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럽의 역사와 교회사 2

2007. 8. 20. 00:37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제2부 비진리와의 연합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망하였고 로마제국에 의한 핍박은 잠깐동안 멈추었다. 그러나 많 은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잃었다. 구원받는 대신 그들은 네로 황제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 하게 된 것이다. 매일매일 감옥에 갇히고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이 순교당했다는 소식을 들 어야만 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마지막 시대의 징조로 로마 군대에 의 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했다. 그 일은 이미 이루어졌다. 모든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서 왕중 왕으로 재림하시는 영광의 순간을 향해 급속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시대에 재림하셔야만 한다고 스 스로에게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분이 오시지 않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고 그 말씀이 서기 66년에서 70 년 사이에 일어난 것은 단지 인류의 마지막에 있을 예루살렘이 당할 일의 전주곡에 불과하 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끝은 아직 아니었다.

실망하고 인내심을 잃은 많은 이들이 진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그리 스도인이라 불렀지만 참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고 의심스러운 다른 교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단이 성하게 되고 교리의 차이로 인하여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이 가짜라고 주장하고 스스로 계시를 말하기도 했다. 전에 사도들이 말한 배 도가 실체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인데 서기 68년에 바울이 순교하고 베드로가 죽음을 당한 지 30년 이상이 지나는 동안 교회는 사도 요한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있었다. 교회는 그에 의해 직접 감독을 받고 신실한 장로들이 그를 도우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세우고 교회를 세 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에베소에서 죽자 교회 내에 새로운 분쟁이 일어났고 요한의 강력한 감독 아래 있었던 교회들은 그가 죽자 하나님이 어디에서 역사하시는지를 알지 못하고 갈 바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요한의 가르침과 신실한 장로들의 가르침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의 사 도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말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참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 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떠나 계속 믿음을 지켰고 참진리를 확고히 붙잡아 전세계의 보이지 않는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 할 것을 믿었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가지고 이땅에 평화 를 이루시기 위하여 다시 오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계속되는 박해

그리스도인들의 교리의 차이에 상관없이 -그들이 배도한 자이건 신실한 자이건 간에- 그 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모든 사람은 계속해서 박해를 당하였다.

여러 신들을 섬기는 로마인들은 종교적으로 참을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 에게 자신들의 신들을 섬기도록 허락해 주었다. 심지어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한 민족에게조 차 자신들의 종교를 믿도록 강조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경우는 달랐다. 왜냐하면 여러 이방종교가 재빨리 황제의 신격화를 수용하고 자신들의 재단에 희생제사를 드리는데 반해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 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황제에게 불충성했기에 박해를 받았다.

박해를 시작한 최초의 황제인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핍박하였다. 그후 250년간 열번 정도의 큰 박해가 기독교에 가해졌다. (네로의 이름의 수값은 666이었다. 그는 적그리 스도 모형이었다-역자 주)

서기 95년경에 도미티안(Domitian)황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타이투스 장군의 형제인 베 스파시언(Vespasian)의 아들- 는 짧지만 지독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기독교인 들이 살해된 것이다.

서기 98년 마르쿠스 율피우스 트라자누스(흔히 트라잔(Trajan)으로 알려짐)가 로마 원로회 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는 로마정부에 대항하고 있기에 벌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의 통치 기간에 죽은 인물 중에 영향력이 컸던 안디옥의 교부이자 신학자였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있었는데 그는 서기 110년에 로마에서 사자 밥이 되었 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제수이트를 창설한 "이그나티우스 드 로욜라"(Ignatius De Loyola)와는 다른 사람으로서 진실한 초대 기독교의 인도자였으며 제수이트(Jesuits)를 창설한 로욜라(Loyola)의 본명은 "이니고 드 로욜라"(Inigo De Loyola)였다. 로욜라는 스페인 人으로서 1541년에서 1556년까지 살았다. -역자 주)

트라잔의 후계자인 하드리안(Hadrian:117-138)과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138-161)는 대학살을 계속 자행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61-180)가 황제직을 이어받을 즈음에, 로마제국은 전쟁과 반란, 홍수, 질병, 기근으로 거의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큰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무지한 민중들은 이 재난의 책임을 대부분 기독교인들에게 전가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직 황제만을 섬기도록 명령했고 법으로 이것을 정하였다. 그 결과 네로 황제 이후로 가장 심한 박해가 가해졌고 수천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해야 만 했다. 이중 신학자 저스틴 마르티르(Justin Martyr)는 로마에서 죽임을 당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193-211)와 막시민(Maximin:235-238) 황제는 여전히 박해를 가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화형당하고 십자가형을 당하고 목이 잘려 죽어갔다.

데시우스(Decius:249-251) 황제는 기독교를 완전히 없애기로 작정했다. 전 제국내에서 끔찍 한 피흘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밸러리안(Valerian:253-260) 황제 시대에는 더 가혹한 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언(Diocletian:284-305) 황제에 의해 시작된 박해는 그 어느 때보다 매우 심했다. 이것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워버리기 위해 시작한 체계적인 박해였다. 그 리스도인들을 향한 디오클레티언 황제의 증오는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서기 303년에는 황제만을 경배하라는 칙령이 선포되었다. 황제의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반역자로 몰아 그들의 개인 재산을 몰수하였고, 모든 집회는 금 지되었다. 교회는 흩어지게 되었고 성서의 기록 문서들이 파손되었다.

이 완고하고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모든 고문도구와 온 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기독교의 전멸'을 기념하기 위한 주화가 만들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으로 도망갔다. 갈리아(Gaul), 스페인, 영국과 라인(Rhine)지역을 통치하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러스(Constantius Chlorus)는 자 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금지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했고 그의 장군들은 그의 행동을 칭찬했다.

내란(Civil War)

디오클레티언 시대에 정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는 한 사람이 다스리기에는 로마제국의 땅덩어리가 너무 넓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큰 제국 을 더 잘 다스릴 목적으로 디오클레티언은 자발적으로 권력을 나누어서 자신의 친구인 막시 미안에게 제국의 반을 통치하도록 허락했다.

제국은 둘로 나뉘어졌다. 디오클레티언이 동로마를 다스리고 소아시아(Asia Minor)의 니코 메디아(Nicomedia)를 수도로 정했다. 막시미안이 서로마를 통치하게 되었고 북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밀라노를 수도로 세웠다.

이 두 황제는 자신들의 통치를 돕도록 케사르(Caesar)라는 명칭을 가진 보좌관을 선출했다. 이들이 황제의 뒤를 이어서 제국을 통치하게 되고 차기 케사르를 선출하도록 하였다. 디오 클레티언과 막시미언에 의해 선출된 케사르들은 갈레리우스(Galerius)와 콘스탄티우스 클로 러스였다. 이들이 국경지역의 군대를 지휘했다.

심한 병을 앓고 난 후, 디오클레티언 황제는 서기 305년 3월 1일 황제직에서 퇴위했고 그는 막시미언도 자신처럼 황제직에서 물러나도록 강요하여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권력을 승계했다. 갈레리우스가 동로마, 콘스탄티우스가 서로마를 통치했다.

그 다음 해에 스코틀랜드 픽트人을 진압하기 위한 원정길에서 콘스탄티우스가 갑자기 사 망하자, 그의 군대는 차기 황제로 아들인 콘스탄틴을 추대하였다(콘스탄틴(Constantine)은 겉 으로는 기독교人인척 하였으나 비밀리에 당시 바벨론신앙의 로마형태인 태양신, 솔(sol)을 믿고 있었으며 지하에 숨어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어 멸절시키기 위해 기독교에 자유를 주었을 뿐이며 로마식 혼합기독교인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주었고 그가 본 십자가 형상은 앵크십자가로서 고대 바벨론의 태양신 숭배 형상이며 섹스심볼이었다. -역자 주). 디 오클레티안이 바라는 순조로운 승계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 8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내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로마제국과 기독교 역사를 뒤바꿔 놓을 무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기독교의 공인

서기 312년 디오클레티안에 의해 9년 전에 시작된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 시대에 로마의 감독은 일반적으로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로 인식되었는데 감독은 "pope"(라틴어의 papa<아버지>에서 유래된 단어임)이라 불렸고 그 이후로 교회내에서 오랜동 안 사용되었다. (이 명칭이 로마의 주교만을 위한 것으로 제한된 것은 9세기 부터이다)

밀티아디스(Miltiades)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지도하는 감독이었다.

밀티아디스 이전에 로마교회에 있었던 300여명의 감독들은 거의 전부가 순교하였는데 심 한 박해 아래 있었던 밀티아디스도 더 나은 소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기 312년 10월 29일, 밀티아디스는 집 밖으로 나서다가 콘스탄틴 황제가 자기를 기다 리고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많은 무장한 군인들이 콘스탄틴을 호위하고 있 었던 것이다.

밀티아디스 집에 오기전에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의 이복형제이자 경쟁자인 막센티우스 (Maxentius:막시미안의 아들)를 로마근처에 있는 밀비안(Milvian)다리에서 패배시켰다. 이 중 요한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콘스탄틴은 왕위를 지키고 서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면 콘스탄틴은 로마 기독교인의 지도자를 개인적으로 박해하는데 자신의 승리를 사용 하려 했을까?

황제는 밀티아디스의 측근인 실베스터(Silvester)의 통역으로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밀티 아디스가 들은 내용은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서곡이었다. 세계 역사상 그와 같이 극적인 사건은 없었다.

십자가의 환상

밀비안 전투 바로 직전에 콘스탄틴은 한 환상을 보았다. 하늘에 불타는 듯한 앵크 십자가 형상이 나타나고 그 위에 "In Hoc Signo Vinces"(이 표시로 승리하라!)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 었다. 이 환상에 깊은 감동을 받은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상징으로서 'r'(이것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X.-Chi와 P.-Pho의 첫자를 포개어서 상징화한 것이다)를 사용하게 했으 며, 군대의 기장과 방패에 새기도록 명령했다.

이제 전쟁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막센티우스는 전쟁에 패배하였 다. 이 중대한 싸움의 승리는 콘스탄틴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고,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 이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공인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으나 죽을 때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로마에 거대한 개선문이 세워졌다. 거기에는 콘스탄 틴의 승리를 신의 뜻이라고 기록하였다.

곧이어 콘스탄틴은 밀라노 칙령(313년)을 공포하고 기독교 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섬 기도록 허락했다.

콘스탄틴은 화려한 라테란(Lateran) 궁전을 로마의 주교에게 기증하였고 밀티아디스가 314 년 1월에 죽은 후, 실베스터가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황제는 관직에 많ㅇ느 기독교인 들을 참여시켰고 교회건물을 짓도록 도와주었다.

정말로 사태가 바뀐 것이다! 황제들에 의해 수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온 교회는 이제 황제 와 친구가 된 것이다. 기독교는 이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또한 이것은 전 로마 제국의 모든 사건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이러한 상황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정말로 꿈같은 일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새로운 상황에 매우 당황했다. 그들은 3세기 이상이나 예수님의 다시오심과 구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멸망과 예수님이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을 열심히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 박해가 끝나고 교회는 권력을 갖게 되고 존경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박해에 관한 많은 예언들을 보았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교회 가 번창하고 땅에서 환영받으리라고 예언하신 적이 없었다. 어느 성경 말씀도 하나님의 교 회가 이 땅에서 번창하고 권력을 갖게되리라고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가?"라고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의문을 품었다.

참 성경진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시 오셨 을 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권정치

계속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관념에 대한 재평가가 계속되었다. 321년 콘스탄틴 은 오래된 태양의 날(Day of the Sun, Sunday)을 금하고 대신 일곱번째 날을 안식일(Sabbath;유 대인들은 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까지를 안식일로 지켰다)로 대치시켰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새로운 명령에 따라 이것을 더 이상 지킬 수가 없어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그만 두어야만 했다(365년 라오디게아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안식일' 지키는 것을 금하였다).

324년에 황제는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의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고 일년 전인 323년에 콘 스탄틴은 동로마 황제를 패배시켜 단일 황제가 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서구세계에서 공인된 종교가 된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 일치를 가속화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콘스탄틴은 325년에 로마제국의 모든 주교들을 모집하여 비밀회의를 열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여러 교리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공의회가 비티니아(Bithynia)에 위치한 니케아(Nicea)에서 열렸다.

니케아 공의회에는 두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 지와의 관계였다. 이 논쟁은 아리안 논쟁(Arian Controversy)이라고 불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Arius)는 예수님이 창조된 인간이며 하나님처럼 영원하고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공의회는 그를 비난하고 아리안파를 쫓아냈다.(그러나 이 들의 가르침은 여러 지역에 퍼졌다. 후에 코트족과 독일인이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때 기 독교란 아리안 파를 말한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유월절의 정확한 날짜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소아시아에 살던 그리스도인- 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는 히브리의 니산월 14일을 예 수님이 죽으신 날로 기념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마와 서유럽의 교회들은 예수님의 죽 음 대신에 부활을 더 강조했고 그들은 일면에 한번 유월절을 기념했는데 그 날은 항상 일요 일이었다.

공의회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더 이상 예수님의 고난만을 되새기는 날 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로마는 최초의 일요일을 이전에 지키던 관습에 따라, 보름 달이 춘분점을 지난 첫날로 하였다. 후에 독일 민족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이 날은 "Easter"(부활절)로 불리게 되었다 (부활절(Easter)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고난당하시고 3일 후에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배도했던 고 대 로마 카톨릭이 만든 절기로서 "이스텔"이란 용어는 고대 바벨론의 여신 세미라미스 (Semiramis)의 앗시리안식 이름인 "이스텔"(Ishtar)의 다른 형의 발음으로서 봄철에 생명이 싹 트는 시기가 이스텔 여신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때이다. 다산을 뜻하는 여신이며 닭이 알 을 낳는 것처럼 많은 생산을 뜻하는 여신인데 이 여신을 기념하는 시기가 부활절(Easter)과 혼합되어 오늘날 부활절에 계란을 먹는 이교풍습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이다 -역자 주).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이 새로운 칙령을 받아들였고, 이들이 기독교의 주요 세력이 되었고 세상도 그들이 참된 기독교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거 부했고 핍박을 피해 유럽의 산과 소아시아로 피난갔다. 역사의 기록에서는 사라졌지만 이들 은 참 하나님의 교회로서 믿음을 지켜나갔다(이들을 재침례교도(AnaBaptist) 라고 한다. 이들 의 신앙은 <재침례교도의 역사>(요단출판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역자 주).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내의 일치를 받아들였고, 이전에 믿던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 단일 정부, 단일 황제, 단일 교회가 이루어졌고 한 신만을 섬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교회 자체 -기독교화된 로마제국- 가 그렇게 기다리던 하나님의 나라인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서서히 이루어지며 콘스탄틴의 밀라노 칙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한 첫 단계인 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세상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 진리에 위배되며, 기독교의 참된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아무리 겉모습을 바꾼다 할지 라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당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틴이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역자 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로마제국과 전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믿었다. 수 만, 아니 수백만 명의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와 정치와의 연합은 이와 같이 하여 준비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후 수 세기 동안 문명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교회와 정치의 대립

콘스탄틴 대제는 337년 5월 22일 사망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야 이마에 물을 떨어뜨리는 세례를 받았다.

콘스탄틴이 죽은지 25년이 지난 후, 그의 조카인 쥴리안(361-363)이 왕위에 올랐는데 쥴리 안의 삼촌은 신앙을 거부하고 예전에 섬겼던 고대 신들의 숭배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배교자'라고 불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미워했으나 유대인들은 보호했고 예루살렘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우도 록 허락했다.

쥴리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과 여신들 숭배는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페르시아 원정길에서 쥴리안이 죽은 후, 기독교는 로마 제국 내에서 현격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394년 데오도시우시(378-395) 황제는 모든 제국내에서의 고대 신들의 숭배를 정식으로 금했 다. 데오도시우스 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힘은 밀란 추기경인 암브로세(Ambrose)와 관련된 사건에서 가장 잘 나타나있다. 성격이 포악한 데오도시우스는 반란을 일으킨 보복으로 데살 로니가 주민 7,000명의 학살을 명하여 아무 죄도 없는 데살로니가인들은 데오도시우스가 보 낸 코트족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말았다.

후에 황제가 밀란에 있는 어느 성당에 들어가려 했을 때, 추기경 암브로세는 문에서 그를 저지하고 학살에 대한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비록 개 인적으로 그 사건을 후회는 했지만, 황제는 그러한 굴복을 함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실추시 키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여덟 달 후에 데오도시우스는 마침내 군중 앞에서 암브로세에 게 겸손하게 용서를 간청하게 되었다.

390년 크리스마스 날에야 비로서 교회의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데오도시우스는 통 합된 로마를 다스렸던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죽은 후,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넘어갔다. 호노리우스(Honorius)는 서로마를 다시리고 아카디우스(Arcadius)는 동로마를 다스렸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통치를 위해 분류했지만, 이 분할은 영속적인 것이 되고 말아 동서로 마는 점차 사이가 벌어졌고 다시는 연합되지 못했다.

바바리아인들의 침입

점점 강대해지는 코트족과 게르만 부족은 로마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수세 기 동안 로마인들은 바바리아 유목민들과 전쟁을 벌여왔다. 이제 이 부족들이 로마제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십년동안 많은 부족들이 로마의 경계를 넘어와 서 평화적으로 정착하였다. 많은 독일 민족이 로마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어떤 이들은 궁전 에서 봉사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자 이러한 독일인 중 한 사람이 왕자 호노리우스(Honorius)의 후견 인이 되었다. 그 사람은 반달족(Vandals, 5세기에 서유럽에 침입하여 로마를 약탈한 게르만의 한 종족 -역자 주) 출신의 스틸리코(Stilicho)였다. 그는 바바리안 족들의 공격을 여러 번 막 아냈다.

이 바바리안 족들 중에서 가장 골치아픈 민족은 서고트( Visigoth)족이었다. 스틸리코는 이 탈리아 반도를 침입한 서고트 족을 쫓아버렸다.

그러나 호노리우스는 로마를 그렇게 여러 번 구해준 장군을 시기하여 408년 8월에 스틸 리코를 암살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또 한번의 침략을 야기시켰다.

값비싼 대가에도 불구하고 서고트 족의 알라릭은 409년에 로마를 정복하지 못했다. 다음 해에 그들은 다시 로마를 공격하여 410년 8월 로마를 정복했다. 그 후 6일동안 로마는 살 육과 약탈을 당하였다. 800년 역사상 최초로 로마가 외국 군대의 손에 넘어갔다.

그것은 매우 충격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롬(Jerome: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음)은 베들레헴에서 이 소식을 듣자 이러한 글을 썼다.

"슬픔을 참을 수가 없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글을 쓰기가 힘들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도 시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다니! 흙더미 위에 세워졌던 로마가 멸망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 어지지 않는다"

서로마제국의 패망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그러나 제국의 왕위를 지키는 황제는 여전히 존재하였다. 최소한도의 의식을 행하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로마제국은 이어져갔다.

알라릭은 도시를 정복한 후 얼마후에 죽었다. 로마는 서고트인들에게 거주지로서 가장 부 유한 지역을 내주었다. 5세기 중엽에 바바리아인들이 서로마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 다.

교황의 평화 중재

모든 야만민족 중에서도 훈족(흉노족)이 가장 사나운 민족이었다. 이 유목 민족은 중앙아 시아로 세력을 펼쳐 나갔으며 유명한 아틸라(Attila)라는 인물이 이들을 지도했다. 그 시대에 그는 흔히 '하나님의 회초리'(Scourge of God)라고 불렸다.

451년 아틸라는 게르만의 서고트족이 다스리는 갈리아(Gaul, 고대 켈트 사람의 땅으로 지 금의 북이탈리아×프랑스×벨기에 등을 포함함 - 역자 주)를 침입하였다. 로마의 아에티우스 (Aetius) 장군은 서로마와 서고트 족들을 모아서 칼론(Chalons) 근처에서 아틸라에게 대항하 였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들 중의 하나였다. 아틸라가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아틸라의 힘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다음 해인 452년에 아틸라는 큰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침략했다. 로마의 저지선은 곧 무너졌다. 로마까지의 길이 아틸라 앞에 열려 있었고, 로마 시민들은 최악의 사태를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로마는 살아남았다. 아틸라는 자신의 손안에 로마를 움켜지기 직전에 실패하였다. 로마로의 행군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때에 로마의 주교는 레오(Leo)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강력한 아틸라를 만나기 위해 북 쪽 지역에 있는 포강(Po River)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두사람 사이에 어떠한 대화가 이루 어졌는지에 관한 문서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서움을 모르는 외교가인 레오는 '하나님의 회초리'(아틸라)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틸라 를 설득하여 로마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틸라는 얼마 후에 죽었다. 훈족은 더 이상 유럽을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 로마를 건진 레오의 행동으로 인하여 주교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시민 정치가 더 이상 통치의 역할 을 수행하지 못하자 교회가 이것을 대치하게 되었다.

역사에 의하면, 레오 대제가 교황권을 확고하게 만든 교황이라고 한다. 레오가 이탈리아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레오는 모든 성직자들을 감독할 수 있는 로마 주교(교황)의 지상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5세기 초에 북아프리카의 히포 지역 주교인 어거스틴은 "로마가 말할 때, 모든 논쟁은 끝 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451년에 열렸던 칼세돈(Chalcedon) 공의회에서 레오는 다음 과 같은 글을 공포하였다.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씀하신다. 다른 것을 믿는 사람은 파문당해 마땅하다."

교황권은 그리스도에 의해 베드로에게 넘겨졌다는 것과 교황이 베드로의 권한을 이어받는 다는 교리가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455년 6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왕인 젠세릭(Genseric)이 로마를 차지하였다. 레오 교황 의 중재로 젠세릭은 로마 시민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그들의 재산을 요구했다. 레오의 평화적인 중재역할은 로마제국에서 뿐아니라 교회내에서의 교황의 권한과 특권을 더욱 확고 하게 만들어 주었다.

로마의 몰락

로마는 점점 쇠퇴하여 갔고, 교황의 노력만으로는 로마를 구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단지 의식을 행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서부유럽의 왕들은 대부분 교황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의식을 행하는 존재로 남아있던 위치도 빼앗기게 되었다.

476년 어린 소년 왕이 로마의 왕좌에 않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로물러스 아우구스투스 (Romulus Augustus)로 로마의 창건자 로물러스(Romulus)의 이름과 황제(Augustus)의 이름이 함께 들어있다. 그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이다.

독일의 오도아세르 장군은 더 이상 꼭두각시왕을 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 476년 9 월 4일 로물러스 아우구스투스를 왕위에서 쫓아냈다. 서서히 진행중이던 로마의 몰락은 드 디어 종결되었다.

서로마는 깊은 상처를 받게 되었고 로마는 멸망하였다. 황제의 자리는 비었고 동로마황제 인 제노는 오도아세르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동로마는 서로마에 거의 영향 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오도아세르는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서로마의 멸망으로 고대역사는 끝을 맺었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대부분의 서 부유럽은 독일의 게르만 출신 왕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이중 다수가 로마의 기독교 즉 카톨 릭에 반대하는 아리안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로마제국을 재건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그들은 아리안 기독교국가 가 아닌 카톨릭 국가를 세우고 싶어했다

출처 : 유럽의 역사와 교회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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