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럽의 역사와 교회사 3

2007. 8. 20. 00:38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제3부 로마제국의 재건 시도

로마제국이 멸망하다!

당시까지만 해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로마제국이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 게 되었다. 전세계를 정복했던 제국이 이제는 오히려 정복을 당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통치자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되었으나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의 난공불락의 요새 덕분에 계속 고대 로마제국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때 동로마의 황제는 제노(Zeno)였다.

오도아세르는 표면상으로는 제노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했으며 제노는 이탈리아를 자신의 통치관할구역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동로마는 아드리드해 연안의 일부 지역에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실제로는 오도아세르가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확고히 잡고 있었다(그가 전이 탈리아 반도의 지배자였다).

오도아세르는 통치형태를 로마를 본따서 조직했고 초기에 그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이유는 오도아세르가 아리우스(Arius)학파의 교리를 추종하는 아리안 기독교인이었고 이와 반대로 이탈리아 국민들은 카톨릭 신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서기 429년부터 반달족들이 북부 아프리카를 통치했는데 이곳의 상황도 이탈리아와 비슷 했다. 반달족들은 로마의 정치형태를 자신들의 통치체제에 수용하였다. 반달족들도 역시 아 리안 기독교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종종 이탈리아 제국내의 카톨릭 신자들을 심하게 박해하였 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서로마를 침입한 아리안 기독교를 믿는 야만인들의 발아래 곤란을 당 하게 된 것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로 교회는 절대적인 시민들의 지지를 받 고 있었으나 이제 상황이 최악의 상태로 바뀔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서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 보기싫은 아리안 이교도들(반달족)을 몰아내기 위해 무슨 방도를 취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새로운 왕

서기 476년 오도아세르는 마지막 로마황제를 퇴위시켰고, 같은 해에 데오도릭(Theodoric) 이라는 이름의 젊은 귀족이 동고트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데오도릭은 남동부 유럽에 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가진 바바리안 출신의 왕이었다.

동로마 황제인 제노는 이 야심만만한 데오도릭을 경계했고 사나운 동고트족들이 자신의 제국을 침략할 것을 두려워하여 데오도릭을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해 주었다. 이 때가 서 기 488년 이며 제노는 데오도릭을 달래어 동고트족의 위협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데오도릭은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와 자신이 오도아세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고 발표했고 490년 가을이 되자 데오도릭은 거의 모든 이탈리아 반도를 자신 의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일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오도아세르 휘하의 군수비대가 장악하 고 있었기 때문에 데오도릭은 이러한 요새들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비밀 음모

비록 데오도릭은 개인적으로는 아리안 기독교의 교리를 지지했지만 이탈리아의 로마 카톨 릭 성직자들의 지지로 왕이 된 입장이었다. 카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은 오도아세르보다는 데 오도릭이 통치아래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은 이탈리아의 모든 카톨릭 신자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 다. 이들은 헤룰리(오도아세르의 충실한 부하)와 그 외 오도아세르에게 여전히 충성을 하고 있는 모든 군인들을 단번에 제거할 계획이었다.

이 음모의 비밀은 잘 유지되었으며 정확한 계획표대로 진행되었고 헤룰리는 불시에 기습 을 당하였다. 단 한번의 공격으로 고트족들도 할 수 없는 일을 이탈리아의 카톨릭 교도들이 이룩한 것이었다. 당시의 역사가가 기록한 대로 '끔찍한 이 대학살'은 헤룰리의 군사적 힘을 완전히 멸절시켰다.

평야지대의 전투에서 패한 오도아세르는 로마의 북부에 있는 라벤나 요새로 철수한 뒤 포 위되어 거의 3년을 버티다가 493년 드디어 항복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493년 3월 5 일 데오도릭은 오도아세르를 자신이 머무는 레벤나로 초대했고 많은 고민 끝에 오도아세르 는 그 초대에 응했다.

그러나 오도아세르가 성의 문에 도착하자 두명의 데오도릭 군사가 갑자기 그의 팔을 잡았 고 덤불속에 숨어있던 다른 병사들도 그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자신들의 상대 가 누구인지를 잘 몰랐기 때문에 오도아세르가 자신들 앞에 홀로 서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 였다. 병사들이 머뭇거리자 데오도릭이 스스로 나서서 날이 넓은 칼로 오도아세르를 머리부 터 칼로 내리쳐서 두동강이를 내어 버렸다.

이 음모의 성공으로 데오도릭은 로마의 막강한 지배자가 되었으며 이탈리아에 강력한 왕 국을 세웠다. 데오도릭은 옛 로마의 문화를 존중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이 사용하던 정치형 태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데오도릭과 그의 후손들은 아리안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그들 도 역시 근절되어야만 한다고 로마 카톨릭의 성직자들은 생각했다.

데오도릭은 526년 10월 30일 라벤나에서 죽었다. 데오도릭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만 있 었기에 왕국은 데오도릭의 손자들이 분할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새로운 로마

한편으로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서서히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서 쪽이 야만족들의 발아래 굴복해 갔지만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327년 새로운 로마제국의 수도를 거대한 규모로 짓기 시작했고 이름을 'Nova Roma(새로운 로마)'라고 불렀다. 이 도시는 고대 그리스의 비잔티움市가 있던 곳에 건 설되었다.

서로마가 멸망하자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로마의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데오도릭을 이 탈리아의 왕으로 임명한 동로마의 제노 황제의 뒤를 이어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491- 518)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저스틴(Justin;518-527)이 그 뒤를 이었다.

527년 10월 -데오도릭이 후계자가 없이 라벤나에서 죽은 지 일년 된 때- 에 새로운 황제 가 동로마의 왕좌에 앉게 되었다. 후사가 없었던 저스틴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인 저스티니 언(Justinian)이 동로마의 황제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저스티니언은 거의 40년동안 동로마를 다스렸다.

저스티니언은 당시 45살로 날카로운 기지를 가진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저스티니언에게는 데오도라(Theodora)라 불리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저스티니언은 황제가 되기 4년 전인 523년에 그녀와 결혼했었다.

데오도라는 하층계급 출신이며 과거에는 배우이자 댄서에 불과했었다. 데오도라의 아버지 는 히포드롬 서커스단에서 곰을 훈련시키던 사람이었고 그녀가 한때 창녀였다는 소문이 끊 임없이 나돌았다. 이것에 대한 논쟁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어쨌든 그녀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데오도라는 모든 면에서 명실상부한 동로마의 여왕이 되었다. 여왕으로서 데오도라의 도덕성은 나무랄 것이 없었고 저스티니언이 죽기 전까지 21 년동안 그의 훌륭한 배우자요, 충고자였다. 데오도라는 매우 영리하고 용감한 여성이었고 그 녀가 없었다면 저스티니언은 황제의 자리를 지켜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복하라!

저스티니언은 황제자리에 오르자마자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스포츠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서로 다른 선수들을 열광적으로 응원하였다.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전차경기였는데 전차경기선수들이 입는 웃옷의 색깔을 따서 청팀과 녹색팀으로 나뉘어졌다.

532년 이 두팀의 응원단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 양편의 주모자들이 처벌을 받게 되었 는데 이것에 앙심을 품은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정부를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사태가 커짐에 따라 정부도 양편으로 나누어지고 방화, 살인이 시 전체에서 자주 발생하 였다. 수천명이 살해되었고 반란군들은 'Nika(그리스말로 '승리'라는 의미)'라고 외쳐댔다. 이 러한 이유로 이 반란은 'Nika Riots(니카 반란)'이라 불리운다.

저스티니언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며 수도를 포기하고 배로 피난가기로 결심했다. 그러 나 마지막 순간에 데오도라 여왕이 그를 설득했다. 데오도라는 남편의 마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 돌려 놓았다. "저는 여기에 남아 이곳을 내 무덤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녀의 확고부동 한 태도는 저스티니언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도 남기로 결정했다.

저스티니언은 벨리사리우스(Belisarius)를 3,000명의 군대와 함께 보내어 반란군을 진압하 도록 하였다. 반란군들은 무참히 무너져 내렸으며 벨리사리우스는 하루만에 30,000명을 죽 였다.

저스티니언의 왕위는 보존되었고 역사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불타는 야망

저스티니언은 자신의 선조들이 야만족들에 빼앗긴 서로마의 영토를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꿈은 과거와 같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시키는 것이었고 저스티니언은 자신이야말로 통일된 로마제국의 참다운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스티니언은 종교적 통일없이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로마 나 동로마의 대부분의 종교는 기독교였으나 초기의 형태와 같지는 않았으며 교리의 차이로 인해 동서로마의 종교체제는 서로 분열되어 있었다.

저스티니언은 신학교리를 통일시키고 양쪽의 종교지도자들을 화해시킴으로써 비잔티움과 이탈리아간의 정치적 재결합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는 정치와 종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고 생각했다.

이 당시에 가장 큰 신학적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라고 믿었다(이들을 '영지주의 자'라고 부른다).

교황의 감독아래 있던 서로마는 이 영지주의 교리를 믿지 않았으며 451년 칼세돈 공의회 는 이 영지주의는 이교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계속 이어져 내려갔으며 동로마의 교회는 카톨릭 정교회와 영지주의를 믿는 교회로 나뉘어졌다.

제노 황제와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영지주의를 지지했고 이것 때문에 콘스탄티노플과 로 마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지주의는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서도 지지를 받았 다.

종교적 난제

518년 저스틴이 황제직을 계승함으로 말미암아 교황과의 관계가 새롭게 재개되었고 로마 와의 대화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동로마의 고위성직자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칼세돈의 결정을 지지하는 화해의 편지에 서명했다.

칼세돈의 권위는 이와 같이 다시 세워지게 되어 잠시동안이기는 하지만 동로마와 서로마 의 교회가 화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영 지주의는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저스티니언은 개인적으로 칼세돈 공의회의 내용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완고한 영지주의자 들을 교회와 연합시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저스티니언은 약간의 성공만을 거두었을 뿐이다.

저스티니언의 노력은 데오도라 왕비에 의해 무산되었는데 데오도라 왕비가 영지주의 교리 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536년에 데오도라는 로마 감독인 비질리우스(Vigilius)와 음모를 꾸몄다. 비질리우스는 교 황이 될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마의 카톨릭 교회를 영지주의를 지지하는 방향으 로 유도하는 일을 돕겠다고 데오도라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데오도라는 칼세돈 공의회 의결 사항을 폐지시키는데 교황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비질리우스를 돕겠다고 하였다.

다음해인 537년 비질리우스는 교황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교황을 이용하려던 데오도라는 곧 실망하게 되었다. 많은 반대압력으로 말미암아 비질리우스는 데오도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수년 동안 영지주의에 관한 논란은 종교세계내에서 계속되었고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저스티니언 황제는 이 문제를 종결짓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553년 5월,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교황이 소집해서 열린 5번째 전교회의 공의회) 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제기된 의제들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으며 마침내 공의회는 동 방 정교회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조금씩 수용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에 동의했으나 영지주의자들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내용이 과거 칼세돈 공의회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교황 비질리우스는 공의회의 칙 령을 받아들일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주위의 압력으로 마침내 554년 2월 공의회의 판결을 승인하는 공식문서에 서명했다.

이 결과 저스티니언 황제는 비질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로 돌아갈 것을 허락했고 또한 교황권을 확고히 한 국사칙령(國事勅令-국가의 기본법을 이루게 됨)을 내렸다. 그러나 교황 비질리우스는 로마로 가는 여행 도중에 죽었고 새로운 교황으로는 저스티니언의 지지 를 받은 펠러기우스가 선출되었다.

저스티니언 황제의 국사칙령은 교황의 지상권을 강화시켰고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는 종교와 정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침이 되었다. 이당시에 교황권은 동로마 황제보 다 밑에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저스티니언 황제가 죽은 이후에도 제국은 여전히 다른 종교적 교리로 말미암아 나뉘어져 있었고 동서교회의 균열은 점점 깊어갔다. 저스티니언 황제가 살아있을 때에는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야만인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통치 기간동안에 제국의 영토는 거의 2배로 늘어났다.

저스티니언 황제는 565년 11월 14일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83세였고 그는 38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제국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했고 3년이 지난 후에는 게르만족인 롬바르트가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이탈리아의 절반정도가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또 다 시 동로마 황제는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된 것이다.

동로마를 끊임없이 위협해 온 적 중의 하나는 페르시아였고 아랍의 모하메드 때문에 동로 마의 세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그후 역사의 무대는 점차 서유럽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강력한 프랑크 왕 국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저스티니언 황제의 노력은 그가 죽은 이후에 유럽의 여러 왕들에게 계승되었다.

출처 : 유럽의 역사와 교회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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