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10. 01:32ㆍ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아펜젤러 가족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한국명:亞扁薛羅) 선교사 추모비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회 최초의 선교사이며,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추모비는 배재동창회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로부터 출생하여, 미국에 있는 플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1878)했다. 두루 신학교에 진학(1882)하였으며, 1884년 12월 엘라 닫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그는 1884년 미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해외선교부(총무)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85년 2월 27일 아라빅호 배편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잠깐 머물다가 1885년 4월 5일 미츠비시 배편으로 부산을 경유 인천에 그의 부인과 함께 도착했다. 이 때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는 첫 기도를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등 우리 나라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미국 공사(G. C. Foulk)의 권유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H. G. 아펜젤러 선교사의 주요 활동과 업적을 요약하면, 첫째, 배재학당의 창설(1886. 6. 8)을 예시할 수 있다. 배재(培材)학교는 고종 임금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둘째, 한국감리회 최초의 정동제일교회의 설립(1887.10.9)이다. 셋째, 한국의 문화 연구와 독립운동의 적극 지원이다. 그는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서구식 의회법을 제일 먼저 시행하였다. 그리고 벙커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넷째, 성서 번역사업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여 당시 한문(漢文)위주의 사회에서 한글을 장려하고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 계몽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밖에도 마가 복음서를 번역하고, 언더우드, 혜론, 스크랜톤 등과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1890)하여 성서 번역에 공헌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 중 1902년 6월 첫 주일, '레이놀즈' 미 남장로회 선교사 주재 구역의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할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어감독 등과 '무지내교회' 방문(1902. 6. 1)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시흥)을 통과하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마구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재판의 증언 때문에 목포 출발이 지연되어 다른 선교사보다 늦게 구마가와마루(熊川丸)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 정면 충돌, 침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순직하였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보올비(J. F. Bowlby : 미국 인디애나로 돌아가던 운산광산 근로자)였고 아펜젤러 선교사 외에 한국인 14명, 일본인 4명, 선원 4명도 실종(사망)했다. 성서 번역에 공적이 큰 J. S. 게일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순직에 대하여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서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아펜젤러 추모비 전면 (배재학당 총동창회)
헨리 닫지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 선교사, 부인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 묘(墓)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亞扁薛羅2世, 1889~1953)는 1889년 11월 6일 서울 서대문구 정동 2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프랭클린-마샬(Franklin and Marshal)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11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1915년 드루(Drew)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7년 뉴욕대학에서 M. A. 학위를 받았다. 1917년 9월 4일 선친의 뜻을 계승하여 감리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인천지방에서 3년간 활동하였다. 1920년 배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20년간 봉직하였다. 그는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끊임없이 교육시켰다. 1919년 11월 6일 ‘미국감리회한국연회’ 서기로 피선되어 1924년 9월 17일까지 다섯 차례나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찬송가 개정작업에 동참하여 <신정 찬송가》를 1931년 발행하는데 공헌하였다. 1952년 11월 배재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중 백혈구 부족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미국 뉴욕감리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53년 12월 1일 64세로 별세하였다.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1954년 10월 18일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되었다. 이화·배재 연합성가대의 주악과 찬송(570장)과 신흥우 박사의 조사 등으로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가 진행되었으며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H. D.아펜젤러 부인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선교사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는 1892년 10월 1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과 평양지방 감리사로 1934년까지 봉직한 노블(Noble, William Arthur. 魯普乙, 1866-1945)선교사의 딸로 1894년 6월 14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중학교와 교육대학을 졸업하였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亞扁薛羅)의 아들 H. D. 아펜젤러와 미국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1917년 9월 4일 남편과 함께 내한하였다.(자료 : 윤춘병,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처음에는 인천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남편을 내조하며 감리교 선교사로 봉직했다. 1941년 강제 출국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0년 세계봉사회 한국지부 대표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다시 내한하여 1952년 남편의 병 치료차 귀국하였다. H. D. 아펜젤러와의 사이에 3남매(Appenzeller, Alice R., Mary E.)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 사후에 다시 내한하여 1962년까지 정동에 있는 감리교선교사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 책임자(Hostess)로 봉직하였다. 정년 후에는 나이트(Cecil Knight)와 재혼하여 미국 그렌다르(Glendale)에서 살다가 1986년 11월 25일 별세하였다.(자료 : Donald N. Clark)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87년 1월 19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아펜젤러 선교사 아들 H.D. 아펜젤러 묘(배재학당 교장) 묘비 후면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ppenzeller, Alice Rebecca, 1885~1950) 묘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ppenzeller, Alice Rebecca, 1885~1950)는 H. G. 아펜젤러의 딸로 한국에서 백인 선교사의 첫 자녀로 출생하여 미국에서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15년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이화학당 제6대 교장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학장으로 교육에 헌신하면서 세계적 종합대학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검은 색 묘비의 상단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고 하는 교훈적인 글이 새겨져 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아펜젤러 동상, 서울 정동교회
아펜젤러 동상, 서울 정동교회
아펜젤러 추모비, 서천앞바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가 그동안 알려졌던 군산 앞바다가 아니라 서천 앞바다에 있는 오세이도라 불리던 어청도 부근이라는 최근 교회사가들의 주장에 근거해 2006.6 아펜젤러 순직 104주년을 추모하며 감리교 충청연회 주관하고 서천군기독교연합회와 서천군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마량진에서 48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어청도는 1914년 이전에는 행정경계상 충청남도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펜젤러 추모비
아펜젤러 추모비 전면
아펜젤러 추모비 후면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메리 F.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선교사 묘
메리 F.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선교사는 이화학당(현 이화대학교) 설립자이며, 한국 여성교육의 선구자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1832년 12월 9일 출생하여,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였고, 외아들을 낳았다. 1872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1884년 5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감리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여성 첫 선교사가 되었다. 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과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희귀한 역사’를 이룩하며 한국에 왔다. 입국 경로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월 27일 일본에 도착, 잠시 머물었다가 1885년 6월 20일 내한했다. 1886년 5월 31일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당시 학생은 1명이었다. 김부인이라는 어느 고급관리의 작은댁으로 왕비의 통역관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입학했으나 석 달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났다. 그 후 ‘별단이’라는 학생이 입학했다. 1886년 11월에는 한옥 교사(校舍)를 완성하여 이사했다. 1887년에는 학생수가 7명이 되어, 민비는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김윤식을 통하여 “梨花”라는 교명의 편액(扁額)을 하사했다. 학생수가 늘면서 2층의 붉은 벽돌집을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으며 스크랜톤 선교사를 대부인이라 호칭했다. 1908년 5월 31일에는 이화학당 초대 ‘메이 퀸’으로 추대되었다. 이화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기관이었으나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동제일교회 초대 여성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교육을 시작 한 것이 후일 협성신학교로 발전했다. 1903년에는 수원 삼일학교(매향학교)를 설립하므로, 수원, 공주지역의 지방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인력과 시설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여성 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여성교육에 진력했다. 그의 저서(단행본)로는 《그리스도 셩교문답》《지구 약론》등이 있다. 1909년 10월 8일 새벽 상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한국의 젊은 여성을 위한 사업(교육, 선교)의 선구자중 한사람이었다. 다년간 충실히 봉사하고 그가 선택한 한국에서 많은 좋은 일들의 향기와 기억을 남겼다.”고 에비슨 박사는 추모했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기념비(이화학당)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기념비(이화학당)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과 초기 이화학당 학생들
윌리암 B. 스크랜톤 선교사(1856-1922)
스크랜톤 대부인의 외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Scranton, 施蘭敦)선교사는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 뉴해븐에서 출생하여 예일대학(1878)과 뉴욕 의과대학(1882)을 졸업했다. 루리 W. 암스(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여, 오하이오주 개업의사로 활동(1882-1884)하다가, 1884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1885년 5월 3일 내한했다. 한국에서 왕립병원(제중원)의 봉사를 시작으로, 1885년 9월 10일 최초의 민간병원 ‘정동병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으로 의료 활동을 했다. 제중원에 이어 두 번째 병원이었다. 1886년 6월 병원 시설을 확장했으며, 1887년 고종 임금은 “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90년에는 상동병원(현 남대문시장 상동교회 자리)을 설립했다. 그 후 거주지와 활동지를 상동으로 옮겨,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선교부에서는 미국 감리회 조직을 위해 앞장섰고, 회계와 선교부 관리자로 서울 경기 지역의 감리사로 폭 넓게 활동했다. 성서 번역위원으로 위촉되어 성서사업에도 공헌했으며, 로마서 에베소서를 주로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1907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감리회선교연회’에서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사임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독자적 의료 활동에 힘썼다. 만년은 일본에서 보내다가 코베에서 1922년 3월 쓸쓸히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코베 캇가노 묘지에 묻혀있다. 아직 양화진에 안장되지는 못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윌리암 B. 스크랜톤 선교사 묘 (일본 고베 캇가노)
<언더우드 가족 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가족 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우선 정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선교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열었고,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당시부터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재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사, 혹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나 제중원 교사라는 직함은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선교사업을 위하여 좋은 것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김윤식의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장차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아원 학생들 중에는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후에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비서로,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경신학교의 교사로, YMCA의 지도자로, 중국 망명 후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입법위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기에 납치되었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으며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제중원은 1900년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L. H. Severance) 씨가 거액을 기부하여 병원을 세웠다. 고아원은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永信)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1900년대에는 두개의 신학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서울 소재 감리교의 피어슨 성경학원과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의 설립 초기부터 평양에 내려가 교수하였다. 언더우드는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지 전 만주에서 로스(John Ross)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윤 등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윤 등 초기 조선 신자들과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조선인 신자의 첫 교회였다. 언더우드는 1880년대 후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행하였는데 제1차 전도여행(1887년 가을)은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이었고 제2차 전도여행(188년 봄)은 아펜젤러와 동행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선교부의 소환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제3차 전도여행은 1889년 봄 신혼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강계, 압록강변의 마을 등이었다. 국내의 전도여행의 성과는 지대한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어학에 관심이 많아 다방면의 사전편찬을 주도했다. '한-영문법'이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첫부분은 문법주석이었고 둘째부분은 영어를 조선말로 번역한 것으로 도합 총 425면이었다. 이 책은 1914년에 개정되어 사용되었다. 두번째 책은 1890년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어자전'이었다. 처음 조선에 부임하였을 때 사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는 5년여 동안 단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첫째부는 게일(James S. Gale)의 도움과 한불자전(韓佛字典) 그리고 어학선생 송순용의 도움을 받아 한영부(韓英部)로 둘째부는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도움을 받아 영한부(英韓部)로 편찬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입국 1년 뒤 '마가복음'의 첫 임시번역본을 간행하였다. 1887년 일본 방문에서 헵번 박사로부터 성서위원회 조직을 제안받고 2월 7일 번역의 감수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합의하고 4월 11일 위원회의 임시 헌장과 세칙을 통과시켜 상임 성서위원회, 번역위원회, 수정위원회를 두었다. 이때 감리교회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헤론(1890년 헤론 사망 후 게일이 임명됨)이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88년 조선야소교서회의 조직을 제의 이듬해 조직되어 언더우드는 총무로 선출되었고 1890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 언더우드는 또한 콜레라 퇴치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으며, YMCA를 조직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애틀랜틱 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신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참고한 글 :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언더우드의 부인),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e)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가족 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가족 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가족 묘 뒤쪽에서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언더우드의 부인) 묘비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제중원 최초 부인과 의사(A.I. 앨러스)로 언더우드와 결혼(호튼 언더우드)하였다.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묘
원한경(元漢慶)은 장로교의 초기 선교사 원두우(元杜尤:Horace G. Undewood)의 2세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내한하였다. 1912년 경신(儆新)학교 교사, 조선신학교 교수 및 교장, 1933년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영국의 왕립 아시아학회 조선지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동 학회지(學會誌)에 한국관계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에 의하여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1945년 8·15광복과 함께 다시 와서 미(美)군정청 고문,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전기 학회의 지부를 재발족시켜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큰아들 일한(一漢)은 연세대학교 교수로, 둘째아들 요한(堯翰)은 복음전도사업 등에 힘썼다. 저서에 《한국의 현대교육 Modern Education in Korea》 《A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등이 있다. (참고- 네이버 백과)
언더우드 2세 원한경 부인 에델 묘
언더우드 3세 원일한 묘
본명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이고, 원일한은 한국 이름이다. 1917년 10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한국 장로교의 초기 선교사이자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설립자인 원두우(元杜尤:Horace Grant Underwood)이고, 아버지 역시 평생을 한국의 교육과 선교에 힘쓴 원한경(元漢慶:Horace Horton Underwood)이다. 할아버지와는 영문 이름이 같다. 1939년 뉴욕 해밀턴대학교를 거쳐 1955년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62년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193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회 파견 선교사로 한국에 와 연희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42년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강제 추방당하였다. 1947년 다시 자원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와 백낙준(白樂濬)과 함께 연세대학교 복구사업에 전념하였다. 6·25전쟁 때는 미국 해군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 당시 정보부에서 활동하였고, 1951년 7월 정전협정 때는 국제연합군 수석통역관을 맡아 정전협정을 이끌어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후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1956~1978), 경신중고등학교 이사(1956), 연세대학교 총장서리(1960)·중앙도서관장·재단이사, 부산 일신병원 이사(1977), 한미교육위원단 운영위원, 한미협회 부회장, 대천수양관 이사장, 대한성공회 이사, 광주기독병원 이사, 광주기독전문학교 이사 등을 지냈다. 잠시의 미국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한국에서 보낸 교육자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合井洞) 절두산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공원에 묻혔다. 국민훈장 모란장, 5·16민족상, 인촌문화상, 한미우호협회상을 받았고, 저서로는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2002)가 있다. (참고- 네이버 백과사전)
언더우드 3세 원일한의 부인 태요안 묘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3남 원요한 기념비
1919.3.30 서울에서 출생하여 1994.3.22.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서거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묘는 미국에 있다. 원요한 선교사는
1947-1991년 까지 44년간 청주 성서학원과 광주 호남신학대학에서 활동 하였다. 원요한의 부인 진 웨치(원진희) 역시 호남 신학대학 교수로 활동했으며 1994.3.22.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서거 양화진에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도마련, 도익서 가족 묘>
도마련, 도익서 가족 묘
도익서 목사 약력
도익서 박사(Dr. Charles D. Stokes)는 한국 선교사인 부친 도마련(Marion B. Stokes)목사와 모친 폴린 스톡스(Pauliine David Stokes)의 넷째 아들로 남 캐롤라이나주 서멀톤 312번지 외할아버지 댁에서 1915년 5월 11일에 태어났다. 서울 외국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에즈베리 신학대학, 신학원, 예일대학원에서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목원대학교(감리교대전신학원)를 설립하였다. 박사님은 한국땅에서 잉태되어 고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선교사로 일생을 사시다가 1997년 1월 10일 낮12시 82세에 애틀란타에서 소천 하셨다.
도익서 박사 내외
도마련, 도익서 가족 묘
부친 도마련(Marion B. Stokes)목사와 모친 폴린 스톡스(Pauliine David Stokes), 도익서 박사(Dr. Charles D. Stokes)
도마련, 도익서 가족 묘
<로버트 하디 선교사>
로버트 하디 선교사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의 남감리교 의료선교사로 1898년부터 함경남도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에서 의술을 베풀며 전도를 시작했다. 그는 5년 동안 선교에 매진했으나 뚜렷한 열매를 남기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1903년 8월 24일부터 일주일 동안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 연합기도회를 인도하다가 ‘아무리 수고해도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그는 8월 30일 원산감리교회에서 열린 주일예배에서 자신의 교만과 한국인들을 멸시했던 죄를 공개적으로 자복했고, 그의 회개는 곧 한국인들의 가슴에도 회개의 불을 붙여 원산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는 그 후에도 개성과 서울, 인천 등지를 순방하며 집회를 인도했고, 특히 1906년 8월 평양에서 그가 인도했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 연합기도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의 기폭제가 됐다. 그는 1935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한국에서 선교할 당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두 딸이 서울 양화진 묘역에 묻혀 있다.
로버트 하디 선교사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
기념비는 하디 선교사의 묘비에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를 덧 붙였다. 기념비는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6.5.24. 존 웨슬리 회심 268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윌리엄 쇼 가족>
양화진 윌리엄 쇼 가족 묘지
윌리엄 E. 쇼(Shaw, William Earl)는 미 감리회 선교사로 1921년 내한하여 서위렴(徐偉廉)이라는 이름으로 평양, 서울, 대전 등에서 1960년까지 선교와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90년 8월 22일 시카고에서 출생하여,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과 콜럼비아 대학원(1921)을 졸업하였다. 선교 사업에 뜻을 두고 한국 선교사가 된 다음 보스턴 신대원을 졸업(1927)하였다. 평양에서 광성학교 교사로 봉직(1921-1926)하고, 만주와 해주 지방에서 교육과 전도사업(1927-1937)에 몰두하였다. 1938년 무어(J. Z. Moore)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 단장으로도 봉사하였다. 1941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되었다가 1947년 다시 내한하였다.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에는 미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피난 교역자 구호에 힘썼으며, 특히 한국군 군종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제1차 세계대전 때도 군목으로 유럽 전선에 종군함) 외아들 쇼 해밀턴이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자 5,925명이 보내준 14,500불의 헌금으로 쇼 기념교회를 대전에 건립하였다. 1955년 목회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쉐파트(Shepard) 부인이 헌금한 6천불을 기초로 목자관을 건립, 관장으로 봉직하였다. 감리교대전신학원(목원대) 창립 이사(1954-1960)로 참여하고 신약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크게 존경을 받았다. 1961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귀국하여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병원에서 별세,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부인이 안고 와서 양화진(제2묘역 라-6)에 안장되었다.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1895-1971)선교사는 1895년 7월 2일 출생하여 1919년 7월 4일 윌리엄 쇼와 결혼하고, 1921년 내한하여 남편을 내조하면서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교육에 헌신하였다.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 남편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양화진 윌리엄 쇼 가족 묘지
윌리엄 E. 쇼(서위렴, Shaw, William Earl),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1895-1971)선교사 묘
묘비 옆면의 미 감리회, 한국 감리회 마크
윌리엄 얼 쇼(서위렴)
한국 전쟁 중 전사한 외아들, 윌리엄 해밀튼 쇼(1922-1950)
윌리엄 해밀튼 쇼(Shaw, William Hamilton)는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진격 해군 장교로 참전 후, 미군정청(美軍政廳) 소속으로 내한하여, 한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기여하였다. 해군에서 제대 후 한국 선교사를 목표로 하버드대학에서 연구하다가 6·25가 발발하자 한국 해안지역의 취약한 방위 상황을 깊이 우려하고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싸우고자 해군 대위로 다시 입대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서울 수복 진두 지휘 중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서울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응암어린이공원'에는 백낙준 등 61명의 기념비 건립위원들이 1956년 9월 22일 전사지에 세운 추모비를 옮겨 놓았다. 비문에 요한복음 15:13(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나니)이 새겨져 있다. 2001년 10월 20일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에 의하여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좌대석이 추가로 놓여졌다. 며느리 조니타 로빈슨 쇼(Shaw,Juanita Robinson)는 1943년 해밀턴 쇼와 결혼하였으며,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사회사업실(Medical-social)을 개설하였다. 서울외국인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1968년 귀국하여 미국 코네티켓에서 사회봉사 사업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하버드 엔칭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은 1952년에 출판된 김말봉의 ‘찔레꽃’ 같은 책들이 있는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한국전쟁중에 나와 우리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책들이기 때문이다.한국전쟁 중에 서울근교에서 전사한 하버드대 중국학 전공 대학원생 ‘윌리엄 쇼 기념도서’라고 찍혀 있다. 쇼의 가족과 친구 5925명이 2-3달러씩 모은 추모기금으로 사들여 기증한 책들이다.
윌리엄 해밀튼 쇼(1922-1950)
<헐버트>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의 묘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의 묘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訖法 또는 轄甫, 1863-1949)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했다. 1884년 다트마우스(Dartmouth)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 재학 중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하였다. 그는 1886년 9월 23일 개원한 육영공원의 운영과 교육내용 및 방법에 관한 규정으로 “育英公院 設學節目”을 제정했다. 학생들이 세계 지리(地理)에 관심을 보이자 1889년에는 <士民必知>를 한글판으로 발행했다. 이 책은 많은 학교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었다. 1891년 12월 교사직을 사임하고 일시 귀국했다가 1893년 9월 감리회 선교사로 다시 내한했다. 1901년 <코리아 리뷰>를 창간하고, 미국 감리회 운영의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문서 선교에 힘썼다. 그는 1906년에 발간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서 한국인의 기질에 대하여 “한국인은 합리주의적 기질과 감정이 가장 알맞게 조화되어 있으며, 냉정과 정열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평온 속에서 냉정을 잃지 않을 줄 알고, 또한 격노할 줄도 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이 살아갈 방도는 교육뿐이며, 한국을 정복한 민족(일본)과 대등하게 될 때까지 교육에 전념해야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교육 선구자로서 23년 간(1886-1909) 봉직하면서 한국의 문화, 역사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열정적 선교사였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한국 YMCA 창설자 헐버트
헐버트는 유능한 한국의 청년들에게 근대적인 사회 개혁 의식을 불어 넣고, 교육과 계몽 그리고 복음화를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실현하는 방안으로 한국 YMCA 창설을 착안했다. 1903년 3월 7일 YMCA 설립자문위원회에서 위원장과 1903년 10월 18일 창립총회(황성기독청년회) 때에는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한편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5년 10월 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이 박탈되고 일본의 한국 병합이 구체화되자 고종황제의 밀사로 워싱턴에 파견되어, ‘한미수호 조약’에 따라 도움을 요청하는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는 ‘가츠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면담은 실패했다. 또한 1907년 4월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네덜란드 헤이그(Hague) 만국평화회의 파견 밀사로 활동 했다. 이 같은 그의 적극적 정치 외교 참여를 일본 정부가 못 마땅하게 여겨 1908년 미국 정부의 소환 형식으로 한국을 강제로 떠나야 했다. 그 후 선교사 직을 은퇴하고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지내다가 1949년(8·15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초청으로 다시 내한했다. 그러나 86세 고령에다 여러 날의 여독(旅毒)으로 1949년 8월 5일 서울 위생병원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그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양화진에 8월 11일 안장되었으며, 1950년 3월 1일에는 건국공로훈장(獨立章)이 추서되었다.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이라는 추모비와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는 어록이 있다.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의 묘석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의 묘비
이 묘비는 1949년 8월 11일 영결식때 제막한 것인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묘비명을 쓸 수 있도록 비석의 가운데 부분을 비워두었었다. 그러나 당시는 건국 초기여서 국내의 여러가지 사정상 추진위원회가 글씨를 미쳐 받지 못했고 그 이후 50년 동안
그대로 비어 있다가 헐버트 박사의 서거 50주년을 맞아 1999년 당시의 대통령이던 김대중의 휘호를 받아 묘비명을 새겼다. 가운데 세로글씨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한글 휘호가 김대중의 필적이다.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의 묘 옆면, 감리회 마크가 있다.
헐버트 2세 셸던 헐버트(Sheldon Hulbert)의 묘
셸던 헐버트(Sheldon Hulbert)는 헐버트의 아들로 비문에는 1896년 2월 출생하여 1897년 3월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겨우 1년을 살다가 죽고 말았다. 박수길은 <아리랑을 부른 헐버트>라는 글에서 “구전으로 전해오던 민요를 서양식 악보로 기록한 것은 헐버트 선교사에 의해서다” 한국학 연구지(Korea Repository)에 ‘Korea Vocal Music’이라는 제목으로 헐버트가 아리랑의 악보와 가사를 실은 것은 1896년 2월에 태어난 아들이 생후 1년 만에 죽게 된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헐버트는 1888년 9월, 한나(May B. Hanna)와 결혼하였으며, 그 부인은 1948년 11월 별세했는데 2남 3녀의 자녀를 낳았다. 성장한 다른 아들 헐버트 2세 윌리엄 체스터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1986년 별세하였다. 그리고 3세(손자) 리차드는 2002년 미국에서 죽었으며, 4세(증손자) 킴벌리(KimbAll A.)는 현재 콜럼비아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2004년 8월 5일 헐버트박사 55주기 추모식 때에 양화진을 방문하여 유족 인사를 하였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셸던 헐버트(Sheldon Hulbert)의 묘
<셔우드 홀>
셔우드 홀 가족
양화진 홀 가족 묘에는 홀(Hall)가(家)의 삼대(三代) 묘역이 있다. 제임스 홀, 로제타 홀, 셔우드 홀을 비롯하여 1991년 10월 5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안장된 메리안 B. 홀도 있다. 제1대 윌리암 제임스 홀(忽)은 최초로 평양의료선교사로서 광성학교를 설립했다. 부인 로제타 홀(許乙)은 맹인 점자교육의 선구자로, 평양에 최초로 병원을 건립했다. 제2대 셔우드 홀은 한국최초 결핵요양원 설립자이며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그 부인 메리안 버텀리 홀도 결핵요양원과 크리스마스 실의 선구자이다. 미국에서 유복자(遺腹子)로 출생하여 어머니(로제타) 품에 안겨 한국에 왔지만 3살의 나이로 양화진에 묻힌 에디스 마가렛과, 또 한 사람은 셔우드 홀의 쌍둥이 중 프랭크가 하루를 살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히므로, 여섯 식구가 묘역을 형성하고 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셔우드 홀 공적비와 묘비
셔우드 홀 공적비와 가족 묘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1900년 6월 평양외국인학교 첫 입학생으로 베어드(Baird) 등 4명과 1908년까지 수학했다. 1911년 미국 오하이오 주 마운트 허몬(Mount Hermon)학교를 거쳐, 1919년 마운트 유니온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메리안과 결혼했다. 1923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뉴욕 롱아일랜드의 홀츠빌 서퍼크 결핵요양소에서 결핵을 전공했다. 1925년 8월 미국 감리회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9일 부인 메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ey)와 함께 내한하였다. 1926년 7월 해주구세병원(Norton Memorial Hospital) 원장으로 부임하여, 의창(懿昌)학교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운산금광(동양연합광업회사) 담당의사로 환자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1928년 10월 27일 해주 왕신리에 폐결핵 퇴치를 위하여 한국 최초로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했다. 결핵요양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셔우드는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사람 꼴인데 한국에서는 5사람 중 한사람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한국인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부끄러운 병>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했다. 거의 불치병으로 인식하는 결핵 환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치료에 확신을 심어주어 효과가 있다. 그는 “시범농장을 통하여 환자들은 지루한 회복기 동안에 육체적으로 덜 힘든, 현대적 영농방법을 배울 수 있으며, 치료에 도움이 되고, 특히 농민 환자는 퇴원 후 고향으로 돌아가 현대식 농사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시범농장 운영을 통하여 환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식료품을 제공하고, 퇴원 후 경제적 자립 능력 배양과 영농기술 보급 등의 효과가 있었다.(자료 : S. Hall, With Stethoscope in Asia,1978)
셔우드 홀 공적비와 가족 묘 후면
셔우드 홀 공적비
셔우드 홀은 결핵치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크리스마스-실(Seal)” 운동을 계획하고 1932년 12월 3일 남대문을 그린 ‘실’을 한국 최초로 발행했다. 남대문은 한국의 상징이며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城樓)로 나타낸 것이다. 원래 첫 도안(圖案)은 거북선에 대포를 배치하여 한국의 적(敵)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는 그림으로 제작하였으나. 거북선에 패한 일본의 반발이 문제시되어 변경되었다. 그 후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성공을 거두며 계속 발행되었다. 그러나 1940년, 서기로 표기한 연호를 일본 연호로 바꾸라는 압력 때문에 실 발행 9년차 의미로 로 수정되기도 했다. 이것이 셔우드에 의한 마지막 실 발행이었다. 1938년 5월 1일부터 효과적 결핵 예방운동 차원에서 “療養村”이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시편 번역자 피터스 부부도 동참했다. 1939년 피터스 부인은 부회장으로 피터스 목사는 사업부장을 맡았다. 1940년 8월에는 ‘화진포’ 그의 별장에서 영국 신부(캐럴)를 만나고 동해안 지역 사진을 촬영했다는 협의로 간첩 누명을 쓰고 일제의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월 또는 천$ 벌금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을 강제로 떠나야 했다. 1941년 11월 한국을 떠나 인도의 변방 마르다(Marda) 연합결핵요양원에서 결핵 퇴치사업을 계속하다가 1963년 은퇴하였다.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가 1991년 4월 5일 98세로 별세했다. 4월 10일 리치먼드 사우스 암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4월 17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결핵협회는 1993년 11월 10일 셔우드 홀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양화진에 공적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캐나다인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라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 퇴치에 헌신할 것을 결심, 토론토의대 졸업 후 역시 의사가 된 메리안 버텀리와 결혼하여 1926년 함께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해주 구세병원에 부임했으며 한국 최초로 1928년에 근대적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고, 1932년에는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 될 때 까지 결핵환자 치료와 실 발행을 계속했으며, 한편으로는 모범농장을 일구어 새 영농기술을 보급하고 의창학교장으로서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2대에 걸쳐 한국인에게 봉사한 공을 찬양해 1984년 한국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울시에서는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 대한결핵협회, 한국결핵사, 1998.2.28)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제임스 홀, 로제타 홀(제임스 홀 부인), 셔우드 홀, 에디스 마가렛(제임스 홀의 아들, 3살) 3대 홀 가족 묘
셔우드 홀 부인 메리안 B. 홀 (1896-1991)
메리안 버텀리 홀(Hall, Marian Bottomley)은 1896년 6월 21일 영국 엡워드(Epworth)에서 출생하여 1911년 캐나다로 이민하였다. 온타리오주 아덴 고등학교 4년제 과정을 3년에 마쳐 마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킹스턴학교(교사양성과정)를 이수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7년 미국 루츠타운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전교에서 가장 규율이 잘 잡힌 반으로 만들었다. 1918년 4월 유니온대학 재학 중 셔우드와 약혼했다. 1920년 9월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22년 6월 21일 결혼하여 켈로그 결핵요양소(Kellogg Sanatorium)에서 함께 결핵 실무를 익혔다. 1925년 8월 15일 미국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출발했다. 메리안 부부는 런던을 경유하여 스웨즈 운하, 아테네, 봄베이, 콜롬보, 싱가폴, 홍콩 등 8개월의 긴 여행 끝에 1926년 4월 10일 일본의 코베에 도착하였으며, 1926년 4월 19일 내한하였다. 해주구세병원과 요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결핵 퇴치와 크리스마스실 발행에 앞장섰다. 1928년 5월 7일‘어머니와 어린이를 위한 복지 클럽’을 시작하였으며, 해주를 중심으로 의료 선교 활동을 통하여 절망에 빠져있던 환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해주요양원 설립 10주년 때 기고한 선교잡지(Korea Mission Field, 34-7,1938.7)에는 “요양원 설립 10주년을 맞는 오늘, 감회 깊게 시작 당시의 그 어려움들을 되돌아본다. 마치 신비한 힘으로 모든 게 이뤄진 것같이 느껴진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꿈’이었고 그 꿈에 성실히 매달렸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성취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은 친구들을 통해 도와 주셨고, 우리의 온갖 난관은 극복되었다. 이제 이곳은 절망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는 장소가 되었다.”-메리안 B. 홀- 1940년 홀 부부는 간첩 협의로 재판까지 받았다. 10월 25일 변론 기록에는“남자 의사들이 거절한 일도 만삭인 몸에 위험을 무릅쓰고 추운 겨울밤 환자를 보러나가 시골에 앓아 누어있는 청년의 생명을 구했다.”고 메리안을 칭찬했다. 1941년 일제의 강압으로 한국을 떠나 인도에서 결핵사업을 계속하였으며 1963년 은퇴하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1991년 9월 19일 밴쿠버에서 95세로 별세하여 9월 25일 리치몬드 사우스 암교회에서 장례식이 집례되고,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결핵협회장(葬)으로 10월 5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국민일보 1991.10.7일자 참고)묘비에는 Marian Bottomley-Wife of Sherwood Hall 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자녀들의 이름도 쓰여 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베델>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Bethell, Ernest Thomas, 裵說)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Bethell, Ernest Thomas, 裵說)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톨(Bristol)에서 출생하여, 머천트 벤처러스 학교(1885-1886, 현재 West of England)에서 수학했다. 1888년 도일(渡日)하여 코베에서 동생 허버트와 ‘베델 브러더스 무역상’을 설립하여 상업에 종사했다. 1900년 5월 26일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과 결혼하여 외아들 허버트 오웬(Herbert Owen Chinki Bethell)을 낳았다. 양탄자를 만드는 공장을 설립하여 사업을 확장(1901-1904)하였으나 같은 업종 일본인 경쟁회사의 방해와 3차례의 고소로 인하여 사업에 실패했다. 1904년 3월 4일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지의 특별 통신원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3월 10일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왔다. 그는 1904년 4월 16일자 신문에 경운궁(慶運宮) 화재를 일제의 방화로 다룬 “大韓帝國 宮中의 廢墟化, Korean Emperor's Palace in Ruins)" 제호의 기사를 처음이며 마지막 특종 기사로 실었다. 그리고 1904년 4월 16일 해임되었다. 해임 사유에 대하여 베델은 “크로니클지의 지시는 그 신문의 편집 방향이 일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기사도 친일적인 것이어야 한다. 당시 한반도의 사정을 직접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크로니클은 나를 해고했다. 그 후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하였다”(베델선생 서거 95주년 기념대회 자료) 그 후 1904년 7월 14일, 대한매일신보 창설자 및 사장으로 취임하여 양기탁, 신채호 선생과 대한매일의 한글판과 영자지 창간호를 냈다. 이 신문은 항일 투쟁의 대변자 기능을 담당했다. 특히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 황제의 친서를 신문에 게재하여 일본의 만행을 폭로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1910년 8월 30일 일제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매일신보로 개제(改題) 되었다. 그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My fight for Korea is heaven ordained.)"라고 했다. 일본의 침략 정책을 맹렬히 비난하고, 한국인의 의기를 돋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1908년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선동과 일본에 대하여 적대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두 차례 재판에 회부되었다. 상해로 끌려가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지고 6개월의 근신과 4,000만환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 벌금은 한국인들이 대납했다. 그 후 계속되는 언론 탄압과 영국 정부의 압력, 신문사 간부들의 구속과 경영난 등으로 1908년 5월 27일 신문사에서 물러났다. 후임 발행인은 만함(Marnham)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심장병)되어 1909년 5월 1일 서울에서 37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1909년 5월 2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고종황제는 그의 죽음에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天下 薄情之 如斯乎)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양기탁(梁起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국의 남자가 한국에 와서, 한 신문으로 깜깜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도 급히 빼앗아 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大英男子 大韓衷, 一紙光明 黑夜中, 來不偶然 何遽奪, 欲將此意 問蒼窮)”이라는 한시를 썼다. 베델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고 유언했다. 일생을 항일 투쟁에 바친 우리 민족의 벗이며 은인이었다. 양화진에는 "大韓每日申報社長 大英國人 裵說之墓"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 뒷면에 쓴 추모의 글은 일제가 망치로 쪼아 지워 버렸다. 8.15 광복 후 전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1964년 사적을 다시 적어 옆자리에 건립했다. 한국정부는 1968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베델의 부인 마리 모드는 신문사가 자금 난에 허덕일 때 사재를 헌납하고 남편이 별세한 뒤에는 모든 재산을 그대로 두고 오직 관을 덮었던 태극기와 영국기, 그토록 사랑하던 한국인들이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輓詞)와 조문(弔文), 남들은 휴지라고 하는 빛 바랜 남편 발행 신문만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외아들과 손자에게 베델의 항일투쟁사를 가르치며 평생을 ‘한국사랑’으로 살다가 1965년 7월 2일 90세로 별세했다. 양화진에 베델 부부가 합장되기를 희망해 본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 묘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의 묘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의 묘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 묘비문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 묘에는 "大韓每日申報社長 大英國人 裵說之墓"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 뒷면에 쓴 추모의 글은 일제가 망치로 쪼아 지워 버렸다. 8.15 광복 후 전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1964년 사적을 다시 적어 옆자리에 건립했다.
<제임스 해롤드 베렌>
제임스 해롤드 베렌(Berrean, James Harold,), 샐리 베렌(‘Sally’ Berrean)부부 묘
제임스 해롤드 베렌(Berrean, James Harold, 1907-1967)은 190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하여, 펜실베이니아 주정부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1946년 내한하였다. 인천에서 미군정청 경찰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수도경찰청(Korean National Police) 수석 고문관으로 봉직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하지 장군은 군정 제도의 폐지를 발표하고 모든 권한을 이승만 대통령 정부에 이양하였다. 그 후 베렌은 미국 대사관으로 소속을 바꾸어 대외안보담당관(External Security Officer)으로 활동했다. 그는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 날 때까지 한국에서 일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1956년 그는 “미국아동구호연맹(Save the Children Federation)” 책임자로 다시 내한했다. 한국 전쟁으로 피해를 당한 고아와 미망인의 구호 및 복지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역개발재단(Community Development Foundation) 이사로도 활동하면서 농촌지역에 무상으로 소(韓牛)를 분양해 주어 농가의 소득 증대와 축산 장려에도 힘썼다. 당시 그와 함께 일했던 민동식(1922.5.5생, 중랑구 상봉2동 84-51)씨 증언에 의하면 아동구호연맹은 종로(기독교서회)에 있었으며 후에 퇴계원으로 이전했다. 베렌이 한국에서 이룩한 주요 업적은 고아들의 구제사업과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구호 및 복지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시행 과정은 첫째, 구호 대상자를 선정하기 위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대상 어린이와 미망인을 찾아 그 명단과 주소록을 작성하고 등록을 받았다. 둘째, 미국에 있는 후원자를 모집하여 재정지원과 구호물품을 지원하도록 주선했다. 셋째, 한국 전쟁으로 인한 구호 대상자와 미국의 후원자간에 결연을 맺어 지속적으로 도울 수 있게 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 농촌의 가난한 농민들을 찾아 소를 사주어 일손을 돕고 농가의 소득을 높이게 했다. 그 소가 커서 새끼를 낳으면 또 다른 농가에 확대 분양하므로 한우 증식을 위한 축산 사업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은 그의 사회 복지 사업은 한국 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1963년 최고 훈장인 태극 훈장을 받았다. 1967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샐리 베렌(‘Sally’ Berrean, 1908-1982)은 제임스 해롤드 베렌의 부인으로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한국의 어린이와 부인들을 위하여 남편 베렌을 도우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아메리칸 우먼스 클럽의 회원으로 한국을 돕기 위하여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한국어 통역도 담당하였다. 1967년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한국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한국의 생활과 전통을 소개하는 세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책의 제목은 <한국의 하루(A Day in Korea)>, <한국의 시골(The Korean Countryside)>, <서울의 시내(City of Seoul)”> 등이다. 샐리는 한국 어린이를 매우 사랑하였으며, 자기 손자와 손녀들에게도 한국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자상한 할머니였다. 1982년 별세하여 양화진 남편 곁에 묻혔다.
해롤드 베렌(J. Harold) 부부의 아들 데니스 베렌(Dennis Berrean)은 어린시절 서울에서 성장하며 외국인학교를 다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레이(Lehigh)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미국 공군장교로 임관되어 1970년대 중반 판문점 유엔 정전위원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민동식씨에게 최근(2003. 6. 1)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에는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시절 까지 잘 보호해주고 협력해준데 대하여 감사의 인사”와 다음과 같은 그의 행적을 전해 왔다. “나는 한국에서 군사정전위원회 장교로 일했습니다. 적십자회에서 봉직했던 캐시(Cathy)와 결혼하였으며 3남매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첫 아이는 쌍둥이 남매로 딸 베스(Beth)와 아들 테리(Terry)이며 1972년 막내 아들 크리스토퍼(Christopher)를 낳았습니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톤 미 국방성에서 5년간 일했으며, 부인 케시는 1982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워싱턴을 떠나 플로리다로 자리를 옮겼으며, 파나마에서 대령으로 전역하였습니다. 지금은 버지니아의 아름다운 도시 윌리암스버그(246 rcher's Mead Williamsburg VA 23185 USA)에 정착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아더 G. 웰번>
아더 G. 웰번(Welbon, Arthur Garner, 한국명: 吳越番)선교사와 두 자녀 묘
아더 G. 웰번(Welbon, Arthur Garner, 한국명: 吳越番)
미국 북장로회 안동 선교사 아더 G. 웰번(Welbon, Arthur Garner, 한국명: 吳越番)은 1866년 8월 4일 미국 미시간(Eastmanville)에서 출생하여 1897년 마가레타(Macalester)대학을 졸업했다. 1900년 샌 안젤모(San Anselmo)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1900년 10월 17일 내한했다. 1901년 9월 24일 대구선교사 새디(Sarah Harvey)와 서울에서 결혼하였으며 1909년까지 서울선교부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1회 독노회(1907. 9. 17)때에 전도위원으로 참여하고 제3회 독노회(1909.9.3)에는 경기노회 총대로 참가했다. 선교구역의 분활로 원주가 감리교 구역으로 편입되고 안동에 새로운 선교부가 개설되어 1909년 2월 플래처(Fletcher, 한국명: 鷲義湫, 성소병원 설립자)와 안동선교부로 전임 되면서 선임선교사(Senior missionary)로 안동의 선교 기지(基地)와 가옥을 매입했다. 1909년 8월 안동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10월 소오텔(Sawtell, 한국명: 史佑大)선교사와 안동 주변지역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이때 그는 안동의 서쪽을 담당하여 순회했다. 안동선교부 주석(主席)으로 안동군 부내면 옥리동(府內面 玉里洞)에 거주하며 안동 지역 교회의 공동관리, 한국어연구 감독, 보조교역자(助師)와 성서판매원 감독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과묵한 성격에 안면이 검은 수염으로 뒤 덥혀 야성적인 인상을 주었고, 교인들과 인간적인 접촉은 별로 없었으나 금곡동에 우물을 파주어 주민들의 식수(食水) 해결을 해 주었다. 안동교회 동사목사(同使牧師)로서 초대 당회장을 역임하였고 지곡, 내매교회에도 사역했으며, 1921년에는 안동지역이 7천여명 교인으로 늘어나 130여 교회로 확장되어 경안노회가 분립되었을 때 임원으로 참여하여 노회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1909년 안동 장사리(長沙里)교회가 흥왕(興旺)하여 소호리(蘇湖里) 교회가 분립 될 때 동사목사와, 1910년 설립된 영주 풍기(豊基)교회에서도 시무한바 있다. 1917년 평양으로 전임되어 1919까지 순회전도와 계몽 교육에 힘쓰다가 부인의 건강 악화로 가족들과 미국에 일시 귀국했으며, 그 자신은 1922년 다시 돌아와 안동지역 선교사업을 계속하다가 1928년 4월 6일 61세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바-15)에 안장되었다.
대구 최초의 간호 선교사 새디 웰번( -1925)
아더 G. 웰번의 아내 새디 웰번(Mrs. Welbon, Sadie 일명: Sarah)은 미국 북장로회 간호선교사로 1899년 9월 29일 내한하였다. 대구에서 최초 독신 간호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01년 9월 웰번 목사와 결혼했다. 그 후 서울로 전임되어 여성 성경반을 지도하며 순회 선교를 했다. 남편 웰번이 안동에 부임 한 뒤에는 1910년 6월 합류하여, 젊은 여성층과 노년층으로 2개의 성경반을 조직 운영하고 많은 새 신자들이 성경반을 통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했다. 1914년 5월에는 안동지역을 15일간 6백여리(150마일)를 걸어서 전도하며 12개 교회를 순방하고, 400여명을 전도한 기록이 있다.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가 1925년 7월 20일 테네시(Maryville)에서 53세로 별세하였지만 양화진에 묻히지는 못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웰번의 장남 토마스의 묘
웰번(Welbon, A. G.) 부부에게는 6남매의 자녀가 있었다. 장남 토마스(Thomas Harvey)는 1903년 5월 17일 출생하여 같은 달 27일 서울에서 열흘 만에 사망하였으며, 딸 앨리스(Alice)는 1912년 5월 30일 출생하여 1914년 2월 9일 디프테리아(Diphtheria)로 2살의 나이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이들은 양화진 아버지와 함께 묻혀있다. 한편 차남 헨리(Henry G.)는 1904년 출생하여 1919년까지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뒤 목사가 되었다. 1932년 결혼(Dorothy Klein)하였으며, 한국에서 미 군정청 통역관으로 봉직(1946-1947)하였다. 바바라(Barbara B.)는 1962년 한국에 돌아와 영어교사로 봉직하고, 매리(Mary F.)는 미국 아이오와(Davenport)에서 여배우로 활동했다. 찰스(Charles P.)는 L.A.에서 미국 우편사업에 종사했다.
웰번의 딸 엘리스의 묘
<클라렌스 N. 윔스>
클라렌스 N. 윔스(Weems)선교사 가족
클라렌스 N. 윔스(Weems, Clarence Norwood)는 1875년 2월 18일 미국 조지아 주 우스타놀라에서 출생했다. 1899년 아칸소 대학과 에모리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칸소와 켄터키에서 10년간 교직(敎職)에 있다가 선교사가 되었다. 클라렌스와 낸시(Nancy)부부는 큰 아들 데이비드, 둘째 아들 클라렌스 Jr.와 함께 미국 남 감리회 선교사로 1909년 내한하였다. 첫 부임지는 개성이었으며 동부교회와 서부교회 목사로 봉직하였고,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과 개성지방 감리사 등으로 23년간 활동 하였다. 이때 윔스 부부는 셋째 아들 벤자민과 넷째 아들 빌을 낳았다. 그 후 선교지역을 원산으로 옮겨 원산성경학원, 농촌교회사역자 양성회, 광명소학교 등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7년간 봉직하였다. 원산 선교활동 중 1939년 9월 22일, 원산 중앙교회에서 “한국 선교 3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 업적은 교역자 양성에 힘썼으며 유능한 학생을 선발 미국 유학을 주선하고, 40여 교회를 건축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1930년 남 감리회 조선연회 대표자로서 남, 북 감리회 통합에도 공로가 있다.
낸시 윔스는 남편의 선교사역을 내조하면서 선교센터에서 독자적으로 재봉(裁縫)과 요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윔스 가족은 1940년 안식 휴가를 미국으로 떠나면서 다음해 다시 돌아올 것을 계획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윔스 선교사는 1952년 2월 26일 조지아 주에서 별세했다.
그의 네 아들들은 성장하면서 모두 한국에서 외국인학교에 다녔고, 한국선교사, 미 군정청 고문, 주한 미국대사관 담당관 등으로 한국에서 봉직하였다. 장남 데이비드는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헬렌과 결혼하여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철원에서 선교사로 있었으며, 2남 클라렌스 Jr.(Clarence N. Weems Jr.)는 2차대전 때 장교로 복무하다가 미 군정청 고문관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특히 헐버트 선교사의 한국 역사책 두 권(뉴욕 힐러리 하우스, 1962)을 편집하므로 한국역사 연구에 공헌하였다. 양화진 어린이 묘역에는 그의 아들 존(Jon Jordan)이 1947년 출생하여 같은 해 6월 1일 사망하여 묻혀있다. 3남 벤자민 B. 윔스는 서울에서 한국학 전문가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부인과 함께 양화진에 묻혔다. 4남 빌은 조지아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MIT와 국제협동기구에서 1958년부터 1963년까지 5년간 한국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벤자민 B. 윔스(1914-1986) 묘
클라렌스 윔스(한국명: 魏任世)의 3남 벤자민 B. 윔스(Weems, Benjamin Burch)는 1914년 5월 14일 개성에서 출생하여 한국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미국에서 듀크 대학을 졸업했다. 북 캐롤라이나에서 교사로 있다가 1939년 내한하여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으로 1940년까지 활동했다. 1940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1942년 미국에서 룻 코브렌츠와 결혼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중요한 요직으로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US-USSR Joint Commission) 활동과, 1948년 ‘미국의 소리’ 방송을 담당하고, 1965년부터 1972년까지 UN군 사령부(Community Relation Officer)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4년 은퇴 할 때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학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에는 단국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서울외국인학교에서도 활동하였다. 벤자민 윔스의 아내 코브렌츠가 서울에서 암으로 앓다가 1966년 6월 2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이 후 벤자민 윔스는 1969년 신윤희(현재 미국에 거주)와 재혼하였으며, 1986년 1월 31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Beloved husband and father' 라 쓰여 있다.
벤자민 B. 윔스(1914-1986) 묘
벤자민 윔스의 아내 룻 코브렌츠(Ruth Coblentz) 묘
룻 코브렌츠(Ruth Coblentz)는 1916년 5월 2일 출생하여 미국 펜실베이니아 에리(Erie)에서 성장하여 오버린 대학을 졸업했다. 독신 여성으로 1938년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내한하여 1940년까지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1942년 벤자민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버지니아 주 알링턴에 정착하며 딸 셋을 낳았다. 1963년 남편을 따라 다시 내한하였다. 코브렌츠는 서울에서 암으로 앓다가 1966년 6월 2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thy peace(St. Francis)라 쓰여 있다.
존 W. 헤론 선교사
최초로 묻힌 의료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
제중원 2대 원장 헤론 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John W. Heron, 惠論)는 1858년 6월 15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며, 동테네시주 메리빌대학과 뉴욕종합대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84년 4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하는 최초 선교사(장로교파)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해티 깁슨(Hattie)과 결혼했다. 헤론 부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일본에서 1894년 4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머물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알렌(H. N. Allen)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하여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렸다. 그의 업적은 우리 나라에서 병원사업과 성서번역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 상림위원 4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6월 25일 창설한 기독교서회 창설자였다. 그는 1889년 언더우드의 압록강 세례문제와 관련하여 언더우드와 헤론 간에 불화도 있었다고 한다. 헤론의 인간성에 대하여 기포드 선교사는 1897년 코리안 레포지트리에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 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결국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이 별세한 뒤 그의 미망인 해티는 헤론과 가까웠던 친구 게일(Gale) 선교사와 1892년 4월 7일 재혼하였다. 이때 게일은 노총각으로 30세였고,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헤론의 아이가 둘(1885년에 출생한 큰딸, Sarah Anne과 1887년에 출생한 딸Jessie Elizabeth)이 있었다. 게일과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으며 해티는 1907년 8월 두 딸과 한국을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다시 돌아 왔다. 결핵으로 1908년 3월 2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의 전 남편 헤론이 묻혀있는 뒷자리에 안장하였다. 양화진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 결정되기까지는 헤론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긴 사연이 담겨 있다. 헤론이 별세하자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 논의 끝에 양화진을 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한국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묘지로 허락되지 않았다. 양화진은 본래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자기네 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동 미국공사관 안에 임시로 묘를 설치하니,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외교적인 차원에서 미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5개국 공사의 공동 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청원하여, 1890년 10월 24일 정부의 허락을 받아 그후 헤론의 시신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헤론 묘지의 관리인은 최봉인(후에 서교동교회 설립교인과 초대장로로 임직)이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존 W. 헤론 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에비슨 선교사>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 가족 묘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 가족 묘
제4대 제중원 원장, 세브란스 병원 창시자
올리버 R. 에비슨(Avison, Oliver R. 1860-1956)은 캐나다 출신의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어비신(魚丕信)이란 한국 이름으로 세브란스 병원장을 비롯하여 연합의학교 초대교장과 연희전문 교장 등 한국의 의료 개척 선교사(1893-1934)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에서 출생하여 6살 때 캐나다 왼스턴에 이주하였으며, 1887년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내과 및 약리학을 강의하다가 언더우드의 영향을 받아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다. 1893년 부산을 경유하여 11월 1일부터 제중원 의사로 봉직하였으며, 1895년 여름에는 서울에 만연된 콜레라 방역사업 책임자로 진력하여 일찍이 상상 할 수 없는 65% 완쾌자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으며, 1899년 제중원에서 수명의 학생을 모아 의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수학 자연과학 농학 등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00년에는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한국 의료 선교의 확장을 제창하였다. 이때 오하이오 출신의 석유회사 중역 루이스 H.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를 만나 그의 후원금을 가지고 제중원을 구리개(銅峴)에서 남대문 밖으로 이전하여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세웠다. 이때 제중원에 있던 남대문교회도 함께 이전하였으며 그는 교회를 열성으로 섬겼다. 1904년 제중원을 "세브란스"로 개칭하고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1913년부터 세브란스 의전(醫專)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1916년부터 1934년까지 연희전문 교장까지 겸직하였다. 1934년 3월 세브란스 의전과 연희전문학교 명예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두 학교 즉 "연세" 통합에도 노력하였다. 1935년 은퇴하고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가 1956년 8월 29일 플로리다 피터스버그에서 96세로 별세하였다. 제자들은 에비슨의 동상을 건립(1928)하였다.
제니 바네스 에비슨(Avison, Jennie Barnes,1862-1936)
남편 올리버 에비슨과 아이 셋을 데리고 내한하여 부산 베어드 선교사 집에서 네 번째 아이 더글러스 에비슨을 낳았다. O. R. 에비슨 부부는 모두 10남매를 낳아 일곱을 키웠다. 자녀 중 큰아들 고든(Gordon W.)은 YMCA 선교사(1915-1939)로 북한지역에서 농촌선교를 담당하고, 딸 레라(Lera)도 선교사역(1911-1914)을 담당하였으며, 아들 더글러스 에비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브란스 병원장이 되었다. 제니 바네스는 1862년 2월 23일 온타리오에서출생하여 남편의 선교사역을 열성으로 조력하였다. 언제나 화사하고 아름다운 옷차림에 매력 있고 상냥한 표정으로 손님을 접대하였다고 한다. 1936년 9월 15일 74세로 별세하였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더글러스 B. 에비슨(1893-1954) 선교사 가족 기념비
더글러스 B. 에비슨(1893-1954) 선교사 2세 부부
더글러스 B. 에비슨(Avison, Douglas Bray)은 부산에서 1893년 7월 22일 출생하였다. 캐나다에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1920년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선천지방에서 활동(1920-1923)하고 서울로 전임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소아과 교수, 부학장 및 병원장 등으로 1947년까지 헌신하였다. 1952년 8월 4일 캐나다 벤쿠버에서 별세하여 임시 안장하였다가 생존시 한국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1954년 유해를 화장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장례하고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양화진 묘역에는 제자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비문이 건립되어 있다. "더글러스 B. 에비슨 선생은 우리 나라에 나시고 일하시고 여기에 무치셨다. 20년 동안 우리 학교에서 몸바쳐 일하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셨다. 알고 행할 수 있도록 후학을 가르치시고 사랑과 정성으로 환자를 대하셨다. 높은 덕 넓은 은혜를 마음에 색이면서 그 유언을 따라 유해를 모신 이 자리에 이 비를 세워 선생을 추모한다. 1953년 8월 4일 세브란스의과대학 동창회 세움"
캐들린 로슨(Kathleen Isabel Rawson, 1898-1985)
더글러스 B. 에비슨의 부인 캐들린 로슨(Kathleen Isabel Rawson, 1898-1985)은 1898년 8월 10일 캐나다(Claremont)에서 출생하여, 남편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자녀로 다섯 딸이 있으며 1985년 8월 6일 벤쿠버에서 별세하여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양화진 남편 곁에 합장하였다.
<허스트>
J. W. 허스트(1864-1952) 가족 묘
J. W. 허스트(Hirst, Jesse Watson. 許時泰, 許濟)는 1864년 12월 24일 미국 마사추세스주에서 출생하여 1890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1893년 필라델피아 제퍼슨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 존스 홉킨스 대학 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뒤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0년부터 4년간 제퍼슨 대학에서 조직학, 산부인과 진단학을 강의했다. 1904년 9월 13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같은 해 9월 23일 세브란스(Severance)병원의 새 건물이 신축된 때부터 에비슨과 함께 전담 의사로 봉직 했다. 왕과 고관의 건강을 보살피는 시의(侍醫)와 군의(軍醫)로도 활동했다. 이때 에비슨은 주치의, 허스트는 부주치의로 임명되었다. 가마를 타고 다니던 그 시절에 고종황제는 그에게 특별히 인력거를 하사하여 교통수단으로 제공해 주었다. 이만열은 <한국기독교의료사>에서 “고종은 일본에서 새 인력거를 하나 더 주문하고 허스트에게 전용 인력거꾼을 붙여주었다. 에비슨과 허스트는 세브란스에서 가르치고 진료하는 일 외에도 시내의 화자들을 방문 치료하는 등 당시의 일과는 아침부터 저녁 8-9시까지 이어졌는데 전용 인력거가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했다. 1906년 세브란스 간호사양성학교 설립 때 실즈(Shields)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1907년 9월 9일 ‘한국의료선교사 협회’가 창립될 때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1년 의학교육의 전문화 과정에서 산부인과 주임교수로 활동하고, 1915년에는 진료사업의 입원실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세브란스 병원장(1925-1927)으로 환자를 진료하고 병원 발전의 기틀을 닦아, 의과대학 교수로서 의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1934년 3월 30일 많은 공적을 남기고 퇴임했다. 연세대학 교직원과 동창들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허스트 흉상’을 헌정”했다. 그러나 <연세대학교사> 조차 “그의 공적보다 더 큰 에비슨의 그늘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 세브란스의 제2인자였다. 그는 남대문교회에서 에비슨 부부와 함께 복음을 전하며 교인들을 지도했다. 귀국 후 북 캐롤라이나주(Durham)에서 거주하였으며, 1952년 4월 28일 플로리다 주에서 별세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H. S. 허스트와 그 자녀들
허스트의 아내 할보 새디 허스트(Hirst, Harbaugh Sadie, 1875-1928)는 1875년 3월 28일 미국 일리노이주 록포드(Rockford)에서 출생했다. 1901년 3월 4일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J. W. 허스트보다 앞서 내한하였다. 개성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송도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1907년 3월 11일 J. W. 허스트와 서울에서 결혼한 뒤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바꾸고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에서 교육에 종사하는 등 남편의 의료 선교에 협력했다. 1928년 2월 19일 서울에서 53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 바탕의 돌에 대리석을 붙여 꽃병 모양으로 조각된 묘비에는 개성(송도)의 개척 선교사이며, J. W. 허스트의 부인이다. “일하고, 사랑하고, 고난 받으며, 승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Having labored, loved and suffered she entered into glory triumphantly)”, “자녀들은 축복의 소산(Her children rise up and call her blessed)"이라 쓰여 있다. "
한편 그 옆 자리에는 허스트 부부의 딸 캐롤(Carol)의 스크롤로 조각된 묘비가 있다. 그는 1920년 11월 15일 4살의 나이에 서울에서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이밖에 허스트 부부의 자녀로서 1907년 11월 6일 서울에서 사망한 아미(Hirst, Amy)와 1908년 8월 2일 사망한 조엘(Hirst, Joel)이 양화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묘지의 소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해리 로드의 에 의하면 허스트 가족으로 "제시(Hirst, Jessie M.), 리챠드(Hirst, Richard W.) 및 도날드(Hirst, Donald V.)가 미국에 거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페인 선교사>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선교사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선교사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陛仁, 1869~1909) 여성 선교사는 미국 마사츄세츠주 보스턴에서 1869년 2월 21일 출생했다. 보스턴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뉴잉글랜드 교사양성소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보스턴 상업도서관에서 사서로 잠시 일 할 때에 한국에서 귀국한 선교사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선교사로 지원했다. 1891년 11월 뉴잉글랜드 지부에서 한국 파송 선교사로 선임되고, 1892년 8월 미국 감리회 소속으로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하여 먼저 한국어를 공부하고 1893년 9월 18일 제3대 이화학당장으로 취임하여 15년 간 여성 교육에 이바지했다. 구약 성경을 가르쳤으며, 교과과정의 편성과 정비에 힘썼다. “여자가 공부는 해 무엇 하느냐”하는 시절에 여성 교육에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그의 주요 업적과 활동 상황을 살펴보면 첫째, 1899년 생리학(生理學) 교과서를 한국 최초로 프라이(Frey)와 공동 저술했다. 이 책은 “젼톄공용문답(全體功用問答, Lessons on the Human Body)"이라고 했다. 젼톄(全體)란 온 몸이며, 공용(功用)이란 신체 각 부분의 쓰임세(機能)를 의미한다. 68쪽의 총10장으로 분류하여 사람의 몸 즉 인체(人體) 각 부분의 구성과 기능 및 위생에 관한 내용을 문답식으로 만든 교과서이다(자료: 이화100년사1994). 생리학(生理學)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전에 인체의 기능에 관하여 여성에게 교육을 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둘째, 1904년 9월 중학과(중등과정)를 설치하였으며, 교과과정(敎科課程) 정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민족은 배워야 나라도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교육열이 점차 높아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한국어 실력이나 학생들의 연령, 지식 수준 등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교과 과정을 편성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이 때 페인은 산수 등 기존 과목 외에 성경, 영어, 체조 등을 교과과정에 편성하였으며 재봉, 자수를 가르치는 가사과를 설치했다. 특히 한국 최초로 여성에게 체육 운동과목을 첨가한 것은 큰 변혁이었다. 여성의 걸음걸이가 뒷 발꿈치 높이 정도로 걷는 것이 미덕(美德)이라고 여기던 시절에 온몸을 흔들어 대는 체육운동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이 같은 체육운동 때문에 양반층에서 처음에는 크게 반발하고 “집안 명예가 손상되고, 혼사 길이 막힌다”고 하면서 하인들을 시켜 학생을 집으로 데려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셋째, 학생수 증가로 1900년 11월 정동에 2층 양옥 본관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규모가 크고 서양식으로 미려하게 건축되어 장안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공부하는 교실과 생활하는 기숙사가 함께 있어 학생들은 좋은 환경에서 즐겁게 생활했다. 페인 선교사는 학생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면서도 엄하게 훈육하여 학생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식료품 조달을 위한 <장보기>도 직접 담당하였는데 그의 시장 행렬은 “앞뒤에 각 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사인교(四人轎) 가마를 타고 기수(護身人)를 앞세웠다.” 늘 흰밥(쌀밥)을 해주니까 학생들이 팥밥이 먹고 싶다고 하면 가끔 시장에 나가 팥을 사다 팥밥을 해 먹이기도 한 무척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자료:이화70년사) 넷째. 학생을 보호하고 신앙을 통한 기도회 등으로 민족 운동을 지원했다. 1904년 러ㆍ일전쟁이 있었을 때 학생들을 기숙사에 보호하고 쌀, 콩, 어포 등 각종 식량을 구입 비축하여 안정된 생활 속에서 수업을 계속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을 때는 신앙을 통한 기도회로 민족 운동을 지원했다. 조국을 잃은 슬픔 속에서 가냘픈 소녀들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수업을 중단하고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주권 회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회를 가졌다. 다섯째, 1907년 이화학당장 자리를 프라이(Frey, Lulu E., 富羅伊, 1907-1921) 선교사에게 인계하고 인천, 평양, 서울의 기독교 학교의 관리와 전도를 위한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신앙이 돈독한 그는 험한 길을 수 백리가 넘도록 걸으면서도 지칠 줄 몰랐다. 열정적인 설교와 전도는 감동을 주었으며 여성 해방 운동에 공헌했다. 40세를 일기로 1909년 9월 25일 해주지방 전도사업 순회 중 콜레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졸리>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 묘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 1857-1898)는 1857년 터키(Smyrna)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영국 외교관인 영사로 중국 상해에 있다가 구한말 우리나라에 부임하여 주한 영국 영사로 인천에서 활동했다. 1896년 영국 작가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방문하였을 때는 그의 안내로 한국의 문화를 외국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졸리 부부에게는 3남매의 자녀가 있었는데 막내 딸 릴리안은 서울에서 성장하여 스탠다드 석유회사 사무실의 비서직으로 1920년대까지 일했다. 졸리는 1898년 별세하여 처음에는 인천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 후 딸 릴리안에 의하여 부모의 유해를 1950년대 중반에 양화진으로 옮겼다. 묘비에는 “Now rests in Peace, perfect peace. not having died but only gone before in 1898(이제는 평안, 완전한 평안 속에서 안식한다. 죽은 것이 아니라 1898년이 가기 전에 또 다른 여행을 떠날 뿐이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1901년 2월 졸리(周驪)의 별세를 슬퍼하고 그의 덕업과 혜택을 크게 치하하여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 상공인이 건립한 묘비도 있다. 비문에는 “嗚呼周公 德業昭彰 惠澤流長 俾我華商 言念不忘 善人云亡 泲泗沱滂 嗚呼周公 美玉善藏”이라 쓰여 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클라라 A. 졸리(1860-1928)
클라라 A. 졸리(Joly, Clara Agnes Lillie) 부인은 1860년 1월 1일 출생하였다. 주한 영국 영사 헨리 졸리와 결혼하여 인천에 거주하였다. 그는 남편이 별세한 뒤에도 한국에 머물면서 순종(1907-1910)이 왕세자로 있을 때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에서 1927년까지 살다가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아들을 찾아 1927년 이한하였다. 그 후 북경(Peking)에 있는 또 다른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1928년 3월 28일 별세했다. 유해는 양화진으로 돌아와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졸리의 아름다운 기억, The eternal GOD is thy refuge and underneath are the everlasting arms.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영원하신 하나님은 피난처이시고, 그 영원하신 팔로 안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릴리안 A. 휘트만(1896-1968)
릴리안 A. 휘트만(Whitman, Lilian Agnes Joly)은 졸리 부부의 세 자녀 중 막내딸로 1896년 출생하였다. 릴리안은 서울에서 석유회사 사무원으로 1920년대까지 일하면서 휘트만(Grant Whitman)을 만나 1927년 서울에 있는 영국성공회당(Anglican Cathedral)에서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한ㆍ일 스탠다드 석유회사에서 기독 실업인으로 30년간 일하다가 퇴직하였다. 퇴직 후에는 미국 매릴랜드의 베데스다(Bethesda)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릴리안은 1968년 별세하였다. 그가 별세하자 남편 그랜트 휘트먼은 부인 릴리안의 유해를 양화진으로 운구하여 그 부모가 묻혀있는 졸리 가족묘지에 안장하였다. 비문에는 “Lord in thy mercy grant us safe lodging and a holy rest and peace at the last(주여 당신의 긍휼로 우리를 받으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거룩한 안식과 평안을 주옵소서)”라 쓰여 있다.
<일본인 소다>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 1867-1962)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소네무라(曾根村)에서 출생했다. 오카야마(岡山)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893년 노르웨이 선박 선원으로 홍콩에 체재하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독일인 경영의 공장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다. 그 후 방랑 생활을 계속하다가 1899년에는 술에 취해 길에 쓸어져 빈사(瀕死) 상태에 있을 때 한국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 한국에 은혜를 갚고자 1905년 6월 내한하였다. 서울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있으면서, 이상재 선생의 감화로 1906년 기독교인이 되어 ‘백만명 구령운동’에 가담하였고, 경성(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3·1 운동과 105인 사건 때에는 한국인 청년지도자들의 석방에 앞장섰다. 특히 가마쿠라 보육원장으로 수천의 한국 고아들을 양육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데려다 이집 저집 안고 다니며 젓 동냥을 하기도 했고, 밤새워 우는 아이들을 안고 꼬박 날을 밝히는 일이 많기도 했다. 1943년 가을 부인 우에노에게 고아원을 맡기고 원산(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다가, 8‧15 광복 후 1947년 10월 13일 서울로 돌아와 부인을 잠깐 만난 뒤 부산으로 걸어가 1947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자료:전택부,이 땅에 묻히리라,1986) 귀국 후에도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사정을 안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5월 15일 다시 내한하였다. 서울의 옛집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6세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국민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다.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대광고교 밴드의 조악(弔樂)으로 시작하여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기도와 성경 봉독, 그리고 재건운동본부장(柳達永), 보사부장관(鄭熙燮), 서울시장(尹泰日)의 조사가 있었다. 유족으로 조카딸 마스다(增田須美子)가 참석하였으며, 박정희 의장과 일본외상(小坂)은 조화를 보냈다. 유달영은 조사에서 “소다 옹의 생애는 어느 사회사업가보다 우리들에게 감격과 충격을 준다. 소다의 생애처럼 깨끗한 인류애와 사랑만이 한국과 일본이 단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료: 한국일보, 1962. 4. 2 기사)
우에노 다끼(上野, )
우에노 다끼(上野, Takiko, 1878-1950)는 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나가사키 기독교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내한하여 소학교(日新) 교사로 봉직했다. 1908년 30세 때 41세의 소다 가이치와 결혼했다. 숙명여학교와 이화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퇴직하여 가마쿠라 보육원에서 남편을 도와 보모가 되었다. 1943년 소다가 원산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할 때에는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가 1950년 1월 14일 74세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소다(曾田)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는 나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전택부는 기록했다. 묘비에는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 이어늘”이라는 주요한 시가 쓰여 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묘비
묘비에는 “孤兒의 慈父 曾田嘉伊知”,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913년 가마쿠라 보육원을 창설하여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 수천 이러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금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를 순회 연설하다. 95세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영락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하니 향년 96세라. 동년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연합>으로 비를 세우노라.”라 쓰여 있다.
기념비
레티샤 빈턴(Vinton, Letitia Coulter) 과 세 자녀의 묘
레티샤 빈턴(Vinton, Letitia Coulter)
1873년 1월 31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여, 1891년 4월 3일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서 12년(1891-1903)간 활동하면서 남편의 선교 사역을 협력하다가 1903년 12월 4일 30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남편 C. C. 빈턴(Vinton, Cadwallader C.)
1856년 미국에서 출생했다. 1891년 4월 3일 미국 북 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내한 초기 제중원 의사를 시작으로 원장이 되었다가 ‘육체를 치유하는 것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1893년 11월 사임하고 자택에서 진료와 복음 전도를 겸하였다. 그는 한글 성서의 출판과 보급을 위하여 성서공회(聖敎書會) 창설에 참여하여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한글 신약 전서의 단편 성경들을 처음으로 출판하기 시작했을 때, 그 관리인(Custodian)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성서공회사, Kenmure편지, 1904)이 있다. 그는 평양, 의주, 만주 등지를 자주 여행하면서 전도했다. 1891년 여름에는 마펫(Moffett)과 만주에서 털리(Turley)에게 ‘로스역 성경’ 출판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성경은 잘 읽혀지지 않고, 벽지로 발라지며, 폐지로도 팔고 있다고 했다. 그는 1897년 4월 1일 창간한 장로교 최초의 신문인 그리스도 신문(The Christian News)의 편집인(Business manager)으로 활동했다. 이 신문은 2부가 왕실에 전달되고, 정부는 460여부를 구입하여 서양의 문명 계몽 용도로 전국의 관청(367군, 중앙부처)에 보급했다. 그는 전도를 위한 기금 확보를 위하여 ‘재봉틀’을 수입하여 팔았고, 성서공회 건물을 이용하여 ‘벽지장사’를 하기도 했다. 1904년에는 부산 나병환자 수용소 설치에 공헌했다. 그는 1907년 12월 16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08년 미국으로 돌아가 1936년 6월 26일 뉴욕에서 별세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캐뒤(Vinton, Cadwallader C.)
청일 전쟁기간 중 한국의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1894년 8월 22일 사망하여 묻혔다. 1894년은 동학혁명(東學革命)과 청일 전쟁(淸日戰爭)으로 한국 사회는 극도로 불안했다. 그해 여름은 폭염(暴炎)까지 겹쳐 더욱 힘들었다. 일본군은 톈진조약(天津條約) 위반을 구실로 청일 전쟁에 승리하여 궁궐(宮闕)까지 장악했다. 혼비백산한 백성들은 피난 행렬이 이어지고, 미국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해병대를 투입하여, 집안에 머물도록 했다. 방안에만 갇혀 지내던 선교사 가족들은 무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여 병으로 앓거나 희생되었다. 빈턴 2세 캐뒤도 이때 사망했다. 당시의 상황을 언더우드 부인 릴리어스(Lillias)는 에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 동안에는 모두 서울에 남아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몹시도 무더운 날 울안에만 갇혀 지내던 선교사들이 병에 걸렸다. 전킨(Junkin)목사 부부도 우리 집에서 여름을 보냈지만 아이 한명이 죽고 말았다. 이는 몇 주 동안의 더위로 희생된 사례였다. 언더우드와 우리 아들도 여름 내내 앓았다. 에비슨 가(家)의 두세명, 알렌 가의 두 명, 아펜젤러 가의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스크랜톤 가의 아이들은 열 때문에 쇠약해 졌다. 홀 의사는 열병에 걸려 죽었다. 빈턴 부부의 아기도 그해 여름에 죽었다.” 한편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는 甲午에 “日淸이 失和하야 彼此에 交鋒하므로 京城에서 義州까지 兵火가 經한 沿路는 安堵키 不能한지라 宣敎師 等은 京城으로 避寓하고, 我敎徒 等은 山峽에 逃散하니”라 기록되었다.
토미(Vinton, Thomas)
1896년 8월 19일 사망하여 묻혔다.
왈터(Walter)
생존한 빈턴 가족은 도로시(Dorothy) 및 휴(Hugh C.)가 미국 오레곤주(Portland)와 워싱턴주(Seattle)에 살았다는 로드(Rhodes, Harry A.)선교사의 기록이 있다.
<토프트>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杜永瑞, 1865-1928)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杜永瑞, 1865-1928)
1865년 7월 4일 영국 웰링톤에서 출생하였다. 1884년 구세군 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890년 스웨덴 출신 힐다랄손(Hildaralson) 사관(정위)과 결혼하였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랜드 등 북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및 인도 북부지방 사령관 등으로 40년간 봉직하다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에서 그의 일생을 마쳤다. 부인 힐다랄손은 농아(聾啞)사업의 공로로 창립자 훈장을 받았다. 제임스 토프트(Toft, James)는 한국 구세군 제5대 사령관(參將)으로 1926년 8월 16일 내한하였다. 이들 부부는 서울 역에 도착하여 육아원 음악대와 많은 인사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곧바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하는 등 활발하고 바쁜 일정을 시작했다. “한국구세군사(장형일)”에 따르면 지방 순회 첫 일정은 1926년 9월 4일, 고산지방을 시작으로 10일에는 충북 영동의 심천 주곡과, 11일부터 대구, 영덕, 13일에 의성, 26일에 충남 홍성, 29일에 개성을 순회하였다. 그리고 10월 7일 전주, 14일 해주 등지를 두루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하였다. 1926년 11월 4일에는 세계 구세군을 통괄하는 브람웰 부우드(Bramwell Booth) 대장 일행이 방한하였다. 그는 초대 대장의 아들로 돈독한 신앙과 실천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온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아 그의 한국 방문은 큰 행사 중의 하나였다. 부우드는 서울에 도착하여 자동차 위에서 “구세군은 인종, 계급 상하를 불구하고 흑암 중의 죄인을 구원하고, 죄, 욕심, 술, 도박보다 큰 힘을 준다.”고 연설했다. 그런데 부우드 대장의 한국 방문기간 중 ‘구세군 분규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 사관 대우에 대한 불만으로 허곤 윤수만 등이 20개 항목으로 된 진정서를 낸 사건이었다. 진정 내용에는 한국인 사관의 참모권 부여, 차별 대우의 개선, 만행(蠻行) 사관의 축출과 선행(善行) 사관의 승진, 생활비 인상 요청 등이었다. 부우드는 이 사건에 대하여 유감을 표시하고 분규행동은 비 복음적, 비 구세군적이라 지적하고 이 사건으로 배운바가 많아 1927년은 “전능의 해”로 삼기를 기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20여명의 사관들이 면직되었으며, 그는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며 구세군의 명예를 손상시킨 충격으로 병을 얻었다. 그가 한국에 부임한지 2개월 반 만에 겪는 엄청난 사건이었으며, 책임이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과중한 정신적 부담이었다. 결국 이로 인하여 1928년 5월 25일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치료와 간호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1928년 6월 15일 새벽 3시 별세하고 말았다. 1928년 7월호 구세신문에는 “구세군 조선사령관 참장 두영서씨 별세”라는 제목으로 차드(Robert Chard, 한국명: 車宇道) 서기 장관은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참장께서 조선에서 일하신 것은 참으로 어려운 처지와 형편 아래에서 나아가게 되었는데 조선 임명 첫해에 당하신 그 고난과 낙망은 육체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나, 그것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하여 건강이 악화되어 별세 2주일 전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종말에는 이 세상을 영영 하직하고 영원한 나라로 가서 만왕의 앞에 계시게 되었도다... 참장은 일평생 선한 싸움을 싸우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셨고 이 세상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사신이가 되었도다.” 그는 구세군 사령관 재임 기간 중 정동 사관학교, 대구군영, 해주군영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쿠퍼(Harold Cooper, 한국명: 具佑保) 참모 정위는 “그가 우리 지방(해주)에 여러 영문을 방문하여 주신 것을 심히 기뻐하며 전하신바 복음과, 끼치신바 모범과, 감동과 감화는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지방 영문을 순회할 때에 태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피곤한 내색도 보이지 아니하고, 구주를 위하여 기쁨으로 하셨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편벽됨이 없이 곧고 바르게 하셨다.”고 하였다. 장례식은 차드(Robert Chard) 서기장관의 인도로 거행되고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He is with Christ"라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리챠드, 이도식 사관 >
리챠드, 이도식 사관
윌리엄 리처드(Richards, Williams J. 한국명 : 이도식)
1878년 영국 런던에서 윌담스토우 출신 존 리처드 부장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열두 살 때 구세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캐더린(Catherine)의 묘 앞에서 헌신을 다짐했다. 런던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덴마크에서 7년간 선교사관으로 봉직하였다. 1909년 2월 8일 메리 킬로(Richards, Mary K.) 부관과 결혼하였으며 만국 본영의 문학부에서 봉직했다. 1913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선교사관으로 파송되어 지방장관과 청년부 서기관으로 봉직하였다. 1918년 6월 2일 한국 구세군 서기장관으로 명령을 받아 내한하였다. 이 무렵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한국의 첫 인상과 예배의 모습을 그의 딸은 <선교사관 자녀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아버지(리처드),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서울에 온 것은 1918년 6월 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종려나무와 바나나 나무만 보다가 한국에서 소나무를 처음 보니 아주 신기했다. 눈도 많이 와서 겨울에는 난로를 피웠다.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할 때는 반드시 성경책을 색 보자기에 소중히 싸가지고 왔다. 그리고 책보를 풀어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낸 뒤에는 그 책보를 착착 개어서 앞에 놓았다가 다시 싸가지고 가곤했다. 마루 바닥에 앉아 “찬송합시다”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어떤 할머니는 남이 다 부른 후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길게 여음을 끄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에 부임한 리처드 서기장관은 구세군을 발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선교자금을 조달하고 한국 여성사관을 양성하였으며 고아원(육아원)을 개원하여 구제사업에도 공헌했다. 그는 브래지(George French, 한국명 : 夫來智) 사령관이 갑자기 전근되어 사령관 직무 대리를 수행하면서 1918년 한국 구세군 개전 10주년 대회 준비에 과로하며 힘썼다. 구세군 고아원 운영 과정에 대하여 그의 딸 기록에는 “나는 아버지가 밤중에 초롱불을 들고 나가 거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가끔 보았다. 서울의 고아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관학교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깍아 주고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그때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놀랬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천연두를 묻혀 와서 온 사관학교에 퍼지게 되었다.” 결국 고아원 운영과정에서 퍼진 천연두 때문에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이 사망하고 리처드 자신도 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이 무렵 구세공보와 관련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은 천연두로 인하여 여러 명이 희생 되었다. 리처드가 서울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거리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이미 천연두에 감염된 아이를 고아원에 수용하므로 인하여 천연두가 확산된 것으로 해석된다. 실베스터(설 보덕) 정령 집에도 천연두가 전염 되어 실베스터 선교사 두 아들이 앓아눕게 되었다. 이때까지 리처드는 이 전염병에 감염되지 아니하여 그?매일같이 실베스터 가족의 심방을 비롯하여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월 19일 실베스터의 셋째 아들 더글러스 실베스터가 두 살의 어린나이로 천연두에 의하여 사망하였다. 뒤이어 같은 해 1월 28일 실베스터의 큰 아들 고던 실베스터도 사망하였다. 이때 리처드는 두 아이의 장례식을 집례 하였으며, 눈 위로 먼 길을 걸으며 평동에서 양화진까지 왕래하게 되었다. 결국 리처드도 이로 인하여 다음 주간에 병에 걸렸으며 얼마간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그도 천연두로 인하여 1920년 2월 5일 별세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실베스터 가족에 뒤이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구세공보에 보도된 ‘한국에서 순직한 선교사관 리처드 부령의 감화’라는 제목에서 뿌람월 푸드는 리처드의 죽음에 대하여 “리처드 부령은 강직하고 열렬한 구세군 주의의 좋은 표본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헌신하여 그의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어디든지 나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봉사 순종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라 했다. 리처드는 “나의 가장 큰 기쁨과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의 나라에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 후 그의 부인과 4자녀의 가족들은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캐나다 사령관)와 캐나다 구세군의 헌금으로 아영 영문에 1922년 12월 8일 ‘리처드기념관’ 이 건립되었다. 묘비에는 "Duty done Victory Won" 이라 쓰여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코엔>
R. C. 코엔(Roscoe C. Coen) 묘 예정지와 아들 M. S. 코엔 묘
로스코에 C. 코엔 (한국명: 高彦)은 미국에서 시카고대학을 졸업(1918)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8년 10월 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인(Mary Bushanan)과 함께 내한했다. 그는 서울 연지동 1번지와 136번지에 거주하면서 선교사로서 특히 경기 중앙시찰구역과 남부시찰장 등으로 15처의 교회를 주관하는 등 많은 선교 활동을 했다. 노량진교회에서 동사목사(同事牧師)로 활동(1921-1923)을 비롯하여, 광주 신사리(新沙里)교회, 광주 鎭村교회에서 곽안련(Clark, Charles Allen)선교사와 상계(相繼) 시무한바 있다. 용인 아곡(牙谷, 1925)교회, 시흥 삼성(三星, 1919, 1929)교회, 안성 안성읍교회(1928), 방축리(防築里)교회, 대갈리(大葛里)교회에서 당회장 등으로 시무했다. 그리고 광주 용수리교회(1927), 용인 문촌교회, 아고리교회에서 사경회 강사로 활동했다. 경ㆍ충노회에서는 목사가족구조부(1920-1928), 학무부(1922-1923), 공천부(1922), 경기남편시찰장(1923), 목사장립위원, 부회계(1927-1928), 재정부(1925-1930) 등에서 활동했다. 이밖에 진우, 쌍동, 상동막, 신대교회와 시흥지역에서 둔전, 금광, 둔토, 세곡, 송파, 심곡, 교회, 수원지방의 학현, 부림교회 등 경기 중앙 및 남부시찰 구역의 교역자로 헌신하였다. 그리고 “미국북장로회선교역사” 편찬위원(1931)으로 활동하고 노해리 선교사를 도와 “The Korea Misson Field”의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조선예수교서회 실행위원(1934)과 한국에 있는 중국인 선교사업 감독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서 성서와 영어를 강의했으며 재단 이사(1940)로 선임되기도 했다. 연세대교수 재임 기간에 인접하여 있는 서교동교회 교역자로 겸직(1935. 11. 10 - 1936. 4. 29)하면서 당회장 직무를 비롯하여 성례와 성찬식을 집례하고, 구역을 조직하여 가정기도회를 갖게 하였다. 12집사를 교인들을 통하여 민주적으로 뽑게하여 교회를 섬기게 했다. 1942년 강제 출국되었다가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서울에서 선교사업 복구활동과 영락교회 맹인 선교사업을 지원했다. 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NCC) 대표로 참여한바 있으며 194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양화진 제2묘역(가-7)은 코엔 부부의 묘지로 예정되어있지만, 지금까지 빈자리로 남아있다. 할 수만 있다면 믿음의 후배인 우리들이 그 분들을 아들 옆으로 모실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부인 메리 B. 코엔 (Coen, Mary Bushanan)은 미국에서 R. C. 코엔과 결혼했다. 1918년 10월 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내한했다. 그는 한국에서 남편의 선교 활동을 내조하면서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음악을 가르쳤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M. S. 코엔 (Coen, Miles Stanley -1919)
코엔 부부사이에서 1919년 낳은 아들이다. 그의 출생 일은 알 수 없으나 1919년 2월 23일 사망하여 양화진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묘역에는 작은 비문이 세워져 있다.
<차드웰 성공회 주교>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 전면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 후면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 전면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車愛德, 1892-1967)은 1892년 8월 1일 영국 햄스테드(Hampstead)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런던대학과 처선트신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에 부제, 1923년 사제로 서품 되었다. 1926년 내한하여 1928년까지 충북 진천에서 활동하였고, 1931년까지는 북한의 배천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는 평양에서 성공회 사제로 봉직하였다. 그가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일제는 영국 선교사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본이 일으킨 중국 침략 전쟁을 강력한 항의 성명으로 발표하였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 첫 번째 피해자인 차드웰은 1940년 7월 24일 외환관리법 위반과 단파 라디오를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쿠퍼 주교도 같은 해 8월 10일 연행되어 4일간의 구류를 살았다. 차드웰은 1941년에야 석방되어 한국에서 제일 늦게 강제 추방된 선교사가 되었다. 그가 한국을 떠난 뒤에는 스리랑카와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8·15 광복이 되어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청주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0년 6·25 전쟁 기간 중 7월 18일 간첩 혐의로 공산군에 체포된 쿠퍼(Alfred Cecil Cooper, 具世實) 주교가 납북(拉北)되자 그를 대신하여 차드웰이 성공회를 지켰다. 이에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는 공백기의 책임을 차드웰에게 맡기기로 하고, 보좌 주교로 임명하여 1951년 11월 30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주교 승품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성직자의 확보가 1차적 과제라고 생각하고 긴급히 독신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독신 선교사를 요청한 사유는 선교비의 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빨리 한국어를 습득하고, 적어도 10년간 봉사할 수 있는 젊은 사제를 파송해 주기를 바랬다. 그 후 교회(성공회)들은 차드웰의 목회 지도아래 전쟁의 상처를 씻으며 건실하게 성장해 갔다. 여기에는 한국인 성직자들의 노력이 매우 컸다. 차드웰 주교는 1953년 5월 31일 서울 대성당에서 1949년 이래 처음으로 부제성직에 김태순과 윤주현을, 사제성직에 이천환과 김경득을 각각 안수하였다. 그 후 이천환(李天煥)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75년간의 선교사 시대를 마감하고 1965년 5월 27일 주교 승좌식을 갖고 한국인 초대 주교로서 서울교구를 창립한 인물이 되었다. 1955년 차드웬은 주일복음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선교 활동에서 출판물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은퇴 후에도 인천성당에서 1년간 봉직하였다. 한편 한국전쟁 중 체포되었던 쿠퍼 주교가 1953년 11월 14일 귀환하였으나 1955년 1월 16일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뒤 사임했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 주교를 물색하여 1956년 1월 17일 아프리카 가나의 교구장이던 데일리(John Daly, 한국명: 김요한)가 한국 교구의 제5대 교구장으로 전임 발령되었다. 차드웰 선교사는 1967년 11월 21일 부산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성공회 구역에 안장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비 전면
묘비에는 “May His Wounds both wound and heal me, He enkindle, cleanse, anneal me. Be his Cross my strength and stay(주님의 상처는 나를 상하게 하여 고치며, 불 붙여 깨끗이 하여 단련하고. 주님의 십자가는 내 힘과 의지가 되어지이다.”이라 쓰여 있다.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비 후면
<터너 주교>
아더 B. 터너(TURNER, Arthur Beresford) 한국 성공회 주교
아더 B. 터너(TURNER, Arthur Beresford 한국명: 端雅德, 1862-1910) 주교는 1862년 8월 29일 영국 솔스베리에서 출생하여 1885년 옥스퍼드(Oxford) 키블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896년 12월 2일 영국성공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대성당에서 코프 주교를 보좌하였으며, 공덕동성당과 인천성당에서 봉직하였다. 1904년 7월 초대 주교였던 코프가 사임하여 제2대 한국 주교로 1905년 1월 25일 터너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서품되었다. 그는 겸손한 인격과 통솔력을 발휘하며 수원과 진천까지 선교범위를 확장하고 교회의 자립에 힘썼다.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을 비롯하여 고아원과 학교기관도 자립시켰다.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설립하여 여성의 기본 상식과 실업(實業)교육을 실시하고 교회 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YMCA 초대(1903)이사, 체육위원회 위원장, 황성기독청년회 회장(1907) 등으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에 축구를 처음으로 보급하여 한국 최초의 축구선수(이호성 등)를 양성한 인물이기도하다. 1910년 10월 28일 오후 4시 인천 성 누가병원에서 신병으로 별세하여 11월 1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후임 주교 트롤로프(Trollope, 조마가)와는 같은 학교 동급생 관계였다. 터너의 죽음에 대하여 게일(Gale, J. S.) 선교사는 "터너 주교의 죽음으로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14년간 그는 우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똑같은 아주 친절한 주인이며, 기쁨을 주는 손님이었고, 확고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모든 친구들을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추도사를 선교 잡지에 게재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아더 B. 터너(TURNER, Arthur Beresford)
<구드윈 주교>
찰스 구드윈 (GOODWIN, Charles) 한국 성공회 주교
찰스 구드윈 (GOODWIN, Charles 한국명: 具斗仁) 주교는 1913년 5월 5일 미국 코네티컷에서 출생하여 1931년 성바올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예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36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수료하였다. 1939년 미국 케임브리지성서공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사제로 서품 받았다. 1939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과 영국에서 성서 원전과 신약을 전공하고 고전어의 대가가 되었다. 1960년 9월 대한성공회 주교로 내한하여 부산과 서울 관구에서 활동하였다, 성공회대학과 연세대 신과대학에서 교수로 성서 원전과 고전어를 강의하였다. 성서원어와 한국어 비교연구에 공헌 후 귀국하여 1997년 6월 28일 별세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찰스 구드윈 (GOODWIN, Charles) 한국 성공회 주교
<마리 위더슨 선교사>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마리 위더슨은 1898년 4월 4일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여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으로 이주하였다. 성장하면서 천성이 온순하고 신앙이 돈독하였다. 1925년 요하네스버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아프리카 영문 담임사관으로 일했다. 이때 크리스 위더슨을 만나 1926년 약혼하였다. 1927년 가을 결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먼 길을 외롭게 떠나 1927년 가을 부산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여 결혼했다. 남편(Chris)을 내조하며 선교사로서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1934년까지 7년간 한국에 살았으며 이때 첫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고아들의 친구가 되었다. 고아들은 주로 거리에서 데려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항상 전염병의 감염과 위협을 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크리스가 전염병으로 앓게 되고 부인 마리도 발진티푸스로 앓아눕게 되었다. 그는 고열로 헛소리를 하면서 며칠동안 의식을 잃은 일도 있었다. 의식을 회복하고 첫 걱정으로 고아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였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아이들을 잘 보살폈다. 그 후 1934년 2월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 케냐에서 봉직하였다. 위더슨 부부는 1953년 1월 19일 한국 전쟁 기간 중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부산으로 다시 돌아 왔다. 6∙25전쟁으로 폐허화된 상황 속에서 구세군을 다시 조직하고 부흥시켰다. 이때 남편은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인은 고아원 원장 겸 가정단 총재로 봉직하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진정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위더슨 부인은 위암으로 투병하면서 크리스마스 자선냄비 때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거리로 나와 전도지를 뿌리며 동료들을 격려했다. 병상에서 글로 써 가정단 사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사령관 남편에게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부탁합니다. 오늘 나는 한국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됨을 무한한 기쁨으로 압니다.”라고 유언 했다. 그는 귀국을 원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수 있다.”고 하면서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면서 1956년 5월 10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장례식 때에 그를 조문하는 60여대의 자동차가 늘어섰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김태선 서울시장 등 주요인사 90여명의 조객록이 작성되었다. 묘비는 1956년 9월 17일 건립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구세군 사령관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魏道善)은 1926년 11월 내한하였다. 한국 구세군 사령부에서 정위로 8년간 봉직하다가 1934년 2월에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케냐에서 총무서기관으로 일하다가 구세군 한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3년 1월 9일, 한국 전쟁 기간 중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산 수영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한하여 사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해군 장교구락부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와 구세군이 공동으로 주최하며 신익희 국회의장 등이 임석한 환영식에 참가했다. 한국사령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요 업적으로는 첫째 54명의 사관을 배출하고 13개소의 전장부를 신설하거나 재건하였다. 둘째 19개소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개수하고, 7개소의 사회사업소를 개설하였다. 셋째, 서울(아현, 마포, 돈암, 영등포 등), 부평, 춘천, 대구, 부산 등지에 급식소를 신설하여 월 평균 5천명에게 음식을 나눴다. 이밖에 245,673명에게 일반구제 사업을 펼쳤으며 영동병원을 통하여 입원 및 외래환자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사랑하는 부인과 한국에서 사별하고 1957년 8월 1일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돌아갔다.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비문 앞면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비문 후면
<테일러>
조지 A. 테일러, 아들 앨버트 W. 테일러 묘
조지 A.테일러(Taylor, George Alexander) 묘
조지 A. 테일러(Taylor, George Alexander,1829-1908)는 1829년 3월 17일 미국에서 출생했다. 그는 버지니아와 알라스카에서 금(金)을 채굴한 경력이 있으며, 1896년 11월, 67세의 고령으로 내한했다.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제임스 모스(James Morse)와 동업자 레이 헌트(Leigh S. J. Hunt)의 금광에 한국 최초 채금(採金) 전문가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이 금광은 1896년 미국무역(American Trading Co.)이 광권(鑛權)을 허가받아 동양연합광산(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에 승계되었다. 이 광산은 너무 많은 금이 생산되어 일명 “노다지”로 불려 졌다. 노다지란 목적한 광물이 �아져 나오는 광맥(Bonanza)의 뜻으로 사용 되지만 이 용어는 “운산금광”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금을 찾아 너무 많은 사람이 접근하여 “노터치(No touch)"라는 접근 금지 경고판을 써 놓았는데 이 표시가 금이 많이 나오는 상징으로 오인되고 ”노터치“가 “노다지”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금광은 고종 황제에 의하여 1910년까지 광권(鑛權)이 보호되고, 그 후 총독부도 개입하지 않아 1939년까지 미국인 광산으로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조지 테일러는 이 광산에 종사하면서 한국 무역업의 기반을 구축할 정도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08년 12월 10일 79세로 한국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묘비에는 “한국 광산 개척자(Pioneer mining engineer to Korea)”, “Master, the long, long shift is o'er, I have earned it Rest.(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라 쓰여 있다.
앨버트 W.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 묘
조지 A. 테일러의 아들 앨버트 W.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는 상속 받은 재산으로 형 윌리암(William)과 서울 소공동에 “W. W 테일러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오버랜드(Overland) 등에서 제작한 “자동차”를 한국에 수입. 판매하였다. 또한 미국의 영화사로부터 영화(필림)를 수입하여 여러 극장에 대여하였다. 쉐퍼(Sheaffer) 만년필을 포함한 수많은 생활 용품들도 그들의 무역을 통하여 한국에 유통되었다. 앨버트 W. 테일러는 메리 린레이(Mary Linley)와 결혼하였으며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양식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 집은 서울 종로구 행촌동 1-18번지에 있으며, 아직도 그 원형이 보존되어 건축가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이집에 살고 있는 안정희(1931.10.25생), 서금순(1937.10.15생) 증언(2005.7.20)에 의하면 “17가구의 무연고자가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아직도 방음(防音)이 잘되고, 현관 바닥과 창틀이 원형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했다. 이 곳에는 둘레 6.8m, 높이 23m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1-10)로 지정되어있다. 이 터는 임진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 승리한 권율(權栗, 1537-1599)장군의 소유였으며, 1920년 앨버트 테일러가 구입하여 “즐거운 세상의 궁전(Palace of Earthly Delights”이란 뜻의 “딜쿠슈아(Dilkusha)"로 명명하여 1923년 건축되었다. 전망이 좋고 집이 잘 지어져 주한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으로 빈번히 사용되었다. 여주인 메리 부인은 연극배우로 런던에서 연극을 했고. 1917년 앨버트를 만났을 때는 상하이, 요코하마 등 극동 무대에서 활약했다. 서울 외국인학교 공연과 외국인 축제 때에는 연극 지도에 앞장섰다.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1942년 그립숄(Gripsholm) 배편으로 미국에 돌아갔다. A. W. 테일러는 8.15 광복후 한국에 남겨둔 재산을 회수하고자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가 살던 “딜크슈아”는 이미 큰 손실을 입었으며, 불법 점유자들이 살고 있었다. 남기고 간 자산은 은행 계좌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그 가치는 매우 낮게 평가되었다. 그는 1948년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은 캘리포니아 맨도시노(Mendocino)에서 1982년 93세로 별세하였다. 앨버트 부부에게 부르스(Bruce)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성장하여 영국 총영사 제랄드 핍스의 딸 조이스 핍스(Joyce Phipps)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존슨 선교사>
왈터 V. 존슨(Johnson, Walter Virgil) 선교사
왈터 V. 존슨(Johnson, Walter Virgil, 贊, 1874-1903)은 1874년 8월 30일 미국 미주리에서 출생했다. 1898년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901년 오번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년 반 동안 워싱턴에서 교역자로 목회 생활을 하다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인 에밀리 H. 존슨(Johnson, Emily Hartman)과 함께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존슨 목사 부부는 한국에 선교사로 부임하기 위하여 미국을 출발하여 태평양을 항해 중일 때, 부인은 귓병(化膿, Abscess)을 앓게되었다. 불행하게도 병균이 뇌에 침투되어 건강이 더 악화되자 한국 땅은 밟아보지도 못하고 1903년 1월 13일, 27세에 일본 코베(Kobe)에서 숨지고 말았다. 존슨은 사랑하던 부인을 일본 땅에 묻고 한 달 정도를 일본에 머물다가 1903년 2월 12일 홀로 내한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념하며 온갖 충성을 다하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겨우 한 달 정도의 선교사 준비 과업을 수행하다가 천연두(Smallpox)로 인하여 선교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1903년 3월 18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돌아보는 이 없이 외롭게 묻혀있다. 한국 체재기간이 너무 짧아 그를 기억하거나 아는 이가 별로 없지만,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다. 묘비에는 "Faithful unto death(죽도록 충성을 다하였느니라)"라는 기록도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켄드릭 선교사>
루비 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선교사
루비 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1883-1908)은 1883년 1월 28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했다. 1905년 캔자스 여자 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감리회에 선교사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미달로 2년을 기다려야 했다. 1년은 교사로, 1년은 대학 특별과를 더 공부한 뒤 1907년 9월 텍사스 엡윗 청년회 후원으로 미국 남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 체재하는 기간이 1년도 못되었지만 황해도 개성에서 여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이 기간의 주된 일은 선교사역의 준비와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 불과하여 선교의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급성 맹장염으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1908년 8월 15일 25세의 젊은 처녀 선교사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지에는 고향 엡윗 청년회원들이 모금하여 묘비를 세웠는데, 화강석을 조각하여 만든 비문 상단에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이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碑文)은 그가 생존시 텍사스 엡윗 청년회에 보낸 편지 속에 있었던 내용이며, 이 편지가 미국에 배달되었을 때 이 청년회는 연합 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그들의 후원으로 한국에서 열정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는 켄드릭 편지에 참석자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고 난 바로 다음날 엡윗 청년회에는 또 하나의 소식이 전해졌다. 켄드릭 선교사가 한국에서 별세하였다는 전보였다. 회의 참석자들 모두는 놀라고 슬퍼했다. 그러나 이 대회 참석자 중 20명이 선교사로 자원하는 놀라운 결단의 기회가 되었다. 그 후부터 텍사스 엡윗 청년회는 해마다 헌금하여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지원했다. 캔드릭은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루비 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선교사 묘
비문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루비 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선교사
<브록크만 선교사>
브록크만 가(家) 3대의 묘지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 선교사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1878-1929 巴樂萬)은 1878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으며, 네브래스카 오마하(Omaha) YMCA 학생부 간사로 활동했다. 1905년 내한하여 1906년 한국 YMCA 부총무로 봉직하면서 직업교육을 주도했다. 직업교육 과정은 목공, 철공, 화공, 염색, 그림, 도자기, 제화 등 전문교육이었다. 이 무렵 직업교육은 하나의 새로운 전문직 창출(創出)을 위한 교육이었다. 특히 강연회와 토론회는 큰 성과가 있었다. “산업교육의 필요성, 과학교육의 필요성, 산업의 기능과 국가 발전, 기업과 사회 발전, 복지사회의 건설” 등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으며 청년들의 사회 참여를 유도했다. 이때의 강연회와 토론회 분위기에 대하여 질레트(P. L. Gillett) 총무는 “YMCA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미국에서도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 37회의 토론회와 38회의 강연회는 300명 내지 400명의 청중이 모여들어 강당은 언제나 꽉 찼다.”라고 보고했다.(자료: 한국YMCA운동사) 그 후 브록크만은 1908년 황성기독청년회에서 공동총무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4년, 조선중앙 YMCA와 9개 학생 YMCA 등을 포함하여 조선 YMCA연합회(현, 한국 YMCA연맹)를 조직하여 초대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승만 박사와 함께 상류 지식층 청년들을 상대로 YMCA 학생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민 중심의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식층을 수용하기 위하여 활동했다. 평양 숭실, 선천 신성, 광주 숭일, 전주 신흥, 군산 영명학교 등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 YMCA를 조직했다. 1910년 6월, 최초의 학생 하령회(夏令會, Summer Conference)의 주역을 담당했다. 1911년 6월에는 개성에서 전국 21개 학교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하령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항일(抗日)과 애국(愛國)을 다짐했다. YMCA 하령회 때문에 그는 105인 사건과 연루되었다.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사(謀事) 했다는 것이다. 전택부 선생은 이 사건을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과 신민회 회원들이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갈 때 암살하려고 음모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YMCA 세력과 학생 Y가 미워서 꾸며낸 것도 사실이다."라고 했다.(자료: 양화진 외인열전) 105인 사건은 1911년 11월 11일 선천 신성학교 학생과 선생을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한 사건 등에서 비롯된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저다인(L. L. Gerdine) 회장은 강제 사면되고, 질레트 총무는 국외 추방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브록크만은 YMCA 사업에 너무 열중하다가 35세 때(1912)에야 친구들의 권유로 R. S. 브록크만 (Mrs. R. S. Brockman) 부인과 만혼(晩婚)했다. 그 후 1916년부터 협동 총무로서 1922년까지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23년, 신흥우 총무와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미국 국제 본부를 방문하여 1925년부터 10명의 농촌 기술자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파송 받고, 재정 원조도 약속 받기로 하는 등 성공적인 과업을 이룩했다. 그가 주도한 지도자협의회는 농촌운동 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1927년, 과로로 인한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했다. 1929년 6월 10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프린스턴신학교 장(葬)으로 집례되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으로 돌아왔다. 묘비에는 '24년 간 한국의 증인 일꾼, 평화의 인, 친구(For twenty four years in Korea, Seer Builder, Peace Maker, Friend)'라 기록되었다. 그는 평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형 플렛쳐 S. 브록크만(Brockman, Fletcher Sims, 1874-1939)은 중국 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1903년 한국 YMCA 창설 자문위원회 특별 강사로 내한했다.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청년회 창설공로자이다. 1905년 동생 브록크만의 한국 파송도 주선했다. 그 뒤에도 가끔 YMCA 초빙을 받아 중국에서 한국에 입국하여 지도자 훈련 등에 참여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어머니 (Mrs. Brockman, W. A. 1840-1915)
1840년 2월 26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915년 3월 7일 한국에서 별세했다.
딸 바바라 브록크만(Brockman, Barbara, 1914-1922)
191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22년 8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샤롯 위더스픈 벨>
샤롯 위더스픈 벨(Bell,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선교사
샤롯 위더스픈 벨(Bell,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선교사
샤롯 위더스픈 벨(Bell,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선교사
유진 벨의 아내인 샤롯 위더스픈 벨(Bell,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선교사는 1867년 5월 13일 미국 켄터키주(Louisville)에서 신학대학장의 딸로 출생했다. 1884년 유진 벨과 결혼했고,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893년 임명되었다. 출발이 지연되어 1895년 2월 12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 1895년 4월 9일 긴 여행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남편과 서울에서 얼마동안 활동하다가 호남지역으로 배치되어 1898년 목포로 옮겼다. 1896년 5월 27일 아들 헨리(Henry)를 낳고, 딸 샤롯(Charlotte)은 1899년 1월 6일 낳아 양육했다. 선교 지역이 목포로 변경됨에 따라 우선 마을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정학교를 시작했지만, 주부 선교사로서 살림살이에 어려움이 컸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함께 일하던 유모를 동반하지 못하여 새 유모를 맞는 과정의 어려움, 집안 일을 돌보는 시골 하인들이 서구 문명에 익숙하지 못한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겪는 어려움 등이었다. 더욱이 선교사 사택 건축공사가 한참 진행중인 상태에서 한편에는 총각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이, 그리고 다른 방에는 여성 선교사 스테레퍼(Straeffer)가 살았으며, 또한 어학 선생까지 동거하였으니 집안을 꾸려가기란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남편 E. 벨 목사는 시골의 전도여행과 선교회 활동 등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아 심리적 갈등이 있었다. 당시 처했던 상황과 마음가짐에 대하여 그의 여동생에게 1899년 2월 보낸 편지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남편이 선교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가사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힘쓰고 있다. 남편을 위하여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의 선교사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어려운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으나 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향수에 젖지만 한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는 심장병을 얻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일년이 넘도록 외롭게 고생하며 지내다가 1901년 4월 12일 전도 여행 중 목포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이때에도 남편 E. 벨은 전주(全州) 여행 중에 있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르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남편은 장례식을 치른 뒤 서둘러 목포로 내려가 두 자녀를 데리고 귀국했다가, 1902년 12월 말 목포로 다시 돌아와 선교사업을 계속했다. ‘샤롯기념예배당’은 1903년 6월 28일 목포에서 헌당되었다.(자료:양림교회사). 양화진 묘비는 2002년 다시 건립되었다.
유진 벨(Bell, Eugene, 裴裕祉, 1868-1925)선교사
1868년 4월 11일 켄터키주 스코트 선교구에서 출생했다. 1891년 루이스빌 센트럴 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캔터키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1895년 4월 9일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1908년 그의 집 사랑채에서 3명의 여학생을 모아놓고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가 광주에 있는 오늘의 수피아여학교이며, 남학생을 모아 공부를 가르친 곳은 숭일학교로 발전했다. 광주 기독병원 설립에도 산파역을 담당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대 총회장(1914), 전라노회 창립 부회장(1911) 등으로 활동했다. 그가 설립했거나 시무한 교회는 목포에서 양동교회(1898)와 광주에서 구소리(九巢里,1899), 송정리(1901), 북문내(1904), 향사리(1908) 일곡(1909), 월성리(1916), 금당리(1917)교회 등이 있다. 그리고 담양 무정(1900) 및 담양읍교회, 해남 우수영(1902) 및 백호(1903)교회, 함평 영흥교회(1903), 장성 소룡(1905) 및 장성읍교회(1912), 나주 상촌(1907)교회, 삼도리(1915) 및, 동수리교회(1922), 화순 백암리교회(1920) 등이 있다.(자료: 조선예수교장로교회사기) 그는 호남지방 선교에 헌신하다가 지나친 격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9월 28일 57세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1904년 재혼하고, 제암리 교회 학살 현장 진상 조사 후 광주로 귀향하다가 병점 건널목에서 열차와 자동차 충돌사고로 1919년 3월 별세한 마가렛트(Bell Margarlet W.) 두 번째 부인도 함께 안장되었다. E. 벨의 딸 샤롯은 성장하여 린턴(Linton, W. A., 仁敦)과 결혼하고, 호남지역 선교사로 40여년 활동했으며, 그 후손들이 유진벨 재단을 설립, 운영 중에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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