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6. 20:27ㆍ운영자자료/5.논문자료 모음
참회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대한 예배 신학적 고찰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교회력과 시간
미국에 유학 가서 맞은 첫 봄 학기 어느 날, 캠퍼스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이마에 검은 재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나는 친절하게 “네 얼굴에 뭐가 묻어 있다”고 했더니 미소만 지으면서 별 대답을 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렇게 몇 학생이 지나간 다음에야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구나 생각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그날이 재의 수요일이었다. 재의 수요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고 참회의 날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마에 재를 바르고 하루를 사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얼굴에 뭐가 묻은 것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던 구약의 전통을 따라 참회하면서 사순절을 시작하는 날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렇게 예배 의식에서 재를 바르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그날 강의가 없어서 오후에 학교에 나왔기 때문에 채플에 참석하지 못했었는데 바로 그날 재의 수요일 예배를 드리면서 이마에 재로 십자가 표시를 한 것인데 예배학 전공자의 무식함을 깊이 자인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알지 못하여 아름다운 예배의 전통과 유산을 놓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의식적인 예배(liturgical worship)를 드리는 교회에서는 참회의 수요일은 교회력의 중요한 절기로 지켜져 왔으나 주로 설교 중심의 예배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한국교회는 교회력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오랫동안 성탄절과 부활절과 같은 절기 외에 기타의 절기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하여왔음이 사실이다. 최근 들어 교회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회의 수요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거나,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배학의 흐름에서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예배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된 ‘예배복고운동’(Liturgical movement)의 영향으로 절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데, 1940년 스코틀랜드 교회에 예배 모범을 펴내면서 마리아와 성자 축일과 관련된 절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력을 복원한 이래 개혁교회 예배 전통은 교회력의 복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물론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루터교나 성공회의 경우에는 교회력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여타의 개신교회들과 개혁교회 전통에 있는 교회들도 차츰 잃어버린 예배 전통과 의식들을 되찾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회력은 “거의 모든 기독교 예배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며, 시간은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특정 시간인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고 계시하신다는 신앙에 근거를 둔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신 사건은 역사 가운데서, 다시 말하면 특별한 시간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간의 중심성은 기독교의 예배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시간으로부터 멀리 도망하지 않고 시간을 예배의 가장 중요한 기본 구조로 사용하여왔다. 우리의 현재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행동하심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서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구원은 현재의 사건에 기초를 둔 실재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시간을 사용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바탕이 되는 바로 그 사건을 다시 경험할 수 있게 되고, 기념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교회력은 “시간의 언어”이며,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세계와 그가 행하신 일들을 새롭게 체험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언어”이기 때문에 예배에서 교회력은 중요성을 가진다.
기독교의 예배의식에서 교회력을 중요시하는 것은 주님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주요 사건들을 늘 기억하게 하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것들을 늘 염두에 두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력을 통해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하여 그분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사건들과 베푸신 사랑을 늘 새롭게 경험하게 해준다. 교회력은 단순하게 반복되는 경축이나 연례적인 행사가 아니라 그 사건을 새롭게 기억(회상)하게 하고, 오늘의 사건으로 맛보게 하며, 미래적은 사건을 예견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모든 날은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새롭게 오시는 강림일이 될 수 있으며, 주현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로 나타나시며, 수난절에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다. 부활절에는 그가 다시 사시며, 오순절에는 성령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의 삶 가운데 다시 오신다. 시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은 사건은 역시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다시 일어나며 경험되는 사건이 된다. 그래서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절기(교회력)를 명령하시고 지킬 것을 명하신다. 교회에 있어서 그 절기들은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그 절기는 “현재적이고 생생하게 경험될 수 있는 실재”이다. 교회는 이러한 교회력을 따라 예배함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을 가지며, 그 풍성함을 누리게 되고, 그 시간을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이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이것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계속해서 거룩한 삶의 경험과 고백으로 속량하는 방법이 된다.
이러한 교회력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되고 형성되었다. 이것은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큰 역사하심과 사건들을 새롭게 경험하며, 그 사건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의미를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숙고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교회 생활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와 관련이 있게 되며, 이러한 시간의 활용이 바로 주장하는 바를 드러내게 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최우선적으로 여겼으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까를 알려고 하면 그들이 이러한 교회력적인 시간을 어떻게 조직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증언하기를 원하였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그러한 사건, 다시 말해 복음을 기록하려고 고무하여 다른 사람들이 처음부터 목격자 된 사람들이 전해준 바를 따를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한다. 그들은 그 사건을 증거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늘 그것을 새롭게 경험하기 위하여 부활의 날에 함께 모인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주일은 “기록된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경험하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교회력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성탄도 단순한 설화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매해 일어나는 경험적인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배에서 교회력의 바른 회복은 하나님의 시간을 통해 허락하시는 풍요를 효과적으로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된다.
참회의 수요일, 그 교회력적인 의미
교회력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과 성령님을 통해 오늘도 계속되는 일하심에 있다. 교회력과 관련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력은 하나님의 은총을 오직 받아들이기만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계속적으로 기억하게 하는 예배의 소중한 유산이다. 그러므로 교회력은 “은총의 교회력”이며, 우리들 스스로 “구원사의 모든 과정을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이렇게 교회력은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게 하고 누리게 하는 “항구적인 수단”(constant means)이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게 하고 누리게 하는 교회력의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인 “참회의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혹은 “성회 수요일”로도 불리기도 하는 절기로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사실 이것은 일상적으로 부르는 구어적인 명칭이며 공식적인 이름은 “재의 날”(the Day of Ashes)이다. “참회”라는 말은 재가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직접적으로 “재”라는 용어를 붙이기도 하는데 이는 이날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이마에 재로 십자가 표시를 하고 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재와 관련하여 “성회”(聖灰)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수요일”이란 용어는 사순절이 보통 주일을 제외하고 40일전에 지켜지다 보니 언제나 사순절은 수요일로부터 지켜지는 것 때문에 붙여진 개념이다.
사순절이 비교적 일찍이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정되어 지켜졌다면 사순절의 시작일인 참회의 수요일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7세기 경에 정식으로 사순절에 편입되었으며, 재를 바르는 의식은 11세기경 독일 라인지방에서 구약시대의 참회방법을 따라 속죄의 의미로 행해지던 예식이 12세기 이후 예배 절기에 유입돼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앞에 4일을 더 첨가한 것은 6세기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보편화 된 것은 7-8세기 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전체 금식의 날을 36일에서 주님의 금식일과 같이 40일로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6일도 1년 365일의 십일조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십일조는 금식과 참회로 드리는 것이었다.
참회와 회개의 절기인 사순절의 시작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회개하고 참회하는 날인 참회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는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참회하는 것이 이 날로 끝이 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순절 절기가 회개와 참회의 절기라고 보았을 때 참회를 시작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회의 수요일로 참회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사순절 기간의 모든 날은 참회와 자기 정화를 위해 노력하는 날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참회와 금식과 금욕적인 행동의 강조도 부활과 연결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맞이하기 위한 청결이며, 나를 새롭게 하여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 앞에 나를 세운다는 의미가 강하다. 사순절 40일 동안 속죄로 우리의 생활을 바꾸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합당한 준비를 하는 기간이며, 장차 이루어질 부활을 기다리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참회의 수요일은 이방 문화나 절기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었으며, 보다 의미 있게 사순절을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것은 성경적인 바탕 속에서 행해진 절기였고, 의식이었다. 초기에는 교회의 징계를 받은 자들이 참회하고 복귀하려는 자들에게 참회에 대한 공적인 표시로서 재를 이마를 바르는 데서부터 유래되었다. 징계 중에 있는 사람들을 복권하는 의미로 활용되던 이러한 관습이 이제는 모든 교인들에게 적용되는 예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마에 재를 바르는 의식도 성경적인 배경 안에서 이루어졌다. 요한 계시록은 이마에 인을 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해 준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계 14:1, 개역개정판). 그들의 이마와 손에 666의 숫자가 새겨져있던 짐승을 따르는 자들과는 반대로 그들은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인 쳐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계시록에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을 쳤던 것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에 나타나는 구절과 평행구절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에스겔도 인치는 것을 하나님의 종들을 보호하신다는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면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겔 9:4-6; 개역 개정판). 물론 여기에서 예루살렘 거주자들 중에 의로운 사람들의 이마에 인(tav)을 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문자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치 않다. 여기에서 “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tav는 히브리어 알파벳 중의 한 글자이다. 고대 사본에서는 그것은 마치 헬라어의 chi와 같은 모양으로 보였다. 마치 양쪽으로 두 선이 교차된 것과 같은 X 모양과 같은 글자였다. 이것은 헬라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단어, christos의 첫 자와 같은 것은 우연한 일치이다. 유대 랍비들은 히브리어 tav와 헬라어 chi 사이의 연결성이 있다고 이해하였으며 이것은 계시록의 기자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 위에 인을 친다는 사실을 기록할 때 틀림없이 그의 마음 가운데 이러한 구약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교회의 교부들도 tav-chi-cross(십자가)-christos를 연결하여 이해하였으며, 그들의 설교 가운데서 그것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들은 에스겔에서 그리스도의 종들로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마에 인을 친 것의 예언적인 측면을 보았다. 이것이 중세 교회로 하여금 이마에 십자가의 표시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문헌에 의하면 성도들의 이마에 십자 성호를 그려주던 것은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징으로서의 재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상징의 능력을 갖춘 동물”이며, 상징들을 새롭게 만들고, 그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사는 존재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상징적 환경이 중요함이 강조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상징적 환경 속에서 깨어나며, 인간은 자신의 영적건강을 위해 스스로 상징적 환경을 만드는 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시 사회의 동굴 벽화에서 시작하여 현대의 여러 상징들에 이르기까지 의미를 주는 상징을 새롭게 창조해왔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언어 자체도 인간의 상징성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상징은 “두 개의 실재(reality)를 이어주며 그 둘을 하나의 새로운 통일체 속으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상징은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포착할 수 있는 것들을 뛰어넘어 다른 사유들에로 이끌어 간다. 그래서 상징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점에서 보면 상징은 하나의 다리와 같이 역할 하는데, 의식과 무의식의 두 세계, 하나의 실재와 다른 실재 사이를 연결시 켜주는 다리와 같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상징은 하나님과 인간, 무한하고 궁극적인 것과 유한하고 구체적인 것을 연결시켜 준다. 이렇게 상징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뿐 아니라 삶의 방향성을 제공”해 준다. 인간의 영혼은 상징적 환경 속에서 되살아나며, 원천적으로 상징적인 존재이다. 즉 상징을 통해 내면의 실재에 도달하고 상징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함으로써 온전성(wholeness)에 이르는 존재이다.
타 종교의 예배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기독교 예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십자가, 배너, 촛불, 가운, 강단, 성만찬상과 세례반 등 많은 상징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예배 행동을 통한 상징들도 많이 활용되어 왔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예배에서는 상징이 많이 상실된 것이 사실이지만 현대 예배학에서는 상징과 이미지가 많이 활용되고 있다. 상징은 말을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에게 실로 많은 것을 말해 주기 때문에 상징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담고 있는 신학적 의미까지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남과 영적인 접촉은 상징과 표상을 통해 이룩되며, 그 내면에 감춰진 사실과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표징과 상징, 그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의미를 알아듣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특히 예배 가운데 여러 표징과 상징이 사용되어왔다.
사순절기에 가장 중요한 상징물 중의 하나를 들라면 그것은 “재”이다. 사순절을 처음 시작하면서 머리에 재를 받으면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재가 뜻하는 상징을 통해 사순절기의 삶을 묵상하고 그 의미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한다. 그렇다면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첫 날에 사용하는 ‘재’라는 상징물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재는 자신을 태워드림의 열정과 헌신을 의미한다. 재의 예식에 쓰는 재를 마련하기 위해 한 해 전, 종려주일에 사용하였던 종려 나뭇가지, 곧 성지(聖枝)를 모아서 태운다. 이렇게 성지를 태워서 얻은 재를 우리는 재의 예식에 쓴다. 재가 상징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면 아무 재나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참회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거의 일년 전부터 준비되어야 한다. 이는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찬송의 도구로 세워주셨으나 찬양과 감격을 잃어버림으로 메말라 버린 자신을 태워 정결케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재가 준비된다. 이는 자신을 모두 태워버린다는 의미가 있고, 사순절기에 하나님께 대한 열망과 열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태워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재는 '정화'와 '순수'의 의미를 가진다. 종려나무 가지가 태워지는 것은 이렇게 메마른 심령이 성령의 불로 태워져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재를 받고 살게 되는 사순절기는 자신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순수한 본래의 모습, 흙과 같은 존재,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는 자신의 것으로 남는 생활이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세 번째는 재는 유한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가지는 재의 의미는 티끌의 상징한다. 재를 받을 때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창세 3,19)는 말씀은 인간의 유한성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결국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적인 존재임이 상징적으로 확인된다.
네 번째로 농경문화에서 재는 '밑거름'이다. 태워진 재는 가지고 있던 모든 형체가 사라지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재를 받으면서 새로운 삶을 출발하고 그리스도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향한 밑거름과 같은 생활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마지막으로는 참회와 회개의 의미이다. 재를 이마에 받는 것은 참회와 애통의 마음으로 재를 머리와 온 몸에 뒤집어썼던 구약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이다. 구약의 욥은 고난이 지나간 후 하나님을 뵙게 되면서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고백한다. 니느웨 사람들도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서 재를 뒤집어쓰고 통회하였다(욘 3:6).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는 모습을 “재에 앉아 회개”하는 것으로 묘사하신다(마 11:21).
이렇게 참회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풍부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상징은 종교성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종교에서 상징이 사라지면 그것은 자칫 관념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상징을 우상화하지 않는 한 상징이 갖는 의미는 성도들의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재의 상징성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은 교회력이 주는 새로운 풍성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참회의 수요일”에 대한 예배 신학적 이해
참회의 수요일(Ash Wednesday)은 죽음과 참회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성회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의식에서 온다. 여기에는 풍부한 영적 자산과 상징성을 담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재(灰)를 죄의 회개하는 표징과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적인 존재임을 일깨워 주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恍맛? 수요일은 재가 더 이상 남지 않고 다 타버리고 황폐해진 상태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면서 참회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할 것을 상징적으로 경험하게 하고 숙고할 수 있도록 하는 절기이다. 이러한 절기가 바르게 지켜지기 위해 마땅히 숙지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예배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첫째는 참회의 수요일은 지은 죄와 잘못에 대한 진정한 참회의 시간이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주요인이 되며 하나님의 은혜의 강가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그래서 이사야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라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한다. 진정한 회개와 돌이킴이 없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는 누릴 수 없다. 이것은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죄를 함께 포함한다. 느헤미야는 민족의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민족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중보적으로 참회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죄와 가족의 죄를 함께 자백한다 (느 1장).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들이 크다. 또한 교회와 지도자들이 지은 죄도 크다. 참회는 “과거 잘못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회개”를 포함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는 비결이 된다. 현대 교회에서는 죄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언급하기를 주저한다. 교인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죄의 참회가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진정한 회개와 돌이킴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몇 년 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이름으로 작성된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는 천주교가 지난 역사에서 저지른 과오를 포괄적으로 반성하는 형식의 문건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문건은 천주교 도입에서 최근까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고 역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점을 반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천주교회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참회를 통해 스스로 거듭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참회는 로마교황청이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고백하고 반성한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한국교회협의회(KNCC)에서도 ‘21세기의 기독교신학선언문’도 한국개신교의 과거 잘못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회개를 담고 있다. 일제하 신사참배, 독재정권 협력 등 개신교의 과오를 회개하고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교회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 인권 수호에 기여하지 못한 점을 뉘우치고 있다. 이 선언문은 과거사 반성에 그치지 않고 성장제일주의와 물량주의, 비민주적인 교회운영 체계, 교단정치의 파행성, 교회 내의 성차별, 기복주의, 내세주의 등 오늘날 한국 교회의 병폐에 대해서도 참회하고 있다.
어쨌든 새 천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역사적인 반성문을 제출하고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했다는 점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난날을 돌이켜 반성적 성찰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문건 하나 발표했다고 반성과 참회는 끝난 것은 아니다. 지속적인 자기 성찰과 쇄신과 갱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참회로부터 시작된다. 교회가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바로 서려고 하는 인식은 바로 설 수 있는 비결이며,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파스칼이 말한 대로 “죄가 많은 것은 분명 악이다. 그러나 죄가 많으면서 그것을 인정할 마음이 없는 것은 더 큰 악이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죄인은 의인으로 인정받았으나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의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죄인으로 배척받았다.(요 8장). 참회의 수요일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고, 참회하게 하는 절기이기에 자신을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고, 이 민족과 사회를 바라보면서 진정으로 참회의 절기가 되게 해야 한다.
둘째는 참회의 수요일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늘의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죄를 자백하고 참회하는 자의 기본자세이다. 참회의 정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예배 행위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인 “키리에 일레이손”(Kyrie elesion)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세대는 넉넉하게 가졌고, 과학 기술문명의 발달과 함께 인간 이성과 능력을 깊이 의뢰하면서 마치 자신이 주인이고, 왕인 것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세대는 ‘끼리에 일레이손’을 잃어버린 세대이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 간절함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던 수로보니게 지방의 여인처럼 그러한 간절함을 가지고 주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자세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 앞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참회의 수요일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절기이며, 그것을 믿고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애타는 심정으로 그렇게 구하는 절기이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을 체험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절기이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가 들은 위대한 소식은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위대한 부르심은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는 이제 긍휼히 여기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셋째는 인간의 본래의 모습과 유한성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참회의 수요일의 첫 번째 메시지가 참회라면 두 번째는 인간의 유한성(mortality)을 인식하는 것이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십시오”라는 참회의 수요일의 메시지는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메시지이다. 사람이 죄악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인간의 ‘유한성’을 망각하고 ‘무한성’을 추구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이 에덴에서 자행된 죄악의 첫 번째 유형이었다면, 6장에서 초자연적 존재들과 결혼하여 거인족을 탄생시키려고 했던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바벨탑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유한적인 인간이 초자연적인 신의 수준으로 나아가려는 욕심에서 만들어진 사건들이다. 인간이 실존적 한계를 뛰어 넘어서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것을 성경은 악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일종의 탐욕이며, 정신분석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영원에 대한 시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영원성’ 혹은 ‘무한성’(immortality)은 신의 영역이다. 오늘날 생명공학은 이러한 영역 침범의 현상이 뚜렷하게 보인다. 인간의 능력을 통해 생명의 문제를 통제하려는 시도들이며 하나님의 영역까지 다스리고 싶어 하는 탐욕이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 했던 원죄 사건도 그 본질은 바로 유한한 자신의 모습에 불안해하면서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욕심으로 나오지 않았던가? 성경은 우리의 유한성을 설명하면서 티끌(흙)에서 왔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간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만이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게 하며, 그러한 유한성의 극복은 무한성의 상징이신 하나님에 대한 “존경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렇게 할 때 인간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수용능력이 생기고, 삶의 방향감각도 생긴다.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영원을 생각하게 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또한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함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게 될 때 진정한 존경대상에 대한 구체적 경험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죌렌 키엘케골은 실존으로서의 인간은 그 자체가 유한성을 드러내지만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진정한 실존의 지평에 이른 인간은 유한성으로 끝나지 않고 무한성으로 고양될 수 있다고 했다. 참회의 수요일은 이렇게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면서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게 할 것이며, 무한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길 수 있도록 하는 절기이다.
네 번째로 참회의 수요일은 은총의 또 다른 시작으로서의 하나님 바른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참회의 수요일과 함께 시작하는 사순절기는 단지 수난과 고통만을 생각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지는 풍성한 은총의 절기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를 지으신 본래 우리의 모습을 되찾게 하는 은총이 풍성한 시기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재창조의 시간이며, 하나님의 최고의 피조물로 지음 받는 존재들이 이제 이 은총을 깨닫고 또 다른 시작'을 하는 절기이다. 하나님 앞에 용납 받는 것도 큰 복이거니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는 절기이며 증거하는 절기이다. 은혜는 누리는 것이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제 그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은총의 옷을 덧입히시고, 우리를 보내신다. 삶의 현장에서,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부르신다. 그러므로 참회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은 하나님의 은총의 자리로 나아가는 시간이며, 그 “마지막 최고의 말”인 은혜를 힘입고 새롭게 하나님을 섬길 결단을 해야 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은혜에 목말라하는 세상으로 나아가 그분을 전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참회의 수요일은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성경에서는 이마에 표시를 하는 것은 소유권의 상징이었다. 즉 이마에 십자가 표시를 함으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세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영적인 표지와 인침을 모사(imitation)한 것이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세례식에서 죄와 사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의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롬 6:3-18)과 같은 ?퓜見? 갖는다. 이것은 또한 요한 계시록에서 묘사하고 있는 택정함을 입은 14만 4천명과 같이 하나님의 종들로서 의인의 길을 따라 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참회의 수요일은 용납 받고 사함을 받는 자의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 편에서는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그 은혜를 누리지만 그분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아들을 버리심으로 가장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다.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신 것이 성육신이고 그냥 계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가슴에 박힌 죄의 쓴 뿌리를 뽑아내시길 위해 하나님 당신을 내 놓으신다. 이것을 제임스 화이트는 “하나님의 자기 주심”(God's self-giving)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키엘케골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소개한다.
죄인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냥 팔을 벌리고 서셔서 “나에게 오라”고 말씀만 하고 계시지는 않으신다. 계속해서 서서 기다리신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그분은 단지 서서 기다리시지만은 않으신다. 직접 찾아 나서신다. 목자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듯이, 여인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 온 집을 헤매며 찾듯이, 그분도 찾아 나서신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그 어떤 목자도, 그 어떤 섬세한 여인들도 갈 수 없는 참으로 먼 길을 그분은 이미 가셨다. 정말로 하나님의 신분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실 만큼 무한히 먼 길을 이미 가셨다. 그렇게 죄인 된 우리들을 찾아오셨다.
그렇다. 그분은 죄인 된 우리들을 찾아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를 완전하게 하나님의 소유 삼으시려고 십자가에 자신을 던지고 계신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고 계셨으며,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되었다. 복음서가 사도 요한을 가리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밝혔듯이 우리의 신분도 그렇게 바뀐 것이다. 참회의 수요일과 사순절은 그 놀라운 사랑과 치유하시는 은혜 앞에서 감격하는 절기이며, 새로워진 신분으로 인해 찬양하는 절기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절기이다.
여섯 번째는 참회의 수요일은 부활을 준비하는 절기로 진입했음을 알려주며 소망의 시작을 알려주는 절기이다. 모래밭과 자갈길을 헤치고 걸어온 길, 구불구불한 언덕을 지나 갈보리 언덕에서 고통의 관을 쓰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 사순절이라면, 머리 위에 재를 받으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서 있으나 머잖아 다시 피어날 백합을 바라보며 구원의 희망을 품는 절기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고난의 동참의 시간이 사순절의 기본적인 마음 자세라면 그 마음의 바닥에는 그분의 부활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시간이다. 지금 부활의 영광을 기다리면서 마치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로 들어 가셨던 주님과 같이 머리에 재를 얹고 사순절기의 광야로 들어가게 된다. 사순절기는 화려함과 풍족함의 삶을 피하고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절제의 삶으로 이어지지만 그 중심 속에서는 언제나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그들은 백합화가 활짝 피어날 부활의 아침을 기다린다. 이마에 재를 얹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치고 우리의 모든 죄를 참회하고 뉘우침으로 그 은혜를 받는 절기이며, 앞으로 다가올 부활을 준비하는 새로운 시작의 시간인 것이다.
참회의 수요일 예배의 실제
(참회의 수요일 예배)
▣ 예배에로 나아감 ▣
전 주 (Prelude)-------------------------------------반 주 자
예배에로부름 (Call to Worship)------------------------시99:5/집 례 자
집례자: 우리 다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립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회 중: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집례자: 하나님의 우리의 피난처이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회 중: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기 원 (Opening Prayer)-------------------------------집 례 자
□ 찬양과 고백 □
*찬양의 찬 송 (Hymn of Praise)----------샘물과 같은 보혈은(190장)/다 같 이
*신 앙 고 백 (Creed)--------------------------------사도신조/다 같 이
성 시 교 독 (Responsive Reading)------------------45번(요3장)/다 같 이
중 보 기 도 (Prayer of Intercession) ------------------------_____목사
□ 말씀의 선포 □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Responsive Reading)-----------------다 같 이
성 경 봉 독 (Scripture Reading)---------창 3:17-19, 딤후 4:1-8/집 례 자
말씀의 선 포 (Sermon)--------------------부르시는 그날까지/______목사
□ 응답과 성회의식 □
*응답의 찬 양 (Hymn)---------------너 하나님께 이끌리어(341장)/다 같 이
성 회 의 식 (Imposition of Ashes)--------------------------다 같 이
집례자: 오늘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지키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 주님 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예배 전통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재를 뿌리는 성회 의식을 통해서 사순절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허물을 기억하고, 우리 존재의 연약함을 기억하게 되며 참회를 통해 우리의 심령에 정한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거룩한 예식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회 중: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부터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이마에 얹어지는 이 재가 우리의 유한성(Mortality)을 나타내는 상징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살게 되는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음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집례자: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회 중: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침묵 속에서 드리는 참회기도 (Silence)--------------------------집 례 자
집례자: 이 시간 우리의 잘못들을 내놓고 주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의 정직한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나의 잘못들을 내놓고 회개합니다. (침묵하며 기도)
? 소돔성을 바라보았던 아브라함의 마음을 가지고, 대 속죄일에 열두지파의 이름을 들고 나아가 방울소리 울리며 참회하던 대제사장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무리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들을 중보하며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침묵하며 기도)
?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속에서 시작된 이 나라와 지도자들이 지은 죄를 참회하며 기도합니다. 우리 조국이 지은 죄와 우리 민족이 지은 죄들을 참회하며 기도합니다. (침묵하며 기도)
? 우리 교회들이 지은 죄들을 참회하며 기도합니다. 분쟁과 분열을 거듭하고, 말씀으로보다는 권모술수와 인간적인 계략으로 주의 초장을 어지럽혔던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지은 잘못을 참회하며 기도합니다. (침묵하며 기도)
? 우리 자녀들이 지은 죄를 참회합니다. 우리 부모님이 지은 죄를 참회합니다. 우리 형제들이 지은 죄를 참회합니다. 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알고, 모르고 지은 죄들을 참회합니다. (침묵하며 기도)
독 창(Confessional Solo) --------끼리에 엘레이송 (유지연 곡)/ _______
*참회의 시편 (Psalm of Confession) ----------------시 51편/ 낭독: _______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12)
용서의 확인 (Assurance of Forgiveness)--------------------------집례자
집례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전심으로 자복하고 통회하며 참회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3).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8-20)
확신의 찬송 (Hymn of Assurance)--------재대신 화관을 내게/ 독창:______
사순절의 시작선언 (Introduction to the Lenten Season) ----------________목사
□ 위탁과 파송 □
*공동체의 찬송 (Hymn) ---------------주의 말씀 받은 그날(209장)/다 같 이
*오늘의 위 탁 (Charge)-------------------------------------설 교 자
*강 복 선 언 (Benediction) ----------------------사도의 축복/ 목사
* 표/ 가능하신 분은 일어서서
* 예배 인도를 위한 지침
1. 본 예배는 수요일에 드려지는 예배이지만 특별 절기 예배이기 때문에 주일예배와 같이 예배 의식적인 요소를 따라 작성되었다. 수요기도회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따라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앞부분은 찬양과 기도, 그리고 말씀으로 엮어 드릴 수 있겠고, 성회 의식 이후만을 도입할 수도 있겠다.
2. 성회의식 담당자는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성회를 이마에 십자가 모양으로 발라 준다. 이때 회중은 나아와 무릎을 꿇게 한다. 성회의식 후에는 자리로 들어가 참회의 기도를 계속하게 한다.
3. 참회의 기도 시간에는 집례자가 다양한 참회의 제목을 제시하고 함께 공동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각 항목 당 1분 정도의 시간을 주는 것이 좋겠다. 이때 찬양곡이나 연주곡을 들려주는 것도 고려할 수 있겠다.
4. 참회의 수요일인 만큼 “용서의 확인” 말씀이 다소 길지만 진정으로 뉘우치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을 들려준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좋겠다.
5. 참회의 자리로 인도하고, 참회를 경험하게 하는 자리인 만큼 초대와 적절한 멘트를 제시하기 위하여 내레이터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
6. 여기에서 제시된 “끼리에 일레이손” 곡은 독창을 위해 선곡되었으나 함께 합창으로 할 수 있는 곡이나 교창 형식을 원한다면 다른 작곡자의 곡으로 대신할 수 있겠다. 흔히 "자비송"으로 알려져 있는 이 찬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래할 수 있지만, 기도의 형식으로 부르는 노래인 경우에는 짧고 간단한 곡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7. 참회의 예배인 만큼 예배 장식이나 예배 분위기 조성에 대해서 깊은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8. “사순절의 선언”은 오늘부터 새롭게 사순절이 시작되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며 비아 돌로로사 고난의 길을 걸어 올라가시는 주님의 고난의 길을 따라 순례의 길을 시작하게 됨을 선언하는 순서이다. “오늘부터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한없으신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감사하기 위해 지키는 사순절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복된 절기를 삼아 영적 성숙을 이룹시다”와 같은 멘트를 준비하면 되겠다.
9. 참회의 수요일 예배는 수요일에 행해지는 정기 집회인 수요기도회나 새벽 기도회 시간에 지켜도 좋겠고, 교회의 형편을 따라 주간과 야간에 함께 실시하는 것도 좋겠다.
나가는 말
사순절기는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참회와 속죄함을 받는 시간이다. 허무와 탄식으로 우리의 죄를 슬퍼하고 자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절기이다. 사순절의 시작일인 참회의 수요일은 이렇게 죄의 뉘우침과 참회로 이어지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음을 깊이 되새기는 절기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과 자비를 확신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절기이다. 또한 개인적인 죄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와 민족, 가족들의 죄악을 생각하며 중보자의 자세로 나아가 참회하는 절기이다. 이 모든 사회악에 대해 “내 탓이오!”를 외치면서 이 땅을 향한 나의 책임과 교회의 책임을 새롭게 되새기는 시간이다. 그러나 참회의 수요일과 사순절은 수난과 부활을 다 포함한 구속의 회상의 절기이며 감사의 절기이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고 사순절의 참 의미를 깨우치면서 영적 순례의 기간을 시작한다. 참회의 수요일은 수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나서면서 그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깊이 참회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참회만으로 끝나는 시간이 아니요, 한없으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는 시간이요, 부활을 소망하는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은혜에 대해 더욱 목말라하고 감격하는 절기이다. 이렇게 참회의 수요일과 사순절기는 하나님께로 향한 영적 발돋움의 시간이다. 가장 깊숙한 자아를 향하여, 그리고 세상과 사회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향하는 영적 발돋움의 시간이다. 이것은 참회의 수요일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순절기 40일 동안 이어져야 할 부분이요, 일생동안 이어져야 할 삶의 내용이기도 하다.
부록(Appendix)
질문으로 배우는 참회의 수요일의 의미
* 참회의 수요일은 무엇인가?
참회의 수요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며, 회개와 참회를 위한 예배 절기이다. 이날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따라 영적 순례를 시작하면서 자아를 성찰하고 나와 공동체의 죄를 참회함으로 정결케 함에 초점을 맞춘다.
* 참회의 수요일은 이방인 절기에서 비롯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수요일로부터 사순절을 시작한 것은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7세기경 그레고리 1세(재위 590-604)때에 온전히 사순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36일에다 4일을 추가하여 지금과 같이 40일이 되었다. 40이라는 숫자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 사순절은 언제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게 되었으며, 그 첫날의 참회의 수요일로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참회의 수요일은 유럽 전역의 교회에서 지켜지게 되었던 것은 900년대로 볼 수 있으며, 이때는 이미 유럽 지역 거의가 다 기독교화 되고 이방의 제의들이 사라지던 때였다.
* 왜 참회의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 혹은 성회(聖灰) 수요일이라고 부르는가?
이날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이마에 재로 십자가 표시를 하고 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보통 “재의 수요일”로 칭하기도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재’에다 강조점을 두기 보다는 ‘참회’에 강조점을 두려는 의도에서 ‘참회의 수요일’로 번역되어 사용하게 되었으며, 재와 관련하여 한자어를 사용하여 ‘성회 수요일’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어 진다. 사실 이것은 일상적인 명칭이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재의 날”(the Day of Ashes)이다. ‘수요일’이라는 의미는 그것이 보통 주일을 제외하고 40일전에 지켜지다 보니 사순절이 수요일로부터 지켜지는 것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왜 이마에 십자가 마크를 하는 것인가?
성경에는 이마에 표시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소유권의 상징이었다. 즉 이마에 십자가 표시를 함으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세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영적인 표지와 인침을 모사(imitation)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세례식에서 죄와 사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의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롬 6:3-18)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또한 요한 계시록에서 묘사하고 있는 택정함을 입은 14만 4천명과 같이 하나님의 종들로서 의인의 길을 따라 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계 7:3).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계 9:4).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 14:1). 이들은 그들의 이마와 손에 666이라는 숫자로 새겨진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을 따르는 자들과 구별되는 무리들이다.
계시록에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을 쳤던 것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에 나타나?? 구절과 평행구절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에스겔도 인치는 것을 하나님의 종들을 보호하신다는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면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겔 9:4-6; 개역 개정판). 물론 여기에서 예루살렘 거주자들 중에 의로운 사람들의 이마에 인(tav)을 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문자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치 않다. 여기에서 “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tav는 히브리어 알파벳 중의 한 글자이다. 고대 사본에서는 그것은 마치 헬라어의 chi와 같은 모양으로 보였다. 마치 양쪽으로 두 선이 교차된 것과 같은 X 모양과 같은 글자였다. 이것은 헬라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단어, christos의 첫 자와 같은 것은 우연한 일치이다. 유대 랍비들은 히브리어 tav와 헬라어 chi 사이의 연결성이 있다고 이해하였으며 이것은 계시록의 기자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 위에 인을 친다는 사실을 기록할 때 틀림없이 그의 마음 가운데 이러한 구약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교회의 교부들도 tav-chi-cross(십자가)-christos를 연결적으로 이해하였으며, 그들의 설교 가운데서 그것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들은 에스겔에서 그리스도의 종들로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마에 인을 친 것의 예언적인 측면을 보았다. 이것이 중세 교회로 하여금 이마에 십자가의 표시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문헌에 의하면 성도들의 이마에 십자 성호를 그려주던 것은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 왜 재로 이마에 표식을 하는가?
재는 비탄과 탄식을 나타내는 성경적인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성경 시대에는 죄를 회개하거나 참으로 어려운 위기와 곤궁에 처하여 하나님께 탄원할 때에 베옷을 입고, 티끌과 재 가운데 앉아 금식하면서 부르짖었는데 그때 머리에 재와 먼지를 뒤집어쓰고는 했다. 오늘날 우리가 더 이상 베옷을 입고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금식하고, 비탄과 탄식의 표식으로 이마에 재를 얹는 예배적인 관습은 남아 있다. 이것은 사순절의 구별되는 중심적인 두 가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참회의 수요일은 이마에 재를 얹는 날일뿐만 아니라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비탄과 탄식으로 마음으로 참회하는 날이다.
* 사람들이 이마에 먼지나 재를 얹는 성경적인 예가 있는가?
다음 구절들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 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삼상 4:12); “다말이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그 채색 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며 가니라.” (삼하 13:19);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dust)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삼하 15:3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 2:12-13); ”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굴며 독자를 잃음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 멸망시킬 자가 홀연히 우리에게 올 것임이니라. (렘 6: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6).
* 재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재는 죽음을 상징하며, 우리가 유한적인 존재임을 분명하게 상기시켜 준다. 이와 같이 목회자 혹은 예배 집례자가 참회의 수요일에 그의 엄지로 성도들의 이마에 재로 십자가 표시를 할 때, 그렇게 선언해 준다: “기억하십시오. 재로부터 왔으니 재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언해 주신 것(창 3:19, 욥 34:15, 시 90:3, 104:29, 전 3:20)을 기억나게 한다. 참회의 수요일에는 그러한 형식을 따라 인간의 유한성을 상기시켜 준다. 이것을 또한 장례예식에서 마지막 하관을 하면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를 외치며 취토하는 형식도 이와 유사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아담에서 창 3장에서 선언하신 말씀이며, 아브라함이 “티끌과 같은 나”(I am nothing but dust and ashes. NIV, 창 18:27)라고 했던 고백과도 같은 내용이다. 참회의 수요일은 재를 통해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적인 존재임을 상기시켜 주며, 이 생명이 끝나기 전,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회개하고 용서의 복음을 새롭게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 참회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어떻게 준비하는가?
재는 전년도 종려주일에 사용하였던 종려가지를 보관하였다가 그것을 태워 만드는 것이 예배의 전통이었다. 가톨릭의 전례 전통에서는 사제가 재에 축복한다. 그러나 원래 재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지 않고 참회자들에게 하였던 것이 예배의 전통이었다. 이것은 재의 축복과 이마에 재를 묻히는 분배의식은 일부 개신교 교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의 예전적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은 종려주일에는 교인들이 손에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양하고는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종려주일에 종려가지를 사용하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이러한 예배 전통의 의미를 살리려면 종려주일에 강단 꽃꽂이를 종려나무 가지로 하게하여 그것을 보관하였다가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 왜 전년도 종려주일에 사용한 종려나무 가지로 재를 만들어야 하는가?
종려주일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기쁨으로 호산나를 외치며 맞이하였던 승리의 입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그분의 오심을 경축했다. 물론 그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오고 계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다 알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오시는 주님을 경축한다. 우리는 종려주일에 사용된 그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함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우리의 죄가 그분을 죽게 했음은 애통해 해야 한다. 또한 오시는 주님을 찬양하도록 찬양의 도구로 쓰인 가지가 말라진 모습은 죄악 가운데 빠진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참회의 수요일의 재는 이렇게 준비되었으나 개교회의 형편의 따라서 할 수 있겠고, 다만 거룩한 예배에서 사용될 것이라면 성별하여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목회적으로는 1년 전부터 준비하는 치밀함이 필요하고, 그리하기 위하여 내년 참회의 수요일 예배를 위하여 올해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미리 준비된 종려나무 가지를 태워 재를 만들었다면 다른 물질을 섞지 말고 성경에서 치유를 위해 사용되었던 기름(oil)을 섞어 준비하면 이마에 십자 표시를 하기가 수월해 질 것이다. 아무런 기름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는 만큼 올리브유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이마에 재를 받아야 하며 진종일 그 상태로 다녀야 한다고 강조해야 하는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강요하거나 무리하게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기도와 회개, 비탄과 슬픔의 마음을 가지고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간구해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그것은 가장 적절하면서도 가시적인 영적 표지(visual spiritual reminder)임을 강하게 부각시킬 필요는 있다. 또한 기독교 문화가 아닌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진종일 이마에 재를 지우지 않아야 한다고 무리하게 강조할 필요도 없다.
* 참회의 수요일은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의무적인 성일인가?
반드시 율법적으로 참석해야 한다고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회의 절기인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날에 이러한 사순절의 예배 신학적 의미를 깨닫게 하여 예배에 참여하도록 독려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금식과 금욕의 날로 지키면서 주님의 고난의 순례에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적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해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은둔의 시간(retreat)을 가지셨던 것처럼 사순절은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이 주님의 순례에 동참하는 시간이다. 주님의 광야 40일은 기도와 명상, 준비와 숙고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주님의 순례에 함께 동참하는 첫 날이기에 영적인 의미를 두면서 참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흔히 참회의 날에는 성전으로 나아갔던 성경적 전통을 따라 평일이지만 교회의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은 적절한 신앙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맑은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과 베푸신 은혜를 상고하며,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죄와 공동체를 참회하며 영적 재무장의 시간이 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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