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6. 20:28ㆍ운영자자료/5.논문자료 모음
오늘의 청소년 예배를 위한 모색
김 순 환 (한국성서대학교 교수/예배학)
I. 들어가는 말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예배에서 다양한 악기들을 사용하는 오늘날 교회들의 예배 사례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느 교회의 경우는 주일 오후 예배와 저녁예배 등에서 청년들이 드럼을 사용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그랜드 피아노의 부품이 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실소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 결에 함께 있던 어떤 이들은 청소년 예배에서 또는 심지어 장년예배에서 피아노나 오르간 말고 드럼이니 트럼펫이니 하는 악기들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반문하기도 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젊은이들을 위한 예배이고 또 그런 악기류가 예배의 효율에 도움을 주는데 굳이 반대할 뭐 있겠느냐는 견해를 개진했다. 개신교회 안에서 이런 류의 논의는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이것 외에도 예배의 형식과 스타일에 대한 새로운 주장들이 더불어 사람들 가운데서 심심찮게 거론되어 왔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적 이해와 공감이 달라서라기보다는 실제적 적용에 있어서 소극적이거나 혹은 그 반대로 적극적인 태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젊은이들을 위한 예배 논의에서 이런 이슈들은 보다 활기를 띄고 다루어져 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바는 바로 이 청소년들을 위한 예배의 논의가 더더욱 중요한 의미를 띄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회와 문화의 변화 폭이 날로 커가면서 그에 가장 민감하게 노출된 청소년들을 위한 교회의 대응과 책임의 폭도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즈음에 청소년들을 위한 예배의 모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다시금 던져주고 있다고 본다. 청소년들이야말로 미래의 교회를 짊어질 자원들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청소년들에 대한 일반화된 이해를 살펴보고 그들의 예배를 위한 원론적 모색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청소년, 그들은 누구인가?
청소년은 아동기에서 성인기로 옮겨가는 과도적 시기이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2-3세부터 20세까지의 나이로 묶을 수 있고 한국의 교육 제도 하에서 보자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이다. 권이종, 『청소년학개론』(서울: 교육과학사, 1996), 71.
이 시기에 놓여있는 청소년들의 신체, 정신적 특성을 통틀어 하나로 묶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공통적인 사실은 이들이 아동기를 지나 성인으로 가는 과도적 시기에 있다는 것이며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넘치는 활력과 에너지가 가득한 시기이며,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서 무한히 열려 있는 꿈 많은 세대지만 그러면서도 이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느끼는 좌절과 고민이 남달리 많은 시기이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일부 청소년들이 과다한 학업과 주변의 과잉 기대를 견디지 못하여, 혹은 청소년기의 미성숙성으로 인한 실수로 갖가지 유혹에 빠지고 사회적 일탈을 서슴지 않는 경우도 자주 지상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위험스럽고 조심스러운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겪어서는 안 되는 시기를 지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섭리가 담긴 중요한 과정이기에 그 사실을 알고 적절한 대처를 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만남을 통해서 건전한 자아를 형성하고 바른 정체를 갖도록, 그리고 전체 인생을 위해 바람직한 인성을 훈련토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 교회가 깊은 관심과 다각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예배를 청소년과 관련지어서 생각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A. 질풍과 노도의 예배자
우선 누구나 지난 청소년시절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곧잘 연상하는 개념이 ꡐ질풍노도(疾風怒濤, Strum und Drang)ꡑ의 시기라는 점이다. 넘치는 활력과 에너지로 인해 무절제하고 격한 행동들을 쉽게 분출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잘 변하고 쉬 흥분하며 앎에 대한 감격과 열정도 더불어 가득한 시기이다. 권이종, 67.
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는 자칫 충동적이기도 하여서 적절한 지도와 배려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이상, 과잉 행동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표출들은 대개가 기존의 사회적 기대나 잣대로 수용하기에는 미숙하거나 벗어난 것들이어서 기성 문화와 이들의 행태는 일반적으로는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떠한 체제 혹은 관계 하에서나 갈등구조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갈등이 그릇 해소될 경우는 역기능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의 이런 특성에서 비롯된 갈등 요인들이 순기능적으로 결과되지 않을 때 그들은 기존의 세계와 가치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거나 이유 없는 저항적 태도를 표출하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미래 건전한 성인으로서의 성격 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갖게 된다.
청소년들의 기질이 질풍노도인 것 못지 않게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매우 단순, 질박(質樸)하다. 단순함은 그들이 성인 세대와 비교해서 현실에 대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부정적 함축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 많은 경험을 축적한 성인세대는 세상에서 주도면밀한 처세로 앞길을 헤쳐나가는 능력을 갖추는 강점이 있지만 세상과 사물을 그저 순수하게 보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약점이 있다. 반면 청소년들은 있는 그대로 실체를 보는 단순함으로 인해 실패와 어려움이 있으면서도 그들의 때묻지 않은 관점과 시각은 복잡하고 다난하게 얽힌 세상의 갈등적 구조와 현실을 훨씬 쉽게 풀어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실패를 최소화하려는 성인들의 신중한 처신이 긍정적 면도 있지만 청소년들은 그들처럼 선입견에 물들어 있지 않아서 개별 사실이나 사물을 독립적으로 혹은 새로운 눈으로 보는 순수성이 남아 있다. 청소년의 사고나 행동은 반사적일 만큼 단순, 질박한 것이 일반적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또 격한 감성의 표출 외에도 또 그것을 부당하게 억누르는 특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들이 세상을 접하는 방식은 앞서 말한 대로 순수하고 선입견이 없기 선입견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단순한 도식에 기초할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만일 어른 세대가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질타만 할 경우 그들은 자칫 자신들의 행동과 처신에 대해서 지나친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감을 잃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적극적 인성을 형성하기보다는 소극적이고 도피적 의식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이들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분출에 대해 엄격하고 즉각적인 질타보다는 사안에 따라서 너그럽게 대하면서 시간을 두고 지적해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단순, 질박한 성격은 장기적인 인생의 궤도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경험이요 습관이다. 성인으로서의 인간의 삶에는 불완전성, 모순, 허구적 틈새들을 수없이 가지고 있다. 누구도 완벽주의로 생을 채울 수는 없다. 그런 틈새를 메우고 원활하게 하는 데에는 차가운 이성의 영역만을 가지고는 안 된다. 실리에 밝고 철저한 이기적 논리로 무장하는 것만으로 인생이 움직여지고 보장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완벽하고 모순 없는 합리적 관계로 치장하여 있지만 감성의 파격 없이는 불가능한 간극이 언제고 무수히 존재한다.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이 바로 이들 청소년들이 두드러지게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이후 성인이 되어 세상의 톱니바퀴에 끼어 세상의 구조의 일부로 돌아가게 되어서 다시 되찾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가 오기 전에 청소년들은 진리 안에서의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 이런 훈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통제적 특성을 가진 어른들의 사고로는 그들의 문화 속에 들어 있는 독특한 감성주의적 색조를 다 이해하기란 어렵다. 청소년들은 그들의 시기에 맞는 방식의 경험을 권리로 요구하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의 잣대에 의해서 쉽게 청소년 세계의 잠재적이고 과정적인 역동성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억누르는 것은 젊은이들을 위하고 미래를 위한 진지한 자세가 아니다.
이러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가 지닌 긍정적 사실은 이런 특성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의 삶의 과정 속에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 다듬어지고 훈련되기만 하면 세상의 수 없는 모순과 장벽을 쉽게 허무는 좋은 인성의 성인으로 성장케 하는 특성이다. 또한 순수한 심성을 가진 성인으로, 그리고 안정되고 균형 있는 정서를 지닌 성인으로 성장하는 기회를 다지는 시기인 것이다.
B. 소외와 고독의 예배자
청소년기는 소외와 고독의 시기이다. 가장 성장의 활력이 넘치는 시기이면서 그 정서의 깊은 곳에는 고독과 소외가 있다. 그래서 그들을 경계인(境界人)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체적 성장은 마치 성인과 같은 징후를 뚜렷하게 보이지만 성인의 성숙성과 노련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어른과 같은 징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사회적으로 성인 취급을 받지 못한다. 독립적 자아로 성장하고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면서 공동체나 사회의 일부임을 표현하고자 하지만 성인들은 쉽사리 그들의 영향력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끼어주지 않으려 한다. 더구나 그들의 이상적 세계관이나 인간관은 그저 철없는 시기의 발상으로 치부되기가 일쑤이다. 심지어 어떤 어른들은 이들을 다만 불완전하고 미숙한 이들로 보고 그 시기가 재빨리 지나기만을 바란다. 성인들은 자신의 젊은 날을 그리워하면서도, 십대를 다루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는 때를 절망적으로 생각한다. 로왓 주니어, 『사춘기: 위기상담과 보살핌』신민규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23.
그리고 암묵적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킨다. 실상은 그들이 현재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한 시기를 겪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들의 단순하고 때묻지 않은 순수는 현실을 직설적으로 대처하게 하지만 그 현실은 이것을 미숙성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자신들 앞에 닥친 현실의 벽 앞에서 쉽게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고 낙심하고 방황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심화되면 그들의 미래를 보는 시각은 절망적이고 어둡다.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청소년들을 좌절케 하는 또 다른 변인은 한국 청소년들이 지닌 독특한 학업제일주의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즉, 우리 나라 청소년들은 과도한 학업과 진학 및 진로문제로 억눌려 있어서 혹자는 이런 학업이라는 업적주의의 환경 속에서 자란 청소년들이 긴장과 욕구불만을 해소할 탈구로서 대중매체 속의 대중적 우상에 열광적으로 빠져든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황영훈, ꡒ청소년과 대중매체: 청소년 스타 우상숭배와 교회의 대처 방안ꡓ 『신학과 실천』(2001.여름): 95.
이런 것에서 청소년들은 소외를 경험할 수 있다.
청소년들은 어른과 어린아이의 중간기에 겪는 자기정체감의 혼란에서도 소외와 고독을 경험할 수 있다. 청소년은 어린이도 또 완전한 성인도 아닌 중간인의 위치에서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기성세대에게 의존하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청소년은 아이로 취급하면 화를 내지만 반대로 어른 취급을 하면 불안해하며 이 두 욕구간의 갈등으로 ꡐ이유 없는 반항ꡑ을 보이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권이종, 76 참조.
몸은 어른이면서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고 느끼고 끝없이 ꡐ나는 무엇이냐ꡑ는 질문을 던진다. 또 해야 할 일이 많아지지만 무능력을 절감하는 데서 오는 문제, 하고 싶은 일은 많으나 많은 제약조건들이 가로막는 문제, 이상적으로 품어왔던 세계와 현실과의 괴리의 문제 등등으로 자기정체감(self-identity)의 위기를 겪는 시기이기인 것이다. 김재은, 『우리의 청소년: 그들은 누구인가』(서울: 교육과학사, 1994), 3-4.
점차 부모나 사회가 요구하는 바는 많아지고, 책임적 역할에 대한 부담도 커 가는데 그에 비해서 자신의 능력이나 주변의 인식과 여건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는데서 오는 좌절감과 절망감은 청소년들을 한없이 고독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큰 기대를 걸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사회의 이중적 현실과 늘 맞부딪쳐야 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고독과 소외는 또한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어지길 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에서 유래하기도 한다. 오치선, 『청소년지도학』(서울: 학지사, 1999), 15.
일반적으로 아동기에 받았던 보호와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고 싶은 욕구를 가짐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머리에 색깔을 들이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는 요즈음의 젊은이들도 실상은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생각의 발로요 소외로부터 벗어나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청소년들이 다 이렇게 야단스러운 행동으로 소외를 극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나마 이런 류의 행동을 좀더 지나치게 구사하는 청소년들은 환경이나 상황이 덜 규제적이거나 방임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많은 청소년들은 이 시기에 그런 외적 발산보다는 내적 고독의 경험에 빠져 들어간다. 떠들고 야만스럽게 행동하거나 조용하고 무난한 행동거지를 나타내건 간에 청소년들은 여전히 외롭고 고독하다.
어른들에 대해 아동기에 가졌던 절대적 의존과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그들로 하여금 소외를 촉발케 한다. 김재은, 15.
곧 의존적 대상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고독감도 깊어진다. 어느 누구도 친구, 학교, 기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고민스런 현실에 더 이상 보호자나 도움자가 되지 못함을 절실히 느낀다. 청소년들만의 미묘한 감정과 정서의 세계에 어른들은 섬세하게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주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도 청소년들이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부모에게 다 공개하고 도움을 청하면 해결의 실마리를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성인들이 상상하지 못할 깊은 고독과 소외를 경험하면서 그 시절을 지내게 된다.
C.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예배자
청소년기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시기이다. 그들의 내면에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고 나름대로 비전이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에도 어떤 환경과 도전, 교육이 제공되느냐에 따라 청소년들의 미래의 삶 전반에는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변인들이 많은 기간이다. 이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특정의 능력이나 영역만을 염두에 둔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지적 능력만을 우위시 하여 개인들의 셀 수 없이 많은 여타 다양한 잠재력들을 배제하는 관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총으로 그에게만 주어진,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무한한 것처럼 청소년들이 그 창조 안에서 창의적 미래를 펼 수 있는 영역도 무한하다는 전제가 중요하다.
한 개인의 가능성은 그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탁월한 소수로서의 가능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나아가는 길에는 특별한 소수 말고도 오히려 그 특별한 소수의 추진력 이면에서 평범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다수의 지원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점차 다양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기독교적 가치와 이상을 이끌고 지탱하는 근본적 힘이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전체 미래인들의 가능성을 향해서 청소년들은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세대는 청소년들이 질서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며 올바른 가치 위에서 무한한 창의성을 계발해 나가도록 돕는 일이 필요하다. 세상을 거시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거나 왜곡된 틀에 가두어 세상을 향한 무한한 잠재력을 축소시키지 않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런 시기에 그들을 위해 균형감각을 키워주고 모든 사물과 현실에 대해서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보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며 각자의 독특한 역할이 다 존중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청소년들의 가능성을 개발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은 결코 인생을 먼저 살아간 어른들의 몫만은 아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맡겨진 일이다. 그 무한한 자원 속에 그들이 잠길 수 있도록 장을 효과적으로 마련하는 일은 어른 세대의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과의 만남인 예배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무한 광대한 세상을 보는 균형된 안목을 키우는 중요한 장이다. 그들의 시기가 갖는 독특한 에너지와 비정형성을 무조건 특정의 틀 안에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청소년 시기는 그들이 신앙 안에서 진솔하고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해 나가는데 중요한 시기이다.
III. 청소년 예배를 위한 모색들
일찍이 루터는 1526년 독일미사(Deutsche Messe)를 발간하면서 독일어로 된 예배만이 아니라 개정된 라틴어 본문의 사용도 허용하고 심지어 주일날마다 돌아가면서 독일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예배의 본문들을 읽거나 노래하도록 하는 조치를 바랄 만큼 젊은이들을 위한 예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까닭은 학교에서 이들 언어를 배우기는 하지만 실제 적용의 기회가 없는 젊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 차원이었다. Laurence Hull Stookey, Eucharist: Christ's Feast With the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3), 80.
그런 조처들이 오늘날 청소년들의 예배에 채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젊은이들을 예배의 참여자로 유도하려는 특별한 배려가 돋보이는 발상이었다.
오늘날 앞서 가는 교회들은 앞장에서와 같이 독특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소년을 위해 장년예배와는 구별되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들을 도입, 운영하고 있다. 이런 예배들의 모습 속에서 청소년들의 문화와 정서적 특질들을 이해하고 최대한 그들을 예배에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단들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의 교회는 분명 청소년들을 위한 예배에 배려와 관심에 더하여 그 방향정립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 방향과 원칙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먼저 다음과 같이 예배와 관련된 청소년 하위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서 실제적 방안들로 나아가며 마지막에는 청소년 이후와의 연계성 등을 단계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A. 청소년 하위문화(subculture)와 그들의 예배
청소년들을 위한 예배는 그들의 하위문화(subculture)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들이 속한 문화의 특성은 과거의 우리의 통념처럼 가정, 학교, 교회 혹은 친구라는 도식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이면이 있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하위문화 안에 깊숙이 들어와 그 문화의 형성을 돕는 변인(變因)들을 보면 과거처럼 학교를 비롯한 특정 공동체나 부모가 아니다. 오히려 빠르게 변화하는 일반 대중사회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인 것을 보게 된다. 청소년들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전과 다름없는 문화적 배경과 생활의 패턴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늘의 대중사회의 영향 속에 깊이 잠겨 있다. 또래 집단과의 교류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집안에 있는 시간에 조차도 안방에 신주단지처럼 모셔놓은 TV나 인터넷에 의해 대중적 문화의 한 가운데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그것들에 의해 더 많이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전통이 오랜 역사의 시행착오 속에서 형성된 안정성을 제공하고 또 비교적 고품질의 영속적 가치들을 담지(擔持)하는 특성과 달리 대중문화는 형식과 규율의 틀보다는 오히려 자유로움 속에서 대중의 현실적 기호를 따라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청소년들로 말하자면 오히려 이런 후자의 성향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성인세대가 일반적으로 전통을 지키려고 하거나 옛것에 대한 향수가 강하고 규율에 순응하는 편인데 비해 청소년은 이점에 있어서는 성인세대와 달리 파격적이고 대중적인 것에 더 매료되고 거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새로움에서 나름대로 세상과 사물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복음의 본질은 성인이나 청소년이나 다 동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예배 스타일이나 형식 속에 청소년들이 쉬 친숙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청소년문화가 속한 대중성은 나름대로 그 안에 담긴 메시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전달의 매개로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왔다. 그 대중성은 오랜 시간을 두고 의도적 학습으로 터득해야 하는 전통적인 가치와 격식들과는 달리 청소년들의 삶과 기질에 친근하고 접근이 용이한 특성 때문에 청소년들의 호응을 더욱 끌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싫든 좋든 이런 대중성에 친숙한 청소년의 하위문화를 이해하고 그 위에서 청소년을 위한 예배를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형식상으로는 새로운 과거의 패러다임에 여전히 머무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풍속에 의해, 대중성 속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친근한 동시대의 문화적 패턴에 대해 눈을 감고 있으면서 그것이 마치 진리의 순수성을 지키는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정신의 고상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혜로운 대처가 아니다. 청소년들은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은 예배라 하여도 어른들의 예배 패턴에서 기대치 보다 훨씬 못 미치는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어떤 장년부 예배들이 어른들의 기준에서 볼 때 비교적 신선하고 새롭다는 느낌을 준다 하여도 역시 마찬가지다. 청소년 하위문화의 상징체계들과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는 각 시대의 사조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갖듯이 청소년과 성인 세대 사이에서도 비록 덜 고형질의 것이기는 하지만 세대적 차이를 극명히 드러내는 사조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구세대는 읽고 씀으로 전달하는 세대지만 신세대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세대이다. 세대를 구분하는 시간의 길이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구체적인 예배의 포맷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들에서이다.
B. 전략적 변용이어야 할 청소년 예배
오늘날은 정보의 홍수 시대이고 난타적 홍보전이 횡행하는 시대이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마치 바닷물처럼 넘치고 있고 그 가치를 미처 판단하기도 전에 무차별적으로 우리 주변에 쏟아지고 있다. 지식과 정보를 앎에서 오는 희열보다는 혼란이 먼저 앞서는 상황이다. 또한 매시간 매초마다 영상이든, 사이버이든, 음성이든, 모든 가능한 공간을 이용한 공격적 홍보들이 작은 틈새도 허용하지 않고 소비자를 뇌쇄적으로 사로잡기 위한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광고의 카피가 유행어가 되고 광고의 컨셉이 실제 생활 속에서 공감을 나누는 소재가 되어 파고들고 있다. 이런 상업주의는 건전한 공감적 가치기준에 일조하기 보다는 상업적 이익이라는 특정 목표에 주안을 두기 때문에 그 폐해가 적지 않지만 상당수 젊은이들이 그런 시대적 조류에 비켜서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의 전달과 보존을 위한 노력이 청소년들을 위해서도 기울여져야 하는데 옛 형식과 요소만을 고집하는 것으로는 곤란하다. 복음의 본질마저도 대중주의적 허상과 반 기독교적 요소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아무리 본질이 중요하다 하여도 그 본질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과 훈련이라는 수단으로 오늘의 청소년들을 복음 앞에 붙잡아 두는 일은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특유의 엄격한 규칙을 어릴 때부터 강요하는 엄격한 단일 종교사회라면 아마도 형식적으로나마 이런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대 사회나 혹은 신앙은 다르지만 이슬람 사회 등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미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패러다임으로 신앙적 규율을 세우고 통제하기에는 어려운 여건을 가지고 있다. 설사 가능하다 하여도 그런 사회의 고집은 곧 타자와의 고립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경직성과 역기능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청소년들을 위한 예배는 마치 상업광고의 카피와 이미지가 오늘의 대중의 감성을 움직이고 제한된 시간 안에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처럼 전략적이어야 한다.
우선 첫째로 청소년들은 그들의 분출하는 에너지가 적절히 발산될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는 앞서의 이해를 토대로 그들에게 친숙한 내용과 장르를 담을 수 있어야 하겠다. 음악의 경우, 그들이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 수용적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드럼을 치거나 일부 관악기를 사용하는 일, 율동을 하고, 빠른 템포로 찬양하는 것들이 그 형식 자체를 경박하게 치부할 필요는 없다. 음악에 대한 일반 기독교인들의 인식은 때로 지나치게 협소한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음악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는 중립적 특질이 강하다. 어떤 류의 음악에 친숙한가에 따른 선입견의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주하, 『음악과 신학』(서울: 요단출판사, 1997), 390.
음악은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중요한 운반기구가 된다. 근자에 대중가요들 속에서 눈에 띄는 경향 중 하나는 과거 10년, 20년 전에 유행했던 음악들을 오늘 청소년 가요 스타들이 새롭게 소위 ꡐ리메이크ꡑ하여 부르는 점이다. 그 내용과 가사는 분명 과거의 것이지만 그것을 싣고 있는 멜로디는 유사한 맥락의 최신 스타일이다. 그런 곡들에 대해 시대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것으로 수용하는 오늘의 청소년 문화의 일면을 볼 때 분명 메시지가 문화의 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싣고 있는 도구들이 그런 것임을 확인케 한다. 신약시대 안에서도 음악의 가사는 물론이고 음조(tune)에 있어서도 다양성을 반영하는 내용이 에베소서 5장 18절, ꡒ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ꡓ과 골로새서 3장 16절 ꡒ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ꡓ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People in the Presence of God: Models and Directions for Worship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PublishingHouse, 1988), 81-82에서 Barry Liesch는 전통적이고 오래된 음악으로서의 ꡐ시ꡑ가 있었는가 하면 비교적 당대에 만들어진 ꡐ찬미ꡑ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즉흥성을 띈 ꡐ신령한 노래ꡑ등이 있었다고 말한다.
둘째로 청소년 예배는 그들을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예배자의 수동성은 예배의 순서에 참여 기회를 늘리는 형식적 측면도 있지만 내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들의 관심 사안을 소재로 한 예배가 될 때 그들의 심적, 영적 참여를 최대화할 수 있다. 이를 위한 구체적 노력으로서 청소년 예배에서 사용되는 성경이나 설교의 언어 등이 신중한 검토와 함께 좀더 쉬운 역본이나 표현 등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청소년들이야말로 언어의 변천에 가장 민감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들은 주지적(主知的) 노력을 통해서 보다는 주정적(主情的) 노력을 통해서 현실을 경험하는 측면이 강하다. 이것은 복음을 수용함에 있어서 결코 어느 한 측면을 우위시 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다른 쪽을 열등시하는 논리와는 다르다. 청소년이라는 예배의 대상에 대한 탄력적 이해를 기초로 고려될 수 있는 것들이다.
셋째는 이들 예배의 전달매개들이 언어적, 구두적(口頭的)인 형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 이미지를 사용하는 기법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시청각의 시대요, 멀티미디어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그들의 인지수단이 다각화(多角化)되어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한 마디로 제시하자면 이미지와 상징을 통한 인지(認知)가 대폭 강화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에서 영상을 사용하는 일도 그 방안의 하나가 될 수 있겠고 또 시, 청, 미, 후, 청각을 모두 사용한 성찬식 예배를 좀더 기획성을 가지고 시행하되 청소년들의 용어와 감각에 맞게 다듬어 시도하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넷째는 청소년 예배가 그들을 둘러싼 문화와 동질성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 예배가 그들의 삶과 연관된 소재들로 채워져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속한 사회와의 이질감으로부터 오는 고민을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우리의 물리적 현실을 배타적으로 규정하는 이분법 위에 서 있지 않다. 창조의 섭리는 인간의 영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몸과 자연 모두에 미쳐 있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행위, 또 그것을 통해서 산출하는 생각과 유희 등은 비록 죄성에 물든 것이어서 변혁적 과정이 필요할지언정 우리가 피하여 살아갈 배타적 환경이 아니다. 김영한, 『한국기독교 문화신학』(서울: 성광문화사, 1995), 125-127.
청소년들은 비록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상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세계를 사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소중한 것을 발견하였지만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시간대, 같은 문화 속에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과 같이 복음의 은총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무의식적으로 원한다. 신앙 안에서의 삶과 세상에서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밀어 부칠 경우 그들은 이중적 정체로 인해 혼란과 곤혹을 느끼거나 아니면 아예 철저히 이중적 구조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청소년들을 문화적으로 지나치게 분리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친숙한 문화적 옷들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가운데서 신앙적 가치기준에 의해 버리고 선택하는 안목을 길러주는 것이 필요하다. 예배는 이런 맥락에서 그것을 가장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장이기도 하다.
C. 성인예배와 연계성을 가진 청소년 예배
그러나 청소년 하위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에 친한 예배의 요소와 내용들을 복음의 운반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과 성인예배와의 연계성 또한 중요한 관심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청소년 성인신자들 모두는 다 같은 한 회중(congregation) 한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한 교회의 전체 교인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그 상태로 늘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다. 결국 성장해서 언젠가는 한 회중의 중심집단이랄 수 있는 성인 예배 속에 합류하게 된다. 즉, 여기서 곧 청소년 예배 자체를 위한 고려에 덧붙여 어른 예배와의 연계성의 필요가 발생하게 된다. 분명 그들의 예배는 성인예배와 단속성(斷續性)을 지닌다. 그들의 예배가 그들만의 개성과 정서와 상징체계에 의해서 구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장년예배와 연속성을 갖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청소년, 혹은 청년 예배의 장을 떠나서 장년예배의 장에 진입하게 될 때에 그들에게 성인예배가 낯설게 느껴져서는 안 된다. 많은 수의 청소년 혹은 청년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성인에 이르면 예배를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본다. 이런 면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청소년 예배와 장년 예배 사이의 거리도 그 원인이 아닐 수 없다. 장년부라는 새로운 하위문화권 속에 진입하면서 작은 문화적 충격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메시지의 본질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님이 당연하다. 다만 그 복음을 실어 나르는 매개의 차이에서 생기는 수용의 낯설음이다.
이러한 청소년 예배와 어른 예배 사이의 연계를 위한 대책으로서 물론 청소년 예배를 그들의 문화적 고려 없이 성인예배와 같은 스타일과 내용으로 감행하는 방법도 잘못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극도로 엄격한 폐쇄적 종교 공동체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이런 무모한 방안을 선호하는 교회란 매우 드물다. 또 다른 대책으로서는 교회의 프로그램 운용상 장년부와 청소년부가 그룹 대 그룹의 행사를 가지면서 그 간격을 좁히고 친밀성을 유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신앙을 형성하는 예배 속에서 그 연계성을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바람직하기는 이런 단속성을 해결하는 방법은 청소년 예배에 성인예배의 요소들을 일정 부분 겸하게 하는 것이다. 음악이나 예배 순서들의 일부를 사용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 앞서서 말한 대로 장년부가 주로 사용하는 찬송가 등을 청소년 예배에서 기획 차원에서 사용케 하는 것이다.
청소년 예배의 효과를 위한 노력을 별도로 기울이지 않고 있는 교회들에서야 이런 일을 일부러 할 이유조차도 없을 것이지만 청소년 예배 자체를 위한 고려는 물론이고 장년부 예배와의 항구적인 연속성을 생각하는 입장에서라면 후자의 노력이 가일층 필요한 것이다. 만일 그 음악 장르에 대해 흥미를 갖지 못한다면 앞서서 소개했던 대로 청소년들의 템포와 스타일로 바꾸어 사용하는 일도 좋을 듯 싶다.
청소년 예배와 어른 예배와의 연계성과 관련해서 한가지 첨부하여 생각해야할 사안은 과연 청소년 예배의 위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청소년 예배는 그 자체로서는 불충분하여서 전교인 예배에 추가적으로 참석해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의 충분성을 인정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점은 서로 예배 시간대가 다를 경우 두 예배에 모두 참석해야 된다는 주장과 그럴 필요가 없다는 주장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변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청소년 예배의 독자성은 그 예배의 내용과 운영에 따라 결정되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예배의 주관자가 소정의 신학교육을 통해 적절히 훈련과정을 마치고 안수 받지 않은 사람일 경우 안수목회자에 준하는 신학적 소양에 충실하고 있는지, 예배 신학적 내용과 균형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또 전교인과의 연합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 등이 그 요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예배는 그 세대의 기질적 특성에 따라 특성화된 것이기 때문에 항구적인 예배 형태로 고착되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이 향후 어른이 되면서 성년에 맞는 다른 유형의 예배에 그들은 적응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청년과 장년의 문화적, 신체적, 정신적, 혹은 기질적 차이는 결코 어떤 근본적 차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연적 성장과 노령화 및 그와 상관하여 향유되는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장년에 맞는 예배의 형태로 바뀌어 간다. 가장 오랜 동안 지속되면서 가장 평균적인 층의 예배형태에 그들은 자연히 합류하여 가게 되어 있다. 청소년예배에 기울이는 노력에는 그 독자성에 대한 배려 못지 않게 장년예배와의 연계성을 위한 배려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V. 나가는 말
청소년의 시기는 강한 감수성을 가지고 격동을 품은 채 살아가는 때이다. 이 시기의 경험들은 오랫동안 이들의 전체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시기는 잘 다듬어지고 승화되어진 모습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 그리스도인들도 이에서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이들에게 복음이 필요하며 그것을 구현하는 예배가 중요하다는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 외에도 이들을 위해 예배가 구체적으로 어떤 양태와 내용을 지녀야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하나님을 가장 깊이 경험하고 만나는 장은 바로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현존과의 만남은 이들의 생애를 변화시키고 성숙시킨다. 이들이 곧 미래 교회를 짊어지고 나갈 중대한 자원인 것이다.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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