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10. 01:27ㆍ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수경원 터와 광혜원
연세대 역사의 뜰 입구
광혜원과 세브란스병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광혜원(廣惠院) -제중원- 세브란스병원
1885년에 설립된 광혜원은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다. 1884년 미국 북장로교의 알렌(H.N.Allen) 선교사가 광혜원을 세웠다. 지금 창덕여고 기숙사가 들어 있는 자리이다. 그 당시 친일파 이완용의 서형인 이윤용이 살고 있던 집이다. 그 이전에는 김옥균등에게 개화사상을 고취했던 정승박규수가 살기도 했던 집이다. 입국 당시 알렌은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미국공사관 부속의사로 행세했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려던 그의 계획은 뜻하지 않게 변했다. 갑신정변 중 중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알렌이 헌신적으로 치료하자 왕실은 서양의술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고종 주치의로 임명된 알렌은 왕실의 지원을 힘입어 광혜원을 세웠고, 개원 13일 후 광혜원은 당시 의약촌이었던 구리개, 지금 을지로2가로 옮겨 고종으로부터 받은 이름인 제중원으로 개원했다. 제중원으로 사용된 집은 공교롭게도 갑신정병의 주모자 가운데 한명인 홍영식의 몰수당한 집이었다. 감리교의 스크랜턴, 장로교의 헤론 의사가 동참하여 1년 동안 1만명이 넘는 환자를 무료로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제중원은 미국인 실업가 L.H. 세브란스로부터 거액을 기부 받아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칭했다. 이후 왕실병원인 제중원과 스크랜턴이 세운 민간병원인 시병원 등의 의료선교사역을 통해 남대문교회, 상동교회 등이 설립되어 의료선교가 조선의 선교활동에 가장 앞장서는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대표적 의료기관인 세브란스병원을 태동시킨 광혜원은 한국의 복음화에 본격적인 첫 테이프를 끊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유적의 한 곳임에 틀림없다.
제1대 제중원 원장, 1884년 미국 북장로교의 알렌(H.N.Allen) 선교사
알렌(H.N.Allen) 선교사
알렌(H.N.Allen) 선교사 부부, 1903년
알렌(H.N.Allen) 선교사 송별회(1905년)
알렌(H.N.Allen) 선교사 진단서
제중원 2대 원장 J.H. 헤론, 양화진 외국인 묘지 최초로 안장
A.I. 앨러스, 제중원의 최초 부인과 의사, 후에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결혼하여 호튼 언더우드가 되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
언더우드 집안 묘소에 안장되어 있다.
제중원 제4대 원장, 세브란스 병원 초대병원장
에비슨 병원장 앨범에서
광혜원 복원 건물
광혜원 복원 건물
광혜원 복원 건물
광혜원 복원 건물
광혜원 현판
광혜원 전시실 내부
연세의 뿌리 광혜원
현재 복원된 광혜원은 당시 일반병동과 안과병동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교정에는 당시 실물크기대로 복원된 광혜원이 있다.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 뒤편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광혜원은 연세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사업이 추진돼 1987년 봉헌하게 됐다. 당시 862평의 대규모의 건물이었던 광혜원은 외래진찰실, 예방접종실, 전염병동, 일반병동, 부인병동, 대기실, 하인처소 등을 갖춘 종합병원이었다. 또 1886년 의학교육이 시작되면서 병동 뒤편에 강의실과 실험실, 그리고 학생들의 숙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복원된 광혜원은 당시 일반병동과 안과병동으로 쓰던 건물 한 채만을 복원했다. 복원된 광혜원은 현재 연세사료관으로 꾸며져 있다. 광혜원 전체 축소모형을 전시하고 있으며, 광혜원의 역사, 알렌과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한 세브란스 병원을 꾸려간 에비슨 선교사의 활약상, 그리고 성 서 한글번역의 약사와 선교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중원 제1대 원장 알렌의 광혜원 설립
알렌의 책
세브란스 병원 초대 병원장 에비슨과 세브란스
올리버 에비슨의 유품 전시회 (2010.3. 연세대)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을 이끌었던 올리버 에비슨의 유품을 29일부터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왼쪽부터 에비슨의 1917년 당시 사진, 1927년 동아일보사가 에비슨에게 준 치사(감사)장, 1935년 에비슨 귀국 시 사회인사 230여 명이 서명한 전별첩, 1932년 에비슨이 평화를 주제로 강연한다는 것을 알린 동아일보 사고. ‘…이제 본사(本社) 발전의 경(慶)을 천하와 한 가지 하려할 새 이 기회로써 인문계발의 공로자에게 사침(謝침·감사와 정성)을 독표(篤表·드러냄)함이 가장 잘 사회양심을 대표하는 소이(所以)임을 살피어 삼가 박의(薄儀·사례로 주는 것)를 받들어 높이 무적(茂績·다양한 공적)을 기리나이다.’ 동아일보사가 1927년 4월 30일 한국 근대 의학교육의 선구자 올리버 에비슨(한국명 어비신·魚丕信·1860∼1956)에게 준 치사장(致謝狀)의 일부 내용이다. 연세대 의료원은 에비슨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2010.3.29일부터 100주년 기념관에서 에비슨의 사진 문서 등 10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전시회에선 고종 황제가 1895년 7월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자 에비슨을 방역국장으로 임명했음을 알려주는 문서가 선보였다. 당시 대한제국이 방역국을 세운 뒤 서양인 의사에게 조직적인 방역사업을 맡긴 첫 사례다. 그가 사망했을 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보낸 조전도 처음으로 전시됐다. 또 에비슨이 은퇴 후 한국을 떠난 1935년 김성수 당시 보성전문교장과 김활란 이화여전 부교장 등 사회 인사 230여 명이 서명한 ‘전별첩(이별을 아쉬워하는 문서)’도 소개됐다. 모두 국내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문서다. 이외에도 에비슨이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세브란스 의학부 연극공연 ‘극분(劇分)의 밤’을 한다는 알림(1929년 10월 25일) △YMCA에서 ‘평화’를 주제로 강연한다는 알림(1932년 11월 11일) △의학강연회를 한다는 알림(1933년 11월 17일)을 낸 것도 소개됐다.
에비슨은 1887년 캐나다 토론토대 의대를 졸업한 뒤 1893년 선교사로 한국에 건너와 그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의 책임자로 일했다. 1916년 선교사 언더우드가 숨지면서 경신학교 대학부(연희전문의 전신)를 이끌었고 1934년까지 세브란스 연합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의 교장을 겸직했다. 최근 SBS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인 박서양의 은사로 알려졌다. 박형우 연세대 의대 교수(의사학)는 “에비슨 탄생 150주년과 제중원 설립 125주년을 기념해 그의 사진 고서 등의 사료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며 “에비슨이 유독 동아일보와 함께 계몽 관련 강연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전시회는 다음 달 23일까지 열린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원두우(언더우드) 선교사
언더우드 타자기
언더우드 타자기
전시물
한국 성경의 역사
예수셩교젼셔 (1887년)
이수정 역본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신약젼셔 (광무 4년)
신약전서(1906년)
성경전서 (1910년)
광혜원 정원
광혜원 후문
<제중원, 세브란스병원과 관련한 사진 자료- 출처는 SBS 제중원 홈페이지 자료실>
1901년 구리개 제중원 일동
고종 주치의로 임명된 알렌은 왕실의 지원을 힘입어 광혜원을 세웠고, 개원 13일 후 광혜원은 당시 의약촌이었던 구리개, 지금 을지로2가로 옮겨 고종으로부터 받은 이름인 제중원으로 개원했다. 제중원으로 사용된 집은 공교롭게도 갑신정병의 주모자 가운데 한명인 홍영식의 몰수당한 집이었다.
콜레라 환자 격리소
선천 제중원
선천 제중원 사람들
재동 제중원
1904년 세브란스 전경
루이스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1838 ~ 1913)의 아름다운 기부
1884년 한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 앨런(Allen)은 목사가 아니라 의사였다. 그는 정부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이 병원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병원을 주관하는 관리들의 부패가 심해져서 원성이 컸다. 결국 선교사들은 재산권과 운영권을 자신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통보했고 오랜 협상 끝에 조선 조정는 선교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광혜원의 당시 책임자는 캐나다인 에비슨(Oliver Avison) 박사였다. 1893년 우리나라 온 그는 병원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병원의 수준을 높이려고 애썼는데 에비슨이 처음 도착했을 때 병원은 한국식 단층건물로 12.5평 크기였다고한다. 그는 설계사에게 부탁하여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병원을 설계토록 했다. 비용은 1만달러 정도가 소용될 예정이었다. 1900년 봄 에비슨은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해외선교대회에 참석, 병원에 대해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청중이 너무 많아서 겁을 먹었다. 그래서 두번째 발코니 맨 뒤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저 사람이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바로 스탠더드 석유회사(존 D. 록펠러가 창업)의 CFO (재무담당임원)이던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였다. 클리브랜드의 한 장로교회의 장로이기도 했던 그는 연설이 끝나자 세브란스는 에비슨을 찾아와서 계획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에비슨은 이미 설계도까지 만들었다고 말했다. 세브란스는 다시 한 번 감명을 받았다. 얼마가 필요하냐고 묻자 에비슨 1만달러만 있으면 할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얼마 후 세브란스는 1만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세브란스는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크다”는 말을 남겼고, 이 말은 세브란스 병원의 정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02년 세브란스의 기부금과 기존 병원 판매 대금을 합쳐서 서울역 맞은편에 병원을 짓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04년 11월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다. 이렇게 한국 최고의 병원 세브란스는 한 의료선교사의 비전과 헌신적인 기독인 사업가의 헌금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 이후에도 그 후손들을 통해 세브란스의 기부가 아직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클리블랜드의 세브란스 홀은 세계적 교향악단인 클리블랜드 교향악단의 본거지로 1928년 루이스 세브란스의 아들인 존 세브란스가 지어 기증한 것이다. 세브란스가(家)의 자선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병원에는 지난 50년 동안 ‘미국 북장로교회(PCUSA)’ 명의로 매년 후원금이 입금됐었다. 병원 직원들은 그냥 “미국 교회가 좋은 일 하나 보다”라고 생각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개원 120년을 맞아 병원측이 추적해보니 돈의 출처는 아들 세브란스가 만든 기금이었다. (출처- 'http://blog.chosun.com/kernee/173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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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교 제1회 졸업생 이제규
1898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 서재필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수경원>
수경원 터
당쟁의 제물로 비명에 숨진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장헌세자)와 효장세자(일찍 죽음)의 친모이자 영조대왕의 후궁인 영빈 이씨. 이곳에 자리하던 영빈 전의(全義) 이씨의 원묘 수경원이 1968년 6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서오능으로 206년만에 이장하였으나 당시의 정자각과 비각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 되어있다. 이조 21대 영조대왕 후궁 영빈 이씨는 1696년에 서울 근교에서 출생해서 6살이 되던 해 궁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숙의와 귀인을 거쳐 30세 되던 해인 1726년. 정성왕후 서씨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자식을 얻지 못하자, 영조는 귀인이던 이씨를 빈으로 모셨다. 1764년 영조 40년 7월 26일 향년 69세로 타계한 소유영빈은 생전에 2남 6녀를 두었다. 그중 사도세자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당쟁의 소용돌이로 뒤주에서 굶어죽는 참변을 겪고, 게다가 어린 나이의 효장세자가 요절하는 비극을 몸소 겪는 등,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수경원 터
수경원 터
수경원 터
세브란스병원 입구에 있는 알렌 선교사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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