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박해의 상황적인 원인과 궁극적인 원인」

2011. 3. 18. 18:02교회사자료/2.초대교회사

「기독교 박해의 상황적인 원인과 궁극적인 원인」

초대 기독교 박해를 중심으로(A.D. 64-313)


Ⅰ.시작하는 말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박해는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오히려 박해가 기독교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터툴리안이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선언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기독교 역사 서적들은 박해에 대한 부분을 주의 깊게 조명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물론 기독교 박해가 다른 역사적인 사건들과 맞물려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따로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을 수 있다. 또한 기독교 역사 자체가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되었다고 한다면 무리일까?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도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 인하여 복음이 전해지며, 교회가 성장되어진 점은 이미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바이다.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복음의 순수성은 그대로 전달되었으며, 영적 생명력을 잃지 않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고난을 통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셔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 후에도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사도 베드로, 바울, 폴리갑 등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인하여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며 기독교가 공인되기에 까지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는 박해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다. 그래서인지 언제 부턴가 우리는 불과 백년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 이 땅에서도 극심한 기독교 박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피와 눈물로 심은 이 땅의 복음의 씨앗이 전 국민 25% 복음화라는 적지 않은 열매를 거둔 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75% 복음화에 대한 막중한 사명이 남아있다. 문제는 복음화 된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이 날로 나태해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주일도 지키지 않는 신앙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며, 주5일 근무제에 따르는 구체적인 교회의 대책이 없는 한 신앙인들 역시 세상 사람들처럼 2일을 휴가로 이해할지도 모르는 형편이다.

요즘 교회현장에서 들려오는 주일학교나 중·고등부학생들의 소식은 더욱 심각하다. 예배에 대한 관심은 사라진지 오래 이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예배시간에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서로 전달한다던가, 게임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비전은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고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이즈음에서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필자는 역사를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감지하는 것이라고 본다. 만약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우연적 가능성을 가진 역사라고 한다면 역사를 연구하는 의미가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모든 사건들이 우연적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역사연구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 필연적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을 다룰 때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던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바로 잡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주질서와 시간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진행들을 총체적으로 판단 해보면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여야하고,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겸손한 자세로 낮아져야 하며,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와 미래를 사는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상실한 원인은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 특별히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의 생명력과 세속화 현상을 가장 명확히 볼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초대교회의 기독교 박해이다(약 A.D. 64-313).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순수성이 뚜렷했던 시기와 눈에 띄게 교회의 세속화현상이 나타났던 시기가 맞물리는 기독교 박해 사건의 원인을 연구함으로써 오늘날 교회의 세속화 현상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들은 모두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바로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 지역, 인종, 문화, 가치관이나 이념이 다른 현재의 상황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시의 박해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궁극적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Ⅱ. 박해의 상황적인 원인

먼저 기독교 박해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할 때 당시의 상황을 염두 해야 한다. 여기서 기독교 박해는 한 가지의 원인만 가지고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에 맞물려서 전개되고 있다. 즉 정치, 종교, 사회, 경제 등의 여러 분야의 영향으로 박해는 진행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복음전파는 당시 정치, 종교, 사회, 경제 전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기존의 문화적 시대적 상황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복음에 대하여 반발하고 저항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1) 정치적인 원인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유대교의 일부로 간주하는 한, 초대교회는 거의 박해를 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religio licita), 합법적인 분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별개의 분파로서 유대교와 구분되며 하나의 비밀 사회로 분류되면서부터 로마당국으로부터 금지 되었다. 로마는 백성들의 충성을 받는 일에서의 경쟁자를 그냥 놔두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불법 종교요 로마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로마 제국은 국가와 종교가 연합 상태 안에 있는 한에서 최고의 선이었다.

종교는 국가의 안정에 기여할 때에만 묵인될 수 있었다. 급속하게 성장한 기독교는 그리스도에게만 도덕적, 영적 충성을 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황제에 대한 충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 황제는 두 번째 위치로 밀려나야만 했다. 로마 제국의 틀 안에서 고전적 문화를 보존하는 일에 열중해 있던 로마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국가에 대한 불충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국가 안에서 또 하나의 국가를 세우려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주적 국가나 우주적 교회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주권은 절대주권을 주장하는 황제의 교만한 주장과 상충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많은 관습은 기독교인들이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로마 당국자들의 의심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황제의 신에게 바친 제단에 분향하기를 거절했다. 한편 아우그스투스 시대로부터 콘스탄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국가의 안녕이 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 제단에서 제사를 드린 사람은 자기가 믿는 개인적 종교 행위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제사를 드리려 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또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밤에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보았는데, 로마 당국자들은 이것을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음로를 꾸미는 것으로 보았다. Earle E. Cairns, ?세계교회사?상(엄성옥 역, 은성출판사, 1995), 129쪽.

2) 종교적인 원인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데에는 정치적인 원인 외에 종교적 이유도 있었다. 로마의 국교는 기계적이고 표면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관습들, 제단, 우상, 사제, 행렬 성가집, 의식 등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로마 국교의 중요한 주장에 복종하는 한, 판테온(Pantheon) BC 27년 정치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 의해 착공된 로마에 있는 건축물로써 원래는 평범한 고전적 신전으로 지어져 박공지붕(박공, pediment :고전 건축에서 포티코(portico:기둥으로 받쳐진 지붕이 있는 현관) 위에 놓인 3각형 박공, 또는 입구나 창문 위를 꾸미는 데 쓰인 그와 비슷한 형태로써 페디먼트는 그리스 신전의 정면에 나타나는 특징이었다.)을 씌운 4각형 평면의 구조로, 4면에 콜로네이드[柱廊]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8~128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전히 재건되었고, 3세기 초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 황제 때 부분적으로 개축되었다. 콘크리트 구조에 벽돌을 덧댄 원형 평면의 건물로서, 벽 위에 거대한 콘크리트 돔을 올렸다. 세베루스나 카라칼라가 아그리파의 원래 건물에서 떼어낸 것으로 보이는 코린트식 기둥의 정면 현관은 3각형 박공이 있는 경사 지붕을 받치고 있다. 현관 아래쪽에는 높이 7m의 거대한 청동문 2짝이 있는데, 이런 종류의 대형문 중에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판테온은 그 규모, 구조 및 설계가 매우 특이하다. 지름이 약 43.3m이고 기단으로부터의 높이가 21.6m에 이르는 돔은 근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는 가장 크다. 출처-"판테온"한국브리태니커온라인. 안에 있는 신들에게 새로운 우상을 추가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상도 없고, 가시적이고 번잡한 예배 절차가 거의 없었다. 그들의 예배는 영적이고 내면적이었다. 그들이 눈을 감고 서서 드리는 기도는 눈에 보이는 대상에게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로마인들이 볼 때 이것은 무신론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징적이고 물질적으로 표현된 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은밀하게 모임을 갖는 것 역시 도덕적 비난거리가 되었다. 그들이 근친사간을 한다거나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관습들을 행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왜냐하면 될 수 있는 한 정부 관리들의 주시를 피하기 위해 공개적인 광고 없이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Kenneth S. Latourette ?기독교사?상(윤두혁 역, 생명의 말씀사, 1979), 152쪽. 또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과 관련된 오해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어린 아이들을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 그 살을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게 된 것이었다. “평화의 입맞춤”(kiss of peace)이라는 단어는 왜곡되어 근친상간 및 개화된 로마인들의 정신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음탕한 일들을 행한다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이것들이 사실이 아닌 헛소문이라는 것도 그다지 차이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Earle E. Cairns, 1995, 130쪽.

3) 사회적인 원인

사회적인 원인들 역시 로마제국이 교회를 박해하는 대의명분(大義名分)에 기여했다. 하층 계급과 노예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한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지도층인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이들 지도자들은 그들을 멸시했으며, 그들이 하층 계급에 미치는 영향력을 두려워했다. 기독교인들은 만인 평등을 주장했으며(골 3:11), 이교도들은 소수의 특권층이 하층 계급과 노예들의 섬김을 받는 귀족주의 적 사회 구조를 주장했다. 기독교인들은 신전이나 극장, 오락 장소에서 이교도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된 관습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미움을 받았는데,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국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의례히 직면하는 현상이다. 그들의 순결한 생활은 상류층의 추잡한 삶을 무언으로 질책했던 것이다. Earle E. Cairns, 1995, 131쪽.

기독교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교의식에 가담을 거부했다. 이교도적 신조들, 습관들, 그리고 부도덕이 속속들이 배어있는 이교적 축제행사들과 공공 오락등과 같은 공동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기피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인류를 증오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Kenneth S. Latourette, 1979, 152쪽. 결국 이교도들은 그들이 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군중을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인류의 증오자들”이라고 규정했다.

4) 경제적인 원인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한 데에는 경제적 고려도 작용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전파로 인해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된 사람들이 느낀 기득권 의식을 보여 주는 단서가 된다. 그들은 기독교가 다이아나(Diana, 로마의 여신) 숭배에 초래할 해로움보다는 자기들의 장사에 끼칠 위험에 더 관심을 가졌다(행 19:27). 사제들, 우상 제조자들, 점쟁이, 화가, 건축가, 조각가 등은 자신의 생계 수단을 위협하는 종교에게 열성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산발적이고 지역적으로 진행된 박해가 250년에는 전반적이고 난폭한 것으로 되었는데, 로마인들의 계산에 의하면 그 해는 로마 제국이 건설된 지 약 1000년이 되는 해였다. 이 시기에 재앙, 기근, 시민들의 불안 등이 제국에 재앙을 초래했는데, 사람들은 제국 내의 기독교인들의 존재 및 과거의 신들을 버린 것 때문에 이런 환난들이 임했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천년왕국의 종말에 관한 미신은 항상 있으며, 이런 점에서 로마인들은 1000년이 되기 직전의 중세 시대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로마가 당면한 환란을 극복하는 논리적 방법인 듯이 보였다. Earle E. Cairns, 1995, 132쪽

Ⅲ. 박해의 궁극적인 원인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 전개된 기독교박해의 궁극적인 원인을 도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여간 조심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실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즉 역사가 이야기 하는 한도 내에서 분석해야 한다.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는 주후 64년 네로 황제부터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대교회 박해는 크게 황제의 고의에 의하여 시작된 1차 박해기간(A.D. 64-96),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된 2차 박해기간(A.D. 98-249), 그리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진행된 3차 박해기간(A.D. 250-313)으로 대별할 수 있다. 박용규, ?초대교회사?, 총신대학교출판부, 1994, 70쪽.

여기서는 기독교 박해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사람들을 주목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 박해를 주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황제나 권력층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그들이 박해를 시작하게 된 동기와 박해의 양상, 그들의 종말, 그리고 이례적으로 전개되는 박해사건의 정황을 통하여 박해의 궁극적인 원인을 도출하고자한다. 아울러 이러한 사건들이 성경과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는지를 다룸으로써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다.

1) 대표적인 박해자들과 그들의 종말

먼저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는 네로 황제에서부터이다. 그는 주후 64년에 발생한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면서 극심한 박해를 시작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연대기」(Annals)에서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심한 문초를 가했던지 그 이유를 ‘방화죄로 인한 것 보다는 그 민족(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정도였다. 또한 타키투스의 표현에 의하면 기독교가 “매우 위험한 미신” 혹은 “사악하고 부끄러운 것” 이라고 했다. 박용규, 1994, 75쪽. 이 네로시대에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고, 하나님은 네로의 박해를 그냥 방관만 하실 수 없었다. 계속되는 네로의 폭정으로 서부의 군단들과 로마의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에서 도주하던 네로는 명을 다하지 못하고 30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고 말았다.

훗날 3차 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데시우스(Decius;250-251)가 혹독한 기독교 박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도 2년이 못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뒤를 이어 갈루스(Gallus, A.D. 251-253)가 황제가 되어 데시우스가 멸망한 이유조차 깨닫지 못한 채 기독교를 박해했다. 한 역사가는 아마도 당시 돌았던 흑사병(黑死病) 때문에 수천 명이 공포에 질려 옛 신들의 제단에 모여든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신들을 소흘히 했기 때문에 재난이 생겼다는 책임을 추궁하고 나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Kenneth S. Latourette, 1979, 162쪽. 박해자들의 최후가 그러하듯 갈루스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갈루스의 뒤를 황제는 발레리안(Valerian; 253-260)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이례적일 만큼 우호적이었으나 그의 통치 말엽인 257년부터 기독교인들은 박해하기 시작했다. 전승에 의하면 이집트의 마술사 마크리아누스(Macrianus)가 발레리안 황제에게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와 살해를 권면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외적들의 침입으로 나라 안은 혼란스러웠고 역병(疫病)까지 나돌아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것은 로마를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믿는 신들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또다시 여겨졌기 때문인 듯하다. Kenneth S. Latourette, 1979, 162쪽. 결국 발레이안은 페르시안(Persian)과의 전쟁에서 사로잡혀 노예가 되면서 극심했던 박해는 일단 중지되고,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황위를 승계하면서 예배의 자유가 보장되고 43년간 기독교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자연히 기독교는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다.

303년,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은 비천한 신분으로 바사에서 용전, 누메리안의 친위대장이 되었다가 황제가 암살되자 군대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284)했다. 그는 303년부터 기독교 박해를 시작하였는데 3차 박해 기간 중 가장 길고 무시무시했던 박해로 손꼽힌다. 기독교인 박해의 죄 값이랄까 303년에 병을 얻고, 305년에 퇴위하여 308년에 죽었다. Williston Walker?기독교회사? (류형기 역, 한국기독교문화원, 1979), 95쪽. 그가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이다가 갑자기 태도를 선회한 결정적인 원인은 시벨리(Cybele)를 섬기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박용규, 1994, 101쪽.

그 즈음에 디오클레티안의 사위 갈레리우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가 발생했는데 그는 박해를 시작한지 8년 되던 해부터 박해를 완화하기 시작하여 10년 되던 해에는 완전히 박해를 종식했다.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그의 중병 때문이었다.

 

그의 병은 갑자기 몸에 종양이 생겼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창자 속까지 곪게 되었고, 또 그곳에 수많은 구더기가 생겨났다고 한다. 투병이 계속되면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하여 범한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는 먼저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드디어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병이 기독교를 핍박했기 때문에 왔다는 기독교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즉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라는 관용의 칙령(the Edict of Toleration)을 발표하였다. 이 칙령은 그리스도인들의 생존권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여 주었고, 예배의 처소를 마련할 권리를 정부차원에서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 아울러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인들에게 백성들과 공공의 복지, 그리고 모든 이들이 무사하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요청하기에 이른다.


2) 불가항력(不可抗力)적인 상황에서의 반전

이제는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불가항력적인 기독교박해가 반전되는 역사의 전개과정을 2차 박해기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네로의 뒤를 이은 도미티안(A.D. 81-96)황제는 네로의 전철을 밟고, 15년 동안 잔악하게 통치한 뒤 네로 황제처럼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도미티안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데 있어서 네로의 후계자로 불릴 정도였으나 그의 말년에 “교회에 대한 핍박을 그만두라는 포고를” 내리고 추방당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 후 황위를 승계한 다섯 명의 황제들은 역사에 선한 황제로 알려졌다. 특별히 도미티안 황제를 계승한 네르바(Nerva; A.D. 96-98)는 6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자 당시 독일 상반부 주둔 부대의 지휘관인 트라얀을 양자로 삼았다. 후계자를 양자로 삼는 이 방법 덕분에 로마제국에는 연속적으로 좋은 황제가 등장하여 그들의 통치하에 로마제국은 최상의 발전을 이루었다. 박용규, 1994, 79쪽.

트라얀(Trajan; A.D. 98- 117)황제부터 이른바 2차 박해 기간으로 일컬어지는데 트라얀 황제의 칙령에 나타난 2차 박해의 양상은 1차 박해 때와는 판이했다. 즉 기독교인들의 의도적인 색출을 금하고,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 것이며, 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현재는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되었다. 그렇지만 이후에 250년까지 간헐적인 박해는 계속되었다. 특히 202년과 20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황제 아래 심한 박해가 주로 이집트와 칼타고에서 발생했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했을 때 도처에 있는 모든 교회 내에서 믿음의 용장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켰다.

세베루스 치하에서 잠시 일어났던 박해 이후인 제3세기 전반부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완전히 끝난 것 같아 보였다.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nus Thrax, 235-238)치하에서 세차게 일어나긴 했지만, 그의 통치는 단명했다. 그 시대에는 동양 종교들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던 때였다. 황제 가운데 7, 8명이 제국의 동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전통을 유지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 아라비아의 필립(Philip the Arabian, 244-249)은 종종 최초의 기독교 황제라 일컬어졌는데 그는 부활절 전야의 철야에 동참했을 정도였다. Kenneth S. Latourette, 1979, 160쪽.

분명, 3세기 전반기에 여러 교회 안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독교 공동체들은 성장한지 이미 오래였으며, 불안정한 시대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종교- 특히 그리스도 교회와 같은 포용력 있는 -를 찾도록 자극을 받았다. 즉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 이후의 평화는 복음전파의 호기가 되었다. 이처럼 박해가 진행되는 기간은 신앙의 순수성을 훈련하는 기간으로, 박해가 중단된 그 기간들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다.

3) 성경적 접근

단순히 수학적인 논리를 넘어서는 이런 역사적인 현상은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난 후 중국의 기독교에서와 그리고 일제하의 한국의 기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박해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성경 속에서도 복음에 대한 박해의 흔적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사역을 시작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행12:2), 스데반의 순교사건(행7:54-60), 전도여행에서 겪었던 바울사도의 수난(행14:19, 고후11:23-28)등 수많은 복음전도자들이 박해를 당했다(행8:1).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복음 증거로 인한 박해를 예고하셨다(마10:23, 13:21, 요15:20).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받았던 수난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히11: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 하였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박해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일어났던 단편적인 사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기독교박해 혹은 진리에 복종하지 않았던 타락한 인류의 갈등 양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있어왔다. 즉 초대교회의 기독교 박해는 성경에 나타난 박해 사건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라 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 박해에 대하여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감지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Ⅳ. 박해 원인의 종합분석

이제 까지 우리는 초대기독교의 박해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 로마제국의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등의 상황적 요소를 통해 박해의 원인을 분석하는 한편, 박해자들의 보다 구체적인 박해원인과 그에 따르는 결과를 보았다. 그리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확장되어나가는 로고스(lovgo")의 자기 확장을 감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박해의 원인을 분석해본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기독교박해의 상황적인 요소에 있어서

첫째,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절 했다.

 

둘째, 종교적인 면이 있어서 가시적인 우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신에게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무신론이라는 오해를 샀으며, 대게 은밀히 모임을 가졌다는 점에서 근친상간을 한다거나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나서 그 아이를 먹는 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나돌았다.

 

셋째, 사회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신전, 극장, 그리고 오락 장소에서 이교도들과 어울리지 않아서 미움을 받게 되었고, 더욱이 귀족중심의 사회에서 만민 평등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은 주위사람들에게 비판의 표적이 되곤 했다.

 

넷째,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면 우상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영향으로 인하여 당시 막대한 수입원이었던 우상제조업이라던가 점술업, 건축업, 등 경제 분야에 미칠 파장도 무시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초대교회의 박해가 막바지에 이르자 박해의 강도는 더욱 잔인해졌고,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되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그간 급속히 성정하여 로마제국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던 반면 로마는 경제적인 침체, 도덕의 쇠퇴와 타락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창립 1000년을 즈음하여 로마의 재앙을 우려하던 로마지도자들은 기독교가 단연 재앙의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해자들의 최후와 2차 박해를 중심으로 다루었던 역사적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미루어 볼 때 기독교의 박해가 상황적이고 우연적 사건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즉 너무나 명백한 하나님의 섭리라 아니할 수 없다. 박해자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박해의 근저에는 외적의 침입, 재앙, 질병, 미신, 우상 등과 관련된 신앙적인 대립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건들이 박해가 일어날 당시의 상황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요소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 당국자들이 볼 때, 이 여러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을 정당화해 주었던 것이다. 박해 때마다 이런 원인들이 모두 작용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가 기독교적 생활을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이교의 혼합절충주의 및 국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 요구와 충돌했던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박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당시의 상황적인 요소가 작용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수납하지 못하는 이교세계, 혹은 세속화된 문명과 복음의 대립으로 보여 진다. 즉 진리를 수납하지 못하는 타락한 인류의 안티(anti)반응 이라 할 수 있다.

Ⅴ.맺는 말

비록 기독교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거칠고 오해 투성이 이긴 했지만, 비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세력(기독교) - 만일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내버려뒀다가는 기존의 문화를 전복시킬 것 같은 - 이 세계에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혁명의 본질, 그 비타협적 성격, 그리고 전 인류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그 주장 때문에, 기존 질서는 유대교까지 포함한 많은 기독교의 경쟁자 가운데서 그 어느 것보다 기독교를 더욱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희미하고 불안전하기는 했지만 비 기독교인들은 깨달았던 것이다. Kenneth S. Latourette, 1979, 153쪽.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지켰던 복음으로 오늘날 우리는 속죄의 노래를 부르고, 구원의 감격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 치열했던 상황적인 박해는 사라졌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류의 궁극적이며 본질적인 박해는 아직도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영적 생명력이 박해를 받고 초토화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교회는 문을 닫고 도무지 복음의 군사들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주일날 성도들에게 말씀의 양식만을 공급하는 실정이다. 마치 사육장에서 기르는 가축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온순하게 길들이고 있다고 비유한다면 너무 과민한 반응일까? 지금이라도 교회는 문을 열고 영적 야성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길러야 한다. 초대교회 박해의 원인이 당시에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인 원인, 즉 교회의 외적인 요소에서 기인했다고 본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주시해야 할 영적 박해의 원인은 신앙의 안일화, 개교회주의, 교단과 교파를 극복하지 못하는 집단이기주의, 복음의 능력에 대한 불신풍조, 교회재정에 관한 교인들 간의 갈등, 교회건축과 같은 양적성장의 치중 등 교회 내적인 요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사단의 세력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영적인 박해를 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회복하고,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당당히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전파로 인하여 받는 고난이 영광스러울 정도로 성숙한 신앙과 영적생명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 옛날, 타락한 인류를 농락하던 사탄의 세력과 당당히 맞서 싸우던 믿음의 용장들이 그립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기쁨으로 순교의 반열에 올랐던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 그들이 싸웠던 궁극적인 대상은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체제 전환을 우려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했던 로마의 지도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복음을 두려워하는 사탄의 세력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영적전쟁은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함께 복음의 승리로 끝이 날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성경을 무기로 삼아 성령님을 의지하고 나아간다면 기독교의 영적 생명력은 회복될 것이고, 이 땅에 다시 한 번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로마제국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정복하여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말이다.

* 참고문헌

박용규, ?초대교회사?, 총신대학교출판부, 1994,
Earle E. Cairns, ?세계교회사?상(엄성옥 역, 은성출판사, 1995)
Kenneth S. Latourette ?기독교사?상(윤두혁 역, 생명의 말씀사, 1979)
Williston Walker?기독교회사? (류형기 역, 한국기독교문화원,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