신자들에게 이런 기억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자이다. 목회자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강조함으로 이런 역할을 한다. 곧 항상 하느님이 함께 함으로 그분의 현존과 지탱하심을 강조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부재 가운데서도 이런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찌의 감옥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하느님의 부재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한 본회퍼야말로 좋은 예이다. 곧 하느님의 부재와 현존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 속에서 서로를 붙들어 주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 가운데서도 이런 현존과 부재의 목회를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목회자는 항상 신자들의 요구에 응하는 현존과 실재의 목회뿐만 아니라, 스스로 창조적인 부재를 통하여, 그 자신이 먼저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목회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웬은 목회자가 분주함과 유용성과 필수성과 같은 기도의 허상들에서 벗어나, 침묵의 기도, 때때로 무용한 듯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 속에 더 깊이 들어가라고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빈 마음으로 무력하게 있으면서 모든 것이 은혜이며, 아무 것도 단지 우리의 고된 노력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 없음을 선언하는 한 방법이다.”(61).

   셋째, 목회는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통해 사람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영적인 안내자이다. 여기서 기억은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과거의 모든 일들을 철저히 성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기억들은 성찰 이전 단계에 이미 우리 자신 안에 들어와 피와 살이 되었다. 신뢰와 사랑과 용납과 용서와 자신감과 희망에 대한 기억들이 우리 존재 안에 들어와 우리의 기억이 된다. 이런 기억들은 위기의 때에 다시 살아나 큰 힘을 발휘한다. 바로 이런 기억들이 사람을 인도한다. 그런 기억들이 우리를 도와 믿음으로 이상을 향해, 더 나은 상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억 한 가운데 예수가 계시다. 예수는 이미 제자들에게 앞으로 어려운 시간이 닥칠 때 그들에게 기억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말해두는 것이다(요한 14:6).    

    목회자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대결케 하고(confronting) 영감을 불어넣는 (inspiring)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먼저 대결케 한다는 것은 예언자들의 사역과도 같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환상, 거짓된 장벽들,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들, 정신적이고 영적인 사슬들을 폭로하고 벗겨내는 고통스러운 일을 뜻한다. 더 나아가 목회자는 이런 대결케 하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본래의 이상을 되찾게 하고, 위대한 비젼(영감)이 시작되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게 한다. 위대한 예언자들과 개혁자들의 삶이 이를 잘 말해준다. 대결케 하는 일은 고백과 회개를 촉구하고, 영감을 불어넣는 일은 새로운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삶을 다시 살아가게 만든다. 목회자는 바로 이런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더 나아가 이런 인도자가 되기 위해 목회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명상)하는 일을 통해 먼저 그 말씀들을 가슴속에 새길 수 있어야 한다고 나웬은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목회자의 피와 살이 될 때, 새로운 세계를 안내하는 진정한 기억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웬에 의하면 이것은 지적인 성찰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묵상’이다. 나웬은 중세 베네딕트 수도회 신학자 르끌레르끄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묵상은 성서 본문을 읽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존재 전체로 개닫는 것이다. 그 구절을 입으로, 발음하는 몸으로, 그 구절을 마음에 새기는 기억으로, 그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지성으로, 그 구절을 실천에 옮기려는 의지로 깨닫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상기시키기 위해, 또 자신보다는 바로 이런 하느님을 상기시키기 위해 목회자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묵상을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묵상은 결코 신비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된다.

   목회를 하면서 목회자는 때때로 좌절하고 한계를 느낀다. 과연 목회자 자신이 이런 치유와 지탱과 인도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고 묻곤 한다. 헨리 나웬은 다음과 같은 말은 목회자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준다. “목회의 큰 신비는 우리 자신의 약점과 한계에 압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너무도 명료하게 거룩한 상담자이신 하느님의 영을 우리 자신을 통해 비추고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3. 침묵과 기도

    1) 침묵의 영성

    기도란 무엇인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하는가? 모든 종교인들이 기도를 드리는데,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는 또 다시 기도를 말해야 하는가? 헨리 나웬은 이 문제에 좋은 답을 제시한다. 그에게 있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증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그런데 그는 기도 이전에 먼저 침묵에 대해 말한다. 그에 따르면, 침묵은 참된 기도를 드리기 위해 거쳐야 할 전 단계이다. 침묵은 참된 기도가 드려지는 자리이다. 바로 침묵은 영성의 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침묵의 영성이라 부른다.

    오늘 우리는 너무도 말이 많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엄청난 말의 홍수 속에서 빠져서 더 이상 말의 중요 기능인 의사전달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고, 사람들간의 교제를 불가능하게 하며,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말은 더 이상 삶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특히 말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고 말을 잘 못하면 바보로 취급해 버리는 미국 사회와 같은 곳은 더욱 그러하다. 말의 참된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나웬은 무엇보다도 침묵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다. 침묵은 말의 고향이다. 침묵을 통해 참된 말의 힘과 결실을 얻게 한다. 그래서 나웬은 사막 교부들의 침묵의 영성으로부터 배울 것을 권고한다.

    사막 교부들에 의하면 침묵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침묵은 우리를 순례자로 만든다. 여기서 순례란 사람이 자기 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곧 침묵하는 것을 뜻한다. 성서 곳곳에 말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다. 말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침묵의 훈련이 필요하다. 침묵은 영적 생활의 중요한 규칙들 가운데 하나이다. 침묵을 하는 것은 우리를 순례자의 상태로 머물게 한다. 둘째 침묵은 마음속에 있는 불을 지킨다. 침묵의 적극적인 의미는 내적인 불, 영적인 불, 곧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생명을 지키는 데 있다. 침묵은 종교적인 정서의 내적인 불을 지킨다. 침묵은 하느님의 내적인 불을 보살피고 살아 있도록 만드는 수련이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체험을 나누는 사람이더라 하더라도, 쉽게 지쳐 떨어지고, 오히려 마음 속에 있는 하느님의 영의 불이 죽는 경우가 있다. 많은 말이 신앙을 약화시키고 사람을 냉담하게 만든다. 바로 여기에 침묵의 의의가 있다. 침묵은 바로 마음 속에 있는 성령의 불을 지키고 다시 살려내어 신앙을 회복시키는 거룩한 규율이요 수련이다. 오늘날 수많은 말의 유혹에 빠져 있는 자들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 바로 이 침묵의 영성이 필요하다. 셋째, 침묵은 말하는 것을 가르친다.  

참된 말, 결실을 맺는 의미 있는 말은 침묵에서 나와 침묵으로 돌아가는 말이다. 힘 있는 말은 침묵에서 비롯된다. 침묵에 바탕을 두지 않는 말은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고전 13:1)와 다를 것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신비, 침묵과 말씀을 통해 참여하는 위대한 신비를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은 영원한 침묵에서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 계기들을 통하여 침묵을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의 풍요를 드러내셨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를 거룩한 침묵에로 인도하시며 이 침묵의 여정을 통해 참다운 말의 창조와 재창조를 가능케 한다. 이것이 바로 침묵의 영성이며, 이 침묵의 영성은 마음의 기도로 이어진다.  

   2) 마음의 기도

   기도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을 것이다. 기도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과 호흡이요 생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목회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생활의 위기에 빠져 있다고 나웬은 진단한다.  그것은 기도를 일방적으로 하느님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의미를 이렇게 인간의 지성적인 활동에 제한함으로 위기라는 것이다. 나웬은 참된 기도는 지성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기도생활의 위기는 우리의 지성이 하느님에 대한 관념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나웬은 사막의 교부들이 가르치는 마음의 기도로부터 배울 것을 권고한다. 나웬은 『마음의 길-사막의 영성과 현대의 목회』라는 책에서 이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먼저 참된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이 마음의 기도는 사막의 교부들의 영성에 기초해 있다. 사막의 교부들은 마음의 기도가 무엇인지 길을 제시해 준다. 나웬은 수도자 러시아 수도자 테오판의 말을 빌어 마음의 기도를 이렇게 정의한다. “기도하는 것은 지성과 함께 마음속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당신 안에 영원히 현존하시며 널리 만물을 내다보시는 주님의 면전에서 서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모든 신체적, 정서적, 지성적, 의지적, 도덕적 에너지의 원천을 의미한다. 마음은 하느님이 거하는 곳이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며, 바로 기도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마음의 기도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던 상태에서 자신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기도이다. 마음의 기도는 하느님에 관한 흥미 있는 말이나 종교적인 정서에 국한하지 않게 하는 기도이다.

마음의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의 진리에로 눈을 뜨게 하며,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과의 참된 관계로 변화시킨다. 마음의 기도는 하느님 앞에 우리의 전 존재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게 한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기도의 첫 과제이다. 물론 이것은 계속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 지성 지향적인 세계에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하느님의 이끄심에 더 잘 귀기울이기 위해서 마음의 기도에 이르는 진지한 수련이 필요하다.

     어떻게 마음의 기도를 드리는가? 나웬은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마음의 기도는 짧고 단순한 기도로부터 발전된다. 곧 “오 하느님, 오셔서 저를 도와주소서,” “나의 주님이신 예수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와 같은 짧은 문장들을 반복함으로써 마음의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때에 따라서는 “주님” 이나 “하느님”이라는 단어만을 반복할 수 도 있다.  이 중 “예수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문은 이것이 동방정교회 전통 속에 오래 동안 내려오는 그 유명한 ‘예수의 기도’(Jesus Prayer) 이다. 왜 이런 단순한 기도문들이 필요한가? 그것은 우리가 침묵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기다릴 때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모으고, 마음 깊이로부터 하느님을 향하기 위해서이다. 곧 이런 반복적인 기도는 마음으로 내려가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둘째로 마음의 기도는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기도가 나 자신의 생활을 통해, 나 자신의 내면 속에서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육체적인 노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라도 내 안에서 계속되는 기도를 의미한다. 나웬은 역설적으로, 기도가 어떻게 끊임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간청하는 것이 기도라고 말한다. 셋째, 마음의 기도는 포괄적이다.

마음의 기도는 우리의 모든 관심사를 포괄한다. 우리가 지성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현존에 참여하게 되면, 모든 정신적 성향들은 기도가 된다. 바로 마음의 기도의 힘은 인간 지성의 모든 것들이 기도가 되게 하는 데 있다. 마음의 기도는 인간 영혼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된다.


   여기서 헨리 나웬은 침묵과 마음의 기도로 대표되는 이런 신비주의의 길이 개인의 내면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말고 사회 속에서의 실천과 연결되어야 함을 잊지 않고 강조한다. 고독과 침묵과 마음의 기도로 개인의 전존재가 하느님과 하나되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 사회의 문제까지도 제기하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침묵의 영성, 마음의 기도의 영성은 곧 사회 변혁의 영성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혁명주의자는 그 중심에 있어서 신비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신비주의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 역시 인간 사회가 지닌 모호한 속성을 벗겨야할 의무가 있다. 신비주의와 혁명주의는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려는 하나의 시도가 지는 두 가지 측면이다. 신비주의자는 사회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기 성찰을 통해 그는 병든 사회의 뿌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 .예수는 우리가운데 오셔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과 인간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별개의 과제가 아니고 십자가의 두 기둥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셨다,”
    
    4. 나가는 글

   최근 새벽이슬이라는 기독교 인터넷 잡지에서, 한국교회의 문제를 놓고, 이른바 네거티브 비판이니, 포지티브 비판이니 하는 용어를 쓰면서 서로 논쟁하는 글들을 읽어보았다. 분명한 것은 한국 그리스도교 내적 외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표출되고 있으며, 우리는 이 시점에서 교회와 목회 및 신앙의 본질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헨리 나웬은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좋은 모델이요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그의 실천적인 삶과 영성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위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반성하게 만들 것이다. 또 이 시대의 목회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회를 다시금 뒤돌아보게 하며, 새로운 전기를 갖게 해 줄 것이다.

과연 목회는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사람과 사회를 치유해주고, 삶을 지탱케 해주며, 희망과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가? 목회자는 이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섬기는 일을 가르치고 실천하고 있는가? 인간과 사회를 바르게 변화시키는 일을 목회로 알고 행하고 있는가? 이런 물음들은 작금의 한국교회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런 참된 교회를 가능케 하는 참된 동력인 영성은 무엇인가?  헨리 나웬의 침묵과 고독의 영성은 말의 홍수에 빠져 있는 현대인과 그리스도인에게 말의 참된 가치와 힘을 회복시키는 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로지 큰소리로 소리를 질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역설하는 마음의 기도는 새로운 도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게 하고, 기도의 다양성을 발견하게 하고, 더 깊고 성숙한 영성의 길로 들어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여, 그 속에서 불타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영을 발견하여, 새로운 용기와 희망으로 삶을 다시 살아내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헨리 나웬이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목회와 영성의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