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상월교회

2011. 3. 10. 01:24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상월 그리스도교회 


1947년 7월 1일 창립자 진 성구씨께서 상월 본 부락에 거주하면서 자기 소유 주택 상월 139의 3번지의 건물을 임시교회 예배처소로 제공하면서 전도에 열심하여 초신자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므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 때에 신덕철 전도사님이 부임하시어 초대 교역자로서 모시게 되었다. 당시 김은석 목사님을 비롯하여 최요한 목사님, 김재순 목사님의 종횡 무진한 협조로 본 교회 창립 초에 중대한 신앙적으로 도움을 주셨으며 김은석 목사님은 말씀중심으로 최요한 목사님은 성령운동으로 김재순 목사님은 겸손과 미덕으로 각각 전도와 포교에 열중하여 오늘의 상월교회가 있게 하여 주었고 특히 최요한 목사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키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이렇게 하여 초창기 교회는 성령과 열심으로 충만하여 뜨거운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중 통한의 6·25를 만나 많은 순교자의 희생을 치르게 된 것이다. 6·25가 지나 남아 있는 성도들이 예배처소의 필요를 느껴 당시 최연남 집사님과 이순례 집사님 그리고 전 성도님들의 피나는 기도와 헌금과 공동작업을 하여 그 노임으로 얻어진 자금으로 본리 423의 5번지에 상월리 회관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삼았다. 1967년 당시 조의환 전도사님 재임시 교회 증축의 필요를 절감하고 교회건립 계를 조직하여 오늘의 석조건물을 건립하는데 물질적 토대가 움트기 시작했다. 1970년 지금의 위치 본리 423의 7번지를 매입하여 건평 40평의 석조건물로 착공하여 당시 배기주 전도사님과 온 교우들이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사연으로 쌓았으니 1972년 6월 23일 역사적인 준공의 결실을 거두었다. 1981년 2월 당시 박희한 목사님의 설계로 교회예배당 증축과 현관건물 기초작업을 하여 7월 23일 지금의 교회예배당 건물을 완공하였다. 1983년 2월 사택기초 작업을 하여 23평 건물로 5월 24일 완공하다. 1983년 12월 12일 예배당 헌당식과 이용선, 신종식, 김동문, 조창희 집사, 장로 장립식 예배를 드리다. 1989년 구 사택을 지금의 친교실로 개조하고 친교실과 사택에 기름보일러 설치하다. 1990년 3월 15일 정남용 목사 취임, 박형식 집사 장로 장립, 최연남 집사, 김복덕 집사, 윤경단 집사 권사 취임, 김출재, 박정수, 배국선, 서폰심, 임보물, 임금일, 고양숙, 집사 안수식을 거행하다. 1993년 3월 5일 순교자 기념비 건립을 착공하여 3월 23일 완공하여 순교비 건립 예배를 드리다.

 

상월 그리스도교회 

 

상월 그리스도교회  

 

상월 그리스도교회

 

교회 내부

 

교회 내부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자기념비

 

상월교회는 6.25 동란을 겪으면서 교회를 천해로 옮겨 예배를 드렸는데 이로 상월교회(당회측)과 천해에 남은 교인들로 나누어졌다.

당회측에는 순교자가  약 4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천해 교인들로 해당되는 15명의 명단을 찾고있다. 상월교회는 1992.3.23. 밝혀진 명단 25명으로 우선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상월교회 순교 당시 상황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믿음의 연조는 짧았지만 성령의 뜨거운 역사와 믿고 죽으면 찬란한 부활이 있음을 굳게 믿고 믿음을 지켜 나갔으니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집안 식구들로부터 많은 핍박과 박해가 있었지만 그런 핍박에 개의치 않고 신앙을 불태워가던 중에 통한의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죽음을 수반한 환란이 닥쳐 이곳 상월에 사무쳤으니 악랄한 빨갱이들은 예수를 믿는다 하여 줄로 묶어 총칼과 죽창으로 죽음을 협박하였으나 찬란한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오히려 완연하게 잠시 기도할 시간을 달라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내 영혼과 온 가족의 영혼을 받으소서 우리 상월리 교회를 기억하소서 기도하시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를 당하신 것이다. 무참히도 죽임을 당한 성도님들은 하나밖에 없는 존귀한 생명을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위해 바쳤음은 오직 순수한 복음으로 뭉쳐진 신앙으로 부활 영생의 영광을 바라본 숭고한 순교였음을 그 누가 부인 할 수 없으니 이 신앙 길이 칭송을 받으며 빛날 것입니다. (주: 공산군의 잔학한 만행은 지방 빨갱이들의 협조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임신 9개월의 태아까지 포함하여 25인의 상월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성도들이 교회당 근처 지금은 깎여 농지로 만들어진 낮은 야산에서 총칼과 죽창 등으로 무참히 처형되었고, 신덕철 전도사이외에는 시신도 거둘 수 없었다고 한다. 만행에 사용된 죽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당 근처에 숲을 이루었던 대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1993년 3월 23(화)일 오전 11시에 드려진 순교자 기념비 건립예배 순서지에서)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자기념비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자기념비

 

믿으면 구원이요 죽으면 영생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그저 좋기만 하였거늘 이 평화로움도 잠시였던가 웬말인가 1950년 6·25동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죄가 되어 줄로 묶여 총칼과 대창으로 죽임을 당하였구려 찬란한 부활의 소망 바라보고 주 예수님 모른다 아니하고 믿음의 절개 지켰으니 대대에 칭송을 받으올찌라 오오! 장하도소이다 이 숭고한 믿음이여라 이 장한 죽음이여라 오늘날 우리도 그 신앙 따르오리니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실 줄 알아" 그 신앙 추모하며 기리고자 온 성도 마음 합하여 이 비를 세워 만대에 전하노라.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자기념비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자기념비

 

상월교회 순교기념비 봉헌문


믿으면 구원이요 죽으면 영생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그저 좋기만 하였거늘 이 평화로움도 잠시였던가 웬말인가 1950년 6·25동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죄가 되어 줄로 묶여 총칼과 대창으로 죽임을 당하였구려 찬란한 부활의 소망 바라보고 주 예수님 모른다 아니하고 믿음의 절개 지켰으니 대대에 칭송을 받으올찌라 오오! 장하도소이다 이 숭고한 믿음이여라 이 장한 죽음이여라 오늘날 우리도 그 신앙 따르오리니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실 줄 알아" 그 신앙 추모하며 기리고자 온 성도 마음 합하여 이 비를 세워 만대에 전하노라.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
주후 1993년 3월 23일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자기념비 측면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자기념비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자기념비 옆면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자기념비 순교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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